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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29〉 ‘海東 六龍이 나르샤’의 비밀… 고려에서 몽골로 귀화해 100년을 산 그들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웠다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이성계는 생애 유일한 패배를 혈육 이방원에게 당했다. 그와 함께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자는 북벌의 원대한 꿈도 사라졌다”

글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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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 官妓와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으로 고향 전주 떠나
⊙ 당시 여진족 공격하던 몽골세력에 항복… 다루가치 벼슬 받아
⊙ 이안사–이행리–이춘–이자춘이 벼슬 이어받아 공민왕 때 몽골이 푸대접하자 다시 고려로 귀화
⊙ ‘왕’이 태어날 이자춘의 명당 터를 나옹화상과 무학대사가 점지해 줬다는 설화도
⊙ 이성계는 常勝 장군… 북방에선 홍건적, 남방에선 왜구 상대하다 압록강 넘어 랴오둥에서도 전투 벌여
⊙ 조선 건국 뒤 위화도 회군으로 잃은 북벌준비 다시 시작… 그 주역은 정도전과 남은
⊙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살해하자 모든 꿈 사라져… 아버지 이성계는 자신에게 모든 수법을 익힌 아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경복궁과 함께 조선시대 정궁의 역할을 했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이다.
  “해동(海東) 육룡이 나시어서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이 구절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처음으로 쓴 책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 문장이다. 한글을 반포하기 이전의 유일한 한글 작품으로 세종 때 정인지, 권제 등이 지었다. 《용비어천가》는 인기를 끈 TV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에 소재가 된 바 있다. 여기서 ‘육룡’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용(龍)이 날아 하늘을 다스린다는 뜻의 《용비어천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세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지만 바탕에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정신이 깔려 있고 제왕(帝王)의 덕목도 포함돼 있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스스로를 용으로 칭한 것은 고려 건국자들을 본뜬 것이다.
 
  고려의 건국자 왕씨들은 스스로 용족(龍族)이라 칭했는데 몸에 용의 비늘이 있다는 것이다.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몰려 폐위된 우왕과 창왕이 목숨을 잃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보여주며 “내가 신씨라면 이 용의 비늘이 있을 리가 있느냐”며 한탄했다는 얘기가 사서(史書)에 나온다.
 
  해동육룡은 이성계(李成桂·1335~ 1408)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1274),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도조(度祖) 이춘(李椿·?~1342),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1315~1361)과 이성계, 태종 이방원(李芳遠·1367~1422)을 말한다. 4대조부터 추존 국왕이 된 연유가 있다.
 
  새 왕조의 건국자들이 4대 조상부터 왕을 추증한 것은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 때부터였다. 광무제 유수는 왕망(王莽)의 신(新) 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때 한 고조 유방(劉邦)을 비롯한 네 명의 유씨 임금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 전통은 송(宋)나라 때도 이어졌다.
 
  송 영종은 송나라의 두 번째 황제 태종의 넷째 아들 조윤분의 후예로, 훗날 황제가 됐을 때 4대조를 황제로 추존했다. 우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향을 전라북도 전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몽골족이었다. 즉 원래 고려인이었으나 만주로 가 5대째 몽골족이던 인물이 다시 귀화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에 살 무렵인 스무살 때 한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졌다. 그때 전주를 다스리던 수령이 이 관기에게 조정에서 온 벼슬아치에게 수청을 들라고 지시했다. 이안사를 사랑했던 관기는 수청을 거부하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죄가 어이없게도 이안사에게 뒤집어씌워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것을 물론 살인죄 누명까지 쓰게 된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170여 호(戶)의 전주 사람들이 그를 따라갔다. 당시 한 호는 보통 여섯 명으로 쳤는데 170여 호라면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그와 함께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훗날 이성계의 친병(親兵)이 된다.
 
  이안사는 삼척에 살면서 전주에서 관기를 죽인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승진해 강원도지사가 돼 삼척에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이안사는 북쪽의 의주(義州)로 다시 몸을 피했는데 전주에서 자신을 따라온 170여 호가 다시 행동을 함께했던 것이다.
 
창덕궁의 편전, 즉 왕이 정치를 하던 인정전이다. 어진 정치를 펴라는 이 말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핵심 참모였던 정도전과 남은을 척살하고 두 형제도 죽였다. 어진 정치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었다.
  이 무렵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몽골세력이 만주까지 밀려들어 왔는데 주역은 몽골의 산길대왕(散吉大王)과 부지르노양이었다. 몽골세력은 여진족을 공격하기 위해 고려 쪽의 협조자를 물색했다. 그때 몽골세력의 눈에 뜨인 것이 바로 이안사였다. 이안사는 자기 세력 1000여 호와 함께 몽골에 항복했다.
 
