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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尾島 등대를 먼저 점령, 10만 병력과 함정 261척을 인천으로 인도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6人의 특공대 1950년 9월15일, 한국전쟁 승리의 轉機(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戰史(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상륙작전도 지름 2m, 높이 7.9m의 등대 불빛 하나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50년 8월 말, 인민군은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민군을 한꺼번에 포위ㆍ격멸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敵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하고, 작전명 「블루 하트(Blue Heart)」를 실행에 옮긴다. 맥아더의 美 극동군 사령부는 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민군 수중에 있던 八尾島(팔미도) 등대를 탈환, 點燈(점등)해야만 했다. 인천지역은 潮水(조수), 水路(수로), 暗礁(암초) 등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등대의 안내 없이는 야간 상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팔미도는 상륙작전에 나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유엔군 함정 261척이 통과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沙洲(사주)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八(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 같아 八尾島(팔미도)라 불리는 이 섬은 인천항에서 13.5km 남쪽에 떠 있으며, 면적은 0.076k㎡, 섬의 최고점은 58m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특공대를 조직해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서기로 했다. 이 작전에는 KLO부대(Korea Liaison Officeㆍ美 극동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가 투입됐다. KLO부대는 1948년 미국이 對北 정보수집 등을 목표로 만든 특수부대로 통상 「켈로부대」라 불렸다. 켈로부대는 고트, 선, 위스키 등
저는 경주 이씨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외갓집에 있는 청주 한씨 족보를 보면 됩니다. 외할머니가 어디서 왔는지도 족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계는 부계를 중심으로 수백년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계가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족보를 따라가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몇년 전 경북 안동에서 수백년 전의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미이라와 함께 그 미이라의 부인이 쓴 한글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 제작진은 무덤의 주인뿐 아니라 그 부인의 신분까지 찾아냈고, 심지어 그 부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까지 찾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족보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 얼마 전에는 경기도 파주에서 400여 년 전에 아기를 낳다가 숨진 여인의 미이라가 발견됐습니다. 학자들은 이 여자가 문정왕후의 종손녀라고 발표했습니다. 파평 윤씨 일가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의 신분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트남 왕자가 고려 망명하여 화산 이씨 시조가 되었습니다.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이 베트남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족보와 성씨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성동본에 속하기만하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이름 석자만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삼촌 뻘인지 형제 뻘인지 조카뻘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가면 어떤 하나의 성씨가 많이 몰려 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집안의 족보를 몇 장만 넘겨보면 몇 대 조상 누구가 언제 어디에서 살다 그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족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족보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가계 기록 시스템입니다. 미국인들은 부계성을 따릅니다. 여자는 시집가는 동시에 성이 사라지고 남편의 성씨를 따릅니다. 저는 일년 가까이 미국에 머무르면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
휴가를 내어 시골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우중충 하던 날씨가 개이고 모처럼 무더위 속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비록 이 삼일 정도의 무더위였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습니다. 한국의 무더위는 원래 유명합니다. 더위가 절정에 이르면 열흘에서 보름 간 열대야가 이어지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에 비한다면 금년은 그야말로 여름 같지 않게 지나갔습니다. 7월 한 달과 8월 들어서도 계속 비가 왔기 때문에 무더위를 느낄 사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93년경 여름에 냉해가 찾아와 농작물에 피해를 준 이래 가장 덮지 않은 여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비가 전국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에만 비가 몰아쳐 내립니다. 특히 올해 경우, 같은 서울인데도 강남은 비가 오고 강북은 비가 오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 했습니다. 작년에도 장마철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더니 장마가 끝나자마자 호우가 내려 강원도 일대와 경북 김천 등지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재작년에는 임진강 유역이 물에 잠겼고, 그 전전해는 지리산 유역, 또 몇 년 전에는 경북 상주시가 물에 폭삭 잠기기도 했습니다. 1995년경에는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의 수많은 군막사가 산사태에 매몰돼 많은 군인들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최근 이런 물난리는 예전의 태풍이나 장마철 때 생긴 물난리와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당연히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습니다. 예전에 물난리만 났다하면 『남미 어디 앞바다에 기온이 예전 같지 않아 발생하는 「엘리뇨 현상」때문』이라고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 날이면 친구들 사이에 『또 엘리뇨 핑계 되면 되겠네』하는 농담을 자주 했었습니다. 휴가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 모든 방송 뉴스가 서울 지방에 비가 많이 내렸다는 것을 톱뉴스로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7월과 8월 내내 남부지
