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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최근 한 月刊朝鮮 독자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탈출기」였습니다. 글의 주인공은 올해 일흔 넷인 유창상이라는 분입니다. 대한석탄공사 공무부장을 거쳐 웨스팅하우스에서 상무이사를 지내셨던 분이랍니다. 유씨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서울대 공과대학 재학생으로 있다가, 「연락장교」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해 11월 그는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에 중공군의 포로가 됩니다. 장교신분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상당한 고문을 당할 것 같아 그는 잡히기 직전에 계급장과 서울대학생증, 도민증 등을 숨깁니다. 『5연대, 이등병, 유창상』 유씨는 敵軍의 심문에 이렇게 자신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는 평남 덕천, 신흥, 청천강 서부지역, 온정리 등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굶주림, 고문, 복구부대에서의 강제노동 그리고 탈출계획까지... 유씨는 글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1953년 포로교환으로 한국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유씨는 결론부분에서 『70세 이상의 고령인 그들(국군포로)이 생전에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당국이 정책을 마련하고 강력히 시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유씨는 현재 뇌졸중 증세가 있어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합니다. 유씨의 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남편이 나라 걱정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가 온갖 고통을 받으며 애국을 했는데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잘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을 새며 글을 쓰더군요』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유씨. 그는 자신보다 「나라」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자 익숙치 않은 컴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9만5000t) 탐험기 艦內 탈영해도 찾는 데 며칠이 걸린다 ●수송기 C-2A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칼 빈슨에 착륙… 『선회비행 때 G5 느껴』 ●1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떠다니는 「전투 기지」… 건조비 40억 달러, 1년 운영 예산만 3570억원 ●5200여 명의 승무원… 5種75대 전투기 실어 ●항모의 3대 요소는 격납고, 캐터펄트, 엘리베이터 ●10여 척의 순양함·구축함·핵잠수함·지원함 거느려 吳 東 龍 月刊朝鮮 기자 4년 만의 한반도 나들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이튿날인 지난 3월21일, 美 핵추진 항공모함 칼 빈슨(Carl Vinson)호에 승선하기 위해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이 새벽 어스름에 국방부 정문 앞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항공모함 칼 빈슨은 지난 3월4일 시작돼 4월2일까지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韓美연합 기동연습인 「독수리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이다. 韓美연합사에 따르면, 美 항모는 한반도 주변 해역으로 이동해 독수리 훈련에 참가해 왔지만, 훈련기간에 한국 항구(부산)를 방문하는 것은 1999년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칼 빈슨은 이라크戰에 참가하기 위해 중동지역으로 이동한 7함대 소속 항공모함 키티호크의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 3월15일 우리 동해에 배치돼 훈련에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칼 빈슨의 「독수리 연습」 참가는 최근 북한 핵위기, 美정찰기 위협사건 등으로 西태평양 지역에 미군 전력이 증강배치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주목을 끌 만한 사건이었다. 평양방송은 지난 3월11일 보도를 통해 『美帝(미제)가 우리를 힘으로 압살하기 위해 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려고 침략과 전쟁으로 악명을 떨친 항공모함 칼 빈슨호까지 남조선 항구에 끌어들여다 놓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조건에서 우리도 결코 가만있을 수 없게 됐다』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오산 공군기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韓美동맹 50년의 證言 - 白善燁 장군 『우리는 美國을 붙잡아야 산다고 생각했다. 草根木皮의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과 손을 잡았기에 안보도, 번영도 가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상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의했던 白善燁 장군 ● 美 해군성 전략기획국장(알레이 버크)이 『아이젠하워에게 휴전의 代價로 한미 군사동맹을 요구하라』고 충고… 美 대통령과 단독 면담, 원칙에 합의 ●『한미동맹은 함께 피를 흘린다는 전제에서 출발. 그것이 血盟이다. 입으로만 동맹이 되지는 않는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3·1절 대회장에 나타난 「多富洞의 영웅」 지난 3월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약 10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에서는 歷戰(역전)의 용사들의 함성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날 사회를 본 奉斗玩(봉두완)씨는 白善燁(백선엽·84) 장군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해 『한국전쟁의 영웅 白善燁 장군. 이분이 1950년 낙동강 多富洞 전선에서 버티어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이라고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白장군은 高齡(고령)이 믿기지 않게 힘차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 참석자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軍歌 「전우야 잘 자라」를 목청껏 불러 대는 歷戰 용사들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白善燁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평양사범, 만주군관학교, 군사영어학교, 1사단장, 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육군 대장을 지낸 전쟁영웅이다. 그는 3년1개월간 치러진 6·25전쟁 기간 중 제1사단장으로 平壤(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그 후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60만 大軍을 지휘하면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에 대한 不敗(불패)의 기록을 남긴 百戰百勝(백전백승)의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거리로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기자는 지난 3월4일 오후 전쟁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울분과 술기운으로 단숨에 지은 노래』 ● 서울 수복 되던 날 明洞에서 朴是春씨 만나… 단숨에 「전우야 잘자라」 작사ㆍ작곡 ● 작곡가 朴是春씨의 의뢰로 히트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63곡 作詞 ● TV드라마「유호극장」5년간 250회 방송… 프로그램 제목에 처음으로 작가 이름 붙여 兪 湖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9년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 졸업. 1942년 東京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 수료.