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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서울시가 서울의 漢字 표기를 ‘首爾’(수이: 중국음=서우얼 혹은 셔우얼)로 정하고 중국에 이를 사용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중국도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서울 시가 ‘서울’을 원음에 가깝게 불러 달라는 데야 이의를 달 생각 없지만, 그간의 과정을 보면 뭔가 개운치가 않습니다. 수천년 간이나 漢字를 國字로 사용해 온 나라로서 한자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중국은 그 동안 서울을 서울의 옛 이름인 ‘漢城’(한성: 중국음=한청)으로 불러 왔습니다. 중국이 애당초 우리의 ‘서울’을 표기할 때 서구의 관례를 적용해서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한자를 채택해서 표기해 왔다면 별 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서울을 굳이 ‘한성’이 아닌 다른 한자로 표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중국이 우리와 국교를 수립한지 이제 겨우 10년이 넘었습니다. 그 전에는 두 나라가 서로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北京이 중국에서는 '베이징'으로 발음된다는 것을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알게 된 것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미디어가 발달한 극히 최근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양국의 교류가 늘어나고, 서울의 지명도 '한성'이나 '한양'이 아니니까 이제는 중국이 서울을 ‘수이(서우얼)’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프랑스를 '불란서'라고도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아예 원음인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오브 아메리카’하고는 전혀 다른 ‘미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프랑스나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사람들이 “남의 나라 국명을 왜 너희들 마음대로 발음하냐”고 따지지 않습니다.&nb
노무현 대통령께서 오늘 8월15일 광복60주년 기념식에서 이런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오늘날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세계정세에 어두웠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대 정부가 냉전체제 붕괴 이후의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잘 대처해 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 국민은 한반도와 주변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갈 것이다. 그럴만한 충분한 안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우리 역사에 뿌리깊이 내려온 분열은 얼마나 극복되었으며 앞으로 또다른 분열의 소지는 없을 것인지, 그리고 이로 인해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인지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크게 세 가지 분열의 요인을 안고 있다. 그 하나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이고, 그 둘은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이며, 그 셋은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과 격차로부터 생길지도 모르는 분열의 우려다. 나라를 지속적인 발전의 토대 위에 단단하게 올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또다시 나라가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분열과 갈등의 원인과 구조를 해소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는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 그리고 독재시대의 억압과 저항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기 위해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자는 겁니다. 노대통령께서는 친일 과거사 정리법에 이어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까지 통과되면 역사의 부조리가 해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야 맞는데, 손뼉을 치기보다는 "또 그 이야기군"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얼마전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이 한국에 다녀갔습니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가 그를 만났습니다. 대담
“부여읍 한가운데에 있는 정림사지와 백제왕릉들 말고 백제의 흔적들은 어디가면 볼 수 있습니까?”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을 오르면서 백제사를 연구하는 부여의 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교수에 물었다.“부여읍 땅밑에 묻혀 있습니다.” 부여 부소산에 오르고 공주 공주산성에 오르면서 백제 유적들을 둘러본다. 능선을 따라 오르고 산기슭과 들판을 두리번거리면서 백제 유적들을 둘러본다. . 우리나라 어느 산엘 가든 선사시대 이후의 선조들이 살아온 흔적들이 남아있다. 악산(岳山)이든 구릉지든 계곡과 산기슭, 산언저리는 먼저 간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였다. 산기슭과 산등성이와 산골짜기에서 선인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 그들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들의 고난과 번영을 보면서 우리들이 과학 문명속에서 깜박 잊기 쉬운 오만함과 편리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본다. 