서울의 경복궁, 경운궁(덕수궁), 창덕궁의 정문 등지에서 매일 수문장 교대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더운 날 임무에 열중하는 군인 아저씨나, 이런 아이디어를 낸 서울市와 기타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힘 빠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한마디로 아무 감흥없는 교대식입니다. 경운궁의 수문장 교대식의 경우, 교대 시간이 되면 스무 명 남짓의 군졸과 이를 이끌고 있는 무관이 북소리를 울리며 등장합니다. 그 다음 이들은 대형 북소리에 따라 서로 암호를 확인하고 궁궐의 열쇠를 인수하는 등 교대 의식을 진행합니다. 교대를 하는 군졸의 행동은 마치 요즘 군인들의 制式(제식) 훈련을 보듯이 절도가 넘칩니다. 조선시대 복장에 현대 군인들의 제식 동작을 섞어 놓으니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어색합니다. 군졸이 든 무기와 복장도 민망할 정도로 초라합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끝에 은박지를 두른 곤봉 막대기와 칼날이 몽땅해서 전혀 위엄이 없는 가짜 청룡도 몇 자루, 守將(수장)이라는 글자가 적힌 대형 깃발 두어 개가 전부입니다. 이런 조잡한 무기로 왕궁을 어떻게 지켰을 지 의문이 듭니다. 군졸이 신고 있는 고무 장화는 낡아서 뒤축이 접히고 기울여져 발에서 벗겨질 듯 위태하고, 걸을 때 질질 끌립니다. 무관 복장을 한 사람은 활과 칼을 가지고 있으나 칼을 등뒤에 둘러매고 교대식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무관은 칼을 겨드랑이 아래 부분에 찼습니다. 교대의식 자체도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너무 작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냄새가 납니다. 어차피 고증이 어렵고, 관광객에게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면 차라리 멋있는 갑옷을 입고, 위엄 있는 무기를 든 군졸들을 늘여 세워 놓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경운궁에서 만큼이라도 舊한국의 신식군대 제복과 무기를 갖춘 군사를 함께 배치하여 이 궁궐이 가진 역사성도 살리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경운궁은 舊한국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
아래 독자 편지는 제가 아래에 쓴 '물귀신을 보다'란 글을 읽고 어느 독자분이 재미있는 이메일을 보내와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글을 약간 편집해서 올립니다.^^; --------------------아래---------------------- 안녕하십니까? 월간조선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 63년생의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상흔 기자 기자클럽에 있는 '물귀신을 보다'란 이야기 중 닭이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내용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일반 닭은 힘들고, 닭중에 비둘닭은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얘기를 스승님으로 부터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뿐만 아니라 개도 병들어 죽지 않고 오래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네요! 나아가, 사람도 積惡(적악)을 엄청하면 늙어서 구렁이로 변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하시더군요. 내친 김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 마디 더 하자면, 여우가 200년 이상 묵으면 둔갑하여 장난친다는데 계룡산에 한 마리가 있다네요. 이런 여우가 죽어서 환도인생하면 여자로 태어나서, 나라를 혼탁하게 만드는데 조선시대 정난정,김개시 등이 여우의 후신이라는군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비둘닭이 구렁이가 되고 그 구렁이가 수백년에서 천년이상 살면 어떻게 될까요? 500년 이상 살면 이무기라 부를 수 있겠지요. 이무기 자체로도 변화막측하다고 합니다.폭우를 내리게하는가 하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작은 못은 순식간에 용암탕의 온도로 올려버린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인간에 대한 殺氣(살기)를 키우며 수도하는 것이랍니다.최종에는 인간으로 짠~ 하고 태어나는데 스탈린- 메기1000년, 김일성, 후세인, 김정일,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이상 구렁이 800~1000년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흉물들은 환경만 마련되면, 인간 죽이는데 전력투구하며 자신은 최고의 호사를 추구하게 되는데 다행이 人衆勝天(인중승천)이라 전.노.김 같은 흉물이 큰 힘(?)을 발휘
요도號(일본항공) 납치사건 秘錄 공개 - 공군 관제사 채희석씨 『평양으로 날던 요도號를 북한 상공에서 金浦로 빼돌렸다』 赤軍派가 납치한 요도號(일본항공)를 金浦공항으로 「납치」한 공군 관제사 蔡錫씨, 33년 만의 秘錄 공개 ●『중앙정보부장이란 사람이 전화로 김포유인 지시』 ●『조종사에게 평양공항이라고 속였다. 조종사는 지시를 잘 따랐다』 ●『해주 상공 지날 때 북한軍이 고사포 발사』 ● 金浦에서 승객 전원 풀려나다 ● 金浦 착륙 유도 지시자는 아직 不明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납치당한 요도號를 한국이 다시 납치」 이상이 인천공항이 2002년 발간한 「세계 항공 보안 사건 사례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요도號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기장은 범인들을 속이고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다」는 대목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요도號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이 지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조차도 「왜 평양으로 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김포에 내리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30일, 기자는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요도號 사건」 당시 자신이 요도號를 관제해 김포공항에 내리게 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관제사를 만났다. 蔡凞錫(채희석ㆍ63) 前 공군 제7항로보안단 소속 관제사. 蔡씨는 33년이 지난 당시의 일들에 대해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항공관제사로서 관제범위인 40마일 반경을 넘어선 구역에 들어가 요도號를 관제한 것은 분명한 越權(월권)이고 항공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마치 의사가 자기 전공분야가 아닌 환자를 받아 수술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왜냐하면 조종사에게 해당지역의 정확한 기상정보와 고도, 활주로 정보를 줄 수
