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갑식의 주유천하 〈22〉 한조해와 한동현 2대(代)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평생 ‘사람을 하늘처럼 여겨라’고 강조하던 그의 유언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국내 최고 명문고 설립한 한조해 선생 부부의 묘는 학생들이 소원 비는 곳
⊙ 젖꼭지가 5개였던 기인… 부모가 궁금해하자 한 역술가, “여러 사람 거둬 먹이라는 뜻”
⊙ 사고당한 후 약 한 번 못 먹고 동생이 사망하자 한의사 될 결심 굳혀
⊙ 공산주의에 환멸, 국군 진격하자 밥 지어주는 군무원으로 취직
⊙ 후암동 한일한의원에서 평생 하루 4시간만 자고 환자 50만명 진료
⊙ 재혼 후 태어난 큰딸이 한의원 앞 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전 재산 들여 학교 설립 추진
⊙ 그 뒤를 이은 한동현 이사장도 아버지 유지(遺志) 21년째 지키고 있어
⊙ 한국의 이튼스쿨 꿈꾸는 공주한일고 한 이사장의 좌우명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를 조심하라’
한조해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본 한일고등학교의 전경.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IC를 나와 자동차로 4분 거리에 충청남도 공주 한일고등학교가 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학교다. 농어촌 일반계 고교지만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능가하는, 전국 최고의 명문고로 꼽힌다. 이 학교에는 내신 석차 최하위 9등급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학교의 위치는 척 봐도 예사롭지 않다. 학생들의 요람(搖籃)을 감싸는 산이 국수봉(國樹峰)인데 야트막한 아홉 개 봉우리가 물결치듯 펼쳐지고 있다. 풍수지리가 사이에서 이 땅은 예부터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明堂)으로 알려졌다. 금닭이 알을 품는 모양으로, 미래 지도자를 길러내는 학교 부지로는 최적이라는 것이다.
 
  닭이 금계가 되려면 주변에 ‘금(金)’자가 들어간 산이 있어야겠다. 그런데 바로 부근에 금동산(金童山)이란 산이 있다. 예부터 명당은 진산(鎭山) 혹은 주산(主山)을 등에 지고 좌우로 좌청룡-우백호를 거느리며 앞으로는 책상 같은 안산(案山)이 있어야 하는데 여섯 봉우리가 파도처럼 넘실댄다. 공교롭게도 골짜기의 이름이 ‘구작골(九爵谷)’이다.
 
  나라 이끌어갈 정승 아홉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구작골에 얽힌 구전(口傳)을 살펴본다. 옛날 신선이 국수봉을 지나다 커다란 박 아홉 개가 열린 형국에 감탄하며 넝쿨의 뿌리 되는 곳에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한다. 이런 지세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무덤이 있다. 상석(上石)도, 비석(碑石)도, 아무 단장 없이 봉분(封墳) 두 개만 덩그러니 보인다.
 
한조해 선생 묘소 옆 나무에 학생들이 달아놓은 이름표.
  유일한 치장이 무덤 좌우에 있는 영산홍 나무다. 그런데 거기에 뭔가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가까이 가보니 학생들이 교복에 다는 이름표다. 어느 날 공부에 지친 한 학생이 자기 이름표를 무덤 옆 영산홍에 걸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신통하게도 학생의 목표가 성취됐고 그 얘기가 퍼지면서 나뭇가지에 걸린 이름표가 해마다 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이름표를 달며 자신의 소원을 빌었고 지하의 한 선생은 제자들이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성심을 다했을 것이다.
  이 전통은 한일고 선배에서 후배들에게 이어지고 있는데 무덤 주인공의 손자도 이 학교에 다니며 이름표를 걸었다는 것이다. 무덤 옆 영산홍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1년 내내 반짝거리는 게 신기하다. 앞에서 볼 때 왼쪽 무덤의 주인공은 한조해(韓祖海) 선생이다. 1913년 함경남도 정평군 봉양면에서 태어나 1997년 세상을 뜬 그는 한일고의 설립자다.
 
