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국천왕의 妃 우씨, 남편이 죽자 王弟 연우(산상왕) 유혹해 결혼
⊙ 연우에게 왕위 빼앗긴 둘째 발기가 반란 일으키자 넷째 계수가 진압
⊙ 우씨, 죽을 때 “산상왕 곁에 묻어 달라”
⊙ 고국천왕의 혼령, 무당에게 나타나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나를 가려 주게 하라”… 무덤 주위에 7겹 소나무숲 조성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연우에게 왕위 빼앗긴 둘째 발기가 반란 일으키자 넷째 계수가 진압
⊙ 우씨, 죽을 때 “산상왕 곁에 묻어 달라”
⊙ 고국천왕의 혼령, 무당에게 나타나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나를 가려 주게 하라”… 무덤 주위에 7겹 소나무숲 조성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고구려 벽화 오회분 4호묘의 귀부인 그림.
고구려의 연나부(椽那部) 조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폭군으로 알려진 제7대 차대왕(次大王)을 시해하고 신대왕(新大王)을 세워 쿠데타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최초로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휘둘렀다. 그는 꼭두각시인 신대왕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위에 오르자 연나부 출신 우소(于素)의 딸을 왕후로 삼게 했다.
우씨녀를 왕후로 맞은 백고가 바로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명림답부 이래로 연나부 세력은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여 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畀留)와 평자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우씨 왕후의 친척인 연나부 세력이었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자제들 역시 남의 여자를 빼앗고 전택을 몰수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이때 고국천왕은 죄로써 그들을 주벌하려고 하자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켜 왕도를 쳤다.
고국천왕은 재위 13년에 좌가려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이로써 우씨의 친정 세력인 연나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우씨 또한 남편인 고국천왕 앞에 낯을 들 입장이 못 되었다. 이때 고국천왕은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감하게 서압록곡에 은거하고 있던 유리왕조(琉璃王朝)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삼았다. 을파소는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는 등 나라 정치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5월에 병고로 죽으면서 다시 연나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 중심에 바로 우씨 왕후가 있었다.
당시 고국천왕과 우씨 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왕의 형제들이었다. 4형제 중에서 고국천왕이 첫째였고, 그 다음 둘째가 발기(勃岐), 셋째가 연우(延優), 그리고 넷째가 계수(罽須)였다. 그러므로 다음 왕위는 둘째인 발기가 이어받아야 할 차례였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한 슬픔보다 어떻게 하면 약화된 연나부 권력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지에만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왕후 자리를 계속 이어가고, 친정인 연나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왕위에 오를 둘째 왕제 발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발상(發喪)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시 고구려에는 취수혼(娶嫂婚) 제도가 있었다. 즉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었다. 역사학자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취수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취수혼에서 망형(亡兄)의 처를 취하는 차례는 형제의 연령순이다. 단 미혼의 동생이 있을 경우 일반민에게 있어서는, 귀족은 구애되지 않지만, 그가 우선적일 수 있다. 이는 혼납금(婚納金)을 마련하기 어려운 데 따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이때 ‘혼납금’은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보내는 돈으로, 일종의 ‘신부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왕실의 경우 혼납금이 아까워 장가를 들지 못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가난한 일반인들 사이에서 혼납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혼을 못한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를 취하여 결혼을 하는 사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왕실이라고 ‘취수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억지로 일반인들의 풍습에 따른다고 하면, 우씨 왕후는 결혼한 발기가 아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셋째 왕제 연우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발기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처는 왕후가 된다. 한때 우씨 왕후의 아래동서였던 발기의 처가 왕후가 된다는 사실도 가슴 아픈 일인 데다, 연우와 결혼하면 완전히 자신의 처지가 위에서 아래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계속 자신이 왕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왕위가 형에서 동생으로 뒤바뀌다
한밤중에 우씨 왕후는 남편 고국천왕의 시신을 궁궐 깊은 곳에 숨겨둔 채 둘째 왕제 발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에겐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왕위를 계승하시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꺼내지 않고 먼저 그렇게만 말했다.
잠을 자다 나온 발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발기는 아직 왕이 죽은 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다음 왕위를 논하는 것도 해괴한 일일 뿐더러, 한밤중에 왕후인 형수가 헐레벌떡 달려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운행이 따로 돌아가고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왕후께서 이 밤중에 홀로 나와 다니니, 이는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 생각됩니다.”
