『 입에서 검은 가래를 뱉어내면서 걸쭉한 막걸리를 마시던 일이 꿈만 같아…』

- 1970년대
장성탄광 광원들이 채광작업을 위해 탄차를 타고 갱구로 들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 탄을 캐던 사람들은 여전히 탄광촌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대부분 골골거리고 쿨럭쿨럭하며 궁핍을 견뎌 내고 있었다. 일부는 毒杯(독배)와 같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 대면서 기자에게 『죽고 싶다』고 했다. 진폐 판정을 받았으나 입원하지 못한 이들은 입원한 막장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하늘을, 정부를 원망하고 있었다.
정부가 진폐 환자에게 지원하는 한 해 예산은 무려 2563억여원(2006년)에 이른다. 엄청난 액수다. 하지만 질긴 가난의 대물림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돈이 증기처럼 증발하는 것일까.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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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재가 진폐 환자들이 강원랜드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였다. |
태백에서 만난 前職 광원 朴光植(박광식·65·태백시 화전동)씨의 말이다.
『지난 세월, 꿈만 같습니다. 잦은 부상과 사고, 깜깜한 막장 속에 갇혔던 일, 입에서 검은 가래를 뱉어내고 걸쭉한 막걸리를 마시던 일, 아무리 탄을 캐도 채워질 수 없었던 가난….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입니다. 한때는 뒷돈 주고 석탄공사에 입사해 부러움을 샀지만, 그게 죽음의 길임을 그땐 몰랐어요』
최근 다 죽어 가던 「진폐 노인들」이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강원랜드 코앞에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차려 놓고 「살려 달라」 외치고 나섰다. 1980년 4월 그 뜨거웠던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함성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막장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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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태백시의 탄광촌. 지치고 병든 前職 광산노동자들이 아직도 모여 살고 있다. |
남편은 채탄공(석탄을 캐는 일)과 굴진공(갱도를 굴착하는 일)으로, 아내는 선탄공(갱에서 캔 석탄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으로 함께 탄광을 드나들었다. 지하 수백m 막장은 地熱(지열)이 높아 옷과 장화가 금세 땀으로 출렁였다. 막장 속에서는 2~3차례 땀에 전 옷을 짜야 했다.
막장을 나오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한 잔이 보약이었고, 탄가루로 엉킨 목을 뚫기 위해 질긴 돼지고기를 씹었다. 탄광촌 주변엔 「니나놋집」이 많았고 물가가 높았다. 도시노동자 못지않게 제법 돈을 벌었지만 주머니는 늘 텅 비었다.
취재 중 만난 정진오(69)씨는 삼척 도계탄광에서 평생 일했다. 그의 이야기다.
『제가 살던 사택은 언제나 탄가루로 덮여 있었습니다. 탄을 밟으면 밀가루처럼 퍽퍽해서 먼지가 폴폴 났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포장된 도로가 없었으니 맑은 날이면 탄먼지에 발이 빠지고, 비가 오면 죽탄에 발이 빠졌으니 장화가 아니면 밖에 나갈 수 없었어요. 그러니 「마누라 없이는 살지만,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지요』
장성광업소에서 22년간 일했다는 윤태랑(71)씨의 이야기다.
『네 아이와 아내, 어머니를 포함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렸습니다. 아이들 교육하기에 빠듯했습니다. 평생 정부米(미)만 먹고 산 「정부미 인생」입니다. 그 시절, 높은 地熱에다 방진마스크 필터에 탄가루가 달라붙어 숨쉬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마스크를 벗고 일했습니다. 그러다 병에 걸린 거지요. 저는 탄 캐는 일을 해도 자식에겐 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工高 기계과를 나와 안산과 울산공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장성탄광에서 청춘을 보냈다는 김덕룡(70)씨의 회고다.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막장에서 청춘을 보낸 이들은 지금 60代와 70代가 대부분입니다. 자녀들은 모두 객지에 내보내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고 있지요. 손주에게 과자 한 봉지 못 사주는 형편입니다. 뼈 빠지게 일했는데 남은 것은 폐병뿐입니다.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지요』

아직도 病魔와 싸워
배 안 주리고 쌀밥 먹는 것이 자랑이던 시절에 광산노동자들은 건강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직장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연줄이 없으면 탄광에 입사하기 어려웠다. 광원 10명을 뽑으면 400~500명이 입사 원서를 냈다.
