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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 춘향전

《춘향전》의 혁명성은 어디로 갔는가?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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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전》 속에는 ‘19禁 소설’을 방불케 하는 에로티시즘과 시대에 항거하는 혁명성이 공존
⊙ 춘향이 ‘열녀’ 자처하면서 변학도 수청 들기를 거부한 것은 당시의 상식에 어긋나는 판타지
⊙ 단순히 부조리에 대한 항거가 아니라 ‘너만은 잘되었으면 하는’ 민중의 인간다운 심성이 핵심
춘향의 초상. 춘향은 부조리한 현실에 항거해 인간다움을 찾는 민중의 염원을 반영한다.
  《춘향전(春香傳)》은 우리나라 고전 중의 고전이다. 과장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그 내용을 알고 있다 해도 될 정도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춘향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을 찾으면 손에 꼽을 정도다. 이런 괴리의 이유는 생각보다 싱겁다. 읽지도 않고, 알려 하지도 않고, 그냥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 유명하니 말이다. 옛것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며, 지난 것의 향기만으로 오늘이 풍성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못 알아보는 흐리멍덩한 눈과 아둔한 귀 때문에 소중한 것이 사장된다면 그건 퍽이나 곤란하다. 오늘 우리가 《춘향전》을 바르게 살펴봐야 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남원(南原)에 사는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춘향(春香)이가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과 연애를 한다. 이후 이몽룡이 떠나자 절개를 지키며 신임사또 변학도의 박해를 견뎌내고,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이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말했듯이 《춘향전》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안다고 여겨 넘어가는 습관이 퍼져 버려 오해가 진실처럼 굳어져 있는 것이 꽤나 많다.
 
 
  성춘향, 김춘향, 서춘향?
 
1971년 이성구 감독의 〈춘향전〉. 홍세미가 춘향, 신성일이 이몽룡 역을 맡았다.
  우선 ‘방자(房子)’가 그렇다. 방자는 ‘방에 딸린 종’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몽룡 옆에 따라다니던 남자 종의 이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방자도 이름이 있겠지만 서사에 중요치 않으니 드러내지 않고 그냥 신분으로 부른 것이다. 즉 이몽룡이 “방자야, 저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은 그냥 “이놈아, 저것이 무엇이냐?”란 의미 정도이다.
 
  이 굳어진 오해로 《춘향전》을 읽다 보면 당연히 매끄럽지 않은 대목이 나온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해서 감옥에 갇힌 춘향이가 서울에 계신 서방님께 편지를 써서 방자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 편지를 지닌 방자가 서울로 가다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는 이몽룡과 만나게 된다. 재담과 사설이 복잡해서 골자만 말하면, 이몽룡이 그 춘향의 편지를 보려 하지만, 방자가 남에게 보일 수 없다며 거부해서 한참 승강이하다가, 결국 이몽룡이 보게 되는 내용이다. 이 장면에서 갸우뚱거려지는 이유는 이렇다.
 
  “어떻게 방자가 이몽룡을 몰라봐?”
 
  “아무리 이몽룡이 몰락한 양반 거지 복색으로 꾸몄다고 해도 그렇게 몰라?”
 
  “오랫동안 남원에서 같이 지냈잖아? 이게 말이 돼? 월매는 거지 모양이어도 잘도 알아보더구먼.”
 
  이런 의아심은 너무 간단한 것을 몰라서다. 이몽룡의 ‘방(房)에 딸려 있던 몸종[子]’과 춘향이가 부탁을 한 ‘방자’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몽룡을 모시던 방자는 사또 자제의 방에 딸린 몸종이니 지금은 새로 온 사또의 자제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함부로 남원을 떠나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춘향은 다른 방자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방자’와 같은 오해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박힌 것이 춘향의 성(姓)이다. ‘성춘향’으로만 알고 있지만 서울 지역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는 ‘김춘향’이고, 오자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서춘향’도 있다. 그녀의 성이 끝날 때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 텍스트도 있다. 따지고 보면 춘향이 첩일 수밖에 없는 은퇴 기생[退妓]의 핏줄이니 아버지가 불분명한 것이 당연하다. 가장 유명한 《춘향전》 텍스트인 완판방각본(完板坊刻本)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가 아버지를 ‘성 참판’이라 하다 보니 춘향의 성이 성으로 굳어져 버렸지만, 춘향의 아버지는 천한 남성, 지방 무관 천총(千摠), 때론 양민처럼 특정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사실 《춘향전》 이본(異本) 중에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貰冊本)이란 점이 중요하다. 즉 소장하는 텍스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빌려 읽었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이 〈남원고사〉인 것이다. 바로 그 춘향의 이름이 ‘김춘향’이었으니, 옛날 사람을 만나 ‘성춘향’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가능성이 훨씬 큰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성이 있을 수 없는, 정확하게는 있을 필요도 없는, 춘향에게 성을 붙이고 그것이 텍스트마다 바뀐 이유는 춘향처럼 절개를 지키는 매력적인 인물이 자신들의 춘향이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내재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느낌으로 시큰둥하는 지금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춘향’은 아이돌이었다. 터질 듯한 환호와 열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꿈의 존재였던 거다.
 
