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열대 우림지역에, 그것도 연관산업이 全無한 곳에 조선소를 지었다. 2년 만에 조선소가 완공되고 1호선이 선주에게 인도됐다. 한국의 기술력과 필리핀의 노동력이 결합된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상상력의 개가’였다.
-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앞에 보이는 선박이 이 조선소에서 건조된 1호선 아르골리코스호다.
한진중공업이 필리핀에 건설한 수빅 조선소는 수도 마닐라에서 직선거리로 11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단순 계산으로 서울에서 조치원 거리 정도이니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느긋한 심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필리핀의 고속도로와 국도라는 것이 한국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4차선이 2차선으로 좁아드는가 하면, 도로 곳곳의 포장이 파헤쳐져 있고, 갑자기 중간에서 도로가 휘어지는 등 엉망이었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교통 체증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멀미가 시작될 즈음 넉넉한 바다 한쪽 끝에 걸쳐 있는 수빅조선소가 나타났다. 아침 8시 마닐라를 떠난 버스는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현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후끈 달아오른 공기가 머리를 때렸고, 에어컨에 길들여져 있던 안경에 짙게 김이 서렸다. 일기예보로는 섭씨 32도 정도라고 하는데, 한낮의 땡볕이 내리 꽂히면서 체감온도는 실제보다 훨씬 높게 느껴졌다.
조선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안벽에서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인 수빅조선소에서 건조한 1호선(4300TEU급 컨테이너선)의 거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1번지’라 불리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필자의 눈에 수빅조선소는 우선 “덥고, 넓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영도조선소의 면적은 26만㎡(약 8만여 평)로 비좁아 곳곳에 야적되어 있는 블록과 철판들을 피해가느라 발걸음을 옮기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런데 수빅조선소는 영도의 10배나 되는 257만㎡(약 78만 평)의 광활한 부지에 터를 잡고 있으며. 앞으로 개발이 가능한 부지도 409만㎡나 확보돼 있어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조선소와 배를 함께 지어
이미 완공되어 정상 가동 중인 5번 도크는 길이 370m에 폭 100m, 깊이 12.5m이고, 600t급 골리앗 크레인 2기가 설치돼 있었다. 도크에서 조립이 끝난 배를 끌어내 마무리 작업을 하는 부두의 안벽 길이가 1.6㎞에 달한다.
영도조선소는 도크의 크기가 워낙 제한되어 있고 작업공간도 협소해 초대형 원유운반선인 VLCC나 1만 2800TEU급 극초대형 컨테이너선, 고부가가치 선박인 FPSO(부유식 원유생산 저장하역설비) 등의 수주나 건조는 꿈도 못꾸었다. 때문에 사상 초유의 조선 호황에도 불구하고 성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수빅조선소는 도크와 작업장 시설이 워낙 광대해 지금까지 머릿속에만 그려왔던 선박들을 실제로 건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안벽에서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인 4300TEU급 컨테이너선 아르골리코스號(호)는 가까이 다가가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길이가 259.8m로 100m 달리기 코스보다 2.6배나 더 길다. 선폭은 32.2m, 시속 24.5노트로 항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배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 된 해운회사인 디오릭스社(사)가 발주한 총 6척의 4300TEU급 컨테이너선(20피트짜리 컨테이너 박스 4300개를 실을 수 있는 배) 중 가장 먼저 건조된 선박이다. 가격은 한 척에 무려 6000만 달러(약 618억 원)란다.
크레인에 매달린 인력수송용 철골 박스를 타고 건들거리면서 올라가 컨테이너선의 조타실 갑판에 내렸다. 조타실에 들어서자 강렬한 햇볕에 달궈진 철판 때문에 연방 땀이 줄줄 흘렀다.
이 선박의 시운전을 담당한 李贊炯(이찬형) 수빅조선소 시운전팀장 겸 프로젝트 매니저(부장)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해상 시운전을 했는데, 선주 측 총책임자와 본선 용선주 측으로부터 ‘진동이 거의 없고, 주요 결함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등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품질이다. 모든 면에서 퍼펙트한 시운전이었다’(well beyond expectation)는 평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배는 7월 4일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명명식을 마치고 선주 측에 인도됐다. 명명식에 직접 참석한 아로요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했다고 한다.
“한진의 수빅 조선소에서 건조한 첫 번째 선박 아르골리코스호는 필리핀에서 건조된 선박 중 가장 규모가 큰 배입니다. 예정보다 6개월이나 빨리 건조된 이 선박은 소음이 아주 적고, 디자인은 놀라워 선주와 제작자에게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선박은 우리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 직원들의 뛰어난 기술에 찬사를 보냅니다. 우리 필리핀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주고 모범적인 업무 태도를 보여준 것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조선소 입장에서 볼 때 4300TEU급 선박 건조는 일상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 정도 선박의 명명식에 국가 원수가 직접 명명자로 나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필리핀 내에서도 ‘수빅1호선’이 갖는 국가적 의미가 크다는 증거 아닐까.
특이한 것은 이 선박은 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수주를 하여 조선소 건설과 배를 동시에 건조했다는 점이다. 과거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배를 수주하고,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지었다는 전설과 같은 일화가 필리핀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비와 햇빛 가림막의 비밀
조타실에 오르자 왼편에 수빅만의 드넓은 바다가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빅조선소의 작업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金元燦(김원찬) 수빅조선소 생산기획팀장(상무)의 안내로 강재 절단 공장, 소조립공장, 대조립공장, 도정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현장에서는 철판 절단, 배관, 용접, 도장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크나 조립장에서 페인트 냄새, 시멘트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신생 조선소라는 느낌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현장 근무 직원들을 자세히 보니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영도조선소와는 달리 모든 공정의 작업장이 실내로 되어 있었고 노천에서 작업을 하는 도크나 대조립장에도 하늘색으로 된 거대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조선산업은 중후장대형 산업의 상징이다. 배 한 척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100% 실내 작업은 불가능하고, 블록 작업이나 배관, 선실 부분, 도크 작업 등은 외부에 노출된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때문에 비가 많고, 무더운 기후지대에서는 조선산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상식이었다.
그런데 수빅조선소가 위치한 곳은 건기의 경우 섭씨 4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고온다습하고 사시사철 비가 많은 열대지역이다. 심한 경우는 하루에도 몇 백 mm의 폭우가 퍼붓고, 매일 한 차례씩 열대 스콜이 내린다.
