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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2〉 항구를 지배하는 자가 일본을 지배한다

글 : 신상목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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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니와(오사카), 古代의 對한반도 교역항… 닌토쿠·고토쿠 천황이 도읍으로 삼아
⊙ 對宋 무역의 중심지 하카타, 상인들이 자치권 행사한 일본 최초의 자치도시
⊙ 사카이, 포르투갈·일본·중국 三角무역 체제에 발빠르게 적응… 뎃포(鐵砲) 등 전략물자 공급지로 급성장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오사카의 사카이항은 16세기 서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자 상공업 중심지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은 하늘길이 열리기 전까지 외부 문명과의 접촉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필연적으로 바닷길 출입구에 해당하는 항구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은 ‘항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항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각 역사 발전 단계에서 어떠한 문명이 어떻게 유입되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일본의 항구들은 그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경제, 기술, 문화 제반 측면에서 여타 지역의 우위에 서게 되는 항구 지역은 권력자들에게는 최중요 전략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있다. 발달된 외부 문명과의 연계를 확보할 수 있는 항구를 지배하는 자는 일본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구는 일본 역사의 수레를 굴리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대 한반도 교류 창구 ‘나니와’
 
오사카 나니와는 견당사나 견수사의 출발지였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오사카(大板)이다. 오사카의 옛 이름은 ‘나니와’(難波, 浪速, 奈波 등 다양한 한자 표기가 있다)다. 나니와는 일본의 고대사(古代史)에서 대(對)한반도 교류 창구로서의 의미가 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의 문물 전수에 국가 발전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도래인(渡來人)들은 야마토(大和) 정권의 국가 체계 확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한반도인들이 야마토 정권의 핵심부인 나라(奈良) 일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규슈를 거쳐 세토 내해(內海)에 진입하여 나니와에 상륙한 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시간과 불편을 줄일 수 있었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들이 이용한 길이기도 하다.
 
  7세기 이후 선진 문물 도입을 위해 중국에 파견된 견수사(遣隋使)나 견당사(遣唐使)가 출발지로 삼은 곳도 나니와 인근 스미요시(住吉)였다. 세토 내해의 동단(東端)이자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하여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할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뱃길이 가장 효율적인 교통로였다는 점과 나라와의 지리적 접근성 등을 감안할 때, 나니와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야마토 정권이 나라분지 일대에 도읍을 잡고 그 주위를 맴돈 사정도 대외교류 창구인 나니와 일대와의 연계를 의식하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특이하게 몇몇 시기에는 아예 나니와로 수도를 이전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제16대 닌토쿠(仁德) 천황이 나니와에 다카쓰궁(高津宮)을 조성하여 도읍으로 삼는 한편, 일대의 하천과 제방을 정비하고 농경지를 넓히며 선정(善政)을 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왕조 연대를 기계적으로 서력(西曆) 환산하면 4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어지럽게 흘러내리는 하천이 뒤엉켜 사구(砂丘)와 갯벌로 이어지던 하구(河口) 지형의 나니와를 바다 진출입과 인간 거주에 용이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위적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36대 고토쿠(孝德) 천황 재위기(645~654년)에 나니와는 다시 한 번 도읍이 된다. 고토쿠 천황은 일본 율령제의 기틀을 다진 다이카(大化) 개신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천도의 상징인 나니와궁의 유적이 현재 오사카성(城) 공원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에 남아 있다.
 
 
  한반도 관련 지명 많이 남아 있어
 
  나니와로의 천도가 이루어진 시기는 일본과 한반도(및 대륙)의 관계가 큰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들과 겹친다. 4세기 초반은 일본과 한반도 간의 교류가 본격화되는 시기로, 이후 일본 정세는 한반도 정세에 의해 직·간접적 영향을 받게 된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의 남진(南進)정책으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자, 일본의 한반도 개입도 정도와 규모를 더해 간다. 야마토 조정은 백제와 밀착된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에 따른 인적·물적 교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활발해져, 당시 야마토 정권은 남북조시대의 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 등에 총 12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국교 수립에 나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에 접어들어 동아시아 정세는 큰 변혁기를 맞는다. 중국 대륙에서는 당(唐)이 건국(618)되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 멸망(660), 고구려 멸망(668), 신라의 당 축출과 삼국통일(676), 발해 건국(698) 등 일본의 대외관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환경 변화가 있었다.
 