그냥 높이 오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경기도 포천군 운악산(936m)에는 언제 누가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석성터가 있다. 정상 못미처에서부터 포천군 화현면의 무지치폭포를 감싸고 축조된 거대한 산성이다. 산성은 많은 등산인들이 운악산을 오르면서 지나쳤을 돌무더기들이었다. 깊고 험한 산속에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석성을 왜 이곳에 쌓았을까? 성곽의 일부는 산 중턱에 산재한 무허가 암자들을 오르내리는 계단과 추춧돌로 쓰이는 바람에 성곽의 일부는 다 흩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류 최대의 역사 현장은 아니어도, 민초들이 난리를 피해서 이불 보따리, 쌀 주머니를 지고 피난을 했던 산성일 것이다. 어디를 가든 산에는 잊혀진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 현장이 남아있다. 산길을 걸으면서 발부리에 채이는 사기그릇 조각이나 무너져 내린 성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산속에 숨어든 선조들의 고난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일부는 실존적인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위해 집을 짓고 살았던 불교나 기독
서울의 예수/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 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 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내 CEO 1600여명을 대상으로 '휴가 때 읽어야할 책 20선'이라는 내용으로 설문조사 벌인 후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국내 CEO들은 독서를 골프, 등산과 더불어 3대 여가활동을 꼽는다고 합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성공한 CEO들은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아 독서를 열심히 하지요. CEO들은 독서를 통해 시대를 읽는 통찰력, 경영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얻는답니다. 이같은 사항은 물론 CEO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인들도 당연히 책을 통해 삶의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CEO 1600여 명 중 63%가 한 달에 1~2권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CEO들이 독서를 하는 주된 목표는 시대 트렌드 포착(38%), 경영 아이디어 발굴(30%), 삶의 지혜 획득(28%) 등이었습니다. 가장 즐겨 읽는 분야는 역시 경제, 경영(71%)였으며, 그 다음이 역사, 철학(14%)였습니다. 아래는 CEO들이 추천한 책 20선입니다. 1.블루오션 전략 2.잭 웰치 위대한 승리 3.짐 콜린스 경영전략 4.미래기업의 조건 5.톰 피터스의 미래를 경영하라 6.경영이란 무엇인가 7.조영박의 행복한 경영이야기 8.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9.괴짜 경제학 10.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11.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12.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13.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14.우체부 프레드 15.생각의 지도 16.대륙의 지도자 등소평 17.문학의 숲을 거닐다 18.백만불짜리 습관 19.용서 20.호모 노마드 유혹하는 인간 여러분들이 읽은 책은 혹시 얼마나 됩니까? 저는 11번, 12번, 19번뿐이네요.
부끄럽습니다. 기자랍시고 「사회정의 어쩌구, 진실추적 저쩌구」 하던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간 듯합니다. 언론사주라는 분이 유력 대통령 후보를 찾아가 돈을 주고, 대선 전략에 관한 훈수까지 뒀고, 야당 후보에게도 찾아가 비슷한 행위를 했다고 하니... 어디 그 분뿐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독자 앞에, 국민 앞에 석고대죄라도 해야겠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의 대표 기업이자 세계적 기업인 그 회사의 핵심인사가 돈으로 대선후보, 검찰 관계자들을 「기름칠」한 것 자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 회사는 『도청 자료가 근거 없는 조작된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백 번, 천 번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놓으니 세계인들 앞에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李會昌, 金大中 등 자료에 언급된 유력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행위도 부끄럽습니다. 모두가 『그 회사, 언론사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국민들이 어디 바보입니까? 국가 원로로서, 또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서 지금 무엇이 두렵습니까? 「기름칠」 당한 검찰도 그 회사가 무서워서 그 회사 관련된 사건을 그렇게 처리했습니까?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발 힘 있는 사람에게 강하고, 힘 없는 사람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그런 검찰이 되어주세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도청행위 또한 부끄럽습니다. 다른 나라 정보기관은 國益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십니까? 국가기관이 이처럼 불법을 공공연하게 저지르는 데 어떻게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법적으로 생산된 정보로 당시 청와대는 인사자료로 활용했다고 하니,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전직 안기부 직원이 불법 도청테이프를 미끼로 그 회사에게 돈을 요구했다는 파렴치한 그 행위도 참으로 부끄러운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거리를 차분히 내다보며, 문자는 장갑을 한쪽 또 한쪽 끼었다. 빨 때마다 오그라들고 털이 뭉쳐 작아질 대로 작아졌기 때문에 그녀는 장갑 낀 손가락 새새를 꼭꼭 눌러주어야 했다. 