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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3·1운동, 메이지유신, 러시아 2월 혁명, 천안함 폭침…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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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0월 일본 외교관 요시다의 문서에 있는 태극기.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가 태극기를 제정했을 당시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종로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
  1919년 3월 1일. 종로 YMCA에 있던 윤치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1시 30분쯤 거리 쪽에서 군중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내용이 매우 부실해 보였다”고도 했다. 젊은 시절 급진개화파의 일원이던 이 ‘냉철한’ 현실주의자는 결국 ‘친일파’의 오명(汚名)을 쓰고 세상을 떠났다.
 
  1932년 3월 1일에는 만주국이 세워졌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집정(執政)으로 취임했다.
 
러시아 볼셰비키정부는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독일과 강화했다. 가운데가 레프 트로츠키.
  1918년 3월 3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발을 뺐다. ‘밀봉열차’와 막대한 공작금을 제공해 가면서 레닌의 귀국을 후원했던 독일의 투자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1868년 3월 8일 메이지(明治) 천황은 ‘5개조 서문(誓文)’을 발표했다. 메이지유신의 시작이었다.
 
  1973년 3월 3일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재출범했다. ‘국영(國營)’에서 ‘공영(公營)’으로 체제가 바뀌었지만, 정권의 방송 장악 시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770년 3월 5일 발생한 보스턴학살 사건은 미국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서 대금 지급 문제를 놓고 가발제조공과 영국군 장교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이 사소한 시비는 인지세·설탕세 등 영국의 조세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시민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5명의 노동자와 선원들이 영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새뮤얼 애덤스 등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보스턴 학살’이라고 부르며 선동했다. 미국 독립운동이 여기서 시작됐다.
 
  1946년 3월 5일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는 미국 미주리주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연설했다. “발트 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鐵)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습니다” 냉전(冷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83년 3월 6일 태극기가 조선의 정식 국기가 됐다. 이후 135년 동안 태극기는 민족과 영욕(榮辱)을 같이했다. 인공기도, 한반도기도, 태극기가 가진 역사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1936년 3월 7일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비무장지대로 규정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進駐)시켰다. 아직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독일군 수뇌부는 프랑스가 반격해 올 경우 ‘36계 줄행랑’을 칠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침묵했다. 히틀러는 자신감을 얻었다.
 
  1917년 3월 8일 전쟁에 지친 러시아 민중들은 ‘빵과 평화’를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켰다. 군대도 민중들의 편에 섰다. 니콜라이 2세는 퇴위했고, 305년을 이어 온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러시아력(曆)으로 2월 23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흔히 ‘2월혁명’이라고 말한다.
 
  1776년 3월 9일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國富論)》 초판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계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거지 이외에는 아무도 전적으로 동포들의 자비심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1945년 3월 9일 B-29폭격기 334대가 도쿄를 공습했다. 약 10만명이 사망했다.
 
  1995년 3월 9일 한국·미국·일본이 미·북(美北) 간 제네바합의에 따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설립했다. KEDO가 제공하는 경수로와 중유(重油)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했다. 신문과 방송의 부실한 보도에 기초한 국회의 부실한 탄핵소추를 바탕으로 한 부실한 탄핵심판이었다.
 
  1985년 3월 11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됐다. 그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신사고)를 내걸고 공산주의 체제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소련의 붕괴를 막지는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당시 사진기자 지바 도야씨는 쓰나미에 휩쓸렸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사진=뉴시스
  2011년 3월 11일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동쪽 해상에서 진도(震度) 9.0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로 인한 쓰나미(津波)로 1만5894명이 죽고 2562명이 실종됐다. 22만8863명이 이재민이 됐다. 질서를 지키며 차분하게 비극을 감내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세계가 감동했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을 달래기 위한 20여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핵무장에 성공했다.
 
2004년 3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됐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쿠데타’ ‘정권찬탈음모’라며 반발했다.
  2004년 3월 11일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방송과 좌파성향 시민단체들은 ‘의회쿠데타’라고 선동했다.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 위반을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가 경미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기각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당했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경남 마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3인조 투표, 5인조 투표, 사전 투표 등 온갖 부정을 자행했다.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은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68년 3월 16일 베트콩 토벌작전 중이던 미(美) 육군 제23보병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 병사들이 미라이 마을에서 민간인 347명을 학살했다.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 등이 이 만행을 폭로했다. 반전(反戰)운동이 격화됐다.
 
  1861년 3월 17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됐다. 통일의 주역 중 하나인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이탈리아 국왕이 됐다.
 
  1978년 3월 18일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가 극좌(極左)도시게릴라인 붉은여단에 납치되어 살해됐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문부식·김현장 등 사건 주모자들은 미국이 광주사태 진압을 방조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데 항의한다면서 이 사건을 저질렀다. 문화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대학생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602년 3월 20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의 출현이었다.
 
  1995년 3월 20일에는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를 추종하는 일본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했다. 13명이 죽고 6000여 명이 다쳤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자유작전’을 개시했다. 그해 4월 9일 사담 후세인은 축출되고 다국적군이 승리했다. 이후 이라크는 종파간 내전과 테러라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국은 2011년에야 이라크에서 철군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행각을 일삼던 대한제국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스티븐스는 이틀 후 사망했다.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의 안중근 의사.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殉國)했다.
 
2010년 3월 26일 북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폭침당했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인근 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 해군 장병 46명이 전사·실종됐다. 한국·미국·영국·호주·스웨덴 5개국 전문가 24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그해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폭침(爆沈)했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1894년 3월 28일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1939년 3월 28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전선군이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면서 스페인 내전이 막을 내렸다. 2년 6개월간의 내전에서 100만명이 죽었다.
 
1993년 3월 28일 발생한 부산 구포열차사고로 78명이 사망했다.
  1993년 3월 28일 부산 구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됐다.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부상당했다. 시공사인 삼성종합건설이 철도법 규정을 무시하고 열차 운행선의 노반 밑을 관통하는 지하 전력구를 설치하기 위한 발파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지반이 약화된 것이 사고원인이었다.
 
  1981년 3월 30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존 힝클리에게 피격당했다. 힝클리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힝클리는 2016년 9월 석방됐다.
 
1992년 3월 31일 USS 미주리호가 퇴역했다. 6·25 당시 북한 해안을 포격하는 미주리호.
  1992년 3월 31일 미국 해군전함 USS미주리호가 퇴역했다. 1944년 1월 진수식(進水式)을 가진 지 48년 만이었다. 미주리호는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군함으로 유명하다. 6·25때도 맹활약했으며 1955년 퇴역했다가 미사일 등 최신장비로 개장(改裝)해서 1986년 재취역, 1991년 1월 제1차 걸프전쟁에도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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