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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서울고, 김성곤(쌍용)의 공통점은?

서울 신문로 2가 역사 조명…경희궁터 어떻게 변화됐을까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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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문로2가는 옛 경희궁 영역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이다.

경희궁의 흥망성쇠와 명맥을 같이한다. 

왕이 떠난 경희궁터에는 일제강점기 학교와 전매국 관사지가 들어섰고, 해방 이후 서울고와 고급주택지가 형성되었다.

서울고 자리에 경희궁 일부가 복원되고 서울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의 공간이 어떻게 시민들의 공간으로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자.


다음은 서울역사박물관장(배현숙)이 지난 5월 펴낸 <신문로2가,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 보고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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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대지도

 

□ 경희궁, 경복궁을 대신해 건설되고, 경복궁 건설로 폐허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이 불타고, 창덕궁은 기거하기를 꺼려해 왕기가 서렸다는 곳에 경희궁을 1617년에 건설하였다. 1865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자 경희궁 전각의 목재와 석재는 새로운 궁궐의 자재로 활용되었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희궁의 빈터는 명례궁 등 4개의 궁에 토지로 분배되고 뽕나무가 심어지는 등 궁으로서의 위상은 점점 사라졌다. 


경희궁지는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보존하여 전시되거나 안내판이 설치되어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히 경희궁의 동쪽 경계부는 흔적이 남아 궁장의 일부가 복원되었으며, 경희궁의 정자 춘화정이 있던 성곡미술관에는 숙종 대에 설치한 반월형 석조 연못이 발견되어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그림 3 1910년대 경성중학교 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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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중학교 전경

 

□ 최신식, 최고급의 시설을 갖춘 최고의 학교, 경성중학교 들어서


1910년 설립된 경성중학교는 조선에 거주하는 고위급 일본 관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로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 경희궁의 일부 전각을 사용하였으나, 1926년 이후 하나씩 건물이 매각되었다. 경성중학교는 본관, 체육관, 수영장, 테니스코트, 도서관, 강당 등을 갖춘 최신 시설의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중학교는 별궁의 하나 경희궁 속에 있었다. 작은 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아래로 층층이 부드러운 검도장, 강당, 우천 체조 경기장이 늘어서 더욱 2층 건물이 2열로 세워져 있었다. 건물 사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돌계단과 울타리 등 옛 궁전 터가 많다고 생각했다.”

 -‘경성의 거리의 추억’ 모리코 오조오(경성중 졸업생, 전 지바현 계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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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고 전경

 

□ ‘신문로 감옥소’ 서울의 명문학교, 서울고


서울중학교는 해방 이후 경성중학교에서 새롭게 거듭난 ‘신흥학교’로서 선생과 학생을 모두 새로 모집해야 하였다. 당시에 월남한 이북 명문중학교 출신 학생들을 대거 서울고등학교에 입학시키면서 학생 수를 충원할 수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초대 김원규 교장의 엄격한 교육과 훈련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신문로 감옥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명문학교로 거듭나기 위해 조병화, 황순원, 김광식 등 각계 인재들을 교사로 초빙해 학생들에게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였고, 교사들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사택을 제공하여 안정적 생활기반이 되도록 하였다. 


서울고는 신설학교였지만, 경성중 시설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일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있던 신사를 허물고 그곳에 삼일탑을 세웠으며, 각종 기념비와 무기고 등을 철거하였다. 


그림 25 졸업식 모습(강신항 졔공).jpg

서울고 밴드반이 졸업식날 행진하고 있다. (졸업생 강신항 제공)

 

밴드반은 1949년 초 창설되고, 각종 관악대회에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어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1955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식에서 서울고 밴드반은 을지로~충무로입구~남대문~세종로~서울고로 이어지는 첫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후 유명해진 서울고의 시가행진은 서울고 학생들뿐 아니라 서울시민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효창운동장에 응원하러 갈 적에 밴드반이 서울고부터 효창동까지 행진하는데, 일부러 시청에서 이화여고 정문 앞길로 갔어요. 거기만 다다르면 행진 나팔소리가 더 커지는 거예요.” (서울고 26회 동문 회고)


신문로와 인접하는 학교 남쪽 영역은 중국인들이 상점과 창고로 이용하는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곳의 중국집·공갈빵집을 자주 들렀으며, 이 중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애용했다는 중국인 ‘왕취복 양복점’도 있었다. 일부 신문로 거주민은 전족(纏足)을 한 중국 여성을 자주 보았다고 하나, 1970년대 신문로 확장공사로 중국인 상점가로는 사라졌다. 


□ 도심과 가깝고, 경성중학교와 인접한 우수한 관사지, 전매국 관사의 형성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에 있는 조용한 고급주택지는 1920년대 형성된 전매국과 총독부 관사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일본은 늘어나는 경성 거주 일본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관사를 건설하였는데, 대부분은 부지확보가 쉬운 빈 땅의 국유지, 산자락, 조선시대 대형필지 등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희궁과 경복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고, 궐내 및 주변에 대규모 관사가 건설된 것이다.  

 

그림 6 2020년 서울역사박물관.jpg

2020년 서울역사박물관 주변 전경

 

□ 해방 이후 관사 불하, 누가 이곳에 들어왔을까?


토지대장과 각종 신문기사와 법규를 살펴보면, 국유지인 신문로2가의 토지가 개인으로 소유자가 바뀌는 시기는 1955년 전후인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소유주는 대부분은 불하를 통해 신문로2가 관사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 소유자 중에는 전매국 소속 공무원을 비롯한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들이 대다수였다.

 

1950~1960년대에 유입된 기업인들은 초기 소유주인 라익진(동아무역 대표), 김형남(일신방직 대표), 조정구(삼부토건 대표), 임대홍[미원(현 대상그룹) 대표]을 필두로 초기 소유주에게 매입한 김성곤(쌍용 대표), 황규삼(풍성전기 대표), 배현규(한일투자금융 대표), 김동신(금강제화 대표), 서병식(동남갈포벽지 대표), 김신권(한독약품 대표), 신춘호[롯데공업(현 농심) 대표], 고홍명(파이롯트 대표), 이건희(삼성) 등이다.

 

이건희는 주택을 매입하여 철거한 후 공지 상태인 채로 부지를 계속 소유하였고, 나머지 기업인들은 실제로 거주하였다. 1970년대에 새롭게 이주한 인물로는 김우중(대우 대표)과 김재홍(한승건설 사장) 등이 있다. 


명문학교와 인접하여 주거 선호도가 높은 신문로2가는 1974년 고교평준화 및 학군제 도입과 1976년 도심 내 명문고의 강남이전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논현동 일대의 주택지가 부각되고 최고가를 자랑하던 신문로2가의 주택지 선호도는 급격히 떨어져, 1983년 최고가 주택지의 자리를 논현동에 내어주게 되었다. 


더불어 호화주택 중과세부과 정책과 강남개발에 따른 거주민들의 변화로 1980년대부터 신문로에는 대사관을 비롯한 사옥, 문화시설, 출판사 등이 입지해 주거지의 성격에서 복합기능지의 양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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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주변 주변 문화주거 시설

입력 :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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