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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감독을 만나다] 김기영

‘변태’를 자처한 한국 컬트 영화의 ‘敎主’

글 :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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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감지 않을 것 같은 푸수수한 머리, 검은 테 안경 속에 부릅뜬 가재눈, 거칠한 피부, 무릎 나온 바지에 닳고 닳아 실밥이 흘러나오고 단추는 떨어진 윗도리,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 모습을 상상하면…

林度京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졸업. 동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학생들과 함께 보았다. 임상수 감독의 리바이벌 작 <하녀>가 칸영화제에 초대받자 원작을 감상할 기회로 만든 자리였다. 수업시간에 영상 관련 강의를 할 때 한국의 고전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그만 필자부터 놀라고 말았다. 그 시기에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경이로웠다. 저 영화가 나온 지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사이 한국영화가 과연 얼마만큼 진화해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주인공인 김진규씨가 차렷자세로 등장해 ‘이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하자’ 식의 계몽멘트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부분만 들어낸다면 영화는 정말 완벽했다.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 무관한 이 부분은 아마 그 차가운 시대가 남긴 ‘사족’이 아닐까 한다.
 
  솔직히 김기영 감독에 대한 관심은 그저 한국영화의 역사를 익히는 과정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름 정도였다. 김기영식 영화를 별로 즐기지 않는 개인적 취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녀〉와의 만남은 일순간 생각을 바꿔버렸다. 얼마 전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할 때 그에게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자 주저없이 “이만희 감독과 김기영 감독”이라고 답했는데, 그 말에 곧바로 동지적 감정이 되었다. 한국영화의 서정주의를 대표하는 감독이 이만희라면 표현주의는 김기영이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스토리텔링에 집착하는 리얼리즘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더 비중을 두는 표현주의를 고집하는 전형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영화팬들 사이에서 김기영 감독은 ‘한국 컬트 영화의 교주’로 통한다. 보통 컬트 영화란 소수의 집단에 의해 광적으로 숭배받는 영화를 일컫는데, 김 감독의 영화처럼 상업적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 ‘복수 3부작’ 시리즈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박찬욱 감독도 열혈 영화광으로서 그에게 숭배를 바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복수 3부작 시리즈와 김기영 감독의 <하녀> <화녀> <충녀> 등 심리 공포극 여자시리즈는 어떤 면에서는 많이 닮아 있다. 시리즈물들은 서로 다른 영화로 분장하고 있지만 감독이 전하려는 일관된 메시지 속에서 일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연호씨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기영 감독은 평생 한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서른두 편은 단지 그것을 약간 다른 형태로 토막 냈던 절단의 역사일 수 있다. 이 영화의 토막은 저 영화의 토막과 붙을 수 있다. 그래도 모자라거나 남는 토막은 반드시 다른 영화의 어딘가 붙을 수 있다. 마치 도마뱀처럼 살아나는 토막들의 조합, 무서운 생명력을 가진 그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따지는 일은 오히려 무색해진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확실하게 그만의 색채가 있다. 멜로 영화로 포장은 하고 있지만 그 속에 쥐 같은 혐오 동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의 생식 본능을 음란하고 저열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그는 멜로물의 꽃인 에로티시즘조차 광기를 주입해 관객들이 그저 편하게 즐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어도> (1977)에서는 남근에 칼을 꽂은 시신과의 섹스라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 2주 만에 간판을 내릴 정도로 외면당했지만, 현재 영화광들에게 <하녀>와 함께 ‘김기영 신앙’을 만드는 작품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지미, 안성기 데뷔시켜
 
초기 영화제작 현장에서 김기영 감독(가운데 앉은 이).
  또 철저한 신인 위주의 캐스팅으로 승부하는 것도 유별나다. 잘나가는 배우를 내세우면 흥행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늘 신인을 등용해 썼다. 자기 스타일의 연기에 대한 고집 때문이다.
 
  그는 “신인들은 연기에 때가 안 묻어서 내가 시키는 대로 연기를 따라하기 때문에 내 연출 의도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어. 그래서 나한테 첫 작품을 한 배우는 다른 감독들한테 가서는 혼이 나는 모양이야. 어디서 그 따위 연기를 하냐고. 하지만 내 연기지도는 철저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이론에 충실하지.”(유지영, 김기영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 선, 2006.)
 