1971년 태백지역 광산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최초로 실시한 건강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검사대상 노동자 8700명 중 35%가 청력과 시력이 나빴고, 안질 등 질병이 있는 노동자는 10% 이상이었다. 또한 주민들에 대한 보건의료시설이나 위생시설이 열악했다.
광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나 보건의료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1960년대까지 사북·고한 지역의 유일한 의료기관은 사북보건소였다. 당시 4만 명에 달했던 탄광촌 주민들의 건강을 떠맡기엔 역부족이었다. 1970년대 중반 고한의 서울병원, 사북의 제일의원 등에서 진료를 개시했지만 응급환자나 중환자는 원주·춘천·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이송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32개 병원이 진폐요양기관으로 지정돼, 2007년 6월 현재 3662명의 환자가 입원 및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톨릭 성모병원에서만 진폐 장애판정이 가능했다. 환자들은 진폐 여부를 판정받기 위해 고된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상경해야 했다.

남편이 사고 나면 아내가 대신 탄광에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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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폐정밀진단 의료기관인 정선병원에 입원해 있는 조동렬(76·왼쪽)씨와 이영자(70)씨. |
진폐증은 보통 「광물성 분진이 폐에 침착되어 그로 인해 폐에 조직반응이 일어난 상태」를 말한다. 조기 증상이나 징후는 없다고 한다. 진폐증의 첫 증상은 주로 호흡곤란이다. 병이 진행하면서 호흡용량이 감소해 호흡곤란이 심해지고 결국 호흡부전이 생겨 사망한다.
조동렬(76·여)씨와 이영자(70·여)씨는 광산에 취업한 남편을 따라 시커먼 개울과 폐석더미 가득한 탄광촌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인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그들은 남편이 숨지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직접 광산에 들어갔다.
조동렬씨의 말이다.
『12년간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요. 병원이 제 집인 셈이지요. 답답하지만 습관이 돼놔서 익숙해졌어요. 함백의 미탄 탄광에서 20년간 선탄작업을 했지요. 남편이 광원이었는데 머리를 다쳐 1979년에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내가 생계를 대신 책임져야 했지요.
남편이 사고가 나서 아내가 대신 탄광에 취직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디가 아프냐고요? 말을 하면 숨이 찹니다. 가슴이 부셔지는 것 같아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그녀의 가족사는 기구하다. 남편이 탄을 싣고 나오다 석탄 수레에 머리를 다쳐 3년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만 끝내 저 세상 사람이 됐다. 그녀의 시동생 두 명도 폐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한 명은 숨졌고, 다른 한 명은 현재 영월의 한 진폐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폐에 돌가루가 생기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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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병원에 입원한 우만춘(66)씨. 아내 박순덕(60)씨가 병수발을 하고 있다. |
『입원했으니 살았지 아니었으면 죽었을 겁니다. 마흔여덟 살에 미탄탄광에 들어가 6년간 선탄작업을 했지요. 작업을 하다 보면, 목구멍에 탄 뭉텅이가 추녀 끝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곤 했지요. 석탄공사에서 일했지만 개인 광산에 더 오래 있었어요.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생각뿐입니다』
광원들은 자식들에게만은 탄 캐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 했다. 숯검정 얼굴로 자식들을 마주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父子나 형제, 부부가 함께 막장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영월과 정선의 탄광을 전전했다는 이도균(72)씨의 말이다.
『진폐 환자 중에는 父子가 입원한 경우나 3형제가 나란히 폐병으로 치료받다 죽은 경우도 있어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채탄공이 탄을 캐서 광차에 「빨리 실어가라」고 욕을 했는데, 광차 운반공이 아버지였다고 해요. 막장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풀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살림이 펴지 않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정선병원 환자대표를 맡고 있는 崔大秀(최대수·65)씨의 말이다.