  이에 산길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안사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고 옥배(玉杯)까지 그의 품에 넣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공(이안사)의 가인(家人)이 우리 두 사람의 서로 통하는 정을 어찌 알겠소. 이 옥배로 내 정성을 표시할 뿐입니다.” 이안사와 산길대왕이 형제의 의를 맺은 것이었다.
 
  산길대왕은 이안사에게 원나라 알동천호소의 수천호(首千戶) 겸 다루가치로 임명했는데 조선 때 편찬된 《태종실록》에는 이안사가 머문 곳이 ‘개원로 남경 알동’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은 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지로 추정된다. 결국 이성계의 선조는 여자 때문에 국적을 고려에서 몽골로 바꾼 셈이 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 4장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야인(野人) 사이에 가사 야인이 해롭게 하거늘 덕원(德源) 옳으심도 하늘 뜻이시니….” 이것은 이안사와 그의 아들 이행리에 관한 부분인데 이행리는 1275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나라의 천호가 된다. 이행리에 관해서는 기이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루는 이행리가 성(城) 아래에서 한 노파에게 물을 달라고 했는데 그 노파가 이렇게 귀띔하는 것이었다. “저들이 공을 해치려 합니다.” 놀란 이행리는 가인들에게 가산(家産)을 모두 배에 싣고 두만강 근처 적도라는 섬에서 만나자고 했다. 적도는 바닷가에서 600보쯤 떨어진 섬이라고 한다.
 
  이행리가 처와 함께 백마를 타고 도주하는데 적 수백 기(騎)가 그를 추격했다. 막 따라잡힐 무렵 갑자기 바닷물이 100여 보가량 뒤로 밀려나 이행리는 적도로 들어갔다. 그 직후 다시 물이 불어 적은 추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출애굽기’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때 얘기와도 흡사하다.
 
  즉 주몽이 북부여 군사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갑자기 거북과 갈대로 만들어진 다리가 나타나 강을 건넜고 다리는 주몽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게 해 준 뒤 사라졌다는 설화다. 이후 이행리는 적도에 잠시 머물다 덕원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이 조선을 개국하려는 하늘의 안배였다는 게 《용비어천가》의 내용인 것이다.
 
  이안사-이행리의 천호 벼슬은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춘이 이었는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자칫 이 벼슬을 잇지 못할 뻔했다고 한다. 이춘은 1342년 사망하면서 큰아들 이자흥(李子興)이 천호 벼슬을 이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자흥은 아버지 이춘이 죽은 지 두 달 만에 급사(急死)하고 만 것이다.
 
  원나라가 이자흥의 아들 이천주(李天柱)가 어리다는 이유로 천호 임명을 미루면서 3파전이 벌어졌다. 이천주와 그의 숙부 이자춘과 만주에서 이씨들과 경쟁을 하던 쌍성총관 조씨였으나 끝내 이자춘이 이겼다. 조씨들도 이안사와 함께 고려에서 몽골로 귀화한 집안으로 세력이 이안사 집안 못지않았다고 한다.
 
  몽골 사람으로 살던 이안사 후손들이 다시 고려로 고개를 돌린 것은 원나라가 만주 지역의 호적을 정리하며 원주민을 우대하고 이주민을 홀대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자춘은 1355년 12월, 고려 수도 개경을 찾았고 이자춘 집안의 내력을 잘 알던 공민왕은 그에게 “너를 성취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자춘은 1356년 3월 이성계와 개경을 다시 방문했다. 당시 이자춘의 몽골식 이름은 ‘울루스부카(吳魚思不花)’였고 벼슬은 쌍성등처천호(雙城等處千戶)였다. 이자춘이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간 것은 아들을 일종의 ‘인질’로 남겨 두기 위함이었다. 그런 이성계가 일약 두각을 나타낸 사건이 바로 격구(擊毬)였다.
 
  격구는 말을 타고 하는 하키쯤으로, 고려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였다. 그런데 1356년 5월 공민왕 부부가 지켜보는 격구경기에서 이성계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했다. 《태조실록》은 이때의 일을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라 찬탄했다”고 적고 있다.
 
  고려로 다시 귀화해 아들을 인질로 개경에 두고 동북면 병마사와 호부상서를 겸하던 이자춘은 1361년 사망했다. 이성계는 풍수(風水)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것은 그가 불교에 심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불교는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와 관련된 설화가 많다.
 
  876년 도선이 백두산에 올랐다가 개경 송악산에 이르러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한 예언이 대표적이다. 도선은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건(建)이라 지으시오”라고 예언했다. 이 도선이 지은 《도선비기》는 고려왕실의 공식 풍수서로,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 두 번째에서 이렇게 못 박았다.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이라며 함부로 사원을 짓지 못하게 명령한 것이다. 《도선비기》는 고려 말까지 등장한다. 고려 숙종 때는 남경(훗날의 한양) 천도설 때 《도선비기》가 근거로 등장했고 인종 때 묘청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며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아버지 이자춘의 묫자리를 잡지 못해 이성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집안에서 부리던 노비가 달려와 두 스님이 나누던 이야기를 전했다는 설화가 있다. 노비는 두 스님이 하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는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먼저 스승이 제자에게 동쪽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
 
  “동산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중 가운데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
 
  “네가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이 두 손을 쓰지만 모두 오른손이 보다 긴요한 것처럼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니라.”
 