이런 악천후를 극복하기 위해 한진중공업은 작업장 전 구역을 실내에서 작업이 가능하도록 실내화했다. 그리고 실내 작업이 불가능한 곳에는 비와 햇빛을 막는 거대한 철제 시설물(회사 관계자들은 이를 ‘셸터’라 불렀다)을 설치하여 필요한 지역에 크레인으로 옮겨 지붕을 덮어씌운 다음 작업을 한다.
빅 싱크 전략
김원찬 상무는 “수빅조선소는 24시간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품의 운반, 배치 같은 위험한 작업은 낮에 하고, 용접이나 도장 같은 작업은 선선한 야간에 작업을 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란다. 이러한 셸터 설치와 24시간 2교대 근무제는 세계 조선 역사상 최초로 기도된 방식이라고 한다. 朴圭源(박규원) 한진중공업 사장의 설명이다.
“수빅조선소는 ‘비가 많은 곳에는 조선소를 지을 수 없다, 연관산업이 없는 곳에 조선소를 짓는 것은 바보짓이다’라는 등등의 험담을 들어가며 마음고생을 한 끝에 완공한 조선소입니다. 교과서대로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빅만에 조선소가 들어선 셈이죠. 우리는 셸터를 설치하고, 거의 모든 작업장을 실내화했기 때문에 무더위나 악천후에도 정상 작업이 가능한 조선소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건설을 ‘빅 싱크’(Big Think) 전략이 거둔 성과라고 보도했다. 빅 싱크란 창조적이고 대담한 아이디어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뜻도 되고, 그동안 협소한 부지와 비좁은 도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金正雄(김정웅) 한진중공업 부회장의 설명이다.
“영도조선소에는 모두 네 개의 도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도크의 최대길이가 300m입니다. 우리가 수주한 8100TEU급 대형 컨테이너선 길이가 325m나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형 컨테이너선은 건조가 불가능한데, 우리 엔지니어들이 기상천외한 방법을 연구해냈어요. 도크 길이만큼의 선체는 도크 내에서 건조하고, 도크를 초과하는 부분은 육상에서 건조한 다음 도크 바깥에 댐을 만들고 수중에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도크보다 더 큰 배를 건조하는 데 성공했어요. 영도조선소에서는 도크와 안벽의 한계 때문에 8100TEU 이상의 큰 배는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빅만에 조선소를 지어라
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진중공업은 다대포공장, 마산조선소, 울산조선소 등으로 사업장을 늘려왔지만 사업장 분산으로 인해 물류비와 관리비용, 기술 집적도의 저하 현상에 부딪혔다. 결국 경영진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필리핀 수빅만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김정웅 부회장의 설명.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던 1996년 수빅만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한진중공업 건설부문이 APEC 행사를 위해 발주한 수빅공항 활주로 건설을 맡았는데, 趙南鎬(조남호) 회장께서 수빅공항 활주로 공사 현장 시찰을 왔다가 현재 수빅조선소가 들어선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수빅만은 2차대전 이후 미 해군기지로 이용됐던 곳으로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킨 이듬해인 1992년 수빅만에서 해군기지를 철수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기지 철수 후 이 지역을 특별 경제자유지역(SBFZ)으로 선포하고 국제공항과 4개의 대형 리조트, 3개의 국영 카지노, 골프장, 워터 파크 등을 건설하여 ‘동양의 캘리포니아’라는 소릴 듣고 있었다.
이 지역의 매력은 특별 경제자유지역으로 선포되어 FDI(외국인 직접투자)가 유입될 경우 국세와 지방세, 수입관세가 면제되는 등 각종 인센티브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수출입 통관절차가 간편하고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인건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장점 때문에 필리핀 전체 외국인 투자액의 15.2%가 이 지역으로 몰리고 있었다.
수빅만이 새 조선소 입지로 거론되자 社內(사내)에서는 필리핀에는 조선 연관산업이 전무하다는 점, 불안한 政情(정정) 등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이 심했다. 일각에선 한진중공업이 지금까지 고생해가며 축적한 조선 관련 고급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조 회장은 주위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소 건설을 강행했다. 국내에만 안주하고 있다간 중소형 조선소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2005년 5월 13일 마닐라의 말라카냥궁에서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소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2006년 2월 28일 부지사용 임대차계약(MOA)을 체결했다.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측으로부터 50년간 70만 평 부지를 월 1000만 원 정도의 저렴한 임대료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양성한 기능인력의 유출을 막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10년간 ‘한진중공업 측의 동의 없이 근로자들이 다른 회사로 전직할 수 없다’는 규정도 얻어냈다. 필리핀 정부가 이처럼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한 이유는 외국인 투자 유치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축구장 5개 넓이의 도크 건설 중
그러나 농업국가 필리핀에 초현대식 조선소 건설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박규원 사장의 설명이다.
“필리핀은 산업기반이 워낙 빈약해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재와 부품, 심지어 볼트와 너트 같은 사소한 부품까지 한국에서 실어 날라야 했습니다. 위안이 됐던 것은 수빅만 경제자유구역청의 적극적인 지원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아르만드 C 아레자 경제자유구역청장의 전결로 원스톱 서비스를 해주어 일사불란하게 조선소 건설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수빅만은 수심이 16m나 되고 灣(만)의 입구에 있는 섬들이 태평양의 파도를 막아주는 등 조선소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5도크 뒤쪽으로 돌아가자 바다에 면한 석산을 깎아내고 그 자리에 5번 도크보다 170m나 더 긴 길이 550m, 폭 135m, 깊이 13.5m의 거대한 도크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원찬 상무는 “이 도크는 축구장 5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세계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석산에서 골재와 흙을 실은 트럭, 레미콘 차량들이 줄지어 공사 현장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트럭들이 개미 행렬처럼 꼼지락거린다. 원래 이 정도 규모 도크 건설에는 2000억 원 정도가 투자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원찬 상무는 “지반이 암반이라서 보강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고, 필요한 골재는 바로 옆의 석산에서 즉석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건설비가 크게 절감됐다”고 말했다.
