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知人之鑑〈3〉 유방이 천하를 갖게 된 까닭 : 월간조선

# 장면 1.

미천한 가문 출신의 유방(劉邦)은 고제 5년(기원전 202년) 5월에 마침내 초나라 항우(項羽)를 깨뜨리고 천하를 차지했다. 한(漢)나라를 세운 제(帝) 유방은 기쁜 마음으로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크게 술자리를 베풀고 자신을 따랐던 신하들에게 뜻깊은 질문을 던진다. 반고의 《한서(漢書)》가 전하는 그날의 이야기다.

“통후(通侯)와 여러 장수들은 감히 짐(朕)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니 모두 그 속내[情]를 말하도록 하라. 내가 천하를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항씨(項氏-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개인 성품이) 오만해 다른 사람을 깔보시는데[嫚而侮人] 항우는 어질어 다른 사람을 공경했습니다[仁而敬人]. 그러나 폐하께서는 사람들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해 점령하게 된 곳을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천하와 이익을 함께했습니다. 항우는 뛰어난 이를 투기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질시하여[妒賢嫉能] 공로가 있는 자를 해치고 뛰어난 이를 의심하여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다른 사람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땅을 획득해도 그들의 이익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입니다.”

상(上)이 말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 무릇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에 있어서 나는 자방(子房-장량)만 못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며 식량을 공급하고 군량 공급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 있어서 나는 소하만 못하고, 또 100만 대군을 이끌고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적을 패퇴시키는 일에 있어서 나는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서 나는 그들을 능히 썼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항우는 단지 범증(范增)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제대로 쓰지를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붙잡힌 까닭이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기뻐하며 복종했다.

실전적 제왕학의 극치 유방

신하들의 대답과 유방의 반박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제왕학 이론에 능하다 한들 유방처럼 제국을 창건한 이의 실전형 제왕학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기와 왕릉의 대답을 줄이자면 이렇다. 개인적인 성품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공로를 나눠주는 시스템을 잘 만들었기에 천하제패가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는 현대사회 기업이론에 적용할 경우 오너가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보상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으면 그 회사는 잘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유방의 답은 단호하다. 우리가 지금도 쓰는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한다’는 말의 저작권자인 유방은 자신의 승리 요인은 용인(用人)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고기나 왕릉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유방의 자가 진단이다.

# 장면 2.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유방을 보필한 명재상 소하.

죽음을 앞둔 유방에게 부인 여후가 뒷일을 물었다. 우선 그 문답을 보자.

“폐하의 100년 후에 소상국(蕭相國-소하)이 이미 죽고 나면 누구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해야 합니까?”

임금에게는 죽음 운운할 수 없어 “100년 후”라고 한 것이다. 지금의 재상 소하(蕭何)를 이을 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유방은 “조참(曹參)이오”라고 했다. 이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답이다. 그 다음은 누구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왕릉(王陵)이면 할 수 있을 것이오. 다만 그는 조금 고지식하니[少戇=少愚] 진평(陳平)이 그를 도울 수 있을 것이오. 진평의 지혜는 남들보다 나음이 있지만 혼자서 일을 다 맡기[獨任]는 어렵소. 주발(周勃)은 사람됨이 무겁기는 한데 학식[文]이 조금 부족하지요. 하지만 우리 유씨(劉氏)를 안전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주발이니 그는 태위(太衛-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위직이다)로 삼을 만하오.”

자기 아내의 앞날까지 내다보다

여씨 일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한나라를 안정시킨 주발.

왕릉은 앞에서 나왔던 바로 그 인물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주발에 관한 것이다. “우리 유씨(劉氏)를 안전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주발”이라는 구절이다. 여후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면 이 대화는 여기서 중단됐어야 한다. 그러나 여후는 그런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유방은 사실상 “우리 유씨를 위험에 빠트릴 사람은 반드시 당신이니 그로부터 유씨를 지켜 줄 사람은 주발이오”라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방의 이런 대답은 평소 욕심 많은 부인 여씨의 성품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문답 과정에서도 이미 그런 조짐이 드러나 있다. 즉 조참이라고 했을 때 물음을 그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여씨는 자기 형제들을 염두에 두고서 또 물으니 유방은 “왕릉”이라고 하고서 경고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방의 깊은 생각을 알 길 없는 여후는 또 물었다. 이에 유방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 이후는 진실로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당나라 때 사람으로 《한서(漢書)》의 대표적인 주석자인 안사고(顔師古)의 촌평이 무섭다. “내가 죽고 나면 당신도 얼마 안 가서 죽을 터이니 더 이상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얼마 안 가서 여후도 황제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죽었고 여씨 형제와 조카들은 주발이 이끄는 신하들에 의해 모두 주륙됐다. 유방은 앞일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 장면 3.