  노비의 말을 들은 이성계가 말을 달려 두 승려를 쫓아가 만난 뒤 부친의 장지(葬地)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에 노승이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 즉 임금의 자리이고 두 번째 혈은 장상(將相·장군이나 재상)의 자리인데 택하시오.” 이에 이성계가 왕후의 혈에 아버지를 묻고 훗날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씌어진 《오산설림(伍山說林)》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 등에 수록돼 있다. 《북로릉전지》는 위창조가 쓴 책으로 함경도 내 이성계 선조들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이성계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금오군 상장군 겸 상만호(上萬戶)로 임명된 후 상승(常勝) 장군의 길을 걸었다.
 
전라북도 남원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다. 황산대첩은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말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이성계는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첫 번째가 고려를 배신한 박의를 1361년 9월 토벌한 것이며, 두 번째가 불과 한 달 뒤인 1361년 10월 홍건적 10만이 장악한 개경 탈환을 이성계가 이룬 것이다. 이성계는 또 개경을 탈환한 지 한 달 후 원나라의 심양 승상 나하추를 격파했다.
 
  1370년 1월에는 기병 5000,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우라산성을 점령했는데 이 우라산성은 고구려의 오녀산성이라는 해석이 있다. 같은 해 8월 이성계는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는데 이번에는 친원파로 고려 조정을 괴롭혔던 기철의 넷째 아들 기새인티무르를 체포하기 위함이었다.
 
황산대첩 비각이다. 지금도 해마다 전승기념식이 열릴 만큼 왜구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정도의 위기에 빠진 고려를 이성계가 구해 냈다.
  이성계는 북방뿐 남방의 왜구를 상대로 나라 전역을 누볐다. 1378년 개경까지 침략한 왜구를 맞아 최영 장군마저 패했을 때 이성계가 구원한 일과 1380년 5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진포, 즉 충청남도 서천 앞바다에서 최무선의 화포에 놀라 육지에 상륙한 왜구를 무찌른 것은 그의 대표적인 전공(戰功)이다.
 
  당시 왜구는 경상북도 상주의 관아를 불사른 뒤 엿새 동안이나 술판을 벌였고 다시 전라북도 남원 운봉으로 향했는데 그것이 고려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당시 왜구의 선봉에는 아지발도라는 용맹한 십대 장수가 있었다.
 
어휘각은 이성계가 황산대첩이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거뒀다는 말을 돌벽에 새겼다는 것인데 세월이 오래돼 알아볼 수 없다.
  아지발도는 온몸을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의형제 이지란에게 말했다.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서 떨어뜨리면 그대가 즉시 쏘라.” 이 말을 마친 뒤 이성계는 첫 화살로 투구의 끈을 끊었고 두 번째 화살로 투구를 벗겨 냈으며 이지란의 세 번째 화살로 아지발도의 숨통을 끊었다.
 
  훗날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킬 때 맞서며 최후까지 저항했던 목은 이색은 황산대첩 후에 이성계에게 이런 축시(祝詩)를 바칠 정도였다.
 
  ‘적의 용장 소탕하기를 썩은 나무 꺾듯 하니
  삼한(三韓)의 기쁜 기개 공에게 속해 있네
  충성이 태양처럼 빛나니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이 청구(靑丘·고려)에 떨치니 바다에 바람도 걷혔네
  몸이 병들어 교외의 영접에 참가하지 못하고
  앉아서 새로운 시 지어 뛰어난 공을 노래하네.’
 
  이성계는 신기의 활 솜씨와 함께 무패의 명장이었지만 자세 또한 신중했다고 한다. 우왕이 황산대첩을 기려 황금 50냥을 내렸지만 그는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무상 당연한 일인데 신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했으며 최영이 인사하자 “공의 지휘를 받들어 이겼을 뿐”이라고 겸양했다.
 
황산대첩의 현장에는 여러 유물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가 훼손시켰다.
  이랬던 고려의 대들보가 반역의 흑심(黑心)을 품은 것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을 만난 뒤부터였다. 정도전은 형부상서 정운경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가 정8품 무관의 서녀(庶女)여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다. 관직에 진출할 때 거치는 일종의 신분검사인 고신(告身)에 걸린 것이다.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고신에서 탈락한 정도전은 1370년에야 성균관박사가 됐으나 이인임의 친원(親元)정책을 비판하다가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유배됐는데 정몽주 등이 1년 만에 유배를 마친 것과 달리 장장 9년 동안을 유배와 유랑으로 보냈다. 그의 친구들마저 연락을 끊자 이런 일도 있었다.
 