1972년 吳源哲 경제수석이 작성, 보고한 核무기 개발의 마스터 플랜; 『1980년대 초, 高純度 플루토늄彈을 완성한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플루토늄彈을 건의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 아래 진행된 한국 정부의 核무기 개발 계획이 최근 문서로 확인됐다. 이 核개발 비밀문서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1972년 9월8일 吳源哲(오원철ㆍ74) 당시 대통령 제2 경제수석(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담당)이 朴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비밀 보고서는 그간 공공연한 비밀로만 알려져 온 朴대통령의 核개발 계획이 우리 국내 문서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史料的(사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지를 포함, A4용지 아홉 장 분량인 「보고번호 제48호」의 이 보고서는 「2급 비밀」로 분류돼 있으며, 보고서의 제목은 「원자 核연료 개발 계획」이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는 비서실장과 대통령의 결재란, 보고관인 吳源哲 수석의 이름, 그리고 職印(직인) 등이 찍혀 있고, 「원자 核연료 사업 계획을 별첨과 같이 작성」, 「별첨 계획의 결론에 의거, 원자핵 연료 사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보고서의 전체적인 서술은 ▲核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核무기의 비교(도표) ▲高純度(고순도) 플루토늄 생산과정(그림) ▲우리나라의 核물질 보유를 위한 개발 방향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 방안 비교(도표) ▲결론 ▲高純度 플루토늄 생산을 위하여 개발하여야 할 核연료 사이클(그림) 순으로 돼 있다. 첫 페이지의 제목 「원자 핵원료 개발 계획」과는 달리, 두 번째 장부터는 「核무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 보고서의 둘째 장부터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核무기의 종류로 「核분열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우라늄 235폭탄, 플루토늄 239폭탄)과 「核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수소폭탄)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하는 문제를
우리 아버지는 옛날 분 치고는 그래도 상당히 합리적인 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지내시면서 꼭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뒤에 이러는 게 뭔 소용있나...귀신이 어데 있다고... 죽으면 그만이지』 물론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실 겁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귀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귀신중에 꼭 한가지는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십니다. 바로 물귀신입니다. 하루는 저는 물귀신이 없다고 하고 아버지는 있다고 하다가 상황이 험악해 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도 물귀신이 있다고 우기시기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아부지, 진짜로 물귀신 보셨니껴?』(경북 북부지방은 의문형이 「껴」로 끝납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시더니, 거의 밥상을 내리칠 태세로, 『이놈의 자식이, 저(자기) 아바이(아버지)가 있다카만 있는 기지... 천하에 못된 놈 같으니라고』 아버지가 물귀신 때문에 그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믿는 또 하나 비 과학적인 것이 있습니다. 닭이 10년 묵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귀신은 제가 양보할 수 있어도, 이 닭이 구렁이 된다는 것은 저도 도저히 승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께서 물귀신은 직접 보셨다했지만, 닭이 구렁이가 되는 것은 직접 보시지는 못한 듯 합니다. 아버지는 『왜정 때 닭이 구렁이 되는 것을 너 할배도 봤고 동네 노인도 여럿봤다』는 것을 자꾸 강조합니다. 아버지가 동네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10년을 묵은 닭은 구렁이가 되기위해 목을 땅속에 파묻고 버둥댄다는 것입니다. 그때 동네 노인 하나가 닭을 쑥 잡아 빼니 벌써 목과 머리는 뱀이 되었고 몸통은 아직 닭인 채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도 승복을 하지 않고 꼬치꼬치 따져들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어째 자(저 아이)는 저 아바이 말을 저래
「돌팔매 싸움」이라 불리는 「투석전」은 우리 민속놀이 중에 하나 였습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행해 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 등에도 투석전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고, 구한말 외국 선교사나 여행가들이 한국 풍습을 기록한 책에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투석전 중에 다치는 것은 예사이고 이중에 몇 명은 실제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투석전을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예사로 하고 자랐습니다. 제가 자란 시골 동네는 행정구역이 안동(풍천)과 예천으로 나누어 지는 곳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두어 채의 집은 행정 구역상 안동군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을에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을 「건넛마을」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은 우리가 건넛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 이름도 우리 마을과 같은 이름을 씁니다. 건넛마을 친구들은 우리를 보고 건넛마을이라고 부릅니다. 행정구역이 다르다 보니 두 동네 아이들은 다른 학교에 다녔고, 어려서부터 서로 얼굴 볼 일이 없이 자랐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마을아이들과 건넛마을 아이들이 싸워 왔는지 그 내력은 자세히 모르나 그 역사는 꽤 깊어 보입니다. 우리 또래 아이들을 비롯, 그 위에 형들, 그 위에 삼촌들도 마찬가지로 싸우면서 자랐습니다. 건넛마을과 우리마을 사이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산은 두 동네 아이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DMZ같은 마을 경계선이었습니다. 어느 동네 아이들이건 이 야산에서 놀기를 결정한 날은 상대편 아이들을 충분히 자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산에서 아이들이 놀게 되면 그 시끄러운 소리가 양 동네에 울려 퍼집니다. 만약 건넛마을 아이들이 먼저 이 야산을 차지하고 놀게 되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곳은 서로 자기 동네 놀이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편 동네 아이들이 노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어느 한편이 힘이 없
