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전 12일 前 중공군 공격받아 부상 입고 포로돼
●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과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30여 년간 노동
● 두 번째 脫北에 성공, 7월 초 중국 주재 한국 영사관에 「안착」
●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과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30여 년간 노동
● 두 번째 脫北에 성공, 7월 초 중국 주재 한국 영사관에 「안착」
아오지 탄광에서 20여 년간 노동
여기 또 한 명의 老兵이 있다. 이름은 張善生(장선생). 나이 79세. 本은 仁同(인동). 충북 충주 용탄동이 고향이다. 3남2녀의 장남으로 서울 덕수상업학교(지금의 덕수정보산업고교) 5학년 무렵인 1950년 광주 보병학교 간부 후보생으로 들어갔다.
국군 중위로 1953년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인 「金化(김화)전투」에서 관통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체포 당시 국군장교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계급 견장과 이름표를 뜯어 버렸다. 북한에서는 지난 52년간 누구도 그가 대한민국 장교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평남 강동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서너 차례 다리 수술을 받은 끝에 그는 함북 은덕군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50세가 될 때까지 아오지에서 살았고 이후 함북 부령군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60세에 퇴직했다.
2002년 2월 큰아들 등에 업혀 두만강을 넘어 脫北했으나 중국 公安(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지난 6월14일 다시 死線(사선)을 넘었고 지난 7월7일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에 「안착」, 고국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중풍으로 半身이 마비됐고, 영양실조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이상이 그의 삶의 대강이다. 몇 文章으로 요약된 그의 삶은 수많은 行間(행간)을 품고 있다. 그 行間에는 반세기 분단의 아픔이 거칠게 꿈틀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담담하게 얘기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장교로서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게… 할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발전된 조국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지난 7월2일 오전 9시35분. 중국 길림성 長春(장춘)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며칠 전 데스크에게서 『중국 延吉(연길)에 가서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를 만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를 조선족이 보호하고 있다」는 정보를 준 피랍·탈북 인권연대 측은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관광객처럼 행동하라. 「기자」의 「기」字도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상태여서 신경이 곤두섰다. 비행기 엔진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납북자도, 국군포로도 없다」는 정부
오전 10시40분, 長春에 도착했다. 延吉 직항 노선이 동나서 어쩔 수 없이 長春을 경유하게 됐다. 『백두산 관광 시즌인 7~8월은 적어도 한 달 전에 비행기표를 예약해야 한다』는 게 항공사 측의 설명이었다.
延吉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3시40분. 무려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長春공항 밖 나무 그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국군포로. 이젠 국민들의 관심 밖의 심드렁한 일이 됐다. 『납북자도, 국군포로도 없다. 다만 이산가족이 있다』는 해괴한 주장이 정부 쪽에서 나오고 있다. 간혹 「중국의 脫北 브로커에게 억류됐던 국군포로가 送還됐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리곤 했지만 1단 기사에 불과했다.
이 정부에서 국군포로는 남북협력을 방해하는 골칫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문득, 기자가 만나러 가는 국군포로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봤다. 「강철 감옥」 안에서 죽은 듯 살아온 사람일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과 장백산을 넘어 왔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張善生씨가 한국에 보냈던 탄원서를 꺼내 읽었다.
<본인은 비록 연로하고 병약한 몸이나 국가를 위해 전투 중 포로가 되었으나 엄연한 현역 국군장교이므로 조국에 귀환하여 전역을 하고 남은 여생을 발전된 조국에서 사람답게 살다가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었을 시 국립묘지에 묻히고 그러지 않을 땐 고향땅에 묻히고자 함.
처와 자식들에게도, 본인은 자랑스러운 국군장교로서 포로가 되어 지금까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였으나 조국에서 자유롭고 떳떳한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함.
이상과 같이 탄원하오니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님과 관계부서에서는 한시바삐 본인을 조국으로 안전하게 귀환시켜 줄 것을 중국 땅에서 탄원합니다.
2005년 6월15일. 탄원한 대한민국 육군중위 張善生>
오후 5시40분. 비행기가 延吉(연길)공항에 다다르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비행기 창으로 바라보니 흙탕물이 농경지를 삼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비가 퍼부었다. 택시를 타고 피랍·탈북인권연대가 일러 준 호텔로 향했다. 비가 와서인지 거리가 엉망이었다. 차들이 엉키고 경적이 귀를 찔렀다.
비에 젖은 延吉, 그를 만나다
호텔 11층에 짐을 풀었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노트 한 권과 캠코더, 디지털카메라, 속내의가 전부였다. 오후 7시쯤 휴대전화로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피랍·탈북인권연대 都希侖(도희윤)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張善生씨를 모시고 있는 조선족과 「접선」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오후 8시 호텔 앞에서 신문지를 말아 오른손에 들고 있으면 누가 「朴사장님이십니까」하고 물을 것이다. 그를 따라가면 된다』
오후 8시. 都총장의 말대로 호텔 앞으로 나갔다. 흰 와이셔츠 차림의 조선족 청년 L씨가 『朴사장이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車로 延吉 시내 골목골목을 돌았다. 혹시 미행하는 車가 있다면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윈도 브러시가 빗물을 한 번 훔칠 때마다 어둑어둑한 시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한 곳은 변두리 시골 마을이었다. 길이 질펀하고 개가 요란하게 짖고 있었다. 오후 8시30분쯤 드디어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 張善生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놀란 듯 기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눈이 붉어졌다.
