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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21세기 시민혁명과 언론 ⑧ 네팔

네팔 국민과 언론은 피로써 ‘독재 왕정’을 무너뜨렸다! 그들이 직면한 ‘마지막 결전’은 공산주의와의 싸움?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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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의 무차별 살육전을 수습하고 즉위한 갸넨드라 국왕이 벌인 ‘왕정 독재’
‌⊙ 2005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일삼은 갸넨드라 국왕의 비참한 말로
⊙ 240여 년간 이어온 왕정 폐지 두고 대립한 네팔 정치권
⊙ 갸넨드라 국왕에 맹렬히 맞선 ‘네팔기자연맹(FNJ)’의 활약상
⊙ 최근 들어 ‘왕정 복고’ 여론이 나오는 이유는 ‘종교’ 때문
⊙ “지금 네팔에서 공산당은 이름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왕정과 싸운 한 네팔 언론인의 당부 “문재인 대통령만큼은 감옥에 가지 않아야…”
2008년 6월 11일 카트만두 나라얀히티 궁전을 떠나는 갸넨드라 국왕. 사실상 폐위된 갸넨드라 국왕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고, 240여 년간 이어진 왕정은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뉴시스
  ‘히말라야’ 산맥을 안고 있는 인구 2938만, 면적 15만km2의 네팔은 한때 왕정(王政) 국가였다. 240여 년간 이어오던 왕정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민중봉기로 2008년 무너지고 말았다.
 
  왕정 붕괴의 시작은 ‘철권통치’의 상징인 갸넨드라 국왕이 즉위하면서부터다. 갸넨드라 국왕은 즉위 과정이 다소 비정상적이었다. 그의 등장은 2001년 발생한 ‘왕실 총격전’에서 비롯된다. 2001년 6월 1일 밤 카트만두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의 총격으로 부왕(父王)이자 당시 네팔의 국왕이었던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쉬와랴 왕비 등이 사망한다. 그 후 디펜드라 왕세자는 자결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뇌사 상태에 빠진다.
 
 
  왕실의 비극… 디펜드라 왕세자의 무차별 살육
 
디펜드라 왕세자에게 살해당한 비렌드라 국왕 내외.
  왕실의 후계자가 아직 살아 있었기에 왕실의 자문기관인 네팔 국가평의회는 사망한 비렌드라 국왕의 뒤를 이어 디펜드라 왕세자가 국왕 자리에 올랐다고 선언한다. 당시 네팔 언론은, 디펜드라 왕세자가 왕비와 자신의 혼사(婚事) 문제를 논의하다가 이견이 생겨 왕실 일가에 무차별 총기를 난사했다고 전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영국의 명문(名門) 이튼칼리지에서 수학할 정도로 전도가 유망한 인물이었다.
 
  디펜드라 국왕은 국왕 자리에 오른 지 4일 만에 결국 사망했다. 네팔 왕정의 최단기 국왕으로 기록된 디펜드라의 후임은 숙부인 갸넨드라였다. 속전속결로 갸넨드라가 국왕 자리에 오르자, 네팔 국민을 비롯한 외신들은 총격 사건의 배후에 갸넨드라가 있다는 식의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의 내용도 각양각색이었다. UPI통신은 자결을 시도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실제로는 “‘누군가로부터 총탄에 맞았다’는 소문이 카트만두에 퍼져 있다”고 전했다. 영국 BBC는 ‘네팔뉴스닷컴’을 인용해 디펜드라 국왕이 총을 난사한 뒤 자결을 시도할 때까지 왕실 경호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비렌드라 전(前) 국왕 부처 등 왕족 8명의 시신을 각국 조문사절이 도착하기 전인 2일 오전 서둘러 화장(火葬)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부 당국자들의 ‘말 바꾸기’도 도마에 올랐다. 당국은 디펜드라 왕세자(당시)의 범행설을 간접적으로 밝혔을 뿐, 공식 발표는 없었다는 것이다. 국왕에 추대되기 전인 6월 2일 갸넨드라는 “‘돌발적인 총기 사고’로 왕실에 변이 일어났다”고만 밝혔다. 그 후 ‘디펜드라 왕세자가 주범’이라고 발표했던 네팔 내무부와 람 찬드라 파우델 부총리는 4일 각각 “발표를 철회한다”거나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한발 물러서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결국 이날 총격 사건의 진상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왕실 총격’의 배후로 지목받은 갸넨드라… 진실은?
 
