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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1 / 다빈치와 양아들 살라이

사생아, 동성애자, 천재 화가, 예언가… 스캔들로 본 그의 진짜 모습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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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는 왜 다빈치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을까
⊙ 빌 게이츠가 다빈치의 광팬이 된 까닭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천재적 예술가들의 이면에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흉터가 새겨져 있다. 예술가들이란 도대체 어떤 종족일까. 겉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다름없는 지구인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은 도대체가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의 영혼은 다른 별에서 왔거나 적어도 끝없는 사막을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의 그것이 아닐까.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명언 중에 영어의 메리트(merit·뛰어남)와 모디스티(modest·겸손)의 공통점은 ‘M’이라는 글자뿐이라는 말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단테나 셰익스피어가 결코 의젓한 신사가 아니라 아니꼽고 거만한 인물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의 강한 자존심과 긍지가 남에게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성격이 괴팍한가?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운가? 사생활이 복잡한가? 말 못 할 특이 취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예술가의 내면을 가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지난 2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선생이 수년간의 암 투병 끝에 89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던 그. 유언을 따로 남기지 않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 마지막 인터뷰가 뇌리에 스쳤다. 그는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라고 단언했다.
 
  지성은 자기가 노력해서 이룩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생에 주어진 모든 것은 신과 우주의 선물이다. 36억 년 전 시작된 태초의 생명부터 우리가 매일 마시는 산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바다, 별, 나무,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까지. 문득 궁금해졌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재능을 부여받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년). 서양 문명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그도 죽기 전에 이러한 생의 진실을 알았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인간
 
  다빈치의 본명은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빈치 지역 출신의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흔히 ‘다빈치’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가 많아 ‘다빈치’를 성씨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그저 출생지를 밝히는 지역명일 따름이다.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늦은 1563년에야 성씨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당시(르네상스 시대)에는 메디치 가문 같은 귀족 가문이 아니면 성이 따로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빈치가 아무리 ‘빈치 지방의’라는 뜻일지언정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그를 지칭하는 애칭이 되었고 유럽에서도 그를 부를 때 레오나르도와 다빈치를 혼용해 쓰고 있으니 우리도 그를 계속해서 다빈치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우리에게 있어 천재 예술가 다빈치는 오직 한 명뿐이니까.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던 인간, 다빈치는 미술, 음악, 건축, 수학, 기하학, 해부학, 동식물학, 천문학, 기상학, 지질학, 지리학, 물리학, 광학, 토목공학, 군사 무기 제조에 이어 요리에도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 제법 창의적인 요리사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물론 1473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할 때 메인 셰프가 되자마자 메뉴를 완전히 바꾸는 바람에 해고되었고 몇 년 후 그의 친구인 산드로 보티첼리와 함께 음식점을 차렸다가 폭삭 망하기도 했지만.
 
 
  요리사 다빈치
 
  다빈치는 서른 살 무렵 밀라노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스포르차에게 일자리를 청하려고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를 했다. 당시 스포르차의 군사적 야망을 알아챈 그는 전문 필경사까지 고용하여 자신을 어필하는 제안서를 보냈는데, 편지에는 자신을 어떤 분야든 누구 못지않게 잘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가라고 띄우며 “만약 제가 제안한 각종 무기와 기술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각하의 정원이나 제가 몸을 낮춰 받드는 각하의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서나 직접 보여드릴 만반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쯤 되면 그의 전문 분야에 영업, 홍보, 사기(?) 등등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다빈치는 결국 스포르차 궁정에 엔지니어 겸 화가로 임명되어 1500년까지 밀라노에 체류했고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 유명한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요리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그곳에서 또다시 주방을 책임진 그는 스파게티 면을 개발하는가 하면 스파게티를 뽑는 기계와 포크, 마늘 빻는 기계, 개구리를 겁주어 물탱크에서 쫓아낼 수 있는 기괴한(?) 기구들도 만들어냈다.
 