그를 취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퀭한 두 눈, 비쩍 말라 몸무게가 40kg에도 못 미칠 정도였다. 5년 전 중풍으로 왼쪽 몸 전체가 마비된 상태였고, 전쟁 당시 입은 오른쪽 다리 관통상으로 걷지도, 서지도 못했다. 물론 대·소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脫北 전 끼니 해결은 전적으로 아내(68) 몫이었다. 남편을 대신해 혼자 땔감을 구했고, 「燒土(소토)질」을 해서 찬거리를 마련했다. 소토질은 원래 잡목이나 짚을 태워 흙을 소독한다는 뜻이지만 북한에서는 「텃밭을 경작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텃밭이란 게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는 게 아니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몇 리를 걸어가야 하는 손바닥만 한 땅이다.
50년 만에 갈치를 처음 먹어
張善生씨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족 청년 L씨가 어른을 대접한답시고 갈치를 구워 드렸다고 한다. 그는 『50년 만에 처음 먹어 본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유년 시절, 강원도 주문진에서 어머니가 어물전 가게를 하던 때가 떠올랐을까? 그는 한참이나 수저를 들지 못했다고 L씨가 전했다.
북한 주민들, 특히 밑바닥 생활을 강요받은 국군포로 출신들에게 생선은 사치스런 음식이다. 지난해 9월 귀환한 국군포로 李完燮(이완섭·73)씨 역시 탈북한 뒤 延吉에서 갈치를 먹고 『53년 만에 처음 먹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張善生 중위는 양쪽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청기가 불량품인지 「삑삑~」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無표정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청기를 떼어 내고 귀에다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행여 옆집에서 기자의 목소리를 눈치 채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L씨는 기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팔을 끌어 당겨 『목소리를 낮추라』고 제지했다.
張善生씨는 목소리가 어눌하고 희미한데다 발음도 명확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말을 알아듣는 조선족 L씨가 없었다면 서로 멍하니 얼굴만 바라보다 그냥 돌아올 뻔했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위급상황임을 직감했다. 조선족 청년 L씨는 『모시기 너무 힘드니 빨리 한국으로 데려가라』고 성화였다.
그는 고향 얘기만 나와도, 北에 남겨 둔 아내 얘기만 꺼내도 눈망울이 묽어졌다. 하지만 눈물샘도 말라 버린 듯 물빛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張善生씨와 인터뷰하는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였다. 기자는 목청을 높이고, L씨가 그걸 전하고, 張씨가 웅얼웅얼 몇마디 하면 L씨가 통역을 했다. 다음의 인터뷰 내용은 독자들을 위해 再구성한 것이다.
파편처럼 오고가던 말들을 간추렸다. 張씨가 토씨 없이 전한 단어들의 의미가 이어지도록 연결한 부분도 있다.
체포 때 장교 계급장 떼내
─국군장교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군번과 계급을 말씀해 주십시오.
『육군 3사단 보병 17연대 11야포단 72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고, 계급은 중위였습니다. 군번은 123990입니다』
張善生씨는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중에서 가장 고위급이다. 1994년 10월 최초 귀환한 국군포로 趙昌浩(조창호) 소위보다 계급이 높았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 51명 가운데 張善生·趙昌浩씨를 제외한 49명이 모두 이등중사(지금의 병장)·하사(현재 상병)·이등병·일등병 등이었다.
─어떻게 체포됐습니까.
『원래는 정보과 부관으로 근무했지만 보병 17연대 소대장에 배속됐어요. 하지만 포병을 따라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하루 종일 굶고서 밤이 되어 퇴각할 계획을 세웠지요.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오른쪽 다리 정강이에 파편이 박혔고 관통상까지 입었습니다. 잡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지요. 다급한 상황에서도 장교로 잡혀선 안 되겠다 싶어 군복의 계급장과 명찰을 뜯어 냈습니다. 지금껏 장교란 사실을 속인 채 하사 출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혼자 체포됐나요.
『아닙니다. 포병 3명과 보병 30명이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오른쪽 다리 관통상으로 평남 강동포로수용소 병원에 입원, 서너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감옥엔 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져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 일을 했습니다. 함북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용접일을 하기 전까지 20여년을 아오지에서 일했습니다』
張善生씨는 한국전 당시 중부전선의 심장부 중 하나인 「金化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1953년 7월15일이었다. 휴전을 꼭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金化는 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중 한 곳이다. 전쟁의 全기간을 통해 彼我間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으로, 특히 미군과 우리 국군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는 「철의 삼각지대」가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지만 敵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병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고립됐고, 귀환 길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다리에 파편이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敵의 압박이 계속되자 그는 奇智(기지)를 발휘한다. 자신이 입던 군복의 계급장과 명찰을 모두 떼어 낸 것이다.
그의 실종 사실이 당시 충주에 피란 가 있던 가족에게 전달된 것은 휴전을 고작 사흘 앞둔 1953년 7월24일이었다. 張善生씨의 어머니는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일찍 휴전을 맺었어도 큰아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늘을 원망했다는 것이다.
아오지 탄광으로
강동 포로수용소병원에서 서너 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그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이는 앞서 2000년 7월 탈북한 許再碩(허재석·73)씨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許씨 역시 강동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다음은 許씨와 관련된 2004년 月刊朝鮮 6월호 기사의 일부다.
<『국군장교 포로 10여 명이 강동수용소로 왔습니다. 그중에 김홍종씨는 국군 대대장이었다고 하고, 김종식은 국군 소위, 신형규씨는 헌병 소위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허통운이라는 사람은 양쪽 다리를 절단했고, 김덕수라는 사람은 복부 부상으로 겨우 살아났다고 합디다. 이곳에 왔을 때 이들은 몸이 허약해서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듯했습니다(中略)』
이듬해인 1954년 4월25일, 트럭이 오더니 회복된 환자들 50~60명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기차를 갈아타자 포로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許씨 일행을 실은 기차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3일 후 기차는 함경북도 경흥군 어느 탄광에 도착했다. 아오지 탄광이었다. 포로들이 탄 기차는 고향行이 아니라 「아오지行」이었다.