『폐에 돌가루가 붙어 수술을 못 해요. 폐 사진을 찍으면 구멍이 뻥뻥 나 있어요. 갑자기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화장실에서 똥 누다 혈관이 터져, 기침하다가 죽어요. 아침 잘 먹고 점심 무렵 죽는 이들도 많습니다. 2007년 정선병원에서만 16명이 죽었어요. 1년에 20명이 죽어 가고 있어요』
옆에 있던 우만춘(66)씨는 쉬지 않고 기침을 콜록콜록해 댔다.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아내 박순덕(60)씨가 병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다.
『폐만이 아니라 몸 기능이 다 망가져서 화장실 갈 때도 휠체어를 탑니다. 남편 병수발하느라 농사일을 포기했어요. 원래 풍채가 좋았던 양반입니다. 날을 받아 놓고 산다고 봐야지요. 겉으론 멀쩡하지만 속은 다 썩었어요』
요양 중인 진폐증 환자는 33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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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원들이 갱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일단 합병증을 얻어 입원하게 되면「장애위로금(휴업급여)」에다 질좋은 요양치료를 공짜로 받을 수 있다. 입원환자가 숨지면 유족들에게 위로금이 지급된다. 서울大 대학원 산업의학과 백도명 교수에 따르면, 병원 등지에서 요양 중인 진폐증 환자는 약 3300명(입원은 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는 진폐증을 앓고 있으나 입원하지 못한 「在家(재가) 진폐 재해자」들이다. 在家 환자들은 유족보상금에서 제외돼 있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조차 없다. 진폐증 진단을 받은 3만여 명 가운데 입원 환자를 뺀 2만7000여 명이 在家 환자들이다. 한때 「산업역군」으로 칭송받다가 「산업 쓰레기」 취급 받는 것도 뭣해서 이제는 진폐 환자 간에 양극화가 극심하다.
비정한 탄광촌의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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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노동자들은 항상 갱내 붕괴와 사고, 침수 등의 위험에 시달린다. 사진은 1996년 강원도 태백시 연화동의 한 갱에서 채탄작업 중 지하수가 터지는 바람에 사고가 나서 동료직원들이 구조작업을 하고 나오는 중이다. |
『진폐 요양환자들은 죽어도 유족 보상이 나오니, 좋든 싫든 그냥 삽니다. 서글픈 얘기지만, 在家 환자들은 상황이 달라요. 보상금이 나오지 않으니 아무리 골골해도 안 모시려는 자식들이 있지요. 그러니 在家 환자가 겪는 고통은 더 큽니다. 진폐 환자는 정부 집계의 2배가량인 3만여 명으로 추산되지만, 고작 3000여 명만 요양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예산범위에 맞춰 대상을 최소화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요』
在家 진폐 환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보건소에서 약을 타 먹는 것이 전부다. 「근로복지공단이 진폐 요양신청에 대한 無원칙한 엉터리 판정을 일삼아 불신이 팽배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요양판정을 받은 소수만 병원진료 등 각종 혜택을 받다 보니 돈을 주면 판정을 받게 해주겠다는 브로커들의 유혹에 빠져드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 진폐 환자의 이야기다.
『환자들 간에 양극화가 심하다 보니, 브로커를 동원 합병증을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공연한 비밀인 셈이지요. 입원 환자에게만 치료해 주고 생계비 주고, 죽으면 유족 위로금까지 나오니 브로커가 낄 소지가 많은 것이지요』
在家 환자들은 고락을 같이한 막장 동료(요양환자)들에게 불신이 컸다. 그 불신은 늙은 광산노동자들의 마음을 또다시 멍들게 하고 있었다.
일부러 합병증 얻으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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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온 뒤 바라본 태백시 전경. |
『진짜 아픈 사람은 입원 못 하고, 돈 쓰고 빽 쓰는 사람은 입원합니다. 在家 환자 중에는 합병증이 있는데 입원 못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경우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在家 환자 최모씨)
在家 진폐 환자인 최만철(71)씨는 2006년 4월 서울지역 병원에서 진폐 합병증인 기관지확장증 진단을 받은 후 요양신청을 했다. 병원 측은 소견서에 「CT 촬영 결과, 진폐결절과 기관지확장증 소견이 뚜렷이 관찰된다. 진폐증에 기관지확장증이 합병된 상태」라고 했지만 서울지방노동청 영월지청은 「정상」 판정을 내렸다.