몇 년 전 이미 한 차례 유행이 지나간 알록달록한 털장갑을 여태 끼고 다니는 사람은 그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장갑만 구식인 건 아니었다. 소매 끝이 날깃날깃 닳아빠진 외투며, 여름도 겨울도 없이 신어온 쫄쫄이식 단화, 통은 넓고 기장은 짧아 발목이 껑뚱해 보이는 쥐똥색 바지, 보푸라기 가 한켜나 앉은 투박한 양말, 서랍에서 꺼내어 얼찐거릴 때마다 반찬 내를 물씬 풍기는 가방 등, 몸에 걸치고 지닌 것마다 구멍만 뚫리지 않았다 뿐이었다. 문자의 이런 차림새는 사십 고개를 바라보도록 노처녀로 알려진 그 녀의 입장을 더한층 측은해 보이게 했다.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사에서 문자는 영업부 편집부 통틀어 최고참이었다. 입사 이래 현 재까지 그녀는 줄곧 교정일만 보아왔다. 편집부 정원은 부장을 포함해서 일곱이었다. 그사이 문자만제외하고 자리마다 얼굴이 수없이 바뀌었다. 대학을 갓졸업한 축을수록 반년도 못 채우고 떠나갔다. 출근 첫날부터 의자가 갸우뚱거린다, 화장실이 더럽다, 층계가 가파르다, 등등의 불만이 하나씩 쌓여가다가 나중엔 말끝마다 “이놈의 데 얼른 떠나야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하고 군시렁거렸다 하면 견뎌야 한두 달이 고작이었다. 문자는 그런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네들로서는, 가리마에 새치가 희끗희끗 하도록 무엇 하나 이룩해논 것 없이, 한평생 있어봐야 별볼일 없는 출판사에, 그것도 말석에서만 십년을 보낸 노처녀 동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中略) ****** 출판사 矯正일을 하는 문자는 꾸
大雪注意報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리 업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의 시는 종종 이하석과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시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이들의 시 만큼 드라이하고 생경하고 재미없는 시는 드물다. 그렇다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리얼리즘은 都會的 切除美라고 할 수 있다. ‘이하석의 정서가 쓸쓸함·막막함이라면 최승호는 불안·공포와 닿아있고 그 불안·공포는 정치·사회·심리적이며 존재론과도 관련 있다(성민엽)’ 大雪注意報는 몇 년도 작품인지 알지 못한다. 시가 실린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刊)』초판이 1983년에 나왔으니 80년대 초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최승호는 이 작품으로 등단 5년 만에 ‘제6회 오늘의 作家賞’을 수상한다. 80년대 文靑들은 그의 시를 읽으며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배웠다. 지나치게 냉혈적인 자연주의를 부각하는 측면도 있어 ‘애호시’로 꼽일 수는 없었다. 예컨대 「시궁쥐」라는 시를 보
(사진) 김진규 문숙 백일섭이 분한 영화 삼포가는길(1981년작)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잇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엇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森浦가는 길은 1973년 신동아에 처음으로 발표됐다. 원래 三浦는 부산 동래, 경남 진해, 울산 염포 등 3곳을 말한다. 하지만 가공의 森浦는 산업화의 물결에 내몰린, 노동력을 밑천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꿈꾸는 공간이다. 산업화 이전의 고향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내 누이와 형제가 기다리는 곳이다. 철들기 전 돈 벌어 출세하겠다고 뛰쳐나온, 지금은 기억속에만 남은 곳이다. 이 작품은 황석영이 꼭 서른살 됐을 무렵 쓰여졌다. 당시 그는 으로 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중편 로 문단내 신인으로 막 물이 오르던 시절이었다. --- 공사판을 전전하는 ‘영달’. 그는 공사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친다. 우연히 정氏와 만난다. 그의 차림은 전형적인 날품 노동자다. ‘팽팽하게 불어오른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 니슨히 걸쳐메고 머리에는 개털모자를 귀까지 가려쓰고 있었다’. 정氏는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출옥, 공사판을 떠도는 인물이다. 그는 마음을 잡고 고향인 森浦로 가는 길이다.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잡이 들었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 佛文學을 전공한 李晟馥이 77년 『문학과 지성』겨울호에 쓴 글이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음험하던 維新의 그림자가 서서히 옅어지던 시기였다. 이성복은 작고한 평론가 김현에게 詩를 건넸다. 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안고 물어물어 김현의 연구실에 찾아간 것이다. 그때가 77년 여름이었다. 김현은 그 중 「정든
내가 끌려간 곳은 소위 ‘먹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비워둔 방이었는데 가끔 징벌을 받은 죄수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텅텅비어 있는 그 방은 마루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아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영등포 구치소의 독방처럼 천장은 높고 마루는 길쭉하게 생긴 영점칠 평의 방이었다. 이를테면 마치 좁은 바위틈 공간과 같이 생간 방이다.····(中略) ··· 그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고통이 되었다. 입에선 끊임없이 개처럼 질질 흘려대고 있는 침. 질퍽하게 오줌을 싸놓은 옷. 손을 뒤로 묶여 팔이 없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는 지금의 형상이 그들을 놀라게 하고 미치게 하고 말 것이다.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싶었다. 이를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싶었다.