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점 커지고 있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 영향력 반영”(AP)
⊙ 일본 문화, 1950년대 이후 영화(구로사와 아키라) → 음악(사카모토 큐) → 음식(스시) 순으로 확산되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정점 찍어
⊙ 한국도 영화(〈올드 보이〉 등) → K‐팝(BTS, 블랙핑크) → 음식(김치, 김밥, 삼겹살 등) 거쳐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 이미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일본 문화, 1950년대 이후 영화(구로사와 아키라) → 음악(사카모토 큐) → 음식(스시) 순으로 확산되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정점 찍어
⊙ 한국도 영화(〈올드 보이〉 등) → K‐팝(BTS, 블랙핑크) → 음식(김치, 김밥, 삼겹살 등) 거쳐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 이미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사진=조선DB
10월 10일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작가 한강을 선정해 발표했다. 한림원은 선정 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詩的) 산문”을 쓰는 작가라는 점을 들었다.
직후부터 미디어의 어마어마한 관련 기사 러시와 함께 출판계 전망부터 학교 교육의 문제, 심지어 정치적 쟁점 사안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 모든 분야가 사실상 재점검(再點檢)되는 수순을 밟았다. 예컨대 한강이 박근혜 정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었다는 점을 재차 띄워 올린다든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경기도교육청의 청소년 유해도서 폐기 대상 목록에 포함된 점을 지적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아가 한강의 수상에 비판적인 반응까지도 큰 화제가 되며 도마에 올랐다. 먼저 10월 10일 작가 김규나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의미를 “노벨 가치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면서 “한림원이 저런 식의 심사평을 내놓고 찬사를 했다는 건, 한국의 역사를 뭣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저 출판사 로비에 놀아났다는 의미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10월 14일 대한민국애국단체협의회, 국가비상대책국민위원회 등 일부 보수단체 회원 10여 명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대한민국 역사 왜곡 작가 노벨상, 대한민국 적화 부역 스웨덴 한림원 규탄한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한림원 규탄 집회를 연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위 두 건에 대해 국내 언론미디어는 수많은 관련 비판 기사들을 쏟아냈고, 또 그만큼 온라인 커뮤니티상에서 빗발치는 대중의 비난을 맞기도 했다. 이들의 인지도 및 대표성, 집회 규모 등의 차원에서 과연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이 맞나 싶지만 말이다. 이에 어느 누구도 한강과 그의 수상에 대해 토를 달아서도 안 되고 오직 축하와 찬사만을 보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이 뒤에 펼쳐진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 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한강 패러디해도 비판받아
“유명인을 패러디하는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 외모를 따라 했다가 논란이 되고 있다.… 19일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 시즌6〉은 한강 작가를 패러디한 영상을 공개했다. 배우 김아영은 한강 작가의 특징을 잡아 눈을 거의 감고 팔짱을 낀 채 조곤조곤한 말투로 ‘수상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는 처음엔 놀랐고 전화를 끊고 나서는 현실감과 감동이 느껴졌어요’라며 수상 소감을 따라 했다. 〈SNL〉 측은 이 영상에서 방청객들의 웃음소리를 강조했다. 패러디를 고려하더라도 외모의 특성을 강조했다는 점은 한강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이 됐다.”(《중앙일보》 2024년 10월 20일 자 기사 〈눈 거의 감고 ‘한강 패러디’… “외모 조롱” 비판 쏟아진 SNL〉)
엄밀히 외모를 거론한 것도 아니라 과거 인터뷰 영상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얘기하는 한강의 표정을 따라 했다는 점만으로도 ‘예의가 아니’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 이 정도의 가히 파시즘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으니 일개 작가의 소셜미디어 포스팅과 불과 10여 명 정도 모인 뒤 금세 해산해 이틀 뒤에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진 소규모 집회조차 어마어마한 이슈가 됐던 것이다. 특히 언론미디어가 앞장서 〈한강 노벨상 쾌거에 ‘불만’ “대한민국 국민 맞나” 봤더니〉 (JTBC 2024년 10월 14일 자), 〈‘국가적 경사’ 재 뿌리며 ‘망언’ 이들이 ‘반국가 세력’?〉(MBC 2024년 10월 15일 자) 등 가히 ‘비국민(非國民)’ 개념까지 떠오를 정도의 몰이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이런 분위기가 수상 후 한 달여 걸쳐 지속되는 바람에 한강의 수상 배경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나 큰 캔버스의 문화계 흐름 점검, 현시점 노벨문학상의 의미에 대한 담론 등은 상당 부분 ‘건너뛰어 버린’ 인상도 강하다. 정작 해야 할 얘기는 못 한 채 계속 보류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만큼 상황을 한 번쯤 담담하게 진단해 볼 필요도 생긴다.
