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뉴욕에 있는 뉴 뮤지엄(New Museum)이 논란에 휩싸였다. 뉴 뮤지엄은 1977년 마르시아 터커(Marcia Tucker)가 설립한 사립 미술관이다. 이사회 이사인 그리스 컬렉터 다키스 조아누(Dakis Joannou)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기획을 발표한 게 발단이었다. 격렬한 비판이 일었다. 사안의 핵심은 이거였다. 미술관 이사들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할 경우, 전시를 계기로 작품 가치가 높아질 경우, 나중에 그 작품을 매각할 때 이익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은 이 전시가 특정인(미술관 이사들)의 취향을 추어올리고 부와 자아에 영합하며 명백한 이해충돌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미술 전문지 《뉴욕 매거진》과 《뉴욕타임스》가 일제히 이 문제를 다뤘고, 미술계 안팎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문득 뉴 뮤지엄 사태가 떠오른 건 서울 은평구에서 열린 한 전시 때문이다. 사비나미술관이 개관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열었다. 지난 2월부터 열린 전시는 두 달 넘게 진행되다 지난 달인 4월 19일 폐막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굵직한 시간과 함께해온 사립미술관이 자신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메인 전시 〈10,000일의 질문—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는 창작의 이면에 도사린 두려움을 정면으로 다뤘다. 미술관이 자신과 예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진지하게 물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전시 중 두번째 섹션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This is for Savina: 10,000일의 동행, 초상화로 말하다〉. 17명의 작가가 그린 이명옥 현 사비나미술관 관장의 초상화 17점을 내걸었다. 여러 곳의 국가 예산을 지원받는 비영리 사립미술관의 전시 공간에, 그 미술관을 현재 이끌고 있는 관장의 얼굴이 열일곱점의 그림 속에 담긴 채 관람객을 맞았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크게 네가지였다. 하나씩 짚어보자.
첫째, 공공 자원과 사적 이익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
미술관 측은 이렇게 해명할 수 있다. ‘사비나미술관은 사립미술관이다. 관장 관련 전시를 기획하는 것은 자유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불법도 아니고, 관장 관련 전시나 개인 소장품 전시가 금지되는 행위인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비나미술관이 단순한 사립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비나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비영리법인이다. '비영리'라는 법적 지위는 단순히 수익을 내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특정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다는 약속이다. 게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와 문화체육관광부(한국사립미술관협회), 은평구청 등의 기관에서 예산 지원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아르코에서 전시 비용을 지원받고, ‘은평구 청년 일자리 사업’을 통해 인력 고용을 지원받는 식이다. 공공의 세금이 들어간다는 얘기다. 이런 곳에서 그것도 현직 관장의 초상을 내건다? 외국은 어떨까.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이런 전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국 미술관협회(AAM)의 윤리강령은 이러한 사안에 단호하다. 미술관과 그 책임자들은 단순히 법적 책임을 피하는 것을 넘어 공공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청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미국 미술관관장협회(AAMD)의 윤리강령은 더 구체적이다. 미술관장이 개인의 영향력이나 지위를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비전문적 행위이며, 관장이 미술을 수집할 경우 관장의 개인 수집 활동과 미술관의 이해관계 사이에 이해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명시했다.
이 기준에서 보자. 사비나미술관 측은 해당 초상화 17점이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작가들이 이명옥 관장을 그려주었고 관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이라고 밝혔다. 이 설명대로라면 공공의 성격을 띈 미술관의 전시 공간이 사적 자산의 전시 플랫폼으로 활용된 것이 된다. 만약 미술관의 예산이 이 섹션을 위해 투입되었다면, 공공 자원이 현직 관장의 이미지 제고에 쓰였단 얘기다. 사비나 측은 '별도 공간'에 전시했다고 강조했다. 3층 전시장 끝쪽을 별도 공간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기자는 사비나미술관 관계자에게 전시 후 초상화가 어디로 귀속되는지 물었다. 그러자 “관장님의 소유이니 관장님에게 돌아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미술관 자체가 관장님 소유 아니냐”고 덧붙였다.
