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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 物語 〈20〉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을 가른 ‘팩토리’

글 : 신상목  (주) 기리야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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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네덜란드, 전 세계 해양을 연결하는 무역망 ‘팩토리’ 건설
⊙ 중국은 광주13공행, 일본은 나가사키 데지마 만들어 ‘팩토리’에 대응
⊙ 일본, 기독교 믿는 다이묘 등장, 자기들과 무역하지 않는다고 포르투갈과 무력분쟁 일으키기도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포르투갈은 해외 무역거점이었던 ‘팩토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해양을 지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 또는 문명권에는 사활적(死活的) 이익이 달린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주요 해양로에 위치한 지정학적 거점은 어느 세력이 그곳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갈릴 정도로 국가 또는 문명권의 흥망성쇠에 큰 의미를 갖는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선구로 촉발된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의 개념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소위 ‘팩토리’(factory)의 등장이다.
 
  팩토리는 (물건을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적 용어로서, 중세 말부터 근세에 걸쳐 원거리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한 무역항을 뜻한다. 본래는 특정 건물을 지칭하였으나, 점차 기능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무역지대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팩토리의 원형은 중세 유럽의 무역동맹인 한자(Hansa)동맹의 ‘칸토’(contor)에서 찾을 수 있다. 칸토란 한자동맹의 길드가 하안(河岸)이나 해안 도시에 설치한 역외(域外) 물산 집산지를 말한다. 한자동맹의 길드는 수상운송이 편리한 지역에 물류창고, 거래소, 사무소 등으로 이루어진 단지를 건립하고 지역 통치자와 계약을 맺어 이들 시설에 대한 일정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일종의 초기 형태의 자유무역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 해양제국의 기초가 된 팩토리
 
  대항해 시대의 물꼬를 튼 포르투갈은 칸토를 모델로 주요 해양로 거점에 무역관을 설치하였는데, 이 무역관의 명칭이 팩토리(포르투갈어로는 ‘feitoria’)이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서안(西岸)을 거쳐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서안을 거슬러 올라온 후, 아라비아해를 건너 인도양, 남중국해, 동중국해에 이르는 동서교통 해양로를 개척하고 장악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미증유의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하는데, 이 해양제국의 기초가 된 것이 바로 팩토리이다.
 
  포르투갈의 팩토리는 한자동맹의 칸토와 달리 이(異)문명 지역을 대상으로 설치되어야 했다. 오랜 항해 끝에 인종, 언어, 종교, 문화, 제도, 관습 등 제반 삶의 양식을 달리하는 이질적 지역과 조우한 후, 그곳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구축하고 생존 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은 사실 유럽인들만이 경험해 본 유럽의 전매특허 역사이다. 여타 인종 또는 민족은 그러한 역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미지 또는 미답의 영역에 발을 내딛고자 하는 강한 욕망은 지금도 유럽 문명을 특징짓는 요소의 하나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정서를 지배하였던 경제적·종교적 열망은 동방 항로를 향한 모험을 촉발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變曲點)을 가져왔다.
 
  목숨을 건 모험이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는 없다. 치명적 리스크를 상쇄하는 보상으로서 독점적 무역이 추구되었고, 그 실현을 위한 장소적 기초로서 팩토리 확보가 최우선적으로 추진되었다. 포르투갈의 팩토리는 현지 세력과의 합의에 의하거나 무주지(無主地)를 평온하게 점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력행사를 통해 강제 점령해야 했다. 현지 세력의 적대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기에 팩토리는 방벽과 포대 등 군사시설을 갖춘 요새와 일체화되는 형태로 건설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친 전성기에 포르투갈은 50개가 넘는 요새화된 팩토리를 구축하였다. 이에는 북유럽의 앤트워프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동안(東岸)의 탕헤르와 세우타, 서안(西岸)의 모잠비크, 아라비아해의 호르무즈, 인도의 고아, 동남아의 말라카, 동중국해의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아우르는 최중요 해상 요충지가 포함되어 있다.
 
