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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중국 뒤흔든 왕리쥔 사건의 막전막후

“江澤民 영향력이 胡錦濤 영향력보다 강하다는 증거”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전 조선일보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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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사실상 내정, 차기 권력구도에 미치는 영향 작아
⊙ 개혁개방 지속하자는 ‘광둥모델’과 사회주의 이념 중시하는 ‘충칭모델’의 대결
⊙ 원자바오의 ‘정치개혁’ 강조는 립서비스 불과

朴勝俊
⊙ 58세.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 홍콩·베이징 특파원, 국제부장, 중국전문기자, 베이징특파원 겸 지국장,
    북중전략문제연구소장, 인천대 중국학연구소 겸임교수 역임.
⊙ 現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 저서: 《등소평 평전》 《중국이 재미있다》 《중국, 중국인 똑바로 보기》
    《격동의 외교비록 한국과 중국 100년》.
미국 망명을 시도한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왼쪽)으로 인해 실각한 보시라이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중국 충칭(重慶)시 당서기가 3월 15일 해임됐다. 그의 후임으로는 장더장(張德江) 부총리가 겸임 발령됐다.
 
  보시라이는 최측근인 왕리쥔(王立軍) 충칭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이 지난 2월6일 미국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정치적 곤경에 처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시라이는 3월 초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 외견상 건재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왕리쥔 사건으로 인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일단 시간차를 두고 천천히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때문에 보시라이의 해임은 오는 10월 제18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3월 14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충칭시 당위원회와 시(市)정부는 왕리쥔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어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 데 이어, 이튿날 전격 해임된 것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으로 이어지는 동안 굵직한 정치적 음모가 배후에 깔린 사건이 끊이지 않아 왔으나, 2002년 권력이 장쩌민(江澤民)에게서 후진타오(胡錦濤)에게로 넘어간 이후에는 정치적 파도가 대체로 가라앉은 흐름을 보여 왔다. 있었다면 2006년 상하이(上海)시 당서기였던 천량위(陳良宇)가 부패 스캔들로 실각한 정도다. 최근 5~6년간은 이렇다 할 정치적 음모가 깔린 사건이라 할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국 정치무대에 돌연 왕리쥔(王立軍) 충칭(重慶)시 부시장 겸 전 공안국장이라는 지방정계 거물이 청두(成都)시 소재 미(美) 영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가 출동한 충칭시 경찰 차량 70여 대가 영사관을 에워싸자 2월 7일 밤 자진해서 걸어 나오는 알 수 없는 사건이 뜬금없이 발생했다. 왕리쥔은 2월 8일 오전 베이징(北京)으로 압송돼 다음 날인 9일 중국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로 신병이 넘겨졌다. 따라서 사건은 ‘왕리쥔 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왕리쥔 사건 이후 중국 안팎의 시선은 일제히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에게로 쏠렸다. 오는 10월 중국공산당 제18차 당대회(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부총리를 투톱으로 하는 새로운 지도체제가 등장하기로 예정된 중요한 시점에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스타’ 보시라이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
  중국의 대외(對外)무역과 해외투자를 총괄하는 국무원 상무부장을 지내고 2008년부터 인구 3000만명의 중국 최대 인구의 도시 충칭시 당 서기로 부임한 보시라이는 그동안 왕리쥔을 앞세워 ‘창홍타흑(唱紅打黑)’, 이른바 붉은 이데올로기를 재(再)확립하는 선전활동을 강화하고, 조직폭력과 범죄를 소탕하는 치안안정 활동을 강화하는 것을 정치적 브랜드로 내세워 올가을 당대회 때 구성될 새로운 지도부의 핵심에 진입하려 해 왔다.
 
  그런 마당에 당대회를 불과 7개월 앞두고 창홍타흑의 선봉장(先鋒將)이었던 왕리쥔 부시장 겸 전 공안국장이 중국이 현재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미국의 영사관에 뛰어들어 가서 망명을 요청했다면, 중국의 정치적 기밀이 송두리째 미국에 넘어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보시라이의 정치적 미래에는 이미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확히는 ‘왕리쥔 사건’이라고 해야 할 ‘보시라이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 보고, 앞으로의 정치적 파장을 예상해 보기 위해서는 보시라이는 누구이며, 왕리쥔은 누구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보시라이는 1949년생 올해 63세로,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이다. 보이보는 1957년에 일찍이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경제전문가이며, 지난 2007년 99세로 사망했다.
 
  보이보는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할 때 덩샤오핑의 측근으로 경제정책에 대한 조언을 많이 했다. 보이보는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修交)할 때에도 덩샤오핑의 부탁으로 한국과 중국의 수교 당위성을 당내(黨內)에 설명하는 역할을 해서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 보이보의 아들인 보시라이에게는 자연히 ‘태자당(太子黨)’이라는 이름이 꼬리표처럼 붙게 됐다.
 