발기는 형수인 우씨 왕후를 점잖게 훈계하여 돌려보냈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우스운 꼴만 당하자 도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셋째 왕제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 우씨 왕후를 맞았고, 집안으로 안내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창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누가 들을까 무서워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대왕이 세상을 떠나셨소.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후사가 없습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둘째 발기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는 나에게 딴마음이 있다고 폭언하면서 오만무례한 행동을 하였소.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대를 보러 온 것이오.”
연우는 우씨 왕후의 말을 듣고, 곧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지금 형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형 발기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우씨 왕후를 더욱 극진히 대접했다.
이때 연우는 예의를 다하여 우씨 왕후를 대접하려고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다. 이것을 본 우씨 왕후가 얼른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시동생의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그것으로 곧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통했다.
궁궐로 돌아가려고 할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넌지시 말했다.
“밤이 깊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대가 나를 궁궐까지 바래다 주시오.”
연우가 흔쾌히 승낙하자, 우씨 왕후는 곧 그와 함께 궁궐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대왕의 유언이라며, 발기가 아닌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하룻밤 사이에 왕위가 형에서 아우로 뒤바뀐 것이었다.
발기는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죽으면 당연히 둘째인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동생 연우가 우씨 왕후와 결탁하여 고구려 제10대 왕위에 오르자 그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인데 너는 그 순차를 뛰어넘어 왕위를 찬탈했다. 너의 죄가 크니 어서 나와 이 형의 칼을 받아라.”
발기가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의 성문 앞에 나타나 이렇게 외쳤으나, 동생 연우는 3일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연우는 왕위에 올랐으며, 우씨 왕후와 결혼한 사이였다. 즉, 고구려 왕후 중에서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연우)까지 두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여인이었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가 상사(喪事)도 알리기 전에 밤길을 이용해 급히 발기를 찾아간 것은 이미 연나부 세력과의 음모에 의한 수순 밟기에 다름 아니었다. 그 음모의 단서가 바로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 있다.
〈처음 고국천왕이 돌아갔을 때 왕후 우씨는 (喪事를) 비밀에 부쳐 발상(發喪)치 않고 밤에 왕제(王弟) 발기(發岐)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사(後嗣)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이 기사 속에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다만 왕위를 계승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만약 그 죽음을 알렸다면 발기는 당장 궁궐로 달려가 왕위를 계승하고, 고구려 제10대 왕의 자격으로 고국천왕의 장례를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기에게 질책만 듣고 그의 집에서 나온 후 미리 연나부 세력과 짜 놓은 계획에 따라 그날 밤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곧바로 셋째 연우의 집을 찾아간 우씨 왕후의 행동 속에 또 음모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인용해 본다.
〈후(后)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장(長·어른)이 되어 의당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더러) 이심(異心)이 있다 하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지금) 숙(叔·아제)을 보러 온 것이오” 하였다.〉
이 대목을 보면 아주 노골적으로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고 발기 대신 연우에게 왕위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유혹’이다. 연우는 그 유혹을 금세 알아차리고 우씨 왕후의 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이 된 것이다.
발기의 반란
산상왕이 된 연우는 형 발기가 군사를 몰고 궁궐 앞에 나타나자 3일 동안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반란을 평정할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물론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이 권력 전면에 재등장하여, 음모의 다음 수순으로 발기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발기는 자신의 군사가 적은 데다 궁궐 안에서 동조하는 세력이 없자 식구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났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男武)의 동모제(同母弟)인데,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으니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고 즉위하여 천륜(天倫)의 의(義)를 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上國)에 와 의탁하는 것이니 원컨대 나에게 군사 3만을 주면 아우 연우의 군사들을 평정코자 합니다.”
발기가 말하는 ‘남무’는 고국천왕의 이름이고, ‘동모제’란 같은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난 동생을 뜻한다.
요동태수 공손도는 발기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손쉽게 고구려를 후한(後漢)의 속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손도는 선뜻 발기에게 군사 3만을 내주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쳐들어갔다. 그 소식을 들은 산상왕 연우는 아우 계수를 시켜 발기의 군사와 맞서 싸우게 했다.