  팩토리의 중심에는 리스본에 소재한 인도무역청(Casa da I′ndia)이 있었다. 인도무역청은 팩토리를 관장하여, 해상제국 각지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상품과 보화(寶貨)들을 유럽에 유통시키고 관세를 거둬들이는 왕실 기구이다. 본국의 무역청과 해외 팩토리를 연결하는 해상교역망 구축을 통해 포르투갈은 당대 유럽 최고의 부국(富國)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처럼 팩토리는 해양제국 포르투갈의 힘의 상징이었고 국부의 원천이었다. 대항해 시대를 ‘팩토리의 시대’라고 명명하여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16세기 이후 초기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역사는 팩토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무역 네트워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선박.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아라비아반도-동남아-일본에 이르는 팩토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제해권을 장악한 네덜란드 역시 팩토리를 기초로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어로 ‘factorij’라 불리는 지점간의 네트워크 조직이었다. VOC가 활약하던 시대에는 인도, 동남아 일대의 상업 플랜테이션 진전에 따라 팩토리가 단순한 상품거래소를 넘어 주요 원자재의 1차 상품화를 위한 집산, 가공소로 발전하면서 기능과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VOC의 팩토리가 설립된 대표적인 지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예멘의 모카, 남인도의 캘리컷, 인도네시아의 암본,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 스리랑카의 콜롬보, 포르모사(지금의 대만), 데지마(出島, 지금의 나가사키) 등을 망라한다.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팩토리가 갖는 의미는 많은 지역에서 팩토리가 유럽과 현지 세력 간의 접점이자 유럽 신문물의 창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해양지대는 대항해 시대 이전에는 유럽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봉쇄되어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직접 연결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팩토리는 그 이(異)문명간 연결의 핵심 고리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포르투갈의 해양제국은 영토 획득보다는 무역 이권의 독점을 목표로 형성되었기에 현지 세력과의 관계에서 충돌과 협력의 유인이 공존하였고, 그에 따라 그 관계의 양태도 침략적 수탈과 호혜적 무역이 교차하였다. 일례로 말라카 지역은 토착 이슬람 세력과의 60년에 걸친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면서 지역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나, 명나라로부터 조차한 마카오는 동방의 진주로 불리며 무역항으로 흥성(興盛)하였다. 동서 교류의 지각 변동을 맞아 동아시아 각 지역의 운명은 유럽 세력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의해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 조공무역에서 해관무역으로
 
  16세기 이후 한·중·일 3국의 역사 경로에서 각국 간에 가장 대별되는 지점의 하나가 바로 팩토리에 대한 수용 또는 대응의 역사이다. 명(明)과 그 뒤를 이은 청(淸)의 대외무역은 황제국이라는 이념에 종속되었다. 이에 따라 무역은 경제활동 이전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표하는 의식(儀式)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조공(朝貢)무역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고, 특히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은 해금령을 통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한 중화질서 속에서 팩토리가 중국의 영토에 자리를 잡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1557년 마카오의 일부를 조차하여 팩토리를 건설하였지만, 마카오는 중국 본토와의 교역 창구가 되지는 못하였다.
 
  전기(轉機)가 찾아온 것은 강희제(康熙帝) 연간인 1684년이었다. 청조(淸朝)는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기존의 유명무실한 시박사(市舶司)를 폐지하고 본격 해상무역 관리기관인 해관(海關)을 설치하는 교역 개방 조치에 나선다. 광저우(廣州)의 월해관(粤海關), 하몽(夏門)의 민해관(閩海關), 닝보(寧波)의 절해관(浙海關), 원타이산(雲臺山)의 강해관(江海關) 등 총 네 곳에 해관이 설치되어 외국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되, 청 당국이 교역품을 통제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관리무역 체제가 가동되었다.
 
  이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과의 교역 창구였던 닝보였다.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과 일본으로 향하는 강남(江南)의 물산은 물량 면에서 여타 지역을 압도했고, 중국-일본-유럽을 잇는 삼각무역의 성행으로 유럽 상선들까지 몰려들면서 닝보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최대의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청 조정은 닝보의 독주와 광저우의 상대적 쇠락을 막기 위해 건륭제 연간인 1757년 모든 서양 선박의 기항을 광저우로 한정하는 상유(上諭, 황제의 조칙)를 발령한다. 소위 ‘일구통상’(一口通商) 조치이다.
 
  중국의 항구에서 무역 중개 등의 상행위와 더불어 통관, 관세 징수 등 국가사무를 대리하여 수행하는 업자를 ‘행’(行)이라 한다. 광저우에는 명대(代) 이래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이라 불리는 공행(公行) 연합(십삼행은 관용적 표현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숫자의 행들이 있었다)이 있었다. 이 명칭이 서양에 ‘Kanton thirteen factories’로 알려진다. ‘行’을 ‘factory’로 번역하게 된 것은 유럽인들이 십삼행 소유 건물 또는 부지를 임차하여 광저우에 무역사무소를 두었기 때문이다. 비록 완전한 할양지나 조차지는 아니었으나, 광저우의 팩토리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상주하면서 무역 사무에 종사하고 대중국 통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광저우는 18~19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인들을 비롯한 인도, 아랍의 이국인들이 상주하고 대규모 화물선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국제도시가 되어 상업적으로 큰 활기를 띠면서 흥성하였다.
 
