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13〉 림노스의 냄새나는 여인과 일지련(一枝蓮)

글 : 유광수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현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터키에 갔을 때 지하철에서 무척이나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들 냄새가 내게 이상했던 것만큼이나 그들도 내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젊은이는 젊은이의 냄새가 있고 노인은 노인 특유의 냄새가 있다. 여성 냄새가 다르고 남성의 냄새가 다르다.
 
  금방 태어난 아기도 자기 냄새가 있다. 목욕을 갓 하고 나온 후의 향긋한 냄새는 비누 냄새만이 아니라 자신 특유의 본질적 냄새다. 개들이 멀리서도 주인을 단박에 알아보고 달려오는 것은 눈으로 보기 전에 먼저 주인의 냄새를 맡고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냄새는 연령에 따라 다르고, 성별, 인종, 민족에 따라, 궁극적으로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사람들이 제 냄새를 감추려 한다는 거다. 향수를 뿌리는 게 대표적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로션에 향기를 섞는 것도 마찬가지다. 촉촉한 피부를 위한 것과 냄새는 아무 상관 없다. 좋은 향이 난다고 피부가 보습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향수를 뿌리는 이유를 페로몬의 대용이라 하는 심리적 시각도 있지만, 그 역시 본질적으론 그 페로몬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본래 지니고 있는 자기 냄새를 바꾸거나 감추려는 것이란 점에서는 여전히 같다.
 
  우리는 냄새를 말하면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뜨끔’한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 같은 가치평가를 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언급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냄새가 난다”는 것은 가치평가를 담지 않은 중립적 언급으로 사실명제를 말할 뿐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우리 인간은 ‘냄새’라는 것에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 정확하게는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 이전의 본능적인 동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냄새를 무척이나 없애려고 노력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실 거다.
 
  정말 냄새가 인간 본연의 모습과 관련이 있는지 두 개의 이야기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아시겠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냄새’와 ‘향기’가 있는데, 그 용어가 가리키는 현상은 같은 것이지만 사용되는 맥락은 완전히 상반된다. 어떻든 그것이 자기 본질이란 것은 같다는 것만 일단 머릿속에 넣어두고 살펴보자.
 
 
  일지련(一枝蓮), 향기 나는 여인
 
고전소설 《옥루몽》에서 향기 나는 여인으로 등장하는 일지련. 그녀는 단순한 공주가 아니라 창을 쓰는 무예가 출중해 명나라 장수들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 고소설 중에 가장 스펙터클하고 웅장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작품은 《옥루몽(玉樓夢)》 《옥련몽(玉蓮夢)》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세기 한양 근처 용인에 살던 남영로(南永魯)라는 양반이 지은 장편소설인데, 여기에 ‘향기 나는 여인’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인 양창곡(楊昌曲)은 출장입상(出將入相)하는 나라의 기둥 같은 인재인데, 그에겐 두 명의 처와 세 명의 첩이 있었다. 그중 가장 어린 세 번째 첩 일지련(一枝蓮)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났는데, 일지련은 중국의 남쪽 한 왕국의 공주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명나라 원수였던 주인공과 조우하여 그를 따라 중국으로 와 첩이 된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한 공주가 아니라 창을 쓰는 무예가 막강하여 명나라 장군들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공주에 아리땁고 거기에 무공 또한 출중한 그런 그녀가 적군인 명나라 원수 양창곡을 흠모하여 그와 연을 맺은 것이다.
 
  아무튼 일지련의 몸에선 기이한 향기가 났는데, 집에서 가까이 지낸 다른 부인들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양창곡과의 첫날밤 장면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연왕(燕王) 양창곡이 촛불을 뒤로 물리고 침석(寢席)으로 나아가, 일지련의 옷을 하나씩 풀어헤치는데 기이한 향기가 진동했다. 연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무슨 향주머니를 차고 있소?”
 
  일지련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왕은 친히 향주머니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심히 그녀의 몸을 살펴보니 얇은 비단으로 몸을 칭칭 싸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연왕은 ‘남쪽 지방 풍속인가?’ 생각하며 그녀의 몸을 감싼 비단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러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지련의 옷을 벗기고 그 얇은 비단을 풀어보니 살빛은 빙설(氷雪) 같고 광채가 영롱한 데다 기이한 향기가 진동하여 퍼져 온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그가 물었다.
 