이 초대형 도크가 완공되면 한꺼번에 6척의 선박에 대한 동시 작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김 상무는 “6도크와 1.7km의 추가 안벽공사, 각 조립장과 도장공장 등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한진중공업은 국내 3대 조선사인 현대, 대우, 삼성에 버금가는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 상무는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는 직간접 인력 3만여 명을 고용하고, 1만2800TEU급 극초대형 컨테이너선 8척 등 36척(연간 60만DWT)의 건조능력,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34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확보하게 되며, 영도조선소는 LNG선, 쇄빙선, DSV 등의 고기술ㆍ고부가가치 선박 건조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차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이 전차와 항공기를 결합시켜 경악할 만한 속도로 진격한 것을 보고 놀란 戰史(전사) 연구가들은 ‘電擊戰’(전격전)이란 이름을 붙인 바 있다. 한국인의 특성을 설명할 때 무모할 정도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도전정신과 속도전, 헝그리 정신을 장기로 꼽는 시각이 많다. 필자는 한국인 특유의 도전정신과 속도전, 헝그리 정신의 결합은 ‘세계 기업사에서의 전격전’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의 건설 과정도 한국인 특유의 ‘전격전’이 그대로 발휘됐다. 한진중공업은 2006년 5월부터 수빅만의 허허벌판에 조선소 건설과 선박 생산을 동시에 추진한 지 불과 2년여 만에 초대형 조선소 완공과 함께 첫 배를 만들어 인도했다. 이처럼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유는 200여 명의 영도조선소 기술인력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가장 먼저 수빅조선소에 근무할 현지 인력들을 양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2007년 2월 초에 문을 연 교육훈련원은 수빅조선소가 들어선 바다 건너편 올롱가포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육훈련원을 취재하기 위해 수빅조선소에서 임직원들의 출퇴근용 선박을 타고 수빅만을 가로질러 올롱가포 부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10여 분을 달리자 ‘트레이닝 센터’라는 간판이 붙은 교육훈련원이 나타났다.
이 훈련원은 부지가 무려 3만 9670㎡(약 1만 2000여 평)나 되어 조선 관련 교육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각급 학교나 전문 교육기관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힌 숙련공들이 입사하기 때문에 별도의 훈련센터가 필요 없지만, 필리핀은 2차산업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산업 구조 때문에 조선소에서 필요한 기능인력은 수요자가 양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박찬용 수빅교육팀장(기술연구원장ㆍ차장)은 “수빅 교육훈련원은 용접, 도장, 배관 등 12개 교육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기간은 과정에 따라 1.5~3개월 코스”라고 설명했다. 훈련생으로 선발되어 입소하면 훈련 기간 동안 월급이 지급되며,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친 후 해당 분야의 국제자격증을 취득해야 작업 현장에 투입된다. 만약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치지 못하거나, 국제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조선업의 특성상 용접이 전 공정의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용접 훈련과정에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용접 훈련장에 들어가자 매캐한 연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훈련생들이 교관들의 지시에 따라 지직지직 하며 어지럽게 불꽃을 날리고 있었다.
박찬욱 차장은 “우리 교육훈련원은 용접은 물론 도장, 배관 등 조선소에서 요구되는 각 분야별 일반ㆍ전문 기능인력에서부터 설계직 등 고급 기술인력에 이르기까지 현지 인력을 집중 양성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2900여 명의 훈련생들이 입소하여 훈련 중인데, 2007년 2월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이곳에서 8000여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여 수빅조선소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 훈련원은 한국의 기업이 필리핀 현지에 설립한 일종의 기술대학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수빅조선소에 근무하는 필리핀 현지 직원 리처드와 재클린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교육훈련센터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현장에 배치된 1기생 출신이라고 한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은 리처드(21)는 선실부문 목공 전문가, 재클린(20)은 선박의 거주 인테리어 작업자인데 아침 4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7시에 현장에 출근하여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처럼 일찍 출근하는 이유는 필리핀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날씨가 선선한 야간에도 작업하기 위해 근무조를 2교대로 운영하기 때문이란다.
리처드와 재클린 씨의 월급은 각각 8000페소(약 19만2000원)라고 한다. 이들은 “다른 회사에 취직한 학교 동료들은 3000페소(약 7만2000원) 정도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크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에 근무하면 좋은 기술을 배울 수 있고, 미래도 보장되어 있어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선업의 글로벌 경영
한국의 조선업은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1960년대 초 유럽으로부터 조선산업 세계 1위 자리를 빼앗아 온 일본이 1990년대 후반까지 40여 년간 그 자리를 달콤하게 즐겼고, 이제 그 과실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현재 세계 10대 조선소 가운데 6개 회사가 한국 기업이다. 영국의 해운·조선 조사기관인 로이드 발표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지난해 3280만CGT(다양한 선종의 용량을 일반 화물선 기준으로 보정한 총 톤수)를 수주, 2716만CGT기록한 중국과 969만CGT에 머문 일본을 제치고 2003년부터 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건조 부문에서도 1119만CGT를 건조, 세계 1위다. 조선 부문의 수출도 2006년 사상 처음 단일 품목으로 200억 달러를 넘어선 이래 올해는 그 두 배가 넘는 40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국도 점증하는 인건비 압력과 작업 부지의 한계로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각 조선회사들은 발 빠르게 글로벌 경영에 나섰다. 삼성중공업은 중국 산둥(山東)성 룽청(榮成)과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블록(선박 부분품)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고, 대우조선해양은 산둥성 옌타이(煙臺)에 블록공장 운영, STX조선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 종합조선단지를 건설 중이다.
