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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3〉 대외무역과 殉敎의 고장 나가사키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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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막부 시절 鎖國정책은 조선과 같은 고립정책이 아니라 막부의 대외창구 독점정책
⊙ 나가사키, 포르투갈 상선 입항하면서 항구도시로 성장…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증해 ‘敎會領’이 됨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7년 스페인인 4명 등 26명의 가톨릭 신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처형
17세기 초 일본에 들어온 남만선(포르투갈선박)을 그린 그림. 왼쪽에는 포르투갈 범선과 선원, 상인들이, 오른쪽에는 선교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열린 후 일본은 전국(戰國)시대의 무력(武力)투쟁과 혼란의 시대를 넘어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하극상(下剋上)이 난무하던 난세(亂世)를 뚫고 천하를 차지한 도쿠가와 막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치력 공고화를 위한 일대 국가 개조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한 작업의 핵심에는 막부의 대외통교(對外通交) 독점정책이 있었다.
 
  16세기 일본의 통일 과정은 누가 외부와의 통교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보다 유효하게 활용하느냐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유럽 세력의 등장은 대외통교의 전략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의 신문물과 신무기(뎃포·조총)를 가장 먼저 입수할 수 있는 규슈(九州) 지방의 전략적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시대의 변화를 꿰뚫어 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신무기를 전력화(戰力化)하여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규슈의 핵심 지역을 장악, 권력 유지 기반이자 대외 팽창 야망 투사(投射)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계 쇼군(將軍)들이 다이묘(大名·영주)들의 독자적 대외통교 억제에 나선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 변화에 따라 일본에서 가장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곳이 나가사키(長崎)이다.
 
 
  鎖國정책의 의미
 
쇄국정책을 시행한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집권 초기에 대외통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주인선(朱印船) 무역의 형태로 일정한 조건하에 허가를 받은 다이묘나 상인들의 대외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는 서양인을 추방하고 모든 번의 외부와의 통교를 일절 금지한다. 이른바 ‘쇄국(鎖國)정책’이다.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쇄국정책은 단순한 고립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쇄국’이라는 말은 1801년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의 《쇄국론(鎖國論)》이라는 책자 제목에서 유래하였다. 시즈키는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저술한 《일본지(日本誌)》의 네덜란드어판을 번역한 인물이다. 《일본지》에는 본편의 부록으로 〈일본에서는 자국인의 출국, 외국인의 입국을 금하고, 일본과 세계 제국(諸國)과의 교통을 금지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소논문이 첨부되어 있었다. 시즈키는 본문 중에 ‘쇄국’이라는 표현이 있음에 착안하여 동 논문의 제목을 ‘쇄국론’이라 번역하였다. ‘쇄국론’이라는 말은 사실 에도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쇄국론’이 역사용어로 등장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 이후로, 주로 막부의 교역 독점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쇄(鎖), 즉 쇠사슬로 결박(結縛)하는 대상은 번이지 막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閉門)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사람·물자·정보의 대외 교류를 통제하는 ‘창구독점정책’으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조선의 위정척사(衛正斥邪)류의 이념형 고립정책과 같지 않다.
 
  막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역사적 경위와 전략적 관점을 고려하여 네 개의 대외 통교 창구만을 열어두었다. 사쓰마(薩摩)번과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 마쓰마에(松前)번과 에조치(蝦夷地·지금의 홋카이도), 쓰시마(對馬)번과 조선 간의 통교를 허용하는 한편, 가장 중요한 유럽·중국과의 교류는 막부의 직할령(直轄領)인 나가사키로 한정하였다. 섬나라인 일본은 모든 해안선이 외부 교류의 창구가 될 수 있다.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일정 크기 이상의 선박 건조를 금지하는 등 이중 삼중의 통제를 가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대외관계를 틀어쥐고 교역을 관리하려 하였다. 그 통제의 중심에 있던 막부 권력 유지의 핵심 지역이 나가사키였다.
 