···(中略) ··· 그 때 나는 놀랍게도 내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가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손목을 죄는 手錠(수정·수갑의 뜻)의 고통도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防聲具(방성구)도 이젠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마치 여름날 나뭇잎새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방의 애벌레처럼 물렁물렁해진 것을 알았다. 다리나 팔 대신에 빨판 같은 게 끝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발이 몸통에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내 몸을 완전히 관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머리만은 마음껏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 마리의 완전한 그리고 다소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린 것은 분명했다···(中略) ··· 이 때의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나의 의식은 여전히 벌레로 변해버린 내 몸통의 눈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벌레의 눈을 통하여 마치 열쇠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자신을 완전히 숨긴 채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세상 사람
제헌절날인 7월 17일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인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앞 광장에서는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좌익단체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단체들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집회가 열렸다. 남남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낸 이념 충돌의 현장으로 하루 종일 긴장감이 감돌았다. 30도 가까운 무더위를 무릅쓰고 맥아더 장군 동상의 사수를 주장하는 인천지구 황해도도민회(회장 류청영), 재향군인회, 한국자유총연맹, 대한상이군경회, 월남참전전우회,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통일안보협의회, 9.15인천상륙작전전우회(해병대), 6.25참전유공자회, 이북오도민연합회등 회원 1500여명(경찰 추산 1000여명)은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가 이날 오후 2시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로 한 맥아더 동상 앞 비들기 광장에 집결하여 ‘반미 친북세력들의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반대 궐기대회’를 갖었다. 류청영 인천지구 황해도도민회 회장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조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을 구출한 은인을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비열한 민족으로 매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거 추진 단체에서는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오후 3시 30분경 뒤늦게 집회를 시작했다.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김수남 공동의장은 “맥아더는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점령군 사령관에 불과할 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는 결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이날 11개 중대 1300여명을 투입해 이중 3개중대 360여명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좌익단체와 시민단체 사이에 벽을 쌓고 양측의 물리적인 충돌을 차단했다. 큰 불상사 없이 양측 회원들은 오후 5시경 모두 해산했다. 우리연방제통일추진회의는 오는 9월 8일 또 다시 대규모로 동상 철거 촉구 집회를 개최한다는 방침이여서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좌익과 보수단체의 대결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좌파단체 7월17일 제헌절에 맥아도 동상 철거 시도,자유진영 단체 ‘사수 결의’ 동시 집회 예정 헌법을 존중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앙양하는 7월17일 제헌절 6ㆍ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기념해 세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좌파단체와 이를 막으려는 시민단체가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집회를 열기로 해 충돌이 우려된다. 인천 월미도를 내려다보는 모습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1957년 9월15일. 지난 7월15일 ‘우리민족 연방제 통일추진회의’ 소속 회원 10여명은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앞 광장에서 천막농성을 벌리며 ‘미군 타도 및 맥아더 동상 철거’를 요구했다.이들은 “맥아더는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의 실질적인 지휘자인데다, 원자폭탄을 사용을 시도했던 전쟁 범죄자”라고 말했다.이에 맞서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등 20개 자유진영 단체 회원 600여명은 7월15일 오후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집회를 갖고 “친북좌익세력의 맥아더 동상 철거 움직임은 6ㆍ25 주범 김일성을 비호하기 위하여 한미동맹을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단정하고 인천시청과 경찰이 맥아더 동상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자유민주민족회의(상임대표 이철승)와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결성준비위원회(위원장 김상철)도 이날 좌파단체가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맥아더장군 동상 해체세력을 방관하는 노무현 정권과 안상수 인천시장은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철승 대표는 성명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안 했더라면 자유 대한민국은 북한처럼 비참한 공산 사회가 됐을 것”이라며 “국민적 합의로 한국의 은인 맥아더 사령관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를 허물어뜨리려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소원을 노무현 정권이 이뤄 준다면 노 정권은 전국민의 저항에 직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해도 도민회(회장 류청영)도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