한강,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수상
먼저 한강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자체가 아예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갑자기 턱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격 전장(戰場)들, 즉 다른 저명한 국제문학상 수상을 통해 노벨문학상 후보군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강은 2016년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맨부커상(현 부커상) 국제상을 수상하던 시점부터 소위 ‘노벨문학상 코스’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10여 년째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들어가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6년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하던 시점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서 진지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다만 한강에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는 건 수상 ‘시기’의 문제다. ‘노벨문학상 코스’에 들어간 작가인 건 맞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리 수상했다는 것이다. 그를 미래 수상감으로 점치던 이들조차 후보로서 진지하게 거론되는 건 10년쯤 뒤라 예상했을 정도다. 한강의 수상이 발표되던 시점에 그의 나이는 불과 53세였기 때문이다. 총 121명에 이르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5번째로 젊은 나이다.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어느 한 작품이 아니라 그 문학 인생 전체를 놓고 가치와 영향을 평가해 주어지는 것이기에 작가가 노년에 이르렀을 즈음 수상하게 되는 것이 상례다. 일종의 공로상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60~70대에 수상하며, 근래 들어선 70~80대 수상이 잦다. 지난 5년 동안만 해도 수상 시점 작가 연령은 2019년 페터 한트케 75세, 2020년 루이즈 글릭 77세, 2021년 압둘라자크 구르나 72세, 2022년 아니 에르노 82세, 2023년 욘 포세 64세 등이었다.
‘베팅’ 유력 후보 20인 안에 포함 안 돼
한편, 단순 연령 차원을 넘어서면 오히려 더 해석이 복잡해진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상하는 경우더라도 영어를 포함한 유럽 지역 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자신의 출세작부터 바로 지체 없이 서구권 각지로 번역돼 퍼져나가기에 50대에 수상한다 해도 그 출세작부터 대표작 등은 서구 문단(文壇)에서 20년 이상 차근히 연구되며 평가가 긴 시간 쌓아 올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강의 경우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강을 세계무대로 끌어올린 《채식주의자》는 2007년 국내 출간된 소설이지만, 2016년에야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가 있다. 서구권 번역의 시발점이 되는 영어 번역 출간이 2015년에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부터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때다.
또 있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스웨덴 한림원 측에서 제시한 내용, 즉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은 여러 측면에서 그의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에 해당되는 설명으로 여겨진다. 《소년이 온다》의 영어 번역 출간은 《채식주의자》보다도 늦은 2016년 이뤄졌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림원 측은 출세작과 대표작이 세계무대에 소개된 지 불과 8~9년 된 작가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얘기가 된다. 유사한 과거 사례를 아예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 등이 지적했듯 해외 언론에서도 한강의 수상은 예상치 못했던 이변으로 여겨진 것이다. 영국의 유명 온라인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Nicer Odds)’가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들에 대한 배당률을 집계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해당 사이트에선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제럴드 머네인이 4.5배의 배당률을 보이며 수상 가능성 1위로 점쳐졌고, 바로 뒤를 중국의 소설가 찬쉐가 배당률 5배를 기록하며 따랐다. 이어 국내에서도 친숙한 살만 루슈디, 토머스 핀천,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럴 오츠, 심지어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도 유력 후보 20명 안에 이름을 올렸다.
한강은 이 20명의 유력 후보 중에도 없던 이름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강이 작가로서 그만한 역량과 자격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노벨상을 받기에는 많이 젊은 나이인 데다 국제 문학상 수상 등을 통해 세계무대에 알려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수상 후보로서 거론되기에 이르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한강은 어떻게 노벨문학상 ‘깜짝’ 수상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PC 무드의 영향?