  갸넨드라의 국왕 즉위 이후, 네팔 국민들은 ‘갸넨드라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카트만두에서만 수천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를 겨냥해 발포, 14명이 부상했고 극렬 시위자 450여 명을 체포해 압송하기도 했다.
 
  언론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6월 5일 경찰은 네팔 언론사 중 하나인 ‘칸티푸르’의 간부를 체포했다. 갸넨드라 국왕이 ‘왕실 몰살 사건의 주범’이라는 요지의 글이 이 일간지 여론면에 실렸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오쩌둥(毛澤東)주의 반군 지도자인 바부람 바타라이가 쓴 이 칼럼에는 ‘이번 사건(왕실 총격전-기자 주)에 정치적 음모가 있으며 인민과 군인들은 갸넨드라 신임 국왕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즉위 초부터 정통성 시비를 겪어온 갸넨드라 국왕은 이처럼 재위 기간 내내 언론을 극렬히 탄압했다.
 
  2002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9월 9일부터 12일까지 IPI 네팔언론자유조사단 활동에 나섰다. 당시 요한 프리츠 IPI 사무총장, 닐스 오이 노르웨이 편집인협회사무총장, 터키 후리에트지(紙)의 페라이 딩크 외신부장 등이 네팔의 정계와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 왕실의 언론 탄압의 실태를 조사한 것이다. 당시 IPI는 100여 명의 네팔 언론인이 갸넨드라 체제하에서 탄압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반(反)갸넨드라 노선을 공식적으로 천명해 온 마오쩌둥주의(마오당) 반군도 갸넨드라 체제와 대립하며 반목을 거듭했다.
 
  갸넨드라 국왕은 마오당 반군을 축출하기 위해 2005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입법부를 해산시키고, 실질적인 행정수반인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총리와 장관들은 해임된 뒤 가택연금됐고, 무장 병사들이 총리와 정치인들 집을 포위했다. 그로 인해 갸넨드라 국왕은 야당과 마오당 반군의 강한 반발에 직면, 2006년 4월 강력한 퇴진 압력을 받았다. 이때에도 20만명에 달하는 네팔 국민이 거리로 나와 갸넨드라 국왕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가 군경(軍警)과 충돌,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철권통치’ 휘두른 갸넨드라, 민중봉기로 왕권 박탈
 
왕정이 존속하던 시절 사용됐던 왕궁. 왕정이 무너진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결국 그해 5월 네팔 의회는 국왕이 보유했던 군대 통수권과 면책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어 6월에는 국왕의 법안거부권과 판사 및 육군 원수에 대한 인사권, 왕위 계승자 임명권 등도 폐지했다. 궁궐터와 임야를 포함해 1729헥타르(약 523만 평)를 소유했던 국왕 및 왕실 토지 또한 몰수했다. 이 조치에 네팔 국민들은 환영했다. 네팔인들은 이때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일컬어 ‘승리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갸넨드라 국왕의 왕권은 축소되긴 했으나, 왕좌에서 물러나진 않았다. 2007년 12월 네팔 민주당 등 6개 정당연합체를 비롯한 마오당은 군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협약을 체결하고 성명을 통해 “네팔은 연방 민주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왕정 폐지 여부를 놓고 대립이 있었다. 일부 정당은 유서 깊은 왕실을 유지하는 입헌군주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의견을 내놨는데, 마오당은 왕정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왕정 폐지로 가닥이 잡혔고, 2008년 6월 네팔 제헌의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제 도입을 공식 선포했다.
 