  “이것이 무슨 향기란 말이오?”
 
  일지련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했다.
 
  “제가 이상한지 어려서부터 온몸이 눈빛처럼 하얗고 몸에 향기가 항상 가득해서 주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비단으로 몸을 감아 광채와 향기를 감추었습니다.”
 
  일지련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빙설처럼 하얗고 기이한 향기가 진동하는 여인이었던 거다. 이런 일지련과 잠자리를 한 양창곡은 다른 첩들과는 완전히 다른 환락에 빠져든다. 엑스터시와 환상을 위해 환각제를 사용하며 섹스를 하는 경우처럼, 일지련과의 관계는 육체의 감촉과 향기에 젖은 그를 한껏 열락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때껏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경험이었던 거다.
 
  연왕 양창곡은 놀랍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했다. ‘아니 남방의 불모지에서 어떻게 이런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나왔단 말인가….’ 동쪽 하늘이 밝아오자 일지련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녀가 누웠던 자리와 연왕의 몸에서까지 향기가 배어 사라지지 않았다.
 
  일지련이 빛이 조요하게 비쳐 들어오는 곳에서 몸단장을 하는데, 물로 얼굴을 씻으니 광채가 더욱 휘황찬란해지며 빛났다. 그러자 일지련은 급히 지분(脂粉)을 가져다가 얼굴에 두껍게 발라 광채를 감추었다. 그녀가 빗으로 머리를 빗자 푸르스름한 빛이 서리며 거울처럼 반짝였다. 그러자 그녀는 수건에 기름을 묻혀 머리카락에 발라 그 빛도 감추었다.
 
  보통 옛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멋지게 그려진다. 소위 재자가인(才子佳人)인 것이다. 양창곡의 5명의 부인 모두 그렇게 아름답다. 특히 세 첩은 세상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중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일지련이 아니라 강남홍(江南紅)이었다. 강남홍은 외모는 물론 무공까지 출중해 전쟁터에서 일지련과 쌍벽을 이뤘고, 거기에 음률과 기예, 아량과 정치적 능력까지 겸비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강남홍도 잠자리만큼은 일지련을 따라갈 수 없었다. 기이한 향기는 일지련만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일지련은 자기 미모와 향기를 감추려 할까? 굳이 왜 힘겹게 비단으로 몸을 칭칭 싸매고 옷을 입을까? 그녀가 비록 오랑캐라고는 해도 공주이고 공주라면 자신의 미모와 향기를 내세우는 것에 장해가 있을 이유가 없다. 연왕 양창곡의 첩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부인들도 모두 다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이니 말이다.
 
  시기 질투 때문에 가린 것은 아니다. 일지련보다 먼저 부인이 된 여성들은 하나같이 그를 친동생처럼 대우했고, 양창곡과의 동침을 종용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새벽마다 자신의 몸치장을 했다.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가 감추려 한 것은 황홀한 빛이 나는 몸이 아니었다. 향기를 감추기 위해 비단으로 몸을 싸고 옷을 갖춰 입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건 시기심을 유발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양창곡의 부인들은 이상적 가정을 꾸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투기와 질투는 없다. 투기하던 한 명의 부인도 훗날 회과(悔過)한다. 아무튼 일지련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양창곡뿐이었다. 그만이 그녀의 옷을 벗기고 비단을 풀고 온전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귀를 튼다는 의미
 
방귀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튀어나오면 왠지 민망해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자신의 냄새’를 다른 이가 맡게 된 것이 부끄러운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향기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왜일까? 아마도 그건 부부간에 방귀를 트는 일을 생각해 보면 단서가 될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이제야 방귀를 텄어”라는 말은 정말 생뚱맞게 들린다. 방귀는 생리현상이지만 의식하면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느닷없이 터져 나올 때가 많다.
 
  부부관계가 아닌 일상에서 방귀는 참 묘한 상황을 연출시킨다. 조금 과도한 사람은 방귀를 뀐 상대방을 보며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당사자는 죄인처럼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따지고 보면 그것이 그렇게도 심각한 상황이 될 것도 아니고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다.
 