일단 노벨문학상은 2012년 중국의 작가 모옌의 수상 이후 2016~2017년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를 가히 기계적으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PC(Political Correctness) 무드의 영향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사실 그동안 노벨문학상은 여성 작가에게 유난히 박한 태도를 보여왔다. 2012년 이전까지 노벨문학상은 총 108명에게 주어졌는데, 이 중 여성 작가는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수상자 또한 노르웨이의 남성 희곡작가 욘 포세였다. 2024년에는 여성 작가가 수상하리라는 예상이 이미 지난해 포세의 수상 직후부터 나왔던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PC 무드의 영향이 한 번 더 개입한다. 이전부터도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지만 특히 2010년대부터 ‘노벨문학상은 백인 작가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 한림원 측에서도 민감히 반응해 온 터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계 작가가 유난히 외면당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한강의 수상 이전까지 아시아계 작가의 수상은 120명 중 6명이라는 극단적인 수치를 보였고, 수상 당시 국적으로 따지면 거기서도 또 중국계 가오싱젠(프랑스 국적)과 일본계 가즈오 이시구로(영국 국적)가 빠져 4명이 된다.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모옌 등만 남는다. 그리고 이들 4명은, 아니 국적이 바뀐 이들까지 포함한 6명 전원이 남성 작가였다. 아시아계 여성 작가에게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여론은 이렇게 이미 수년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예상 리스트에서든 올해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 3위권 내에 중국의 여성 작가 찬쉐가 빠지지 않고 올랐던 것이다. 일본 작가 역시, 위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에서도 볼 수 있듯, 여성 작가 다와다 요코가 배당률 12배로 오랜 기간 후보를 맴돌았던 남성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5배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강의 수상을 가능케 할 시대 공기(空氣) 역시 착실히 조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테이프 끊어
그런데 왜 그중에서도 유력 후보 20명 명단에조차 없던 한강이었을까. 여기서부턴 미국의 뉴스통신사 AP의 2024년 10월 10일(현지시각)자 기사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를 짚어봐야 한다. 이 기사는 한강의 수상에 대해 “점점 커지고 있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 영향력을 보여준다”며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작 〈기생충〉,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를 포함한 K-팝 그룹의 세계적 인기 등 K-컬처의 세계적 영향력이 커지는 시기에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왜 노벨문학상과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문화 분야들을 일일이 거론하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실제로 특정 국가의 다양한 문화 분야 성취들은 이처럼 연결돼 있는 구조가 많다.
더군다나 아시아 국가 문화의 동시다발적 서구 도달 및 성취와 관련해선 이미 선례(先例)가 존재한다. 1950~60년대 일본 문화의 서구권 진출 사례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흐름과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
일본 문화가 처음 서구권에서 큰 성과를 거둬 인상을 남기게 된 계기는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 황금사자상 수상이다. 이후 일본 영화는 승승장구해 1954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요짐보〉 〈7인의 사무라이〉 등 사무라이 영화들이 미국과 유럽 영화 시장에 대대적으로 배급되기에 이른다. 이들이 서구로 수출돼 어찌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7인의 사무라이〉는 1960년 할리우드에서 〈황야의 7인〉이라는 제목의 서부영화로 리메이크돼 대성공을 거뒀고 〈라쇼몽〉도 1964년 〈폭행〉이라는 제목의 폴 뉴먼 주연 영화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사카모토 큐, 스시,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부턴 가속이 붙었다. 한 번 일본 문화가 성공적으로 서구에 도달하자 1963년에는 일본 가수 사카모토 큐의 일본어 노래 ‘위를 보며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가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이 기록은 2020년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1위를 차지하기 전까지 무려 57년 동안 아시아 아티스트의 유일한 ‘핫 100’ 차트 1위 자리를 지켰다. 이어 1965년에는 아베 고보 원작을 영화화한 〈모래의 여자〉 감독 데시가하라 히로시가 아시아 감독 사상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로 지명되는 쾌거를 거둔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일본 음식마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서 큰 인기를 얻어 일식당 점포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영국 《테일러앤프랜시스저널》의 2018년 1월 24일 자 기사 〈미국에서의 스시, 1945~1970〉을 보면 “(일본 음식의 대표 격인) 스시가 미국에서 처음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라 명시하며 그 확산 과정을 수많은 당시 신문기사 등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가 금세 유럽까지 번져나간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모든 문화 분야에 걸쳐 일본 콘텐츠는 1950년대부터, 특히 1960년대를 정점으로 서구 사회에 급속히 확산됐다. 그러다 결국 다다른 곳이 노벨문학상이다. 1968년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대표작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건이다. 어찌 보면 다른 모든 문화 분야에서 이미 일본 콘텐츠가 뻗어나갈 만큼 뻗어나갔으니 그 전반적 약진(躍進)과 성취를 치하하듯 노벨문학상이 인증(認證) 도장을 찍어주는 모양새였다고도 볼 만하다.
