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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16 | 이원익(李元翼)전

3명의 군주를 바른 도리로 모신 명재상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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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목사 시절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는 평가 받아
⊙ 임진왜란 중 평안도와 영남에서 군병 관리, 군량 보급, 산성 수축 등에 업적
⊙ 선조에게 “많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며 이순신 옹호
⊙ 광해군 시절 영의정으로 廢母에 반대하다 귀양… 인조반정 후 복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원익
  “강정(剛正), 청고(淸苦)했다.”
 
  서인(西人)이 집필을 주도한 《인조실록》에서 남인(南人) 계통의 정승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이 졸(卒)했을 때 그의 사람됨과 생활 모습을 표현한 문장이다. 굳세고 바른 성품에 지나칠 정도로 깨끗함을 지켰다는 말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이다.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상들 직함인데, 군(君), 수(守), 정(正)은 모두 왕실 사람들에게 내리는 작호(爵號)다. 그리고 정(正)을 끝으로 친진(親盡)이 된다. 친진이란 왕실과의 친척 관계가 다 끝났다는 뜻이다. 마침내 일반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난 이원익은 23세 때인 1569년(선조 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은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훗날 같은 남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이원익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은 청년이었다. 그의 비명(碑銘)은 청년 이원익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젊었을 때에 기품이 자못 호방하였다. 집이 낙산(駱山) 아래에 있었는데 번번이 거문고를 가지고 산에 올라 스스로 타고 노래하였으며 옛사람의 악부(樂府)까지도 소리를 길게 끌며 소리 높여 읊으면 다 곡조에 맞았다. 삼각산(三角山)의 백운대(白雲臺)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 영동(嶺東)의 풍악(楓岳-금강산),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등 기승(奇勝)이며 유명한 곳에는 모두 얽매임 없이 홀로 가서 즐겼다.〉
 
 
  吏才를 드러내다
 
  승문원은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중국·일본·여진과 주고받는 문서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문과 급제자가 주로 배치되어 신진 관리로서의 기본을 익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원익은 2년 정도 승문원 부정자(종 9품), 정자(正字·정9품), 저작(著作·정8품)을 지내면서 중국어 과목에서 늘 우등을 차지했다.
 
  이어 성균관으로 옮기는데 1573년(선조 6년)에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으로 임명받아 북경을 다녀온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명(明)나라를 보고 온 것이다. 이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1574년 가을 황해도 도사(都事)로 부임한다. 도사는 종5품직으로 관찰사를 보좌하는 외직이다. 이때 권덕여가 관찰사로 있었는데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후임으로 이이(李珥·1536~1584년)가 왔다.
 
  이원익은 무엇보다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그는 군적(軍籍)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이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선조수정실록》 9년(1576년) 1월 2일 자에는 이원익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음을 알리고 파격적으로 이 배경을 상세하게 전한다.
 

  〈황해도사(黃海都事) 이원익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監營)의 사무를 맡기었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하고, 드디어 홍문선(弘文選)에 기록하였다. 이윽고 정언에 제수되니 대신들이 제목(除目)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재주가 있는데도 하급 관료로 침체해 있었는데 이제야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조정에 공론이 있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때 군적을 처음 반포하였는데 제도(諸道)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소략하게 하고 어떤 이는 각박하게 하여 백성들 원망이 많았다. 그런데 해서(海西·황해도)에서 만든 군적만은 최고로 일컬어지니 원익은 이 일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해 내직으로 돌아온 이원익은 사헌부 지평·헌납·장령, 홍문관 교리·응교 등 청요직을 거쳐 동부승지를 시작으로 선조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이이 탄핵 사태
 
이이
  선조 16년(1583년) 6월 11일 병조판서 이이의 사소한 실수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된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이가 이날 대궐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생겨 선조를 알현하지 않고 병조에만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이 반대파들에게 탄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이유였다.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있었고 홍문관까지 나섰다.
 