  냄새가 역해서 불쾌감을 줘서 그럴까? 아니다. 본질은 지독하든 그렇지 않든 한 냄새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냄새’를 다른 이가 맡게 된 것이 부끄러운 때문이다. 서로가 지켜야 할 거리가 있는데 그 영역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 민망한 것이다.
 
  한창 떠들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 서로 가까이 섰을 때, 데면데면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일정 영역에 들어가고 들어온 것 같은 거다. 강아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똥오줌으로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이 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알리는 본능적 행동이란 것을 생각해 보라. 그것과 같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냄새’란 문명화된 인간의 치장이 아니라 원초적인 동물적 본질이란 점을 놓치면 안 된다.
 
  우스운 것은 같이 잠자리를 하는 부부간에도 수년 동안 방귀를 트지 못했다며 괴로워하는 말을 곧잘 듣는다는 거다. 아니, 세상에 그깟 방귀가 대체 뭐라고 그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 성교하는 것보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또 보인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내 냄새’라고 무의식 각인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방귀 트는 문제가 심각한 사건은 전혀 아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는 더욱 말이다.
 
  일지련은 자기 향기를 양창곡만 맡게 했다. 부부이니 방귀를 튼 셈이다. 다른 부인들과는 ‘부끄러워서’ 방귀를 트지 못했다. 실제로 《옥련몽》을 보면 다른 첩인 강남홍과 벽성선(碧城仙)이 서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장난을 치는 장면이 에로틱하게 묘사돼 나온다.
 
  아무튼 일지련에게서 나는 기이한 향기는 그녀의 본질이고 그 향기로 인해 그녀가 그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본질, 자기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는 자, 자신을 ‘알아도 되는 자’는 오직 남편 양창곡뿐이었던 거다.
 
 
  림노스의 냄새나는 여인
 
존 워터하우스(John Waterhouse·1849~1917)의 그림 〈힐라스와 님프들〉(1896). 맨체스터시티 아트갤러리 소장. 아르고호가 키오스(Chios)섬에 도착했을 때 헤라클레스의 젊고 잘생긴 동료 힐라스가 물을 찾기 위해 숲속으로 갔다. 그는 샘을 찾았으나 그곳의 님프들이 그의 미모에 반해 자신들의 물속 거처 깊숙이 끌어당겼다. 해변이 힐라스의 이름으로 울려퍼지게 만드는 헤라클레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청년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중 이아손(Iason)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콜키스 지방으로 황금양털을 찾으러 가는데, 멀고 먼 그 길을 가기 위해 ‘아르고’라는 배를 만든다. 그 소식을 들은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같은 많은 영웅이 이아손을 돕겠다고 그 배에 탄다. 요즘 영화로 치면, ‘어벤저스 군단’을 꾸려 황금양털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아르고 원정대’로 불린 이들은 바다를 항해해 가다가 림노스라는 섬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빼어나게 아름다운 여성들이 나타나 창과 방패를 들고 무수히 달려들었다. 사자를 손으로 찢어 죽이는 헤라클레스 같은 전사들이 즐비한 아르고 원정대원들 앞에 그들의 기세등등함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헛웃음을 치며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달이 났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란 말인가.
 
  그녀들에게서 상상조차 안 되는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거였다. 모습은 한결같이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데 냄새는 장난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독한지 싸움이고 뭐고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혹시 한여름철 잔뜩 쌓인 채소들이 썩는 냄새를 맡아보신 적이 있는가? 똥 냄새나 퇴비 썩는 냄새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냄새가 난다. 그래도 그 냄새는 계속 맡고 있으면 후각신경이 무뎌져서 면역이 되는데, 이 림노스의 여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도무지 면역이 되지 않았다.
 
  림노스 여인들에게서 냄새가 나게 된 이유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저주를 내린 때문이었다. 섬의 한 여자가 재물이 많은 한 노인과 결혼했는데, 첫날밤을 지내고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노인이 도무지 남자 구실을 못하는 거였다. 이에 화가 난 여인이 남편인 노인을 죽여 버렸다. 아프로디테가 이를 알아 섬 여인들에게 저주를 내렸고, 여자들의 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나게 된 것이다.
 