이때 계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명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명을 받아 형 발기와 맞서 싸우기도 곤란했다. 일단 그는 지엄한 왕명을 어길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발기가 지휘하는 후한의 3만 군사와 결전을 벌였다.
계수가 선봉장이 되어 이끈 고구려 군사들은 날래고 용맹하여 후한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했다. 더구나 후한의 군사들은 고구려의 발기가 대장군이라는데 불만이 많은 데다, 왜 그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도무지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 오면 후한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발기는 아우 계수를 보고 외쳤다.
“네가 지금 이 형을 죽이려 하느냐?”
“연우 형님이 왕위를 형님에게 사양치 않는 것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발기 형님께서 그 분을 참지 못해 다른 나라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멸하려 들다니,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들을 뵈올 작정이십니까?”
발기는 동생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났다. 계수는 형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끝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 발기의 주검을 본 계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초장(草葬)을 지냈다. 나중에 다시 왕명을 받아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기로 하고 풀로 시체를 덮어 임시로 무덤을 만들어 둔 것이다.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국내성으로 돌아온 계수는 산상왕에게 보고하고 울면서 말했다.
“결국 발기 형님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였습니다. 형제끼리 의를 저버려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산상왕은 따로 술상을 마련하고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형제의 정을 다지는 자리에서 계수에게 이렇게 질책했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청병(請兵)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은 대단히 큰 죄다. 이제 네가 그의 군사를 쳐 크게 이겼으나 도망가는 것을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을 한 것인데, 너는 왜 슬피 울며 나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계수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신(臣)은 지금 한마디 말씀을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산상왕이 물었다.
“그 청이 무엇이냐?”
“왕후(우씨)가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을 가지고 대왕을 세웠다 하나, 대왕이 예로써 사양치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로서의 의리가 없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덕을 널리 알리려고 발기 형님의 시체를 거두어 초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지금 대왕께서 진노하시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만일 인자한 성품으로 모든 것을 잊고 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을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씀을 사뢰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을 죽여 주십시오.”
산상왕은 이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앉으며 계수에게 자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너를 질책하였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허물이 무엇인지 알겠노라. 너의 충정과 형제애를 알았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이에 계수는 벌떡 일어나 산상왕에게 절을 한 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며 형제애를 돈독히 했다.
곧 산상왕은 신하들을 시켜 발기의 시신을 모셔다 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주통촌 여자의 몸에서 왕자를 얻은 산상왕
산상왕은 7년이 지나도록 우씨 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걱정이었다. 전 남편인 고국천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결함은 우씨 왕후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석녀(石女)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위 7년 3월에 산상왕이 산천에 기도를 하였더니 15일 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근심하지 말라.”
산상왕은 꿈에서 깨어나 여러 신하가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나에게 말하기를 소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정작 나에게는 소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재상 을파소가 대답했다.
“천명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저 기다리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을파소는 죽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고우루(高優婁)가 재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재위 12년 11월의 일이었다. 산상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할 때 제상에 올릴 교시(郊豕·돼지)가 달아났다. 그 돼지를 잡으려고 담당 관리가 쫓아가다 보니 주통촌(酒桶村)이란 마을에 이르렀다. 아무리 쫓아가도 관리는 달아나는 돼지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을에 사는 20세쯤 된 아름다운 여인이 앞질러 가서 돼지를 잡아 주었다.
이렇게 겨우 돼지를 잡아 가지고 돌아온 관리가 산상왕에게 주통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대왕은 이상히 여겨 밤에 몰래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같이 간 신하를 시켜 그 여자와 하룻밤 정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그 여자의 집에서는 대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그 청을 거역하지 못했다.
여자의 부모가 허락하자, 산상왕은 곧 방에 들어가 그녀와 마주보고 앉으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대왕의 명을 감히 어길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아이가 생기면 부디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하룻밤의 정을 나눈 뒤 환궁했다.
산상왕 재위 13년 3월에 우씨 왕후가 주통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투기(妬忌)를 하여, 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했다. 그 여자가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남자 복장을 하고 달아났으나, 곧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때 주통촌 여자는 왕후가 보낸 군사에게 말했다.