정치와 돈. 동전 양면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상가분양 사기사건에서 비롯된 「굿모닝게이트」가 정치권을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것도 바로 「돈」 때문입니다. 현재 굿모닝시티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정치인은 민주당 鄭大哲(정대철) 대표와 일부 의원들뿐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대가성이 없는 합법적인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혹이 날로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굿모닝시티 계약자 협의회」측은 돈을 받았다는 40여명의 정치인ㆍ검찰ㆍ경찰ㆍ언론인ㆍ연예인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청와대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盧武鉉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與野 모두 대선자금을 공개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정치와 돈」의 적나라한 실상은 선거철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민주당측은 지난 大選에서 「희망돼지」를 분양했습니다. 선거 직후 盧武鉉 당선자는 물론 민주당은 『깨끗한 돈을 모아, 깨끗한 선거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돼지저금통으로 들어온 돈은 당초 70여 억원이라던 것이 4억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수 사무총장이 기업으로부터 수십 억원을 받았다고 공개했지만 말을 여러 번 바꿔, 듣는 사람조차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과연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지난 대선 당시 돈줄은 한나라당에 더 많이 몰렸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입니다. 한나라당은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대선잔금이 더 문제일 것 같습니다. 大選 직후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런 소문이 나 돌았습니다. 한 관계자의 말입니다. 『大選(12월19일) 전 날까지 돈이 각 지구당에 전달된 것으로 안다. 大選 직전 중앙당은 전국 각 시도지부에 돈을 「현금」으로 전달하되, 대면접촉 방식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쪽(중앙당) 관계자가 차에 현금을 싣고 A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에서 시도지부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사항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지방에서는 그
저는 미국 독립기념일이 들어있던 지난 6월30일부터 7월5일까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다녀왔습니다. 국제라이온스 세계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가뜩이나 절간 같은 도시에 독립기념일이 찾아오니까 더 심심하더군요. 올해는 미국 경기도 별로 안좋은지 불꽃놀이(fire works of display)도 안하더군요. 덴버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달리면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나옵니다. 이곳에는 미 공군사관학교(Air Force Academy)가 있습니다. 1954년도에 설립된 사관학교로 미국의 하늘을 책임질 공군 사관생도를 양성하는 곳이죠. academy drive를 거쳐 공군박물관, 공사의 대표적 건물인 뾰족 첨탑의 커댓채플(Cadet Chapel)을 둘러보게 된다니 기분이 설레더군요. 그러나 제가 탄 전세버스는 이곳을 멀찌감치서 바라보고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독립기념일 전날(7월3일)로서, 미국이 테러에 대비해 댐이나 군사시설, 주요 국가기관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워싱턴과 함께 미국전역에 세개뿐인 조폐국이 있는 덴버의 미합중국조폐국(U.S. Mint)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가까운 후버댐도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없답니다. 함께 한 일행 중 비교적 미국정보에 정통한(?) 사람이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서 격납고에 넣어둔 점보기 3대가 아랍 테러범들에게 탈취됐다고요. 미국 정부는 이들 테러범들이 이 여객기로 독립기념일을 전후로 테러를 가하려는 것을 감청했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대서양만 직선으로 건너면 바로 워싱턴, 뉴욕 아닙니까. 미국 언론에도 그런 보도가 있었다고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럴싸한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올 때도 유나이티드항공을 타고 왔는데, 혹시 아랍사람들이 이 비행기도 테러하는 게 아니냐고 해서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독자여러분께 싱거운 이야기 한마디 해보았습니다.*
『월간조선이죠? 납북자 가족인데 아버지 이름이 있는지 확인 좀 하고 싶습니다』 7월15일 오전부터 月刊朝鮮의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고 있습니다. 월간조선이 출간한 「피살자ㆍ피랍치자 명부」 관련 기사가 나간 후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들 때문이었습니다. 16일부터는 수십 명의 납북ㆍ피살자 가족들이 월간조선 사무실을 직접 찾아 슬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기자는 그들 중 한 분을 만나 자세한 사연을 들었습니다. 올해 67세인 나왕식(羅汪植)씨. 사무실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기자에게 『월간조선에서 피살자 명부가 나왔다는 데 어디로 가야됩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기자는 나씨를 월간조선 출판부로 안내했습니다. 기자는 나씨로부터 눈물 겨운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순간 기자는 피가 꺼꾸로 솟아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얘기는 대충 이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ㆍ25 때 북의 괴뢰군에 의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였던 1950년 7월경 경기도 화성을 점령했던 괴로군은 우리 동네 마을 사람들 중에 이승만을 지지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 우익청년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괴뢰군은 저의 아버지의 경력을 알고 곧바로 잡아갔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를 포함해 일부 마을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분류한 후 동네 인근에 있는 지하 방공호에 모조리 잡아다 쳐 넣었습니다. 괴로군은 이들 「반동분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 고문과 구타 등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도 괴로군에 의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괴로군들의 몽둥이에 맞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씨의 사연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씨 가족은 「몽둥이에 맞아 죽은」 부친의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1950년 7