 
  19금 소설 《춘향전》
 
임권택 감독의 2000년 작 〈춘향뎐〉. 조승우와 이효정이 각각 이몽룡, 춘향 역을 맡았다.
  《춘향전》의 핵심 가치를 굳이 꼽자면 에로티시즘과 혁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둘은 항상 같이 다니는 긴밀한 관계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에로틱한 감정의 원초적 흥분은 쉽게 파토스적 호소로 이어지고, 그런 성(性)은 계급, 신분, 나이, 지역, 문화를 뛰어넘는 원동력이 된다. 성을 통제하는 것이 대중을 억압하는 주요한 수단이라고 한 빌헬름 라이히까지 갈 것도 없이, 음담패설을 일삼는 상황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음담패설이 구연(口演)되는 상황과 공간은 그 순간 평등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변모하고 그 상황에 같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동참한 공범 혹은 동지가 된다. 신분, 나이, 계급 등과 같은 문명적 가치를 떠나서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이다.
 
  《춘향전》이 바로 그랬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렇지, 이 텍스트는 그야말로 19금(禁)으로 도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의 한 대목 〈사랑가〉도 마찬가지다. 첫마디인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부터 그렇지만 이어지는 사설을 한번 음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드라마와 영화로 손쉽게 보여주는 것만 받아먹는 식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겐 잘 보이지 않겠지만, 그 수위가 지금 보기에도 상당하다. 소설에서 첫날 밤 장면을 서술한 대목은 더하다.
 
  〈원앙금침(鴛鴦衾枕)을 촛불 아래에 펼쳐 놓고, 하얀 피부와 꽃 같은 용모가 드러나니 춘정(春情)을 자아내는 것이 아리땁고 미칠 지경이다.
 
  “도련님 먼저 벗으시오.”
 
  “나 먼저 벗은 후에 너는 아니 벗으려나 보다. 잡말 말고 너부터 벗어라.”
 
  춘향이 먼저 벗은 후에 이 도령도 마저 벗고 춘향을 잡아채서 덥석 안고 두 몸이 한 몸이 되었구나. 네 몸이 내 몸이요 네 살이 내 살이라. 호탕하게 무르녹아 여산 폭포에 돌이 구르는 듯 데굴데굴 구르면서…〉 -〈남원고사〉
 
  이후에는 더 노골적인 상황과 이야기들이 줄줄 한참 동안 이어진다. 제대로 떠올려가며 이해할 수 있는 약간의 수준만 되면 이런 포르노그래피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당대에 음란소설로 낙인찍힐 만하다.
 
  몽땅 이렇게 까발리듯 하는 것만 있다면 《춘향전》은 〈변강쇠가〉 정도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춘향전》의 에로티시즘은 그보다는 훨씬 격이 높다.
 
  유명한 남원 광한루의 단오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네 타는 춘향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몽룡의 밀고 당기는 애간장 녹는 듯한 흥분과 긴장감이 팽팽하게 그려진다.
 
 
  그네 타기의 에로티시즘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던 남원 광한루.
  꽃 피고 새 우는 5월이었고 그들은 이팔청춘 16세였다. 양(陽)의 기운이 겹으로 쌓이는 날 중에서도 가장 양기가 성하다고 하는 단오(端午)는 남자는 씨름, 여자는 그네 타기를 하는 흥분의 놀이마당이다. 지금도 그 나이에 그렇게 화창하고 따스한 날씨라면 감정이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딱히 열정을 발산할 일과 기회가 현저히 적었던 옛날에는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리는 명절이 단오였다.
 
  단오의 그네 타기는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儀禮)에 기원을 둔 것으로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성적(性的) 상황의 유래를 지니고 있지만 그런 원초적 전승 상황은 여기선 접어두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현재적 상황만으로 풀어보자.
 