“너희가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나의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다. 만약 나를 해치게 되면 왕자를 죽이게 되는 것이니 그리 알라!”
그러자 군사는 감히 여자를 해치지 못하고 돌아가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왕후는 어떡하든 그 여자를 죽이려고 패악을 떨었으나 끝내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이야기가 산상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때 대왕은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지금 아이를 배었다 하니, 그것이 누구의 아이냐?”
“신첩이 평생 형제와도 동석치 않거늘 하물며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겠나이까? 지금 복중에 있는 아이는 대왕의 핏줄이 틀림없사옵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고 돌아와, 우씨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마침내 왕후도 어쩌지 못하고 그 여자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해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낳자,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오,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주셨구나.”
산상왕은 처음 ‘교시(郊豕)’가 달아나 여자를 얻은 것이므로,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 주통촌 여인을 ‘소후(小后)’로 삼았다. 처음 소후를 낳을 때 그 어머니는 해산하기 전에 무당으로부터 “왕비를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지었는데, 정말 나중에 그 이름대로 되었다고 한다.
둘째 남편 산상왕과의 합장을 원한 우씨 왕후
오래도록 바라던 왕자를 얻은 산상왕은 그해 10월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옮겼다. 재위 2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여 13년에 완성을 본 것이니, 축성기간만 11년이 걸린 셈이다.
산상왕은 재위 13년에 주통촌의 여인에게서 아들 ‘교체’를 얻었고, 재위 17년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태자 교체는 15세의 나이에 아들 연불(然弗)을 얻었다.
이때 왕손(王孫)을 얻은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혈통이 없어 형제끼리 싸움이 일어나는 변란을 겪은 그로서는 왕손을 얻게 되자, 비로소 ‘형제상속’이 아닌 ‘부자(父子)상속’으로 왕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재위 31년 5월에 산상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씨 황후는 살아 있었다.
산상왕의 뒤를 이어 태자 교체가 고구려 제11대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동천왕(東川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매우 착하여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소후뿐만 아니라 부왕의 정실인 왕후 우씨에게도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우씨 왕후는 산상왕이 죽고 나서 동천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은근히 그의 심성을 떠보고 싶었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씨 황후는 동천왕의 측근에서 보위하는 신하를 한 명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몰래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라 보시오.”
그때까지도 우씨 왕후는 새로 즉위한 동천왕보다 실제적으로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을 들은 신하는 명령대로 감히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랐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도다.”
동천왕은 애마의 말갈기를 자른 신하를 찾아내 벌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의 가련한 모습만 안타까워했다.
우씨 왕후는 그래도 동천왕의 성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가식적으로 온화한 성격인 척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험을 해 보기로 하고, 대왕의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를 불러 말했다.
“수라상을 들여갈 때 일부러 대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도록 하여라.”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는 곧 우씨 왕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동천왕은 그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동천왕이 왕위에 오른 후, 우씨 왕후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처지였다. 동천왕은 소후의 아들이므로 비록 산상왕 정실인 우씨 왕후였지만 자신이 왕태후(王太后)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씨 왕후는 두 번에 걸쳐 동천왕을 시험해 보고 나서 적이 안심이 되었다. 과연 재위 2년 2월에 동천왕은 졸본의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대사면했으며, 그해 3월에는 우씨 왕후를 ‘왕태후’로 삼았다.
우씨는 동천왕 8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태후’로서 대왕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종을 맞았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일찍이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많은 과오를 범하였으니, 어찌 국양(고국천왕)을 지하에서 뵐 수 있으리오. 그러하니 만일 내가 죽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시오.”
