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의 대전제인 내각제 합의각서 유출 파동이 났을 때는 더 함축적 어휘가 등장합니다. YS는 유출 초기 각서 서명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나중에 거짓말로 드러나게 되죠. 그러자 유출 경위로 국면 전환을 시도합니다. 공작정치라는 것입니다. YS에 우호적인 언론들도 어떻게 유출이 됐는지에 초점을 맞춰 정치면을 구성했습니다. YS는 당무를 거부한 채 마산으로 가 버립니다. 이때 노 대통령은 “원만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참기 힘든 인내심이 요구되었다”고 회고합니다. 그토록 ‘참는다’의 대명사 격인 그가 ‘참기 힘든’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에 대해 저를 포함, 당시 민정계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이게 무슨 애도 아니고…. 여기서 대통령께서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노 대통령의 ‘인내’에 불만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JP도 ‘틀물레짓’(아이들이 떼를 쓰거나 보챌 때 누워서 사지를 버둥거리는 모습)이라고 비판한 기억이 있습니다.
299석 중 개헌 선을 훨씬 넘는 216석의 총재이자 현재권력이었던 노 대통령이 왜 54석 민주계 보스에 불과한 YS에게 끌려다녔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명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계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였으니까요. 둘째는 YS 진영의 민정계 공략이었죠. 대표적 인물이 허주(虛舟)로 더 잘 알려진, 노 대통령의 친구 김윤환 의원입니다. 김 의원은 일찌감치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한 가지 더 꼽으라면 YS의 엄포가 상당히 먹혀들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YS는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참모들은 걸핏하면 ‘탈당해서 DJ(김대중) 손 들어준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노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겠지요. JP는 그 후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YS와 DJ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둘은 절대 합쳐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곤 했습니다.
돌고 도는 권력
이런 YS가 현재권력이 됐을 때는 미래권력인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1997년의 일입니다. 이회창 대표는 원래 YS에게 고분고분했습니다. 이 대표가 신한국당 8룡(龍·신한국당 대선 후보 9명을 통칭 9룡으로 불렀습니다. 이 대표와 이인제·이한동·이수성·이홍구·최병렬·박찬종·최형우·김덕룡씨입니다)으로부터 ‘당 대표와 대선후보 중 하나만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을 때도 YS는 중립을 지켰습니다. 중립은 사실상 이회창 대표를 지원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데 훨씬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둘이 결정적으로 충돌한 것은 ‘DJ 비자금’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YS 청와대의 배재욱 사정비서관으로부터 DJ 비자금 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정보기관의 비밀자료였을 것입니다. 배 비서관이 미래권력에 줄을 선 것이지요. 신한국당은 이를 폭로하면서 수사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YS는 김태정 검찰총장을 은밀히 불러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하라고 지시합니다. YS는 회고록에서 김태정 총장에게 했다는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만일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검찰에서 수사하게 되면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된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과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선거를 치를 수가 없다. 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헌정이 중단되고 대통령 없는 나라가 된다. 이게 말이나 되느냐. 그러니 안 된다.”
DJ 비자금 폭로로 결정적 일격을 노렸던 이회창 대표 쪽으로선 생각하지도 않던 복병을 만난 셈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대표 측이 반발하면서 급기야 선거운동 중 YS인형을 몽둥이로 패는 사건이 벌어지고, YS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맙니다.
여당형 충돌과 야당형 충돌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충돌이 수면 위로 또 한 번 떠올랐던 적은 노무현 대통령 때입니다. 노 대통령이 당정분리(黨政分離)라는 이상적 아이디어를 갖고 대통령 취임 전 평당원이 될 때부터 갈등은 잉태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야당 기질’에 익숙해 있던 당시 여당 의원들과 각자 따로 놀며 국정을 수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여러 건입니다. 노무현 정부 2년 차에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김근태 의원이 노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제안한 것은 전형적인 ‘야당 식’이었습니다. 집권 열린우리당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공약한 데 대해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이 내 생각을 모르고 선거에서 공약했다. 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데 대해 김 의원이 보도자료까지 내며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2005년엔 집권 여당의 행태에 실망한 탓인지 노 대통령이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大聯政)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노선 차이가 크지 않다”면서 독일 사례를 예로 들어 가며 이런 제안을 내놓아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연정 제안도 제안이지만,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노선이 별 차이가 없다는 현실 인식에 더욱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정말 코미디 같은 얘기였습니다.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떨어지고 당내에서 또 신당 얘기가 나오자 노 대통령은 “신당은 지역당”이란 코멘트를 했고, 이에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제2의 대연정 발언’이라고 비판한 것도 떠오릅니다.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집권당 대표인 김 의원을 향해 ‘유감’이란 뜻을 밝힙니다. 갈등의 결정판은 대선이 임박한 2007년에 극에 달합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이른 시기, 즉 퇴임 1년 전에 집권당에 탈당계를 내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김무성의 도전, 아직은 섣불러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간 대립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 취임 후 1년도 안 돼 주이야박(晝李夜朴)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엔 이명박 사람, 밤엔 박근혜 사람’이란 뜻입니다. 2008년 4월 친이(親李)계의 공천을 받았지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의리’를 저버린 국회의원이 많다는 것이지요. 박근혜 의원이 확실한 미래권력이었단 뜻도 됩니다.
그런 미래권력이 현재권력이 된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제 또 다른 미래권력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의 충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 대표의 상하이 개헌 발언부터 여의도연구원장 임명 소동, 유승민 전 원내대표 낙마 파동이 있었습니다. 이번엔 전략공천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몇 번의 충돌에서 김 대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앞선 예에서 보았듯이 현재·미래권력 간 충돌에서 승자는 항상 미래권력이었는데도 말입니다(승자였다고 모두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말은 현재권력인 대통령이 미래권력을 용인하거나 아니면 집권당을 탈당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현재 새누리당에선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임기가 아직도 2년 4개월이나 남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미래권력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건 당정분리라는 그의 ‘독특한 철학’ 때문으로 보입니다. 박 대통령은 당이 정부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고 있습니다. 이런 박 대통령에게 김 대표가 ‘야당 식 대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2017년에도 김 대표가 현재처럼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면, 박 대통령은 물러서거나 탈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 대표의 대선 전략이 아직은 섣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