  그래서 그는 당시 잘나가는 배우보다는 신인들을 기용했다. 대표적인 배우가 <이어도> <반금련> <수녀> <파계> <느미> 등 그의 영화 7편에만 출연하고 영화계를 떠난 이화시씨다.
 
  그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불구 혹은 비정상인, 사회적 약자로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미장센으로 중시했던 조명 속에서 일그러져 버린다. 외모보다는 탄탄한 연기력을 더 중시했기에 스케줄에 쫓기는 알려진 배우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데뷔시켜 성공한 배우 중 대표주자가 바로 김지미, 안성기, 문희, 김승호씨다.
 
  그의 영화 <황혼열차>(1957)를 통해 길거리 캐스팅으로 김지미씨와 조역배우였던 안화영(전 세경영화사 전무)의 다섯 살짜리 아들 안성기가 데뷔했다. 김지미씨는 뛰어난 외모로 이 한 편을 거쳐 일약 스타가 됐고, 안성기씨는 그의 영화에 단골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국민배우로 성장했다. <여, 여, 여>에 캐스팅된 이후 청춘스타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한국영화 전성기를 누린 문희씨는 물론, 김승호씨도 1대 ‘국민 아버지’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이런 김기영 감독을 직접 만나서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보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쉽다. 그는 1998년 2월 5일, 76세를 일기로 그가 만든 영화처럼 너무나도 극적으로 사망했다. 종로구 명륜동의 자택에서 화재로 인해 평생 동지였던 아내 김유봉 여사와 함께 생을 달리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떠난 이후, 35년간 남긴 32편의 영화는 신화처럼 남아 국내외 영화계에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영화 제작 위해 술과 담배도 끊어
 
  특히 그의 대표작 <하녀>는 2008년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이끄는 세계영화재단(WCF, World Cinema Foundation)에서 그해 디지털 복원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되살아났다. <하녀>가 선정된 것은 특히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열렬한 지지 덕분이었다고 한다. WCF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 복원작업은 보통 제3세계의 우수 영화 발굴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 우리의 영화를 보존하기 위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외부의 발굴에 의해 선정된 작품으로서 작업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디지털 복원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통상 그들이 작업하던 곳에 맡기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직접 해낼 것을 요청했다고 하니 더 민망하다.
 
  <하녀>는 디지털 복원을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에 수집될 당시 원본 네거필름 10롤 중 2롤(약 20분 분량)이 없어서 다른 해외상영관 프린트(복사본)에서 아날로그로 복원해 채워진 상태였다. 필름 보관상태도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열악했다고 한다. 필름 위에 손으로 영어 자막을 긁어 넣는 바람에 손상도 상당해서 이를 복원하는 일은 최고의 기술력이 총동원된 대공사였다. 그렇게 복원한 디지털 <하녀>는 2008년 칸영화제에 출품돼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이 사실은 국내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김기영 감독은 사후에도 여전히 영화계에서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영화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당시 그를 만났던 기자들은 “이상한 사람” “눈만 봐도 오싹한 사람” “아무 말도 안 해서 인터뷰가 어려운 사람” 등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면서 기피하는 감독이었다. 180cm가 넘는 키에 거대한 몸집, 평생 감지 않을 것 같은 푸수수한 머리, 검은 테 안경 속에 부릅뜬 가재눈, 거칠한 피부, 무릎 나온 바지에 닳고 닳아 실밥이 흘러나오고 단추는 떨어진 윗도리,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 모습을 상상하면 왜 그런 생각들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화 이외의 삶에는 돈을 거의 쓰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돈을 아끼려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영화계 인사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의 조감독 출신이면서 김 감독과의 인터뷰집 〈24년간의 대화〉를 쓴 유지형 감독조차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는 유명 감독이 되면 한 해에 열 편 이상의 영화를 찍는 경우도 적지 않던 다산의 시대에 평생 ‘겨우’ 32편의 영화를 남겼다. 제작과 감독을 겸했던 이중고와, 촬영과 조명과 미술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수공업의 고수 등이 이유였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주도하는 수공업 제작 방식의 틀 안에서 작가주의적 일관성을 지켜냈다. 60~70년대 살벌한 정치상황에서 사전검열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며 지금까지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컬트 영화를 내놓은 업적은 이런 고집 덕분이었다.
 
  감독이 만든 영화는 바로 그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가 남긴 32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인생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몇 편의 인터뷰를 통해 설명하는 그의 삶은 이러했다.
 