《삼국사기》에는 왕태후 우씨가 유언대로 산상왕 곁에 묻혔을 때의 기록 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무자(巫者·무당)가 말하기를, “국양왕(고국천왕)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그와 싸움을 하였다. 그런 연후 물러나와 생각하니 안후(顔厚·낯이 뻔뻔함)하여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너는 조정에 고하여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능(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지하에 묻힌 혼령까지 이처럼 진노를 했다면, 당시 고구려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왕태후 우씨의 ‘취수혼’ 풍습에 대한 금기 깨기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우씨 왕후의 ‘취수혼 사건’ 이후 왕계(王系)의 변화가 있었다. 즉 형제상속 제도가 거의 사라지고 장자(長子)상속으로 이어져 왕위계승으로 인한 왕족 간의 불협화음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왕계의 변화가 없었다면, 고구려는 왕이 죽을 때마다 삼촌과 조카 간의 왕위 다툼으로 인해 정국(政局)이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른다.⊙
우씨녀를 왕후로 맞은 백고가 바로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명림답부 이래로 연나부 세력은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여 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 어비류(於畀留)와 평자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우씨 왕후의 친척인 연나부 세력이었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자제들 역시 남의 여자를 빼앗고 전택을 몰수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이때 고국천왕은 죄로써 그들을 주벌하려고 하자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켜 왕도를 쳤다.
고국천왕은 재위 13년에 좌가려의 반란을 토벌하였고, 이로써 우씨의 친정 세력인 연나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우씨 또한 남편인 고국천왕 앞에 낯을 들 입장이 못 되었다. 이때 고국천왕은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과감하게 서압록곡에 은거하고 있던 유리왕조(琉璃王朝)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삼았다. 을파소는 연나부 세력을 견제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는 등 나라 정치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5월에 병고로 죽으면서 다시 연나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 중심에 바로 우씨 왕후가 있었다.
당시 고국천왕과 우씨 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왕의 형제들이었다. 4형제 중에서 고국천왕이 첫째였고, 그 다음 둘째가 발기(勃岐), 셋째가 연우(延優), 그리고 넷째가 계수(罽須)였다. 그러므로 다음 왕위는 둘째인 발기가 이어받아야 할 차례였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한 슬픔보다 어떻게 하면 약화된 연나부 권력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지에만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왕후 자리를 계속 이어가고, 친정인 연나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왕위에 오를 둘째 왕제 발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발상(發喪)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당시 고구려에는 취수혼(娶嫂婚) 제도가 있었다. 즉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이었다. 역사학자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취수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취수혼에서 망형(亡兄)의 처를 취하는 차례는 형제의 연령순이다. 단 미혼의 동생이 있을 경우 일반민에게 있어서는, 귀족은 구애되지 않지만, 그가 우선적일 수 있다. 이는 혼납금(婚納金)을 마련하기 어려운 데 따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이때 ‘혼납금’은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집에 보내는 돈으로, 일종의 ‘신부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왕실의 경우 혼납금이 아까워 장가를 들지 못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가난한 일반인들 사이에서 혼납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혼을 못한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를 취하여 결혼을 하는 사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왕실이라고 ‘취수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억지로 일반인들의 풍습에 따른다고 하면, 우씨 왕후는 결혼한 발기가 아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셋째 왕제 연우와 결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발기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처는 왕후가 된다. 한때 우씨 왕후의 아래동서였던 발기의 처가 왕후가 된다는 사실도 가슴 아픈 일인 데다, 연우와 결혼하면 완전히 자신의 처지가 위에서 아래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계속 자신이 왕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왕위가 형에서 동생으로 뒤바뀌다
한밤중에 우씨 왕후는 남편 고국천왕의 시신을 궁궐 깊은 곳에 숨겨둔 채 둘째 왕제 발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에겐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왕위를 계승하시오.”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꺼내지 않고 먼저 그렇게만 말했다.
잠을 자다 나온 발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발기는 아직 왕이 죽은 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다음 왕위를 논하는 것도 해괴한 일일 뿐더러, 한밤중에 왕후인 형수가 헐레벌떡 달려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운행이 따로 돌아가고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왕후께서 이 밤중에 홀로 나와 다니니, 이는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 생각됩니다.”
발기는 형수인 우씨 왕후를 점잖게 훈계하여 돌려보냈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우스운 꼴만 당하자 도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셋째 왕제인 연우의 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 우씨 왕후를 맞았고, 집안으로 안내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창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누가 들을까 무서워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대왕이 세상을 떠나셨소.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후사가 없습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둘째 발기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는 나에게 딴마음이 있다고 폭언하면서 오만무례한 행동을 하였소.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대를 보러 온 것이오.”
연우는 우씨 왕후의 말을 듣고, 곧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지금 형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형 발기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우씨 왕후를 더욱 극진히 대접했다.