許씨가 강동수용소에서 본 국군장교 포로들도 이때 許씨와 함께 아오지에 왔다. 장교 포로 중 신형규씨만은 그때 아오지가 아닌 함경북도 새별군 하면탄광으로 갔다고 한다>
張善生씨도 許씨와 함께 아오지行 기차를 탔다. 하지만 폭탄 파편이 박힌 오른쪽 정강이 때문에 거친 막장일은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 일을 했다.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11세 연하의 부인을 만나 당 비서의 중매로 결혼했다. 부인은 아오지 탄광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했습니까.
『아오지 탄광 기계 수리공을 할 때 「편의시설 지도원」이란 직분으로 식모 일을 하던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 여자를 당 비서가 중매를 섰습니다. 31세 때입니다. 5남1녀를 뒀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함북의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생한 기억을 말해 주세요.
『제가 다리를 못 써서 나무(땔감)도 노친네(아내)가 하고, 아들과 떨어져 살아서… 우리 노친네가 먹을 것을 구해 왔어요』
고생한 얘기를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張善生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 빨리 노친네를 데려와야 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곁에 있던 조선족 L씨는 『사흘 뒤 가족들을 모두 모시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제야 張善生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기자는 나중에 L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졌다. L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 우시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충북 충주가 고향, 12세 때 강릉으로 이사
기자는 그에게 고향에 대한 추억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고향은 어딥니까.
『충북 충주시 룡한리입니다. 마을 앞에 제숙산이 있었고 집 앞에는 배나무·감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마을이 모두 張氏 성을 가졌습니다. 첫째 삼촌인 장규영, 둘째 삼촌인 장규순도 한마을에 살았는데 둘째 삼촌은 철도 경찰관이셨습니다. 옆집에 동네 친구가 살았는데 성은 모르지만 해동이라고 불렀어요.
12세 때 충주를 떠나 강릉으로 이사 갔습니다. 주문진에서 어머니가 어물전을 열었는데 신통치 않아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다시 13세 때 강릉에 갔습니다. 집주소는 강릉군(지금은 강릉시) 교동 893번지입니다. 강릉 삼락학원에 다녔습니다. 바로 집 뒤에 강릉상업학교가 있었습니다』
그의 증언을 확인해 보니, 충주에 「룡한리」라는 지명은 없었다.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수 있겠다 싶어 충북 충주시 공보실에 전화를 걸었다. 확인 결과, 룡한리가 아니라 「용탄리」였다. 지금은 용탄동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산에 있었다던 제숙산 역시 「계족산」이었다. 계족산은 현재 「계명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계명산으로 지명이 바뀐 것은 1958년이었다.
공보실 관계자는 『당시 충주에 큰 부자가 없는 것이 鷄足山(계족산)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아 충주시의회 의결을 거쳐 1958년 「여명을 알린다」는 뜻의 鷄鳴山(계명산)으로 개칭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계족은 닭발이란 뜻이고 分散을 뜻하는 것이어서 지역 여론을 감안해 바꾼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苦學하며 서울 덕수상업학교 다녀
그가 다녔다는 강릉 삼락학원도 현재 남아 있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시교육청에 문의했다. 초등교육과 홍문기 장학관은 지역 교육 원로들에게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왔다.
『1930~1940년대에 삼락학원이 있었다. 그러나 정식 公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인근에 강릉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학교 갈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 사설학원이다. 몇 년제 과정인지는 알지 못한다. 현재 삼락학원 자리에 명주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발음이 부정확해 다소 착오가 있었지만, 70년이 지난 일인데도 그의 기억은 비교적 정확했다.
─부모님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아버지 이름은 장천복, 어머니는 박만돌입니다. 아버지는 倭政 때 양조장 일을 했는데 광복 뒤 포목장사도 하고 주문진에서 생선을 떼와 강릉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이때껏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농촌을 돌며 들깨기름을 팔러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그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밑에 남동생 2명과 여동생 2명이 있습니다. 남동생은 선광·춘식, 여동생은 간난이·춘애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강릉시 왕산면 칠성산에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17세 때 서울 덕수상업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낮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張善生씨 부모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 장남을 서울로 유학 보냈다. 집 곁에 강릉상업학교가 있어 굳이 학비가 비싼 서울 덕수상업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강릉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非정규 사설학원인 「삼락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굳이 서울로 유학을 택한 것은 학업 성적이 우수한데다 장남에 대한 부모의 각별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당시 명문학교였던 덕수 공립상업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張善生씨는 학창 시절 「발바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활달했다. 활달한 성격에 뜀박질도 잘해 부모의 자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곧잘 큰아들을 떠올리며 『머리가 비상하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살아 있었다면 집안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며느리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대화 도중 남한에 살 때 좋아하는 「처녀애」가 있었다고 했다. 국군포로가 된 지 52년이 지났지만 첫사랑의 여자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권현자」라는 그녀의 이름도 기억했다. 정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중풍과 탈북, 그리고 再탈북
그는 5년 전 중풍에 걸렸다. 半身 마비로 몸의 왼편은 전혀 쓸 수 없다. 왼손, 왼발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오른쪽 몸으로 지탱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오른쪽 몸도 영양결핍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중풍이 언제 왔습니까.
『5년 전에 왔습니다.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아스피린도 없는 나라에서 약이 어딨습니까. 우리 노친(아내)이 나무도 하고 끼니를 구해 저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脫北했습니까.
