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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범의 해상실크로드 기행

동북아 국제무역의 중심지 寧波

樂賓館에서는 고려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글·사진 : 허우범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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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 越나라 때부터 발전한 항저우–닝보 浙東운하의 기점
⊙ 宋, 고려 상인·사신을 위해 高麗貢使館·航濟亭 건립… 닝보 시내 月湖공원에서 高麗使館터 발견
⊙ 신안 해저보물선의 출항지, 조선 성종 때 선비 최부가 표류한 곳

許又範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닝보 시내에 있는 웨후(月湖)공원.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항저우(杭州)를 출발하여 닝보(寧波)로 향한다. 오늘은 며칠 만에 청청(淸淸)한 하늘이다. 하지만 이것도 창밖을 바라볼 때의 상쾌한 풍정(風情)일 뿐, 호텔을 나서기가 무섭게 햇볕이 쨍쨍하다. 오늘 저녁에는 소금기에 전 티셔츠를 세탁해야 하리라.
 
  닝보로 가는 도로변에 운하(運河)가 보인다. 항저우와 닝보를 잇는 저둥(浙東)운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국의 운하는 항저우와 베이징(北京)을 연결하는 징항(京杭)운하를 말한다. 하지만 중국의 내륙을 연결하는 운하는 시안(西安)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된 난베이(南北)운하를 포함하여 크게 세 개로 나뉜다.
 
  중국의 대운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수(隋) 양제(煬帝)다. 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이어 운하 건설에 집중하다가 나라까지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사실 중국의 운하 건설은 춘추시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 때부터 시작됐다. 부차는 창장(長江)과 화이허(淮河)를 연결하는 장화이(江淮)운하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지역별로 만들어진 인공수로들이 시대와 왕조를 거치면서 확장되다가 수 양제 때에 이르러 이들을 연결하는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의 북방은 유목민족들의 차지였다. 남방으로 쫓겨난 한족(漢族)들은 이곳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산을 접하고 남방지역을 새롭게 이해했다. 북송(北宋) 시대의 도읍인 카이펑(開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는 많은 배가 운하를 통하여 남방의 물산을 운반하는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당대(唐代) 이후부터 모든 왕조는 내륙의 수송로인 대운하를 매우 중시했다. 대운하가 막히면 조정으로의 물자조달이 끊어지고 이는 곧 왕조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운하는 오늘도 대륙의 중요한 물류(物流) 수송로로 이용되고 있다.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국제무역 중심지 닝보
 
  닝보는 저장성(浙江省)의 동쪽 창장 하류에 있는 도시다. 융장(甬江)과 위야오(餘姚)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닝보는 상하이(上海), 장쑤성(江蘇省) 및 푸젠성(福建省)의 여러 항구와도 연결된다. 이런 요충지에 위치한 까닭에 닝보는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때부터 발전했다. 당송(唐宋) 시기에는 밍저우(明州)로 불리며 한반도·일본·동남아시아·아라비아 등과의 국제무역 중심지로 부상(浮上)했다. 특히 고대(古代)로부터 신라와 고려 등 한반도와의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닝보의 발전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라인들과도 관련이 깊다. 즉, 해상왕국을 건설한 장보고가 죽은 후, 산둥성(山東省) 덩저우(登州)와 화이수이(淮水) 유역의 추저우(楚州)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재당(在唐) 신라인의 네트워크가 붕괴되었다가, 이곳 닝보에서 새롭게 재편됐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보다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상품교역은 물론 관료와 구법승(求法僧) 등의 원활한 인적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황해의 바닷길을 주도할 수 있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닝보까지의 바닷길은 인천의 능허대, 경기만의 당항성에서 출발하여 황해 횡단항로를 통해 산둥성 덩저우에 도착하고, 이곳에서부터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방법이 오랫동안 애용되어 왔다. 하지만 장보고가 황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중국의 강남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사단항로(斜斷航路)가 개척됐다.
 
  사단항로는 중간 기착지 없이 닝보까지 가는 항로로 직선거리 600km다. 이 항로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이 필요하다. 또한 계절풍과 해류 등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해상활동 경험이 많은 전문가만이 운행 가능한 항로인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개척된 이 항로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항로로 발전했다.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해상교류를 전개했는데, 국제무역항인 예성강의 벽란도와 닝보는 양국 간의 해상교류를 증진시키는 대표적인 항구였다. 고려 사신과 상인들은 사단항로를 통해 닝보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다시 운하를 따라 내륙으로 갈 수 있었다.
 