현대중공업도 베트남에 수리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를 신조선 분야로 돌린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런 현지 생산기지를 통해 한국의 앞선 조선 기술과 해외의 저렴한 인건비를 결합하여 세계 최강의 조선업 경쟁력을 이어간다는 구상이다.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진출로 인해 필리핀은 한국 조선업 글로벌 경영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한 시절 한국의 스승국이었던 나라가 필리핀이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 한국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데 비해 필리핀은 아직도 전형적인 농업국가다. 해외에 가정부와 악사, 가수 등 일용근로자로 나간 사람들의 본국 송금이 국가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전문가들은 2차대전 후 급속 성장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비교 분석한 결과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동력원으로 ‘토지개혁’을 꼽았다. 2차대전 후 경제적 성장을 일군 일본, 한국, 타이완 등은 토지개혁으로 수천 년 계급사회를 이루어 온 지주-소작인 관계를 청산하고,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신분상승이 가능한 나라로 변신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수빅조선소의 가능성과 한계
반면에 필리핀이나 중남미 등은 대지주들의 기득권 유지로 인해 토지개혁을 단행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지주-소작인의 계급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도 150여 개의 권문세가 집단이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구조다. 이들이 정계와 재계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선 貧農(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면 똑똑하고 노력해도 당대에 巨富(거부)를 이룬다든지 국가 요직에 등용되어 권력창출의 주인공이 된다든지 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런 전근대적인 나라에 초현대식 조선소를 한국의 기술진이 건설함으로써 이 나라를 산업화, 근대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재 수빅조선소에는 필리핀 인력 8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2단계 공사가 완료되는 올 연말이면 2만 명 이상의 고용창출 효과가 기대된다. 2006년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전체 수출액 400억 달러 중 10%를 차지했는데, 앞으로 이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한진중공업 덕분에 일약 세계적인 조선산업국에 오르게 됐고, 고부가가치 선박을 수출하는 국가 대열에 족보를 올리게 됐다.
한진중공업 입장에서도 수빅조선소는 한국의 기술과 필리핀의 우수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확보한 ‘유쾌한 투자’에 속한다. 김정웅 부회장은 “국내에 수빅조선소 정도의 조선소를 지으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조~5조 원 정도가 들어야 하는데, 7000억 원 정도에 조선소를 건설함으로써 경비가 크게 절감됐고, 부지 임대료도 월 1000만 원이면 거저나 다름없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수빅조선소가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성과만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다. 한진중공업은 비좁은 작업공간과 도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댐 공법, 船尾(선미) 수중탑재공법, 스키드 공법 등 기상천외한 신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을 높여왔다. 이제 수빅만에 광활한 초현대식 조선소가 건설됐으니 기존의 헝그리 정신이 퇴색될 우려도 없지 않다. 박규원 사장도 이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수빅조선소 근무인력들의 숙련도가 급속도로 높아져 한국과 비슷한 생산성에 오를 경우 굳이 인건비가 필리핀보다 10배나 비싼 한국에서 배를 지어야 할 명분이나 근거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는 다른 업종들이 이미 심각하게 경험한 바 있는 제조업 空洞化(공동화)가 조선업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등이나 다름없다.
과연 수빅조선소는 한국 조선업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인지, 아니면 공동화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 아닐까.●
[인터뷰] 朴圭源 한진중공업 사장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 34억 달러 물량 수주
박규원 사장은 영도조선소와 수빅조선소 두 곳의 운영 책임자로서 2년째 수빅에 상주하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어 있었다. 그는 선주들에게 수빅조선소가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수빅에서 근무하겠다고 약속했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수빅조선소는 농업국인 필리핀을 산업국으로 탈바꿈시킨 대역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은 기적과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배를 만드는 아무런 인프라도, 기능 인력도 없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에서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훌륭한 배를 건조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무엇보다 조선업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었던 필리핀 현지인들을 뽑아 교육을 시키는 일이 어려웠고, 자연과의 싸움이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수빅조선소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규모의 경제성입니다. 수빅조선소의 규모는 영도조선소의 10배에 이릅니다. 영도조선소에서는 도크가 적어 큰 배를 짓고 싶어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선 호황기에도 회사의 성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恨(한)을 수빅에 와서 푼 것이죠. 수빅조선소는 이미 39척을 수주해 놓고 대량생산체제에 돌입했습니다. 생산능력은 2011년이면 영도조선소 수준인 매출액 규모 1조 7000억 원에 도달하고 2016년이면 매출액 2조 5000억 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조선소 특화전략 수립
─수빅조선소는 조선소 건설공사 착공도 하기 전에 이미 12척의 선박을 수주하고,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1호선을 인도하는 행사를 가지는 등 숨가쁘게 달려왔는데요.
“연관산업이 전무한 농업국가에다가 2년 만에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고, 동시에 첫 배를 인도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빅조선소 착공 전인 2006년 초에 이미 4300TEU급 컨테이너선 12척을 수주했고,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선 등 34억 달러의 수주를 하게 됐는데, 이는 선주들이 한진중공업의 기술과 품질을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선주들 입장에서 볼 때 영도조선소가 아니라 조선 경험이 전무한 필리핀에서 배를 만든다는 사실에 걱정을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만, 이번 1호선 시운전 결과가 대내외에 알려지면서 그런 우려가 말끔히 해소됐습니다.”
─수빅조선소의 도크 명칭을 보니 1~4번 도크는 없고, 5~6번 도크로 이름을 붙인 것이 좀 특이하다고 생각됐습니다. 도크 명칭을 굳이 5~6번 도크로 명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1~4호 도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수빅에서는 5~6번 도크로 명명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진중공업은 하나의 회사다. 다만 영도와 수빅에 조선소 두 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란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한 것이죠.”
─필리핀 현지 인력들의 임금 수준과 생산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곳 근무 인력들의 월평균 급여는 9100페소(한화 20만 원 수준) 정도인데, 이는 필리핀 교사의 월평균 급여가 5000~6000페소인 것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입니다. 복리후생 제도도 우수해 수빅조선소는 현지인들이 최우선으로 입사를 희망하는 직장으로 알려져 있어요. 현재의 생산성은 한국 근로자들의 30% 수준 정도인데, 앞으로 2~3년 정도 숙련되면 영도조선소 수준의 생산성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필리핀이 중국보다 경쟁력 높아
─우리나라 조선소들의 글로벌 경영 현황을 보면 대부분 중국, 베트남에 현지 공장을 설립한 데 비해 한진중공업은 필리핀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업은 설계능력을 제외하면 인건비 의존도가 높은 산업입니다. 중국에서 조선소가 입지하고 있는 해안가 지역은 이미 인건비가 많이 올라 부담이 큰 데다가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었어요. 필리핀은 인건비가 중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장점이 있어요. 한 마디로 필리핀은 저렴한 인건비로 양질의 고급두뇌 확보가 순조로워 중국보다 훨씬 높은 경쟁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박 사장은 “현재 진행 중인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삼성중공업이나 대우조선해양과 비슷한 규모가 될 것”이라면서 “우리의 목표는 영도와 수빅 합쳐 연간 70여 척의 선박을 건조하여 세계 4대 조선소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필리핀의 고속도로와 국도라는 것이 한국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4차선이 2차선으로 좁아드는가 하면, 도로 곳곳의 포장이 파헤쳐져 있고, 갑자기 중간에서 도로가 휘어지는 등 엉망이었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교통 체증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멀미가 시작될 즈음 넉넉한 바다 한쪽 끝에 걸쳐 있는 수빅조선소가 나타났다. 아침 8시 마닐라를 떠난 버스는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현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후끈 달아오른 공기가 머리를 때렸고, 에어컨에 길들여져 있던 안경에 짙게 김이 서렸다. 일기예보로는 섭씨 32도 정도라고 하는데, 한낮의 땡볕이 내리 꽂히면서 체감온도는 실제보다 훨씬 높게 느껴졌다.