  그 옆 오른쪽 무덤에는 2001년 남편의 뒤를 따른 홍종숙 여사가 사이좋게 영면(永眠)하고 있다. 한 선생과 홍 여사는 저승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터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전국 최강의 학교가 된 한일고의 유래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장소를 서울로 옮겨본다.
 
서울 후암동에 있는 한일한의원의 모습.
  서울 남대문경찰서 뒤편 CJ본사 부근 남산 쪽 후암동은 비탈길이다. CJ본사 맞은편에 허름한 4층 건물이 있는데 ‘한일한의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1953년부터 진료를 시작해 올해로 벌써 65년을 맞은 노포(老鋪)다. 이 건물은 1984년 개축했다. 그런데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요즘 건물과 달리 추억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이곳이 한조해 선생이 평생 환자를 돌봐 번 돈을 알뜰히 모아 한일고 만드는 데 바친 터전이다. ‘현제(玄濟)’라는 호를 쓰는 한 선생은 부친 한남(韓南), 모친 윤남(尹南)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 소작농의 장남은 자취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돌아가실 때 남긴 게 안경과 잉크병 등을 합해 작은 보따리 하나 정도였는데 그냥 버렸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 선생은 젖꼭지를 다섯 개 달고 태어났다고 한다. 믿기 어렵지만, 가슴에 두 개, 등에 세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선생의 부모가 근방에 사는 유명한 역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해석은 이랬다. “여러 사람 거둬 먹이라고 젖꼭지가 다섯 개 달렸으니 걱정하지 마라.” 믿기 힘들지만 이런 말은 실제로 전해지고 있다.
 
  한 선생의 가정은 땅 한 마지기 없어 여러 사람을 거둬 먹이기는커녕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이 가족의 유일한 희망은 천도교(天道敎)였다. 천도교의 뿌리는 동학(東學)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해 손병희 선생 대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 종교의 기본은 차별 없는 세상, 사람이 으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종교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한다. 한 선생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것은 지금 어렵지만 미래에 잘될 수 있다는 꿈을 주기에 족했다. 한 선생은 보통학교 졸업 후 함흥으로 가 영생(永生)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하고 돈 버는 일을 시작했다.
 
  16세 어린 소년은 객지에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부두의 하역(荷役)이었다. 몸에 상처 나는 것은 예사였고 바다에 빠진 적도 숱하게 많았다. 한때 일본인을 상대로 생선 장사도 했는데,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한 선생은 훗날 한일고 학생들에게 “오뎅(어묵의 일본어)은 절대 먹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고 한다.
 
  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수박, 참외를 먹지 말고 복숭아를 먹어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한의사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위장을 믿지 마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젊을 때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 같지만 함부로 쓰면 망가진다. 한 선생은 꼭꼭 씹어 음식 섭취하는 법이며 손가락 셋으로 엎드려뻗쳐 하는 법도 교사와 학생들에게 선보였다.
 
  20대에 들어 결혼하면서 사실상의 가장(家長)이 된 그에게는 불행이 쉼 없이 찾아왔다. 맨 먼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어이없이 사망한 것이다. 동생이 몰던 트럭이 고장이 났는데 하필 건널목에 멈춰 섰다. 마침 기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힘이 장사였던 동생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트럭을 빼냈지만 늑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동생을 잃자 한 선생의 인생관은 달라졌다. 돈 없어 동생이 죽었다는 한이 맺혀 한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부친 한남 옹도 한의학에 관심이 있어 집에 굴러다니던 책을 손에 잡게 됐다. 주경야독(晝耕夜讀), 한 선생은 밤에 한의학을 공부하고 낮엔 신의주~부산을 오가는 철도 정비 일을 했다.
 