〈올드보이〉에서 한강까지
언급했듯 한국 문화의 지난 10여 년간 서구 진출 경로도 이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그 성취의 규모가 훨씬 크다는 점만 다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의 영화가 미국과 유럽으로 넘어가 마니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곧 K-팝과 한국 TV드라마가 뒤따랐다. 2012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첫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최고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K-팝 팀들이 하나둘 미국과 유럽으로 진출해 엄청난 규모의 팬덤을 만들어냈고, 2019년 〈기생충〉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 석권으로 이어졌다. 곧바로 글로벌 OTT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성공 신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 음식 열풍이 서구 전반에 걸쳐 함께 일기 시작했다. 김치, 삼겹살, 김밥, 떡볶이, 치맥 등 한국 음식들이 서구 사회로 파고들어 젊은 층 식문화 트렌드를 형성했다. 이 모든 흐름을 차례로 거친 뒤 드디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듯 지난 10여 년간의 한국 문화 행보가 1950~60년대 당시 일본 문화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동(東)과 서(西)라는 큰 분류로서 서구 문화의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아시아 문화가 서구로 뻗어나가는 과정은 이런 식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 분야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점화(點火)되는 형태란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붐’을 형성하는 것, 어찌 보면 하나의 ‘세계관’을 성립시켜 그를 브랜드화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이 같은 큰 줄기 아래서 각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 공기 요소들을 감안해 상황을 바라보면 한강이 어째서 때 이른 202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는지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노벨상은 결국 ‘유럽상’
끝으로, 노벨문학상의 본질과 한계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어떤 의미에선 그 어마어마한 보도 러시 과정에서도 가장 소홀히 다뤄진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은 결국 유럽에서 개최되는 ‘유럽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본질이자 한계다. 앞선 여성 작가에 대한 오랜 홀대 문제 외에 121명의 역대 수상자 중 86명이 유럽 국가 국적(복수 국적 포함)이라는 점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세계문학의 진수(眞髓)는 정말로 유럽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비율이다.
이 같은 상황은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영화제로 알려진 칸국제영화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30편의 영화 중 유럽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무려 21편이다. 절묘하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국적이 보여준 3분의 2라는 비율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그 30편 중 아시아 영화는 불과 5편뿐이다.
이런 사실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유럽 영화는 예술 본위적(本位的) 차원에서라도 다분히 침체기 내지 정체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2000년대 들어 사반세기 동안 세계 영화계 흐름은 어느 관련 미디어에서든 남미 영화와 아시아 영화의 대약진(大躍進)이라 설명한다. 비평적 차원에서든 상업적 차원에서든 모두 그렇다. 결국 칸국제영화제도 별 수 없는 ‘유럽상’이긴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철저히 유럽의 관점과 유럽의 이익 중심으로 유럽 문화의 헤게모니를 방어하려는 목적이 큰 문화 행사다.
‘아파트’와 《82년생 김지영》
이런 탓에 더 이상 ‘유럽상’의 선택을 기다리지만 말고 문화 시장에 있어 활력이 살아 있는 아시아에서나마 각종 문화상을 직접 만들어내 아시아 중심 문화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꽤 오래전부터 대두되고 있지만, 그 실현은 아직까지도 요원(遙遠)하다는 게 문제다. 그 중심이 돼야 할 한중일(韓中日) 3국 간 민족 감정의 골이 깊고, 문화적 주도권을 놓고 서로 간 신경전도 극심해 웬만해선 협력과 단합이 쉽지 않기 때문도 크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은 문화계에서 이런 시상식 등의 행사를 열어야 할 필요가 휘발(揮發)되고 있는 시점일 수도 있다. 예컨대 한국은 미국 최고 권위 음악상인 그래미상에서, 적어도 대중문화 부문에 한해선 단 한 번도 상을 수상해 본 적 없고, 6개 본상 부문에 후보로도 지명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K-팝은 점점 더 글로벌 팬덤을 키워나가며 점점 더 많은 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장 지금도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미국의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노래 ‘아파트(APT.)’가 발매 즉시 빌보드 ‘핫 100’ 차트 8위에 오르며 장기 히트를 예고하고 있다. 아니 미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아파트’ 열풍 상황이다. ‘제2의 강남스타일’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문학계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도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물론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손원평의 《아몬드》, 정유정의 《종의 기원》 등은 이미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특히 《82년생 김지영》은 일본에서만 20만 부가 넘게 팔리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2020년 꼭 읽어야 할 책 100선’에도 선정되는 등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상의 권위를 통해 대중에 특정 문화 콘텐츠를 톱-다운(top-down) 식으로 내리꽂아 트렌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뉴미디어 폭발로 인해 지금은 대중이 먼저 열린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자유롭게 소비한 뒤 거기서 생성된 대중의 의사가 바텀-업(bottom-up) 식으로 각종 문화상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라 볼 만하다. 특히나 한국 문화 콘텐츠는 대부분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글로벌 콘텐츠화에 성공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진입장벽이 무너진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세계 대중의 지지를 받고 지금의 위상까지 올라갔다.
