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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8 / 저주로부터의 도피 - 로트렉과 발라동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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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로 고통받은 ‘다이아몬드 수저’ 로트렉과 사생아 출신 모델 발라동
⊙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어도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야”
⊙ 발라동, 르누아르와의 사이에서 화가 위트릴로 낳아
⊙ 발라동, 로트렉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해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년)
프랑스의 화가, 도안가, 그래픽아트 미술가, 삽화가, 석판화 화가.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서로 사촌 간이었던 어머니로부터 귀족의 혈통과 재산뿐 아니라 유전적인 결함까지 물려받았다. 어릴 때부터 데생에 능해 파리에 가서 거장 화가 레옹 보나(Leon Bonnat)에게 그림을 배웠고 1885년경 몽마르트르에 정착해 물랭루주 같은 유명 카바레와 카페, 사창가에 출입하면서 파리의 풍속과 사창가 여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포착했다. 드가와 인상파, 풍속판화 등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상업적 용도로 사용되던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영원한 삶,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꿈이라고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 기술의 힘으로 영생을 이루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미래 과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라는 저서에서 2045년경 컴퓨터 지능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해 산업과 사회가 폭발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특히 질병에서 해방된 인간이 평균 200년을 살고 노화(老化)도 멈춘다는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장수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년) 같은 천재 예술가가 그랬다. 1800년대 후반, 술과 향락으로 죽음을 앞당기려 했던 그가 만약 요즘 시대를 살고 있다면 아마 더욱더 강력한 방법으로 명을 단축했을 것이다.
 
 
  비운의 다이아몬드 수저
 
  로트렉은 1864년 겨울 프랑스 남부 알비의 한 성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풀 네임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렉-몽파. 혈통과 영지 등 나타내야 할 것이 많아 길어진 이름에서부터 귀족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툴루즈 백작가는 프랑스의 대귀족 열두 가문 중 하나로 남프랑스의 3분의 1을 지배하던 대영주였다. 금수저라는 말로는 부족한 다이아몬드 수저라고나 할까. 하지만 유럽의 다른 귀족들처럼 가문의 부(富)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반복한 탓에 로트렉은 뼈가 점점 약해지는 유전병을 지니고 태어났다.
 
  결국 그는 열세 살 무렵의 어느 날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대퇴골이 골절된 이후엔 하반신 성장이 멈추고 말았다. 그의 키는 고작 152cm, 일설에는 142cm라는 말도 있다. 로트렉은 열다섯 무렵부터는 줄곧 지팡이에 의존해야만 걸을 수 있었고 자신과 같은 명문가 또래들이 즐기는 승마, 사냥 등 야외 활동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었다.
 

  체면을 중시했던 그의 아버지 로트렉 백작은 장애가 있는 아들을 멀리했다. 아버지 곁이 그리웠던 어린 로트렉은 아버지가 말 타고 사냥을 나가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여기서 그의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파리의 거장 화가 레옹 보나(Leon Bonnat)에게 예술 교육을 받게 해줬다. 그렇게 로트렉은 파리 화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서민들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독립 후 몽마르트르 언덕에 정착했다.
 
  신체적 결함 때문에 일반 여성과 데이트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일찍이 윤락가에 드나들면서 성적(性的)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달리 진짜 성 경험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사랑을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다. 친구들은 장난 삼아 그에게 마리 샤를레라는 소녀를 소개해줬다.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피해 가출한 그녀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성적으로 미숙한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 도리어 수치심을 갖게 해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때 로트렉은 결심했다. 왜 육체적 사랑을 느끼기 위해, 그깟 쾌락을 느끼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그는 앞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만 쟁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모델 발라동
 
  하지만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사랑의 허무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유명 모델이었던 발라동을 만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름답고 야성적이며 무엇보다 로트렉의 장애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성격이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버렸다.
 
