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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30〉 신생국 조선을 설계한 두 奴婢 이야기

“박자청은 수도 한양을 만들었고 장영실은 그곳을 ‘과학 조선’의 産室로 만들었다”

글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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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비 출신 박자청, 성실함으로 이성계의 눈에 들어… 그 아들 태종 이방원이 본격 등용
⊙ 정도전이 그린 ‘한양 설계도’를 현장에서 만든 것이 박자청
⊙ 경복궁·창덕궁·한양도성 등 박자청 손 안 거친 것 없어… 경회루와 창덕궁 금천교는 최고의 명작
⊙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태종의 헌릉이 마지막 건설…헌릉 만든지 1년 뒤 사망
⊙ 장영실은 중국 元나라 후손… 경남 동래현 관노로 일하다 재능 인정받아 발탁
⊙ 세종이 원한 천문관측기기와 자격루 등 개발한 그를 양반들은 질시했다
⊙ 세종이 타던 어가가 부서지며 몰락… 곤장 80대 맞은 뒤 역사에서 사라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역대 조선의 국왕들은 정전인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머물기를 더 좋아했다.
  중국 베이징(北京) 자금성(紫禁城)이나 영국 버킹검궁, 프랑스 베르사유궁을 보고 감탄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궁궐(宮闕)의 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다.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운궁(慶運宮), 경희궁(慶熙宮) 같은 5대 궁궐이 한 공간에 모인 건 우리가 유일하다.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일제가 개칭한 것이다.
 
  여기에 창덕궁・창경궁 맞은편에 종묘(宗廟)가 있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제왕과 저세상으로 간 임금들이 이승과 저승의 지척에서 교감하는 묘한 도시가 서울인 것이다. 우리 궁궐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데 이 전통은 백제 때부터 유래됐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本紀)에 온조왕 15년, 즉 기원전 4년의 백제 궁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新作 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조선의 궁궐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고려가 멸망한 후 새 왕국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그는 분명 《삼국사기》에 등장한 백제 궁궐에 대한 기록을 숙독했던 게 분명해 보인다.
 
  “궁원(宮園)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정도전의 미학(美學)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설계자 정도전 뒤에는 박자청(朴子靑·1357~1423)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박자청은 원래 황희석의 가인(家人), 즉 머슴이었는데 내시(內侍)로 출사했다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했으며 나중에 참찬의정부사까지 승진했다.
 
돈화문을 지나면 진선문이 보인다. 그 사이가 금천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선은 역사상 드물게 노비(奴婢)의 수가 가장 많았던 나라다. 노비 문제로 망한 고려를 교훈 삼아 조선 태조와 태종은 능력 있는 노비를 등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신분제는 더 강고해졌다. 그렇다면 박자청은 어떻게 연어가 거센 물결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듯 출세가도를 달렸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따라가 본다.
 
  〈세종실록〉에 세종 5년 11월 9일, 즉 박자청이 죽은 해에 박자청 졸기(卒記)가 나온다. ‘황희석의 가인으로 내시로 출사했다가 낭장에 올랐다.’ 여기 등장하는 황희석은 고려 말의 무관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했다가 우왕 때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는 1388년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해 1389년 ‘회군(回軍) 공신’에 책봉됐다.
 
  박자청의 이름이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7년, 황희석이 중군도총제라는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 ‘박자청은 황희석의 보종(步從), 즉 수행원 출신이다’라는 기록이 처음이다. 이것을 보면 박자청은 이성계 휘하에 있던 황희석을 따라다니다 이성계의 눈에 띄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태조 2년, 즉 1393년 박자청은 결정적인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
 
  그날 박자청은 궁궐을 지키는 입직군사였는데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개국 1등 공신인 의안대군 이화가 입궐하려 했다. 그때 박자청은 “태조의 소명(召命)이 없었으니 입궐할 수 없다”고 앞을 막고 나섰다. 화가 난 이화가 박자청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으나 박자청은 끝까지 그의 출입을 막았다. 이 일이 며칠 후 이성계에게 알려졌고 이성계는 이화를 불렀다.
 