 
  ‘교회령’이 된 나가사키
 
  나가사키는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1570년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에 의해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지가 되면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다채로운 역사의 고장이 된다. 나가사키는 근세 시기 일본의 대유럽 교류 창구이자 대중국 무역 중심지로서, 에도시대 260년의 발전 과정을 축약하고 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는 초기 기독교 전래기에 일본에서 가장 기독교가 융성했던 곳이다. 스미타다는 1563년 그의 사위와 함께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적극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1567년 예수회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기독교 포교가 시작된다. 알메이다는 히라도(平戶)에 일본 최초의 서양 의술 병원을 세운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569년에는 빌렐라 신부에 의해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자에게 세례가 행해지고 교회당이 세워지는 등 교세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하는 1571년 시점에 나가사키에는 이미 1500명을 헤아리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으로 예수회의 입지가 강화되고 교세(敎勢)가 공고해지자, 1580년 오무라 가문은 나가사키의 관할권을 아예 예수회에 기증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가(佐賀)의 류조지(龍造寺) 가문과 사쓰마(薩摩)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규슈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오무라 가문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예수회를 활용코자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스미타다가 선교사들에게 빌린 채무를 갚지 못해 관할권을 넘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입항세(入港稅) 징수권과 재판권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나가사키 및 인접 모기(茂木)에 대한 관할권이 예수회로 이관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로마의 예수회 고문서관에 보관된 스페인어 문서에 기증 기록이 있으며 일본 측 사료에도 그를 뒷받침하는 정황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의 주권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만, 나가사키는 한때 (이론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령(敎會領)’이었을 정도로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다.
 
  예수회가 관할권을 행사하고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하는 나가사키는 곧 남만(南蠻・포르투갈-스페인)무역의 중심지로 부상(浮上)한다. 포르투갈 상선이 실어오는 뎃포・화약 등의 전략물자와 중국산 생사, 비단 등의 소비재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를 바탕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더욱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이권(利權)의 중심지이자 기독교 포교의 거점이 된 것이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나가사키는 시마즈 가문에 의해 일시 접수되었다가,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시마즈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규슈 정벌에 나선 히데요시에 의해 관백(關白) 직할령이 된다.
 
 
  ‘바테렌 추방령’
 
오다 노부나가(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양과 통교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서로 달랐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승계자로서 기존의 방침을 대부분 계승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뜻을 달리했다. 노부나가는 부국강병의 관점에서 유럽 세력과의 교역에 도움이 된다면 기독교 포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히데요시는 교역의 실리는 취하고자 했으나 기독교 포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히데요시는 1587년 소위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 - ‘伴天連(바테렌)’은 신부(神父)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padre의 음차어이다]을 내려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한다. 신국(神國)인 일본에서 사법(邪法)의 신봉자들이 신사불각(神社佛閣)을 파괴하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20일 이내에 모든 선교사의 일본 퇴거를 명하였으나 실제 선교사를 강제로 추방하지는 않았다.
 
  이때의 추방령은 개종(改宗) 강요, 노예무역 묵인, 불상 파괴 등 기독교의 만행에 대한 히데요시의 개인적 분노가 반영된 즉흥적・선언적 엄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교역 활동과 기독교 포교를 분리하는 한편, 기독교의 기존 정치질서 파괴적 성격을 인식하고 경계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훗날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기독교 금교(禁敎) 및 쇄국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바테렌 추방령에 의해 포교가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수면하에서의 은밀한 포교는 묵인되었다. 추방령 자체가 사제 추방과 기독교 포교 금지를 규정할 뿐, 기독교 신앙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가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에 나선 것은 1596년 소위 ‘산 펠리페(San Felipe)호 사건’ 이후이다. 산 펠리페호 사건은 스페인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만이 일본과 통교하고 있었으나, 스페인이 1571년 필리핀을 정복하고 필리핀-멕시코를 연결하는 태평양 횡단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상황이 일변한다. 동(同) 항로상에 위치한 일본에 스페인 선박들이 자연스럽게 출몰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포루투갈의 식민제국은 새로운 교역 파트너의 등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포르투갈에 비해 스페인과의 관계 설정은 진통을 겪는다.
 
 
  일본의 골고다 언덕
 
나가사키의 오우라천주당.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을 기리기 위해 1865년 프랑스인 신부들이 세운 목조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사진=배진영
  1596년 7월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하던 산 펠리페호가 동중국해에서 풍랑을 만나 도사(土佐)의 우라도(浦) 앞바다에 표착한다. 산 펠리페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화물과 소지품을 몰수당하는 등 일본 측의 비우호적 태도로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4월 겨우 수리를 마치고 일본을 떠날 수 있었다.
 
  산 펠리페호 사건이 역사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산 펠리페호가 일본에 머무르던 기간 중에 갑작스런 기독교 탄압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산 펠리페호가 도착한 지 석 달 후인 1596년 10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포교 활동에 종사하던 사제와 신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할 것을 명한다. 대대적인 색출로 24명이 체포되었고, 압송 과정에서 그들을 도운 2명 등 총 26명의 기독교인이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된다.
 
  이것이 소위 ‘나가사키 26성인(聖人) 순교’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인 4명, 멕시코인·포르투갈인 각 1명, 일본인 20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일본의 ‘골고다 언덕’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우발적 사건이나 다이묘의 사적 처벌이 아닌 일본 최고 권력자의 공식 명령에 의해 기독교도가 처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3개월에 걸쳐 체포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가사키로 이동시킨 후 처형한 것은 이동 과정에서 기독교 금지령을 널리 알리고,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인 나가사키에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공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나가사키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 순교지가 된다.
 