  2년 전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빼앗겼다면, 이때에는 왕실의 상징성마저 박탈당했다. 지폐에 새겨진 왕의 초상은 지워졌고 국가의례에서 왕과 왕정을 상징하는 표현도 삭제됐다. 카트만두 시내에 위치했던 왕궁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갸넨드라 국왕은 왕관을 반납하고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비판 언론인’ 비쉬누 니스트리 “갸넨드라 국왕 즉위 후 22일간 구금”
 
왕궁 앞 도로. 2001년 6월 갸넨드라 국왕이 즉위했을 당시, 그에 분노했던 시위대와 군·경찰이 대치했던 장소다.
  지금부터 만나볼 비쉬누 니스트리(55·Bishnu Nisthuri)와 타라 나스 다할(56·Tara Nath Dahal)은 갸넨드라 국왕 시절 탄압을 받은 대표적인 언론인이다. 이 중 비쉬누 니스트리는 원래 고등학교에서 예술을 전공했다. 그는 1992년 미국 공보원(USIS)이 개설한 ‘기자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인도 뉴델리에서 ‘저널리즘 심화 과정’을 연수한 뒤 본격적인 기자의 길로 투신했다.
 
  이후 《안투 이얌》지(誌) 실무 편집장, 《히말라야 타임스》 편집장, 《스페이스 타임》 실무 편집장 등을 거쳤다. 1998년부터 네팔기자연맹(FNJ) 실행위원을 역임한 비쉬누 니스트리는 2005년 5월 제21차 네팔기자연맹 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됐다. 네팔기자연맹에 몸담으면서 그는 갸넨드라 국왕의 언론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다.
 
  지난 8월 18일 카트만두 시내 안나푸르나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짧은 머리에 수수한 차림으로 나온 비쉬누 씨는 인상 또한 평범했다. 인터뷰 초반엔 다소 경직돼 있었지만, 이야기가 무르익자 간간이 미소도 내비치며 답변에 임했다. 비쉬누 니스트리와 나눈 문답이다.
 
  ─ 비렌드라 국왕 내외와 디펜드라의 죽음에 ‘갸넨드라가 개입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어디까지 사실인가.
 
  “당시 비렌드라 국왕의 평판은 좋았습니다. 네팔뿐 아니라 남(南)아시아 지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국왕 내외 암살에 갸넨드라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사실 발견된 게 없습니다. 갸넨드라가 디펜드라를 사주했다는 것도 드러난 바가 없습니다. 정황상 그런 음모론이 제기됐을 뿐, 확실한 건 아닙니다.”
 
  ─ 갸넨드라가 국왕에 즉위한 후 언론 탄압이 거셌는데, 그 방식은 어땠나.
 
  “말로만 위협을 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갸넨드라 국왕은 ‘반갸넨드라’ 매체에 군인들을 보내 해당 기자와 간부를 연행했습니다. 이는 그의 즉위 초부터 자행된 일이었습니다. 저도 갸넨드라 국왕이 즉위한 지 겨우 4일 만에 22일간 구금됐으니까요. 가족들은 제 행방을 몰랐죠. 제 기억에 즉위하자마자 20~25명의 네팔 기자들이 체포된 걸로 압니다. 인신구속 등 육체적인 억압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경우는 없던 걸로 압니다. 다만 마오당 노선을 추종한 기자 중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처럼 비쉬누 씨가 당국에 의해 끌려갈 무렵, FNJ의 마헨드라 비스타 사무총장, 재무 담당 헤만타 카플리 등도 체포·구금을 당했다.
 
 
  ‘정치인들은 갸넨드라 국왕 눈치 봤다’
 
  ─ 갸넨드라 국왕 즉위 전, 당신과 ‘네팔기자연맹’은 혹시 친(親)왕정 노선은 아니었나.
 