한국 문화계 스스로 전환점 만들어내
물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러모로 반갑고 뜻깊은 일인 게 맞다. 적어도 서구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지우기 힘들었던 기성세대들에게 뿌듯함을 안겨준 자긍심(自矜心) 이벤트로서 톡톡히 역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1980년대의 올림픽 금메달과도 같은 역할 말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한국 문화계가 전환점을 맞았다는 식의 전망은 무리다. 한국 문화계가 이미 스스로 전환점을 만들어내 미래를 열어나갔기에 노벨문학상 수상과 같은 이변도 따라올 수 있었다고 순서를 바꿔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을 통해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노벨문학상 수상도 이뤄질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 이번 수상과 관련해 벌어진, 심지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갈등과 혼란의 지점들도 개개인에 사뭇 다르게 다가와 다른 시각과 판단을 부를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
직후부터 미디어의 어마어마한 관련 기사 러시와 함께 출판계 전망부터 학교 교육의 문제, 심지어 정치적 쟁점 사안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 모든 분야가 사실상 재점검(再點檢)되는 수순을 밟았다. 예컨대 한강이 박근혜 정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었다는 점을 재차 띄워 올린다든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경기도교육청의 청소년 유해도서 폐기 대상 목록에 포함된 점을 지적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아가 한강의 수상에 비판적인 반응까지도 큰 화제가 되며 도마에 올랐다. 먼저 10월 10일 작가 김규나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의미를 “노벨 가치의 추락, 문학 위선의 증명, 역사 왜곡의 정당화”라면서 “한림원이 저런 식의 심사평을 내놓고 찬사를 했다는 건, 한국의 역사를 뭣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저 출판사 로비에 놀아났다는 의미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10월 14일 대한민국애국단체협의회, 국가비상대책국민위원회 등 일부 보수단체 회원 10여 명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대한민국 역사 왜곡 작가 노벨상, 대한민국 적화 부역 스웨덴 한림원 규탄한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한림원 규탄 집회를 연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위 두 건에 대해 국내 언론미디어는 수많은 관련 비판 기사들을 쏟아냈고, 또 그만큼 온라인 커뮤니티상에서 빗발치는 대중의 비난을 맞기도 했다. 이들의 인지도 및 대표성, 집회 규모 등의 차원에서 과연 이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이 맞나 싶지만 말이다. 이에 어느 누구도 한강과 그의 수상에 대해 토를 달아서도 안 되고 오직 축하와 찬사만을 보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소용없었다. 사실 이 뒤에 펼쳐진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 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한강 패러디해도 비판받아
“유명인을 패러디하는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 외모를 따라 했다가 논란이 되고 있다.… 19일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 시즌6〉은 한강 작가를 패러디한 영상을 공개했다. 배우 김아영은 한강 작가의 특징을 잡아 눈을 거의 감고 팔짱을 낀 채 조곤조곤한 말투로 ‘수상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는 처음엔 놀랐고 전화를 끊고 나서는 현실감과 감동이 느껴졌어요’라며 수상 소감을 따라 했다. 〈SNL〉 측은 이 영상에서 방청객들의 웃음소리를 강조했다. 패러디를 고려하더라도 외모의 특성을 강조했다는 점은 한강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이 됐다.”(《중앙일보》 2024년 10월 20일 자 기사 〈눈 거의 감고 ‘한강 패러디’… “외모 조롱” 비판 쏟아진 SNL〉)
엄밀히 외모를 거론한 것도 아니라 과거 인터뷰 영상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얘기하는 한강의 표정을 따라 했다는 점만으로도 ‘예의가 아니’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 이 정도의 가히 파시즘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으니 일개 작가의 소셜미디어 포스팅과 불과 10여 명 정도 모인 뒤 금세 해산해 이틀 뒤에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진 소규모 집회조차 어마어마한 이슈가 됐던 것이다. 특히 언론미디어가 앞장서 〈한강 노벨상 쾌거에 ‘불만’ “대한민국 국민 맞나” 봤더니〉 (JTBC 2024년 10월 14일 자), 〈‘국가적 경사’ 재 뿌리며 ‘망언’ 이들이 ‘반국가 세력’?〉(MBC 2024년 10월 15일 자) 등 가히 ‘비국민(非國民)’ 개념까지 떠오를 정도의 몰이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이런 분위기가 수상 후 한 달여 걸쳐 지속되는 바람에 한강의 수상 배경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나 큰 캔버스의 문화계 흐름 점검, 현시점 노벨문학상의 의미에 대한 담론 등은 상당 부분 ‘건너뛰어 버린’ 인상도 강하다. 정작 해야 할 얘기는 못 한 채 계속 보류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만큼 상황을 한 번쯤 담담하게 진단해 볼 필요도 생긴다.