  당시 야마토 조정으로서는 동맹관계·적대관계, 그리고 내부 권력관계에 유의하며 인원·물자의 대외 유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었다. 야마토 조정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체재하던 백제 왕자 부여풍에게 5000명의 호위병을 제공하여 귀국을 지원하고, 663년에는 2만이 넘는 병력을 출병시켜 백제·왜 연합군을 구성하여 나당 연합군에 맞선다. 소위 ‘백촌강 전투’로 알려진 국제전이다. 기타(北)규슈 지역이 도해(渡海)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나, 조정이 국가적 군사 자원 동원에 나설 때 기점으로 활용된 곳이 나니와였고, 고구려, 백제 멸망 후 대량의 유민(주로 백제계)이 유입된 곳도 나니와였다.
 
  나니와는 고대 시기 부도(副都) 또는 수도로 기능한 정치 중심지였고, 이러한 지위는 외부 교류, 특히 대한반도 교류 창구라는 입지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이러한 영향으로 구다라다이지(百濟大寺), 구다라오진자(百濟王神社), 구다라가와(百濟川), 구다라바시(百濟橋), 고라이초(高麗町), 고라이바시(高麗橋) 등 많은 한반도 유래 유적지나 지명이 남아 있다. 나니와는 9세기 이후 한반도와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정치 중심지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나니와의 위상을 바탕으로 인근 와타나베쓰(渡津, 오사카의 중심지 요도가와·淀川의 하구에 위치한 항만)에 항구 인프라가 형성되면서 오사카만(灣) 일대가 서일본의 물산 집산지로 기능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對中 무역 관문 하카타
 
하카타는 몽골 침략 당시 몽골-고려 연합군의 상륙지점이었다.
  지금의 후쿠오카(福岡)시에 해당하는 하카타(博多)는 고래(古來)로 외교·국방상의 요충지이자 한반도 및 중국과의 교류 관문으로 중시된 해상 교통 요지이다. 견당사 폐지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일본의 대중(對中)관계는 11세기 이후 송(宋)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하카타는 대송(對宋) 교역의 중심지였다. 하카타에는 수많은 송상인들이 무역선단을 꾸려 왕래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인 거리가 조성되고 중국식 사찰과 건물이 건축되는 이국적 풍경의 국제화된 도시로 변모한다. ‘강수’(綱首)라 불린 송상인들은 당방(唐房)이라 불리는 거주지에 체류하며 하카타의 유력 상인·호족·승려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송의 문물이 일본으로 대거 유입된다. 만두·우동·소바 등 오늘날 일본인들이 즐기는 먹거리도 이 시기에 하카타를 통해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세기 이후 원(元)·고려 연합군 침공, 왜구 발흥 등으로 침체하던 하카타의 대외무역은 14세기 후반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다이묘(大名) 세력을 제압하고, 1401년 명(明)에 조공(租貢)무역을 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한다.
 
  고이토미(肥富)라는 하카다의 상인이 대명무역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과의 사무역(또는 밀무역)에 종사하던 하카타 상인들은 중국에서 생사(生絲)를 들여오면 20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으며, 일본의 동(銅)을 중국에 가져가면 4~5배의 가격에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이토미는 대명무역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을 쇼군에게 진언했고, 막부의 권력 강화에 골몰하던 요시미쓰로서는 명과의 무역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고이토미는 1401년 최초의 견명선(遣明船)에 부사(副使)로 승선하여 중국으로부터 조공무역 허가를 얻어내는 데도 직접 참여하였다고 한다. 상인들은 성사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대명무역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이때의 대명무역을 명 조정의 공인을 상징하는 감합부(勘合符)를 사용하였다는 의미에서 ‘감합무역’이라고 한다. 일본의 감합무역은 조선의 대명무역과 성격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의 대명무역이 사대(事大)관계 수립이라는 외교적 고려에 1차적 목적이 있었다면, 일본의 감합무역은 권력 유지에 부심하던 막부의 무역 권익 확보와 그를 통한 권력 기반 강화라는 국내 정치·경제적 동기가 컸다. 무역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을 목도한 막부로서는 다이묘·상인·왜구 등 사적 행위자들의 사무역을 규제하고 무역 이익을 최대한 점유하기 위해 대중국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방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일본 최초의 자치도시
 