《한서(漢書)》 고제 본기에는 이보다 더 섬뜩한 장면이 나온다.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10월의 일이다.

고제 유방은 오(吳)나라 왕 자리가 비었다며 왕실 사람들 중에 누가 적합한지 추천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한다. 이에 신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패후(沛侯) 비(濞)가 진중하고 후덕하니[重厚] 그를 세워 오왕으로 삼을 것을 청합니다.” 이에 유방은 유비를 제배하고서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얼굴에는 반란의 관상[反相]이 있다.”

이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拊=摩循] 말했다.

“한나라는 앞으로 50년 후에 동남쪽에 어지러움[亂]이 있을 터인데 설마 너이겠는가? 하지만 천하는 같은 성의 한 집안[同姓一家]이니 너는 삼가는 마음으로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결코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不敢]”라고 말했다. 그가 50년 후, 동남쪽이라 한 것은 점을 친 결과였다. 물론 10년의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정확히 41년 후인 기원전 154년 오초(吳楚) 7국의 난이 일어난다. 이름에서 오나라가 맨 앞에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반란의 주동자는 오나라 유비였다.

유방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인 유비는 유방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봉국(封國)인 오나라에 나아가 봉국에 있으면서 망명객들을 모으고 주전(鑄錢)과 제염(製鹽)을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세금을 내리는 등 위민책으로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경제(景帝) 때 중앙집권 강화 차원에서 봉국을 약화하는 방책을 건의한 조조(晁錯)의 구상에 따라 봉국을 몰수하려 하자 오왕 유비는 주륙(誅戮)한다는 명분으로 초(楚)와 조(趙), 교서(膠西), 교동(膠東) 등 제후국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른바 오초(吳楚) 7국의 난이다. 한나라 조정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격퇴시켰다. 유비는 결국 동월(東越)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유방의 말을 되새겨 본다. “너의 얼굴에는 반란의 관상[反相]이 있다.”

유방과 한신

숱한 전공을 세우고도 팽당한 한신.

우리에게는 과하지욕(胯下之辱), 즉 무뢰배의 사타구니를 기어가는 치욕을 견뎌 낸 인물로 잘 알려진 한신. 그는 초나라 항우 밑에 있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자 유방에게 의탁했다. 초한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다. 그런데 유방의 휘하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군법을 어겼다 하여 사형에 처해질 신세에 놓였다. 이때 하후영이 한신의 탄식을 듣고서 살려 주었고 심지어 유방의 무한한 신뢰를 받던 승상 소하에게 그를 추천했다. 소하는 한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유방에게 천거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방은 선뜻 한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후 치속도위(治粟都尉-식량과 말먹이를 관장하는 군관)가 됐는데 역시 도망가 버리자 소하가 쫓아가 데리고 와서 그 참에 한왕에게 천거하여 말했다.

“반드시 천하의 패권을 쥐고자 하신다면 신(信)이 없이는 함께 일을 꾸밀 자가 없습니다.”

