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100년 전 모던 뉘우스 - 한국 영화의 상징, 단성사와 우미관

근대적 희로애락을 발산하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무성영화 시대 한국영화는 거의 단성사에서 개봉
⊙ 현대적 설비의 명치좌, 약초극장에 밀려 2류 극장으로 떨어져
단성사는 1907년에 개관했다가 박승필(朴承弼)이 인수, 3층 건물로 증축하고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출발했다.
  근대의 상징은 영화관이다. 급변하는 바깥세상의 모습이 영화관을 통해 전해졌다. 영화관은 근대문명의 교육장과 다름없었다. 그중 단성사(團成社)는 민간 형태의 최초 극장으로 초기 한국영화 태동의 산실이었다.
 
  단성사는 1907년에 목조 2층 건물로 시작해서 경술국치 이후 일본사람 손에 넘어갔다가 1910년에 당시 판소리와 창극을 주로 공연했던 광무대의 주인 박승필(朴承弼)이 인수, 3층 건물로 증축하고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출발했다.
 
  국내에서 처음 제작된 영화 〈의리적 구토(仇討)〉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돼 1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조선일보》 2001년 1월 19일자 ‘이규태 코너’에 따르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의 인력거는 한 대 예외 없이 기생들이 타고 단성사로 몰렸기에 기방은 개장휴업 사태가 계속됐다고 한다.
 
  이후 단성사는 〈장화홍련전〉(1924), 나운규의 〈아리랑〉(1926), 〈춘향전〉 (1935)을 상영했다. 특히 〈아리랑〉을 보려고 종로 기독회관까지 관람객이 줄을 섰고, 2년간 연속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판권을 샀던 임수호는 벼락부자가 돼 ‘아리랑 팔자’란 말이 회자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 대륙극장으로 개칭했다가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했다. 1960~90년대는 제2의 전성기였다. 또 단성사 상영은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역도산〉(1965)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히트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이후 영화관이 멀티플렉스로 변화하자 단관이던 단성사도 2005년 총 10개관의 멀티플렉스로 재건축했으나 경영난을 맞아 2008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3번의 유찰을 거쳐 2015년 7월 575억원에 낙찰됐다. 한 해 전 감정가는 962억6920만원이었다.
 
우미관은 단성사·조선극장과 더불어 서울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인기가 높았다.
  우미관(優美館)은 1912년 개관되어 1982년 문을 닫았다. 단성사·조선극장과 더불어 서울 북촌의 한국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본인 영화관인 황금좌·희락관·대정관 등과 대조를 이뤘다.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음악·무용발표회 등 각종 공연도 이뤄졌다.
 
  개관 당시 위치는 지금의 종각 부근인 경성부 종로구 관철정 89번지. 당시 “우미관 안 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회자했다. 개관 초기에는 2층 벽돌건물로 1000명가량이 앉을 수 있는 긴 나무의자가 있었단다. 항상 2000명가량의 관객이 빽빽이 들어차 벙어리 화면과 변사의 입을 쳐다봤다고 한다.(《동아일보》 1982년 11월 18일 기사 참조)
 
현재의 단성사 건물. 작년 9월 1일 1차 오픈한 ‘단성골드 주얼리센터’는 지상 1층에 백화점식 복합 주얼리센터를 조성했고, 2층에 국내 최초로 보석·원석 갤러리를 꾸몄다.
  무성영화 시절에는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나 〈카추샤〉 〈몬테크리스트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영했다. 또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도 단성사와 함께 상영됐다. 변사의 임기응변에 이따금 반일(反日) 표현이 섞이기도 해 이를 두려워한 일경이 항상 고등계 형사를 배치, 감시했다고 한다.
 
  또 1924년 12월 17일에는 우미관에서 《조선일보》가 첫 라디오 방송 실험을 했다는 기록, 1928년에는 국내 최초로 발성영화(‘소리나는 활동사진’)를 상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화재(1959년)로 소실된 이후 옛 화신백화점 뒷자리(인사동 262번지)로 옮긴 뒤 재개봉 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경영난으로 1982년 11월 30일 문을 닫았다.
 
동양극장 개관을 알리는 《동아일보》 1935년 11월 4일자 1면 광고.
  동양극장은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1935년 11월 준공됐다. 서구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던 시절, 신파극에 뿌리를 두고 ‘배귀자 악극단’을 주축으로 전속극단이 조직돼 상업극을 주로 상연했다. 동양극장의 제1전속극단은 ‘청춘좌’였고, 사극을 주로 공연하는 ‘동극좌’가 2전속, 희극을 전문으로 한 ‘희극좌’가 3전속이었다. 그러나 희극을 즐기는 관객이 적어 ‘희극좌’는 수명이 길지 못했고 1936년 ‘동극좌’와 합병하여 ‘호화선’이 됐다.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는 《비평》 1938년 10월호에 실렸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음을 밝혀 둔다.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
  京城 北村 劇場街 盛衰記

  백암동인(白岩洞人)
 
《비평》 1938년 10월호 표지.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40만 부민(府民) 때나 70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北村)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업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優美館)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團成社)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 놓고 통제적(統制的)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東洋劇場)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朝鮮劇場),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야 아는 데까지 써 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국만 남은 인사정(仁寺町)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 놓고 얼마 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金讚泳)에게로,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第一劇場)의 관주(館主)인 ミナト(미나토·편집자註)에게 팔여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玄哲), 신용희(申鎔熙), 김조성(金肇聲)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畵) 제일봉절(弟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 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 불장난으로 다 타 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내가는 행인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의 소굴이든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 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 박승필(朴承弼)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분이 돌아가고 박창현(朴昌鉉)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아서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 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경영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야 한때는 전 경성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가진 비화, 애화만 자어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 놓은 명치좌(明治座), 약초극장(若草劇場)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류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日支事變-중일전쟁·편집자註)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 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으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사계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公平町)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 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 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 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1935년-편집자註)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洪淳彦)씨가 극장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후지로(分島周次郞)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넘어가 거탄(巨彈)적 존재이며 신문연재 소설에 왕좌격이던 최독견(崔獨鵑)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씨의 두뇌의 명철함을 가히 짐작할 배니 최독견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의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심념(心念)을 굳게 넣어 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200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오십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비평》 1938년 10월호에 실린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 첫 장.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李雲芳)씨인데 그분의 알선으로 청춘좌(靑春座)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도 할 만한 심영(沈影), 서월영(徐月影), 박제행(朴齊行)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음으로 동극좌(東劇座)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 보겠다는 것이 주점으로 희극좌(喜劇座)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 보았으나 아직 조선에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豪華船)이라는 것인데 결국 동양극장의 ドル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 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 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 온 사람이 즉 최독견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上映)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에서야 2회 상연(上演)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서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야 크게 기뻐할 배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른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야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 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서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야 중앙무대(中央舞臺)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 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씨의 손에 경영 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솔리티(authority·편집자註)인 이창용(李創用)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야 조선영화 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
 
  (출처=《批判》 1938년 10월호. p.74~7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