『첫 번째 脫北은 3년 전에 했습니다. 큰 아들이 저를 업고 함북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아들은 저를 중국에 내려놓고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가 머물러 있던 곳의 집 주인이 「한국에 보내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서울에 있는 제 동생(張善光)과 전화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 公安에 제 발로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조선에 못 가는 줄 알았습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를 큰아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延吉에 내려 준 것이다. 아들은 되돌아가고 그만 혼자 남았다. 그때가 2002년 2월26일이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측에 따르면, 당시 그는 여러 명의 탈북자와 함께 和龍(화룡)에 와서 脫北 브로커의 보호를 받았다. 이 브로커를 통해 서울 성내동에 사는 동생 善光씨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귀가 어두워 전화상봉은 불발에 그쳤다. 게다가 그를 보호하고 있던 브로커가 수천만원의 脫北 비용을 요구했다.
善光씨는 『정말 친형인지 애매한데다 거액의 몸값까지 요구해 선뜻 응할 수 없었고, 통일부에 문의하니 「조심하라」고 해 형이 있다는 중국에 무작정 찾아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답답했던 張善生씨는 자기 발로 중국 公安에 찾아가 脫北 사실을 털어놓고 만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公安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북송됐다. 2002년 5월29일의 일이다.
피랍·탈북인권연대 측은 『체포된 張善生씨는 중국에서 한 달, 북한에서 한 달 감옥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탈북은 어떻게 해서 이뤄졌습니까.
『큰아들이 거기(延吉)에 가면 한국에 전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회령을 거치지 않고 함북 온성군 삼봉구를 거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삼봉구는 중국 개산툰과 인접한 곳입니다. 지난 6월14일의 일입니다』
『국군포로 안태모·최문구를 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국군포로들을 많이 봤다고 밝혔다. 장교 출신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의 이름을 물었지만 몇 명을 제외하고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국군포로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할 순 없습니다. 아오지 탄광에 같이 있었던 안태모·최문구라는 이름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출신이나 계급은 잊어버렸습니다. 아, 장교 출신도 한 명 있었습니다. 소위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오지에 국군포로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함북 무산군 주초구에 있는 무산광산에 국군포로들이 많았습니다』
─정부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군장교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장교로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장교로서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게… 자기 역할을 못한 게…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요. 나머지 여생, 국가에 도움을 줘야지…』
인터뷰를 마치자 밤 11시30분이 훌쩍 넘었다. 조선족 L씨와 기자는 延吉로 다시 돌아가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다. 술이 오르자 그는 국군포로와 脫北 주민의 실상에 대해 비교적 많은 말을 했다.
그는 흥분해서 『국군포로들을 부지기수로 많이 봤다』고 했다. 그의 직설적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공화국에 죽어 가는 영감(국군포로)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함경북도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한국이 싫어요. 중국에도 法이 있습니다. 저를 찾아와 아버지를 찾아 달라는 남한 분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는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안전도 그렇고, 北에 남겨 둔 가족 전체를 데려가지 못하면 또다시 이산가족을 만드는 셈입니다. 이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가 거주하는 곳을 손으로 꼽았다.
국군포로를 계속 방치할 것인가?
『함북 은덕군 아오지 탄광과 오봉 탄광에 주로 살고 있습니다. 아오지는 우스갯 소리로 「아~오지 말라」는 곳으로 부릅니다. 또 함북 새별군 고건원 탄광과 온성군 미산리에 5~6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왜 국군포로들이 오래 사는지 아십니까. 긴 세월 동안 남녘 하늘만 바라보며, 그리움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노인이 된, 다 죽어 가는 이들을 붙잡아 두고 무얼 하겠다는 것입니까. 金大中 정부 시절, 對北지원을 했다는데 함경도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不歸客(불귀객)이 될 게 뻔합니다』
택시를 타고 혼자 호텔로 향했다. 빗방울이 점점 거셌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반세기가 지난 뒤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52년 만에 귀환을 꿈꾸는 老兵은 비로소 긴 전쟁을 끝내고 남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전쟁에서 신명을 바친 그는 평생을 불운 속에 살아야 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덕택에 오래 살아남아 脫北에 성공했다. 그는 강하지도, 건강하지도 않고 그저 죽음을 앞두고 있다.
갑자기 브레히트의 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미웠다>●
[인터뷰] 張善生씨 동생 善光씨
『형님 다음은 형수님 모실 차례』
● 善光씨, 脫北 브로커 농간에 마음고생
● 張善生씨 어머니, 정한수 떠놓고 매일 치성드려
張善生씨의 동생 善光(선광·72)씨는 형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그간의 마음고생을 솔직히 털어놨다.
3년 전 脫北 브로커가 형의 생존 사실을 처음 전했을 때만 해도 그는 반신반의하며 『뭣 하러 오느냐』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잘 사는 형을 脫北 브로커들이 집적거려 바람을 넣은 것 아니냐. 나도 잘 살지 못하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고 곤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형이 아오지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브로커들이 형의 「몸값」으로 거액을 요구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 7월12일 기자가 善光씨가 사는 서울 성내동 자택에 찾아가 형의 「아오지」 삶을 전하자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半身不隨(반신불수) 중풍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고 하자 善光씨는 『더 늦기 전에 빨리 모셔와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善光씨의 부인인 金敎姬(김교희·66)씨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金씨는 『성당에 가서 무사히 송환되기를 기도드렸다. 건강하게 오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善光씨는 형과 일곱 살 차이다. 나이 差가 커 형과의 유년시절 「놀이 추억」은 별로 없다. 다만 강릉 안목해수욕장 부근에서 전복을 잡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가 초등학교 때 서울 덕수상업학교에 다니던 형은 우상이었다. 善光씨의 큰아들 熙萬(희만·45)씨가 형이 다녔던 덕수商高를 나와 한국은행에 입사하자 『똑똑한 피는 못 속인다』고 으쓱했을 정도다.