 
  서울의대 다니면서 연극반 활동
 
  1919년 서울 교동에서 출생한 그는 소학교 3학년 때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고보를 졸업했다. 다시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의대 시험을 봤지만 낙방하고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교토대 의학부를 다녔다. 그때 주로 좌익극을 공연하는 쓰키지 극장에서 모스크바 유학파인 일본의 뛰어난 극작가 오사나와 가오루의 연극과 강연을 들으면서 당시 진보적인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광이기도 했다. 아벨 강스, 르네 클레르, 쥘리앵 뒤비비에의 영화에서 많은 교감과 영화적 이론을 터득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살 돈이 없어서 커다란 회중시계를 들고 극장에 가서 커트(한 장면)의 타임을 잴 정도로 영화에 열광했다. 해방 후 서울에 돌아와 서울 의대(구 경성의전)에 진학했는데, 공부는 뒷전이고 일본에서 보았던 연극을 잊을 수 없어서 서울대 통합 연극반을 만들었다.
 
  이때 입센의 <유령>, 셰익스피어의 <햄릿> <베니스의 상인> 등을 무대에 올려 대학극의 수준을 넘는다는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해방 후 그는 좌우익 대립 속에서 여운형씨가 주도했던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잠시 활동을 할 정도로 좌익에 심취했지만 연극을 하면서 정치활동을 떠났다. 평양의전에 다니는 학생들과의 합동공연을 위해 평양에 가서 프랑스의 극작가 빌드라크의 <상선 테나스티>를 무대에 올렸다. 당시 한국계 소련인 검열관이 이 무대를 보고는 그에게 모스크바 유학을 제안했다. 이 시기에 대해 김 감독은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이북에서 이데올로기에 젖어 계몽 연극이나 하며 평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서울로 돌아온 그가 안톤 체호프의 <악노>를 공연할 때 여배우로 소개받은 치대 여학생이 바로 그의 아내이며 영원한 영화 동지인 김유봉 여사이다. 대학연극반 시절은 6·25 전쟁으로 피란을 떠나는 바람에 끝이 났지만, 이들의 인연은 여기서 다시 시작됐다.
 
  피란지인 부산 대학병원에 근무하던 중 연극부에서 활동하던 여학생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그 여학생은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오빠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김 감독은 그녀에게 “판잣집을 지으면 올래?”라고 이야기했고, 둘은 그렇게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치과 의사가 된 아내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영화계에 뛰어든 남편을 제작자로서 마지막까지 지원했다.
 
  그는 부산에서 평양고보 선배인 오영진씨를 만나 의사 일을 하면서 대한공보원에서 만든 ‘대한뉴스’를 만드는 일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됐다. 하지만 당시 오씨는 폐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야 했다. 16mm 뉴스카메라로 찍어서 현상하고 편집하고 녹음에 해설까지 써야 하는 중노동이었지만 재미를 느끼면서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던 습관은 이후로도 이어진다.
 
 
  의사 봉급의 10배 넘게 받고 미국 공보원으로 전직
 
김기영 감독.
  대한뉴스에 연극적인 요소를 결합하면서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미국 공보원(USIS)에서 ‘리버티뉴스’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의사 월급이 3500원이었는데, 공보원에서는 그에게 5만원이라는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제의했고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이직을 결심했다. 의사생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리버티뉴스의 촬영지는 진해와 마산 사이에 있는 상남촬영소였다. 이 촬영소에는 직접 미국에서 갖고 온 최첨단의 갖가지 영화기자재가 마련돼 있어 최신시설의 영화촬영소로 꼽혔다. 한마디로 미국의 어느 유명한 스튜디오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엄청난 필름을 사용하면서 촬영도 해 보고 편집기와 현상기로 영화 전반에 대한 작업을 하는 동안 나름대로 자신의 영화적 가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다른 감독들의 조감독 시절과 같은 수련기가 될 것이다.
 
  김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특이하게도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입봉한 케이스에 속한다.
 
  그는 공보원에서 리버티뉴스를 만들면서 남은 필름으로 극영화를 연습하기 시작하는데, 그 습작이 트럭을 의인화한 <나는 트럭이다>와 진해에 근무하는 한국수병의 이야기를 담은 <수병일기>, 삼십 분 분량의 단편영화로 전쟁 통에 다리가 잘린 소년을 간호하는 간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병실> 등이다.
 
