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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事理分別 〈16〉 常經과 權道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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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에는 權道와 常經이 있으니 뛰어난 사람을 고르는 것[擇賢]이 마땅”(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선택할 때 영의정 유정현이 한 말)
⊙ “군자는 천하에 나아가 일을 할 때 오로지 주장함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음도 없으며 (그때그때의) 마땅함[義]에 따라 행할 뿐”(공자)
⊙ 판서까지는 常經을 행하는 자리, 정승이 돼야 비로소 權道를 행할 수 있어… 事理와 事勢 알아야 權道 행할 수 있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울 때 신하들은 ‘權道’에 바탕을 둔 ‘擇賢論’을 주장해 이를 뒷받침했다.
  ‘권(權)’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권력・권세’하고만 연결해서 쓰다 보니 갖고 있던 뜻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 원래 ‘저울・저울추’를 뜻하고, 동사로는 ‘저울질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됐다. ‘저울질한다’는 것은 ‘상황마다 거기에 맞는 조치를 취한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잠시’ ‘임시’라는 뜻이 파생돼 나왔다.
 
  예를 들면 ‘권지(權知)’의 ‘권’이 바로 ‘임시’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知)’는 장(掌)이나 사(司), 전(典)과 같은 뜻으로 ‘일을 주관하다’ ‘담당하다’라는 뜻이다.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어가 ‘도지사(道知事)’다. 말 그대로 도의 일을 맡아서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권지는 오늘날 ‘인턴’과 같은 말이다. ‘정식 임용을 앞두고 일단 임시로 일을 맡긴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면, 바로 정식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지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합격자를 권지로 임명, 각 관청에 보내 일정 기간이 경과해야 실직(實職)을 주는 것이다. 특히 바로 6품에 임명되는 갑과(甲科) 합격자 3명 이외의 합격자는 모두 종9품을 받아 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 무과(武科)의 경우 훈련원・별시위 등 이른바 권지청(權知廳)에 분속돼 권지성균관 학유(學諭), 권지승문원 부정자(副正字) 등으로 실무를 익히게 했다.
 
  심지어 우리 역사에는 임금 중에도 권지가 있다. 태조 이성계와 정종이 그런 경우다. 명나라에서 1401년 태종을 공식 책봉하기 전까지 조선 임금의 공식 명칭은 ‘권지 고려국사(高麗國事)’ 혹은 ‘고려 권지국사’였다.
 
  ‘권’이 ‘임시’라는 뜻을 가졌기에 실은 ‘권도(權道)’라는 말도 ‘임시방편’이라는 뜻이 강했다.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니었다.
 
 
  常經과 權道
 
  우선 중립적 뉘앙스부터 살펴보자. 태종 6년(1406년) 8월 24일, 태종이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넘기겠다는 선위(禪位) 의사를 밝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때 권근(權近)이 글을 올려 선위의 부당성을 역설했는데, 그중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신이 가만히 천하(天下)의 일을 생각건대, 일은 같으나 형세가 다른 것이 있으니 태평(太平)하고 무사(無事)한 때를 당하면 상경(常經)을 지키고 위태하고 변급(變急)한 때를 당하면 권도(權道)를 행했습니다. 진실로 태평한 때를 당해 권도를 쓰면 시중(時中)의 적의(適宜)함을 잃게 되어 도리어 화란(禍亂)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천하의 국가를 가진 이가 반드시 대대로 서로 전위(傳位)하는 것은 예(禮)의 상경입니다. 무릇 제후(諸侯)가 나라를 전(傳)하는 데 반드시 천자(天子)에게 명(命)을 받는 것도 또한 예의 상경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는 사리(事理)로서의 예 개념이 나타나 있고, 동시에 권도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 상경임을 알 수 있다. 상경은 상도(常道)라고도 한다. 권근은 권도와 상경의 일반론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권도라는 말을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구한 계책이나 영구적인 법도와 대비되는 의미에서는 임기응변 정도의 의미다. 그러나 태종은 권도를 상당히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논어(論語)》에 정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을 확연히 보여주는 기사가 태종 17년 6월24일자 《태종실록》에 나온다.
 
 
  喪中인 하구에게 고기 내린 태종
 
  이날 태종은 하륜(河崙)의 아들 하구(河久)에게 고기를 내려주었다. 하륜의 아내 이씨(李氏)가 의원(醫員) 양홍달(楊弘達)에게 말했다.
 