조선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안벽에서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인 수빅조선소에서 건조한 1호선(4300TEU급 컨테이너선)의 거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1번지’라 불리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필자의 눈에 수빅조선소는 우선 “덥고, 넓고, 시원하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영도조선소의 면적은 26만㎡(약 8만여 평)로 비좁아 곳곳에 야적되어 있는 블록과 철판들을 피해가느라 발걸음을 옮기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런데 수빅조선소는 영도의 10배나 되는 257만㎡(약 78만 평)의 광활한 부지에 터를 잡고 있으며. 앞으로 개발이 가능한 부지도 409만㎡나 확보돼 있어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조선소와 배를 함께 지어
이미 완공되어 정상 가동 중인 5번 도크는 길이 370m에 폭 100m, 깊이 12.5m이고, 600t급 골리앗 크레인 2기가 설치돼 있었다. 도크에서 조립이 끝난 배를 끌어내 마무리 작업을 하는 부두의 안벽 길이가 1.6㎞에 달한다.
영도조선소는 도크의 크기가 워낙 제한되어 있고 작업공간도 협소해 초대형 원유운반선인 VLCC나 1만 2800TEU급 극초대형 컨테이너선, 고부가가치 선박인 FPSO(부유식 원유생산 저장하역설비) 등의 수주나 건조는 꿈도 못꾸었다. 때문에 사상 초유의 조선 호황에도 불구하고 성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수빅조선소는 도크와 작업장 시설이 워낙 광대해 지금까지 머릿속에만 그려왔던 선박들을 실제로 건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안벽에서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인 4300TEU급 컨테이너선 아르골리코스號(호)는 가까이 다가가니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길이가 259.8m로 100m 달리기 코스보다 2.6배나 더 길다. 선폭은 32.2m, 시속 24.5노트로 항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배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 된 해운회사인 디오릭스社(사)가 발주한 총 6척의 4300TEU급 컨테이너선(20피트짜리 컨테이너 박스 4300개를 실을 수 있는 배) 중 가장 먼저 건조된 선박이다. 가격은 한 척에 무려 6000만 달러(약 618억 원)란다.
크레인에 매달린 인력수송용 철골 박스를 타고 건들거리면서 올라가 컨테이너선의 조타실 갑판에 내렸다. 조타실에 들어서자 강렬한 햇볕에 달궈진 철판 때문에 연방 땀이 줄줄 흘렀다.
이 선박의 시운전을 담당한 李贊炯(이찬형) 수빅조선소 시운전팀장 겸 프로젝트 매니저(부장)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해상 시운전을 했는데, 선주 측 총책임자와 본선 용선주 측으로부터 ‘진동이 거의 없고, 주요 결함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등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품질이다. 모든 면에서 퍼펙트한 시운전이었다’(well beyond expectation)는 평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배는 7월 4일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명명식을 마치고 선주 측에 인도됐다. 명명식에 직접 참석한 아로요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했다고 한다.
“한진의 수빅 조선소에서 건조한 첫 번째 선박 아르골리코스호는 필리핀에서 건조된 선박 중 가장 규모가 큰 배입니다. 예정보다 6개월이나 빨리 건조된 이 선박은 소음이 아주 적고, 디자인은 놀라워 선주와 제작자에게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선박은 우리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 직원들의 뛰어난 기술에 찬사를 보냅니다. 우리 필리핀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주고 모범적인 업무 태도를 보여준 것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조선소 입장에서 볼 때 4300TEU급 선박 건조는 일상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 정도 선박의 명명식에 국가 원수가 직접 명명자로 나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필리핀 내에서도 ‘수빅1호선’이 갖는 국가적 의미가 크다는 증거 아닐까.
특이한 것은 이 선박은 조선소를 건설하기도 전에 수주를 하여 조선소 건설과 배를 동시에 건조했다는 점이다. 과거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배를 수주하고,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지었다는 전설과 같은 일화가 필리핀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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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가운데)이 7월 4일 선박 명명식에 참석하여 박수를 치고 있다. 그 오른쪽이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
비와 햇빛 가림막의 비밀
조타실에 오르자 왼편에 수빅만의 드넓은 바다가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빅조선소의 작업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金元燦(김원찬) 수빅조선소 생산기획팀장(상무)의 안내로 강재 절단 공장, 소조립공장, 대조립공장, 도정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현장에서는 철판 절단, 배관, 용접, 도장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크나 조립장에서 페인트 냄새, 시멘트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신생 조선소라는 느낌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현장 근무 직원들을 자세히 보니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특이한 것은 영도조선소와는 달리 모든 공정의 작업장이 실내로 되어 있었고 노천에서 작업을 하는 도크나 대조립장에도 하늘색으로 된 거대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조선산업은 중후장대형 산업의 상징이다. 배 한 척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100% 실내 작업은 불가능하고, 블록 작업이나 배관, 선실 부분, 도크 작업 등은 외부에 노출된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때문에 비가 많고, 무더운 기후지대에서는 조선산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상식이었다.
그런데 수빅조선소가 위치한 곳은 건기의 경우 섭씨 4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고온다습하고 사시사철 비가 많은 열대지역이다. 심한 경우는 하루에도 몇 백 mm의 폭우가 퍼붓고, 매일 한 차례씩 열대 스콜이 내린다.