이때 연우는 예의를 다하여 우씨 왕후를 대접하려고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다. 이것을 본 우씨 왕후가 얼른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시동생의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 주었다. 그것으로 곧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통했다.
궁궐로 돌아가려고 할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넌지시 말했다.
“밤이 깊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대가 나를 궁궐까지 바래다 주시오.”
연우가 흔쾌히 승낙하자, 우씨 왕후는 곧 그와 함께 궁궐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대왕의 유언이라며, 발기가 아닌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하룻밤 사이에 왕위가 형에서 아우로 뒤바뀐 것이었다.
발기는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죽으면 당연히 둘째인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동생 연우가 우씨 왕후와 결탁하여 고구려 제10대 왕위에 오르자 그는 크게 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인데 너는 그 순차를 뛰어넘어 왕위를 찬탈했다. 너의 죄가 크니 어서 나와 이 형의 칼을 받아라.”
발기가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의 성문 앞에 나타나 이렇게 외쳤으나, 동생 연우는 3일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연우는 왕위에 올랐으며, 우씨 왕후와 결혼한 사이였다. 즉, 고구려 왕후 중에서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연우)까지 두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여인이었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는 연우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녀를 둘러싼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 우씨 왕후가 상사(喪事)도 알리기 전에 밤길을 이용해 급히 발기를 찾아간 것은 이미 연나부 세력과의 음모에 의한 수순 밟기에 다름 아니었다. 그 음모의 단서가 바로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 있다.
〈처음 고국천왕이 돌아갔을 때 왕후 우씨는 (喪事를) 비밀에 부쳐 발상(發喪)치 않고 밤에 왕제(王弟) 발기(發岐)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사(後嗣)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고 하였다.〉
이 기사 속에 우씨 왕후와 연나부 세력의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씨 왕후는 발기에게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다만 왕위를 계승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만약 그 죽음을 알렸다면 발기는 당장 궁궐로 달려가 왕위를 계승하고, 고구려 제10대 왕의 자격으로 고국천왕의 장례를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씨 왕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기에게 질책만 듣고 그의 집에서 나온 후 미리 연나부 세력과 짜 놓은 계획에 따라 그날 밤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곧바로 셋째 연우의 집을 찾아간 우씨 왕후의 행동 속에 또 음모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다시 인용해 본다.
〈후(后)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장(長·어른)이 되어 의당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더러) 이심(異心)이 있다 하고 포만무례(暴慢無禮)하므로 (지금) 숙(叔·아제)을 보러 온 것이오” 하였다.〉
이 대목을 보면 아주 노골적으로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고 발기 대신 연우에게 왕위에 오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유혹’이다. 연우는 그 유혹을 금세 알아차리고 우씨 왕후의 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이 된 것이다.
발기의 반란
![]() |
개마총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전투장면. 무사와 말 모두 갑주를 입고 있다. |
반란을 일으킨 발기는 자신의 군사가 적은 데다 궁궐 안에서 동조하는 세력이 없자 식구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났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男武)의 동모제(同母弟)인데,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으니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고 즉위하여 천륜(天倫)의 의(義)를 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上國)에 와 의탁하는 것이니 원컨대 나에게 군사 3만을 주면 아우 연우의 군사들을 평정코자 합니다.”
발기가 말하는 ‘남무’는 고국천왕의 이름이고, ‘동모제’란 같은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난 동생을 뜻한다.
요동태수 공손도는 발기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손쉽게 고구려를 후한(後漢)의 속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손도는 선뜻 발기에게 군사 3만을 내주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쳐들어갔다. 그 소식을 들은 산상왕 연우는 아우 계수를 시켜 발기의 군사와 맞서 싸우게 했다.
이때 계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명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명을 받아 형 발기와 맞서 싸우기도 곤란했다. 일단 그는 지엄한 왕명을 어길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발기가 지휘하는 후한의 3만 군사와 결전을 벌였다.
계수가 선봉장이 되어 이끈 고구려 군사들은 날래고 용맹하여 후한의 군사들이 당하지 못했다. 더구나 후한의 군사들은 고구려의 발기가 대장군이라는데 불만이 많은 데다, 왜 그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도무지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 오면 후한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발기는 아우 계수를 보고 외쳤다.