김길선(66)씨는 심폐기능이 나빠져 근로복지공단 측으로부터 「고도장애」 판정을 받고 합병증(폐기종) 증상이 있다는 소견서까지 받아 냈지만 정작 진폐 장애등급 판정을 못 받고 疑症(의증), 그러니까 진폐로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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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家 진폐 환자인 김길선(66)씨의 진폐판정서. 합병증을 앓고 있지만 진폐 장애등급에서 제외됐다. |
『在家 환자들은 일부러 몸을 망가뜨리려 합니다. 합병증을 얻어야 돈을 받을 수 있잖아요. 녹용이나 인삼 같은 좋은 약을 먹으면 몸이 좋아질 텐데 오히려 술 마시며 지냅니다. 그러다 합병증이 걸리면 되레 「축하인사」를 건넵니다. 이제 입원하게 됐다고요. 세상에 죽을병에 걸리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니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기가 막힌 현실이 그저 놀랄 뿐입니다』
태백지역 시민들은 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태백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박준형(56)씨의 말이다.
『저도 젊은 시절 탄광에서 일해서 사정을 잘 알지요. 진폐 판정받고 입원하면 이런저런 위로금이 나오지만 정작 누워 있는 환자는 단 돈 10원도 못 씁니다. 누가 쓰느냐, 자식들이 쓰지요. 평생 막장에서 탄가루와 싸웠지만 그 덕은 자식들이 보는 셈이지요. 자식들만 노납니다. 그래서 막장에서 목숨 버린 부모덕에 호의호식하는 자식들을 눈꼴사납게 보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在家 환자들은 아무 혜택을 못 받으니 딱하다고 생각하지요』
진폐환자들이 가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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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家 진폐 환자인 최만길(71)씨 소견서. 진폐증에 기관지 확장증이 합병됐으나 정상 판정을 받았다. |
1986년 한국노총의 통계에 따르면, 광산노동자 4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는 54만원이었다. 이는 全노동자의 평균임금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제조업에 비해 2배 이상 노동강도가 높다는 점과 재해 확률이 9배 높은 현실을 감안하면 저조한 수준이었다.
통계상 월급은 높은 편이지만 탄광촌 물가가 비싼데다 도급제를 적용해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형편이었다.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고, 재해와 사고를 감수해야 했다.
中小(중소) 탄광이나 하청기업 탄광의 경우 「先産(선산)부」가 한 달 꼬박 일하면 37만원 정도, 「後産(후산)부」는 32만원 수준이었다. 갱외부는 훨씬 적어 남자라도 20만원 선, 여성이 주로 일하는 선탄부는 15만원 안팎이었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난 상당수 在家 환자들은 배우자를 질병·사고 등으로 잃었고, 자식과 사는 이가 드물었다. 자식들은 일찌감치 탄광촌을 떠나 멀리 울산과 구미, 안산 공단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했다. 病魔(병마)에 가난까지 겹쳤지만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在家 환자들은 자기 집을 소유한 이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집이 있어도 방 한 칸, 손바닥만 한 부엌이 전부였다. 젊은 시절, 한번 갱 속에 들어가면 아무리 고되도 퇴갱 전까지 나올 수 없었듯, 뿌리 깊은 가난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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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성 광산근로자가 선탄 작업을 하고 있다. 남편을 탄광사고로 잃으면 아내가 생계를 잇기 위해 광산에서 일했다. |
고달픈 신세타령
태백 삼수동에서 만난 이한갑(68)씨는 1979년 태백 어룡광업소에서 탄부가 되어 채탄 일을 했다고 한다. 아내는 중풍으로 고생하다 몇 년 전 세상을 떴고, 막내딸과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방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에게서 고달픈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그는 한눈에 봐도 거동이 불편했고 왼손은 퉁퉁 부어 치료가 급해 보였다. 말도 어눌했다.