천진암에 나브끼는 대형 태극기 천주 공경, 나라 사랑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앵자봉(667m) 기슭 한가운데 에 쏫아 있던 해발 225m짜리 산봉오리를 하나를 깍아서 만든 3만여평의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天眞菴) 대성당터의 주변 산들이 무더위를 품은 짙은 안개에 쌓여 아득히 보인다. 장마를 알리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6월 24일 한국 천주교 창립 제226주년을 맞이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앵자봉 중턱에 자리 잡은 천진암(天眞菴) 대성당 터에서는 기념 미사가 있었다. 광활한 3만평의 빈터에는 교황 바오르 2세의 강복문이 세겨진 머릿돌과 사방 출입문 자리를 표시한 철골 네 개, 성당의 중앙 제대(祭臺)로 쓰일 87t짜리 제대석, 1㎥ 크기의 화강암들만이 놓여 있을뿐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 현장에는 1년전과 별로 달리진 것이 없다. 눈에 뜨이는 것으로 대성당터 입구의 대형 십자가 좌우에 높이 25m의 깃대가 양쪽에 세워졌다. 오른쪽에는 대형 태극기가, 왼쪽에는 노랗고 하얀 교황기가 펄럭이고 있었다.공공 기관에 나브껴야 할 대형 태극기가 십자기와 나란히 걸려 있다는 것이 왠지 어색하다.“한국천주교가 다른 나라처럼 선교사들의 전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처를 모신 사찰에서 이벽, 정약용 등 젊은 선비들이 모여 천주학을 논하면서 자생한 것처럼 토종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천진암 성지를 찾아 온 신자들을 누구나 한번쯤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대형 태극기를 달았습니다.”천진암 李 그레코리오 신부의 말처럼 천진암 성지는 천주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가짐도 함께하는 성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1979년부터 35만평의 천진암 주변을 개발하여 성역화 사업을 해오고 있
고려初에 발생했던 산불과 몽골 침략, 그리고 6.25.... 그때마다 불탔던 낙산사가 다시 지어졌지만 지난 식목일날 산불도 낙산사를 피해가지 않았다. 어느덧 1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한지 3개월이 돼 가고 있다. “모든 허물과 책임의 아픔을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먼 옛날 의상스님의 원력처럼 역대 조사님의 발원처럼 이웃과 衆生의 依支處로 거듭날 수 있음을 슬픔속에서도 확신했습니다.” 정념주지스님이 불기 2549 부처님 오신 날에 발표한 봉축사의 한구절이다.낙산사에서는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하기보다는 불자들의 자력으로 큰 법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부터 복원할 계획으로 성금을 모으고 있다.
며칠 전부터 아파트 베란다에서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나서 창을 열고 창 주위를 살펴 보았습니다. 창 밖에 매단 에어컨 실외기 주변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새새끼소리를 듣고 옆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실외기의 바깥쪽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분명히 새새끼 소리는 실외기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전선과 배관을 연결하느라 뚫린 작은 구멍이 옆 모서리에 나 있으나 전선과 배관이 엉켜 있어 새가 들락거릴 수가 없게 돼있었습니다. 벽 안쪽을 향한 실외기 한 모서리에 직경 4-5cm 크기의 작은 구멍속에서 새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실외기 속에 작은 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친 것이 분명했습니다. 문 뒤에 숨어서 보니 어미새가 입에 작은 곤충을 물고 와 실외기 주변을 이리저리 날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날아왔다가 인기척에 놀라 다시 공원 건너 숲으로 날아가는 어미새는 여름에는 산에서 살다가 겨울이면 인가 주변으로 내려오는 텃새인 박새였습니다. 배가 고픈 새끼들이 실외기 속에서 먹이를 물고 날아 올 어미새를 애타게 기다리며 큰소리로 짹짹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씬거리니까 어미새는 둥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이리 저리 오가더니 건너 편 산 숲 속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끼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더니 그 중에서 제일 배가 고팠던 새끼 한 마리가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동안 둥지속의 새들이 알에서 깨어나 이렇게 컸지만 집안 식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실외기 속에 박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칠 것이라는 상상도 못했고 눈치도 채지 못했습니다. 어미새의 지저귐과 새끼들의 짹짹거림으로 베란다는 상당히 시끄러웠으나 창밖에서 나는 새소리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실외기의 작은 구멍으로 주둥이를 내밀던 새끼 한마리는 밖으로 발까지 내밀고 곧 튀어 나올 자세였습니다. 문을 열고 새를 구경하는 식구들의 소란을 멀리 어디선가 지켜 보고 있는 어미새는