  이렇게 영화를, 뉴스제작에 이어 단편영화로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다른 감독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습관이 생겼다. 영화의 설계도인 콘티에 철저하게 의존해 촬영하는 것이다. 김 감독의 말이다.
 
  “콘티는 리버티뉴스 시절 단편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지. 그리고 콘티에 의해 철저하게 찍은 것도 사실이야. 난 촬영을 하기 4~5일 전쯤에 콘티가 나와야 해. 그걸 다시 내 식으로 수정을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업을 다시 하곤 하지. 그러나 지금도 그렇듯 내 콘티는 나만 아는 부호와 암호로 기록돼 있어. 난 내 콘티를 다른 사람이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특히 배우들의 경우인데, 그들에게 콘티를 보여주면 콘티대로 연기를 하지 않고 제 딴에 계산을 해서 딴 짓을 하거든. 그래서 난 현장에서 배우들에게조차 내 콘티를 보여주지 않아.”(유지형, 〈24년간의 대화〉, 선, 2006)
 
〈하녀〉. 1960년.
  대부분의 감독들이 현장 상황에 따라 콘티를 수정하면서 촬영하지만 그는 조명을 비롯해 미술까지 현장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만들어 놓고 뉴스대본처럼 치밀하게 영화를 찍었다. 그의 영화가 지금까지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은 이런 치밀한 작업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김 감독은 <화녀>(1971)가 성공한 이후에야 집을 샀다. 남산으로 오르는 주자동 골목의 이층집이었다. 이 집은 원래 흉가여서 시세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귀신이 있는 집이면 귀신이 잘살도록 해 놓아야 해를 끼치지 않고 도와준다며 이 집 내부를 온통 검정으로 칠했다. 그의 주술이 통했는지 몰라도 그는 이 집에 사는 동안 만든 영화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산 명륜동 고옥은 선대 때부터 살아온 집이었다. 이 집 역시 흉흉한 과거를 갖고 있는 집이었다. 선대의 노부부가 함께 대들보 밑에 깔려 죽기도 했고, 또 다른 부부 역시 한시에 함께 죽음을 맞은 장소였다. 오래되다 보니 비닐로 천장을 가린 채 몇 해를 그대로 놔둔 상태였고, 찌그러진 대문을 거쳐 복도 끝의 작업실까지 걸어가면 흰 양말이 까맣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이 집은 김 감독이 찍은 영화의 소품 창고이기도 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골동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소품 하나에도 감독의 영향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어지러운 곳에서 그는 50여 편의 시나리오를 쓰며 부활을 꿈꿨다. 그러다가 선대의 부부처럼 김 감독 부부 역시 화재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영화 속에 묻어 나는 병리학적 사회관
 
〈화녀 82〉. 1982년.
  비범한 그의 삶처럼 그는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한 영화에 몰입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초기부터 표현주의 양식을 띠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이 의사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부산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시절, 병원 선배가 실수로 식염수통에 넣어 둔 유아의 시체를 목격한 충격이 자신의 영화 형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소름 끼치는 컬트영화를 만들었지만, 실상은 무서운 장면을 촬영하고는 곧 외면해 버릴 정도로 겁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는 그런 자신을 ‘변태’라고까지 서슴없이 표현했다.
 
  의사 출신인 그가 사회를 병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불구자로 그려지고 있다. <하녀>에서 백치 식모, <화녀>에서 성폭력 충격으로 간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수녀>에서 반벙어리가 그들이다. 아이들 역시 귀여움을 잃고 소아마비 환자나 말더듬이로 등장한다.
 
  이런 영화 속 현상들을 보면 김 감독은 현실 세계에서 불행한 감독이었을 것같은 느낌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실생활은 유복한 편이었다. 치과의사인 아내와 함께 삼남매를 잘 키워냈는데, 두 아들은 사업가이고, 딸은 어머니의 직업을 이어받아 치과의사가 됐다. 그의 사위 역시 치과의사다. 자식 중 어느 누구도 영화계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영화에 매료된 아버지의 척박한 삶을 세습하고 싶지 않은 바람 때문일 수도 있다.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만드는 그에게 매번 군사독재 시절의 검열과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은 가혹한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영상자료원 김기영 전작전 공식 포스터.
  그는 그렇다고 다른 감독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바보사냥>(1984) 이후 10년간 어떤 영화도 찍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영화인들을 만나 어려움을 호소한 적도 없다. 그를 아는 영화인들은 그와 차 한 잔, 밥 한 끼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시절 그는 차가운 서재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렸고, 한편으로는 대학시절 연극반을 기억하며 연극계로 돌아갔다. 이때도 그는 연극의 제작비를 모으고 또 적은 제작비 안에서 작품을 올리기 위해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았다. 그는 늘 그렇게 혼자였다.
 