이런 악천후를 극복하기 위해 한진중공업은 작업장 전 구역을 실내에서 작업이 가능하도록 실내화했다. 그리고 실내 작업이 불가능한 곳에는 비와 햇빛을 막는 거대한 철제 시설물(회사 관계자들은 이를 ‘셸터’라 불렀다)을 설치하여 필요한 지역에 크레인으로 옮겨 지붕을 덮어씌운 다음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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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빅조선소는 더운 날씨와 비를 피하기 위해 거의 모든 작업장이 실내화되어 있다. 실내공장에서 소조립 블록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 |
빅 싱크 전략
김원찬 상무는 “수빅조선소는 24시간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품의 운반, 배치 같은 위험한 작업은 낮에 하고, 용접이나 도장 같은 작업은 선선한 야간에 작업을 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란다. 이러한 셸터 설치와 24시간 2교대 근무제는 세계 조선 역사상 최초로 기도된 방식이라고 한다. 朴圭源(박규원) 한진중공업 사장의 설명이다.
“수빅조선소는 ‘비가 많은 곳에는 조선소를 지을 수 없다, 연관산업이 없는 곳에 조선소를 짓는 것은 바보짓이다’라는 등등의 험담을 들어가며 마음고생을 한 끝에 완공한 조선소입니다. 교과서대로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빅만에 조선소가 들어선 셈이죠. 우리는 셸터를 설치하고, 거의 모든 작업장을 실내화했기 때문에 무더위나 악천후에도 정상 작업이 가능한 조선소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 건설을 ‘빅 싱크’(Big Think) 전략이 거둔 성과라고 보도했다. 빅 싱크란 창조적이고 대담한 아이디어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뜻도 되고, 그동안 협소한 부지와 비좁은 도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金正雄(김정웅) 한진중공업 부회장의 설명이다.
“영도조선소에는 모두 네 개의 도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도크의 최대길이가 300m입니다. 우리가 수주한 8100TEU급 대형 컨테이너선 길이가 325m나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형 컨테이너선은 건조가 불가능한데, 우리 엔지니어들이 기상천외한 방법을 연구해냈어요. 도크 길이만큼의 선체는 도크 내에서 건조하고, 도크를 초과하는 부분은 육상에서 건조한 다음 도크 바깥에 댐을 만들고 수중에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도크보다 더 큰 배를 건조하는 데 성공했어요. 영도조선소에서는 도크와 안벽의 한계 때문에 8100TEU 이상의 큰 배는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빅만에 조선소를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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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의 상징인 골리앗 크레인. 수빅조선소의 5도크에는 600t 골리앗 크레인 2기가 설치되어 있다 |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던 1996년 수빅만에서 APEC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한진중공업 건설부문이 APEC 행사를 위해 발주한 수빅공항 활주로 건설을 맡았는데, 趙南鎬(조남호) 회장께서 수빅공항 활주로 공사 현장 시찰을 왔다가 현재 수빅조선소가 들어선 지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수빅만은 2차대전 이후 미 해군기지로 이용됐던 곳으로 1991년 6월 피나투보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킨 이듬해인 1992년 수빅만에서 해군기지를 철수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기지 철수 후 이 지역을 특별 경제자유지역(SBFZ)으로 선포하고 국제공항과 4개의 대형 리조트, 3개의 국영 카지노, 골프장, 워터 파크 등을 건설하여 ‘동양의 캘리포니아’라는 소릴 듣고 있었다.
이 지역의 매력은 특별 경제자유지역으로 선포되어 FDI(외국인 직접투자)가 유입될 경우 국세와 지방세, 수입관세가 면제되는 등 각종 인센티브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수출입 통관절차가 간편하고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인건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장점 때문에 필리핀 전체 외국인 투자액의 15.2%가 이 지역으로 몰리고 있었다.
수빅만이 새 조선소 입지로 거론되자 社內(사내)에서는 필리핀에는 조선 연관산업이 전무하다는 점, 불안한 政情(정정) 등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이 심했다. 일각에선 한진중공업이 지금까지 고생해가며 축적한 조선 관련 고급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조 회장은 주위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소 건설을 강행했다. 국내에만 안주하고 있다간 중소형 조선소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진중공업은 2005년 5월 13일 마닐라의 말라카냥궁에서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소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2006년 2월 28일 부지사용 임대차계약(MOA)을 체결했다.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측으로부터 50년간 70만 평 부지를 월 1000만 원 정도의 저렴한 임대료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양성한 기능인력의 유출을 막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10년간 ‘한진중공업 측의 동의 없이 근로자들이 다른 회사로 전직할 수 없다’는 규정도 얻어냈다. 필리핀 정부가 이처럼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한 이유는 외국인 투자 유치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축구장 5개 넓이의 도크 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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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크 내에 셸터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 이 셸터 덕분에 비가 오거나 혹서기에도 작업이 가능하다. |
“필리핀은 산업기반이 워낙 빈약해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재와 부품, 심지어 볼트와 너트 같은 사소한 부품까지 한국에서 실어 날라야 했습니다. 위안이 됐던 것은 수빅만 경제자유구역청의 적극적인 지원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아르만드 C 아레자 경제자유구역청장의 전결로 원스톱 서비스를 해주어 일사불란하게 조선소 건설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수빅만은 수심이 16m나 되고 灣(만)의 입구에 있는 섬들이 태평양의 파도를 막아주는 등 조선소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5도크 뒤쪽으로 돌아가자 바다에 면한 석산을 깎아내고 그 자리에 5번 도크보다 170m나 더 긴 길이 550m, 폭 135m, 깊이 13.5m의 거대한 도크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원찬 상무는 “이 도크는 축구장 5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세계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석산에서 골재와 흙을 실은 트럭, 레미콘 차량들이 줄지어 공사 현장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트럭들이 개미 행렬처럼 꼼지락거린다. 원래 이 정도 규모 도크 건설에는 2000억 원 정도가 투자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원찬 상무는 “지반이 암반이라서 보강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고, 필요한 골재는 바로 옆의 석산에서 즉석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건설비가 크게 절감됐다”고 말했다.