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ㆍ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ㆍ부장. 1962년 방송작가로 복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68년 방송문화상,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1993년 서울시문화상,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만리」,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군가) 등 63곡.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반세기 만에 돌아온 「전우야 잘자라」 지난 3월24일,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兪湖(유호·본명 兪海濬·83) 선생은 반세기 전의 감격이 느껴지는 듯 조용히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3월1일,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서울시청 광장)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그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전우야 잘자라」를 다시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고 했다. 1950년 10월은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남대문이란 말은 일제가 만들어 유포 시킨 말이기 때문에 그 원래 이름인 「숭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줄 알고 있고, 몇일 전 모 일간지의 독자투고란에도 같은 주장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대문은 남대문일뿐 일제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산이름에는 유독 앞산, 남산 이란 이름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동네 앞에 있는 산은 거의 대부분 앞산 혹은 남산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북쪽에 있는 산은 뒷산으로 불렀습니다. 현재 서울의 남산은 조선시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습니다. 목멱산은 「남쪽에 있는 산」이란 말로 남산과 같은 말입니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목멱산」이란 말 대신 친근한 「남산」이란 말을 더 선호 했을 것이고, 이 말이 오늘날 그대로 이어져 남산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쪽에 있는 「흥인문」은 「동대문」으로, 서쪽의 돈의문은 「서대문」으로, 남쪽의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그냥 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옛 문헌에도 남대문이라고 기록한 것을 셀 수도 없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흥인문도 굳이 「흥인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흥인문」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명은 현지 사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면서 굳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백제가 망하고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이들 유민들은 일본에 정착하면서 주변의 산과 강 고을에 옛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많이 붙혔습니다. 아마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붙인 이름중에는 앞산도 있었을 것이고, 뒷산이란 이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 백제나 신라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놓은 지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참고로, 애국가 가사 중에 나오는 「남산」은 서울에 있는 남산이 아니라, 우리 나라 어느 동네에나 있는 「남산」즉 「우리의 산하」로 봐야 할 것입니다. ps: 이 글을 읽고 월간조선 조남준 부국장이 다음과
SUBJ: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Speaks on USFK-ROK People Relations SOURCE: Seoul Wolgan Choson in Korean 01 Apr 03 pp 461-476 TEXT: [Article by Wolgan Choson reporter O Tong-yong: "Testimony by US Forces Korea Public Relations Officer Kim Yong-kyu From His 25-Year Career"; bolded subheads as published] [FBIS Translated Text] US Forces Committed Many "Foolish Acts" of Doing Good Deeds But Being Blamed for Them" Without losing his cool-headedness while being caught between the fires of anti-US and anti-ROK sentiment, he stated that "US Forces believe us to be a companion, but we are entrenched in 1960's and 1970's notions and think that they are looking down on us." A Man Who Has Three Official Titles Kim Yong-kyu (age 56) lives with three "official" titles, pubic relations officer for US Forces Korea [USFK] Headquarters, United Nations Command [UNC], and US Forces Combined Headquarters. Mr. Kim has his office in the public relati
駐韓美軍 공보관 - 金永圭의 25년 체험 증언 『美軍들은 좋은 일 하고도 욕 먹는 「바보짓」을 많이 했다』 反美 감정과 反韓 감정의 협공 속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는 『미군들은 우리를 동반자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1960~70년대식 생각에 매여 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세 가지 직함을 가진 사람 金永圭(김영규ㆍ56)씨는 세 가지 타이틀을 가지고 산다. 駐韓(주한)미군사령부, 駐韓유엔군사령부, 韓美연합사령부의 공보관이 그의 「공식」 직함이다. 金씨의 사무실은 서울 용산 美8군 메인포스트內에 있는 공보실. 그의 사무실 전화와 휴대전화는 內外信의 문의 전화로 종일 몸살을 앓는다. 남들은 한번 충전하면 며칠씩 사용한다는 휴대전화 배터리도 퇴근 무렵인 오후 5시면 바닥이 난다. 韓美 관계의 「接點(접점)」에 있는 그는 韓美 50년 동맹사상 최악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동맹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전화부터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답변은 대변인의 성명처럼 우렁차고 간단 명료했다. 『내일 외신기자들과 판문점엘 들어가는데 날 만나려거든 오전 9시에 통일대교 입구로 나오시오. 鄭周永(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끌고 들어간 다리 말이오!』 지난 1월29일 설연휴 직전, 기자는 승용차를 몰고 자유로를 달렸다. 간밤에 도로에 쌓인 눈이 영하 14도의 맹추위로 얼어붙어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위태롭게 했다. 판문점으로 가는 길의 주변 산들은 눈을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상회하는 칼바람 속에서 AP, AFP 등 세계의 주요 통신사의 기자들이 유엔군사령부의 협조로 판문점을 찾은 것이다. 駐韓미군 공보관인 金씨가 外信기자들을 따라나서는 일은 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