  영화제작 이외에는 철저하게 절약하며 사는 구두쇠였던 그의 생활태도 때문에 영화계에는 아직도 떠돌아다니는 유명한 일화들이 많다. 90kg이 넘는 거구로 유난히 육식을 좋아하는 그가 지방촬영 현장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다가 서울대 후배이기도 한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들킨 사건도 그중 하나다. 이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 정 감독이 바로 서울로 올라가 버리자 다음날 그가 남대문 시장에서 산 햄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옆구리에 끼고는 정 감독의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정 기사, 미안해. 난 몸집이 너무 커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힘이 없어. 다 같이 먹을 돈은 없고…”라는 말에 화를 풀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 현지 촬영 때는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주말이면 심야상영관에 들어가서 이틀 밤을 보내고 나온 적도 있다는 등 수없는 구두쇠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런 웃지 못할 이야기들은 한국 자체가 가난했던 시절, 대부분의 영화를 직접 제작했고, 그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아내가 치과를 경영하면서 벌어 오는 수입으로 충당했던 상황에서 김 감독이 피할 수 없었던 현실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되었던 ‘김기영 감독 10주기 전작전’에서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당시 사모님은 김 감독의 영화를 5분 보면 운다고 그랬다. 버린 돈 생각 때문에”라는 말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외곬의 삶이었기에 영화계에 회자되는 모든 기행이 그의 분신인 서른두 편의 영화와 함께 한국영화의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김기영 감독의 영화 이야기
 
  ‘김기영 스타일’로 한데 묶인 32편의 영화
 
  김기영 감독은 35년간 3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55년 작 <주검의 상자>가 첫 작품이었고, 1990년 작 <죽어도 좋은 경험>이 마지막이었다. 이 영화는 김 감독의 상영포기로 포스터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채 창고에 박혀 있다가 그의 사후에 발견돼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비평가들은 그를 두고 “한국영화사에서 최초로 작가주의적 일관성을 드러낸 감독”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이연호씨는 “이런 평가의 이면에는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라는 상찬과 ‘악취미의 수집가’라는 비판이 함께 포함돼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까닭에 대부분의 영화를 스스로 제작했다. 영화 자막에 나오는 한국문예영화사, 신한문예영화사, 유락영화사, 유성영화사는 모두 그가 만든 제작사였다. 여기서 다른 감독들이 사실상 ‘직업 감독’으로서 일 년에 수 편의 영화를 찍을 때에도 그는 자신이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서두르지 않고 일 년에 한 편 정도만 만들어냈다.
 
  그래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무의미하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만들어 냈지만, 대부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되고 있어, 한 개의 퍼즐판과 같다.
 
  그나마 아쉽게도 초기 영화인 <주검의 상자>(1955) <양산도>(1955) <봉선화>(1956) <여성전선> (1957) <황혼열차>(1957) <초설>(1958) <십대의 반항> (1959) <슬픈 목가> (1960) 중 현재 제대로 보존돼 있는 영화는 <양산도> 딱 한 편뿐이다. 당시 신문 영화평을 통해 보면 이때 작품들은 전후 이탈리아에서 드러난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제작들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라는 시대상황과 함께 그가 뉴스를 위한 기록영화 제작으로 영화를 시작한 데서 드러나는 특질이 어우러지면서 영화 속 현실 재현 효과가 뛰어났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영화 세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면, 차라리 제작 시기보다는 그가 다뤘던 주제들을 중심으로 분류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이런 분류는 김 감독에 대해 깊이 연구한 영화평론가 이연호씨가 처음 시도한 것인데, 김 감독의 영화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쉽게 그의 영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
 