  이에 대한 선조의 반박은 논리 정연했다. 6월 20일 선조는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우선 사소한 일을 확대해서 문제 삼는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비판하면서 정말 이이가 임금을 업신여긴 대죄를 지었다면 파직 정도의 처벌을 제시한 양사나 옥당도 잘못이라고 거꾸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결국 당파적 이유에서 이이를 내쫓으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다그침이었다. 그러고 이렇게 말한다.
 
  “경들이 만약 이이를 일러 나라를 그르친 소인(小人)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분명히 밝혀 그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임금이 소인을 등용하고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이야말로 숙특(淑慝)을 가려낼 수 있는 때가 아니겠는가. 경들로서는 확실히 가려내지 않고 어물어물해서는 안 된다. 조정이 각기 유파끼리 분당(分黨)되어 나랏일이 날로 글러가고 있는데도 대신들이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이날 당장 홍문관 관리 전원이 자신들이 붕당으로 몰렸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선조는 이를 반려했다. 정승들도 이이에게 문제가 없지만 병조판서 자리가 너무 중하니 일단 병조판서를 교체할 것을 청했다. 선조는 결국 이들의 청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때 정승들에게 병조판서 교체를 지시하면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이이가 고향으로 돌아가 흰구름 위에 높이 누워 있으면 누가 그를 옭아맬 수 있겠는가?”
 
  병조판서 교체는 선조가 이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처였던 것이다.
 
 
  당쟁의 불똥이 튀다
 
  그런데 여기서 보듯 당쟁에 대한 선조의 대응은 미온적이고 수세적이다. 대안(代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이의 사퇴는 조정에 보다 심각한 당파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고 선조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동인(東人) 계열 대사간 송응개를 정점으로 한 홍문관 전한(典翰) 허봉, 승지 박근원 등이 주도한 이이 탄핵은 일단 성공이었다. 늘 이이의 중재역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동인 세력이 승리를 거두는 듯했다.
 
  일전에 이이가 후견인 역할을 하던 백인걸의 상소문을 대필해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문제 삼아 이이를 공격했던 송응형은 송응개의 형이다. 형제가 모두 이이와 악연(惡緣)이었다. 허봉의 경우도 부친이 병중에 있는데도 기생들과 놀았다는 이유로 직제학에 추천됐다가 이이의 반대로 좌절된 적이 있어 이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다음날 대사간 송응개가 선조를 찾아와 성혼, 이이, 심지어 영의정 박순까지 몰아세우는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모두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西人)의 한통속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조의 마음은 정해졌다. 송응개의 발언이 끝나자 선조는 “네 말이 설사 전부 옳다고 하더라도 진작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불충(不忠)이다. 대사간에서 물러나라”고 면박을 주었다. 본인에게 면전에서 파직을 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선조는 동인들의 이이 탄핵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날 바로 송응개는 장흥부사로, 허봉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도승지 박근원을 포함해 이들 세 사람이 유배 간 일을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른다. 그리고 당시 승지들을 모두 교체하는데 이원익도 동인인지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주목사로 이름 떨쳐
 
윤두수
  《선조수정실록》 20년(1587년) 4월 1일 자에, 이원익이 안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도 이례적으로 그 배경과 안주목사로서 업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원익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삼았다.
 
  이원익이 파산(罷散)하여 있다가 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쳤으나 오히려 복관(復官)되지 못하였다. 이때 안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진영인데 재해를 여러 차례 겪고 기근이 들어 조폐(凋弊)되었다는 이유로 명망이 중한 문신을 정밀히 골라 그 지방을 다독거려 수습하게 하되 구임(久任)시켜 공을 세우도록 책임 지우기를 청하였다. 명관(名官)이 모두 꺼려 피하기를 도모하였으므로 상이 이조에 명하여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도록 책임 지웠는데 판서 권극례가 이로 인하여 면관된 사람을 기용하고자 하여 이원익을 주의(注擬)하니 상이 허락하여 이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원익이 단기(單騎)로 부임하여 먼저 조곡(糶穀) 1만 석을 감사(監司)에게 청해다가 종자를 주어 경작을 권하였더니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드디어 군정(軍政)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하여 몸소 변진(邊鎭)에 양세(粮稅)를 납입하게 하여 조등(刁蹬)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西路)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이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사람들이 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질(陞秩)하여 환조(還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원익의 명망은 여기에서 기초되었다.〉

 
  조등()이란 간사한 꾀를 써서 물가를 오르게 하는 일을 말한다.
 