행사의 이모 저모는 '카메라 산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정보기관 보고서 취향] 정보기관에 대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확고해 보입니다. 특히 국정원에 대해서는 「特別」할 정도입니다. 盧대통령은 민주당 大選(대선) 후보시절은 물론 당선자 신분 때도 『국정원 보고서는 한 줄도 보지도 읽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盧대통령은 검찰인사 파동 당시 「평검사와의 대화」에서도 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청와대에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보고절차와 내용이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 보고서는 수석비서관들이 참고한다고 합니다. 盧武鉉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책상황실이나 국정상황실쪽에서 보고서를 우선 순위와 중요도에 따라 배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정상황실 등이 국정원 보고서는 물론 관계기관 정보를 일차로 스크린 한 뒤 청와대 해당부서에 회람ㆍ배포를 하거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절차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盧대통령이 국정원 보고서를 직접 보지는 않지만 사실상 비서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국정원 보고서의 내용은 「정치사찰 성격」을 탈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는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국정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정치정보 외의 경제ㆍ남북관계ㆍ해외정보가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경찰청 보고서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경찰청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경찰 정보요원들의 업무가 정치분석ㆍ전망에서 査正(사정) 정보 수집으로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정치동향 수집에서 정치인 非違(비위) 사실을 수집하는 쪽으로 업무 중심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튼 盧武鉉 대통령의 정보보고서 취향이 과거와는 좀 달라지고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 풍경이야 전국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설날은 무척 설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가? 어른들에게 세배가 끝나고 나면 또래끼리 짝을 지어 동네 노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니곤 했습니다.어쩌다 백원짜리 하나 건네 주는 노인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탕이나 떡, 과일, 쌀과자 등을 줍니다. 어떤 노인분은 초등학생 꼬맹이들인 우리들에게 정종을 한잔 따라 주기도 합니다. 노인들 위주로 세배를 돌지만 친구 부모님에게는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제일먼저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동네 친구 아버지 중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한분 계셨습니다. 저와 세배를 다닌 친구 일행은 그 친구 아버지 집에 도착해서 안방문을 휙 열고 『세배하러 왔습니다』하고는 방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친구 부모님을 모셔놓고 큰절을 한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뭔가 좀 허전한 것 같아 단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고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습니다. 깐깐한 친구아버지는 우리가 일어 섰다 앉기도 전에 『어른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 자네들 아버지가 욕먹어...』하며 혀를 찼습니다. TV에서 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기에 그 말이 입에 배어있던 차에 한명이 그 말을 하자 모두가 엉겹결에 따라 해버린 것입니다. 『어른들에게 세배할 때는 그냥 절만하는 것이 제일 좋고, 정 한마디 하려면 「건강하십시오」라고 하면 된다』 세배하러 왔다가 우리는 꿇어 앉은 채 친구 아버지의 예절 교육을 무릎이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안동식혜가 한 상 나왔지만 숟가락을 갖다 댈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 할머니에게 세배 오는 사람들을 가만 살펴보니 모두들 그냥 절만 하고 가거나 간혹 『몸 편찮은데 없냐』고 한마디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런 불경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큰 절할때는 무조건 입을 꼭 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환씨가 이번에는 국정원 도청 의혹과 관련한 글을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는 도청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해 『(검찰이)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고 말했습니다. 현재로서 물증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나라당이 지난해 대선 직전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측이 메모보고서 양식으로 작성한 것을 외부에서 다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 중 일부입니다. 김기환씨는 한나라당이 공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한 메모보고서와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영일 사무총장이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폭로한 문건은 국정원 내부 문건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동일해 보입니다. 그는 『국정원이 도감청한 내용을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해 『국정원측이 증거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감청을 했다는 물증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관련 부서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직원들도 여러 부서로 내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기환씨는 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도감청 문제에 대해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정원의 도감청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도감청과 관련해 국정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불법적인 도감청은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도청관련 시설도 없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얼마 전 검찰이 불시에 국정원의 감청시설에 대해 현장조사를 벌였습니다. 