관람면적 6만여 펑의 식물원이 5월 19일 문을 연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상품리 앵자봉의 방축골 산자락에 자리잡은 해여림식물원은 1973년에 도서출판 예림당을 설립하고 1991년에는 도서출판 능인을 설립하여 30년 넘게 아동도서 전문 출판의 외길을 걸어온 羅春浩(63) 원장이 200억 원의 사재를 털어 지었다. 「온종일 해가 머무는 여주의 이름다운 숲」이란 의미를 담아 지은 해여림식물원은 관람 동선 거리만도 10km로 초본류 1,800여 종, 목본류 1,300여 종, 구근류 8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초화류, 약용식물, 원예식물, 습지식물 등 4천여 식물을 생태 특성별 또는 주제별 동산으로 나누어 심었다. 관찰이 편리하도록 관람 동선을 과학적으로 배치했다. 테마별 동산마다 그늘과 쉼터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천천히 쉬어가며 여유롭게 관람을 할 수있게 했다. 2001년에 착공한 해여림식물은 앞으로 식물연구소, 눈썰매장, 열대식물원, 천체관측소, 민속박물관, 청소년교육원을 갖춘 ‘예림랜드’로 꾸밀 계획도 갖고 있다. “30년 이상 ‘예림당’을 통해 아동문학과 자연과학 및 각종 교양, 지식 도서, 도감 등 수천 종의 어린이 책을 출판해오면서 저는 일찍이 자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귀중한 식물들을 한곳에 모아 생태를 연구하고 우리 식물자원의 가치를 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는 ‘해여림식물원’을 일구게 된 동기도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대한출판협회장을 역임하고 2000년부터 APPA(아사아태평양출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羅春浩 회장이 말년에 올인을 해서 설립한 국내 최초 ‘관광식물원’인 해여림식물원은 나무나 식물이 하루아침에 훌쩍 자라나지 않듯이 터를 잡으려면 긴세월이 흐르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요금은 성인 8,000원(주말 공휴일 9,000원), 청소년 5,000원(주말 공휴일 6,000원), 어린이 5,500원
조선일보 독자면에는 「독자 갤러리」라는 난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보내온 사진을 싣는 난인데, 이곳에 실린 사진은 정겨운 것이 많습니다. 딱딱한 신문에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곳에 가끔 시골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실리는데 사진 설명이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종종 발견됩니다. 설명자체가 틀렸다기보다 농사용어나, 구체적 묘사 부분에서 틀리는 경우입니다. 저는 시골출신이라 시골 사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갑니다. 5월11일과 12일 연 이틀 시골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렸는데 두 사진에서 설명문이 좀 거슬립니다. 먼저 5월11일 사진은 농부가 써레질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제목이 「워워~~, 음메음메~」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송아지가 논에서 일을 하나」 하고 사진을 자세히 보았지만, 써레를 끄는 소는 송아지가 아니라 어미 소였습니다. 어미 소는 절대로 『음매~』하고 울지 않기 때문에 저는 사진 설명을 보고 논에서 일을 하는 소가 송아지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어미 소는 『엄무~』하고 웁니다. 송아지 울음소리는 아기 울음소리처럼 깊이가 얕고 떨리지만, 어미 소는 목소리가 깊고 큰 것이 특징입니다. 또 조선일보 오늘 자 「독자 갤러리」에는 소가 연자방아를 끄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 설명문에는 「발동기가 없던 시절, 말이나 소를 이용해 곡식을 빻던 연자방아...」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연자방아는 요즘으로 치면 정미소인데, 정미소는 우리말로 「방앗간」입니다. 방앗간에서는 곡식을 찧거나 빻거나 합니다. 「방아를 찧는다」고 할 때 대체로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짓이길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방아를 빻다」라고는 잘 하지 않는데, 「빻다」라는 말은 완전히 부수어 가루로 만들 때 쓰는 동사입니다. 연자방아의 제일 중요한 용도는 나락의 껍질을 벗기는&nb
지난 5월1일(일요일) 종묘제례에 참석했습니다. 작년 종묘제례가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떤지 저는 종묘 입구에서부터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제례는 그런대로 주최측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안내원들이 종묘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슴에 ‘종묘대제’라는 리본을 달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종묘에 들어 선 사람들이 정전으로 들어가는 복판 돌길인 '神路'에 함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례가 열리는 종묘 정전 마당에서도 안내원들이 완장을 차고 질서를 잡고 있었습니다. 작년 종묘제례가 10점을 주기도 아까웠다면, 이번에는 주최측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성의를 봐서 70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례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햇볕을 피해 많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제례는 대체로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작년처럼 도깨비 시장에 온 것 같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이날 질서 유지에는 더위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날 제례에는 황실 자손들도 여러 명 참석했습니다. 의친왕의 둘째 딸 이해원 여사, 작년에 언론에 ‘의친왕 둘째 딸이 경기도 하남에 있는 빈민촌에서 월세 20만원짜리 쪽방에 산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알려진 분입니다. 1919년 생인데 정신이 또렷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씨가 이 분의 동생입니다. 줄리아 여사도 참석했습니다. 줄리아 여사는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 태어난 황세손 이구씨와 결혼했던 분입니다. 지금은 이혼을 했지만 한 때 황세손 비였습니다. 2003년 MBC에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한국을 방문한 이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무슨