  “옛날에 주아부(周亞夫)의 세류영(細柳營)에서는 장군의 명령만 듣고 천자의 조서도 통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박자청이 대군(大君)을 막은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고 네가 한 행동은 잘한 게 못 된다”며 꾸짖었다. 주아부는 중국 한나라 개국공신 주발의 아들로 세류영이라는 군영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한 문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금천교 오른쪽의 장식물은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세류영을 지키던 군사는 황제가 왔음에도 “군중(軍中)에서는 장군의 명만 듣는다”고 했다. 그제서야 한 문제는 장군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이 왔음을 밝히고 세류영에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주아부는 천자 앞에서도 “갑옷을 입은 사람(군인)은 절을 하지 않으니 군례(軍禮)로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장군’이라고 칭송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성계는 박자청을 일약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켰다. 이후에도 박자청은 이성계가 군막에 머물 때마다 새벽까지 자지 않고 순찰을 돌면서 경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감동했을 것이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추운 겨울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속에 안고 체온으로 따뜻하게 데워 감동시킨 일화와 비슷해 보인다.
 
  결국 이성계는 박자청을 1395년 원종공신으로 책봉했다. 노비 출신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박자청의 진짜 재주는 이것이 아니었다. 실록에는 태종 이방원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박자청을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토목 역사(役事)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어 태종은 박자청이 완성했거나 진행하는 토목공사를 거론한다.
 
  “박자청이 만든 송도(松都·개성)의 경덕궁(敬德宮)과 한양의 창덕궁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요, 모화루(慕華樓)와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위한 곳이요, 개경사(開慶寺)와 연경사(衍慶寺)는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를 위한 곳이다. 성균관을 짓고 행랑을 세우는 것 또한 나라에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그러면서 태종은 박자청을 처벌하자는 주장에 개탄했다.
 
  “박자청은 부지런하고 삼가서 게을리하지 않은데 도리어 남에게 미움을 받으니 불가한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박자청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왕까지 나서 변호를 하게 만든 것일까. 1412년 5월 14일 형조는 태종에게 공조판서였던 박자청의 죄를 청했다. 공조판서는 정2품의 고관인데 그가 받은 혐의는 종5품 부사직(副司直) 이중위(李中位)를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즉 박자청이 도성 축조 공사를 감독하고 있는데 이중위가 말을 타고 지나가며 인사를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박자청이 이중위를 때렸다는 것이다. 이에 박자청은 “때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목격자들도 전부 “이중위를 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형조는 오히려 “대신(박자청)에게 아부하는 자들도 모두 죄를 주어야 한다”고 태종에게 주청했던 것이다.
 
창덕궁의 회랑은 정연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태종은 이 해프닝의 본질이 ‘신분관계’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박자청은 외롭고 혼자인 사람으로 대가거족(大家巨族)이 아닌데 어찌 그에게 붙을 사람이 있겠는가? 박자청은 태조 때부터 성실하게 오랫동안 근무해서 지위가 대신에 이르렀는데 사소한 일 때문에 사헌부, 사간원, 형조(이를 삼성·三省이라 한다)가 모두 나서는가?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
 
  박자청이 세운 건물은 앞서 말한 송도의 경덕궁, 한양의 창덕궁과 모화루, 경회루, 개경사, 연경사 외에 경복궁 남쪽에서 종묘까지 이어지는 행랑(行廊), 동대문 밖에서 말을 키우는 마장(馬場·지금의 마장동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연희궁(延禧宮), 태조의 건원릉,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 용산 군자감, 청계천 준설과 호안 공사, 한양 도성, 살곶이다리 등이 있다. 이 건물들에 하나같이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 소개할 것은 1412년 경회루를 지을 때 얘기다. 박자청이 전무후무한 2층 누각 경회루를 지은 것은 태조의 명에 의해서였다. 태조는 원래 정전(正殿)인 경복궁에 거처해야 했는데 그곳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등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아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 즉 터가 불길하다며 박자청에게 창덕궁을 지으라고 했다.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비로소 이성계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어찌 경복궁을 헛것으로 만들고 쓰지 않겠는가. 조정의 사신이 오는 것과 성절(聖節·중국 황제의 생일)의 조하(朝賀)하는 일 같은 것은 반드시 이 경복궁에서 하기 위해서 때로 기와를 수리하여 기울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편전, 즉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다. 인정전은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한국 궁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태조는 박자청에게 경회루를 짓게 하고 연못을 팠는데 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가득 차지 않았다. 이에 박자청은 연못의 물을 모두 빼낸 다음에 물이 스며든 곳을 검은 진흙으로 메우면 물을 고이게 할 수 있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건축에 관한 한 기지(機智)가 넘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경회루가 있기 전 원래 습지였던 그 자리에는 연못과 서루(西樓)라는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서루가 부실공사였는지 기울기 시작했다. 〈경회루기〉에는 새로 2층 누각을 짓게 된 경위가 나온다. 〈경회루기〉를 쓴 사람은 하륜(河崙)이었다.
 