『합병증이 걸리면 입원해야 되는데 제 경우는 입원 못 했습니다』
그는 7급 진폐 장애판정을 받고 합병증인 폐기종까지 얻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입원을 못 하고 있었다.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요. 합병증을 얻고도 왜 입원을 못 하는지…. 딸 신세를 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납니다. 이웃에 최순봉이란 분은 3급 판정을 받고 휠체어 생활을 했어요. 겨우 병원에 입원했는데 얼마 안 돼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하더군요. 그집 아주머니가 「아직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사람을 내보내느냐」고 병원 측과 싸웠는데 결국 병실을 나가야 했어요. 얼마 후 집에서 죽었습니다』
이봉운(72)씨는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채탄공과 굴진공으로 일했다. 막장에서 탄을 캐거나 갱도를 굴착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진폐환자 장애등급으로 13급 판정을 받았다.
『몸 안 좋은 지 10년쯤 됐습니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아요. 지난 20~30년간 병들어 꼼짝 못 해도 병원에선 「약 먹고 금방 낫겠느냐」고 에둘러 말해요. 나라에서 방치하고 있어요. 외지에 나가 사는 자식의 도움받을 형편이 못 돼요. 1992년 탄광일을 그만둔 뒤 「노가다」(막일꾼)하며 공사판을 전전했지요』
그는 자식을 광원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 포크레인 일을 시켰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한국진폐재해자협회 成熙稷씨가 말을 거들었다.
『진폐 장애등급은 1·3·5·7·9·11·13급이 있는데, 1급이 장애정도가 제일 심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1급 줄 사람을 13급 판정을 내버려요. 진폐증은 현대의학 수준으로는 치료를 받더라도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영구불치의 직업성 질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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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시 삼수동에서 만난 在家 진폐환자들. 왼쪽부터 이준세(65), 최순길(72), 이한갑(68), 이준식(72)씨. |
『원탄을 부리면 검은 연기가 하늘 메워』
10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무희(71)씨는 13급 판정을 받았다. 태백 광전광업소와 어룡광업소, 성원탄광 등에서 선탄일을 했다고 한다. 협심증으로 수술을 받은 지 12년이 된다. 진폐 약과 심장 약을 먹는다. 약이 없으면 외출을 못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남편은 경찰이었지만 고향인 경북 봉화에 공비들이 많아 그만둬야 했지요. 그래서 강원도 장성으로 이사와 채탄공이 됐습니다. 남편 회사에서 탄광사고가 났는데 화약계장 대신에 남편이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 유치장에서 몰매를 맞아 다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남편도 11급 진폐 판정을 받았어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대신 제가 탄광에 들어가 선탄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벨트나 컨베이어를 통해 운반되는 원탄 중에서 이물질을 감별하거나 선탄장 안팎에 떨어진 낙탄 줍는 일을 했다.
『선탄작업이 막장 일보다 탄가루를 더 많이 뒤집어써요. 1t짜리 광차가 원탄을 부리면 엄청나게 분진이 쏟아집니다. 원탄을 분쇄기로 빻으면 검은 먼지가 온 하늘을 메웁니다. 멀리서 보면 꼭 큰불이 난 것 같지요. 젊은 시절 빨래를 밖에 널어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고된 선탄일을 하며 2남2녀를 키웠다. 남편은 죽기 전까지 물 한 모금 제 손으로 마시지 못해 5년간 대소변 수발을 해야 했다. 「다른 집은 다들 아빠가 일하는데 우리 집은 맨날 엄마만 일하냐」는 철없는 아이의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출근하면서 아이를 이웃 집에 맡기고 점심때쯤 젖 먹이러 집에 가면 젖이 퉁퉁 불어 못 먹였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자식들을 제대로 못 가르쳐 좋은 직장을 갖지 못했지만 그나마 매달 20만원씩을 보내와 생활비로 씁니다』
답답하다고「방진마스크」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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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家 진폐 환자 이무희(71)씨. |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채탄막장에서는 방진마스크 없이 광목으로 만든 목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작업하는 탄광노동자들이 많았다. 그의 말이다.