  “아들 하구가 오랫동안 아버지의 상사(喪事)로 인해 기운이 허약한데다가 병은 심하고 입이 써서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오. 내가 육식(肉食)하기를 권해도 하구가 따르기를 달게 여기지 아니하니 그대는 이 사정을 상전(上前)에 아뢰어 하구로 하여금 고기를 먹도록 하여 주오.”
 
  양홍달이 와서 아뢰었다.
 
  “하구 어미의 말이 이러하여 신(臣)이 진찰해 보았더니 상중(喪中)에 채소만 먹은 나머지 천식이 깊이 병들어 치료하기 어려웠습니다.”
 
  왕이 즉시 내관(內官) 김용기(金龍奇)에게 명해 하구에게 고기를 내려주며 말했다.
 
  “네 어찌 과정(過庭)의 가르침[訓]이 없었으랴? 반드시 상경과 권도의 도리를 통달했을 것이다. 상중에 육식하지 않음과 비록 효자라 하더라도 몸을 망쳐 요절(夭折)하는 것을 비교한다면 어찌 몸이 건강해 제사를 받드는 것과 같겠느냐? 이것이 곧 효도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륜은 태종 16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태종의 말을 보면, 그가 하륜에 대해 “상경과 권도의 도리에 통달했던 재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니 그런 이치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몸을 건강하게 해 아버지의 제사를 잘 받드는 것”이 오히려 가장 큰 효도이며, 이것이 바로 권도라는 말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은 ‘뜰을 지날 때[過庭]의 가르침’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는 《논어》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過庭의 가르침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역시 특이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에 백어가 답했다.
 
  “(그런 특별한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일찍이[嘗] 홀로 서 계실 때 내[鯉]가 종종걸음[趨]으로 뜰을 지나가는데[過庭] ‘시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고 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았으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시를 배웠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실 때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는데 ‘예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하였습니다’고 하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無以立]’고 하셨다. 나는 물러 나와 예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을 뿐이다.”
 
  이에 진항이 물러나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나를 물어서 세 가지를 얻었으니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가 그 아들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구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태종이 말한 ‘과정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예, 즉 사리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無以立]는 말이다. 30세에 이르러야 한다는 바로 ‘이립(而立)’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립은 다시 말하지만 ‘입기이례이입인이례(立己以禮而立人以禮)’의 압축어로 먼저 자기 자신을 사리로써 세우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사리로써 세워준다는 말이다.
 
 
  廢世子
 
  태종 18년 6월 3일은 조선 역사의 방향을 바꾼 운명의 날이다. 양녕의 실행(失行) 패덕(悖德)을 들어 세자 자리에서 내쫓을 것을 건의하는 상소가 이어지자 개경에 머물고 있던 태종은 마침내 6월 3일 자신의 최종 결심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백관들의 소장(疏狀)의 사연을 읽어보니 부끄럽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천명(天命)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내가 이를 따르겠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한상경을 필두로 한 공신들과 6조 판서, 각급 문무(文武)대신들이 조계청(朝啓廳)에 몰려들었다. 조계청은 정승 이하 신하들이 국정을 의논하는 건물이었다.
 
  전날까지 폐세자(廢世子) 상소를 연일 올리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대환영의 조치였다. 하나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폐세자 이후 누가 세자를 이을 것인가? 어떻게 보면 더 큰 문제였고, 자칫 이 과정에서 의외의 희생자가 수도 없이 나올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조계청 안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잠시 후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인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조말생과 그의 직속 부하인 좌대언(左代言・후일의 승지) 이명덕이 조계청을 찾아와 태종의 두 번째 지시사항을 전달하면서 침묵은 깨졌다.
 
  “나라의 근본(세자를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국본[國本]이라고 불렀다)은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만약 정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흉흉할 것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유복자(遺腹子)라도 세워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게 하였고, 또 본부인의 장자(長子)를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법식이다. 양녕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이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작은아이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에 앉히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有故)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을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는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할는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폐세자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양녕의 아들 중에서 후사(後嗣・다음 임금)를 고르겠다는 뜻과 함께 그 아이의 호칭 문제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단은 성리학의 전통적인 종법(宗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마디로 적장자(嫡長子) 상속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擇賢論의 이론적 근거가 權道
 