  “경복궁 제거사(提擧司)가 궁궐 서루가 기울어 위험하다고 알려오니 전하(태종)께서 그곳으로 나가서 보고는 ‘누각이 기운 것은 땅이 습하고 기초를 견고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박자청 등에게 ‘농사철이 가까워 오니 노는 자들을 시켜 빨리 수리토록 하라’고 지시하셨다. 이에 박자청 등은 지형을 살펴 조금 서쪽으로 옮겨 그 터 위에 옛 모습보다 약간 넓혀 새로 만들고 또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각의 둘레에 못을 만들었다.”
 
  문제는 누각이 완공된 뒤였다. 태종은 직접 경회루에 올라가 본 뒤 “나는 옛 모습대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하니 박자청은 “후일에 또 기울 염려가 있어 이와 같이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려한 경회루가 마음에 들었는지 태종은 술자리를 베풀어 박자청을 위로하고 종친과 부마를 불러 공사에 참여한 600여 명에게 술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창경궁과 연결된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원래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다 연결돼 있었으나 일제가 도로를 내면서 끊어졌다.
  두 번째는 태종의 정실 원정왕후 민씨가 1420년 사망했을 때다. 장지(葬地)가 헌릉으로 정해졌다. 이에 박자청은 마전(麻田) 나루터에 부교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마전 나루터란 훗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삼전도를 이른다. 부교(浮橋) 설치 제안에 대해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결국 부교는 만들어졌고 장례행렬은 한강을 평지처럼 건너 무사하게 장례를 치렀다. 뒤늦게 박자청을 칭찬하는 말들이 나왔다.
 
  세 번째 공사는, 그야말로 불도저 같은 그의 집념이었다. 박자청은 성균관 문묘를 넉 달 만에 완성했는데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현장을 지키며 인부들을 닦달했다. 이 때문에 그를 폄하하는 기록도 있다. “성품이 가혹하고 각박해 어질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미천한 데서 일어나 다른 기능은 없고 토목공사를 감독한 공으로 지위가 재부(宰府)에 올랐다.”
 
  그는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한국인 DNA의 원형이었는지 모른다. 박자청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 태종의 헌릉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앞서 헌릉 자리에는 태종의 원경왕후가 묻혀 있었는데 1422년 산릉도감의 제조를 맡은 박자청은 공사를 위해 인부 1만명을 요구했지만 기근이 심해 경기도에서 2000명만 동원하고, 나머지 일은 소에게 맡겼다.
 
  박자청은 자신을 끝까지 믿어 줬던 태종의 헌릉 조성에 마지막 힘을 쏟았고 이듬해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박자청이 죽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그를 위한 제문을 지어 내렸다. 그런가 하면 익위공(翼魏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는 위엄 있고 행동이 민첩했다는 뜻이다. 그의 삶은 양반들의 질시 속에 오늘날의 문화재를 만든 일생이라고 하겠다.
 
금천교 다리 밑을 지나는 물은 북한산에서 발원한 것이다. 금천이란 잡귀를 막기 위해 일부러 만든 시냇물로, 궁궐이나 왕릉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조선의 노비 출신 건설자 장영실(蔣英實·1390~?)은 원래 중국 핏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元)나라 유민으로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의 기생이었다. 그의 생몰 연대는 정확지 않으나 장영실의 아산 종친회에 따르면 1385년 혹은 1390년 태어났다고 한다.
 
  장영실의 집안은 어머니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관노(官奴)로 전락했다. 그랬던 그가 태종의 눈에 띄어 재주를 인정받았다. 어릴 적부터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관찰력 또한 뛰어났으며 기계의 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가 기계 등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통하고 무기나 농기구 제작, 수리에 능숙했다는 이야기가 태종에게 전해졌다.
 