국정원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당황해 할만한 일이었지만 국정원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조사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재로서는 불법적인 도청은 없습니다』 감청은 통신비밀보호법 7조에 의해 고등법원 수석 부장판사의 허가나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안동식혜는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은 안동 문화권인 경북 북부 지방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입니다. 같은 문화권인 의성이나 예천 서부지방 등지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안동식혜」라고 이름 붙여도 그다지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안동에서는 흔히 「식혜」라고 하면 이 안동식혜를 칭하는 것입니다. 타 지방에서 식혜라고 부르는 것을 안동에서는 「감주(甘酒)」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해서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따라서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안동식혜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식혜라고 합니다. 안동식혜는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속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그 맛이 워낙 독특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겨울철에 만들어 먹는다는 것과, 무우채, 생강, 고춧가루가 기본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 당근, 땅콩, 잣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발효를 시켜서 만드는데 이 때문에 독특하게 삭인 맛이 나고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안동 지방에서는 설날 식혜를 만들지 않는 집이 없으며, 찾아 오는 손님에게는 꼭 식혜를 대접합니다. 그 맛이 집집마다 천차 만별이라 돌아다니며 맛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안동식혜가 발효식품이라는 점에서 젓갈의 한 종류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북 북부 내륙지방에서는 생선이나, 새우 등의 젓갈 종류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무 등 야채를 이용해서 젓갈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바다 음식이 얼마나 귀했냐고요? 이쪽 지방 옛날 노인들은 평생 소원이 새우젓하고 밥한번 먹어 봤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구한말 혹은 일제시대 중국 연변 지방으로 옮겨간 안동출신 후손들이 이 식혜를 만드는 것을 보면 매우 걸죽하게 만들어 마치 죽처럼 보입니다. 현재 안동지방에서는 식혜를 이처럼 심할 정도로 걸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타지에서 온 분들은 안동댐 올라가는 민속촌에 가면 평소에도 안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였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데 동네 입구에 있던 행상집(상여집)의 문이 열려 있고 안에 있던 행상(상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른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동네 행상을 새로 장만해서 옛날 행상을 오늘 불태웠다』하는 것입니다. 『아뿔사, 하느님 부처님 맙소사...그걸 누가 태웠어요?』 아무리 후회해 봐야 행상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네의 노인이 귀신 붙어 있는 옛날 행상을 태워버려야 마을이 평안하다며 태우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노인의 말이 곧 법인지라 아무도 대꾸를 못하고 행상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새로 장만한 행상은 알루미늄으로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었습니다. 불타버린 행상은 많은 사연을 간직한 행상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말기, 동네에 행상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은 초상이 나면 이만 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행상을 멀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빌려와서 사용했는데, 사용하고 나면 사용료를 그 동네에 주어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 했습니다. 그래서 행상을 하나 마련하기로 결론을 냈지만 문제는 행상을 마련할 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북과 장구, 징, 꽹과리를 메고 임시 광대패를 만들어 예천, 안동 일대 마을을 돌아 다니며 일종의 구걸 공연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여름 한철 내내 구걸 공연을 나선 끝에 겨우 행상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동 풍산 어느 곳에 아주 기술 좋은 목수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에게 땅을 얼마간 사주고 행상 제작을 의뢰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미 그 노인을 제외하고는 행상 제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귀했다고 합니다. 노인 혼자 여러 달 동안 매달려 행상을 제작했습니다. 행상을 가져 오는 날 동네에는 성대한 맞이 굿이 펼쳐 졌습니다. 행상의 위 부분은 각종 귀신과 호랑이를 탄 저승사자 등이 死者를 호위하고, 행
대구에 있을 때 어느 해입니다. 그 해 비가 많이 내렸고 일부지역에는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 폭우로 대구 인근 산간에 있던 많은 무덤이 무너지거나 훼손되었습니다. 산사태를 만나서 무덤이 쓸려 갔다면 모를까, 산 기슭에 멀쩡하게 있던 무덤이 비가 온다고 힘없이 무너지지다니... 저는 처음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어서 무덤 만드는 과정을 보고 무덤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시골에는 사람이 없어서 동네에 누가 죽으면 이웃 동네에서 인부들을 사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반대로 급격하게 도시화가 된 지역에서는 사람은 많을지라도 이웃끼리 서로 무관심하다 보니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사와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일당 받고 급하게 조직된 인부들이라 상여소리를 비롯 뭘 하나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장지부근까지는 영구차로 운반한 고인을 다시 상여에 옮겨 산소까지 이동하는 것을 보니 비록 도시에서 치르는 장례식이지만 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상여 없이 시신이 든 관을 메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지에 가니 미리 포크레인이 와서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관을 땅에 묻자 포크레인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뚝딱 뚝딱 두 번만 흙을 쌓으니 봉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봉분 위에 올라가 형식적으로 몇 번 다지고 내려오자 포크레인이 봉분을 꾹꾹 눌러 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봉분에 떼를 입히자 무덤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무덤이라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서 비만오면 쉽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옛날의 무덤 만드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관을 하고 나면 「덜구지」가 이어 집니다. 덜구지란 무덤을 다지는 작업을 말합니다. 덜구지는 처음 관을 무덤에 넣고(혹은 관은 불태우고 시신만