 
  宋 휘종의 칙령으로 건립한 高麗使館
 
닝보의 항제정은 고려사신 일행을 맨 처음 맞이했던 곳이다.
  1079년 송(宋)나라는 고려 사신과 상인들의 공식 왕래 장소가 된 닝보에 고려공사관(高麗貢使館)과 항제정(航濟亭)을 설치했다. 항제정은 벽란도를 출발한 고려인들이 황해를 건너 닝보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여정을 푸는 곳이었다. 이 장소들은 항만으로 들어가는 해구(海口)인 딩하이현(定海縣)에 있었다. 항제정은 그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만경창파(萬頃蒼波)를 무사히 건너온 고려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장소였다. 고려공사관은 낙빈관(樂賓館)이라고 불렸다. 고려의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며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한 곳이다.
 
  이 두 장소의 설치는 고려와 송나라에 모두 뜻깊은 것이었다. 양국은 994년 이후 사신을 교환하지 못했다. 고려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소진했다. 거란족 이후에는 여진족이 흥기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금(金)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침공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여진족과 거란족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양국은 산둥 덩저우를 오가는 항로가 어렵게 되자 보다 안전한 닝보 항로를 택했다. 고려공사관과 항제정은 양국이 80여 년 만에 교류를 재개하는 시점에 건립된 것이다. 송나라가 고려와의 외교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도를 항저우로 옮긴다. 북송(北宋)의 멸망과 남송(南宋)의 시작이다. 이때에도 송 휘종(徽宗)이 칙령을 내려 고려사관 건립을 지시할 정도였다.
 
  고려인을 맞이하는 규모도 엄청났다. 광더호(廣德湖)에 궁궐 같은 배 두 척과 다양한 시화(詩畵)로 장식한 수상별장용 화방(畵舫)을 100척이나 건조하여 띄워 놓고 고려 사신들을 맞이했다. 남송은 고려를 아주 중요한 외교 상대로 대우했던 것이다.
 
  북송 시기에 건립한 고려공사관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항제정은 최근에 다시 세워 놓았다. 건물 옆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빨간색 글씨로 ‘중한우의(中韓友誼)’라고 쓰인 낙관(落款) 모양의 표지석이 있다. 이곳 유적지를 찾는 사람은 드물지라도 항제정은 약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중 양국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안 보물선의 출항지
 
고려사관 안에 전시된 신안유물선 모형.
  항제정 근처에는 자그마한 자오바오산(招寶山)이 있다. ‘외국으로부터 부(富)와 보물을 불러왔다’는 의미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후타오산(候濤山)이다. 이곳에 정박한 배들이 물때를 기다렸다가 출항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엔 고려를 비롯하여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이 활발하게 왕래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경제는 나날이 발전했고 산의 이름까지도 바뀌게 된 것이다.
 
  딩하이현에 있었던 고려공사관은 찾을 수 없지만, 닝보 시내의 웨후(月湖)공원에 있는 고려사관(高麗使館)은 옛 터 위에 복원된 것이다. 웨후공원을 찾았다. 햇살이 한창 따가운 시간이어선지 사람들이 드문드문하다. 이 공원은 닝보 항구로부터 10여 분 떨어진 곳인데 이름처럼 멋진 호수가 더위를 식혀 준다.
 
  닝보시는 1999년에 웨후공원풍경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송나라 시대의 고려사관 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2006년에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묵었던 사행관을 복원했다. 지금은 고려사관 유적기념관이 되어 고대로부터 이어 온 한중교류의 역사를 알려주는 장소가 됐다.
 
‘외국으로부터 부와 보물을 불러왔다’는 의미를 가진 쟈오바오산(招寶山).
  기념관 입구에는 황금색 비단에 그린 그림들이 화려하다. 당시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닝보항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 사행관인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연회를 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한잔 걸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교왕도(交往圖)의 양쪽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다. 1117년에 송 휘종이 이곳 태수(太守)였던 누이(樓異)에게 칙령을 내려 관청인 고려사(高麗司)와 숙소인 영빈관을 건설토록 지시한 내용과, 그 임무를 완수한 누이가 이를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을 새긴 것이다.
 
고려 사신 일행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그린 〈송–고려 교왕도(交往圖)〉.
  기념관은 3개의 전시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중에 원(元)나라의 선박 모형이 눈에 띈다. 설명을 보니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신안유물선을 재현해 놓았다.
 
  왜 이곳에 신안유물선이 있을까. 이 선박의 출항지가 이곳 닝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밍저우항을 출발한 선박은 고려의 벽란도를 거치고 다시 일본으로 가던 중에 신안에서 침몰된 것이다. 닝보가 송나라 때부터 해상 실크로드를 이끄는 국제적인 도시였음을 이곳 고려사관이 입증하고 있다.
 