  그네를 타본 사람은 다 느끼듯이, 힘껏 위로 올라갈 때의 격앙된 흥분과 내려올 때의 안도감에 섞인 기대의 흥분은 실상 성적 유희와 비슷하다. 그네를 혼자서도 타지만 서로 마주 보고 둘이 타는 경우를 떠올리면 그 흥분과 상상의 장난이 훨씬 더 분명하다. 한 명은 흥분으로 올라가고 바로 그때 다른 한 명은 안도감으로 긴장적 진정이 이루어지고, 그러다가 다시 상황이 바뀌어 이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상승적 감정의 고조를 일으킨다.
 
  이렇게 단옷날 광한루에서 그네 타는 춘향의 감정이 에로틱했다면, 보는 이몽룡의 심정도 역시 비슷하게 고조되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흥분과 불안을 ‘포르트(Fort) 다(Da) 게임’으로 설명했는데, 간략히 말하면, 아이에게 어떤 대상이 나타났다(있다) 사라지는(없다) 것이 흥분과 불안이 교차하는 쾌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자주 하는 ‘까꿍 놀이’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모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통해 아이들은 흥분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Fort] 것이 다시 나타날[Da] 것에 대한 기대를 자아내는 그네 타기의 과정은 쾌락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렇게 프로이트적 쾌락 심리가 깔려 있기에, 광한루에 단오놀이 나온 춘기 방장한 이몽룡이 멀리 보이는 물 찬 제비처럼 왔다 갔다 하며 보이다 말다 하는 야릇한 것이 무엇인지 방자에게 다그치듯 물은 것이다. 그리고 계속 모른 척하며 짐짓 약을 올리는 방자에게 “얘 방자야! 우리 둘이 의형제 하자. 방자 동생아, 날 살려라!”라고 하다가, 아예 “방자 형님아!”라고까지 간청하며 매달렸던 것이다. 한껏 달은 몸을 살려달라며, 빨리 저 야릇한 것을 데려오라고, 그렇게 애걸한 것이다.
 
 
 
변학도를 위한 변명

 
  《춘향전》이 담고 있는 혁명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 변학도다. 악인(惡人)의 전형이 돼 버린 그는, 조선시대 현실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
 
  물론 변학도가 남원에서 탐학무도(貪虐無道)한 짓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암행어사 이몽룡에게 징치 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보면 이유는 오직 하나, 춘향을 탐했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변학도의 대표적 악행(惡行)을 꼽자면 기생점고(妓生點考)인데, 실상은 그가 기생점고를 하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로 처벌받아야 한다. 기생점고는 신임사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관리들이 교체될 때, 지역 현안과 추진하던 사업과 민심 동향 등은 물론 기본적 물품들과 병장기, 관청 살림살이들까지 꼼꼼히 확인하는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연한 절차에 관기(官妓)들도 포함된다. 관기는 지방에 출장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필수 요원으로 남원은 물론 어느 관청이든 법률로 그 숫자를 정해놓았다. 꼭 점검해야 하는 것이, 지방에서 지내며 정이 든 지방관이 임기가 끝나 돌아갈 때 관기를 데려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법에서 엄금했기 때문이다. 관기는 국가의 재산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점검해야 했다.
 
  물론 춘향은 관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방관이 부르면 달려가야 했다. 춘향의 부친이 어떤 신분이든 종모법(從母法)을 따르는 조선시대에 기생 모친의 신분을 따라 천민(賤民)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타난 춘향은 이치에 닿지도 않는 소리를 연신 늘어놓으며 지방관인 사또의 수청(守廳)을 거절한다. “소녀가 비록 천한 몸이오나, 어려서부터 예법은 알아….” 어쩌고 하며, “지아비가 있으니 수청을 못 하겠다”는 소리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망발에 현실을 도외시한 방자함의 극치다. 변학도 입장에선 속에서 천불이 날 소리다.
 
  예법은 양반 부녀자의 것이지 천한 기생 딸년의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예법을 안다 한들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전임 사또의 자제와 혼인관계라는 말은 그야말로 억지다. 정확하게는 그냥 ‘데리고 놀다 버리고 간 신세’라는 것이 옳은 상황 판단이다. 공식적으로 혼인을 한 적도 없고 첩으로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단지 춘향 혼자서만 지아비라고 우기는 거였다.
 
  소설 이본에 따라, 첫날밤에 “절대 너를 버리지 않고 잊지 않겠다”는 내용을 적은 불망기(不忘記)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그냥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법적 효력은 물론 사회적 기능도 없다.
 
  “몸이 달아서 어떻게라도 해보려고 그냥 써준 거요.”
 