어느 날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다가 건네 편에 앉은 사람보고『거기, 나물좀 건네 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여자 분은 제가 좀 건네 달라는 나물 바구니는 주지 않고 식탁 위에서 무엇인가 열심이 찾았습니다. 저는 또 다시 『나물 바구니 거기 옆에 있잖아요』했습니다. 그러자 여자 분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이 『호호호, 이게 나물이에요?. 야채지... 나물과 야채도 몰라서 어떻게 기자하겠어요』하는 것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 분들도 『시골서 자랐다면서 나물이 뭔지도 몰라요』하며 덩달아 구박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말을 배우면서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물에 대한 개념이 서울에 오니 바뀌었나하며 갑자기 어리둥절 해 졌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고향이 같은 경상도 분이 많아서 『이 바구니에 담긴 것이 나물 아니에요?』하고 응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전부다 하는 말이 『그건 야채죠』하며 제 편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바구니에는 상추가 가장 많았고 그 외 깻잎 등 삽겹살 쌈을 싸 먹는 각종 채소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씩 나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대부분은 상추와 배추는 야채에 포함되지 나물에 포함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양념으로 무친 것만 나물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취나물 등 산나물 등이 자기가 아는 나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럼 『무우청, 시래기 등은 나물이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무엇이 나물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먼저 국어사전에 나온 정의를 보겠습니다. --인터넷 검색 국어사전-- 나물[명사] 1.식용할 수 있는 나뭇잎이나 풀을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을 무친 반찬. 2.채소를 여러 가지 양념으로 무친 반찬. 채(菜). 나물은 몇몇의 특정 채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나는 먹는 풀은 전부 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상추, 배추, 무청, 취
자치기는 겨울철에 즐겨 하는 놀이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해가 져야 끝을 보는 놀이기도 했고요. 지방마다 노는 법이 조금씩 다르고,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은 지역도 많습니다. 워낙 전국적으로 놀았던 놀이라서 규칙이 많을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정답이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래 소개 한 자치기는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방법입니다. 이 글을 다 쓰고 어릴 때 자치기를 하면서 놀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자치기의 세부적인 규칙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으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 없더군요. 결국 아래 쓰인 모든 것은 저의 기억에 의존해 썼습니다. -----------아래----------------- 자치기의 놀이 기구는 「큰자」와 「작은자(자치기 부랄:지방마다 이름이 다름)」밖에 없습니다. 큰자의 길이는 대체로 손끝에서 팔꿈치 부근까지 오면 됩니다. 부랄자는 손바닥 길이 만합니다. 부랄자는 평평한 바닥에 놓고 큰자로 한쪽 끝을 내려 쳤을 때 공중으로 튀어 오를 수 있게 양쪽 끝을 어긋나게 깎습니다. (부랄자 양끝의 깎인 모양은 주전자 꼭지를 생각하면 쉽다) 자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아무 나무나 써도 좋지만 어미자로 내려칠 때 부랄자가 자주 갈라지기 때문에 재질이 약한 아카시아 나무는 좋지 않습니다. 부랄자는 갈라지거나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여분으로 두 서너 개 더 준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편을 가릅니다. 놀이 시작 전에 바닥에 부랄자 길이 보다 조금 크게 세로(「ㅣ」) 형태로 땅을 팝니다. 판 홈 주위에 직사각형으로 금을 칩니다. 한번 공격은 야구처럼 세 명까지 할 수 있습니다. 공격수는 먼저 바닥에 난 홈에 가로로 부랄자를 걸쳐 놓고 어미자로 수비가 있는 전방을 향해 힘껏 떠서(튕겨겨) 날려 보냅니다. 날아 오는 부랄자를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비수가 손으로 받으면 부랄자를 날린 사람은 죽습니다. 부랄자를 날리는 사람은 어미자로 최소 다섯자 이상을 날리지 못해도 자동으로 죽습니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복장을 한 여러 명의 어른들이 장화를 신고 우리집 안방으로 쳐 들어 왔습니다. 이들은 천정에 못을 박고 벽을 뚫고 하더니 무엇인가 설치를 하고는 사라 졌습니다. 그 날 이후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광창에 호롱불을 얹어 놓고 밤을 밝혔던 산골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이야 초를 아주 우습게 알아 하룻밤 촛불시위에 수만 개를 날려 버릴 정도가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고는 매일 밤 촛불을 켠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촛불은 호롱불에 비해 몇 배나 밝습니다. 이렇게 초도 귀하던 시절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왔으니 동네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 질 만했을 겁니다. 전기가 들어온 후 동네 부잣집에서 TV를 들여 놓았는데, 밤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TV를 봤습니다. 당시에는 밖에 바람이 불고 이슬비만 내려도 정전이 되었습니다. 1980년 중반에 와서야 기술이 좋아 졌는지 왠만한 태풍이 와도 전기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또 5촉짜리나 30촉 전구를 쓰는 집이 많았는데, 이 싸구려 전구가 툭하면 나가서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의 초가집도 걷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묵은 초가집을 걷어내면 지붕에서 뱀도 나오고 특히 굼벵이가 많이 나옵니다. 마당에 떨어진 굼벵이를 닭이 달려들어 신나게 쪼아 먹습니다. 어느 공무원의 아이디어인지 부근에 있는 하회마을은 초가집을 걷어 내지 않고 그냥 남겨 놓아, 오늘날 훌륭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동네에 대형 마이크가 들어오더니 매일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를 틀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밤낮없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길을 넓히고 수로를 만들고 상수도를 놓았습니다. 이렇게 단체 노동을 하는 것을 「부역」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점심도 지급되지 않는 완전한 무보수 강제 노역의 일종입니다. 부