  “비렌드라 국왕 재위 기간 중 네팔 헌법은 왕정을 지지하는 법이었습니다. 네팔 시민들은 네팔 국왕을 지지했고, 그에 따른 헌법도 준수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국회의원 선거도 치러지는 등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네팔기자연맹)가 왕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게 아니라 헌법을 근거로 지지한 것이죠. 갸넨드라 국왕 재위 시기엔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연맹 자체도 탄압을 받았지만, 탄압받는 언론인들을 보호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연맹은 갸넨드라 국왕이 왕정 독재를 천명한 이후, 민주주의의 정착과 그 어떠한 독재도 반대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국왕이라도 헌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 2005년 갸넨드라 국왕은 ‘절대왕정’을 선언, 입헌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독재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네팔 정치세력은 어떤 입장을 취했나.
 
  “갸넨드라 국왕이 독재를 선언한 그 즉시 FNJ는 ‘왕정 독재’에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FNJ는 일부 인권단체와 손을 잡고 왕정 독재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조용히 있었습니다. 아마도 정치인들은 ‘왕이 오랫동안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FNJ가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자 정치인들도 같이 행동에 나섰지만 그전에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 갸넨드라 국왕 통치 시절, 이른바 ‘왕당파’(어용) 언론들의 보도 양상은 어땠나.
 
  “사실 갸넨드라 국왕을 지지하는 언론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네팔텔레비전’ ‘내셔날 뉴스에이전시’ 등 국영 매체 네 개가 있었는데, 필연적으로 이들 언론사는 왕정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 나머지 민영 언론들은 대체로 왕정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예를 들어 ‘칸티푸르(Kantipur)’사가 왕정에 가장 극렬히 반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팔 일각서 제기되는 ‘왕정 복고’ 여론에 대한 비쉬누의 견해는?
 
  ─ 마오당 세력은 반갸넨드라 노선을 지향한 것으로 아는데 이들이 네팔 정계에 주도적으로 등장한 계기는 무엇인가.
 
  “갸넨드라 왕의 독재가 가속화되고, 의회를 해산하자 정치인들은 ‘무너진 의회를 다시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네팔 민주당의 기리자(Girija Prasad Koirala·1925~2010·네팔 총리 역임)와 같은 정치인입니다. 민주당과 함께 마오당은 왕정 독재에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특히 마오당은 갸넨드라 왕정을 겨냥해 무장투쟁도 전개하는 등 매우 극렬하게 반대했는데 왕정이 약해지고 제도 정치권에 들어오면서 다소 온건해졌습니다. 왕정 붕괴와 맞물려 2008년 제헌의회 구성 당시 제1당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갸넨드라 왕정을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당들이었다고 (네팔) 국민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 당신을 포함한 ‘네팔기자연맹’은 마오당과 우호적인 관계였나.
 
  “FNJ는 마오당과 특별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FNJ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게 본연의 목적이었고 가장 중요했습니다. FNJ가 직접 나서서 어느 당에 우호적이거나 비난하거나 지지하는 역할을 하진 않았습니다. 우리(FNJ)는 연맹 지도부를 투표로 선출했기 때문에 어느 정파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 최근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왕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지금도 있고 그때도 있었습니다. 과거 헌법에는 네팔이 힌두 국가라고 국교(國敎)가 명시돼 있었지만, 지금은 종교의 자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힌두교인 나라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일부 정치인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니 힌두교도들은 ‘왕정이 있었다면 (국교가) 유지됐을 텐데’ 하고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기는 합니다. 왜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헌법을 개정했느냐는 것이지요. 왕정에 대한 미련은 대부분 종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왕정의 필요성, 다시 말해 입헌군주제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촛불혁명은 대통령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좋은 사례”
 