善光씨가 형의 실종 소식을 들은 것은 대구 육군본부 군속으로 일할 때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스무 살. 휴전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그는 『당시 포병 관측장교는 무전기를 짊어지고, 포탄을 투하할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주로 했다. 엄청 위험한 일이었다. 형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金씨는 시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장독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매일 치성을 드렸고 굿도 많이 했다』며 『명절 때는 따로 상을 차릴 정도였고 큰아들 생각에 많이 우셨다』고 떠올렸다.
善光씨는 『형이 송환되면 다음은 형수님을 모셔올 차례』라며 『빨리 모셔와 형님 부부가 함께 해로하시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국군 중위로 1953년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인 「金化(김화)전투」에서 관통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체포 당시 국군장교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계급 견장과 이름표를 뜯어 버렸다. 북한에서는 지난 52년간 누구도 그가 대한민국 장교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평남 강동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서너 차례 다리 수술을 받은 끝에 그는 함북 은덕군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50세가 될 때까지 아오지에서 살았고 이후 함북 부령군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60세에 퇴직했다.
2002년 2월 큰아들 등에 업혀 두만강을 넘어 脫北했으나 중국 公安(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지난 6월14일 다시 死線(사선)을 넘었고 지난 7월7일 중국 주재 한국영사관에 「안착」, 고국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중풍으로 半身이 마비됐고, 영양실조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이상이 그의 삶의 대강이다. 몇 文章으로 요약된 그의 삶은 수많은 行間(행간)을 품고 있다. 그 行間에는 반세기 분단의 아픔이 거칠게 꿈틀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담담하게 얘기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장교로서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게… 할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발전된 조국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지난 7월2일 오전 9시35분. 중국 길림성 長春(장춘)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하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며칠 전 데스크에게서 『중국 延吉(연길)에 가서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를 만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를 조선족이 보호하고 있다」는 정보를 준 피랍·탈북 인권연대 측은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관광객처럼 행동하라. 「기자」의 「기」字도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상태여서 신경이 곤두섰다. 비행기 엔진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납북자도, 국군포로도 없다」는 정부 |
|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된 張善生씨 위패 |
延吉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3시40분. 무려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長春공항 밖 나무 그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국군포로. 이젠 국민들의 관심 밖의 심드렁한 일이 됐다. 『납북자도, 국군포로도 없다. 다만 이산가족이 있다』는 해괴한 주장이 정부 쪽에서 나오고 있다. 간혹 「중국의 脫北 브로커에게 억류됐던 국군포로가 送還됐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리곤 했지만 1단 기사에 불과했다.
이 정부에서 국군포로는 남북협력을 방해하는 골칫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문득, 기자가 만나러 가는 국군포로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봤다. 「강철 감옥」 안에서 죽은 듯 살아온 사람일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과 장백산을 넘어 왔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張善生씨가 한국에 보냈던 탄원서를 꺼내 읽었다.
<본인은 비록 연로하고 병약한 몸이나 국가를 위해 전투 중 포로가 되었으나 엄연한 현역 국군장교이므로 조국에 귀환하여 전역을 하고 남은 여생을 발전된 조국에서 사람답게 살다가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었을 시 국립묘지에 묻히고 그러지 않을 땐 고향땅에 묻히고자 함.
처와 자식들에게도, 본인은 자랑스러운 국군장교로서 포로가 되어 지금까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였으나 조국에서 자유롭고 떳떳한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함.
이상과 같이 탄원하오니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님과 관계부서에서는 한시바삐 본인을 조국으로 안전하게 귀환시켜 줄 것을 중국 땅에서 탄원합니다.
2005년 6월15일. 탄원한 대한민국 육군중위 張善生>
오후 5시40분. 비행기가 延吉(연길)공항에 다다르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비행기 창으로 바라보니 흙탕물이 농경지를 삼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비가 퍼부었다. 택시를 타고 피랍·탈북인권연대가 일러 준 호텔로 향했다. 비가 와서인지 거리가 엉망이었다. 차들이 엉키고 경적이 귀를 찔렀다.
비에 젖은 延吉, 그를 만나다 |
| 한국 정부에 보낸 張善生씨 자필 탄원서. |
그는 張善生씨를 모시고 있는 조선족과 「접선」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오후 8시 호텔 앞에서 신문지를 말아 오른손에 들고 있으면 누가 「朴사장님이십니까」하고 물을 것이다. 그를 따라가면 된다』
오후 8시. 都총장의 말대로 호텔 앞으로 나갔다. 흰 와이셔츠 차림의 조선족 청년 L씨가 『朴사장이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車로 延吉 시내 골목골목을 돌았다. 혹시 미행하는 車가 있다면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윈도 브러시가 빗물을 한 번 훔칠 때마다 어둑어둑한 시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한 곳은 변두리 시골 마을이었다. 길이 질펀하고 개가 요란하게 짖고 있었다. 오후 8시30분쯤 드디어 장교 출신 脫北 국군포로 張善生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놀란 듯 기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눈이 붉어졌다.
그를 취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퀭한 두 눈, 비쩍 말라 몸무게가 40kg에도 못 미칠 정도였다. 5년 전 중풍으로 왼쪽 몸 전체가 마비된 상태였고, 전쟁 당시 입은 오른쪽 다리 관통상으로 걷지도, 서지도 못했다. 물론 대·소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脫北 전 끼니 해결은 전적으로 아내(68) 몫이었다. 남편을 대신해 혼자 땔감을 구했고, 「燒土(소토)질」을 해서 찬거리를 마련했다. 소토질은 원래 잡목이나 짚을 태워 흙을 소독한다는 뜻이지만 북한에서는 「텃밭을 경작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텃밭이란 게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는 게 아니라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몇 리를 걸어가야 하는 손바닥만 한 땅이다.