저의 고향에는 아직도 머슴살이를 하는 노인이 있습니다. 지난 설 때 시골에 내려가서 이 노인이 길을 걸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저 노인이 살아 있다니...』 기억 속에 까맣게 잊고 있던 노인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그 노인이 처음 우리동네로 들어왔던 날을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에 이 노인은 제가 초등학교 4, 5학년일 때 우리 동네로 들어 왔습니다. 그때도 지금 살고 있는 주인 집의 머슴으로 왔습니다. 당시 노인의 나이가 50대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백발에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칠십대는 되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노인이 된 이 사람을 「00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장가를 간 젊은 청년들은 이 머슴 노인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머슴살이를 「남의 집 살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공장이 적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특별히 할 일이 없는 한 동네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땅은 제한되어 있고 사람은 많으니 항상 가난한 삶이 이어졌습니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천하 장정인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품을 팔러 다니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신혼 살림에 젖먹이 마누라에게 맡기고 1년 혹은 3년, 심지어 10년 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머슴이란 비록 계약에 의해 주인집의 농사를 지어주는 신분이지만, 머슴살이는 사실상 종 살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머슴들은 아무리 날이 추워도 수 십리 산 길을 헤매며 나무를 한 짐씩 해와야 했고(1970년초반까지만해도 땔감을 한 지게 얻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했다), 꼭두새벽에 마당을 쓸어야 했으며, 저녁에는 새끼를 꼬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머슴살이를 하면 부인은 아이를 혼자 키우며 온갖 험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일년 열 두 달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나면 품값으로 쌀을 몇 가마니를 받았다고 합니다.
호젓한 임도 따라 걷는 가벼운 산행 부목재-대학산-진지리고개-임도 답사 가는 겨울이 아쉬워 배웅을 가기로 했다.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산골짜기마다 겨울에 내린 눈이 상당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곧 녹아 버릴 잔설을 밟으러 조금 깊은 산을 찾아갔다. 깊기는 해도 쉽게 지난 겨울을 돌이켜 보면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을 찾아 나섰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과 화촌면, 횡성군 갑천면을 잇는 길고 꼬불 꼬불한 임도가 나있다. 산악 자전거꾼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산길이다. 산중턱으로 난 임도를 따라 3,4시간 봄속의 겨울을 찾아 나섰다. 나이가 들면 다리부터 늙는다고 하는데 겨우내 움츠렸던 기지개도 펴고 무담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산행이다. 홍천군 동면 노천리 부목재 마루턱에는 양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대학산(大學山, 876.4m)이고 왼쪽에 솟아 있는 산이 응봉산(鷹峰山, 868m)이다. 그런데 두산은 부목재를 사이에 두고 임도로 이어져 있다. 대학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444번 지방도와 물골 일대. 예방 조치로 산 7,8부 능선을 따라 뚫은 임도는 평소에는 차가 다닐 수 없게 차단기로 가로 막아 놓았다. 2년전에 작고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은 흥겨운 자리게 가면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라고 자랑을 한단다. 언제 어떻게 영국의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느냐고 되물으면 학교 구경을 하느라고 뒷문으로 들어 갔다가 앞문으로 나왔으니 옥스퍼드를 졸업한 것이 아니냐고 매 주위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정회장님의 농담처럼 홍천군내 임도를 따라 대학산에 오르다보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대학을 나오게 된다. 응봉산과 대학산 줄기를 잇는 부목재에서 응봉산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 대학산 기슭의 임도를 따라 나섰다. 부목재에서 임도를 따라 들어선 대학산 가는 길. 큰골 고갯길로 접어들어 능선을 따라 정상을 오르는 것이 수월하다
누에는 봄가을 두 번 칠 수가 있습니다. 누에치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반해 큰 돈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봄가을 돈 가뭄이 심할 때 약간의 목돈을 만질 수 있고, 이 돈으로 공납금 등을 내곤 합니다. 누에치기는 한 달이 조금 더 걸립니다. 누에치는 시기가 봄가을 농사철과 겹치기 때문에 누에를 치 치는 집은 이 한 달 동안 그야말로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낮에는 들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별빛을 보며 뽕을 따 놓아야 다음날 누에 밥을 줄 수 있습니다. 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집은 누에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부모들이 들 일을 하는 동안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들이 뽕을 따는 것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에를 치다가 뽕이 모자라면 다른 동네까지 가서 뽕잎을 따오기도 합니다. 봄 누에는 주로 뽕나무 밑동 채 베어서 누에 밥을 주고 가을 누에는 잎을 따서 줍니다. 봄에 베어도 금새 가지가 자라기 때문에 가을에도 뽕을 딸 수 가 있습니다. 젖은 뽕잎을 주면 누에가 병이 나기 때문에 비오는 날 뽕을 따면 방에 흩어서 뽕잎을 말려야 합니다. 봄에 뽕나무에는 「오디」라는 열매가 달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뽕나무에서 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산딸기도 같이 열리기 때문에 빈 도시락 통을 들고 오디나 산딸기를 따러 다니곤 했습니다. 오디는 익기 시작하면 하루 이틀 만에 땅에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따먹어야 합니다. 오디를 많이 따 먹으면 손과 입술 주변이 온통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몇일 동안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보통 친구들과 같이 가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입에 허겁지겁 집어 넣기 때문에 입 주위에 오디 물이 잔뜩 뭍게 됩니다. 오디에는 각종 곤충이 많이 붙어 있는데 급하게 먹다가 벌레를 같이 씹는 경우도 흔합니다. 뽕나무에는 야생 누에도 삽니다. 이 야생 누에를 「새누에」라고 하는데 털도 없는 누에가 가을에 싸늘한 찬 바람을 맞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 신기할 뿐입니다. 이 야생 누에는 고치를 지을 때까지 뽕잎