  이후 스포르차가 〈최후의 만찬〉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밀라노에 있는 교회의 벽에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다빈치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곤 최후의 만찬 식탁 위에 어떤 음식을 올릴지 고민하며 음식을 결정하기 위해 모든 음식을 직접 요리하느라 긴 시간을 썼다고 한다. 만약에 누군가 다빈치에게 가장 좋아하는 직업을 물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요리사’라고 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재가 된 사생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저서를 접하고 드로잉으로 그려낸 것.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사람이 팔과 다리를 뻗으면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 비트루비우스의 글에 착안하였으나 실제 인체를 직접 관찰하여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을 가했다.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이탈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었고 그의 아버지 피에로는 5대째 공증인으로 일하며 스물다섯의 나이에 피렌체 정부청사 맞은편 포데스타 궁전 외곽에 사무실을 둘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빈치는 안타깝게도 약혼자를 둔 피에로가 휴가철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고아였던 카테리나와 하룻밤 불장난을 저질러 태어난 사생아였다. 수완 좋은 피에로는 이 곤란한 상황을 돈으로 잘(?) 해결했는데, 카테리나를 자신의 집안일을 봐주던 농부 겸 가마 노동자 안토니오와 결혼시키고 인근 농가에 살림까지 차려주었다. 친어머니의 손에서 크던 다빈치는 어머니의 결혼 후 이복동생이 네 명이나 연달아 태어나자 결국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친할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다빈치를 돌봐준 사람은 할아버지와 숙부였다.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의붓어머니가 첫 출산을 하다가 숨지자 드디어 아버지 피에로와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다빈치가 서자라는 사실이 가업인 공증인을 물려받는 데 걸림돌이 되었고 당시 지식인에겐 필수 코스였던 라틴어 학교 대신에 주산 학교만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다빈치는 라틴어를 못 읽었고 이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무학자’라고 낮춰 불렀던 열등감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어떤 이들은 결과론적으로 이것이 그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미화하지만, 정작 다빈치 본인은 이 말에 전혀 동의할 것 같지 않다.
 
  어려서부터 비범했던 다빈치는 아버지의 친구가 방패에 무서운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하자 실감 나는 괴물을 그리겠다며 살아 있는 동물들을 산 채로 해부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예 시체보관소에 틀어박혀 인체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로 최초로 인간의 태아를 비롯해 수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겼다. 또 현재까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소묘도 고대의 인체 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측정한 결과를 가지고 정확하게 그렸다고 한다.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1500년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 2005년 발견되었으나 오랫동안 유실품이었다가 2011년에 전시되었다. 2017년 11월 15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030만 달러에 낙찰되어 미술 작품 역사상 최고액을 달성했다.
  아들의 재능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다빈치가 열네 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갔고 그는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갔다. 다빈치가 스무 살이 됐을 때는 스승 베로키오가 그의 뛰어난 솜씨를 보고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고 단지 베로키오가 돈이 안 되는 그림보다는 조각에 더 몰두했을 뿐이라는 싱거운 뒷얘기가 있다. 어찌 됐든 다빈치는 일찍부터 실력을 인정받으며 명성을 누렸다.
 
  지난 2017년, 그의 그림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세상의 구주’라는 라틴어)〉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액인 4억5030만 달러(약 5014억원)에 팔려 화제를 모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품(〈모나리자〉)과 가장 비싼 예술품 모두 그의 작품이 차지한 것이다.
 
 
 
패셔니스타, ADHD

 
  다빈치는 계부와 조부, 계모 사이를 떠돌 듯이 옮겨가며 눈칫밥을 먹고 자란 탓인지 매사 싫증을 잘 내고 주의가 산만했다. 특히 창의적이지 않고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할 때면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스티브 잡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쓴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은 “그가 21세기 초 학생이었다면 감정기복과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약물 처방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인물을 그리고자 할 때 그의 얼굴, 행동, 옷,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허리춤에 항상 노트를 차고 다니며 그때그때 스케치를 해 모아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냈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특이하게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를 반전시켜 기록했는데, 이러한 ‘거울형 글쓰기(mirror writing)’를 한 이유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남이 훔쳐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노트 메모만 열심히 했을 뿐, 중도 포기는 그의 고질병이었고, 늘 한 가지 프로젝트를 다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프로젝트에 달려들기 일쑤여서 유독 미완성작이 많은 화가 중의 하나다.
 
