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울 강남구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린 기획전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전시된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작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남자와 그의 팔 곁에서 잠든 작은 강아지를 단순한 선과 평면적 색채로 그려 넣었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책과 커피잔이 놓여 있어 조용한 독서의 시간을 암시한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룬 전시는 자주 열리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작품을 원고지와 초판본, 작가 연보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대신, 문학적 세계관과 삶의 태도, 감수성과 취향이 오늘의 시각예술 안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묻는 전시라면 더욱 그렇다.
서울 강남구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가 개관 10주년을 맞아 준비한 대규모 기획전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 드문 시도에 속한다. 전시는 3월 27일부터 8월 2일까지 총 111일간 플랫폼엘 전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단순히 ‘하루키라는 유명 작가’가 아니다. 플랫폼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과 문학적 서사, 그리고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감수성이 동시대 예술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읽힐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고독과 상실, 일상 속 사소한 취향에 대한 집요한 애정, 재즈와 달리기, 고양이와 LP, 고요와 불안, 현실과 비현실이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겹쳐지는 감각이 이번 전시의 핵심 언어가 된다. 문학 전시라기보다, 하루키라는 거대한 문화적 좌표를 통해 관람객 각자가 자기 내면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협력 기관의 무게에서도 드러난다. 플랫폼엘은 와세다대학교 국제문학관, 이른바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와 손잡고 하루키가 와세다에 기증한 소장품을 국내에 소개한다. 하루키 관련 전시가 일본 문학관의 아카이브와 직접 연결돼 열리는 것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관람객은 작가의 문학을 둘러싼 물질적 흔적, 다시 말해 그가 남긴 물건과 기록, 삶의 자취를 통해 소설 바깥의 하루키를 마주하게 된다.
또 하나의 큰 축은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다. 하루키 독자라면 그의 이름을 낯설지 않게 기억할 것이다. 단정하면서도 유머가 배어 있고, 건조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선으로 하루키의 책과 에세이, 잡지 작업을 오래 함께해 온 동반자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원화 200여 점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이는 전시의 가장 직접적인 볼거리이자, 하루키 세계의 시각적 번역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장면이다. 미즈마루의 그림은 하루키 문장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문장 옆에서 공기를 바꾸고, 리듬을 만들고, 때로는 말보다 먼저 정서를 건넨다. 전시는 바로 그 관계, 즉 문학과 그림이 서로를 어떻게 지지했는지까지 살펴보려 한다.
이 전시는 하루키만을 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키를 매개로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사유를 펼쳐 보일 수 있는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참여 작가는 안자이 미즈마루를 비롯해 강애란, 김찬송, 순이지, 이원우, 한경우다. 각 작가는 하루키 작품을 직접 삽화처럼 재현하기보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감각을 자기 언어로 변주한다.

강애란, The Towering of Intelligence
강애란의 작업은 지식과 이미지, 축적과 소멸의 문제를 다루며 하루키 문학 속 기억과 시간의 층위를 떠올리게 한다. 김찬송은 익숙한 사물과 감각을 비틀어 놓으며 하루키 소설 특유의 낯익은 비현실을 환기한다. 순이지의 작업은 일상과 환상, 개인의 정서적 결을 섬세하게 건드리며 하루키 독자들이 오래 붙잡는 잔향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낸다. 이원우는 구조와 서사, 공간과 관계를 통해 인물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한경우는 시간성과 반복, 관람자의 지각을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하루키 문학의 리듬을 시각적 경험으로 바꾼다. 작가들은 하루키를 설명하기 위해 소환된 것이 아니라, 하루키를 통해 다시 자기 작업을 비춰보는 거울로 참여한다.
플랫폼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에만 머물지 않고, 하루키에게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뮤지션 장기하, 만찢남 셰프 조광효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인물들이 하루키를 어떻게 읽고 받아들였는지가 함께 소개될 예정이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체험, 생활양식, 취향의 언어로 작동해 왔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하루키는 청춘의 독서였고,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을 견디는 문장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음악과 음식, 산책과 달리기의 감각으로 남아 있다. 이번 전시는 그 다층적 수용을 정면에서 다룬다.
전시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루키 자신의 에세이 제목을 연상시키면서도, 시선을 분명히 바꿔 놓는다. 중요한 것은 ‘하루키가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하루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이다. 즉 이번 전시는 작가에 대한 해설보다 독자와 관람객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놓는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를 멀리했던 사람, 혹은 이름만 들어본 사람도 자기 방식대로 입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서 생긴다.

와세다대 국제문학관(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나 와세다대 문학부 영화연극과를 졸업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이후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인간 내면의 고독과 상실, 도시적 감수성, 음악과 기억, 무의식과 역사적 상처를 독특한 문체로 직조해 온 그는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돼 왔다. 이번 전시는 그런 ‘세계문학의 아이콘’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의 문장이 어떻게 개별 독자의 삶 속에서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다.
플랫폼엘 역시 이번 전시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16년 개관한 플랫폼엘은 패션 브랜드 루이까또즈의 문화예술 후원 경험을 바탕으로 태진문화재단이 운영해 온 복합 예술 공간이다. 지난 10년간 동시대 미술과 다원예술, 퍼포먼스, 실험적 프로젝트를 꾸준히 소개해 온 이곳이 10주년 기념전으로 하루키를 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미술관이 소설가를 호출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감수성의 공통 언어를 찾는 과정에서 하루키가 하나의 플랫폼이 된 셈이다.
결국 이 전시는 하루키 팬을 위한 팬 서비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소설가의 아카이브, 작업 동반자의 원화,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변주, 그리고 동시대 문화 생산자들의 응답이 한자리에 모이는 구조는 문학이 더 이상 책장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전시장에서 미즈마루의 선을 따라 오래 멈출 것이고, 누군가는 하루키가 남긴 취향의 사소한 흔적에서 자기 청춘의 시간을 건질 것이다. 또 누군가는 하루키를 전혀 읽지 않았더라도, 익숙한 일상에서 조금 비껴난 감각의 통로를 발견할지 모른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한 작가를 둘러싼 거대한 해설서가 아니라, 그를 통과해 각자의 기억과 취향, 상실과 고독, 사적인 감수성을 다시 만나는 전시다. 하루키를 읽은 사람에게는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전시이고,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왜 इतने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 곁에 머물렀는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전시다. 플랫폼엘의 봄은 그렇게, 문학을 읽는 대신 문학의 공기를 걷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