내일은 1년에 한번씩 있는 종묘제례 날입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첫째 주 일요일에 있습니다. 아래는 작년에 종묘제례를 보고 하도 실망스러워 올린 글입니다. 작년같은 꼴불견을 또 볼까 걱정입니다. --------------- 아 래----------------난장판 종묘제례 글쓴 날짜: 작년 5월 조 회 수 : 2149 지난 5월2일 일요일 종묘제례에 참여했습니다. 재 작년인 2002년의 종묘제례가 월드컵으로 인해 밤에 거행되어서 아쉬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낮에 꼭 보고 싶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종묘제례가 제대로 치루어 질 수있을 지 걱정을 하면서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날 종묘제례를 본 느낌을 이곳에 글을 쓰려던 차 마침 오늘(7일) 자 조선일보에 종묘제례 참석자가 쓴‘독자의 편지’가 있어 여기에 먼저 소개합니다. 추한 한국인 모습 제발 벗어나자 지난 2일 아이들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를 관람하러 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와 제례악을 관람하려는 외국인 관광객과 일반관람객으로 붐볐다. 보슬비가 내렸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녀들에게 우리 전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잡은 문제되지 않았다. 자녀에게 자세히 보여주려고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2시간여 앞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뒤쪽 처마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변은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밀치고 들어온 한 아주머니는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뒤에 있던 친구까지 끌어들였다. 한쪽에선 30대 초반 여인이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자녀를 야단치고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러 참석한 외국인들의 불쾌해 하는 표정을 보았을 때는 비참했다. 무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광화문 앞의 차도를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했습니다. 현재 서울시와 협의가 된 상태라고 합니다. 광화문 앞 광장 조성은 제가 작년(2004년) 2월 이곳 기자칼럼에서 주장한 바 있어 느낌이 남다릅니다. 제가 『광화문 앞에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글을 올린 지 8개월 후인 작년 10월, 각 대학 건축학과 학자들이 세종로 일대의 환경개선을 위한 포럼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포럼에서는 『세종로 전체를 보도로 바꾸고 차량은 지하로 다니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제가 이곳 기자칼럼에서 주장했던 것과 완전히 똑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참석한 학자들 중에 저의 글을 읽은 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화문 광장 조성 논의가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무척 고무적이었습니다. 오늘 유홍준 청장이 『광화문 복원을 좀 더 앞당기고, 광화문 앞 동서로 난 차선을 광장으로 만들겠다』고 한 것을 보고는 작은 소망이 하나 실현된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이번에는 비록 광화문 앞의 좁은 도로만 광장으로 만든다는 것 정도에서 그치지만, 저는 이것이 경복궁 일대의 구 도심 복원이라는 거대한 문화사업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세상일이란 것이 사고의 전환과 처음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만 하면 금방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주장하지만, 서울은 경복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는 한가지 원칙은 분명하게 세워놓고 도시계획을 잡아야 합니다. 나라의 얼굴인 경복궁을 제대로 꾸며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허해 집니다. 어차피 천년만년 갈 우리나라입니다. 이 나라 최고의 문화산실인 경복궁 복원에 돈 들어가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다
아래 ‘엄청 빠른 닭 이야기’는 거의 10년 전에 어느 스포츠 신문에서 보았는데 하도 우스워서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는 맹구가 자동차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자동차 백미러로 뒤를 보았는데 웬 닭 한 마리가 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맹구는 ‘잘못봤나’ 싶어서 다시 한번 유심히 백미러를 들여다 보았는데 글쎄 백미러 한 참 뒤 쪽에 있던 그 닭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휙 하면서 맹구의 자동차를 앞질러 가는 것입니다. 맹구는 어이가 없고, 황당했지만 '저 닭을 잘만 이용하면 엄청나게 큰 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맹구는 수소문을 하여 겨우 닭 주인이 있는 농장을 찾았습니다. 맹구는 닭 주인에게 “저 닭으로 서커스를 하면 돈을 많이 벌 것 같다. 후한 값을 처 줄 테니 나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 “제기랄~, 잡을 수가 있어야 팔든지 말든지 할 것 아뇨”