요즘 전철을 타면 젊은이들에게 고함을 쳐서 자리를 빼앗는 노인들을 많이 봅니다. 한번은 노인과 20대 젊은이가 서로 쌍말을 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경로석에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노인은 젊은이가 일부러 졸고 있으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노인의 호통에 놀란 그 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했는데도 그 노인은 계속해서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며 나무라는 것입니다. 옆에 서 있던 이 젊은이도 노인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말대꾸를 시작했고 급기야 쌍말이 서로 오갔습니다. 참으로 눈뜨고 못 볼 장면이었습니다. 노인과 싸운 젊은이도 잘못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노인의 잘못이 더 컸습니다. 다행이 우리나라가 경로사상이 발달하여 자리양보가 외국인이 부러워 하는 아름다운 풍속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노인들에게 대중교통의 남의 좌석을 뺏을 권리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안동의 시내 버스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버스 노선은 안동 각 지역의 시골로 이어집니다. 승객은 주로 「학생」아니면 「노인」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학생들의 하교시간과 뒤섞여 복잡한 시내버스를 수백 번도 더 타 보았지만 학생들의 자리를 호통쳐서 빼앗는 노인들은 한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시골버스를 타면서 노인들에게 수도 없이 자리를 양보 해 보았습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들은 대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하다가 자리에 앉습니다. 그래도 미안했던지 제가 든 책가방이라도 건네 달라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 받은 노인 중에는 헛기침 한번 하면서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고는 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 그냥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 보는 것으로 고맙다는 것을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또 1990년부터 대구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대구에 있을 때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자리에 앉은 사람들
한나라당 元喜龍(원희룡) 의원은 지난 2월 대통령의 자의적인 特別赦免을 제한하기 위해 赦免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元의원은 17일 盧武鉉 대통령의 한총련 관련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는 『盧武鉉 대통령의 한총련 이적성 재검토 발언은 입법, 사법, 행정의 분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유지하는 3권 분립의 기본 근간을 무너뜨리는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말했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한총련에 대해 이적성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은 변호사 출신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고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한총련과 관련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거나 현재 수배중인 자들에 대해 「특사」, 「수배해제」를 검토하는 것은 자칫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의 존립 가치를 없애는 상당히 권위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말씀은 시대 변화에 따라 대학생 조직인 한총령의 이적성을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善意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 봅니다. 본래 特赦(특사)란 법원으로부터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해 형의 집행을 면제해주거나 유죄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조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수배자를 特赦(특사)한다는 것은 법률적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한총련 수배자 등에 대해 特赦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수배자에 대해 수배해제를 검토하거나 수사 중단 또는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盧武鉉 대통령과 청와대측의 (한총련 이적성 재검토) 생각은 문제가 있는 대목입니다. 한총련은 이미 사법부의 판단을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재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총련의 이적성 문제는 재판을 통해 사법부의 재평가를 받거나, 국가보안법 개정 등 입법부를 통한 개정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좋
전남 나주시에서 함평으로 가는 23번 국도변에 있는 LG정유 오량동 농민주유소에는 '살인 만행 무죄판결, 미국인에 일체의 서비스를 거부'와 'NO AMERICANS'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옹졸한 생각인지 몰라도 , 여중생 사망 사고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그렇게 속을 뒤틀리게 했다면 미국 칼텍스(Caltex)사와 합작회사인 LG정유의 기름을 팔지 않겠다며 주유소 문을 닫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된 데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 이상(2002년 327억 8000만 달러)을 차지하는 최대 수출 시장인 미국과의 경제 교류가 큰 몫을 차지한다. 또한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안팎으로 자유민주 체제를 굳건히 다져 가며 오늘날까지 우리 국토를 지켜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판국에 '미군 철수'를 외치는 것은 우리 눈앞에 닥친 국제 정세로 보아 국익에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아직 국민 소득 1만 달러가 못되는 나라,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나라다. 무엇이 그리 자신 만만해서 연일 반미를 부르짖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벌어진 한 퍼포먼스는 이들의 판단이 얼마나 어설픈지를 잘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가 일류 국가가 되기는 커녕 이런 젊은이들에게 휘들리고 있다가는 언젠가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는 이런 젊은이들을 길러내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문제다.