  요절한 것도 아닌데 그가 직접 그리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한 회화 작품 가운데 전문가들이 진품으로 인정하는 작품은 겨우 15점가량에 지나지 않고, 공증인인 그의 아버지가 “30개월 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아무런 보상 없이 그림을 몰수당해도 좋다”는 계약서까지 작성했던 〈동방박사의 경배〉조차 밑그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빈치의 노트에는 ‘무엇이라도 완성된 것이 있는지 말해봐. …말해봐. …말해봐’라는 자조 섞인 메모가 되풀이되어 적혀 있다. 남들 앞에서는 늘 자신만만하게 굴었지만 속내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빈치는 흔히 천재 하면 떠오르는, 패션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안경 낀 부스스한 느낌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금발 곱슬머리의 꽃미남 스타일이었다고 하면 상상이 갈까? 초상화에서도 느껴지지만 잘생기고 체격도 좋았는데 키가 190cm가 넘었다는 얘기도 있다. 게다가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자타공인 패셔니스타였는데, 당대의 유행인 슬림한 옷차림과는 다르게 항상 무릎까지 오는 장밋빛 코트를 걸치곤 우아하게 옷자락을 펄럭이고 다녔다. 그는 항상 최고급 말들을 탔는데 오늘날로 치면 페라리나 벤틀리쯤 되는 명품차를 몰고 다닌 것이다. 이쯤 되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꽤나 많았을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그는 여자를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친구로 둔 적조차 없었다. 대신 항상 잘생긴 젊은 사내들과 어울렸다.
 
 
  동성애자(?)
 
  1476년, 스물네 살 때 다빈치는 다른 네 명의 청년과 함께 남색 행위로 공식적인 고소를 당한 기록이 있다.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시절, 당시 피렌체에는 동성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용인이 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남색만은 불법이었고 사형으로 다스려졌는데, 감옥까지 끌려갔던 그는 다행히 무혐의로 훈방되었다. 당시 함께 잡혀간 다른 청년 중 한 명이 메디치 가문에 연줄이 있어서 함께 풀려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으니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듯싶다.
 
  결과야 어찌 됐건 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그가 받은 충격은 꽤 컸고, 이후 그는 극도로 성(性)을 혐오하는 자세를 보이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다. 그는 “성관계는 사랑의 완성이 아닌 한낱 종족 보존을 위한 혐오스러운 행위일 뿐”이라고 기록했고 “화가는 고독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는 평생 동안 11만3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을 남겼지만(현재 1만3000쪽이 남아 전해지고 있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만은 일언반구 흘리지 않았다. 다빈치는 남자 누드를 많이 그렸는데 그들이 단지 모델이었는지 아니면 동성애 상대들이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를 동성애자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다빈치가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는 남자의 생식기 구조를 묘사하면서 남자의 성기를 다양하게 표현했는데, 여자의 은밀한 곳을 드로잉한 것은 단 두 차례뿐이었고 그나마도 과장했다. 섹스 행위를 묘사한 드로잉에서는 남자의 성기가 서로 만나는 모양으로 그렸는가 하면 또 다른 페이지에는 남자의 성기가 남자의 궁둥이를 향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역시 그가 동성애자였을 거라 분석했다. 그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어머니를 내면에 위치시켜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할 수 있는 젊은 남자들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다.
 
 
  양아들 살라이
 
모나리자(La Joconde, portrait de Monna Lisa)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이지만 언제(15세기경), 누구를 모델로 하여 그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빈치가 작품에 서명을 하지도 않았고, 주문서와 같은 기록도 전해진 것이 없다. 이 초상화가 왜 작가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가 후일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빈치는 어머니의 이복동생들 외에도 아버지와 세 번째 결혼한 계모에게서도 이복동생을 얻었다.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 탓에 그는 자식을 낳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훗날 이복동생 하나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빈치는 저주에 가까운 냉소를 담아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고 네게 후계자가 생긴 것을 알았고, 그런 사건이 네게 큰 즐거움을 준 것을 이해한다. 나는 어느 정도 네게 타고난 분별력이 있다고 판단했었는데, 네가 내게 제대로 보는 선견지명이 없었음을 알게 해주는구나. 너는 부단히 경계하는 적을 자식으로 두게 된 것을 기뻐하지만 자식의 모든 에너지는 자유를 쟁취하는 데 있고 그놈은 네가 죽은 후에야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다빈치의 이 독설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그의 인생에 날아와 꽂혔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은 양아들 잔자코모 카프로티티(일명 ‘살라이’)는 죽기 전까지 소위 말해 그의 등을 벗겨 먹었고, 앞에서는 따르는 시늉을 했지만 뒤에서는 그를 비난하고 경멸하기 일쑤였다.
 