이 초대형 도크가 완공되면 한꺼번에 6척의 선박에 대한 동시 작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김 상무는 “6도크와 1.7km의 추가 안벽공사, 각 조립장과 도장공장 등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한진중공업은 국내 3대 조선사인 현대, 대우, 삼성에 버금가는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 상무는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는 직간접 인력 3만여 명을 고용하고, 1만2800TEU급 극초대형 컨테이너선 8척 등 36척(연간 60만DWT)의 건조능력,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34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확보하게 되며, 영도조선소는 LNG선, 쇄빙선, DSV 등의 고기술ㆍ고부가가치 선박 건조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차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이 전차와 항공기를 결합시켜 경악할 만한 속도로 진격한 것을 보고 놀란 戰史(전사) 연구가들은 ‘電擊戰’(전격전)이란 이름을 붙인 바 있다. 한국인의 특성을 설명할 때 무모할 정도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도전정신과 속도전, 헝그리 정신을 장기로 꼽는 시각이 많다. 필자는 한국인 특유의 도전정신과 속도전, 헝그리 정신의 결합은 ‘세계 기업사에서의 전격전’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의 건설 과정도 한국인 특유의 ‘전격전’이 그대로 발휘됐다. 한진중공업은 2006년 5월부터 수빅만의 허허벌판에 조선소 건설과 선박 생산을 동시에 추진한 지 불과 2년여 만에 초대형 조선소 완공과 함께 첫 배를 만들어 인도했다. 이처럼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유는 200여 명의 영도조선소 기술인력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가장 먼저 수빅조선소에 근무할 현지 인력들을 양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2007년 2월 초에 문을 연 교육훈련원은 수빅조선소가 들어선 바다 건너편 올롱가포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육훈련원을 취재하기 위해 수빅조선소에서 임직원들의 출퇴근용 선박을 타고 수빅만을 가로질러 올롱가포 부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10여 분을 달리자 ‘트레이닝 센터’라는 간판이 붙은 교육훈련원이 나타났다.
이 훈련원은 부지가 무려 3만 9670㎡(약 1만 2000여 평)나 되어 조선 관련 교육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각급 학교나 전문 교육기관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힌 숙련공들이 입사하기 때문에 별도의 훈련센터가 필요 없지만, 필리핀은 2차산업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산업 구조 때문에 조선소에서 필요한 기능인력은 수요자가 양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박찬용 수빅교육팀장(기술연구원장ㆍ차장)은 “수빅 교육훈련원은 용접, 도장, 배관 등 12개 교육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기간은 과정에 따라 1.5~3개월 코스”라고 설명했다. 훈련생으로 선발되어 입소하면 훈련 기간 동안 월급이 지급되며,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친 후 해당 분야의 국제자격증을 취득해야 작업 현장에 투입된다. 만약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치지 못하거나, 국제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조선업의 특성상 용접이 전 공정의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용접 훈련과정에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용접 훈련장에 들어가자 매캐한 연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훈련생들이 교관들의 지시에 따라 지직지직 하며 어지럽게 불꽃을 날리고 있었다.
박찬욱 차장은 “우리 교육훈련원은 용접은 물론 도장, 배관 등 조선소에서 요구되는 각 분야별 일반ㆍ전문 기능인력에서부터 설계직 등 고급 기술인력에 이르기까지 현지 인력을 집중 양성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2900여 명의 훈련생들이 입소하여 훈련 중인데, 2007년 2월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이곳에서 8000여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여 수빅조선소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 훈련원은 한국의 기업이 필리핀 현지에 설립한 일종의 기술대학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수빅조선소에 근무하는 필리핀 현지 직원 리처드와 재클린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교육훈련센터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현장에 배치된 1기생 출신이라고 한다.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은 리처드(21)는 선실부문 목공 전문가, 재클린(20)은 선박의 거주 인테리어 작업자인데 아침 4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7시에 현장에 출근하여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처럼 일찍 출근하는 이유는 필리핀의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날씨가 선선한 야간에도 작업하기 위해 근무조를 2교대로 운영하기 때문이란다.
리처드와 재클린 씨의 월급은 각각 8000페소(약 19만2000원)라고 한다. 이들은 “다른 회사에 취직한 학교 동료들은 3000페소(약 7만2000원) 정도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크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진중공업 수빅조선소에 근무하면 좋은 기술을 배울 수 있고, 미래도 보장되어 있어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선업의 글로벌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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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훈련원에서 배관기술을 교육받고 있는 훈련생들. 수빅만에 문을 연 교육훈련원은 조선 관련 교육센터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
현재 세계 10대 조선소 가운데 6개 회사가 한국 기업이다. 영국의 해운·조선 조사기관인 로이드 발표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지난해 3280만CGT(다양한 선종의 용량을 일반 화물선 기준으로 보정한 총 톤수)를 수주, 2716만CGT기록한 중국과 969만CGT에 머문 일본을 제치고 2003년부터 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건조 부문에서도 1119만CGT를 건조, 세계 1위다. 조선 부문의 수출도 2006년 사상 처음 단일 품목으로 200억 달러를 넘어선 이래 올해는 그 두 배가 넘는 40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국도 점증하는 인건비 압력과 작업 부지의 한계로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각 조선회사들은 발 빠르게 글로벌 경영에 나섰다. 삼성중공업은 중국 산둥(山東)성 룽청(榮成)과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 블록(선박 부분품)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고, 대우조선해양은 산둥성 옌타이(煙臺)에 블록공장 운영, STX조선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 종합조선단지를 건설 중이다.
현대중공업도 베트남에 수리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를 신조선 분야로 돌린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런 현지 생산기지를 통해 한국의 앞선 조선 기술과 해외의 저렴한 인건비를 결합하여 세계 최강의 조선업 경쟁력을 이어간다는 구상이다.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진출로 인해 필리핀은 한국 조선업 글로벌 경영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한 시절 한국의 스승국이었던 나라가 필리핀이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 한국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데 비해 필리핀은 아직도 전형적인 농업국가다. 해외에 가정부와 악사, 가수 등 일용근로자로 나간 사람들의 본국 송금이 국가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이다.
