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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13〉

소금의 도시와 음악천재 모차르트 이야기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아인슈타인) / “세상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다”(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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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어로 소금을 ‘잘츠(Salz)’라고 하는 것을 보면 잘츠부르크는 말 그대로 ‘소금 자치시’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한 오스트리아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숨 막힐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
⊙ 아들의 재능이 뚜렷해지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친 아버지… 기록에 따르면 볼프강은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했다
⊙ 1784년의 어느 날, 그의 집에 찾아온 무명음악가가 당시 14세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스승
⊙ 생가 맞은편 미라벨 궁전과 정원(Mirabell Garten)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
⊙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곳이며 묘지엔 모차르트의 누이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 있어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여 보금자리를 만들어 정착할 무렵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이 소금(salt)다. 소금은 지금으로 치면 천연냉장고였다. 냉장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음식이 썩는 것을 막을 방법은 소금밖에 없었다. 조미료가 없던 시절, 소금은 음식 맛을 내는 데 요긴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소금인데, 유럽에 특히 소금과 깊은 인연을 지닌 도시가 있다. 바로 ‘소금 왕국’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다.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은 멀다. 스위스-오스트리아는 남북으로 짧고 동서로는 긴 형태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떠나 오스트리아 땅으로 들어가는 데 승용차로 8시간이 걸렸다.
 
  밀라노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이탈리아 북부 국립공원을 지나 안개 낀 남 알프스를 넘으면 스위스다. 거기서 독일 아우토반으로 갈아타야 한다. 뮌헨-인스브루크를 거쳐야 비로소 잘츠부르크에 닿는다.
 
모차르트가 한때 살았던 곳은 관광 명소가 됐다.
  오스트리아에 처음 왕국이 생긴 것은 기원전 150년쯤이다. 기원전 179년, 켈트족이 상부 오스트리아(Upper Austria)로 몰려왔다. 켈트족이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인 이유가 있다.
 
  암염(巖鹽), 즉 소금 광산이 천지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금을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본 켈트족이 처음 왕국을 세운 곳이 잘츠부르크(Salzburg)다. 유럽에서 ‘부르크(-burg)’로 끝나는 지명은 예전에 자치도시(borough)였다는 뜻이다. 중세 봉건 영주 시절 자치를 허용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흥성하여 외부는 물론이고 윗전의 간섭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소금이 이 나라 역사에 중요했다는 뜻인데, 독일어로 소금을 ‘잘츠(Salz)’라고 하는 것을 보면 잘츠부르크는 말 그대로 ‘소금 자치시’였던 셈이다. 잘츠부르크뿐 아니라 오늘날 직장인이 받는 급료(給料)를 뜻하는 샐러리(salary)라는 단어도 소금에서 유래됐다.
 
  오스트리아 명승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는 소금 창고, 수도 빈의 잘츠브뤼케(Salzbrucke)는 소금 다리, 잘츠토르(Salztor)는 소금 성문이다. 오스트리아 음식이 짠 것도 소금과 연관이 있겠다.
 
  잘츠부르크를 기반으로 켈트족이 세운 왕국의 이름은 노리쿰(Noricum)이었다. 노리쿰 왕국은 도나우강 지역, 서부 슈티리아, 카린티아까지 영향권을 넓혔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였다.
 
  오스트리아 역사는 15세기 이후로 축소 일변도를 달려왔다. 결혼 동맹을 이용해 가장 고귀한 가문으로 모든 유럽 왕가 위에 군림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운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제국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나치 히틀러에게 강제로 나라가 병합됐다. 그 후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1955년까지 분할 통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지도의 변천사를 보면 독일에서부터 프랑스 동부, 이탈리아 북부, 중부 유럽에 이르던 영토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지금 오스트리아가 영세(永世)중립국이 된 것도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까, 오스트리아에 체류하는 동안 줄곧 묘한 느낌을 받았다. 스러진 영광의 잔해를 그러모으기 급급하다고나 할까. 눈이라도 마주치면 씩 웃어주는 여느 유럽인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 보였다. 시선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상대를 경계하는 눈초리에 냉랭한 표정…. 동구권에서 빈민들까지 대거 유입하자 그런 분위기가 생긴 것일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한 오스트리아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숨 막힐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놀라울 정도다. 그렇지만 잘츠부르크만큼은 아직 낭만이 가득했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때문일 것이다.
 