  1508년, 살라이는 다빈치의 심부름으로 로마에 세계지리학 책을 구하러 갔다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피렌체의 구치소에서 검사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살라이가 소유하고 있다가 공개된 취조 기록 진술서에는 다빈치를 향해 ‘멍청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뽐내기 좋아하고 무식하면서도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허세 대장 고집불통 늙은이’라고 한 살라이의 거침없는 비난이 담겨 있다. 하지만 다빈치 역시 살라이의 행태를 몰랐을 리 없다. 쉴 틈 없이 도둑질과 거짓말을 일삼는 그에게 ‘모든 기독교인에게 해가 되는 존재 술탄’이란 뜻의 살라이라고 별명을 붙인 게 바로 그였으니까. 세상을 아울렀던 천재도 문제적 인간 하나를 어찌하지 못한 걸 보면 사랑이 무서운 건지 다빈치가 유약한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다빈치 소유 포도밭 소작인의 아들이었던 살라이는 곱슬머리를 한 금발 청년으로 절세미인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다. 호색한이었던 그는 도벽에 낭비벽까지 심해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다빈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라이를 끝내 내치지 않고 나중에 〈모나리자〉를 비롯해 자신의 유산인 포도밭까지 물려주었다. 살라이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 인생은 아이러니
 
세례 요한(Saint Jean Baptiste)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인물로 피렌체의 수호성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지막 걸작으로 그가 밀라노 스포르차 가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제2의 피렌체 시기(1503~1506)에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살라이는 다빈치의 마지막 걸작, 〈성 세례 요한(Saint Jean Baptiste)〉은 물론, 그의 노트 속 관능적 젊은이의 모델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2011년 1월, 이탈리아 국립문화재감정위원회가 〈모나리자〉의 코와 입이 살라이를 모델로 그려진 〈세례 요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공식 발표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의 한 미술연구가는 〈모나리자〉의 초벌 그림들을 조사한 결과 원래는 어깨가 훨씬 넓고 가슴이 없어 남성을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며, 이는 살라이의 신체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 속 모델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가 있다.
 
  그의 노트 속, 젊은이(살라이가 모델인 듯한)와 등을 맞댄 늙은이(레오나르도의 분신)를 그린 우의화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로 형상화된다. 한쪽 없이는 반대쪽이 절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관찰과 아이디어를 기록한 노트는 무려 11만3000장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1만3000장이 그의 메모로 확인되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코덱스 레스터’는 주로 지질학과 물에 관한 연구를 다룬 7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 노트다. ‘코덱스 레스터’라는 이름은 1717년 이 노트를 구입한 레스터 백작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 1980년에 기업가 아먼드 해머에게 판매되어 ‘코덱스 해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1994년 빌 게이츠가 3000만 달러에 이 노트를 구입하면서 다시 코덱스 레스터로 명칭을 바꿨다.
  살라이는 그에게 있어 쾌락이자 고통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초인간적 정신의 천재라기보다는 늘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했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영웅으로 다빈치를 꼽았고, 빌 게이츠 역시 그의 72쪽짜리 작업 노트 〈코덱스 레스터〉를 경매에서 350억원에 사들일 정도로 광팬이 된 것이 아닐까.
 
  앞에서 언급한 다빈치의 수많은 직업 중에 빠진 게 하나 있다. 바로 그가 예언가였다는 사실. 다빈치는 인류 멸망에 관한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곤 했는데 인류가 4006년 3월 21일에 시작된 대홍수로 11월 1일에 종말을 고한다며 “극이동으로 아프리카의 하늘이 유럽에, 유럽의 하늘이 아프리카에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4006년이라니! 3900년대를 살게 될 미래 인류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언제 멸망하든 지구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니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다빈치에 대한 인류의 기억과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필자의 공저(共著) 《발칙한 예술가들-스캔들로 보는 예술사》에서 발췌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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