간첩 잡기 위해 「녹슨 칼」 새로 가는 국정원 高泳耉(고영구) 체제의 국가정보원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高泳耉-徐東晩(기조실장) 체제 출범 당시 제기됐던 親北ㆍ思想的 편향성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겁니다(월간조선 6월호는 이 문제에 대한 추적기사를 통해 우려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高원장은 취임 이후 대대적 내부감사를 실시하는 등 집안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직원을 대상으로 국정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간첩 잡는 데 적극 나서라』고 독려했다고 합니다. 국정원 관계자의 말입니다. 『高泳耉 원장이 요즘 상당히 독이 올라 있습니다. 그는 결코 진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하다가 그런 쪽에 발을 들여 놨는 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모습은 완전히 오른 쪽입니다. 그가 국정원장으로 있는 이상 그 자리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요즘 국정원 수사국 소속 직원들은 「일 할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 쪽 일이 간첩 잡는 것 아닙니까. 林東源(임동원), 辛建(신건) 체제에서는 위축돼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高泳耉 원장에 대해 좋게 말하면 조직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쉽게 색깔을 바꾸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옳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국회 정보위 소속 한 의원도 高泳耉 원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사람 요즘 완전히 극우가 된 것 같아요. 「국정원에 들어가 보니 (북한 및 남북관계의) 실상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허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더군요. 국정원이라는 곳이 그런 곳인가 봅니다. 청와대나 다른 부처에 있는 책임자들도 국정원에서 근무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高泳耉 원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KAL機 폭파 사건이 한국정부의 음모에서 비롯됐다」는 내용의 책을 쓴 著者에 대해서도 『利敵性(이적성)을 검토, 필요하다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北은 지난 90년 초반 무렵 초기 수준의 핵폭탄 3~4개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최근
6월28일 토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어느 한정식집. 남경필, 원희룡, 이성헌, 권오을, 김성식, 정태근, 고진화, 박종윤, 권영진 그리고 김부겸, 김영춘 등 한나라당 미래연대 소속 회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탈당파들은 탈당이유를, 대부분의 잔류 회원들은 마지막 설득 작업을 했다.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술이 밥을 대신했다. 소주, 맥주 그리고 백세주. 술 병이 그들의 식탁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우리는 맹세하지 않았나? 미래연대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데 왜 나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에는 희망이 없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나간다』 -희망이 뭔가. 『지금 한국정치는 지역정치에 묶여 있다.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정치를 하고 싶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한나라당도 이제 새 지도부가 탄생했으니 두고 보자. 그리고 개혁을 위해 여기서 같이 일을 더 해보자. 만약 그것이 안되면 내년 총선 이후에 같이 나가자. 지금 나가고자 하는 것은 盧武鉉 정권 이후 나타난 새로운 「권력」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 아닌가. 결국 盧武鉉 정권과 같이 하겠다는 것 뿐이다. 『위험도 있다. 내년 총선에서 떨어질 각오도 돼 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한나라당도 개혁노선을 걷고자 하고 있다. 초기 같이 맹세했던 우리의 다짐을 위해 같이 노력하자. 『...』 이들은 식탁 위에 놓여진 술 잔을 하나 둘 비웠다. 일부 회원은 취기가 올랐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허탈감,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이대로 탈당하면 우리는 무슨 명분으로 내년에 출마를 하겠는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안된다면 내년 총선 이후 같이 떠나자』 김성식 서울 관악갑지구당 위원장은 눈물로 호소했다. 탈당을 결심한 김부겸 의원은
1990년, 盧泰愚 정부 시절 인신매매가 번지고, 무역수지는 적자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조폭과의 전쟁을 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캠페인도 일어 났습니다. 내각은 경제를 살릴 방편을 의논한다며 연일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내 놓은 결론이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글날과 국군의 날은 다음해인 1991년부터 국정 공휴일에서 제외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글날 만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그 부당성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글날은 잊혀진 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책 결정자들은 국경일을 포함, 한글날을 단순히 하루 「노는 날」로 인식했던 모양입니다. 한글날은 1970년 공휴일로 지정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현실은 「노는 날」을 걱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리죽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달러 한푼 벌기 위해 우리의 누님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서 내다 팔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배고픈 시절에도 조상들은 다 깊은 뜻이 있어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놓고 특별하게 기념을 했던 것입니다.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은 많은 석학들이 이미 충분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한글은 문자역사상 만든 날짜와 만든 사람, 만든 목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제자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일점 일획도 소리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아 인류가 만든 문자 중 경제성 면에서 단연 앞선 문자입니다. 한글은 소리 생성원리만 잘 연구하면 앞으로도 수많은 소리를 더 만들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한글은 天地人의 조화를 표현하여 문자에 철학을 담고 있는 유일의 문자입니다. 공기가 소중함을 잘 모르듯이 우리는 한글이 없이 단 하루도 우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화의 강국 대열에 든 것도 한글이란 훌륭한