  6·25가 터졌다. 공산주의에 넌더리가 난 한 선생은 국군이 북진해 오자 군인들에게 밥 지어주는 군무원(軍務員)으로 취직했다. 그것은 인민을 위한다면서 사람들을 곤충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공산주의의 본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게 부모와 아내,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한동현 한일고 이사장은 한의원을 지키면서 수요일에는 한일고를 찾아가 업무를 본다.
  한 선생의 아들로 한일고 이사장을 맡은 한동현(韓東炫·56) 이사장은 그들의 생사를 알아봤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중국 단둥 쪽으로 아버님의 자제분들 생사를 알아봤는데 모두 생존해 계시다더군요. 당시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한 선생은 평소 소망처럼 한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실천하기 위해 한의원에 취직했다. 낮에는 잡일하고 밤에는 한의학 서적을 탐독하느라 한 선생은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1954년 한조해 선생은 후암동에 한일(韓一)한의원을 차렸다. 정식 자격증보다 당시는 누구라도 병을 잘 고치기만 하면 한의원을 낼 수 있었다.
 
한조해 선생이 쓰던 60년이 넘은 약 서랍.
지금은 한동현 이사장이 쓰고 있다.
  그때부터 쓰던, 60년이 넘은 환자 차트와 약 서랍을 지금 아들 한동현 이사장이 쓰고 있다. 한조해 선생은 생전 50만명 가까운 환자들을 돌봤다. 훗날 보물(寶物)이 될 이 차트와 서랍을 간직하고 있는 한 이사장은 “아버님이 특히 부인과 질환과 암환자 치료에 능하셨다”고 회고했다.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편 한의사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한 선생은 늘 외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북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식 때문이었다. 어느 날 친지가 서울시경 경찰국장으로 전쟁 때 순직한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둔 홍종숙씨를 그에게 소개했다. 나이 차가 아홉 살인 둘은 서로를 위로하다 한의원이 있는 판잣집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우측 사진은 평소 한일고 교정을 찾던 한조해 선생이며 아래 사진은 국선도로 체력을 단련할 때의 모습이다.
  한조해 선생은 1년에 두 번씩 열린 한의사 시험에 일곱 차례, 즉 14번 만에 합격했다. 이 수험표 14장이 아직 보관돼 있는데 그는 학생들과 대화를 할 때면 ‘13전 14기’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후 선생의 한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도운 한 이사장에 따르면 환자 수가 하루 500명이 넘었는데 한조해 선생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국선도(國仙道)를 수련한 뒤 한의학 서적, 특히 《동의보감》을 보며 환자 맞을 채비를 했다고 한다.
 
  한 선생은 신의(神醫) 혹은 화타(華佗)나 편작(扁鵲)에 비유될 만큼 신통한 의술을 보여줬는데 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본다. 10년 넘게 체증(滯症)으로 고생한 환자에게 선생이 약 세 첩을 지어줬는데 한 첩을 먹고 나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자 그 환자는 “혹시 첩약에 마약을 넣은 것 아니냐”고 의심하다 끝내 용산경찰서에 민원을 제기했다. 분석 결과 아무 이상이 없자 그 환자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 번은 나이 마흔다섯 된 여성이 찾아왔다. 별의별 보약에 체외수정·시험관 아기 시술까지 받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 그녀가 약을 복용한 지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져 건강하게 낳았다. 암과 관련해선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선생은 간암 치료에 능했는데 약제 외에 황토를 담가 가라앉힌 ‘황토수’로 복수를 빼거나 황달을 치료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선생이 절대 과다한 처방을 하거나 비싼 보약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아버지를 바로 곁에서 보고 자란 한동현 이사장은 “인생은 활화산처럼, 의술은 신선이나 도인처럼 부리신 분이 1980년대 오전, 오후 각각 7명으로 환자를 제한했다”며 “그동안 누적 환자 수가 40만~50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증거로 “아버님이 건강하실 때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를 1개 면에 160명씩 썼는데 매일 그런 종이가 서너 페이지가 됐으니 하루 500~600명을 치료하신 셈이 된다”며 “안타깝게도 1960년대 이전 자료를 분실해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선생은 한 이사장에게 이런 ‘환자론(論)’을 남겼다고 한다.
 
  “환자는 내 몸처럼 돌봐야 한다. 그게 의사의 출발점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다 보면 몸 아픈 서러움, 돈을 못 버는 서러움, 치료를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서러움을 알게 될 것이다.” 간호사나 직원 혹은 아들이 이런 지시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한 선생은 어김없이 불호령을 내렸다.
 