“네가 지금 이 형을 죽이려 하느냐?”
“연우 형님이 왕위를 형님에게 사양치 않는 것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발기 형님께서 그 분을 참지 못해 다른 나라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멸하려 들다니,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들을 뵈올 작정이십니까?”
발기는 동생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났다. 계수는 형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발기는 후한의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끝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 발기의 주검을 본 계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초장(草葬)을 지냈다. 나중에 다시 왕명을 받아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기로 하고 풀로 시체를 덮어 임시로 무덤을 만들어 둔 것이다.
![]() |
고구려 벽화 무용총의 접객도. 주인과 손님의 모습을 크게, 하인의 모습을 작게 그려 놓았다. |
“결국 발기 형님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였습니다. 형제끼리 의를 저버려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산상왕은 따로 술상을 마련하고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닌 형제의 정을 다지는 자리에서 계수에게 이렇게 질책했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청병(請兵)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은 대단히 큰 죄다. 이제 네가 그의 군사를 쳐 크게 이겼으나 도망가는 것을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살을 한 것인데, 너는 왜 슬피 울며 나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계수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신(臣)은 지금 한마디 말씀을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산상왕이 물었다.
“그 청이 무엇이냐?”
“왕후(우씨)가 비록 선왕의 유명(遺命)을 가지고 대왕을 세웠다 하나, 대왕이 예로써 사양치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로서의 의리가 없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덕을 널리 알리려고 발기 형님의 시체를 거두어 초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지금 대왕께서 진노하시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만일 인자한 성품으로 모든 것을 잊고 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을 의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씀을 사뢰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을 죽여 주십시오.”
산상왕은 이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앉으며 계수에게 자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너를 질책하였구나. 지금 네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허물이 무엇인지 알겠노라. 너의 충정과 형제애를 알았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이에 계수는 벌떡 일어나 산상왕에게 절을 한 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며 형제애를 돈독히 했다.
곧 산상왕은 신하들을 시켜 발기의 시신을 모셔다 왕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
주통촌 여자의 몸에서 왕자를 얻은 산상왕
![]() |
삼실총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여인. 평민으로 보인다. 주통촌 여인은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
재위 7년 3월에 산상왕이 산천에 기도를 하였더니 15일 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근심하지 말라.”
산상왕은 꿈에서 깨어나 여러 신하가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꿈에 천신이 나타나 나에게 말하기를 소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정작 나에게는 소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재상 을파소가 대답했다.
“천명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저 기다리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을파소는 죽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고우루(高優婁)가 재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재위 12년 11월의 일이었다. 산상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할 때 제상에 올릴 교시(郊豕·돼지)가 달아났다. 그 돼지를 잡으려고 담당 관리가 쫓아가다 보니 주통촌(酒桶村)이란 마을에 이르렀다. 아무리 쫓아가도 관리는 달아나는 돼지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을에 사는 20세쯤 된 아름다운 여인이 앞질러 가서 돼지를 잡아 주었다.
이렇게 겨우 돼지를 잡아 가지고 돌아온 관리가 산상왕에게 주통촌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대왕은 이상히 여겨 밤에 몰래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같이 간 신하를 시켜 그 여자와 하룻밤 정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그 여자의 집에서는 대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그 청을 거역하지 못했다.
여자의 부모가 허락하자, 산상왕은 곧 방에 들어가 그녀와 마주보고 앉으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대왕의 명을 감히 어길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아이가 생기면 부디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하룻밤의 정을 나눈 뒤 환궁했다.
산상왕 재위 13년 3월에 우씨 왕후가 주통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투기(妬忌)를 하여, 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했다. 그 여자가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남자 복장을 하고 달아났으나, 곧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때 주통촌 여자는 왕후가 보낸 군사에게 말했다.
“너희가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대왕의 명령이냐, 아니면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나의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다. 만약 나를 해치게 되면 왕자를 죽이게 되는 것이니 그리 알라!”
그러자 군사는 감히 여자를 해치지 못하고 돌아가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왕후는 어떡하든 그 여자를 죽이려고 패악을 떨었으나 끝내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이야기가 산상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때 대왕은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지금 아이를 배었다 하니, 그것이 누구의 아이냐?”