관장 개인의 사적 소장품을 공공 지원이 결합된 전시 공간에서 기념하는 구조, 비영리 미술관 공간, 공공 후원, 미술관의 권위, 전시 이력, 언론 노출, 미술사적 서사, 이 모든 것이 관장 개인 소장품의 상징적·시장적 가치 혹은 관장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시 포스터에는 아르코가 후원했다고 쓰여 있지만, 정확한 사실 관계는 좀 달랐다. 아르코 측은 "사비나미술관에는 예술단원 지원사업(전시 운영, 소장품 관리 등을 돕는 인력 지원 사업) 예산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 외 시각예술 창작전시 사업으로도 전시 지원 중이지만 해당 전시자체에는 지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해당 전시의 포스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후원했다는 문구가 보인다. 아르코 측은 "해당 전시는 아르코 후원 문구를 꼭 쓰지 않아도 되는데 왜 썼는지 잘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둘째, 미술관 측은 전시에 관해 '관장과 친한 작가들의 자발적 창작'이라고 설명했다. 초상화를 그린 17명의 작가들이 사비나미술관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전시 기회를 받거나 지원을 받은 이력이 있는지, 관람객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유럽의 공공 미술관들은 원칙적으로 이런 상황 자체를 원천 차단한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주요 공공 미술관에서 현직 관장의 초상화를 관장 재임 중에 공식 전시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설령 헌정의 의미가 있더라도 관장이 퇴임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행이다.
그럼에도 외국 미술계에서도 권력관계 이해충돌 문제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2017년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뮤지엄(Stedelijk Museum)에서는 베아트릭스 루프(Beatrix Ruf) 당시 관장이 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개인 미술 자문 회사를 운영하는 한편, 주요 기부자와의 협상을 불투명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결국 사임했다. 그가 사임한 이유는 실제 위법 행위가 밝혀져서가 아니었다. 이해충돌처럼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기관의 신뢰가 훼손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조사에서 루프는 결백 판정을 받았다.
영국의 테이트(Tate) 역시 자체 '윤리 정책'을 정해놨다. 관장은 물론 직원, 이사회 구성원, 에게도 적용된다. 어떤 개인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개인적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아래, 이해 관계가 충돌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놨다. 이 기준에서 보면 현직 관장의 개인 소장 초상화 17점을 미술관에서 전시한다는 기획은 내부 윤리 심의 단계에서 이미 걸러진다.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오래 재직한 관장이 퇴임한 후 그 시대를 분석하는 자료들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보여주는 전시 말이다.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 선생처럼 역사의 중요 인물이 된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 관한 유물들 하나하나가 이미 한국 미술사를 증언하는 중요 유물로 충분히 교육적 효과가 있다.
셋째, 이런 전시가 관객과 사회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
사실 기자가 가장 우려한 지점이 바로 관객들에게 미칠 영향이다. 미술관은 단순히 관객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무엇이 전시될 가치가 있는지, 누가 기념될 자격이 있는지, 공공의 이름이 붙은 공간에서 어떤 서사가 승인되는지 후세대들에게 가르치는 곳이다.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미국 미술관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10명 중 9명 가량이 미술관을 신뢰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긴다. 다른 어떤 공공 기관보다 높은 신뢰도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러므로 미술관이 무언가를 전시하는 행위는 단순히 그림을 보여주는 걸 넘어 공적 승인의 의미를 띈다.
사비나미술관의 관장 초상화 전시를 본 관람객에게 무엇이 남을까. (세금이 들어가든 말든) 미술관 관장이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그렸다는 초상화 17점으로 기림을 받는 건 멋진 일이다, 이 미술관의 역사는 곧 관장 개인의 역사다. 뭐 이런 인상이 아닐까. 이게 사적인 공간에서, 이를테면 관장의 자택에서 관장의 돈을 들여 전시된다면 당연히 아무 문제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적 예산이 연계된 공간에서 전시됐다는 점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진다.
한 전직 박물관장에게 이 전시에 대한 의견을 묻자, “한국 문화계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전시가 젊은 작가들과 미술 관계자들에게 보내는 신호도 문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현직 관장이 현직 작가들이 그렸다는 초상화 17점으로 스스로를 기리고, 소위 미술 전문 기자라고 하는 기자들이 비판없이 전시 보도를 쓰는 장면은 한국 미술계의 위계 구조와 네트워크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교범이 된다.