한동현 이사장의 가족사진.
  이렇게 행복을 누리는가 싶었지만 한 선생은 홍 여사와 사이에서 낳은 1남 1녀 중 장녀(한동엽)를 잃고 말았다. 리라초교 4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떴는데 한 이사장은 “누나가 공부뿐 아니라 음악·미술 등 못하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어릴 적 돈 없어 공부를 못했고 돈 없어 변변한 치료 한 번 받게 하지 못하고 동생을 떠나보냈으며 부모와 처자식을 북한에 남겨놓은 한 선생은 뒤늦게 본 귀염둥이 딸마저 잃자 전 재산을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내놓기로 결심했다.
 
  사실 한 선생은 한일고를 설립하기 전 남모르게 야학이나 새마을학교를 도왔다. 80년대 초반 경기도 양평중학교가 양평종고에서 분리될 때 학교 부지가 없어 고민하자 자신의 양평 땅을 학교에 헌납했다. 원래 한 선생은 성남시에 학교 부지를 마련해 두었는데 교육부로부터 더는 중·고교를 설립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눈을 충청도로 돌렸다.
 
  하지만 지금의 땅을 매입하는 데도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땅 주인들이 한복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그를 보고 “과연 땅 살 돈이 있겠느냐”고 의심했던 것이다. 정안면 농협조합장은 한 선생에게 “내일까지 1억원을 입금하면 믿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한 선생이 다음날 아침 일찍 돈을 입금하자 조합장은 그제야 주민들 설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한 선생을 땅투기꾼쯤으로 의심했던 몇몇 농부는 그곳에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다는 말에 감복해 무상으로 땅을 내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땅을 사고 난 뒤에도 한 선생은 학교가 들어설 부지 뒷산을 셀 수 없이 찾아가 기도드렸다고 여러 사람이 증언하고 있다. “천신(天神)이여, 지신(地神)이여, 학교신(學校神)이시여.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 선생의 기도는 공사가 진행될 때뿐 아니라 학교가 지어지고 나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학교 측에 아무런 기별도 넣지 않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어디선가 바람처럼 휙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휙 사라졌다. 교사들이 말한 바로는 고무신을 신은 웬 영감님이 학교 앞 샘에서 정화수를 떠 언덕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그 허름한 옷차림의 촌로(村老)가 300억원의 재산을 쾌척한 학교 설립자 한조해 이사장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한일고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 설립자의 흔적은 이 흉상이 유일하다.
  한 선생은 평생을 이부자리를 펴고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항상 돗자리를 깔고 불편한 잠을 잤으며 특히 한겨울 냉골이 될 때도 절대 이부자리를 펴지 않은 것은 어려웠을 적의 기억을 절대 잊지 않으려는 자기 다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발품을 판 끝에 1985년 7월 한조해 선생은 학교법인 한일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전교생 기숙사 생활의 영재학교’라는 목표를 세우고 법인 설립 1년 6개월 만인 1987년 2월에 한일고등학교를 완공시켰다. 한 선생은 건물 준공식 때도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몰래 다녀갔으며 3월 3일 첫 입학식 때도 교장 등을 제외하면 이사장 얼굴을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쩌다 교사나 학생을 만나면 “수고 많습니다” 하며 90도로 인사를 했다. 그래서 지금 한일고에서는 교사·학생 모두 90도로 인사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한일고에는 이 밖에도 재미있는 전통이 많은데 예를 들자면 8인이 한방을 쓴다는 것이다. 교육적으론 2인 혹은 3인 1실이 좋다는데 왜 그런 것일까?
 
  팔도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팔도(八道)를 상징하는 8인 1실을 쓰게 함으로써 공부만 잘하는 외톨이가 아니라 동창으로서의 끈끈한 유대도 다지게 하려는 심모(深謀)였는데 그래서인지 한일고에선 호실 선배·침대 선배의 통솔력이 제일 강하다. 한일고 학생들은 반드시 한 번쯤은 전적지(戰蹟地) 순례를 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고마움을 알고 자신들도 나라의 동량이 되겠다 다짐한다.
 