한강,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수상
먼저 한강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자체가 아예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갑자기 턱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격 전장(戰場)들, 즉 다른 저명한 국제문학상 수상을 통해 노벨문학상 후보군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강은 2016년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맨부커상(현 부커상) 국제상을 수상하던 시점부터 소위 ‘노벨문학상 코스’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10여 년째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들어가는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6년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하던 시점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서 진지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다만 한강에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는 건 수상 ‘시기’의 문제다. ‘노벨문학상 코스’에 들어간 작가인 건 맞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리 수상했다는 것이다. 그를 미래 수상감으로 점치던 이들조차 후보로서 진지하게 거론되는 건 10년쯤 뒤라 예상했을 정도다. 한강의 수상이 발표되던 시점에 그의 나이는 불과 53세였기 때문이다. 총 121명에 이르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5번째로 젊은 나이다.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어느 한 작품이 아니라 그 문학 인생 전체를 놓고 가치와 영향을 평가해 주어지는 것이기에 작가가 노년에 이르렀을 즈음 수상하게 되는 것이 상례다. 일종의 공로상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60~70대에 수상하며, 근래 들어선 70~80대 수상이 잦다. 지난 5년 동안만 해도 수상 시점 작가 연령은 2019년 페터 한트케 75세, 2020년 루이즈 글릭 77세, 2021년 압둘라자크 구르나 72세, 2022년 아니 에르노 82세, 2023년 욘 포세 64세 등이었다.
‘베팅’ 유력 후보 20인 안에 포함 안 돼
한편, 단순 연령 차원을 넘어서면 오히려 더 해석이 복잡해진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수상하는 경우더라도 영어를 포함한 유럽 지역 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자신의 출세작부터 바로 지체 없이 서구권 각지로 번역돼 퍼져나가기에 50대에 수상한다 해도 그 출세작부터 대표작 등은 서구 문단(文壇)에서 20년 이상 차근히 연구되며 평가가 긴 시간 쌓아 올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강의 경우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강을 세계무대로 끌어올린 《채식주의자》는 2007년 국내 출간된 소설이지만, 2016년에야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가 있다. 서구권 번역의 시발점이 되는 영어 번역 출간이 2015년에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부터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때다.
또 있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스웨덴 한림원 측에서 제시한 내용, 즉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은 여러 측면에서 그의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에 해당되는 설명으로 여겨진다. 《소년이 온다》의 영어 번역 출간은 《채식주의자》보다도 늦은 2016년 이뤄졌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림원 측은 출세작과 대표작이 세계무대에 소개된 지 불과 8~9년 된 작가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얘기가 된다. 유사한 과거 사례를 아예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기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 등이 지적했듯 해외 언론에서도 한강의 수상은 예상치 못했던 이변으로 여겨진 것이다. 영국의 유명 온라인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Nicer Odds)’가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들에 대한 배당률을 집계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해당 사이트에선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 제럴드 머네인이 4.5배의 배당률을 보이며 수상 가능성 1위로 점쳐졌고, 바로 뒤를 중국의 소설가 찬쉐가 배당률 5배를 기록하며 따랐다. 이어 국내에서도 친숙한 살만 루슈디, 토머스 핀천,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럴 오츠, 심지어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도 유력 후보 20명 안에 이름을 올렸다.
한강은 이 20명의 유력 후보 중에도 없던 이름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강이 작가로서 그만한 역량과 자격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노벨상을 받기에는 많이 젊은 나이인 데다 국제 문학상 수상 등을 통해 세계무대에 알려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수상 후보로서 거론되기에 이르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한강은 어떻게 노벨문학상 ‘깜짝’ 수상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PC 무드의 영향?