 
  “독서도 어렵지만 장서는 더 어렵다”
 
웨후공원 옆에 있는 고려사관(高麗使館).
  공원의 북쪽에는 톈이거(天一閣)라는 장서(藏書)박물관이 있다. 이 장서각(藏書閣)을 만든 주인공은 명(明)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을 지낸 범흠(范欽)이다. 그는 엄청난 애서가(愛書家)였는데 자신이 소장한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 장서각을 지을 정도로 서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손들일지라도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서고(書庫) 출입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톈이거는 입구부터 사람들로 가득하다. 중국인들이 이토록 서적을 좋아했던가. 흥미로운 생각으로 들어서니 청(淸) 건륭제(乾隆帝)가 하사한 삼보(三寶) 특별전(特別展)이 진행 중이다. ‘아, 이것을 보러 온 것이구나!’ 나도 놓칠 수 없어서 전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시장 안에는 관람객이 드물다. 그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톈이거는 2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들 사이로 조성된 정원은 태호석(太湖石)과 수풀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山水)를 압축시켜 놓았다. 게다가 각 시대의 전각(篆刻)들이 어울려 더욱 고아(古雅)한 운치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러한 감흥도 잠시, 입구를 메웠던 사람들이 정원 여기저기에 넘쳐난다. 멋진 풍경을 담느라 서로가 분주하다.
 
  전시된 서적들은 애서가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탐나는 것들이다.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를 살았던 사상가인 황종희(黃宗羲)도 이곳을 둘러보고는, “독서도 어렵지만 장서는 더 어렵다. 특히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게 간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고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니, 귀한 서적을 항상 읽을 수 있었던 주인공은 얼마나 기뻤을까. 서곡(書谷)에서 누리는 행복함은 황제의 자리보다도 더 높았으리라.
 
  닝보의 옛 모습을 살펴보기 위하여 쯔청구전(慈城古鎭)으로 향했다. ‘강남 제일의 옛 마을(江南第一古縣城)’이라는 시쳉구전에 도착하자 명청 시대에 지은 건물들이 보인다.
 
  여러 건축물들을 둘러보다가 ‘쯔청시아오시관(慈城校士館)’이라는 조금은 특이한 건물로 들어섰다. 알고 보니 과거급제(科擧及第)를 위한 특별교육기관이다. 각종 국가고시를 대비하여 특강반을 운영하는 학원들이 근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가. 이 마을에서는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최부의 《漂海錄》
 
전남 무안에는 《표해록》을 지은 최부의 묘와 사당이 남아 있다.
  고대 닝보항은 계절풍과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까닭에 표류의 항구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시대의 최부(崔溥)다. 그는 전남 나주 출신의 선비로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부임했다. 그의 임무는 죄를 짓고 제주로 도망친 자들을 색출하는 일이었다. 최부는 이곳에서 몇 개월 근무하던 중 부친상(父親喪)을 당했다. 급히 고향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16일간을 표류하다가 닝보에 도착했다. 사단항로의 계절풍은 여름에는 한반도 쪽으로 불고, 겨울에는 중국 쪽으로 분다. 해류도 마찬가지다. 최부는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동해안에 표류한 것이다.
 
  중국의 닝보에 도착한 최부는 처음에 왜구(倭寇)로 오해를 받아 호되게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조선의 관료이자 사대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대운하를 통해 베이징까지 호송되어 당시 명나라 황제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했다. 이후 만주지역과 의주를 거쳐 6개월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최부는 성종의 명(命)을 받아 자신의 표류기를 상세하게 적어 보고했다. 그가 지은 책인 《표해록(漂海錄)》은 명나라의 초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최부의 기록에는 당시 중국인과 조선 선비의 랴오둥(遼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그가 산둥 지역에 이르렀을 때 랴오둥 출신 상인인 진비(陳圮)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최부 일행에게 술과 떡 등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대접하며 말하기를, “우리 랴오둥은 귀국과 이웃했으므로 그 두터운 정이 한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약소한 물품을 가져왔다”면서 사례했다.
 
  이에 최부는 “귀하가 사는 곳은 곧 옛날 고구려의 도읍지였습니다. 고구려는 지금 우리 조선의 땅이 됐습니다.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마다 다른 점이 있지만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고 했다. 즉,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랴오양(遼陽)에 있었고 이 사실에 대해서 양국이 모두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최부가 랴오양에 도착해서도 나타난다. 랴오양에서 만난 계면(戒勉)이란 승려는 자신의 조부가 조선에서 도망친 이래 랴오양에서 3대째 살고 있었다. 그의 말 중에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지인데 중국에게 빼앗겨 소속된 지가 1000여 년이나 됐다”고 했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15세기 조선과 명나라 지식인들은 ‘랴오양=고구려의 옛 도읍지’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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