요사이 시골에 가면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논둑 길을 걷노라면 사라 졌던 메뚜기, 개구리가 눈에 제법 많이 보입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사라진 솔개, 독수리, 부엉이, 소쩍새 같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었던 날짐승들은 좀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메뚜기와 잠자리 같은 곤충이 많아지면 개구리나 들쥐가 많아지고, 다시 개구리나 들쥐를 잡아 먹는 뱀이나 족제비들이 증가합니다. 뱀, 들쥐, 족제비가 늘어나면 부엉이, 소쩍새, 독수리가 나와야 자연의 이치에 맞는데 유독 이들 날짐승만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메뚜기와 개구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어릴 때 나지막한 야산이나 논둑 길을 걸으면 메뚜기 떼가 좌우로 파도 치듯이 날아 다녔습니다. 풀무치는 「푸르르」하고 날았기 때문에 「푸랭이」, 방아깨비 수놈은 「때때때」하고 날았기 때문에 「때때미」, 눈이 없고 맛없게 생긴 놈은 「문둥이 메뚜기」라고 불렀습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도랑이 있는 둑길을 걸어 갈 때 미쳐 방향을 잡지 못한 개구리들이 발 뒤축에 와서 부딪히곤 했습니다. 흰색계통 개구리는 백개구리, 청색계통 개구리는 청개구리, 손바닥 만큼 커서 두 손으로 잡을 만큼 힘이 센 개구리는 떡개구리, 풀잎이나 나무에 착 달라 붙는 개구리는 철봉개구리(흔히 청개구리라고 하는 이놈은 먹으면 큰 일 남), 연못에 살면서 등이 우둘투둘 징그러운 놈은 오똘(옻)개구리, 배때기가 알록달록 한 놈은 무당개구리라고 불렀습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대 놓은 논은 올챙이로 논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메뚜기 개구리가 많으니 그 위에 포식자들은 먹이 걱정을 하지 않고 번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많던 메뚜기와 개구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980년 중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농약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논 저 논
特檢이 未完의 수사로 끝났습니다. 對北송금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밝히되 사법처리는 최소한으로 하겠다던 特檢의 다짐이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물거품이 돼 버렸습니다. 宋斗煥 特檢도 아쉬움을 피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特檢은 아쉬움이 많은 수사였습니다. 特檢은 1억 달러가 頂上회담 대가로, 4억 달러는 경협자금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4억 달러가 국정원을 통해 비밀리에 전달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朴智元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150억원은 또 뭡니까? 그리고 궁금한 게 또 하나 있습니다. 特檢은 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경호 上의 이유」였다고 밝혔습니다. 特檢이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전적으로 林東源 前 국정원장의 진술에만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난 달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2000년 6월 남북 頂上회담 당시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우리측 선발대로 평양에 먼저 가 있던 한 고위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인사는 頂上회담 전체의 일정은 물론 대통령의 움직임까지 자세히 알아야 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사는 회담이 연기된다는 사실을 발표 전까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6월12일부터 회담이 시작될 거라 알고 있던 이 인사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평양 현지에서, 발표에 의해 알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의 안전과 경호를 위해 목숨까지 받쳐야 하는 사람으로서 회담이 갑자기 연기된다는 것을 통보 받고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회담이 하루 연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회담일정이 6월12일에서 14일 2박3일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기된다는 사실을 6월11일 발표를 전후해서야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 인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林東源 당시 국정원장이 일정 조정을 협의하기 위해 2000년 6월3~4일 양일간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했고 북측 고위층와 이를 협의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林東源 원장
『2002년 12월 19일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그 길었든 시간들 속에 일장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마침표가 또 다른 시작이 될 거라 믿었든 저희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12월 20일 한나라당 제 16대 대통령후보 이회창님은 눈물로서 정계은퇴 선언을 하셨습니다. 항상 무언가의 끝에서면 길었다고 생각했든 기간들이 왜 그리도 짧게 느껴지는지 또 아쉬움은 왜 그리도 많은 지요』(「내 마음 속의 대통령」서문 일부)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李會昌 前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네티즌들의 글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내 마음 속의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나올 이 책은 대선 이후 한나라당 홈페이지, 창사랑 홈페이지, 다음 카페 등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 일을 기획하고 출판까지 담당한 이는 「창사랑(이회창씨 지지자들의 온라인 모임)」의 대구지역 대표였던 정해은씨(57ㆍ개인사업). 정씨는 『李會昌씨가 정계은퇴를 발표하던 12월20일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읽고 무척 많이 울었던 게 생각난다』면서 『좋은 글들을 컴퓨터 속에 사장시킬 수 없어 책을 만들 생각을 했다』며 출판 배경을 밝혔다. 정씨는 최근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오는 「이회창 복귀론」을 의식한 듯 『李會昌씨가 다시 정계 복귀하는 데는 반대한다. 세대가 바뀌고 있는데 한나라당도 변해야 할 것 아닌가』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 『李會昌씨를 좋아 하지만 얼굴 한 번 직접 본 일이 없고, 악수 한 번 한 적도 없다』며 「昌」 복귀세력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정씨는 우선 일차로 2000권 정도를 찍을 예정이다. 출간일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26일. 그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앞에서 직접 책을 팔 예정이다. 정씨는 『책을 만드는 데 1000만원 정도 들어갔기 때문에 기본 비용 정도는 벌어야 한다』면서 『수익금은 창사랑 기금으로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책 출간과 관련해 한나라당 대표경선에 나선 한 후보측은 『李會昌 총재께서 「