『발파할 때 물을 뿌리면서 해야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작업을 했어요. 심지어 도급제에 쫓겨, 답답하다는 이유로 방진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1970~1980년 초까지는 「브라자 마스크」를 많이 썼어요』
농촌에서 농약 칠 때 쓰는 것처럼 생긴 방진마스크를 「브라자 마스크」라고 불렀다. 채탄이나 굴진 모두 회사에서 방진마스크를 지급하면서 착용을 의무화했지만 작업현장에서는 일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용을 꺼렸다고 한다.
최순길(72)씨는 1968년부터 30년 동안 광원으로 일했다. 영월과 정선 등 여러 탄광 지역을 전전했지만 동진광업소에서 사고로 허리를 다쳐 그만두었다고 했다. 좁은 막장에서 탄맥을 따라 석탄 캐는 일을 평생 하다 보니 두 다리와 허리가 망가졌다. 현재 인공관절에 의지해 걸어다닌다.
『11급 판정을 받았지만 입원은 못 했습니다. 그 시절, 채탄작업 중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콧구멍이 막히고 입 안은 금방 새까매집니다. 압축기를 통해 갱내로 공기가 들어오지만 채탄작업장은 갱구 입구에서 멀게 수백m 떨어져 있어요. 산소가 넉넉하지 않고 습도가 높아 조금만 일하면 숨이 찼습니다. 방진마스크는 필터 작용이 좋지 않아 쓰고 있으면 답답하고 호흡이 가빴어요. 마스크를 안 쓰면 진폐라는 직업병에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 벗은 채 작업을 했습니다』
『태백에서 찍으면 말짱해요』
이재형(69)씨는 1967년부터 탄광촌 주위를 떠돌았다. 여러 탄광 중 장성에서 20년을 보냈고 개인탄광에서 도급을 많이 뛰었다고 한다.
『예전엔 마스크라는 게 없었어요. 수건 동여매고 일했지요. 입에 탄가루가 가득했어요. 화약을 장전·발파해 탄층을 무너뜨리면 엎드려 삽질을 했어요. 생산량을 채워 빨리 퇴근하려고 몸 아픈 줄 몰랐습니다. 당시 월급이 1만1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 돈으로 부모 모시고 자식들 키웠습니다.
합병증이 없어 입원 못 해요. 몸이 아프고 숨이 차지만 「진폐 疑症(의증)」 판정만 나와요. 앉으면 덜하고 누우면 숨이 찹니다. 1997년부터 아팠어요. 안산 중앙병원에서 X레이를 찍었더니 폐가 허옇게 나왔어요. 그런데 태백에 와서 다시 찍으니 말짱해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흉부 X선 사진에 흰 그림자(음영)가 나타나는 것은 폐 속에 들어온 먼지 때문에 폐의 본래 모양새가 망가져 결절이 생긴 것을 뜻한다. 결절은 채탄 작업장을 떠나도 계속 커질 수 있다고 한다.
김정배(68)씨는 7급 판정을 받고 진폐 위로금을 받았지만 모두 써버렸다고 한다.
『1966년 7월부터 25년간 막장에서 일했습니다. 숨이 차고 허리가 조여 와 말을 제대로 못 해요. 목이 따가워 미치겠어요. 오르막길을 10분 이상 못 걷습니다. 합병증이 의심되지만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합니다. X레이를 찍으면 흰 그림자가 많이 보여요. 몇 년 전 진폐 위로금을 받았지만 약값으로 벌써 다 써버렸어요』
윤태랑(70)씨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그는 1963년부터 22년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채탄공으로 일했다.
『발파를 하도 많이 해서 고막이 나가 잘 안 들려요. 전화통화조차 못 합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숨이 차 올라와요. 늙어 아무 일도 못 하는데 먹고살 형편은 안 되고 죽을 지경입니다. 숨이나 떨어졌으면… 참 살기 힘들어요』
한국진폐재해자협회 成熙稷씨의 말이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에서 진폐 장애 판정을 받은 이가 1만7000여 명 된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는 진폐疑 판정을 내리는데 이들은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일본에선 「疑症」이란 게 없어요. 독일은 본진 작업장에서 20년 이상 일하면 환자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집단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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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家 진폐 환자들이 먹는 약. 약을 못 먹으면 바깥 외출을 못 한다고 한다 |
대부분 60~70代 폐병을 앓고 있는 노인들이지만 기꺼이 단식에 동참,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 周應煥(주응환) 회장의 말이다.