잘츠부르크를 관통하는 잘차흐강은 시민들의 산책로이다.
  인구가 15만명인 잘츠부르크는 좁다. 도시 복판을 흐르는 잘차흐강으로 신・구 시가지가 나뉜다. 한강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강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작아 보이지만 말이다. 도시 사방은 알프스의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산지에는 요새들이 서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제일가는 명소는 호엔잘츠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이다. 성은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며 열쇠를 매달아놓은 잘차흐강의 스타츠브뤼케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가파른 비탈길 위에 우뚝 서 있다.
 
잘차흐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사랑을 맹세한 연인들이 열쇠를 걸어놓았다.

벨베데레 궁전은 빈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 가운데 하나다.
  호엔잘츠부르크성은 1077년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바이에른 공국을 비롯한 남부 독일 제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운 요새다. 1·2차 세계대전 와중에도 용케 파괴되지 않았다.
 
  이 중부 유럽 최대 규모의 성은 건축미보다 기능을 강조했다. 겉으론 단순해 보이는데 내부는 미로(迷路)투성이다. 성에서는 잘츠부르크 시가가 한눈에 보이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잘츠부르크 성당이 있다.
 
이 궁전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장소였다.
  성에서 내려와 다시 다리를 건너면 건너편으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한 미라벨 궁전이 있다. 발 디딜 수 있는 모든 곳에 모차르트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과연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생애를 짚어보기로 한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이었다. 아버지가 누나 나네를을 가르치는 걸 지켜보던 볼프강은 세 살 때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이 뚜렷해지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기록에 따르면 볼프강은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캐리커처다.
  모차르트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독일의 뮌헨과 영국의 런던을 다녀왔는데, 프랑스의 파리를 여행하는 도중 어머니를 잃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는 걸출한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 한명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였다. 그는 바흐로부터 교향곡을 작곡하는 법을 배웠다.
 
  1784년의 어느 날, 그의 집에 어느 무명(無名)음악가가 찾아오기도 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14세였으니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스승이기도 했다.
 
  베토벤의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둘의 관계는 한 달 만에 끝나고 만다. 베토벤이 다시 빈을 찾은 것은 모차르트가 죽은 지 1년 후인 1793년인데, 일설에는 둘의 관계를 후세 작가들이 지어낸 것이라고도 한다.
 
모차르트 분장을 한 행위예술가가 행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음악 수업 때 항상 ‘미’만 맞았던 내가 모차르트 음악을 논하는 것은 분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후세 음악가들이 그에게 남긴 헌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 위대한 천재성의 일면을 보여드리겠다.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모차르트에게 바친 말이다. 베토벤은 자기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의 1악장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는 없다.” 그러면서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작품을 쓰는데 그것이 마술피리를 주제로 한 첼로와 피아노곡이다.
 
  러시아 음악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고 구스타프 말러는 죽을 때 모차르트의 이름을 불렀으며 막스 레거의 대표곡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도 유명하다.
 
무명 음악가가 공원에서 홀로 연주하고 있다.
  내친김에 몇 가지 더 소개해보기로 한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위대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세상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남다른 천재성을 발휘했던 모차르트의 요절을 아쉬워한 것인지 모차르트의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많다. 공식적인 그의 사망 원인은 가난으로 인한 건강 악화인데, 사인을 두고도 ‘무수히 난 좁쌀만 한 발열’이라는 진단 기록 때문에 그 원인이 선모충병이라느니 류머티스열이라느니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이 원인이라는 주장 등 각종 가설이 난무하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죽던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한다.
 