  보시라이는 중국의 최고 명문 베이징(北京)대학 역사학과에서 세계사를 전공하고, 사회과학원에서 신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런 지적(知的)인 배경과 훤칠한 키에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가진 잘생긴 호남형 외모에다가 달변의 설득력을 겸비한 그는 중국공산당 내의 스타 간부였다. 보시라이는 1993년 ‘북방의 홍콩’이라는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시장, 1999년 다롄시 당서기, 2001년에 랴오닝성 성장을 지낸 후, 2004년에 베이징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상무부 부장(장관)에 올랐다. 당에서는 중앙위원과 정치국원을 거쳤다.
 
 
  漢族에서 몽골족으로 호적 세탁한 왕리쥔
 
  ‘북방의 스타’라고 자타(自他)가 공인하던 보시라이는 4세 연하인 시진핑이나, 6세 연하인 리커창보다 훨씬 먼저 중국 국내외에 ‘중국공산당의 미래 지도자’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보시라이로서는 올 10월의 당대회가 9인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라는 최고 집단지도체제의 멤버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5년 뒤의 19차 당대회 때는 이미 68세가 되어 중국공산당의 내부 합의에 따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없는 나이가 되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2008년 충칭시 당서기가 된 이후 자신의 운명을 걸고 이른바 ‘창홍타흑’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 영사관에 뛰어들어 가는 돌발행동을 해서 보시라이의 출세길에 돌연 커다란 그림자를 던진 왕리쥔은 보시라이보다 열 살 아래의 내몽골 출신이다. 그는 몽골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호적을 고쳐 소수(少數)민족인 몽골족으로 출신성분을 세탁하면 출세에 유리하다는 점을 활용하기 위해 신분을 바꾼 것이다.
 
  왕리쥔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인민해방군에 입대해서 복무하다가 전역과 동시에 공안(경찰)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2003년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 공안국장 자리에 올랐고, 2008년 보시라이가 상무부장에서 충칭시 간부로 전보될 때 보시라이를 뒤따라 충칭시로 옮겨가 공안국장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른바 “문무(文武)를 겸비했다”는 말을 듣는, 재주가 많은 인물이다. 취미로 시작한 서화(書畵)가 프로의 수준에 올라 그가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그 판매액을 놓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충칭모델’ vs. ‘광둥모델’
 
작년 11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한 후진타오와 장쩌민(오른쪽).
  보시라이가 재주꾼인 왕리쥔을 앞세워 벌인 ‘창홍타흑’ 캠페인은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보시라이가 벌인 캠페인을 미국과 유럽의 학계에서는 ‘충칭모델(Chongqing Model)’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1949년 이후 1978년까지 중국의 시계추가 왼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면, 1978년부터 오른쪽으로 움직여 갔다가 이번 보시라이의 캠페인을 새로운 깃발로 해서 과거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 위주 사회로 다시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을 낳았다. 심지어는 오는 가을 출범하는 시진핑과 리커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중국지도부의 국가전략이 과연 어느 방향이 될 것인가를 설명하는 두 개의 깃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칭모델이었다.
 
  충칭모델에 대응하는 개념은 ‘광둥(廣東)모델(Guangdong Model)’이다. 보시라이와는 달리 광둥성 당서기인 왕양(汪洋·57)은 중국이 현 상황에서 달려가야 할 길은 개혁개방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며, 개혁정책의 심화를 위해 정치체제의 개혁도 과감히 거론하고 연구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양은 현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같은 고향인 안후이(安徽)성 출신으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간부 출신이다. 왕양은 보시라이의 충칭시 당서기 전임자이기도 하다.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의 충돌은 현재 중국사회 전체가 이번 10월의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여부를 놓고 격렬한 이념투쟁을 벌이고 있는 흐름을 대변한다.
 
 
  뒤바뀐 역할
 
왕양 광둥성 서기.
  아이러니컬한 것은, ‘충칭모델’의 주인공인 보시라이와 ‘광둥모델’의 주인공인 왕양의 역할이 정확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사로 중국 경제발전을 선도한 덩샤오핑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인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가 주장해야 할 것이 바로 ‘광둥모델’이다. 경제적으로는 개혁파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덩샤오핑의 노선보다는 마오쩌둥의 노선 쪽에 서 있는 듯한 후진타오와 동향(同鄕)인 데다가 후진타오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인 왕양이 주장해야 할 것이 ‘충칭모델’이다. 그런데 그 역할이 서로 뒤바뀐 것이다.
 