비쉬누 니스트리.
  이 대목에서 비쉬누 씨는 두 차례에 걸친 제헌의회 선거 과정에 아쉬움을 표했다. 첫 번째 제헌의회 선거는 왕정이 종식되던 2008년, 두 번째는 5년 후인 2013년 치러졌다. 첫 번째 선거에서 주요 정당을 물리치고 마오당이 제1당이 되었다. 제헌의회의 역할은 헌법 제정과 정권을 인수하는 작업이었다. 마오당은 권력을 잡은 후 ‘제도개선’이라는 명목하에 권력을 남용,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마오당은 민족 중심의 연방 구조를 꿈꿨지만 다른 정당들이 이를 반대한 것이다. 2년 기한의 제헌의회는 2년을 연장했고 다시 1년을 연장, 총 5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결국 헌법을 만들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마오당의 바부람 수상은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선거 날짜를 지정했다. 마오당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제대로 된 의회 구성이 어렵다고 판단, 마오당 외의 정당들이 대법원장을 임시정부 수상으로 선출, 선거에 참여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두 번째 제헌의회 선거를 하게 되었다. 비쉬누 씨는 이 과정에서 “국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며 네팔의 헌정체제와 종교에 대한 물음이 설문조사에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설문조사에 대한 결과를 당국이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제헌의회 구성과 헌법 제정 과정에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비쉬누의 주장이다.
 
  그에게 2016~2017년간 이어진 이른바 ‘촛불혁명’에 대해 물어봤다. 비쉬누 니스트리의 말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촛불혁명’)은 대통령도 부패를 저지르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좋은 사례입니다. 국민들이 정치인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는 건 매우 부러운 일입니다. 법치국가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촛불혁명’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특히 한국은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정치에 반영하는, 민주주의에 있어 매우 뛰어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문 대통령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훌륭한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인데, 그냥 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을 위해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네팔에서 공산당은 이름뿐…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북한은 전 세계 국가 중 사실상 유일한 ‘1인 지배 체제’이자 전례 없는 ‘3대 세습 체제’이다. ‘언론 자유도’ 역시 세계 최하위다. 북한에 대해 비쉬누 니스트리는 사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기자로서 북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보장해야 합니다. 타국의 국민으로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의 독재체제에 대해선 절대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북한 정권도 시민들에 대한 억압을 청산하고, 세계의 흐름대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나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경제체제도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왕정 독재와 마오당의 전횡을 극복한 네팔과 네팔 언론이 ‘반공산주의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비쉬누 씨는 “네팔에 있어 공산주의는 한 정당의 이념노선에 불과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은 하나의 정당에 불과합니다. 당과 당의 연합으로 공산이 출현할 수도, 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네팔에는 헌법이 있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당에서 국회의원들이 선출된 상태입니다. 이들이 정권을 이끌 때, 시민들은 그들이 부여된 권력을 어떻게 쓰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산당은 이름만 있을 뿐, 네팔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비판 언론인’ 타라 나스 다할, 갸넨드라 ‘폭정’ 당시 유엔 사무실로 피신
 
타라 나스 다할.
  타라 나스 다할도 비쉬누 니스트리와 함께 갸넨드라 국왕의 독재체제에 맹렬히 저항했던 언론인이다. 대학 시절 타라 씨는 법학을 전공했다. 그때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싹텄다고 한다. 왕정체제하에서 일반 국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알고 국민의 목소리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언론에 투신했다는 게 타라 씨의 설명이다.
 
  그는 비쉬누 니스트리가 언급했던 반갸넨드라 매체 ‘칸티푸르’에서 8년간 일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곳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면서 네팔 국영언론의 이른바 ‘친(親)정부 보도’에 거부감을 가진 적도 있다고 한다. 갸넨드라 국왕의 폭정이 거세질 무렵 그 역시 비쉬누와 마찬가지로 네팔기자연맹(FNJ) 소속이었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은 대략 이러했다.
 
  “갸넨드라 국왕이 네팔 국민들의 인권을 말살하고 억압을 해 언론인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멀쩡한 헌법도 사문화(死文化)했습니다. 그런 폭정 가운데 저는 갸넨드라 국왕을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네팔 경찰들로부터 수배를 받아 저는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자 제 가족을 억류하는 등 극심한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그때 카트만두 내 유엔(UN)센터에 피신해 있었는데, 유엔(UN) 측은 제게 몰래 무선전화를 줬습니다. 네팔의 폭정을 전 세계에 알려달라는 취지였습니다.”
 