  안주목사로 2년 반을 일한 뒤인 선조 22년(1589년) 9월 이원익은 서인의 중심인물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추천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된다.
 
  〈이원익을 형조참판으로 삼았다. 원익은 정사가 최(最)를 맞아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는데 임기가 차자 이 임명이 있었다. 윤두수가 그때 감사가 되어 모든 군사와 백성에 관한 사무가 있으면 그때마다 차임(差任)하여 그와 의논하였는데 건혁(建革)한 바가 많았고 일이 완료되면 그의 공로를 계문(啓聞)하였다. 원익도 두수가 도량이 있고 임사(任使)를 잘한다 하여 그에게 쓰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관서 지방의 민정(民政)에 정리된 바가 자못 많았다.〉
 
  두 사람 모두 당파를 넘어서는 도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 3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까지 이원익은 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임진왜란 중 정승에 오르다
 
  일차적으로 그의 관리로서 뛰어난 면모가 발휘된 때는 임진왜란 시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직무를 맡아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는 장차 상이 서행(西幸·몽진)할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목사를 지내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했으므로 민심이 귀의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평양 수비군은 겨우 3000여 명이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으로서는 군 통솔이 잘 안 되고 군기(軍紀) 또한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했다.
 
  평양이 함락되자 이원익은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됐다.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그는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했다. 1595년(선조 28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됐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했다.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오르긴 했으나 모든 것이 어수선할 때였다. 《국조인물고》가 전하는 당시 이원익의 활약상이다.
 
  〈을미년(乙未年·1595년·선조 28년)에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조정에 돌아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고 영남(嶺南)에 독부(督府)를 개설하였다. 이때 중국 군사가 변경(邊境)까지 가까이 갔는데, 공이 식량 공급을 잘 조정하여 군량이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또 적을 제압하는 요령은 성을 지키는 것 말고는 딴 방책이 없다고 생각하여 곧 각처의 산성(山城)을 수선하였다. 이때 군율(軍律)이 해이하여 문란해지고 제도(諸道)의 장수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 다 잡아다가 매를 때렸는데, 사납고 무지한 자일지라도 다 그 엄명한 데에 복종하고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이순신을 옹호하다
 
이순신
  무엇보다 이 기간 이순신을 옹호한 사람이 이원익이었다. 《선조실록》 29년(1596년) 10월 5일 한양으로 올라온 이원익에게 선조는 이순신에 관해 묻는다.
 
  〈상이 말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힘써 종사하고 있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그 사람은 미욱스럽지 않아 힘써 종사하고 있을뿐더러 한산도(閑山島)에는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상이 말했다.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 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상이 말했다.
 
  “절제(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순신 또한 이원익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품고 있었다. 이 점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이원익을 상국(相國)이라고 존칭했다.
 
 
  명나라 정응태와 맞서다
 
  선조 31년(1598년) 이원익은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류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마라”며 자원했다.
 
  그는 이미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당쟁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정도(正道)를 고수하며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당파를 넘어 지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재상으로 자리 잡았다.
 
  《국조인물고》에는 이때 명나라에 가던 도중 이원익이 정응태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이때에 공이 떠나서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정응태 일행이 왕래하는 것을 만났다. 정응태가 공이 가면 반드시 경리(양호)를 칭찬하여 아뢰리라는 것을 알고 크게 섭섭히 여겨 어두워진 뒤에 두세 장관(將官)을 보내어 요동(遼東) 경계까지 공을 쫓아가서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중국말을 알아듣고 또 말하기를 ‘우리는 국왕의 명을 받들고 중국 조정에 들어가는데, 이제 중도에서 멈추게 하면 임금의 명을 막는 것이다. 너희가 힘으로 일행을 묶어서 거꾸로 실어 갈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국왕에게 변명할 말이 있을 터인데, 어찌 너희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니, 장관이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돌아갔다.
 