  이 점을 두고 중국 지식인들은 보시라이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후진타오의 지지를 겨냥한 ‘충칭모델’을 주창하고, 보시라이와 반대편에 서 있는 왕양은 거꾸로 장쩌민 전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지지를 겨냥해서 ‘광둥모델’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분석을 내놓는 중국 지식인들은 “이번에 보시라이가 겪고 있는 정치적 풍파는 덩샤오핑 사상을 정확히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장쩌민 전 당주석의 영향력이 여전히 좌(左)편향인 후진타오의 영향력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보이보라는 개방개혁의 기둥이었던 인물의 아들로, 당연히 ‘광둥모델’ 쪽의 입장에 서야 할 보시라이가 출세에만 눈이 어두워 오히려 좌편향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점을 장쩌민 세력이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이번 사단(事端)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보시라이를 위해 충칭의 부패 관리들을 잘라내고, 폭력조직들을 와해시키는 데 앞장섰던 왕리쥔이 어느 날 자신은 물론, 주군(主君) 보시라이도 방향을 잘못 잡고 있어서 정치적 장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중국 탈출을 기도했다는 설(說)도 있다.
 
  막후(幕後)의 진실이 어떤 것이든 지난 3월 5일 후진타오 당 총서기 체제 아래에서의 마지막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보시라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3월 9일 충칭시 인민대표들이 공동으로 가진 내외신(內外信) 기자회견장에도 나와서 “사회주의의 최대의 우월성은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창출하는 것”이라는 평소 창홍타흑의 주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만약 소수인(少數人)들만 부유해지는 자본주의로 굴러 떨어진다면 우리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빈부(貧富)격차를 축소하고, 공동부유를 실현하는 것이 충칭시 정부 시정강령의 중요한 기둥이며, 그것이 창홍타흑의 기본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공동부유를 생산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의 목표라고 말했으며, 엥겔스도 사회주의 공평분배에 대해 말하면서 어떤 실현방식을 채택하든 공동부유라는 흐름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오(毛) 주석은 건국 초기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목적은 모두에게 할 일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며, 모두가 공동부유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덩샤오핑 동지도 전국 인민들이 공동으로 부유해져야지, 빈부 양극으로 분화해 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최대의 우월성은 공동부유에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
 
  보시라이는 마치 왕리쥔 사건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이 평소의 지론(持論)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설명해 나갔었다.
 
  같은 날 저녁 광둥성 인민대표들과 함께 내외신 기자회견에 나선 왕양 광둥성 당서기는 “급히 공(功)을 다투기 위해 단기적인 이익을 구하는 데 몰두한다면, 경제발전 방식의 전환을 하기에 쉽지 않은 병목과 만나게 될 것”이라면서 “경제발전의 단기(短期)효과에 집착하지 말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종합국력의 상승이라는 목표에 따라 발전을 지속해 나가자”고 말했다.
 
  왕양 역시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성장의 지속을 강조하는 ‘광둥모델’의 지지자다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양은 정치개혁에 대해서도 활발한 언급을 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보다 활발한 모습을 띠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천시퉁 사건 연상케 해
 
  왕리쥔 사건은 1995년의 왕바오썬(王寶森) 베이징시 부시장 자살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왕바오썬 부시장은 천시퉁(陳希同) 베이징시 시장의 심복이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와중에서 덩샤오핑에 의해 상하이시 시장 겸 당서기에서 일약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된 장쩌민은 권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천시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십분 활용했다.
 
  장쩌민은 천시퉁의 제1 심복이었던 왕바오썬 부시장이 미모의 TV 여성앵커에게 부당하게 확보한 아파트를 몇 채씩 주는 등의 비리를 저지른 점을 포착, 먼저 왕바오썬을 압박해서 자살로 몰고 간 후, 천안문 사태의 책임과 비리 혐의를 묶어서 천시퉁을 제거했다.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 내정자들
 
후진타오-원자바오 이후의 중국을 이끌어갈 시진핑(왼쪽)과 리커창(오른쪽).
  보시라이 사건은 오는 10월에 이뤄질 중국 최고지도부의 교체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올 사건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가 시진핑-리커창 체제로 교체되도록 골조가 짜였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1명이 되느냐 마느냐의 여부도 이미 보시라이의 정치국 상무위원 진출 자체가 가능성이 많지 않은 것으로 전망되던 터였다.
 
  차기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단을 보자.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시진핑, 총리는 리커창,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거시경제 담당 부총리는 장더장(張德江) 부총리와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로 각각 예상되고 있다. 서열 4위의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에는 사상 최초의 여성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으로 내정된 류옌둥(劉延東) 정치국원 겸 국무위원, 이데올로기와 선전 담당에는 류윈산(劉云山) 현 정치국원 겸 서기처 서기, 기율담당에는 리위안차오(李源潮) 현 당중앙조직부장, 공안과 사회종합치안 담당에는 멍젠주(孟建柱) 현 공안부장이 이미 내정된 상태다.
 
