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18〉 내시(內侍)와 정승(政丞)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현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국보 제135호 혜원 신윤복 작 〈월하정인도〉.
  영조 때 무신인 구수훈(具樹勳)이 지은 《이순록(二旬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문턱인 과천 대로변에 커다란 집을 짓고 살던 부자가 있었다. 때마침 한양에서 과거가 열릴 때라 삼남지방 인재들이 상경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주인이 하인들을 시켜 과거 보러 가는 사람 중 준수한 양반을 가려 집으로 모시고 오라 당부했다.
 
  며칠이 지나자 하인들이 영남에서 상경하던 한 선비를 억지로 모셔왔다. 선비 입장에서는 황당했다. 납치 수준은 아니었지만 강권해서 억지로 붙잡히듯 부잣집으로 끌려왔으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주인이 너무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잘 먹이고 입히며 심지어 며칠 푹 쉬다 가라고 했다. 하지만 과거로 맘이 급한 선비는 몸이 달았다.
 
  ‘혹시 내가 과거를 못 보게 이러는 건가?’ 이런 엉뚱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비가 떠나려고 하자 술을 권하며 간곡히 붙잡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그렇게 밤이 되어 버렸고,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선비의 침실에 웬 아리따운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몸을 도사렸다. 하지만 방에 들어온 여인의 자태가 너무나도 고왔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성욕이 불같이 일어나 결국 그녀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제 배에 걸터앉을 때는 꼭 소 울음소리를 크게 내셔야 합니다.” 여인의 말은 해괴망측하기 그지없었다. 명색이 과거를 보러 가는 양반인데 소 울음소리라니…. 여우에 홀린 것일까? 자고 나면 훤한 한길 가에 저 혼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널브러져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여인은 너무나도 아리따웠다. 어떻게든 여인을 잡고 일을 벌이려고 하면 여인은 막무가내로 버티며 “소 울음소리를 내라”고 했다. 부끄러워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여인은 굽히지 않았다. 입안에 침이 마르고 몸이 달아 노곤노곤해진 선비는 결국 그러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선비는 여인의 배에 걸터앉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소 울음소리를 냈다. 여인이 너무 작게 낸다고 타박을 했다. 몇 번이고 다시 크게 울음소리를 내라며 선비를 독촉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교를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게다가 망측하게 웬 소 울음소리란 말인가. 그것도 연신 타박까지 하니 에라 모르겠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밤은 깊었고 눈앞의 여인은 외면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결국 아름다운 여인의 성화에 못 이긴 선비는 방 바깥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소 우는 소리를 길게 질러내고서야 질퍽한 정사를 벌일 수 있었다.
 
 
  과거 응시생을 집에 들인 환관
 
청나라 시대 마지막 환관의 모습. 환관들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는 없었으나 가정의 따뜻함을 즐기기 위해 돈을 주고 아내를 사곤 했다. 환관들에게서 거세한 생식기는 방부제를 써서 보존했고, 세상을 떠날 때 관에 다시 집어넣었다. 비록 이승에서는 없었지만 저승에서는 완전한 몸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날이 밝았고 다행히도 꿈은 아니었고 여우에 홀린 것도 아니었다. 간밤에 자신이 한 짓을 떠올리면 부끄러워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봉변이라면 봉변이지만 이런 여인과의 하룻밤이라면 또다시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의 대접은 변함없이 극진했고 선비는 그렇게 주인의 만류로 며칠 동안 더 그 집에 머물렀고, 밤마다 여인과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즐겼다. 시간은 흘러 과거 날이 다가왔다. 이젠 더 머물 수 없었다. 선비는 날이 급해 한양으로의 상경을 서둘렀다. 주인은 과거 보는 데 필요한 지필묵(紙筆墨)과 여비를 챙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종도 붙여주고 글을 써서 과거장에 제출할 때 가지런히 정서해 주는 서기까지 붙여주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선비는 과거를 치렀고 급제를 했다. 급제하면 며칠 동안 서울에서 인사를 다닌 후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 선비 역시 그랬다. 영남으로 내려가는 길에 다시 과천의 그 집에 들렀다. 주인이 달려와 반갑게 맞이하며 마주 앉았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과 여인에 대해 말했다. 주인은 자신이 환관(宦官)이라는 고백을 하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양가(良家)의 딸로 가난하여 제가 키웠습니다. 자색도 저리 빼어나고 재주도 뛰어난데 그만 제게 온 탓에 젊은 몸이 그냥 저렇게 살게 되었지요.” 주인의 고백은 그 여인은 자신의 부인이란 말이었다.
 
  환관은 내관(內官)으로 궁궐에서 왕과 왕비를 비롯한 가족들을 보좌하기에 생식기를 제거했다. 어려서 궁에 들어갈 때 불알을 인위적으로 제거했기에 성욕이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 환관들은 수염도 났고 덩치도 건장했다. 유사시에 왕과 왕비 등을 몸으로 보호할 수 있는 완력도 있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환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환관은 왕의 측근이기에 일정한 직위도 있었고 재산도 모았지만 단 하나 집안을 이루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성불구자가 무슨 아내를 두느냐고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부인이란 단순히 성적 대상만이 아니라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사회에서 집안일을 처리하고 다스리는 중요한 직무가 있었다.
 