  ─ 갸넨드라 국왕 이전(以前)의 왕정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나.
 
  “사실 갸넨드라 왕이 독재를 선언한 2005년 직후에도 잠시나마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는 있었습니다. 그 당시 네팔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여러 정당의 공통된 의견은 헌법대로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국왕이 독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는 갸넨드라 국왕 체제 이전엔 대체로 국정이 평온하게 운영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일례로 1996년부터 네팔 정부군과 마오당 반군이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정당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네팔도 한국처럼 공화정을 해야 한다!”
 
  ─ 2005년 5월 3일부터 ‘네팔기자연맹’은 총회를 개최, 왕정의 억압에 대한 도전을 선언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논의됐나.
 
  “기자연맹 총회에서 네팔도 한국처럼 ‘공화정(共和政)’을 해야 한다고 해 그와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갸넨드라 국왕이 재위 시 말살했던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를 다시 회복하자는 결의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강하게 이 같은 주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기억에 남는 게 ‘피스 앤 데모크라시(Peace and democracy)’를 설립한 것입니다.”
 
  타라 씨의 설명에 따르면, 국왕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시키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피스 앤 데모크라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피스 앤 데모크라시’는 몇 개의 단체로 구성됐는데, 네팔기자연맹을 비롯해 네팔의료연맹, 네팔 변호사연맹, 네팔 엔지니어연맹, 교사 및 교수협회라고 한다. 네팔의 헌정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일종의 자문 조직 같은 것이었다. 타라 씨는 “그 후 피스 앤 데모크라시는 75개 지역에 조직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타라 씨는 마오당에 대해 비쉬누 씨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마오당이 갸넨드라 국왕 체제에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맞지만, 왕정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마오당 이외의 다른 정당과 ‘피스 앤 데모크라시’ 같은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더 컸다는 주장이다. 마오당에 관한 타라 씨의 설명이다.
 
  “외부에선 갸넨드라 국왕의 퇴진 운동에 마오당만이 참여한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정당도 국왕 퇴진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다만,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마오당이 네팔의 민주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결과 왕정이 무너졌다는 점은 평가해 줄 만합니다.”
 
 
  북한에서의 혁명 가능성은?
 
  ─ 왕정 폐지는 네팔인들 입장에서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에 흠이 가는 것인데,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했나.
 
  “국민투표(2007년)를 거쳐 그 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왕정 폐지를 국민들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당 간의 협조를 통해 의회에서 그 같은 결론을 냈으니 민주화를 열망했던 네팔 국민 입장에서는 (왕정 폐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죠.”
 
  ─ 만약 왕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할지 모르는 부작용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나.
 
  “갸넨드라 왕이 실정(失政)을 하지 않았다면 네팔도 일본처럼 안정적인 입헌군주국이 됐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왕(갸넨드라)이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그 같은 민중봉기로 왕정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왕정 종식의 원인을 국왕 스스로가 제공한 셈입니다.”
 
  ─ 북한에도 네팔처럼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2001년에 판문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난 4월 27일 남북한 정상이 그곳에서 만났다고 하니 저도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판문점에서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봤는데, 웃음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자유와 정보가 단절돼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 주민들이 처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네팔처럼 혁명이 일어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네팔보다 상황이 더 안 좋기 때문입니다.”
 
  타라 씨는 남북통일에도 제법 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하고 북한은 두 개의 나라가 아니다. 반드시 통일이 됐으면 한다”고 앞장서 말하기도 했다. 타라 씨는 “남북통일은 당연히 대한민국 헌법으로의 통일, 즉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라 씨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뉴스로 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사례를 지적하며 “문 대통령만큼은 감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 가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한국과 네팔 관계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며 “발전한 나라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계속 네팔과 우의(友誼)를 다졌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왕정과 싸워 이룬 민주화, 이제는 공산주의와 싸울 차례인가?
 