사실 유방은 한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하의 권유가 이어지자 마침내 재계하고서 단장(壇場)을 설치해 신을 제배하여 대장군으로 삼고서 계책을 물었다. 이때 한신이 내놓은 계책이다.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군왕을 남정에서 왕노릇을 하게 했으니 이는 유배를 보낸 것[遷]입니다. 장교와 병사들은 모두 산동 사람들이니 밤낮없이 (동쪽으로 가려고) 발을 들어 안달하고 있으니[企] 그들을 예봉으로 삼아 쓰신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돼 백성들이 모두 스스로 평안해지면 다시 쓸 수가 없습니다. 계책을 결단하시고 동쪽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항우와 산동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읽어 낸 한신의 계책을 높이 평가한 유방은 드디어 그에게 일을 맡겼다. 그러나 사람 보는 데 탁월한 유방은 동시에 한신의 사람됨도 읽었을 것이다. 한신은 삼가는 마음[敬]이 부족했고 늘 위를 넘보았다[犯上]. 유방이 이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유방의 대장군이 된 한신의 활약은 말 그대로 눈부셨다. 2만의 군사로 배수진을 치고 그 10배인 조나라를 제압했다. 이어 제나라를 공격해 함락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신은 제나라 왕이 되고자 했다. 유방과 한신의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아직 항우와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유방으로서는 한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한신에게 남은 길은 자신이 유방을 딛고 올라서거나 아니면 죽음, 이 둘뿐이었다. 한신은 뛰어난 군인이기는 했으나 전략가는 아니었다. 반면에 유방은 뛰어난 군인이면서 전략가였다. 천하는 전략가의 몫이다.

초한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나라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방은 한신의 병권을 회수한 채 초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이것으로 이미 한신은 독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기원전 201년 장안으로 압송돼 신분은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됐고 고제 10년(기원전 197년)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몰래 내통하여 호응하려고 했는데 사인(舍人)이 그가 병사를 일으켜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 한다고 고발해 버렸다. 여후와 상국 소하의 계략에 걸려 장락궁(長樂宮)으로 유인된 뒤 살해당했다. 이것이 역사가 전하는 한신의 최후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실은 유방의 밀지 혹은 묵인에 따른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신은 서툴렀다.

한신과 남이장군

남이장군의 묘.

무대를 조선으로 옮긴다. 1468년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자정 무렵 한양 수강궁 후원 별전에서는 친국이 한창이었다. 별전 뜨락에는 남이장군이 형틀에 묶인 채 친국을 당하고 있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뒷 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세종 때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토벌 작전을 이끌어 큰 공을 세웠고 이어 여진족 정벌에서 족장 이만주를 참살해 28살의 나이로 공조판서에 올랐던 남이다. 세조는 남이를 누구보다 아껴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이 또한 그 자체만으로 남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유자광이 모함을 하고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공신 그룹이 예종의 뜻을 받들어 남이는 억울하게도 역모의 혐의를 덮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죄가 있다면 한신과 마찬가지로 큰 공을 세운 데 있었다. 군공(軍功)을 세운 자는 그래서 서둘러 관직을 떠나야만 목숨을 보전하던 것이 옛날에는 지혜이자 이치였다.

남이는 이런 지혜가 없었고 이런 이치를 몰랐다. 젊어서였을까? 해답은 그가 남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좋게 보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담겨 있다 하겠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우활(迂闊)하다는 평을 면치 못한다. 우(迂)는 마음이 비뚤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뜻이고 활(闊)은 듬성듬성, 대충대충이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지봉유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조선 중기 때의 학자 이수광은 남이의 시에 대해 이런 촌평을 남겼다.

“그 말뜻이 힘을 믿고 함부로 날뛰어 평온한 기상이 없으니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유방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의 전형

《논어(論語)》 계씨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면서 아는 자는 최고요,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겪고 나서야 그것을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이요, 겪고 나서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최하가 된다.”

전통적인 풀이에서는 아는 자를 지식을 아는 자로 보았다. 비문(非文)이다. 이 풀이의 실마리는 그것[之]에 있다. 그것이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즉 날 때부터 사람을 볼 줄 아는 자, 그 사람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보는 법을 배워서 사람을 볼 줄 아는 자다. 공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머지 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유방은 사람을 쓸 줄 알았다. 지인(知人)에 그치지 않고 용인(用人)에도 능했던 것이다. 《한서(漢書)》를 쓴 반고는 유방을 이렇게 요약했다.

“애초에 고조는 문학(文學-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가리킨다)을 닦지 못했지만 품성[成]이 밝고 매사에 통달했으며[明達] 계책을 좋아하고[好謀] 능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아[能聽=聰] 문지기[監門]나 수자리 병사[戍卒]라도 옛 친구를 대하듯이 했다.”

돌이켜 보면 유방은 소하가 한신을 추천할 때부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가까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와의 싸움이 극에 이르자 삼군을 통솔하는 지휘권을 가진 대장군의 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어쩌면 이미 토사구팽(兎死狗烹)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신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