  하카타의 상인들이 중국·조선·류큐 등지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면서 하카타의 위상도 변화한다. 하카타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자치(自治)도시로 알려져 있다. 중세 유럽의 자치도시처럼 자체 방어력과 주변 영주와의 계약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강력한 자치권은 아니었으나, 소정의 세금을 납부하면 상인 협의체가 자체 규약에 따라 민생·치안·분쟁해결 등 행정·사법에 해당하는 일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대외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정치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상업 세력과 권력 강화를 위해 그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던 정치 세력 사이에 긴장과 협력의 이중관계 형성을 의미한다. 오우치(大內)·오토모(大友)·모리(毛利)·류조지(龍造寺)·시마즈(島津) 가문 등 유력 다이묘들이 규슈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카타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카타를 접수한 다이묘들은 상인들의 자치를 용인하고 부국강병 관점의 협업(協業) 관계를 구축하는 실리를 취하였다.
 
 
  사카이의 등장
 
16세기 사카이는 대상인들의 회의체가 다스리는 자치도시였다.
  하카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감합무역은 또 다른 무역항인 사카이(堺)의 성장을 불러온다. 사카이는 지금의 오사카부(府) 중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사카이는 세토 내해의 항로를 따라 도달할 수 있는 동쪽 끝이다. 그 이상 배가 동쪽 태평양 연안으로 항해하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출발한 배는 자연스럽게 사카이에서 항해를 마감한다. 많은 도래인들의 상륙지였던 탓에 사카이에는 도래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스에키(須器)라 불리는 한반도(특히 가야) 유래의 도질토기(陶質土器) 등이 대표적 예이다.
 
  사카이에는 일찍부터 가와치이모지(河內物師)라 불린 철장(鐵匠)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또한 도래인들이 남긴 유산으로 추정된다. 규슈와 서일본 일대에서 채취된 철이 뱃길을 타고 사카이로 운송되어 오면 사카이의 철장들이 발달된 야금술(冶金術)로 각종 철제 도구를 제작하여 일본 전역에 유통시켰다. 대형 범종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물품이 사카이에서 전문적으로 제작되었고, 사카이에서 제작된 도검(刀劍)류는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그 우수함으로 무가 사이에 정평이 나있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사카이는 상업항구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14세기까지는 물동량이 크지 않은 포구에 불과했으나, 15세기 들어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16세기에는 서(西)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자 상공업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사카이는 간사이(關西) 일대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육로가 지나는 교통요지이다. 해로와 육로가 만나는 물류 허브로서의 잠재력이 큰 곳이었고, 감합무역은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합무역은 견명선(遣明船)이라 불린 무역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척당 100~150명이 탑승하는 대형선박 7~8척이 선단을 구성하여 파견되는 대규모 무역사절단이다. 견명선은 당초 막부가 직접 경영하였으나, 응인(應仁)의 난(1467~1477년) 이후 막부의 약체화와 재정난으로 인해 유력 다이묘, 사찰 등이 점차 운영 주체로 나서게 된다. 사카이를 비호하는 호소카와(細川) 가문과 하카타를 비호하는 오우치(大內) 가문은 견명선 운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대표적 다이묘들이다. 견명선에는 하카타 또는 사카이의 상인들이 동승하여 공무역에 수반된 공인(公認) 사무역을 수행했다. 막부는 이들에게 수입물품 가액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추분전(抽分錢)이라는 명목으로 징수하였고, 이는 재정난으로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막부에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응인의 난 이후 사카이는 기존의 효고(兵庫)를 대체하여 견명선의 모항(母港)이 된다. 견명선이 발착(發着)하는 거점이 되면서 사카이는 대명무역의 수혜를 독식하다시피 하며 상업 중심지로 급성장한다. 이즈음 막부는 추분전을 견명선 출항 전에 정해진 액수를 미리 내도록 하는 선납제로 변경하고, 그 징수 사무를 사카이 상인들에게 위임한다. 이로 인해 사카이 상인들이 실질적으로 견당선의 승선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고, 대명 무역항으로서의 사카이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진다.
 