  미혼모(未婚母)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식당 종업원, 가정부, 공장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하루하루 먹고살았던 발라동은 서커스단에 입단해 곡예사로 활동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서커스를 못 하게 된 후 모델 업계에 발을 들였다. 그녀는 불과 열다섯 살에 이미 인생의 쓴맛을 맛볼 대로 맛봤고 신분은 달랐지만 쓰라린 성장기를 보낸 아픔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어 로트렉과 묘하게 닮은 데가 있었다.
 
  발라동은 당시 파리에서 이름을 떨치던 화가 샤반의 모델로 경력을 시작했다. 샤반의 집에 살며 모델, 하녀, 연인 1인 3역을 맡아 하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험 삼아 그림 몇 장을 그려 샤반에게 보여줬지만 샤반은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며 그녀의 도전을 대번에 무시했다. 샤반의 차가운 민낯을 본 발라동은 바로 그의 곁을 떠나 여러 예술가의 모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몽마르트르 화가들은 어린 나이에 온갖 풍파를 겪은 소녀에게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꼈고 그것을 그리기 위해 앞다투어 그녀를 찾았다.
 
  발라동은 로트렉과 만나기 전에 이미 르누아르의 연인이었다. 르누아르의 대표작 〈부지발의 무도회〉와 〈우산〉에 등장하는 여자가 바로 발라동이다. ‘행복의 화가’라는 별명답게 르누아르의 그림 속 발라동은 수줍고 싱그러운 여성이었다. 파리의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여성의 실존적인 모습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라동은 르누아르가 자신의 외모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좋은 남편감이 아니야”
 
〈세탁부〉(1889)
로트렉의 나이 25세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크기는 92×74cm이며 200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가운데 최고가인 224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로트렉은 서민 중에서도 창녀, 무용수, 세탁부 등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한눈에 봐도 고단한 일상에 지친 세탁부 여인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발라동은 르누아르에게 버림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출산했다. 사람들은 “사생아가 사생아를 낳았다”고 수군거렸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르누아르를 쏙 빼닮은(?) 그녀의 아들 위트릴로는 화가로 성장했고 훗날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명성을 누리게 된다.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지칠 대로 지친 발라동. 로트렉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자신을 진심으로 헤아려주는 화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로트렉은 발라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고 그의 작품 속에서 그녀는 낡은 옷을 입고 지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발라동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많은 그림 중 로트렉의 대표작 〈세탁부〉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로트렉은 발라동이 연습 삼아 그린 그림에도 관심을 가져주었고 수잔이라는 예명을 지어주며 그녀가 화가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친구였던 화가 드가에게 발라동을 소개했고 발라동은 드가 밑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로소 솔메이트를 만났다고 생각한 발라동은 로트렉에게 청혼을 했다. 로트렉 역시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결혼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겐 아버지로부터 외면받은 경험, 뿌리 깊은 자기혐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에 결혼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라동은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로트렉의 마음을 바꾸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장애와 병까지 가진 나는 좋은 남편감이 아니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처럼 유전병을 가진 아이를 낳게 될까 봐,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난 그대를 원해요’
 
  그들의 연인 관계는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며 1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발라동은 로트렉과 드가의 도움으로 공식적으로 화가가 되었다. 1909년 발라동은 〈아담과 이브〉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파리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그림 속 이브는 기존 성서 속의 해석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 사과를 따는 이브의 표정은 당당하고 인류를 재앙에 빠트린 원죄(原罪)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브가 욕망 앞에서 순수하게 몸을 활짝 드러낼 때, 옆에서 아담은 퀭한 눈으로 온갖 계산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발라동이 이런 도발적인 그림을 그린 건 자신이 만났던 비겁한 남성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게다. 어쩌면 그가 만났던 진짜 남자다운 남자는 로트렉이 유일했는지도.
 