 
  <양산도>가 스스로 뽑은 걸작 11편 중 첫째
 
〈충녀〉. 1972년.
  초기작 중 <양산도>는 김기영적 출발을 드러내는 첫 번째 영화로, 미 공보원을 떠나면서 만들었다. 이 작품은 김 감독이 스스로 뽑은 자신의 영화 걸작 11편 중 단연 첫 번째인데, 특히 신분의 차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남녀가 무덤 속에서 피투성이로 섹스를 하고 하늘로 승천하는 라스트신은 초현실적인 영상미로 김기영식 화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녀>(1960)로 시작되는 중·후기 작품들은 김 감독의 색채가 더욱 뚜렷해진다. 그 시점을 중심으로 김 감독이 즐겨 다뤘던 주제는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화두는 산업화로 시작된 근대적 도시의 삶 속에 드러난 혼돈상이다. 당시 한국영화의 역대 흥행기록을 깬 <하녀>와 <충녀>(1972)가 대표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서구적 삶으로의 전환에 성공한 당시 중산층 가정의 부부와 시골에서 올라와 하층계급을 형성한 식모 혹은 첩들이 벌이는 내밀한 암투를 다루고 있다. 계단이 있는 2층집, 서양시계들, 스테인드글라스 등 화려한 장치가 산업화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징물들을 쥐, 쥐약 같은 혐오물이 위협하고 있다. 마치 계급 간의 갈등처럼. 김 감독은 이런 스토리를 실제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에서 차용해 왔다. <하녀>는 창원에서 식모가 주인 내외를 살해한 ‘금촌 살인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충녀>는 첩으로 지내던 극장 사장의 비서가 사장을 살해한 ‘명보극장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선지 <하녀>를 본 당시 주부들은 영화가 끝난 뒤 “저년 죽여라!”고 외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육체의 약속〉. 1975년.
  <하녀>는 10년을 주기로 리메이크됐는데, <하녀>의 컬러영화판 <화녀> (1971)와 <화녀 82>(1982)가 그 작품들이다. <화녀>로 김 감독은 재기에 성공했다. <충녀>는 <육식동물>(1984)로 이어진다. 이 멜로물들 속에서 주부의 자리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입장은 늘 같다. “돈은 여자가 벌고 남자는 가정보다 사회에 소신껏 일하며 보람을 찾아야 한다”(영화 <흙>에서 여의사의 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 감독 부부의 살아가는 방식이었던 듯하다.
 
  두 번째는 근대화로 인해 벌어지는 시대적 비극상을 담은 시대물들이다. 그 당시 아직까지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전근대성의 과도기적 갈등을 다룬 <양산도>와 <고려장>(1963)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양산도>는 양반과 평민의 계급적 갈등을 다루고 있고, <고려장>은 유교적 효의 사상과 당시 경제적 효율성의 혼돈스러움을 제기하고 있다.
 
  세 번째는 근대와 전근대를 넘나드는 작품인데,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가 대표적이다. <살인나비…>는 세상을 비관해 자살하고자 한 사람이 동반자살을 기도해 애꿎은 사람까지 죽은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제작된 작품이다. 이 사건은 김 감독의 손에서, 살아있는 남자의 간을 요구하는 2000년 전 여자의 유골과 청년의 이야기로 재탄생됐다.
 
 
  <여, 여, 여>는 아내가 직접 각본을 써서 참여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의 포스터. 1966년.
  네 번째는 그 당시 유행했던 시, 라디오 드라마, 소설 등 당대의 베스트셀러급 소재를 영화화한 것이다. 비록 소재를 외부에서 차용해 왔다 하더라도 “원작의 30%만 살린다”는 김기영식의 해석이 내려진 작품들이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1966) <렌의 애가>(1969) <이어도> (1977)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청준의 원작 <이어도>는 원작의 스토리 라인과는 달리 파랑도라는 섬이 레저개발로 인해 파괴되는 환경문제로 다루고 있어 원작자까지 “김기영식 해석에 놀랐다”는 평가를 들은 작품이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다섯 번째는 <파계> (1974)나 <흙> (1978) 등 당시 유행하던 ‘문예영화’의 범주에서 김기영식 색채를 입혀 가며 변주한 작품들이다. <파계>는 ‘색즉시공’과 같은 관념적인 화두를 놓고 구도의 행각 자체를 새디스트적 잔혹미학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 이광수 원작의 <흙>은 농촌계몽운동을 주제로 했지만 ‘그의 여자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되어 있다.
 