  정응태가 중국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곧바로 아뢰기를 ‘신이 조선에 가니 길가에 떨어진 작은 책 하나가 있었는데 다 조선이 왜를 섬기는 절목(節目)이었습니다. 이번 왜구(倭寇)는 수상(首相) 이원익과 그 국왕이 길을 빌려주어 인도한 것이니, 이원익을 하옥하고 엄히 캐어물으면 그 정상이 절로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갖가지로 기교(奇巧)하였다.
 
  공이 드디어 부사(副使) 허잠(許箴)과 서장관(書狀官)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날마다 육부(六部)와 과도관도어사(科道官都御史)의 아문(衙門)에 말하여 해명하고 또 통정사(通政司)에 정문(呈文·글을 올림)하고는 머리로 바닥을 두들겨 피를 흘리고 각로(閣老·명나라 때 재상을 일컫는 말)가 나오는 것을 기다려 호소하니, 각로가 온화한 말로 이르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위에 전달하여 아뢸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동법 실시
 
  당시 이원익이 갖고 있던 중망(重望)은 광해군 즉위 후 북인(北人) 세력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그가 다시 영의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북인은 원래 남인과 함께 동인이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기점으로 서인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갖는 쪽은 남인, 급진적 태도를 갖는 쪽은 북인으로 갈렸다. 당색(黨色)이 약하기는 했지만 이원익은 일관되게 류성룡을 따라 온건 남인이었다.
 
  영의정으로서 그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정쟁이 아니라 민생(民生)이었다. 전후(戰後)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점점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女色)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諫爭)했다. 하루는 궐중에서 광해군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였는데 광해군이 진노하여 옷을 털고 들어가 비빈(妃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모욕당한 것이 지극하다. 너희는 삼가라. 그러지 않으면 그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원익은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 다시 이이첨(李爾瞻)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이원익이 광해군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慈殿)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광해군은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의 명망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1623년 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내려왔다.
 
 
  인조반정 후 영의정 복귀
 
인조가 청백리 이원익에게 하사한 관감당(觀感堂). 경기도 광명시에 있다. 사진=조선DB
  《인조실록》 3월 16일 자는 거사가 성공한 직후 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유명한 장면이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昏朝·광해군) 시절 임해군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를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한창일 때에도 상차(上箚)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여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전리에 방귀(放歸)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광해군 초기 북인 정권이었음에도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조 초기 서인 정권이었음에도 다시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선조·광해군·인조 세 조정에 걸쳐 정승을 지내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된 것이다. 비명이 전하는 그의 처신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공은 금도(襟度)가 정명(精明)하고 표리(表裡)가 순일(純一)하며 평소에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에 임하면 독립하여 산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일을 처리할 시 순전히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인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해 절로 이치에 맞았는데, 어떤 재신(宰臣)이 말하기를, “누가 금세에는 성인(聖人)이 없다 하던가? 완평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이때는 일이 많았는데 묘당에 큰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공이 한마디 말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였으므로, 오성(鰲城·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일마다 행수(行首)의 재처(裁處)를 따른다”라고 했고, 신흠(申欽)공도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도 오성을 언급하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위인(偉人)이다”라고 하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만물에 미쳐야 하고 지론(持論)은 되도록 두터워야 한다”라고 했다.〉

 
 
  ‘正’을 한결같이 지킨 재상
 
  그가 글을 지으면 조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지만 체재는 갖추어서 보기에는 간단하고 담박한 듯하나 의미가 심장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의 화려한 것을 자기 일로 삼은 적이 없으므로 지은 글을 짓는 대로 곧 버려서 집에 감춘 사고(私稿·문집)가 없었다. 이런 재상이 있었기에 혼란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조선이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1634년(인조 12년) 정월 29일에 서거하니 향년 88세였다.
 
  “한 마음으로는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 임금도 섬길 수 없다”고 했으니 곧 이원익을 두고 한 말이다.
 
  이준경이 중정(中正)을 갖춘 정승이었고 류성룡이 중(中)에 치우쳤다면 이원익은 정(正)을 한결같이 지킨 정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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