“신첩이 평생 형제와도 동석치 않거늘 하물며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겠나이까? 지금 복중에 있는 아이는 대왕의 핏줄이 틀림없사옵니다.”
산상왕은 그 여자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고 돌아와, 우씨 왕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마침내 왕후도 어쩌지 못하고 그 여자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해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낳자,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오,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주셨구나.”
산상왕은 처음 ‘교시(郊豕)’가 달아나 여자를 얻은 것이므로,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 주통촌 여인을 ‘소후(小后)’로 삼았다. 처음 소후를 낳을 때 그 어머니는 해산하기 전에 무당으로부터 “왕비를 낳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지었는데, 정말 나중에 그 이름대로 되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바라던 왕자를 얻은 산상왕은 그해 10월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옮겼다. 재위 2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여 13년에 완성을 본 것이니, 축성기간만 11년이 걸린 셈이다.
산상왕은 재위 13년에 주통촌의 여인에게서 아들 ‘교체’를 얻었고, 재위 17년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태자 교체는 15세의 나이에 아들 연불(然弗)을 얻었다.
이때 왕손(王孫)을 얻은 산상왕은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을 혈통이 없어 형제끼리 싸움이 일어나는 변란을 겪은 그로서는 왕손을 얻게 되자, 비로소 ‘형제상속’이 아닌 ‘부자(父子)상속’으로 왕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재위 31년 5월에 산상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씨 황후는 살아 있었다.
산상왕의 뒤를 이어 태자 교체가 고구려 제11대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동천왕(東川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매우 착하여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소후뿐만 아니라 부왕의 정실인 왕후 우씨에게도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우씨 왕후는 산상왕이 죽고 나서 동천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은근히 그의 심성을 떠보고 싶었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씨 황후는 동천왕의 측근에서 보위하는 신하를 한 명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몰래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라 보시오.”
그때까지도 우씨 왕후는 새로 즉위한 동천왕보다 실제적으로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을 들은 신하는 명령대로 감히 대왕이 타는 애마의 말갈기를 잘랐다.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도다.”
동천왕은 애마의 말갈기를 자른 신하를 찾아내 벌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의 가련한 모습만 안타까워했다.
우씨 왕후는 그래도 동천왕의 성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가식적으로 온화한 성격인 척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험을 해 보기로 하고, 대왕의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를 불러 말했다.
“수라상을 들여갈 때 일부러 대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도록 하여라.”
수라상을 담당하는 시녀는 곧 우씨 왕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동천왕은 그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동천왕이 왕위에 오른 후, 우씨 왕후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처지였다. 동천왕은 소후의 아들이므로 비록 산상왕 정실인 우씨 왕후였지만 자신이 왕태후(王太后)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씨 왕후는 두 번에 걸쳐 동천왕을 시험해 보고 나서 적이 안심이 되었다. 과연 재위 2년 2월에 동천왕은 졸본의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대사면했으며, 그해 3월에는 우씨 왕후를 ‘왕태후’로 삼았다.
우씨는 동천왕 8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태후’로서 대왕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임종을 맞았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일찍이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많은 과오를 범하였으니, 어찌 국양(고국천왕)을 지하에서 뵐 수 있으리오. 그러하니 만일 내가 죽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주시오.”
《삼국사기》에는 왕태후 우씨가 유언대로 산상왕 곁에 묻혔을 때의 기록 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무자(巫者·무당)가 말하기를, “국양왕(고국천왕)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그와 싸움을 하였다. 그런 연후 물러나와 생각하니 안후(顔厚·낯이 뻔뻔함)하여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너는 조정에 고하여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능(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지하에 묻힌 혼령까지 이처럼 진노를 했다면, 당시 고구려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왕태후 우씨의 ‘취수혼’ 풍습에 대한 금기 깨기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구려는 우씨 왕후의 ‘취수혼 사건’ 이후 왕계(王系)의 변화가 있었다. 즉 형제상속 제도가 거의 사라지고 장자(長子)상속으로 이어져 왕위계승으로 인한 왕족 간의 불협화음을 막았던 것이다. 이러한 왕계의 변화가 없었다면, 고구려는 왕이 죽을 때마다 삼촌과 조카 간의 왕위 다툼으로 인해 정국(政局)이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