![[사비나미술관]왼쪽부터-박찬용, 바라보다, 2022, 혼합재료, 각 80 x 122 x 195cm, 안창홍, 기념사진, 1985, oi~.jpg](https://monthly.chosun.com/editor/cheditor/attach/2026/20260506230417_upniiafo.jpg)
해당 전시의 다른 섹션에 걸린 작품들 photo 사비나미술관
넷째, 이 장면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한국 미술계와 언론도 큰 문제다.
이 전시가 열린 이후 소위 미술 기자들이 문화면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시 소개 기사들은 미술관이 보도자료에 쓴 10,000일의 기념이라는 서사를 그대로 읊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문화 기자들은 취재원과의 관계에 의존한다. 미술관 관장, 큐레이터, 작가들과의 접근권을 유지해야 하는 기자가 그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는 것은 그 접근권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둘째, 한국 미술계는 좁다. 비판은 쉽게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비판한 사람은 배제당할 수 있다. 셋째, 문화 행사를 공공 자원이 투입되는 공적 영역이 아니라 호의와 배려의 영역으로 보는 관행이 뿌리 깊다. 이를테면 ‘30년을 헌신한 분을 기리는 좋은 전시인데 왜 시비를 거느냐’는 시선이다. 넷째, 한국에서 미술 비평은 아직도 상당 부분 미술관과의 협력 관계 안에서 생산된다. 독립적인 비평의 기반이 약하다.
외국 언론은 어땠을까. 스테델레이크 사태는 네덜란드 언론 NRC가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시작됐다. 뉴 뮤지엄 논란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다.
미술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미술관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공공 자원이 투입되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독자와 시민을 대신해 묻는 것이다.
이런 전시가 분명 불법은 아니다. 사비나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계에 기여해온 바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30년의 역사에는 그 나름대로 기념할 가치가 있을 게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라는 것과 적절하다는 것은 다르다. 만약 이번 전시 후 해당 초상화들이 미술관 아카이브나 공적 기록으로 편입된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전시 섹션이 포함된 과정에서 외부 큐레이터나 별도의 윤리 검토 절차가 있었고, 그것을 밝힌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산이 투입되는 곳인 만큼, 공공성 차원의 검토가 있었는지도 공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사실 기자는 이번 점을 짚어 본 소위 미술 기자들이 한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지켜봤다. 다양한 시선의 부재는 한국 문화계,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공공의 지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영리 법인이 무엇인지, 미술관의 윤리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검토하는 문화가 아직 충분히 정착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게 아닐까. 한국 미술시장 규모가 6천억원이니, 1조원을 돌파했느니 하는 외형적 성장에만 주목하지 말고 기본적인 것부터 다져나가길 바라는 건 무리한 바람일까.
기사 내용과 관련해 사비나 미술관 측에서 의견을 전달해왔다. 미술관 측은 "해당 초상화 전시는 별도 공간(미술관 3층 전시 공간에서 파티션으로 분리된 부분)에서 전시됐으며 해당 섹션엔 외부 공공기금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해당 초상화는 판매 목적이 아니다"라고도 밝혔다. 그러면서 "초상화들은 현직 관장이라는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쳐진 그림이 아니고, 오랜 시간 경제적으로 어렵고 제도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던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지지하고 전시 기회를 마련해 주며 격려해 온 이명옥 관장에게 보낸 감사와 연대의 표시"라고 주장했다. 전시에 걸린 특정 작품을 두고는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종료 후 작가가 감사의 뜻으로 자발적으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 "기사에서 암시하듯 작가들이 미술관 권력에 기대어 아부하거나 전시 기회와 지원을 얻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다는 식의 해석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작가들을 비굴한 존재로 묘사하는 대단히 모욕적인 시선"이라며 "특히 이 섹션에 참여한 작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미술시장에서 작품이 잘 판매되는 블루칩 작가들과 거리가 멀다"라고 부연했다.
글=하주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