일단 노벨문학상은 2012년 중국의 작가 모옌의 수상 이후 2016~2017년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를 가히 기계적으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PC(Political Correctness) 무드의 영향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사실 그동안 노벨문학상은 여성 작가에게 유난히 박한 태도를 보여왔다. 2012년 이전까지 노벨문학상은 총 108명에게 주어졌는데, 이 중 여성 작가는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수상자 또한 노르웨이의 남성 희곡작가 욘 포세였다. 2024년에는 여성 작가가 수상하리라는 예상이 이미 지난해 포세의 수상 직후부터 나왔던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PC 무드의 영향이 한 번 더 개입한다. 이전부터도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지만 특히 2010년대부터 ‘노벨문학상은 백인 작가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 한림원 측에서도 민감히 반응해 온 터다. 그중에서도 아시아계 작가가 유난히 외면당한다는 비판이 거셌다. 한강의 수상 이전까지 아시아계 작가의 수상은 120명 중 6명이라는 극단적인 수치를 보였고, 수상 당시 국적으로 따지면 거기서도 또 중국계 가오싱젠(프랑스 국적)과 일본계 가즈오 이시구로(영국 국적)가 빠져 4명이 된다.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모옌 등만 남는다. 그리고 이들 4명은, 아니 국적이 바뀐 이들까지 포함한 6명 전원이 남성 작가였다. 아시아계 여성 작가에게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여론은 이렇게 이미 수년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예상 리스트에서든 올해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 3위권 내에 중국의 여성 작가 찬쉐가 빠지지 않고 올랐던 것이다. 일본 작가 역시, 위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에서도 볼 수 있듯, 여성 작가 다와다 요코가 배당률 12배로 오랜 기간 후보를 맴돌았던 남성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5배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강의 수상을 가능케 할 시대 공기(空氣) 역시 착실히 조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테이프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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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1)은 일본 문화의 세계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더군다나 아시아 국가 문화의 동시다발적 서구 도달 및 성취와 관련해선 이미 선례(先例)가 존재한다. 1950~60년대 일본 문화의 서구권 진출 사례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흐름과 놀라우리만치 일치한다.
일본 문화가 처음 서구권에서 큰 성과를 거둬 인상을 남기게 된 계기는 1951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 최고상 황금사자상 수상이다. 이후 일본 영화는 승승장구해 1954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요짐보〉 〈7인의 사무라이〉 등 사무라이 영화들이 미국과 유럽 영화 시장에 대대적으로 배급되기에 이른다. 이들이 서구로 수출돼 어찌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7인의 사무라이〉는 1960년 할리우드에서 〈황야의 7인〉이라는 제목의 서부영화로 리메이크돼 대성공을 거뒀고 〈라쇼몽〉도 1964년 〈폭행〉이라는 제목의 폴 뉴먼 주연 영화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사카모토 큐, 스시, 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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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을 쓴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
심지어 이 시기에는 일본 음식마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에서 큰 인기를 얻어 일식당 점포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영국 《테일러앤프랜시스저널》의 2018년 1월 24일 자 기사 〈미국에서의 스시, 1945~1970〉을 보면 “(일본 음식의 대표 격인) 스시가 미국에서 처음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라 명시하며 그 확산 과정을 수많은 당시 신문기사 등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가 금세 유럽까지 번져나간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모든 문화 분야에 걸쳐 일본 콘텐츠는 1950년대부터, 특히 1960년대를 정점으로 서구 사회에 급속히 확산됐다. 그러다 결국 다다른 곳이 노벨문학상이다. 1968년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대표작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건이다. 어찌 보면 다른 모든 문화 분야에서 이미 일본 콘텐츠가 뻗어나갈 만큼 뻗어나갔으니 그 전반적 약진(躍進)과 성취를 치하하듯 노벨문학상이 인증(認證) 도장을 찍어주는 모양새였다고도 볼 만하다.