『지난날 전쟁터 같은 막장에서 석탄을 캐낸 진폐 환자들은 오늘날 GNP 2만 달러를 상징하는 일등공신들입니다. 광산노동자들의 땀과 춥고 배고팠던 지난 시절 연탄 한 장의 따스함을 잊어선 안 됩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연탄재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바에야 사생결단으로 투쟁하다 죽겠습니다』
결국 이들의 아우성은 정부가 손을 들게 만들었다. 노동부가 勞·使·政(노·사·정) 및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폐 제도개선협의회」를 구성, 2008년 상반기까지 개선안 마련과 함께 관련 법령 개정을 추진할 방침을 세웠다. 진폐 노인들은 2007년 12월7일에야 농성을 풀었다.
투쟁위원장을 맡았던 成熙稷씨의 말이다.
『노동부가 진폐제도개선협의회를 구성해 협회의 요구사항을 주요 의제로 다루는 등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 농성을 풀고 정부 조치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노동부는 2001년 9월 在家 진폐 환자에게 생계비(월 73만원) 지원, 유족 보상제도 개선 등을 主 내용으로 종합대책을 발표한 뒤 막대한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시행하지 않았다. 2002년 12월12일에는 盧武鉉(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와 태백·영월·정선·평창 지역 국회의원인 李光宰(이광재) 의원이 사북 연세병원을 찾아 진폐 환자 권익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연극「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2007년 11월28일 오후 강원도 정선군 아라리 예술극장(옛 광하분교)을 찾았다.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를 보기 위해서다. 때마침 在家 진폐 환자들이 버스를 대절해 찾아왔고, 한나라당 국민통합특별委 소속 李秉錫(이병석) 의원과 소설가 徐永恩(서영은)씨, 위덕大 韓在淑(한재숙) 총장, 중요무형문화재로 대금정악 이수자인 李相圭(이상규) 한양大 국악과 교수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 뮤지컬은 1980~1982년 사북초등학교 탄광촌 마을 어린이 64명이 쓴 詩 112편을 노래와 춤으로 劇化(극화)한 것이다. 탄진공해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의 노래는 진솔하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가 오실 때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는/쓰껌헌 탄가루로/화장을 하고 오신다/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아버지 얼굴 예쁘네요/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그럼 예쁘다말다/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한바탕 웃는다 (5학년 하대원)
아버지 월급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아버지 월급 쓸 것도 없네 (6학년 정재옥)
공연 내내 진폐 노인들은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공연이 끝난 뒤 李秉錫 의원은 『소외된 在家 진폐 환자들의 아픈 이야기를 듣고 멍든 가슴을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李相圭 교수는 진폐 노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연극 내내 속으로 끝없이 울었다』고 했다.
韓在淑 위덕大 총장은 『평생 탄광촌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오늘 공연을 보고 큰 교훈을 얻었다. 그 시절, 연탄보일러로 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의 헌신 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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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촌 아이들의 시선으로 만든 뮤지컬「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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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공연을 在家 진폐 환자들이 관람하고 있다. |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徐永恩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광원이 된 먼 친척 오빠 얘기를 꺼냈다.
『먼 친척 오빠가 계셨는데 사북 광원으로 가셨어요. 제 친구가 그 오빠와 결혼한 뒤 소식이 끊어졌어요. 저는 언제나 어떻게 사실까 궁금했지요. 언젠가 서울에 찾아와 「돼지고기 실컷 먹고 싶다」고 하기에 같이 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많이 먹지를 못했어요.
캄캄한 막장 속 안전모에 달린 불빛은 생명등입니다. 어둠을 담아 다른 사람에게 빛으로 소통하기를 원했겠지요. 그 소통이 어려움과 기쁨과 함께 하면 희망으로 바뀌겠지요. 콩알만 한 월급이었겠지만 그 싹이 자라 희망이란 열매를 맺으리라 믿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