  이들은 이미 활발히 관영TV에 모습이 소개되면서 외국손님을 접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리위안차오와 멍젠주는 이미 2010년과 2011년 초 사이에 평양을 방문해서 생전의 김정일(金正日)과 상견례까지 마쳐 놓은 상태였다.
 
  물론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1~2명 정도는 유동적이다. 이 유동적인 자리에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 바로 보시라이와 왕양, 그리고 장가오리(張高麗) 톈진(天津)시 당서기,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당서기 등 4명 중 1~2명일 것으로 예상돼 왔다. 보시라이는 바로 이 1~2석의 4개 특별시 담당 당서기 가운데 1석을 따기 위해 그동안 맹렬히 뛰어 왔던 터였다.
 
 
  중국의 앞날 점치는 시금석
 
  보시라이의 정치적 운명이 중국공산당의 앞날에 던지는 그림자는 이처럼 보시라이 자신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 여부보다도 보시라이가 내세우던 창홍타흑의 이른바 충칭모델이 중국지도부에 의해 채택되느냐 마느냐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올 가을 이후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갈 시진핑-리커창 체제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다소 좌적(左的)이고 분배에 역점을 두는 ‘충칭모델’의 길이냐, 지속적인 개혁이 강조되는 ‘광둥모델’의 길이냐를 두고 현재 중국사회 내부,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와 관련, 최근 마리청(馬立誠)이라는 학자가 쓴 《당대 중국 8대 사회사조》라는 책이 출간돼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현재 중국사회에는 ①덩샤오핑 사상 ②노(老)좌파 ③신(新)좌파 ④자유주의 ⑤민주사회주의 ⑥신유학파 ⑦민족주의 ⑧순수민족주의 등의 사조로 지식인 사회가 편가름을 한 채로 격렬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큰 흐름으로는 앞으로 시진핑-리커창 체제가 걸어가야 할 발걸음이 과거의 마오쩌둥 이데올로기 위주의 사회적 요소를 다소 회복해야 한다는 좌적인 흐름과,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을 최소한 2020년까지는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우적(右的)인 흐름으로 크게 나뉘어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다.
 
  보시라이의 실각(失脚)이 곧 충칭모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시라이의 실각은 차기 총서기인 시진핑(習近平)이 지지하는 광둥모델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원자바오 총리는 3월 14일 “정치개혁에 성공하지 못하면 경제개혁이 끝까지 이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기를 1년 남겨 놓은 원 총리가 마지막 전인대 내·외신 기자회견 석상에서 정치개혁에 대해 언급한 데 대해 외신들은 중국의 ‘민주화’와 관련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원 총리의 발언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중국 정치체제의 성격상 정치개혁은 총리의 소관이 아니다. 정치개혁은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 체제 아래서 국가지도부가 숙려(熟慮)를 거듭하면서 긴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풀어나갈 과제다. 원 총리의 발언은 전인대 폐막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 외신기자들을 위해 립서비스(lip service)를 한 데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치열한 노선투쟁 계속될 것
 
마오쩌둥의 후계자였다가 덩샤오핑에게 밀려난 화궈펑.
  이번 왕리쥔 사건은 왕리쥔이 청두 주재 미 영사관에 뛰어들어 가고 영사관 주위를 70여 대의 충칭시 경찰차가 봉쇄하고, 영사관에서 걸어나온 왕리쥔이 베이징에서 파견된 수사관들에게 압송되어 가는 광경들이 중국판 페이스북인 웨이보(微博)를 통해 생중계되듯 알려졌다. 웨이보에 공개된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중국 외교부가 2월 9일 왕리쥔의 미 영사관 진입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일파만파로 파문이 확대되어 나가는 흐름을 보여주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중국의 최고 권력은 당초에 화궈펑(華國鋒)이라는 인물에게 넘어가 있었다. 덩샤오핑의 날카로운 인물됨을 알고 있었던 마오쩌둥이 생전에 “당신이 일을 맡으면 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해서 화궈펑이 후계자가 되도록 배려한 대로 화궈펑의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 화궈펑은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과 지시는 무엇이든지 옳다”는 이른바 범시론(凡是論), 다시 말해 마오쩌둥의 유훈에 의한 통치론을 국가통치의 근간으로 제시했었다.
 
  마오 사후의 그런 권력승계에 반기를 든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은 마오 사후 당내 토론과정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은 실천”이라는 실천론, 다시 말해 “국가전략은 어디까지나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제시해서 화궈펑의 범시론을 누르고 마오 사후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국 정치의 그런 흐름을 볼 때 이번 보시라이 사건은 앞으로 오는 가을까지 당내에서 전개될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을 둘러싸고 전개될 노선투쟁의 결과에 따라 정리될 것이다. 그런 노선투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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