  히데요시가 왜 갑자기 강력한 기독교 탄압령을 내렸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산 펠리페호와 관련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나도는 속설이 있다. 먼저 ‘선교사의 식민지 앞잡이설’이다. 산 펠리페호의 선원이 취조 과정에서 ‘스페인이 광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선교사를 보내 기독교도를 양성하고 이후 군대를 보내 기독교도와 합세시켜 내외에서 협공을 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것이 히데요시를 자극하여 강력한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의 대척점에 ‘예수회-프란체스코회 대립설’이 있다. 당시 일본 포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란체스코회 중심의 스페인 세력의 일본 접근을 견제하기 위하여 산 펠리페호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을 침략 세력으로 모함한 것이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외에 히데요시가 자신의 포교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력권인 교토와 오사카에서 공공연히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선교사와 그 추종 세력에 격분하여 극단적인 조치에 나선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분분하다.
 
 
  도요토미, 필리핀 침공도 계획?
 
  스페인어 자료를 포함한 최근의 연구는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이 보다 복합적인 국제 정세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기독교 위협론에서 비롯된 대(對)필리핀 강경외교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 과정에서 기리시탄 다이묘 간의 강한 결속과 급속한 교세 확대를 목도하고, 기독교 세력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159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이 기독교 세력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인식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가 마닐라를 오가며 교역에 종사하여 큰 부를 축적한 나가사키 상인 하라다 마고시치로(原田孫七)다.
 
  필리핀 사정에 정통한 마고시치로는 히데요시에게 필리핀의 본국 스페인이 식민지 침략에 기독교를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한편, 필리핀의 방비 상태가 약체에 불과해 일본의 힘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으나, 만약 이른 시일 내에 필리핀을 공략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필리핀이 일본을 침략해 올 것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하라다는 1591년 히데요시의 외교 서신을 휴대하고 마닐라를 방문한다. 히데요시는 마닐라 총독 다스마리냐스(Gomez Perez Dasmariñas)에게 일본에 조공(朝貢)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필리핀을 침공하겠다고 통고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두고 터무니없는 공갈외교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당시 조선 침략을 준비하던 히데요시가 양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공갈외교를 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전쟁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대필리핀 전쟁을 먼저 수행할 의향이 정말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히데요시는 당시 망상에 가까운 대외 정복관을 가지고 있었다. 명을 정복하여 베이징(北京)에 천황의 거소를 두고 닝보(寧波)에 태합(太閤)의 본영(本營)을 두어 필리핀, 인도를 아우르는 제국을 지배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그의 심중을 알 길은 없다.
 
 
  갑작스런 기독교 탄압 이유는?
 
네덜란드 화가 코넬리스 클래츠 반 비링겐이 그린 〈영국 해안에서 궤멸된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한 영향으로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저자세를 취했다.
  히데요시의 요구에 필리핀 총독부는 뜻밖에도 저자세로 대응한다. 답신사를 파견해 예를 갖추는 한편, 조공 요구에 대해서는 답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고 히데요시를 회유코자 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의 칼레해전(1588) 이후 무적함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어 해상 전력에 큰 공백이 발생한 상태였다. 더욱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에스파냐의 입지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총독부는 히데요시의 침공 위협을 코웃음으로 넘겨버릴 수만은 없었다. 1592년 조일(朝日)전쟁 발발은 히데요시의 요구가 단순한 협박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점을 들어 히데요시의 대필리핀 조공 요구가 단순한 공갈외교가 아니라 유럽 정세와 필리핀 사정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내려진 계산된 강경외교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있다.
 
  1596년 기독교 탄압령은 특사 파견으로 시간을 벌면서 일본과 필리핀 간에 애매한 평화가 유지되던 와중에 내려진 것이다. 1594년 필리핀에서 파견된 프란체스코회 소속 선교사 4명이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며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게 되는데, 이들은 당초 목적과 달리 제공받은 주거지를 교회로 만들고 포교 활동에 나선다. 기독교에 대한 히데요시의 경계심으로 외교관계 긴장이 촉발되고 기존 선교사들도 운신이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외부에 노출된 이들의 포교 활동은 무모한 것이었다. 민감한 시기에 벌어진 공공연한 포교 활동이 히데요시를 자극하여 26인 처형이라는 초강경 조치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히데요시로서는 이들의 포교 활동을 필리핀 총독부의 일본 침공 음모로 간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다수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개별국 행위의 동인(動因)을 개인의 캐릭터를 넘어 국제 정세의 변동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규슈 평정 과정에서 기리시탄 다이묘 간의 강한 결속과 급속한 교세 확대를 목격한 히데요시가 기독교 세력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며, 이러한 인식은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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