  이렇게 자신에겐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평생 번 돈을 학교에 쏟아부으며 생의 마지막을 학교에 바치던 중 한 선생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말년을 힘들게 보냈다. 병세가 심해져 몇몇 교사가 찾아왔을 때 그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그 말을 마치 유언을 남기듯 교사들에게 전한 한 선생은 1997년 5월 7일, 83년의 세상 구경을 마치고 하늘로 떠났다.
 
  아버지가 남긴 모든 것은 한동현 이사장이 떠맡아야 했다. 한 이사장은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했다. 아버지가 강원도 횡성에 마련해 놓고 남에게 경영을 맡긴 ‘한일목장’을 직접 운영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1981년 건국대 축산과에 합격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가업을 잇지 않겠다니 섭섭할 만도 했지만,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몇 달 후 한 이사장은 축산이 생각처럼 낭만적인 업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1학기 만에 건국대를 그만두고 한의대 입시 공부에 몰두했다. 다음해 경희대 한의학과에 합격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밑창이 튼튼한 랜드로버 구두를 선물했다고 한다. 늘 고무신만 신고 다니는 자신과 비교하면 아들을 위해 큰 선심을 쓴 셈이다.
 
  아들은 한의대를 졸업하고 잠시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아버지의 후광(後光)에 기대는 것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버지와 함께 후암동 한일한의원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제1진료실은 아버지가, 제2진료실은 자기가 맡았는데 자기 진료실만 빈 것이다.
 
한조해 선생은 한일고를 영국의 이튼스쿨처럼 만들기 위한 뜻으로 붉은 벽돌로 지었다.
  한동현 이사장은 상도동에 ‘한일한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법, 그들의 마음을 사는 법을 익혔다. 명의로 주변에 이름이 나 환자들이 몰리자 비로소 한 이사장은 아버지의 서울역 맞은편 후암동 한일한의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사후, 뒤를 이어 한일고 이사장에 오른 뒤 한동현 이사장 또한 100억원이 넘는 사재(私財)를 학교에 지원했다.
 
  “처음 학교를 개교했을 때 학생들이 오지 않아 유인책(誘引策)을 쓰느라 돈을 많이 썼어요. 선생님들에겐 한때 1년에 1200%의 보너스를 드리기도 했고요. 영국의 이튼스쿨 같은 학교 만드는 게 소원이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습니다.”
 
한여름 한일고를 찾았을 때의 모습.
  또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한 이사장의 아내가 한조해 선생의 환자 딸이란 사실이다. 한마디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고른 것이다. 한 이사장의 부인 고정미씨는 어렸을 적부터 자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을 온 한의사가 미래의 시아버지가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버지와 그 한의사가 둘의 만남을 주선해 결혼까지 하니 운명은 묘하다. 이것은 한조해 선생이 며느릿감을 ‘점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동현 이사장의 좌우명은 뭘까. 그는 선친이 남긴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를 조심하라’는 말을 평생 안고 살고 있다.
 
  재산에 탐욕을 부리지 말고 여색에 혹하지 말 것이며 맛난 것 탐하지 말고 제 이름을 알리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는? 잠을 너무 오래 자면 게을러지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가까이할 것은 호현낙선(好賢樂善) 네 글자로 요약된다. 현명한 이를 가까이하고 어진 인재를 중용하란 말은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 선생의 말이다.
 
  대(代)를 이은 한조해·한동현 부자의 한일고 사랑이 참으로 희귀한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그렇다면 한일고 졸업생들이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어려운 학교를 위해 되돌려야 할 시점인데, 제약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교과부가 온갖 규제를 만들어놔서 졸업생들이 기부를 하려 해도 건물을 짓는 등의 용도 외에는 쓸 수 없으며 누군가 기부를 하면 그만큼의 국고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가 아닌 농어촌 일반계 고교라서 재원 마련도 쉽지 않은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조회 : 1250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