2016년 3월 21일 네팔의 카드가 프라사드 올리 총리(왼쪽)가 중국의 리커창 총리와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조약 서명식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비쉬누 니스트리와 타라 나스 다할 모두 언론인으로서 네팔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그들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네팔의 언론 상황은 이들의 바람과는 다소 엇나가는 듯하다.
 
  네팔 정부는 지난 8월 17일 기밀정보 공유를 위법으로 간주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사생활 관련 정보가 담긴 기사를 보도하거나 녹음 혹은 촬영을 허가 없이 할 경우 최대 3년의 징역 및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다고 한다.
 
  네팔 언론계 인사들은 “기자들의 취재 및 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반대의견에 편협한 시각을 가진 정부가 이 법을 통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잠재우려 한다”며 비판했다. 네팔기자연맹 고빈다 아차리아(Govinda Acharya) 회장도 “이 법은 기자들을 침묵시키고 탐사보도를 막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AFP’ 인터뷰에서 말했다.
 
  네팔의 현 총리는 친중(親中)·친(親)공산주의 성향의 카다 프라사드 올리(Khadga Prasad Oli)다. 카다 총리는 중국뿐 아니라 쿠바, 라오스, 베트남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5월과 6월, 9월에 세 단계에 걸쳐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온건 공산당과 마오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과연 네팔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공산주의로부터 언론의 자유도 수호할 수 있을까. 왕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네팔 언론은 이제 공산당과의 결전을 남겨두고 있는 듯하다.⊙
 
박영식 주(駐)네팔 한국 대사 인터뷰
 
  “고교 제2외국어 과정에 ‘한국어’ 포함되도록 네팔 교육부와 협의 중”
 
  지난 8월 22일 카트만두 시내 한 식당에서 박영식(53) 대사와 만나 한국-네팔 관계의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청취했다. 지난해 4월 부임한 박영식 대사는 1989년 외무부에 입부(외무고시 23회)해 주(駐)태국1등서기관, 자유무역협정 상품무역 규범과장, 주호주 참사관,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관 등을 역임했다.
 
  박영식 대사는 네팔인들의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을 꽤나 인상 깊게 보았다고 했다. 박 대사의 설명에 따르면, 네팔엔 여러 민족이 한데 섞여 있고 그들 고유의 언어가 따로 있다고 한다. 네팔인들은 어릴 때부터 이들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네팔어와 영어는 물론 셀파어, 힌두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박영식 대사는 “네팔과 한국을 이어주는 건 한국에 유입되는 네팔 근로자”라며 네팔인들을 상대로 한 한국어 교육에 특별히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네팔 근로자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려면 한국어 능력시험을 봐야 합니다. 올해 한국어 능력시험에 신청한 네팔인이 8만3000명, 실제 시험을 치른 네팔인은 7500여 명이었습니다. 그중의 10분의 1만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박영식 대사는 “이렇듯 경쟁률이 치열하기 때문에 네팔인들은 한국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다. 그 덕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했다. 박 대사는 “우리의 목표는 네팔 고등학교 제2외국어 과정에 한국어가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네팔 교육부와 협의 중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류(韓流)가 전파되려면 결국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쏟고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 주네팔 대한민국 대사관은 주기적으로 K-POP과 한식(韓食) 관련 행사를 해오고 있다. 특히 2년에 한 번씩 외교부·KBS 공동으로 ‘케이팝 월드 페스티벌(KWF)’을 주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전 재외공관을 통해 각 나라의 가수 및 댄스팀을 심사를 거쳐 선발하다고 한다. 몇 년 전 네팔팀이 이 행사의 파이널 단계까지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박영식 대사는 “그 덕에 네팔에 케이팝이 널리 알려졌다”고 말했다. 박 대사는 앞으로도 더 적극적으로 한류 전파에 나설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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