  “아니, 장난으로 써준 걸 가지고 대체 뭔 소리요?”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주변에서 듣는 사람들도 그냥 춘향의 안쓰러운 호소에 혀를 차며 쓴웃음을 지을 상황인 것이다.
 
 
  법적 근거 없는 춘향의 항거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당대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가 춘향 역을 맡아 화제가 됐다.
  좋다. 한참 양보해서 춘향을 이몽룡의 첩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바뀔 게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한두 번 데리고 지낸(?) 첩이 그야말로 한둘이 아니었다. 한 번 밤을 지내놓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첩으로 받아들인다는 약조를 골백번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현재 그 누구도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는 상황에 놓인 여성에게 눈독을 들이는 힘센 남성들의 행패는 늘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아무나 찝쩍거릴 수 있었단 소리다. 때때로 여성 입장에서 그렇게 다른 남자에게 가서 새로운 첩 생활을 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원하기도 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춘향이처럼 그런 손길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남자들이 그냥 물러설까? 그런 일은 없다. “감히 첩년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가 냉정한 사회 현실이었다.
 
  혹시 예전의 서방이 나타나 “내 첩을 왜 당신이 가져갔소?”라고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풀 일이었다. 서로 돈을 주고받고 마무리 짓든 아니면 힘이나 정치적으로 처리하든 아무튼 그냥 그렇게 여성과는 상관없이 처리되고 마는 문제였다. 그녀들의 신세는 정말 딱한 거였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 놓인 말도 안 되는 약자 주제에 감히 지방관의 수청을 거절하다니 그야말로 놀랠 일이었다. 변학도 입장에서 보면 이런 항거는 지방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물론 춘향의 항거에는 근거가 있었다. 《사기(史記)》 〈전단전(田單傳)〉의 “충신은 두 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고[忠臣不事二君] 정녀는 두 명의 남편으로 바꾸지 않는다[貞女不更二夫]”는 명분이었다. 여기서 정녀(貞女)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녀(烈女)인데, 아무튼 이렇게 열녀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한 것이다. 하지만 춘향은 양반도 아니고 실제로 정혼한 사이도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근거이다. 춘향은 그냥 악을 바락바락 쓰며 억지를 부리는 거였다.
 
  절대 열녀가 될 수 없는 춘향은 이렇게 열녀 코스프레를 하며 모진 고초를 당한다. 그리고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 이몽룡이 장원급제해서 남원의 암행어사로 내려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춘향만 꼭 집어서 감옥에서 구출해 낸 것이다. 아무리 소설이 픽션이라지만 너무 과한 무리수의 연속이다.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할 수는 있지만, 과거에 급제한다고 대뜸 암행어사가 되지는 못한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왕명을 받아 민정을 시찰하는 관리로, 생판 초짜 관리에게 시키지 않는다. 적어도 4~5년은 된 관리에게 밀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을 이몽룡은 대뜸 받은 것이다.
 
  비록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었다 해도 남원에 내려올 수는 없다. 자신의 연고지는 피하게 하는 상피제(相避制)가 있어, 절대 남원 지방 암행어사에 제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해낸다. 그야말로 이몽룡은 드라마처럼 이 어려운 일을 연달아 해낸다.
 
  그리고 남원에 내려와 춘향만을 쏙 구출해 낸다. 사실 그가 암행어사로서 한 일은 민정시찰이나 공정한 정사(政事)를 펼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사적 복수와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권력 남용에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것에 주목하지 않고, 암행어사의 멋진 출또 장면의 스펙터클과 터무니없는 근거로 우기며 바락바락 대들던 억센 춘향이를 구출하는 것만 집중한다.
 
 
 
《춘향전》의 혁명성

 
  그렇게 결국 춘향은 정렬부인(貞烈夫人)이 된다. 천민이 양반 여성이 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고도 말하지만 그 논쟁은 접어두고, 그보다 더 궁금한 본질적 물음을 해보자. 이몽룡을 둘러싼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설정 중에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이렇다.
 
  “이전에 버리고 간 여자를 그렇게까지 다시 보고 싶소?”
 
  발칙한 말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물음이다. 서울에 그 내로라하는 여성들이 즐비하고, 정치적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는데도, 그것을 다 도외시하고 춘향이를 구출해서 정실 처로 삼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양반 남성의 결연이란 늘 그렇듯 정략결혼이었으니 정치적 연줄에 따라 다른 여성을 처(妻)로 삼고, 정말 춘향이 좋으면 첩(妾)으로, 이번엔 진짜 첩으로 삼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이몽룡은, 아니 《춘향전》은, 수많은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더니, 마침내 춘향이를 꼭 그렇게 정렬부인으로 삼았다.
 