  태종이 정말 양녕을 폐하고 종법에 따라 양녕의 아들, 특히 다섯 살짜리 장남에게 ‘기계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바를 봐서는 태종이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은 잡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약간은 갈팡질팡한 것이 분명하다. 조선의 장래가 걸린 사안이기 때문에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조계청에서 신하들의 의논이 시작됐다. 양녕의 장남을 후사로 삼겠다는 태종의 입장표명이 있었기 때문인지, 우의정 한상경 이하 모든 신하는 양녕의 장남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 즉 최고위직인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이 조심스럽게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택현론(擇賢論)’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유정현이 더 적극적이었다. 유정현은 무조건 뛰어난 사람을 고르자는 입장이었고, 박은은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옛날 제도에 정해져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뛰어난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조건부 택현론이었다. 다소 궁색한 논리였다. 옛날 제도에 그런 경우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유정현이 한 말이다.
 
  “신은 배우지 못해 고사(故事)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권도와 상경이 있으니 뛰어난 사람을 고르는 것[擇賢]이 마땅합니다.”
 
  택현론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권도였던 것이다. 태종은 다시 조말생을 불렀다.
 
  “나는 제(양녕)의 아들을 대신시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모두 ‘불가하다’고 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어라.”
 
 
  公義로 충녕을 고르다
 
  마음속에 점찍어 둔 충녕대군을 지명하면 될 것을 태종은 다시 이런 식으로 신하들에게 택현의 책임을 넌지시 떠넘겼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정현 등 신하들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이가 없다”며 직접 고르라고 태종에게 선택을 다시 미뤘다. 이들은 왜 이 같은 ‘핑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하들로서는 당연히 뒷날 일이 잘못될 경우의 사태를 걱정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양녕이 부활할 경우 복수의 칼날이 바로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었다.
 
  반면에 태종은 어떤 생각에서 이렇게 한 것일까? 이에 관한 명쾌한 답은 앞서 보았던 박은의 상소문에 나온다.
 
  “뒷세상으로 하여금 전하께서 맏아들을 폐하고 뛰어난 이를 세운 거조(擧措・큰 일)가 공론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리게 하시고, 또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자신이 공론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알게 하여,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게 하는 일입니다.”
 
  양녕의 폐세자는 태종 개인의 순간적 결단이나 신하들의 공모가 아니라 태종과 신하들이 함께 의견을 모은 최종적 결론, 즉 공의(公義)였다는 형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양녕이 되살아날 수 있는 명분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우회적으로 표명하면서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절차를 밟았던 것이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다. 태종은 자신의 최종 결심을 밝힌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의 복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은 국왕 될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벼슬아치들이 사무를 보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정치’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늘 큰일에 헌의(獻議・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그것은 일반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면 몸가짐과 말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하나, 중국 사신에게는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제법 자란 아들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임금 자리)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이에 유정현 등 신하들은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며 화답했다.
 
 
  공자가 제시한 일의 이치, “權道를 발휘하라!”
 
  양녕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종의 일 처리는 정확히 공자가 말한 권도와 합치한다. 공자는 먼저 《논어》 ‘미자(微子)편’에서 여러 뛰어난 이를 언급하면서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들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無可] 불가한 것도 없다[無不可].”
 
  그러면 새로운 상황을 맞아 취해야 할 잣대는 무엇인가? 이 실마리는 《논어》 ‘이인(里仁)편’의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다.
 
  “군자는 천하에 나아가 일을 할 때 오로지 주장함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음도 없으며 (그때그때의) 마땅함[義]에 따라 행할 뿐이다.”
 
  “오로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함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음도 없다”라는 말은, 고스란히 “가한 것도 없고[無可] 불가한 것도 없다[無不可]”라는 말과 정확히 똑같다. ‘마땅함’만이 추가됐을 뿐이다. 그 마땅함은 오랜 수양을 통해 찾고 만들어갈 수 있는 잣대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자한(子罕)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도리를 행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도리를 행하는데 나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함께 (조정에) 설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함께 조정에 설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권도를 행할[與權] 수는 없다.”
 
  더불어 조정에 선다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며, 함께 상경을 행하는 단계다. 그것을 넘어서야 더불어 권도를 행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제로 말하면 판서까지는 상경을 행하는 자리이고 정승이 돼야 비로소 권도를 행할 수 있다. 사리와 사세를 모르고서야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이 권도라 할 것이다. 권도는 특히 사세를 읽을 줄 알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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