  태종은 그를 궁궐에서 일하게 했는데 장영실이 관직에 오른 것은 세종 때였다. 세종은 제련 및 축성, 무기, 농기구의 수리에 뛰어난 장영실을 곁에 두고 자신이 꿈꿨던 천문기기 제작 등 과학진흥에 그를 참여시켰다. 관노 출신인 그의 등용이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문무(文武) 대신들이 한사코 반대했지만 세종은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대신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동래현의 관노가 ‘상의원 별좌’가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상의원 별좌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는 관서로 태조 때 세워졌다. 이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창덕궁 후원을 일제는 비원이라고 불렀다. 이 후원은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의 극치다. 자연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인공미를 최대한 억제했다. 연못 정문 위에 우뚝 솟은 건물이 규장각이다.
  안승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에게 의논하기를,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디 원나라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 하여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이 1423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마침내 앞서 말한 것처럼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된 것이다. 장영실은 1432년부터 6년 동안 천문기기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1434년)와 옥루(1438년)였다. 세종은 이를 보고 장영실을 각별히 총애했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창덕궁 후원의 정자들이다. 왼쪽 정자는 두 다리를 연못 속에 담그고 있다.
  장영실은 또한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 대간의(大簡儀)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을 잇달아 개발해 냈다.
 
  시간을 재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의 관심사였다. 백제는 6세기에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고 누각박사(漏刻博士)를 둬 물시계로 시간을 관측했다. 통일신라 때는 천문박사(天文博士), 누각박사라는 기술 관리가 있었다. 천문박사는 태양과 별 등 하늘의 일을 맡았고 누각박사는 물시계 관측이 주요 임무였다. 고려도 태사국(太史局)이 역법과 누각의 일을 맡았다.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은 모두 3종류의 물시계를 만들었다. 첫 번째 것이 1424년에 만든 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구리로서 경점(更占)의 기(氣)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것은 자동시계가 아닌 단순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양을 측정하여 시간에 따른 부피 증가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년 후인 1434년에 만든 것이 두 번째 물시계인 자격루다. 이것은 자동시보 장치가 붙어 스스로 움직이는 물시계이다. 즉 경루(更漏)와 같이 눈금으로 시간을 알 수 있는 물시계에 시, 경, 점에 따라 종, 징, 북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 몇 시인지 알려주는 것으로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구성은 4개의 파수호(播水壺),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 및 시보장치로 구성돼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들어올린다. 이것은 처음 만든 경루와 같은 원리이다. 살대가 떠오름에 따라 이 부력이 쇠구슬과 지렛대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즉, 파수호보다 높은 곳에 목인(木人) 3명이 있다. 각각 시각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치고, 경을 알리기 위하여 북을 치며, 점을 알리기 위해 징을 치는 것이다. 목인보다 낮은 곳에 평륜(平輪)이 있고 둘레에 12지신(十二支神)이 있었다. 만약 자(子)시가 되면 자시를 맡은 신이 자시의 시패를 들고 솟아올라 왔다가 내려가는 식이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의 무대가 된 이곳에 머물기를 꺼려 창덕궁 건립을 박자청에게 지시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장영실은 1433년 호군(護軍)으로 승진했다. 장영실은 또한 금속활자 발명에도 기여했다. 1434년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는데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로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천문기기 제작 이후 금속활자 개발에 몰두하던 장영실은 어처구니없이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낙마하고 말았다.
 
  53세 때였던 1442년 3월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경기도 이천을 다녀올 때 임금을 호위하던 기술자 가운데 최상급자가 정3품 상호군 장영실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타고 있던 어가(御駕)가 갑자기 부서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노비 출신 장영실의 출세에 못마땅해하던 조정에서는 이를 호기로 삼았다. 그들은 장영실에게 임금에 대한 불경죄를 씌웠다.
 
  의금부가 장영실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파직을 구형했으나 세종은 곤장을 80대로 줄여 줬을 뿐이었다. 가마가 부서진 데 대해 매끼 고기 반찬이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세종의 뚱뚱한 몸무게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후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은 역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삼사(三司)의 간언으로 사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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