주한 미군 팩트북 2003 -주한미군의 전력 현재의 주한미군 병력을 살펴보면, 3만6000명의 미군과 3500여명의 미군 군속, 그리고 1만3,000여명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4,500여명의 카투사와 1만5,000여명의 한국인 직원들 주한미군에서 복무하거나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한미군의 구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육군이 2만7,000명(장교 3400명), 공군이 8500명(장교930명), 해군, 해병대 500여명(100여명)기타 100여명이 됩니다. 육군병력은 미8군 예하의 1개 전투 보병사단 (미2사단), 1개의 항공여단(17항공여단), 1기의 기갑여단(6기갑여단) 그리고 기타지원 부대들 (19전구 지원사령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2사단의 전투력을 살펴보면 현재 전시 수준의 병력인 1만4000명을 유지하면서 2개 보병여단, 1개 포병여단, 1개 공병여단, 1개의 항공여단, 1개의 전투 공병여단 그리고 전투지원여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미2사단은 1917년 창설된 일명 인디안헤드 사단으로 불리우며 1차세계대전과 한국전에서 참전한 부대입니다. (부대마크도 별문양 안에 인디언 머리가 새겨져있습니다) 미2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은 에이브라함 전차, MLRS다연장포, 155m 곡사포인 Paladin, 아파치헬기 등의 최정예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17항공 여단은 주로 UH-60블랙호크헬기와 C-12수송기, CH-4누크 헬기가 주종을 이루어 주로 지원 임무를 맡고 있으며 6기갑여단은 아파치 헬기 2개 대대와 패트리어트(Patriot) 미사일 1개 대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외에 전투지원업무를 맡고 있는 19전구 지원 사령부는 대구, 부산, 평택에 위치하여 주로 군수지원을 맡고 있습니다. 한편 공군은 오산에 美7공군 사령부가 있으며 오산 (51전투 비행단)과 군산 (8 전투비행단)에 각각 1개 비행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기 기종으로는 F-16과 A-10기를 보유하고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가 이번 주말쯤 미국으로 다시 떠난답니다. 李 전 총재는 미국 비자 연장을 이유로 내세우며 지난 주 일시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한나라당 차기 대표선출 등 전당대회와 맞물려 있으면서 온갖 억측을 낳고 있습니다. 『누가 옥인동(李 전 총재 자택)에 찾아갔다더라, 「사인」을 받았다더라』 등이 그런 예에 속합니다. 물론 근거 없는 루머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여러 「소문」들 중에서 핵심은 바로 「이회창 복귀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선에서 두 번 연패하고 정계를 은퇴한 李會昌씨가 정말 정계에 복귀할 것인가라는 것이 최대 관심사입니다. 물론 李 전 총재측도 한나라당 관계자들도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복귀 즉시 한나라당 사람들은 다 죽는다』라는 것이 당의 현재 분위기입니다. 李 전 총재를 모셔왔던 유승민(劉承旼) 전(前)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도 『총재는 이제 정치에 관심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이회창 복귀설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 李 총재께서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주말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복귀설과 맞물려 李會昌 측근이었던 유 소장도 4ㆍ24 보궐선거 출마설이 나돌고 있습니다. 유 소장은 『이 총재를 만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당에 공천신청을 했다는 보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출마에 뜻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신청을 하면 되지 왜 비공식적으로 합니까? 저는 요즘 춘천에 있는 한 지방대학에 강의 나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삼일 정도 됩니다. 이렇게 바쁜데 무슨 정치를 할 수 있겠어요』라며 출마설을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 內 일각에서는 이회창 복귀를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고 합니다. 李會昌 측근들이 만들었다는 「三起會(세 번 일으키는 모임)」가 그렇답니다. 아무튼 현재의 상황으로는 「아니다」가 정답입니다.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