국가인권위에 북한 人權문제 개선 요구 진정서 제출 ‘북한 人權에 대해 위원장이 모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안다는 사람, 나와보라.’ ‘이라크 국민들의 人權을 운운하면서 한 민족인 북한 주민들의 人權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못하는 인권委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가 말이오. 어서 문을 열라우요.’ 지난 6월 3일,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 국제회의실에서 탈북자들과 북한 人權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민, 대학생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가진 후 이들은 곧바로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7층에 있는 인권상담센터로 몰려갔다. 최근 정부의 유엔인권委의 對北 결의안 표결에 불참과 인권위원장의 발언 등으로 3000여명의 탈북자들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金昌國 위원장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金위원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13층에 있는 金昌國 국가위원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金昌國 위원장은 지난 4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북한 人權에 관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계량화된 자료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 의원들의 거센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1) 정부는 북한 人權 문제 개선을 남북회담의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라. 2) 인권委는 북한의 人權 문제를 다루는 전담부서를 죽각 구성하라는 등의 진정서를 인권委에 제출했다. 이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은 安赫(안혁. 36. 1992년 입국)씨와 姜哲(강철환. 35. 1992년 입국. 朝鮮日報 기자)씨를 비롯한 김성민(탈북동지회 사무국장), 오수룡, 차성수등 5명은 金昌國 위원장 대신 강명득 인권정책국장과 대회를 나눴다. 강국장은 인권委가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한것에 대해 ‘충분한 자료와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국장은 또 ‘최근 인권委에 북한 인권연구팀을 만들었다.’며 오는 6월 5일 시민 및 사회단체와 간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동북3省(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녕성)의 몇몇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북한과 가까운 곳도 다녀왔습니다. 사스(SARSㆍ급성호흡기증후군)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런 걸 무서워해서는 안되겠죠. 취재는 잘 안됐습니다. 그러나 기자는 중요한 걸 깨닫고 왔습니다. 「통일은 되어야 한다」는 大전제 하에 「북한동포를 살리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통일을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어쩌면 북한문제 해결과 통일 달성을 위해서는 美國보다 中國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의 또 다른 동포 중국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등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내용들은 국내 언론을 통해 수 없이 보도돼 왔던 것들입니다. 기자는 그 동안 이런 문제에 대해 『그려러니』하는 생각만 해 왔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이 제게 준 또 하나의 「충격」이 있습니다. 月刊朝鮮 기자로서의 역사적 사명감입니다. 『북한 인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金正日 독재 타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한 탈북자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는 이 같은 혁명적 사업을 위해 작지만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 월간조선 기자라면 정말 열심히 취재하시오. 월간조선은 우리의 糧食(양식)이오. 투쟁양식 말이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조선(북한)에는 분명 김정일 타도 세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월간조선이 생명수와 같은 것이오. 비록 그들이 월간조선을 접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비밀리에 보내려고 하고 있소.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간다는 생각으로 일 하시오』 이 말을 들은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몇몇 지인들을 통해 월간조선을 몰래 입수해 읽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순간 기자의 머리를 「때리는」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극우 보수언론, 반개혁적 언론, 반통일 언론...」 솔직히 기자 주변에는 「안티조선」은 아니지만 「親조선」은 아닌 언론계 선배들이
[심층분석] 駐韓美軍 철수時 戰力 대체 비용은 얼마나 들까? 駐韓美軍의 「하드웨어」 대체 비용만 31조원… 정보수집ㆍ인력 등 「소프트웨어」는 대체가 불가능… 방위비 부담은 두 배로 매년 100억 달러 추가 지출… GDP 2% 감소 ● 오산ㆍ수원 기지 등에 배치된 48基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요격 미사일의 가치는 2조원 ● 유사시 사용하는 「전쟁 예비탄」은 10만t 이상… 6조원 ● KH-11ㆍ12 첩보위성, U-2機, 통신감청 장비 등 미군의 정보자산 가치는 돈으로 환산 어려워 ● 주한미군, 운용비 年 30억 달러 ● 한국 국방연구원(KIDA)의 「국방경제모형(KODEM-2)」 시뮬레이션 결과, 『현재 주한미군 철수하면 방위비 약 2배 돼야』 ● 再배치 추진될 경우, 야전부대인 2사단이 옮겨갈 수백만 평의 땅을 물색하기 어렵다 ● 제프리 존스 美 상공회의소 명예회장, 『주한미군에 대해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 보호막」으로 인식. 核문제로 인해 외국인 직접투자가 40% 이상 줄었다』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駐韓美軍 가치는 140~260억 달러 駐韓美軍이 완전 철수할 경우, 그 공백을 메우고 駐韓美軍이 있을 때와 같은 수준의 戰力(전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정부는 駐韓美軍이 당장 철수할 경우 자체능력으로 대체戰力을 구축하기 위해선 3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9월30일 통일부가 국방부로부터 입수, 국회 통일외교통상委 曺雄奎(조웅규·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駐韓美軍이 보유한 장비와 물자에 대한 평가액만도 약 140억~259억 달러(약 16조8000억~31조원)에 달한다. 물론, 주한미군 장비 및 탄약, 정보 수집 수단과 연간 운영유지비 등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계산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총병력 3만7000여 명
초여름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계를 담당하는 캠프 보니파스를 찾았습니다. 이 부대는 적과 얼굴을 맞대고 경계근무를 하는 까닭에 부대구호도 forever in front of them all!(최전방에서!)이더군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굽어보이는 3초소(찰리초소)에서 바라본 북측 기정동 마을의 모습은 부산해 보였습니다. 논에 물을 대고 트랙터로 밭을 가는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남측 대성동 농부들은 모내기를 진작 끝냈습니다. 반듯한 논에 물이 넘실거렸고, 모들은 벌써 땅내를 맡은 듯 노릿한 색깔이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은 고요하고 새소리만 들렸습니다. 가장 긴장이 흐르는 곳이 가장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문득 황지우 시인의 시 '아직은 바깥이 있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