  여섯 번째는 성(性) 그 자체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이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개작한 <육체의 약속>(1975) <느미>(1979) <반금련>(1981)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모범수로 가석방된 여자와 그 외출에서 만난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육체의 약속>은 이만희의 정서를 김기영식의 욕망으로 대체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느미>는 지식인 남자가 백치에 가까운 유부녀에게 사로잡히는 멜로물로 당시 인기스타 장미희와 하명중의 연기가 눈길을 끌었다. <반금련>은 중국의 대표적인 외설서 <금병매>를 영화화한 것으로 처참한 검열을 받고 묶이자 제작포기 각서까지 쓴 작품이다. 10년 뒤 다른 감독이 30분을 재촬영한 것으로 극장에 개봉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곱 번째는 <자유처녀>(1982) <바보사냥>(1984) 등 후기의 자조적 저예산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1980년대 스크린쿼터제에 의한 의무편수 채우기용으로 2주 만에 촬영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조차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자유처녀>는 그의 <살인나비…>와 정인엽 감독이 만든 당시의 최대 히트작 <애마부인>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작품으로 주인공도 <애마부인>의 안소영이 맡았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과 그 주제가였던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합해 놓은 제목을 붙인 <바보사냥>은 비록 저예산 졸속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영화에 컬트적 숭배를 보내는 영화광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여덟 번째는 범죄물인 <아스팔트> (1964), 사극인 <미녀 홍낭자>(1969), 가족영화인 <혈육애>(1976), 옴니버스 영화인 <여, 여, 여>(1969)와 같은 독립적인 주제를 갖는 영화들이다. 특히 세 명의 감독(정진우 유현목 김기영), 세 명의 각본가(이은성 김승옥 김유봉), 세 명의 카메라맨(최호진 장석준 손현채)까지, 엄청난 인적자원이 동원돼 만들어진 <여, 여, 여>는 여자의 머리칼이 가발이 되는 과정을 스토리라인으로 한 아방가르드한 영화로 현재 시점에서 보아도 기획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 느껴진다. <의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 감독의 파트는 아내 김유봉 여사가 각본을 써서 직접 참여했다. 주제는 각기 다르지만 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김기영식의 컬트적 색채는 여전한 작품들이다.
 
 
  유현목·신상옥·이만희와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 이끌어
 
〈이어도〉. 197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대립적 관점이 늘 존재한다. 가학과 피학, 남성성과 여성성, 중산층 여자와 하류층 여자, 정신과 육체가 늘 경합한다. 이런 관념적 형상화가 거의 모든 영화 속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영화는 마치 한편의 옴니버스 영화같다. 군사독재 시절 영화를 만들어 내야 했던 그는 사회를 그런 뒤틀어진 틀 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김기영 영화의 절정기인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다. 한 해에 최고 200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고, 그를 비롯한 유현목 신상옥 이만희라는 거장들이 이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무성영화 시대를 거치면서 ‘듣는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을 영상미 그 자체로 ‘보는 영화’로 이끌어낸 사람들이 이들이다. ‘듣는 영화’는 스토리텔링 그 자체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영화적 장치인 미장센과 이미지의 중요성을 살린 이들의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영화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게 되었다.
 
〈자유처녀〉. 1982년.
  연극 무대 연출자로서 영화로 자리를 옮긴 김기영 감독은 촬영장을 연극세트처럼 구획화된 세트로 만들어 놓고 조명도 철저하게 계산된 방식에 의해 촬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표작 <하녀>는 개봉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계산된 조명 속에서 일그러진 얼굴들이 보여주는 심리묘사는 지금 보아도 뛰어난 영상언어로 다가온다.
 
  ‘보는 영화’를 이끌어 내는 데는 그의 파트너였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 후배인 정 감독은 컬러영화 시대가 시작된 시기인 <화녀>(1971)부터 그의 파트너로서 영상을 맡아 왔다. 김 감독은 정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에 있어서 카메라맨의 작가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라며 “나와 함께 심리적 컬러를 형상화하기 위한 연구를 많이 해서 영화를 색채 대비의 심리적 영화언어를 구축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전성기를 함께 만들어 간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1984년 <충녀>의 리메이크작 <육식동물> 이후 10년 만에 배우 윤여정씨와 다시 만나 <죽어도 좋은 경험>(1995)을 만들었으나 한국에서 개봉하지는 못했다. 사실상 10여년간 영화현장을 떠나 있었던 셈. 그는 이 세월 동안 50여 편의 시나리오를 쓰며 투자자를 계속 찾아다녔다. 1997~ 1998년 영화계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힘입어 <악녀>로 서른세 번째 작품의 촬영에 들어가려고 하던 중 화재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비록 그의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철저했던 영화정신은 아직도 한국영화계의 중심에 표석처럼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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