  요즘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듯이 하는 말을 떠올리면 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디 나갔다가 조금만 늦으면, 글쎄 쫄쫄 굶고 있다니까. 아니 반찬 다 해놨겠다, 밥통에 밥도 있겠다, 그냥 떠서 국하고 먹으면 되잖아. 그런데 그걸 못하고 그냥 멀뚱멀뚱 기다리고만 있어. 내가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
 
  요즘도 이러니, 지금보다 더 옛날 조선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끼니를 챙겨 먹는 것은 물론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개는 것에서부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도포와 갓을 찾는 것까지 여간 번잡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거였다. 그래서 양반들은 어디를 가든, 여종들을 데리고 다니며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춘향전》의 춘향이 때문에 수청을 꼭 성적 동침과 동의어로 생각하는데 그런 면을 포함한 모든 것이 수청이다. 세수하실 물을 가져오고 이부자리를 깔고 개고 마실 물을 대령하고 진지를 차리고 기침하시면 가래 뱉으시라고 타구(唾具)를 가져다 입가에 받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다 수청이다. 물론 잠자리는 당연한 거고.
 
 
  환관인 남편에게 태몽을 이야기한 여인
 
  자신이 환관이라는 주인의 충격적인 고백 이후, 소 울음의 진실이 밝혀진다. 주인이 말했다.
 
  “글쎄, 어느 날 그녀가 꿈을 꿨답니다. 황소가 자신의 배를 걸터앉았다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는군요.”
 
  좋게 생각해서 태몽일 수 있다. 손만 잡고 자도 임신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 생각일 뿐이다. 아무리 내시라지만 그 이치를 모를 리 없다. 둘은 껴안고 자도 도무지 일이 생기지 않는 사이니 여자의 꿈은 헛꿈이었던 거다. 소 같은 자식이든 용 같은 자식이든 자식은 불가능한 거였다. 하지만 소가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꿈의 내용은 의미심장했다.
 
  여자는 대체 환관인 남편에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냥 순수해서 자신이 꾼 꿈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성욕을 드러낸 것일까? ‘저랑 성관계를 맺으면 용이 되어 승천할 거예요.’ 이런 메시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때마침 과거 때였다.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것은 그 유명한 ‘등용문(登龍門)’ 고사가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성관계를 맺을 수 없는 남편에게 이런 메시지는 고통을 넘어 고문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어쩌잔 소린가? 뭘 해달란 소린가? 아무튼 이 말을 들은 남편 환관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황소가 배를 걸터앉았다고 하는데 제가 이런 몸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인연을 찾으려고 했습지요.”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양반을 억지로 강권해서 모셨고 떠나려는 것을 만류했고 급기야 밤이 깊어 자신의 아내를 들였던 거였다. 남편 환관은 의인(義人)이었다. 아내의 의도가 어떻든 아내의 처지를 이해했던 것이다. 꿈의 신통함을 믿었던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아내의 성욕을 이해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을 마친 주인은 그녀를 불러 선비와 함께 가라고 했다. 선비는 마다할 수도 없었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아리따운 그녀의 자태 때문도 그렇고 그녀의 꿈 덕분에 급제를 했을 수도 있으니 그랬다. 그렇게 선비는 그녀와 함께 제집으로 돌아갔다. 선비는 관직에 나갔기에 자주 서울로 왕래할 일이 생겼다. 그때마다 과천의 그 집에 들렀지만 주인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하인들을 통해 이런 말만 전했다. “전에는 인연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일개 환관이고 당신은 훌륭한 관리가 되셨으니 서로 왕래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죽어 저승에서 만납시다.”
 
 
  정승이 딸을 몰래 개가(改嫁)시키다
 
《매일경제》 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 중에서.
  조선시대 양반 여자들은 개가(改嫁)가 어려웠다. 조선 초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틈이 있었지만 후기에는 완전히 막혀 버렸다. 결혼해서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열녀(烈女)라며 장려하던 사회이다 보니 다시 결혼한다는 것은 ‘색욕에 미친 년’ 아니면 ‘몸이 헤픈 천박한 년’이 되는 거였다. 평민들이나 천민들은 상관없었지만 양반 여성에게 개가는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집에 화냥년 같은 딸이 있다는 말이 밖으로 돈다면 아버지의 관직은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거였다. 이러니 아버지들이 엄하게 딸들을 단속할 수밖에 없었다. 딸의 행복이나 인간다움 같은 것보다 자신의 지위가 더 중요하고 우선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권위적인 양반들이 차고 넘친 것이 절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정승이 있었다. 좋은 집안을 가려 딸을 출가(出嫁)시켰는데 글쎄 한 달이 채 안 돼 남편이 죽어 버렸다. 그러자 시댁에선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나름 배려라면 배려지만 친정에 돌아와도 갑갑한 상황에 놓이긴 마찬가지였다.
 