  로트렉과 헤어진 후 그녀는 복수라도 하듯이 남자들을 취사선택하며 사랑을 주도했다. 남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건 이제 그녀의 몫이었다. 발라동 곁을 스쳐 지나간 남자 중에는 오늘날 유명해진 음악가도 있다. 바로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 작곡가 에릭 사티. 발라동과 사티의 연애 기간은 6개월뿐이었지만 사티는 발라동과 헤어진 이후 죽을 때까지 연애를 하지 못하고 오직 그녀만을 사랑했다는 후문이 있다. 사티를 모르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곡 ‘난 그대를 원해요(Je Te Veux)’가 바로 그가 발라동을 위해 작곡한 곡이다. 세찬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봄을 맞이하는 듯한 선율이 그녀와 꼭 닮았다.
 
  가난한 동료 화가들과 달리 로트렉은 자기 소유의 성, 작업실, 막대한 재산에다가 지극 정성인 어머니까지 갖고 있었다. 그가 평생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동력은 순전히 장애에 대한 울분과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었다. 하지만 성격 자체는 유쾌하고 유머 감각도 있어 주변에 늘 친구가 많았다.
 
 
  물랭루주
 
〈물랭루주에서의 춤〉(1890)
당시 파리지앵들에게 매력적인 나이트클럽으로 명성이 높았던 물랭루주의 풍경을 담았다. 그가 화폭에 즐겨 담던 물랭루주는 ‘붉은 풍차(Moulin Rouge)’라는 뜻으로 1889년 무도장으로 개장했다. 건물 옥상의 크고 붉은 네온사인 풍차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이 그림 뒤쪽에 작가가 직접 연필로 쓴 서명이 있음이 발견되었는데, “뼈가 없는 듯 느껴질 정도로 춤을 잘 추는 발렌타인이 초보자를 가르치다”라고 써 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인물들은 잘 알려진 툴루즈 로트렉의 화류계 멤버들. 그중 바에 기대고 있는 흰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는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이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핫한 클럽이었던 물랭루주에서 친구 반 고흐와 함께 온갖 폭탄 양주를 말아 마시던 그는 이내 물랭루주의 무용수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도발적이고 활기 넘치는 클럽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통해 재능 있는 신예 화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인기는 치솟았고 물랭루주를 비롯해 여러 클럽으로부터 홍보용 포스터 주문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사실 말이 클럽이지 당시에는 사창가(私娼街)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신선한 디자인의 획기적인 포스터를 제작해줬다. 이것이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이자 오늘날 포스터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게 된 시초가 됐다.
 
〈물랭루주,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 1891)
단순한 선과 평면적인 색채로 표현한 현대 예술 판화의 시초. 카바레 손님들의 술을 자꾸 뺏어먹으며 춤을 추는 버릇 때문에 ‘라 굴뤼’라는 별명이 붙어버린 무희가 주인공이다. 물랭루주의 소유주였던 지들러가 단골손님이었던 로트렉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이 포스터는 대중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고 그를 일약 스타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로트렉은 조명 가운데서 캉캉춤을 추는 무용수를 빨간 스타킹과 빨간 셔츠, 금발로 강조했다. 배경에 선 관중은 모두 신사모를 쓰고 있는데 귀족들도 보러 오는 수준 높은 공연이니 내숭 떨지 말고 놀러 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의 포스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예쁘지가 않았다. 당시 스타 가수였던 이베트는 심지어 늙은 노파처럼 추하게 그려놓기도 했다. 이베트는 로트렉에게 “제발 좀 예쁘게 그려달라”고 간청했고 그녀의 모친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겁박했지만 로트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모델들을 추하게 그리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로트렉은 “실제로 추하니까”라고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아름다움 역시 갖고 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건 무척 떨리는 일이다.”
 