〈올드보이〉에서 한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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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황동혁 감독(오른쪽)과 배우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으로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 음식 열풍이 서구 전반에 걸쳐 함께 일기 시작했다. 김치, 삼겹살, 김밥, 떡볶이, 치맥 등 한국 음식들이 서구 사회로 파고들어 젊은 층 식문화 트렌드를 형성했다. 이 모든 흐름을 차례로 거친 뒤 드디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듯 지난 10여 년간의 한국 문화 행보가 1950~60년대 당시 일본 문화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동(東)과 서(西)라는 큰 분류로서 서구 문화의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아시아 문화가 서구로 뻗어나가는 과정은 이런 식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 분야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점화(點火)되는 형태란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붐’을 형성하는 것, 어찌 보면 하나의 ‘세계관’을 성립시켜 그를 브랜드화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이 같은 큰 줄기 아래서 각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 공기 요소들을 감안해 상황을 바라보면 한강이 어째서 때 이른 202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는지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노벨상은 결국 ‘유럽상’
끝으로, 노벨문학상의 본질과 한계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어떤 의미에선 그 어마어마한 보도 러시 과정에서도 가장 소홀히 다뤄진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은 결국 유럽에서 개최되는 ‘유럽상’이라는 것이다. 이게 본질이자 한계다. 앞선 여성 작가에 대한 오랜 홀대 문제 외에 121명의 역대 수상자 중 86명이 유럽 국가 국적(복수 국적 포함)이라는 점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세계문학의 진수(眞髓)는 정말로 유럽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비율이다.
이 같은 상황은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영화제로 알려진 칸국제영화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30편의 영화 중 유럽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무려 21편이다. 절묘하게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국적이 보여준 3분의 2라는 비율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그 30편 중 아시아 영화는 불과 5편뿐이다.
이런 사실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유럽 영화는 예술 본위적(本位的) 차원에서라도 다분히 침체기 내지 정체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2000년대 들어 사반세기 동안 세계 영화계 흐름은 어느 관련 미디어에서든 남미 영화와 아시아 영화의 대약진(大躍進)이라 설명한다. 비평적 차원에서든 상업적 차원에서든 모두 그렇다. 결국 칸국제영화제도 별 수 없는 ‘유럽상’이긴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철저히 유럽의 관점과 유럽의 이익 중심으로 유럽 문화의 헤게모니를 방어하려는 목적이 큰 문화 행사다.
‘아파트’와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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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오른쪽)와 듀엣곡 ‘APT.’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 로제. 사진=인스타그램 |
그런데 어쩌면 지금은 문화계에서 이런 시상식 등의 행사를 열어야 할 필요가 휘발(揮發)되고 있는 시점일 수도 있다. 예컨대 한국은 미국 최고 권위 음악상인 그래미상에서, 적어도 대중문화 부문에 한해선 단 한 번도 상을 수상해 본 적 없고, 6개 본상 부문에 후보로도 지명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K-팝은 점점 더 글로벌 팬덤을 키워나가며 점점 더 많은 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장 지금도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미국의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노래 ‘아파트(APT.)’가 발매 즉시 빌보드 ‘핫 100’ 차트 8위에 오르며 장기 히트를 예고하고 있다. 아니 미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아파트’ 열풍 상황이다. ‘제2의 강남스타일’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문학계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도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물론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손원평의 《아몬드》, 정유정의 《종의 기원》 등은 이미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특히 《82년생 김지영》은 일본에서만 20만 부가 넘게 팔리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2020년 꼭 읽어야 할 책 100선’에도 선정되는 등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상의 권위를 통해 대중에 특정 문화 콘텐츠를 톱-다운(top-down) 식으로 내리꽂아 트렌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뉴미디어 폭발로 인해 지금은 대중이 먼저 열린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자유롭게 소비한 뒤 거기서 생성된 대중의 의사가 바텀-업(bottom-up) 식으로 각종 문화상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라 볼 만하다. 특히나 한국 문화 콘텐츠는 대부분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글로벌 콘텐츠화에 성공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진입장벽이 무너진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세계 대중의 지지를 받고 지금의 위상까지 올라갔다.
한국 문화계 스스로 전환점 만들어내
물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러모로 반갑고 뜻깊은 일인 게 맞다. 적어도 서구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지우기 힘들었던 기성세대들에게 뿌듯함을 안겨준 자긍심(自矜心) 이벤트로서 톡톡히 역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1980년대의 올림픽 금메달과도 같은 역할 말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한국 문화계가 전환점을 맞았다는 식의 전망은 무리다. 한국 문화계가 이미 스스로 전환점을 만들어내 미래를 열어나갔기에 노벨문학상 수상과 같은 이변도 따라올 수 있었다고 순서를 바꿔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을 통해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노벨문학상 수상도 이뤄질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 이번 수상과 관련해 벌어진, 심지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갈등과 혼란의 지점들도 개개인에 사뭇 다르게 다가와 다른 시각과 판단을 부를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