  한번 결혼했던 여자가 다시 결혼하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친정으로 돌아와도 여인의 정체성은 그녀가 시집간 시댁에 영원히 존재한다. 몸은 친정에 있어도 시댁인 ‘○○○네 부인’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딸이 집으로 돌아와 있으니 아버지 정승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승이 지나다가 보니 딸이 곱게 몸단장을 하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거울을 내던져버리는 거였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괴로움과 비참함을 아버지 정승은 잘 알았다.
 
  측은한 마음에 괴로워진 정승은 결국 수를 냈다. 자기 문하에 드나드는 젊은 무인(武人) 하나를 은밀히 불렀다. 그에게 은(銀)덩이를 주며 말했다.
 
  “오늘 밤 튼튼한 말 한 필과 가마를 세내어 우리 집 후원 뒷문으로 오너라.”
 
  정승의 말이니 무인이 안 들을 리 없었고 돈까지 받았으니 즉각 시키는 대로 했다. 정승 말대로 한밤중에 뒷문에 가서 기다리니 정승이 한 여자를 데리고 나와 가마에 태우는 것이 아닌가.
 
  “멀리 북쪽 함경도 북관에 가서 살아라” 그러며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정승은 무인에게 자신의 딸을 몰래 시집보내 버렸다. 다음날 정승은 딸이 밤사이에 자결했다고 말하며 통곡을 했다. 그러고 이렇게 말했다. “평소 이 아이가 남에게 얼굴을 보이려 하지 않았으니 내가 손수 염습(殮襲)을 하겠다.” 그러고는 이불을 시체 모양으로 만들어서 싸고는 입관(入棺)을 해 장례를 치러 버렸다. 그렇게 해서 딸의 시댁은 물론 정승의 집안에서도 모두 다 딸이 자살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수년이 흘렀다. 정승의 아들이 암행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역을 탐방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마을에서 얼굴이 맑고 또렷한 두 아이를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꼭 자신의 핏줄처럼 보이는 것이 영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가 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누이가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이곳에 정착해 살라고 하셨어요.” 아들은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암행어사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이 조용한 틈을 타서 아버지를 뵈었다. 그러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버님 괴이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정승이 말없이 눈을 부릅뜨고 뚫어지게 아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 시퍼런 서슬에 아들은 감히 더 이상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내색도 못 했다. 그렇게 정승 딸의 두 번째 결혼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니어도 너는 행복해라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남의 것도 망쳐 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아내를 선비에게 보낸 환관은 그렇지 않았다. 돈에 팔려와 자신에게 속한 여인을 아무 조건 없이 좋은 남편감을 구해서 보냈다. 자신보다 더 훌륭한 자를 가려 구했다.
 
  그의 욕망은 하나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이 본성인 정욕을 따라 사는 이치를 인정하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한탄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남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속 깊은 마음과 고매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쾌락을 남도 느끼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짐은 자신이 짊어지고 남의 짐은 덜어줄 수 있다면 덜 수 있도록 기꺼이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여인은 그것을 알았다. 환관 남편의 그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소 울음소리를 바깥까지 들리도록 크게 울어대라는 해괴한 요구를 했던 것이다. 꿈 때문이라면 적게 소리를 내든 크게 내든 상관이 없다.
 
  사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도 자신의 배에 걸터앉는 순간 이미 씩씩거리는 소가 되어 등용문에 오를 용이 될 거였다. 배에 걸터앉을 때, 성교의 쾌락에 젖어 들 때, 소 울음소리를 내라는 것은, 크게 바깥까지 들리게 내라는 것은, 이토록 훌륭한 남편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단순히 성적 쾌락을 위한 최음제(催淫劑)나 페티시(fetish)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정승의 인격과 성품은 어떤가. 청상과부가 된 딸을 몰래 시집보낸 아버지 정승이 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 온 아들을 노려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권위적이고 고약하게 갑갑해서일까? 아니다. 아버지 정승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정승이 아들을 노려봄으로써 아들의 입을 막았다.
 
  그건 애초에 그런 일은 있지도 않다는 단호하고 단단한 다짐이었다. 아버지 정승도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다. 딸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적어도 아들의 입을 통해 딸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잘 살고는 있지?” “먹고살 만은 하겠지?” “두 손자는 총명하더냐?” 등등 붙잡고 묻고 싶은 것이 태산같이 쌓였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문은 나게 마련이고 입에서 나온 말은 돌고 도는 게 세상의 이치다. 가까운 자식부터 단속하지 않으면 결국은 벽에 있는 귀가 다 듣고서는 바깥에 죄다 까발려 버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만 알자’와 같은 말로 아들을 다독이며 그토록 알고 싶은 딸의 안부와 사는 모습을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찼을 테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다.
 
  그건 아버지 정승이 제 벼슬에 연연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소문이 나면 사랑하는 딸의 삶이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딸을 멀리 보낸 것도, 잘 사는지 안부를 끝끝내 묻지 못한 것도, 모두 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딸을 위하는 마음이 자기의 지위, 신분, 명예는 물론, 사랑하는 딸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까지도 억눌렀던 것이다. 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남편 환관도 아버지 정승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기쁨보다 남의 행복과 즐거움을 바라는 진정한 사랑,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