50년 만에 갈치를 처음 먹어 |
| 張善生씨가 가족 얘기를 하며 울고 있다. |
북한 주민들, 특히 밑바닥 생활을 강요받은 국군포로 출신들에게 생선은 사치스런 음식이다. 지난해 9월 귀환한 국군포로 李完燮(이완섭·73)씨 역시 탈북한 뒤 延吉에서 갈치를 먹고 『53년 만에 처음 먹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張善生 중위는 양쪽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청기가 불량품인지 「삑삑~」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無표정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청기를 떼어 내고 귀에다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행여 옆집에서 기자의 목소리를 눈치 채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L씨는 기자의 목소리가 커지면 팔을 끌어 당겨 『목소리를 낮추라』고 제지했다.
張善生씨는 목소리가 어눌하고 희미한데다 발음도 명확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말을 알아듣는 조선족 L씨가 없었다면 서로 멍하니 얼굴만 바라보다 그냥 돌아올 뻔했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위급상황임을 직감했다. 조선족 청년 L씨는 『모시기 너무 힘드니 빨리 한국으로 데려가라』고 성화였다.
그는 고향 얘기만 나와도, 北에 남겨 둔 아내 얘기만 꺼내도 눈망울이 묽어졌다. 하지만 눈물샘도 말라 버린 듯 물빛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張善生씨와 인터뷰하는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였다. 기자는 목청을 높이고, L씨가 그걸 전하고, 張씨가 웅얼웅얼 몇마디 하면 L씨가 통역을 했다. 다음의 인터뷰 내용은 독자들을 위해 再구성한 것이다.
파편처럼 오고가던 말들을 간추렸다. 張씨가 토씨 없이 전한 단어들의 의미가 이어지도록 연결한 부분도 있다.
체포 때 장교 계급장 떼내─국군장교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군번과 계급을 말씀해 주십시오.
『육군 3사단 보병 17연대 11야포단 72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고, 계급은 중위였습니다. 군번은 123990입니다』
張善生씨는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중에서 가장 고위급이다. 1994년 10월 최초 귀환한 국군포로 趙昌浩(조창호) 소위보다 계급이 높았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 51명 가운데 張善生·趙昌浩씨를 제외한 49명이 모두 이등중사(지금의 병장)·하사(현재 상병)·이등병·일등병 등이었다.
─어떻게 체포됐습니까.
『원래는 정보과 부관으로 근무했지만 보병 17연대 소대장에 배속됐어요. 하지만 포병을 따라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하루 종일 굶고서 밤이 되어 퇴각할 계획을 세웠지요.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오른쪽 다리 정강이에 파편이 박혔고 관통상까지 입었습니다. 잡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지요. 다급한 상황에서도 장교로 잡혀선 안 되겠다 싶어 군복의 계급장과 명찰을 뜯어 냈습니다. 지금껏 장교란 사실을 속인 채 하사 출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혼자 체포됐나요.
『아닙니다. 포병 3명과 보병 30명이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오른쪽 다리 관통상으로 평남 강동포로수용소 병원에 입원, 서너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감옥엔 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져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 일을 했습니다. 함북 고무산 노동자지구에서 용접일을 하기 전까지 20여년을 아오지에서 일했습니다』
張善生씨는 한국전 당시 중부전선의 심장부 중 하나인 「金化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1953년 7월15일이었다. 휴전을 꼭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金化는 철원~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 중 한 곳이다. 전쟁의 全기간을 통해 彼我間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으로, 특히 미군과 우리 국군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는 「철의 삼각지대」가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지만 敵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병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고립됐고, 귀환 길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다리에 파편이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敵의 압박이 계속되자 그는 奇智(기지)를 발휘한다. 자신이 입던 군복의 계급장과 명찰을 모두 떼어 낸 것이다.
그의 실종 사실이 당시 충주에 피란 가 있던 가족에게 전달된 것은 휴전을 고작 사흘 앞둔 1953년 7월24일이었다. 張善生씨의 어머니는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조금만 더 일찍 휴전을 맺었어도 큰아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늘을 원망했다는 것이다.
아오지 탄광으로 |
| 張善生씨가 남쪽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
<『국군장교 포로 10여 명이 강동수용소로 왔습니다. 그중에 김홍종씨는 국군 대대장이었다고 하고, 김종식은 국군 소위, 신형규씨는 헌병 소위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허통운이라는 사람은 양쪽 다리를 절단했고, 김덕수라는 사람은 복부 부상으로 겨우 살아났다고 합디다. 이곳에 왔을 때 이들은 몸이 허약해서 뼈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듯했습니다(中略)』
이듬해인 1954년 4월25일, 트럭이 오더니 회복된 환자들 50~60명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기차를 갈아타자 포로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許씨 일행을 실은 기차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3일 후 기차는 함경북도 경흥군 어느 탄광에 도착했다. 아오지 탄광이었다. 포로들이 탄 기차는 고향行이 아니라 「아오지行」이었다.
許씨가 강동수용소에서 본 국군장교 포로들도 이때 許씨와 함께 아오지에 왔다. 장교 포로 중 신형규씨만은 그때 아오지가 아닌 함경북도 새별군 하면탄광으로 갔다고 한다>
張善生씨도 許씨와 함께 아오지行 기차를 탔다. 하지만 폭탄 파편이 박힌 오른쪽 정강이 때문에 거친 막장일은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탄광 굴착기계 수리공 일을 했다.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서 11세 연하의 부인을 만나 당 비서의 중매로 결혼했다. 부인은 아오지 탄광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했습니까.
『아오지 탄광 기계 수리공을 할 때 「편의시설 지도원」이란 직분으로 식모 일을 하던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 여자를 당 비서가 중매를 섰습니다. 31세 때입니다. 5남1녀를 뒀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함북의 한 농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생한 기억을 말해 주세요.