  아프로디테가 분노한 이유는 살인 때문은 아니었다. 돈을 보고 노인과 결혼한 파렴치한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살인이나 파렴치함도 문제긴 하지만, 본질은 성관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상대를 버린 것에 있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그들이 영원히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몸에서 냄새가 나게 했던 것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들을 가까이할 수 없었던 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아프로디테가 내린 저주는 어찌 보면 저주가 아니었다. 역겨운 생각을 지닌 그녀의 속성을 밖으로 드러나게 했을 뿐인 거였다. 그렇게 그녀들의 본질이 드러났고, 본질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상황이 바로 징벌이었던 거다.
 
  이렇게 냄새나는 여성들만 살게 된 림노스 섬에 아르고 원정대가 온 거였다. 이아손과 영웅들은 이 섬의 여인들을 외면하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코를 틀어막았는지 아니면 쉬지 않고 딴생각을 하며 거사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들 림노스의 여인들과 잠자리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교를 마치자 그녀들 몸에서 나던 고약한 냄새가 사라지고 향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아프로디테의 저주가 사라진 거였다. 이 향내가 일지련의 향기처럼 지속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교할 때만 솟는 향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분명하다. 외적 미모와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 냄새라는 것, 내면의 본질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 냄새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냄새가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것 말이다.
 
 
  냄새인가, 향기인가
 
고수라 불리는 향채.
  림노스 여자들의 냄새에 대해서 신화를 오랫동안 연구한 어떤 분은 “여성들이 서로 맡지 못한 것을 보니 생리 냄새다”고 했는데, 여성끼리 생리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생리라는 일정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쉬지 않고 냄새가 났다는 것으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떤 외국의 탐사전문가는 림노스 지역을 답사한 후, “실제 이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짐승 가죽 무두질을 오랫동안 했는데, 그 냄새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일면 그럴듯하다. 그 섬 전체에 고약한 냄새가 그득해 몸에 배었을 테니 말이다.
 
  《옥련몽》의 작가 남영로는 어떻게 여성의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을 상상해 냈을까? 남영로가 조선 땅을 떠난 적이 없으니 실제로 중국 남방의 여인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그런 상상을 했을까? 그냥 대충 꾸몄는데 우연히 맞아떨어진 걸까?
 
  오랫동안 남영로와 이 작품을 살펴본 바로는, 남영로가 아마도 책에서 읽고 상상력을 발휘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영로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엄청난 규모의 장서(藏書)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국 자료도 상당수 있었다. 남영로는 그 대단한 아카이브 속에서 배우고 익히며 상상력을 펼쳤고, 그 결과가 우리가 아는 《옥련몽》 《옥루몽》으로 형상화된 거였다. 아마도 그는 중국 남방 지역에서는 기이한 향풀을 먹는 습성이 있고,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 몸에서 그 풀 향기가 난다는 것을 읽어서 알았을 거다.
 
  이 향기는 지금도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흔한 음식이 되어 버린 베트남 쌀국수는 독특한 향을 갖고 있는데, 그건 우리가 고수(산형과의 한해살이풀)라고 부르는 ‘향채(香菜)’를 고명으로 얹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리에겐 호오(好惡)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 향신료 풀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이 드물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쌀국수에는 향채를 조금 넣거나 아예 빼지만 현지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다. 듬뿍 넣는다. 왜 그렇게 먹느냐는 물음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먹었어요. 이걸 먹어야 몸에 모기 같은 벌레들이 달려들지 않아요. 냄새가 나거든요.”
 
  퍼뜩 《옥련몽》 작품을 떠올려 더듬어보니, 일지련이 “소녀가 어려서부터 꽃을 먹는 습관이 있어서…”라고 말을 흐리던 장면이 생각났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른 이유는 나이, 성별, 체질 등의 차이 때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먹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냄새가 결정된다. 김치를 먹는 사람과 치즈와 버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의 냄새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일지련이 그랬던 거다.
 
  먹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곳에 살며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냄새가 좌우되고 결정된다.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며 산 사람과 도시에서 매연을 맡으며 운전한 사람의 냄새는 목욕탕에서 아무리 박박 씻어도 티가 난다. 림노스 여인들이 바로 그랬던 거다.
 
  냄새는 그가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말해 준다. 냄새는 그가 살아온 삶의 모든 궤적을 고스란히 담은 본질 그 자체이니 말이다. 남은 그만두고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내 냄새는 향기인지 냄새인지 말이다.⊙
조회 : 1478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09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