  16세기에 들어 최대 무역항으로 번성하게 된 사카이는 하카타와 마찬가지로 자치도시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명목상의 지배자는 있지만, 에고슈(會合衆)라는 대상인 회의체가 도시의 주요 사항을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체제였다.
 
  사카이의 상인들은 외부 침입 방어를 위해 도시 주변에 해자(垓字)를 조성할 정도로 자치에 대한 의식이 높았다. 무가(武家)나 대사찰 등 특권 계급이 아닌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호(濠)를 파고 외침 방비(防備)에 나선 것은 일본 역사에서도 희소한 사례이다. 일본에서는 사카이를 호가 둘러싼 도시라는 의미에서 환호도시(環濠都市)라고 부르기도 한다.
 
  16세기 중반 사카이를 방문한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빌렐라는 〈야소회사일본통신〉에서 “사카이는 거리가 매우 광대하며 많은 대상인들이 있다. 이곳은 베니스처럼 집정관(執政官)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기술한 바 있다. 사카이가 ‘동양의 베니스’가 된 셈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탐낸 도시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기 손에 넣었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의 일본 진출 이후 사카이의 전략적 중요성은 한층 높아진다. 이 시기에는 감합무역이 폐지되고 포르투갈-일본-중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동중국해 일대에서 전개되는데, 사카이 상인들은 누구보다 재빠르게 이러한 환경 변화에 적응한다. 사카이 상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반입된 핵심 전략물자인 뎃포(鐵砲)를 남들보다 앞서 국산화하여 생산하는 한편, 히라도(平戶), 나가사키(長崎) 등 남만무역항에 자체 유통망을 구축하여 남만철·화약·탄환·면포 등 뎃포 운용에 필요한 전략물자를 서일본 일대에 공급한다. 전국시대 다이묘들 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사카이의 뎃포와 전략물자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번성 가도를 달린다.
 
  사카이의 운명은, 사카이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카이에 눈독을 들이면서 일변한다. 뎃포·도검류 최대 생산지인 사카이는 단순한 상업도시 또는 무역항을 넘어 군수(軍需)도시이기도 했다. 사카이를 손에 넣는 것은 무기고와 금고를 동시에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쇼군 옹립에 공을 세운 대가로 교토 일대를 관할하는 간레이(管領) 취임을 제안받는다. 노부나가는 이를 사양하고, 대신 구사쓰(草津)·오쓰(大津)와 함께 사카이를 자신의 관할지로 양허해 달라고 요구해 이를 관철시킨다. 다른 다이묘들이 높은 관직을 탐할 때 부국강병 관점에서 실리를 취한 노부나가의 전략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카이를 관할지로 삼은 노부나가가 2만관(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상당)의 군자금을 사카이에 부과하자, 사카이의 상인들은 납부를 거부한다. 상인들이 오히려 해자를 깊게 파고 야구라(櫓·방어용 건물)를 세우는 등 항전의 뜻을 내비치자, 노부나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1만의 군사를 보내 무력으로 사카이를 제압한 후, 고율의 세금 징수와 자치권 박탈로 명령 불복을 응징한다. 기존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기득권을 양해 받을 여지가 있었을 것이나, 쇼군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보유한 노부나가가 마음을 먹은 이상 사카이가 자치를 유지할 방도는 없었다. 사카이가 가져다주는 금력과 무력을 손에 넣은 노부나가는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듯 천하통일을 향해 본격적으로 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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