몽클라 장군의 백의종군 기자는 최근 지갑종(池甲鍾ㆍ76)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연합신문 정치부 차장시절, 몽클라(Monclar) 장군을 인터뷰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됐다. 인터뷰를 보면 그가 스스로 ‘계급 강등’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나온다. 기사 全文을 소개한다. 중령 계급장 달고 참전한 몽클라 中將 會見談-연합신문 1959년 1월13일자 “韓國軍은 세계 제1급 군대 조속한 시일내 통일 冀願” 한국참전 16개국중 10번째로 벨기에(白耳義)의 방문을 마친 본 기자는 그 인국(隣國)인 佛불란서(佛蘭西)를 열한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여정도 초조(焦燥)히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당지시간(當地時間)으로 1월9일 하오 6시 30분이었다. 드골씨 지도하에 제5공화국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어 디디려는 이 불란서공화국은 오랜 역사를 두고 세계의 중심을 이룬 나라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무엇보다도 생생한 것은 6.25동란 당시 용약(勇躍) 한국에 파병하여 그 전통적인 무용을 대공전(對共戰)에 바친 사실이다. 동란이 발생한 해인 8월20일에 일부 지상선발대를 파병하고 계속하여 주력부대인 1개독립 보병대대를 갖고 한국동란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3차에 걸쳐 병력의 교대가 있었는데 이 동안 참전한 용사들은 전부가 지원으로 이루어진 장병으로서 구성되었으며, 제1차 파병은 저 유명한 말세이유 항(港)을 출발하여 1950년 11월24일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좋던궂던 기자가 들은 불란서 파병 이면(裏面)의 일단을 소개하건대, 당시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출혈에 지친 나머지 한국파병의 첫 1개 대대가 ‘말세이유’항을 떠나려던 때 일부 시민들이 부두와 대로에서 트럭을 통과 못하게 방해 메모를 하여 1일간 출발을 연기하여 다음날 새벽 일찌기 승선시켰다는 것이다. 이들 일부 시민들의 파병반대 이유는 세금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현명한 佛蘭西 지도부는 인류정의의 굳은 신념 밑에 기어코 파병은 단행하고야 말았다. 한편 불
해군, 한국전쟁 기간중 국산비행기 제작 성공 우리 비행기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공군이 아닌 해군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발견됐다. 해군본부가 밝힌 해군일화집에 따르면 1951년 8월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했다고 한다. 우리 국산비행기가 어떤 산고를 겪어 태어났고 어떤 벽에 부딪혀 좌절했는가 하는 기록이 해군일화집 제1장 "초창기편"에 나온다. 참고로 전문을 소개한다. 국산비행기 제작의 효시 1951년 8월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국산비행기 '서해호'를 제작 완성한 것은 조경연 중위와 배종민, 김종건 문관을 비롯하여 그밖에 17명의 공창 기술진의 피땀어린 노고의 결정이었다. 1946년 9월에 우리 해군은 처음으로 300톤급의 쾌속정 '충무공정'을 만들어 세인을 놀라게 한바 있거니와 그후 해군은 또다시 국산 비행기를 만들어 공창 기술진의 기량과 기개를 드높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행기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그대의 애로와 난관이란 참으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 제작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경연(趙敬衍) 중위였다. 조 중위는 일제부터 항공기 연구에 몰두해 온 청년으로서 그는 모형비행기를 만들기를 몹시 좋아하였다. 그가 해군에 입대 PF기관장으로 있을 무렵이었다. 목포지구에 미군 비행기 1대가 추락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 중위는 미군이 버려둔 추락 비행기의 엔진과 그 밖의 부속품을 사모아 어떻게 하든지 비행기를 만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후 그는 목포에서 주어온 엔진을 말끔히 수리하는 한편 여러 방면으로부터 자재를 구득하기에 온갖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조 중위를 비롯하여 배종민, 김종건 등 10여명은 수상비행정 1대를 제작,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함대사령부 편제에는 건공반이 새로 생기게 되었고 건공반이 창설되자 대원들은 더욱 분발하여 해군 603정으로 강원도 설악산까지 가서 추락된 비
김정일, 삼지연 별장에 숨어있었다 지난 5월12일자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미군 당국은 지난 2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김정일이 약 50일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미군의 폭격을 두려워하여 은신처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북(對北) 정보부서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국군 장성은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金正日)이 백두산 근방에 있는 양강도의 삼지연 지하 은신처에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1만1000여개 지하갱도 가운데 김정일의 은신처로 추정되는(미군은 확실히 파악중이라 함) 곳은 평양 근방 자모산을 비롯, 묘향산, 삼지연 별장(북한에선 특각이라 함) 등 5~6곳이라고 했다. 은신처는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 국경을 향해 종심(縱心)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차하면 김정일이 국경선을 넘어 중국으로 도주하기 쉽도록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북한 김정일은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을 1985년부터 건설해 왔다고 한다. 비행기로 대피할 수 있도록 주석궁에서 순안비행장으로 가는 지하통로를 만든 것을 비롯, 각 시군마다 지하갱도를 뚫어 김일성 사적물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했으며, 당ㆍ행정기관의 지휘부가 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었다. 그는 金正日의 은신처가 지하 갱도 50m 이하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미군이 이라크전에서 사용한 벙커 파괴 폭탄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미군은 스텔스 전폭기로 미리 은신처로 파악한 지점을 공격해 입구를 무너뜨리고, 미군 降襲(강습)부대를 침투시켜 환기구(ventilating opening)에 최루가스 등을 넣어 김정일과 지휘부를 제거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미군은 현재 24대의 B-1, B-52 폭격기를 괌에 배치하여 북한을 작전 반경안에 두고 있다. B-1폭격기는 특히 레이다망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폭격기로서 북한의 방공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 최근 미군이 지난 3월 한미독수리연습을 위해 한반도에 와 있던 F-117스텔스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