 
  예술과 고통은 한 몸
 
〈침대에서〉(1892)
침대 시트 밖으로 얼굴만 내놓고 마주 보며 누워 있는 두 여성은 사창가의 레즈비언들. 로트렉은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면서 사창가 여성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자주 그렸다. 그는 여인들이 옷 갈아입는 모습, 속내를 나누며 대화하는 모습, 소파 위에 누워 있거나 털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 등 그들의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로트렉의 진심은 사실 이랬다. 그는 발라동을 그렸을 때처럼 무용수들에게서도 직업적 특성이 아닌 인간성 자체를 찾아냈다. 무용수이자 매춘부였던 그들을 성 상품화된 대상이 아닌 개성 있는 아티스트로 묘사한 것. 그가 여성 간의 동성애(同性愛) 관계를 그린 작품 〈침대에서〉도 외설적이거나 에로틱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로트렉은 종종 무용수들의 숙소를 방문해서 그림을 그렸고 마치 가족처럼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의 힘든 일상을 공감하며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의 작품 속 모델이 되어 유명해진 댄서나 가수들이 차츰 많아졌고 물랭루주의 모든 이가 로트렉의 그림 속에 영원히 담기길 원했다.
 
〈앙바사되르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리앙〉(1893)
프랑스의 카바레 가수이자 코미디언, 싱어송라이터였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공연 포스터. 로트렉의 포스터 대표작 중 하나다. 동일한 색채가 화면을 넓게 차지하는 구성이 파격적이다.
  1890년부터 로트렉의 예술적 기량은 절정에 이르렀다. 피카소도 그의 그림에 큰 감명을 받아 그의 포스터를 자기 방에 붙여놓고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유명세는 날로 커져갔지만 그럼에도 주변에서 무시당하는 삶은 나아질 것이 없었다. 물랭루주에서 테이블에 펜을 흘리고 나가는 그에게 어떤 짓궂은 이는 “신사분, 지팡이 놓고 가셨습니다”라며 조롱을 했고 매춘부를 그렸다는 이유로 가문 내에서는 물론 지인들에게도 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 로트렉 백작은 대로해 “가문의 수치”라며 “로트렉이란 이름을 쓰지 말라”고까지 했다.
 
 
  ‘킬러 칵테일’
 
  이런 그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오로지 술과 매춘이었다. 그는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좋아했고 마치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이것저것 섞어 마시기를 즐겼다. 그는 킬러 칵테일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한 잔 마시면 지진을 느낄 정도로 독하다 해서 ‘어스퀘이크’라고 이름 붙은 이 칵테일은 47도라는 어마어마한 도수를 지녔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던 로트렉은 매독까지 더해지며 결국 정신착란, 마비증상 등으로 앓아눕기에 이르렀다. 세 달 가까이 신경외과 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상태는 이미 회복 불가 상태였다. 결국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01년 9월 9일, 그가 죽음을 코앞에 두자 로트렉 백작이 아들의 마지막을 지키려고 찾아왔다. 하지만 이때조차 아들 곁에서 차분히 상태를 살피기는커녕 어수선하게 방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손상시키는 실수를 연발할 뿐이었다. 이 꼴을 지켜보던 로트렉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힘을 쥐어짜 유언과도 같은 말을 뱉어냈는데, 그의 입에서 힘겹게 나온 말은 바로 “이 늙은 멍청이(Le vieux con)!”였다고 한다.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어도…”
 
  짧은 생 동안 무려 6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로트렉. 그가 죽자, 평소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던 아트 딜러 모리스 조이앵은 로트렉의 어머니의 후원을 받아 로트렉 미술관을 세웠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끝까지 노력했다.
 
  로트렉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백작이 되지는 못했다. 어차피 그에게 작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후에 그의 작품이 루브르에 전시되는 명예를 얻자 평생 그를 멸시하던 백작은 그제야 “아들을 인정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고 로트렉 부인은 백작이 죽은 아들을 이용한다며 분개해했다.
 
  로트렉은 생전에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어도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야”라고 자주 한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주와도 같았던, 그 장애가 만약 없었다면 우리는 현대 포스터 아트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할 뻔했다. 진정, 예술이란 고통 없이는 탄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름다움과 추함은 공존한다는 그의 말처럼 어쩌면 예술과 고통은 한 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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