  이 시기의 광저우는 현대인들이 방문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현대의 홍콩을 연상시키는 코스모폴리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광저우를 비롯한 남중국 일대에서는 유럽인들과 2인3각의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한 행상(行商)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신흥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청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무역항을 통해 유럽의 사상과 문물이 자연스럽게 중국 사회에 유입되었다. 남중국 연안과 배후 지역 일대는 섬유, 도자기, 차(茶) 등 수출 품목에 특화된 수공업과 연관 산업이 발달하였고, 그 대가로 유럽과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銀)이 넘쳐나면서 경제는 흥청거렸다. 베이징(北京)의 조정이나 내륙 거주민들은 여전히 중화사상에 젖어 유럽과의 무역을 오랑캐에 대한 시혜적 조치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들 무역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목도하고 경험한 중국인들은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사키 데지마
 
일본은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어 네덜란드와 무역했다.
  16세기 중반 유럽 세력과 최초로 조우한 일본은 누구보다 이 생면부지의 이방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1543년 다네가시마(種字島)에 최초로 발을 내디딘 이래 일본처럼 교역의 물꼬가 순조롭게 트인 곳은 없었다. 일본에 도달하기 전에 거쳐 온 인도, 동남아, 중국 등지에서 적대적 환경 속에서 어렵사리 교역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교역의 문을 열고 자신들을 대하는 일본은 신비하고도 특별한 존재였다.
 
  에도 막부가 1634년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네덜란드 상관을 이전하고, 쇄국정책의 기조하에 데지마를 유럽과의 교역 창구로 열어 두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데지마에 설치된 상관(商館)이 팩토리에 해당하는 시설이다. 네덜란드인들로서는 격리된 협소한 장소에 팩토리를 두는 것이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워낙 일본과의 교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막대하였기에 거액의 사용료를 내면서까지 데지마에 팩토리를 19세기 중반까지 유지하였다. 데지마라는 인공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지만, 사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들이 데지마 조성 이전인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당시 접근해 온 유럽인들에 대해 보인 인식과 태도였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
  포르투갈과 일본 사이에 가장 먼저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히라도(平戶)이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는 1550년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히라도 체재와 선교를 허용하는 대가로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을 유치한다. 마쓰라가 기대한 대로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은 히라도에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기독교 포교로 인한 불교도들과의 마찰로 교회가 불타고 거래 분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살상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포르투갈인들은 1562년 입항지를 인근 요코세우라(横瀬浦)로 옮겨 버린다.
 
  요코세우라의 영주였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안전을 확약하는 한편, 스스로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가 될 정도로 포르투갈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기독교에 귀의한 오무라는 완전히 종교에 심취하여 주위의 친지와 가신에게 개종(改宗)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오무라의 독단적 행동은 곧 가신과 영민(領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오무라를 등지는 가신이 속출하고 요코세우라에 건립된 교회들이 습격을 받아 불타는 등 선교사와 선원들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포르투갈인들은 입항지를 후쿠다우라(福田浦)로 재차 이전한다.
 
  1565년 10월 일본인과 유럽인 간에 벌어진 사상 최초의 무력(武力)분쟁으로 일컬어지는 ‘후쿠다우라 전투’가 발발한다. 후쿠다우라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포르투갈의 선박을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 휘하의 군대가 공격한 사건이다. 마쓰라는 포르투갈인들이 히라도에서의 무역을 거부하고 여전히 오무라의 영지인 후쿠다우라에 입항한 것에 불만을 품고 포르투갈의 캐락선을 공격하는 보복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포르투갈의 화력 앞에 무릎을 꿇고 패퇴하고 만다. 유럽 세력의 접근을 거부하며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곳은 많아도 자신들과 교역을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공격해 온 지역은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1570년 오무라는 더욱 안전한 항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당시 조그만 어촌에 불과하던) 나가사키를 제공하였고, 이후 나가사키는 유럽과 일본을 연결하는 접점이자 유럽의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관문으로 일본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 장소가 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무풍(無風)지대 조선
 
천주교 의식을 거행하는 서양인 사제와 일본인들. 일본 다이묘들은 무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천주교를 수용했다.
  전국(戰國)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 규슈 일대의 다이묘들은 군사적·경제적 힘을 기르기 위해 전력(全力)을 경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하에서 눈앞에 나타난 포르투갈인들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세력에 결부시켜야 하는 포섭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이 여타국과 일본이 가장 대별되는 점이다. 다이묘 간에 기독교 개종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유럽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유럽 세력과의 통교와 신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통해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려 한 대표적 존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에 접어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기독교 포교 세력을 추방하고 일본이 원하는 형태와 방식의 교류만을 남겨두려 하고, 네덜란드가 그에 동의하면서 데지마에 팩토리가 설치되었다. 데지마가 위치한 나가사키는 유럽과의 문물 교류의 관문이자 난학(蘭學)의 중심지로서 200여 년 동안 일본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 되어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선 땅에는 팩토리가 존재한 적이 없다. 벨테브레나 하멜 등 조난에 의해 표착한 경우를 제외하면 조선과 유럽의 본격적인 접촉 자체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0년이나 늦은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상황에서 팩토리가 한국의 역사 속에 자리할 여지가 있을 수가 없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제1차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흐름에서 조선은 완전히 초연(超然)한 무풍(無風)지대로 남아 있었다. 이보다 유럽과의 접촉이 늦고 유럽 문명에 대한 노출 기간이 짧은 지역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토록 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넘보는 나라가 되었으니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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