  아내가 유배 중인 남편에게 “평소에 집안에 식량이 떨어지든 땔감이 떨어지든 언젠가는 입신양명해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집안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 기대했는데 겨우 유배나 가 있고 평소에 그 많던 친구들이 지금 어디 갔느냐”는 식으로 힐난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에 정도전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졌지 은혜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나락에 떨어진 뒤에야 정도전은 진짜 세상인심을 알게 됐고 백성들의 실상을 보며 혁명을 꿈꾸게 된다.
 
일제에 의해 동강난 황산대첩비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이성계의 경력에서 유일한 흠이 우왕과 최영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한 것이다. 그 일이 걸렸는지 훗날 조선을 세운 뒤 이성계는 북벌(北伐)의 꿈을 품고 실제로 그 준비를 정도전에게 시켰다. 그 일을 눈치챈 명 태조 주원장은 정도전의 압송을 수차례 요구했다.
 
  북벌 준비의 주역은 정도전과 남은인데 기록에 남은이 이성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나온다. “사졸이 훈련되었고 군량이 갖추어졌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동명왕의 강토란 고구려의 영토를 말한다. 《태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등장해 북벌 준비가 꽤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며 남은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즉 중국 역사상 선비족의 북위와 수당(隋唐), 거란족의 요(遼), 여진족의 금(金), 몽골족의 원(元)처럼 중원을 정복하자는 것이었다.
 
경북 봉화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의 대웅전 격인 유리보전이다. 남한에 몇 개 남지 않은 공민왕의 흔적으로, 이 글씨를 쓴 사람이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개경을 떠나 안동까지 피란왔는데 홍건적을 물리친 것도 이성계였다. 그러나 결국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망한다.
  그랬던 이성계의 꿈은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정도전을 주살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 이성계는 생애 단 한 번도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었는데 유일한 패배가 아들과의 정권 다툼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끼는 부하를 잃고 북벌이라는 야망마저 사라졌기에 더 허망했다.
 
  훗날 벌어진 상황을 보면 만일 이성계가 정도전과 함께 중원에 진출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점칠 수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1398년 사망했다. 그 후 명 황실은 분열을 거듭해 주원장의 손자 주윤문이 스물두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됐지만 장성한 숙부들이 사방에서 견제하는 통에 1년 만에 내란에 휩싸인다.
 
  그중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朱·1360 ~1424)로 그가 곧 영락제다. 일부 사가들은 조선군이 북상했다면 내전을 벌이던 명이 랴오둥을 돌아볼 수 없어 고구려의 옛 영역을 쉽게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일부는 곧 중국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위험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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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홍석    (2018-09-06)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6
몽고 식민지배 몽고인 하급관리로 공물 도둑질하던 습성으로 나라 도둑질하며 우리 전통 고대 기록 수거령으로 손에 쥐고 유체이탈 화법 비슷하게 엳사마저 도둑질을 하였으니 몽고계 원족 세습 다루가치 울루스부카 가문은 휴도 흉노 김씨 가문 보다도 더 극악무도한 나라 도둑 흉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서홍석    (2018-09-06)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김일성 가계의 소설같은 전기를 풍성하게도 제작해 놓았구나. 몽고 제국 식민지배하 고려인이 고려 영토에서 몽고에 투항 귀화해 몽고인이 되었더니 몽고어에 능통해져서 몽고인이 하는 세습 다루가치 벼슬도 하고 동국정운(대칸민국 국보제71호)도 쉽게 저술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민족 관계 구분없이 분탕하여 한치의 혀로 혹세무민하면 그 죄의 중대함 / 그 죄상의 극악무도함을 알기나 하느냐 !
  서홍석    (2018-09-06)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문갑식은 거짓말 집어치워라. 문재인 닮아 거짓말쟁이로 나섰냐 ? 남평 문씨 집안 따져보면 울루스부카 가문에 사돈관계라고 하니 사돈관계 몽고인 가문을 고려인만들어 주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 문갑식은 몽고인이 몽고어 발음(pronounciation)으로 쓴 몽고인의 몽고어 한자 사전 동국정운을 먼저 터득하고 거짓말을 하라. 세습 다루가치는 고려인이 할 수 없었다. 고려 공민왕이 反원 정책을 폈는데 조선의 이성계가 고려인으로서 고려인 왕씨 가문을 말살시켰냐 ? 조선의 이성계, 조선도 차명, 이성계도 차명. 몽고계 원족 세습 다루가치 울루스부카 가문의 실체를 밝히도록 하라. 민족 문제를 그토록 소홀한 틈 노리다니, 환단고기가 뭐더냐 고이연 놈 !!!!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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