  당대 바른 상식을 가진 남성이었다면, 아니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양반이든 상민이든 모두가 다, 이렇게 속으로 뇌까렸을 것이다.
 
  ‘아니 무슨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원…’
 
  바로 여기에 《춘향전》의 혁명성의 본질이 있다.
 
  《춘향전》의 혁명성을 말하라면, 정절(貞節)이나 열(烈)과 같은 가치를 담고 있다거나, 변학도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의 착취에 대한 항거와 비판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담겨 있다. 절개나 시대비판 같은 것은 다른 작품에도 있지만, 그 작품이 《춘향전》만큼 각광받지 못했고 《춘향전》만큼 우리의 심금을 울리지도 못했다. 《춘향전》에는 더 근본적인 가치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춘향전》은 그 물음을 던졌고 사람들은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을 했다.
 
  춘향이 변학도에게 발악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는다. 수청을 거절한다는 것이 어리석음 정도가 아니라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이란 것을 잘 안다.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는 것도, 남원에 내려와 구출해 내는 것도, 그리고 정렬부인으로 삼는 것도, 모두 다 말이 안 되는 소리란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판타지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는 거다. 자신들은 비록 질곡(桎梏)에 묶여 있지만, 춘향만은 벗어나서 훨훨 그랬으면 좋겠는 거다.
 
 
  춘향의 발악
 
  춘향의 입장이 되어 보자. 매정하게 이몽룡이 떠난 후 그녀에게 괴로움이 닥쳤다. 좋다. 그래 이미 버린 몸, 변학도에게 바치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놈이 간 다음은 어떻게 될까? 또 다른 놈이 올 거고, 그놈도 또다시 또 그럴 거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또, 또, 또….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어떻게 될까? 그녀다움은 어디로 가 버릴까? 아니 애초에 그녀다움이란 게 있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변학도가 춘향을 단념해서 내버려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것도 바뀔 건 없다. 감옥에 갇히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냥 그런 것이다. 서울 도령님은 다른 여자 만나 잘 먹고 잘살 것이다. 그리고 춘향은…. 무엇보다 이번엔 잘 넘겼지만 변학도 다음에 올 다른 사또에겐 어떻게 해야 할까. 악을 쓰며 온 힘을 다해 거절하면 그 새로운 권력자는 과연 들어나 줄까?
 
  그랬다. 그녀는 이놈(이몽룡) 저놈(변학도) 찝쩍대고 괴롭히고, 어떻게든 단물만 빼먹고 버리려는, 이 황망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 우겼다. 떼를 썼다. 그렇게 우기고 억지를 부리며 바락바락 대들어야만 겨우 제자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랬던 거다.
 
  춘향의 발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알았다. 그렇게 버티는 안쓰러움을 눈물 섞인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번 씹다 버린 껌을 다시 입에 넣을 리 없지만, 그 고귀한 양반 도령께서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구출하러 내려올 리도 없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 정렬부인이 될 수 없지만, 그렇게 되게 한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렇게 《춘향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퇴색해 가는 《춘향전》
 
  남원 사람들은 모두 다 춘향이 감옥에서 고생할 때 같이 애달파했고 슬퍼했고 통곡했다. 춘향이 서울로 올라가자 그 모두 자기 일인 것마냥 신이 나서 기뻐했다. 무슨 혜택이 돌아가서가 아니었다. 춘향이처럼 자신들도 잘될 거라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한마음이었다. 그녀가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비록 나는 아니어도 너만은 행복하게 살아라’는 열망, 그것이 바로 《춘향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춘향전》을 읽고 듣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것이 《춘향전》 혁명성의 본질이다.
 
  《춘향전》의 혁명성이 사라졌다면 그건 정절이 퇴색하고 민중적 비판 의식이 시들해져서가 아니다. 인간다움의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네가 행복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하고 행복감이 차오르는 그 무엇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어도 너는….’
 
  눈물 섞인 열망과 환희와 기쁨이 사라졌기에, 냉철하고 차가운 지식의 이론과 계산만 남았기에, 《춘향전》은 더 이상 치명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
 
  지금 우리의 고전 《춘향전》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춘향전》을 알려 하고, 누가 《춘향전》의 가치를 되새기려 하는가. 《춘향전》의 혁명성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지난날 영광의 찬란한 명성을 곱씹으며 힘겨운 미소만 짓고 있는가.
 
  글쎄 잘 모르겠다. 냉정한 현실 인식으로 보자면 내 생각에 《춘향전》은 먼지 쌓인 채 낡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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