  남편은 요절했지만 남은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 출판으로 큰 돈을 번 뒤 1809년 덴마크 출신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재혼했다. 두 사람은 모두 모차르트 전기를 남겼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곳이며 묘지엔 모차르트의 누이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아이들과 숨어 있던 곳도 이곳이다. 앞서 말한 호엔잘츠부르크성은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대주교와 잘츠부르크의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던 곳이다.
 
  이렇게 도시 구석구석마다 얽힌 이야기가 많은 잘츠부르크지만, 이 도시에서 모차르트의 자취가 가장 깊이 남은 곳은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라고 생각한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이곳 한가운데 위치한 노란색 건물이 모차르트 생가(Mozart Geburtshaus)다.
 
모차르트 생가 전경이다.
  모차르트는 여기서 17세까지 살았는데 총 4층으로 된 공간에 그가 사용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등이 전시돼 있다.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초상화와 어린 시절 작곡한 음악 원본 악보가 전시돼 있으며 2층에는 그의 오페라와 관련된 자료, 3·4층은 그와 가족이 살았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생가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미라벨 궁전과 정원(Mirabell Garten)이 나온다. 궁전은 1606년 당시 잘츠부르크의 지배자였던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것으로 바로크 양식이다.
 
모차르트의 생가는 지금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정원은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가 조성했는데 유럽 정원 문화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앞서 말했듯 미라벨 정원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 마리아와 트랩 대령 아이들이 유명한 ‘도레미 송’을 부른 곳이다. ‘도레미 송’은 호엔잘츠부르크성의 성벽 계단에서 시작해 미라벨 정원 계단에서 끝나게 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에서 시작해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절정을 이뤘다는 말이 있다. 뮌헨 남부의 독일 알프스 최고봉에 갔을 때 정상 너머로 잘츠부르크가 보이자 가이드가 꺼낸 얘기도 영화 이야기였다.
 
모차르트의 얼굴은 초콜릿 포장에도 쓰인다.
  어떤 이들은 슈퍼마켓의 초콜릿, 연필통부터 싸구려 음식에까지 모차르트의 이름과 얼굴을 붙여놓는 잘츠부르크의 상술(商術)을 비판한다. 그중엔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때 신경도 쓰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갈 때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굉장한 수입을 올리고도 평생을 빈곤에 허덕였다. 이유는 금전관리에 서툴렀고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사망 후 걸쳤던 금장식 달린 화려한 수의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이들에게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우리만 그러냐”며 인근 체코의 프라하가 더하다고 지적한다. 갑자기 체코와 프라하에 화살을 돌리는 건 왜일까? 그 이유는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빈 궁정에서 보냈지만 31세 때인 1787년 건강이 나빠지자 프라하로 요양을 떠난다.
 
잘츠부르크에는 곳곳에 모차르트 얼굴이 그려져 있다.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노스티츠 백작은 모차르트에게 많은 돈을 후원했다. 이런 성원에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해 1787년 10월 29일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서 초연했다.
 
  그 이후 프라하는 ‘돈 조반니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라하 시민들은 모차르트에게 감사의 표시로 청동상 ‘얼굴 없는 유령’을 바쳤는데 너무 무거워 진품은 스타보브스케 극장 앞에 남고 모조품이 빈에 있다. ‘얼굴 없는 유령’은 빈에서 배낭객 사이에 필수 방문코스라 불리는 카페 센트럴 앞에 서 있는 흰색 동상이다. 이렇게 보면 프라하 사람들은 명분도 얻고 청동상도 고스란히 보유하는 실리를 챙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노스티츠 백작이 세운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1984년 아카데미상을 8개나 받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체코 출신 감독 밀로스 포먼이 영화를 촬영한 곳도 빈이 아니라 프라하였다.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1년 공연의 대부분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로 채우고 있다니, 모차르트를 팔아먹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잘츠부르크 시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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