전문가들은 2차대전 후 급속 성장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비교 분석한 결과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동력원으로 ‘토지개혁’을 꼽았다. 2차대전 후 경제적 성장을 일군 일본, 한국, 타이완 등은 토지개혁으로 수천 년 계급사회를 이루어 온 지주-소작인 관계를 청산하고,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신분상승이 가능한 나라로 변신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수빅조선소의 가능성과 한계
반면에 필리핀이나 중남미 등은 대지주들의 기득권 유지로 인해 토지개혁을 단행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지주-소작인의 계급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도 150여 개의 권문세가 집단이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구조다. 이들이 정계와 재계의 상층부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선 貧農(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면 똑똑하고 노력해도 당대에 巨富(거부)를 이룬다든지 국가 요직에 등용되어 권력창출의 주인공이 된다든지 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런 전근대적인 나라에 초현대식 조선소를 한국의 기술진이 건설함으로써 이 나라를 산업화, 근대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재 수빅조선소에는 필리핀 인력 8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2단계 공사가 완료되는 올 연말이면 2만 명 이상의 고용창출 효과가 기대된다. 2006년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전체 수출액 400억 달러 중 10%를 차지했는데, 앞으로 이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한진중공업 덕분에 일약 세계적인 조선산업국에 오르게 됐고, 고부가가치 선박을 수출하는 국가 대열에 족보를 올리게 됐다.
한진중공업 입장에서도 수빅조선소는 한국의 기술과 필리핀의 우수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확보한 ‘유쾌한 투자’에 속한다. 김정웅 부회장은 “국내에 수빅조선소 정도의 조선소를 지으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조~5조 원 정도가 들어야 하는데, 7000억 원 정도에 조선소를 건설함으로써 경비가 크게 절감됐고, 부지 임대료도 월 1000만 원이면 거저나 다름없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수빅조선소가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성과만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다. 한진중공업은 비좁은 작업공간과 도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댐 공법, 船尾(선미) 수중탑재공법, 스키드 공법 등 기상천외한 신기술을 개발해 경쟁력을 높여왔다. 이제 수빅만에 광활한 초현대식 조선소가 건설됐으니 기존의 헝그리 정신이 퇴색될 우려도 없지 않다. 박규원 사장도 이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수빅조선소 근무인력들의 숙련도가 급속도로 높아져 한국과 비슷한 생산성에 오를 경우 굳이 인건비가 필리핀보다 10배나 비싼 한국에서 배를 지어야 할 명분이나 근거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는 다른 업종들이 이미 심각하게 경험한 바 있는 제조업 空洞化(공동화)가 조선업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등이나 다름없다.
과연 수빅조선소는 한국 조선업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인지, 아니면 공동화의 출발점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 아닐까.●
[인터뷰] 朴圭源 한진중공업 사장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 34억 달러 물량 수주
박규원 사장은 영도조선소와 수빅조선소 두 곳의 운영 책임자로서 2년째 수빅에 상주하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어 있었다. 그는 선주들에게 수빅조선소가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수빅에서 근무하겠다고 약속했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수빅조선소는 농업국인 필리핀을 산업국으로 탈바꿈시킨 대역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지난 2년은 기적과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배를 만드는 아무런 인프라도, 기능 인력도 없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에서 불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훌륭한 배를 건조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무엇보다 조선업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었던 필리핀 현지인들을 뽑아 교육을 시키는 일이 어려웠고, 자연과의 싸움이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수빅조선소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규모의 경제성입니다. 수빅조선소의 규모는 영도조선소의 10배에 이릅니다. 영도조선소에서는 도크가 적어 큰 배를 짓고 싶어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선 호황기에도 회사의 성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恨(한)을 수빅에 와서 푼 것이죠. 수빅조선소는 이미 39척을 수주해 놓고 대량생산체제에 돌입했습니다. 생산능력은 2011년이면 영도조선소 수준인 매출액 규모 1조 7000억 원에 도달하고 2016년이면 매출액 2조 5000억 원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조선소 특화전략 수립
─수빅조선소는 조선소 건설공사 착공도 하기 전에 이미 12척의 선박을 수주하고,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1호선을 인도하는 행사를 가지는 등 숨가쁘게 달려왔는데요.
“연관산업이 전무한 농업국가에다가 2년 만에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고, 동시에 첫 배를 인도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빅조선소 착공 전인 2006년 초에 이미 4300TEU급 컨테이너선 12척을 수주했고,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선 등 34억 달러의 수주를 하게 됐는데, 이는 선주들이 한진중공업의 기술과 품질을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선주들 입장에서 볼 때 영도조선소가 아니라 조선 경험이 전무한 필리핀에서 배를 만든다는 사실에 걱정을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만, 이번 1호선 시운전 결과가 대내외에 알려지면서 그런 우려가 말끔히 해소됐습니다.”
─수빅조선소의 도크 명칭을 보니 1~4번 도크는 없고, 5~6번 도크로 이름을 붙인 것이 좀 특이하다고 생각됐습니다. 도크 명칭을 굳이 5~6번 도크로 명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1~4호 도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수빅에서는 5~6번 도크로 명명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진중공업은 하나의 회사다. 다만 영도와 수빅에 조선소 두 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란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한 것이죠.”
─필리핀 현지 인력들의 임금 수준과 생산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곳 근무 인력들의 월평균 급여는 9100페소(한화 20만 원 수준) 정도인데, 이는 필리핀 교사의 월평균 급여가 5000~6000페소인 것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입니다. 복리후생 제도도 우수해 수빅조선소는 현지인들이 최우선으로 입사를 희망하는 직장으로 알려져 있어요. 현재의 생산성은 한국 근로자들의 30% 수준 정도인데, 앞으로 2~3년 정도 숙련되면 영도조선소 수준의 생산성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필리핀이 중국보다 경쟁력 높아
─우리나라 조선소들의 글로벌 경영 현황을 보면 대부분 중국, 베트남에 현지 공장을 설립한 데 비해 한진중공업은 필리핀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업은 설계능력을 제외하면 인건비 의존도가 높은 산업입니다. 중국에서 조선소가 입지하고 있는 해안가 지역은 이미 인건비가 많이 올라 부담이 큰 데다가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었어요. 필리핀은 인건비가 중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장점이 있어요. 한 마디로 필리핀은 저렴한 인건비로 양질의 고급두뇌 확보가 순조로워 중국보다 훨씬 높은 경쟁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박 사장은 “현재 진행 중인 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 삼성중공업이나 대우조선해양과 비슷한 규모가 될 것”이라면서 “우리의 목표는 영도와 수빅 합쳐 연간 70여 척의 선박을 건조하여 세계 4대 조선소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