저는 지구상에 나타났다는 각종 UFO를 믿지 않습니다. 즐거운 상상 거리를 하나 포기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주 전체에 생명체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행성인가에 생명체가 있다는 결론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체 중 한 집단이 우리가 UFO라고 생각하는 우주비행체를 타고 지구에 왔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비행체를 보면 구조야 어떻든 간에 어느 행성인가에서 존재하는 광물질을 제련해서 만든 것입니다(이 광물질은 UFO를 만든 행성에서 생산했을 확률이 크다). 비행체를 타고 온 우주인들이 광물질을 캐서 그들이 탈 우주선을 만들어 거친 우주환경을 극복해가며 여행을-그것도 상당한 거리- 할 정도로 지적이란 뜻입니다. 이 외계인들이 다른 행성에 가다 지구에 그냥 들려보았다고 해도, 이 정도 거리를 여행 할 정도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라면 지구의 정보를 본 행성에 보고 할 것입니다. 통신이 불가능하다면 돌아가서라도 보고를 할 것입니다. 이 우주인들이 지구의 존재를 본 행성에 보고를 했으면 조사팀이라도 다시 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들의 비행능력만 보고 판단하면 이들은 지구인보다 더 우수한 기술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모를까 숨어서 활동할 필요가 없는데도 지구인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꼭 비행체를 타고 옵니다. 몸의 세포를 분해해서 우주 공간을 이동 했다가 재 결합 할 정도의 신기한 생명체는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즉 이들의 생명은 우주선 같은 물질에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약하다는 뜻입니다. UFO에 탄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 실종된 항공사 여승무원이 결국 죽은 채 발견됐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여승무원 한 명 역시 집 근처 골목에서 강도에게 맞아 죽고, 돈 몇 십 만원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어이없고 화가 납니다. 1990년, 길가던 부녀자들이 납치되거나, 인신매매 등이 자주 발생하자 盧泰愚 정부는 ‘범죄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인격과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총련 출범식이 등의 대학생 집회가 있는 날이면 전투경찰들이 집회가 열리는 해당 학교를 삼중, 사중으로 뺑 둘렀던 기억이 납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올라 온 학생들은 버스나 기차역에서 곧바로 연행되었습니다. 물샐 틈 없는 경계였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막강한 경찰 병력의 일부만 범죄소탕에 돌리더라도 대한민국에는 깡패 한 마리 발을 못 붙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힘없는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는 자기 방어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비겁하고 추악한 짓입니다. 집에 가다 맞아 숨진 여승무원은 자신이 누구에게, 왜 죽어야 했는지 조차 몰랐을 겁니다. 악질 사형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유언을 남기는 것에 비하면 사람이 죽는 방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돈을 노린 어린이 유괴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범인들이 어린이 유괴해서 '힘들게' 돈을 받아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니 길가는 사람 아무나 납치해도 최소한 몇 십만원은 건질 수 있습니다. 최근보면 범인들은 희생자가 될 사람이 얼마나 돈을 가졌는지는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납치당한 사람이 돈이 많든 적든,&nb
독도 문제가 시끄럽습니다. 독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영토 문제입니다. 국가는 자국의 영토를 침략당하면 자위적 차원에서 반격에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침략하면 우리는 반격해서 독도를 지키거나, 나아가 일본 열도의 일부나 전체를 점령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끝날 것입니다. 독도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고질적인 교과서 왜곡 문제도 불거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본에 대해 『과거사 왜곡하지 말고, 식민지배 사과하라』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일본 사람들(일본 정부) 과거사 절대로 사과 못 합니다. 전범 히로히토가 전후에 아무런 책임 추궁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천황에 대해서는 언론조차 입도 뻥긋 못하는 나라입니다. 전범이 살아서 천수를 누리고, 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일본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독일과 일본을 자꾸 비교하는데 독일과 일본은 사정이 완전히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 전쟁 범죄자가 패한 후에 천수를 누린 경우가 있었습니까.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겁니다. 엄청난 국제적 범죄를 저지르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도 자손대대로 계승하고 있는 일본 천황에 비하면, 자국이나 타국의 백성에게 거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우리나라 황실은 일본에 의해 황실자체가 말살되었습니다. 일본 정치 지도자가 입 발린 사과 몇 마디 한들 진실함도 없을 것이며, 사람 심사만 더 뒤틀어 놓을 것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일본 왕이 『통석의 념을 금할 수 없다』고 비비 꼬아서 사과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히 엎드려 절 받기식입니다. 저의 고향 동네에는 전쟁에 두 번 나간 노인이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일본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나가서 싸웠고, 6ㆍ2
'지방선거 구인난' 국민의힘, 추미애에 맞설 경기도지사 후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