『제가 다리를 못 써서 나무(땔감)도 노친네(아내)가 하고, 아들과 떨어져 살아서… 우리 노친네가 먹을 것을 구해 왔어요』
고생한 얘기를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張善生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 빨리 노친네를 데려와야 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곁에 있던 조선족 L씨는 『사흘 뒤 가족들을 모두 모시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제야 張善生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기자는 나중에 L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졌다. L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 우시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충북 충주가 고향, 12세 때 강릉으로 이사 |
| 張善生씨 탈북을 지원한 피랍탈북인권연대 都希侖 사무총장. |
─고향은 어딥니까.
『충북 충주시 룡한리입니다. 마을 앞에 제숙산이 있었고 집 앞에는 배나무·감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마을이 모두 張氏 성을 가졌습니다. 첫째 삼촌인 장규영, 둘째 삼촌인 장규순도 한마을에 살았는데 둘째 삼촌은 철도 경찰관이셨습니다. 옆집에 동네 친구가 살았는데 성은 모르지만 해동이라고 불렀어요.
12세 때 충주를 떠나 강릉으로 이사 갔습니다. 주문진에서 어머니가 어물전을 열었는데 신통치 않아 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다시 13세 때 강릉에 갔습니다. 집주소는 강릉군(지금은 강릉시) 교동 893번지입니다. 강릉 삼락학원에 다녔습니다. 바로 집 뒤에 강릉상업학교가 있었습니다』
그의 증언을 확인해 보니, 충주에 「룡한리」라는 지명은 없었다.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 수 있겠다 싶어 충북 충주시 공보실에 전화를 걸었다. 확인 결과, 룡한리가 아니라 「용탄리」였다. 지금은 용탄동으로 바뀌었다. 마을 앞산에 있었다던 제숙산 역시 「계족산」이었다. 계족산은 현재 「계명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계명산으로 지명이 바뀐 것은 1958년이었다.
공보실 관계자는 『당시 충주에 큰 부자가 없는 것이 鷄足山(계족산)이란 이름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아 충주시의회 의결을 거쳐 1958년 「여명을 알린다」는 뜻의 鷄鳴山(계명산)으로 개칭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계족은 닭발이란 뜻이고 分散을 뜻하는 것이어서 지역 여론을 감안해 바꾼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苦學하며 서울 덕수상업학교 다녀
그가 다녔다는 강릉 삼락학원도 현재 남아 있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시교육청에 문의했다. 초등교육과 홍문기 장학관은 지역 교육 원로들에게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왔다.『1930~1940년대에 삼락학원이 있었다. 그러나 정식 公교육기관이 아니었다. 인근에 강릉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학교 갈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을 가르친 사설학원이다. 몇 년제 과정인지는 알지 못한다. 현재 삼락학원 자리에 명주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발음이 부정확해 다소 착오가 있었지만, 70년이 지난 일인데도 그의 기억은 비교적 정확했다.
─부모님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아버지 이름은 장천복, 어머니는 박만돌입니다. 아버지는 倭政 때 양조장 일을 했는데 광복 뒤 포목장사도 하고 주문진에서 생선을 떼와 강릉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이때껏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농촌을 돌며 들깨기름을 팔러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그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밑에 남동생 2명과 여동생 2명이 있습니다. 남동생은 선광·춘식, 여동생은 간난이·춘애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강릉시 왕산면 칠성산에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17세 때 서울 덕수상업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낮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張善生씨 부모는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 장남을 서울로 유학 보냈다. 집 곁에 강릉상업학교가 있어 굳이 학비가 비싼 서울 덕수상업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강릉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非정규 사설학원인 「삼락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굳이 서울로 유학을 택한 것은 학업 성적이 우수한데다 장남에 대한 부모의 각별함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당시 명문학교였던 덕수 공립상업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張善生씨는 학창 시절 「발바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활달했다. 활달한 성격에 뜀박질도 잘해 부모의 자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곧잘 큰아들을 떠올리며 『머리가 비상하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살아 있었다면 집안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며느리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대화 도중 남한에 살 때 좋아하는 「처녀애」가 있었다고 했다. 국군포로가 된 지 52년이 지났지만 첫사랑의 여자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권현자」라는 그녀의 이름도 기억했다. 정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중풍과 탈북, 그리고 再탈북 |
| 한국전쟁 당시 포탄이 박혔던 오른쪽 다리 정강이. 워낙 살이 빠져 팔인지 다리인지 구분이 어렵다. 52년이 지난 지금도 상흔이 남아 있다. |
─중풍이 언제 왔습니까.
『5년 전에 왔습니다.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아스피린도 없는 나라에서 약이 어딨습니까. 우리 노친(아내)이 나무도 하고 끼니를 구해 저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脫北했습니까.
『첫 번째 脫北은 3년 전에 했습니다. 큰 아들이 저를 업고 함북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아들은 저를 중국에 내려놓고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가 머물러 있던 곳의 집 주인이 「한국에 보내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서울에 있는 제 동생(張善光)과 전화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 公安에 제 발로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조선에 못 가는 줄 알았습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를 큰아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延吉에 내려 준 것이다. 아들은 되돌아가고 그만 혼자 남았다. 그때가 2002년 2월26일이었다.
피랍·탈북인권연대 측에 따르면, 당시 그는 여러 명의 탈북자와 함께 和龍(화룡)에 와서 脫北 브로커의 보호를 받았다. 이 브로커를 통해 서울 성내동에 사는 동생 善光씨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귀가 어두워 전화상봉은 불발에 그쳤다. 게다가 그를 보호하고 있던 브로커가 수천만원의 脫北 비용을 요구했다.
善光씨는 『정말 친형인지 애매한데다 거액의 몸값까지 요구해 선뜻 응할 수 없었고, 통일부에 문의하니 「조심하라」고 해 형이 있다는 중국에 무작정 찾아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답답했던 張善生씨는 자기 발로 중국 公安에 찾아가 脫北 사실을 털어놓고 만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公安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북송됐다. 2002년 5월29일의 일이다.
피랍·탈북인권연대 측은 『체포된 張善生씨는 중국에서 한 달, 북한에서 한 달 감옥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탈북은 어떻게 해서 이뤄졌습니까.
『큰아들이 거기(延吉)에 가면 한국에 전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회령을 거치지 않고 함북 온성군 삼봉구를 거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삼봉구는 중국 개산툰과 인접한 곳입니다. 지난 6월14일의 일입니다』
『국군포로 안태모·최문구를 안다』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국군포로들을 많이 봤다고 밝혔다. 장교 출신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의 이름을 물었지만 몇 명을 제외하고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국군포로를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할 순 없습니다. 아오지 탄광에 같이 있었던 안태모·최문구라는 이름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출신이나 계급은 잊어버렸습니다. 아, 장교 출신도 한 명 있었습니다. 소위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오지에 국군포로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함북 무산군 주초구에 있는 무산광산에 국군포로들이 많았습니다』
─정부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국군장교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장교로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장교로서 본분을 지키지 못한 게… 자기 역할을 못한 게…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요. 나머지 여생, 국가에 도움을 줘야지…』
인터뷰를 마치자 밤 11시30분이 훌쩍 넘었다. 조선족 L씨와 기자는 延吉로 다시 돌아가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다. 술이 오르자 그는 국군포로와 脫北 주민의 실상에 대해 비교적 많은 말을 했다.
그는 흥분해서 『국군포로들을 부지기수로 많이 봤다』고 했다. 그의 직설적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공화국에 죽어 가는 영감(국군포로)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함경북도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한국이 싫어요. 중국에도 法이 있습니다. 저를 찾아와 아버지를 찾아 달라는 남한 분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는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안전도 그렇고, 北에 남겨 둔 가족 전체를 데려가지 못하면 또다시 이산가족을 만드는 셈입니다. 이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가 거주하는 곳을 손으로 꼽았다.
국군포로를 계속 방치할 것인가?『함북 은덕군 아오지 탄광과 오봉 탄광에 주로 살고 있습니다. 아오지는 우스갯 소리로 「아~오지 말라」는 곳으로 부릅니다. 또 함북 새별군 고건원 탄광과 온성군 미산리에 5~6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왜 국군포로들이 오래 사는지 아십니까. 긴 세월 동안 남녘 하늘만 바라보며, 그리움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같이 노인이 된, 다 죽어 가는 이들을 붙잡아 두고 무얼 하겠다는 것입니까. 金大中 정부 시절, 對北지원을 했다는데 함경도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不歸客(불귀객)이 될 게 뻔합니다』
택시를 타고 혼자 호텔로 향했다. 빗방울이 점점 거셌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반세기가 지난 뒤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52년 만에 귀환을 꿈꾸는 老兵은 비로소 긴 전쟁을 끝내고 남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전쟁에서 신명을 바친 그는 평생을 불운 속에 살아야 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덕택에 오래 살아남아 脫北에 성공했다. 그는 강하지도, 건강하지도 않고 그저 죽음을 앞두고 있다.
갑자기 브레히트의 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미웠다>●
[인터뷰] 張善生씨 동생 善光씨
『형님 다음은 형수님 모실 차례』
● 善光씨, 脫北 브로커 농간에 마음고생
● 張善生씨 어머니, 정한수 떠놓고 매일 치성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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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善生씨가 송환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생 張善光·金敎姬씨 내외. |
3년 전 脫北 브로커가 형의 생존 사실을 처음 전했을 때만 해도 그는 반신반의하며 『뭣 하러 오느냐』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잘 사는 형을 脫北 브로커들이 집적거려 바람을 넣은 것 아니냐. 나도 잘 살지 못하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고 곤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형이 아오지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브로커들이 형의 「몸값」으로 거액을 요구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 7월12일 기자가 善光씨가 사는 서울 성내동 자택에 찾아가 형의 「아오지」 삶을 전하자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半身不隨(반신불수) 중풍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고 하자 善光씨는 『더 늦기 전에 빨리 모셔와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善光씨의 부인인 金敎姬(김교희·66)씨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金씨는 『성당에 가서 무사히 송환되기를 기도드렸다. 건강하게 오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善光씨는 형과 일곱 살 차이다. 나이 差가 커 형과의 유년시절 「놀이 추억」은 별로 없다. 다만 강릉 안목해수욕장 부근에서 전복을 잡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가 초등학교 때 서울 덕수상업학교에 다니던 형은 우상이었다. 善光씨의 큰아들 熙萬(희만·45)씨가 형이 다녔던 덕수商高를 나와 한국은행에 입사하자 『똑똑한 피는 못 속인다』고 으쓱했을 정도다.
善光씨가 형의 실종 소식을 들은 것은 대구 육군본부 군속으로 일할 때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스무 살. 휴전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그는 『당시 포병 관측장교는 무전기를 짊어지고, 포탄을 투하할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주로 했다. 엄청 위험한 일이었다. 형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죽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金씨는 시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장독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매일 치성을 드렸고 굿도 많이 했다』며 『명절 때는 따로 상을 차릴 정도였고 큰아들 생각에 많이 우셨다』고 떠올렸다.
善光씨는 『형이 송환되면 다음은 형수님을 모셔올 차례』라며 『빨리 모셔와 형님 부부가 함께 해로하시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