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국의 미학산책 〈3〉 멸종위기 전통: 현판 : 월간조선

고교생일 때, 암송을 해야만 하교가 허락되던 가사문학이 있었다. 송강의 〈관동별곡〉. 달달 외우는 사이에 딴 생각도 고였다. 촌놈이 언제 상경해 보는 날엔 꼭 가 봐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문이었다.

연추문 들이다라

〈…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 연추문(延秋門) 들이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

연추문는 ‘가을맞이’란 뜻인, 경복궁 서북쪽 담장 가운데의 영추문(迎秋門)을 말함이다. 청와대 가는 길 중간에 무지개 모양 대문이 듬직하게 자리했고, 그 위로 올린 문루엔 나무 현판이 아름답게 걸렸다. 나무판에 가득 채워 새긴 글씨다. 지금은 주변의 높은 건물로 해서 인왕산 쪽 시계가 가려졌지만 일대는 예로부터 여덟 곳이 특히 아름답다고 입소문이 자자했던 장소다. 그 하나가 ‘운대(인왕산)의 단풍 든 풍경(雲臺楓光).’ 그곳 가을의 정취는 지금도 현판 글씨와 더불어 물맛처럼 서늘하다.

일제 때 그 앞에 놓였던 전차 길이 흔들어 대어 고종 때 중건했던 영추문이 무너졌다. 1975년에 새로 세웠다. 궁성의 현판은 무관들이 썼던 관행에 따라 그때 어영대장 허계(許棨, 1798~1866)가 썼다지만 이미지를 찾지 못했음인지 20세기 후반의 이름난 서가 일중 김충현(一中金忠顯, 1921~2006)이 새로 썼다.

초가집에도 현판이 걸렸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광화문’ 현판.

전통 시절엔 공공건물은 말할 것 없고, 가정집도 주인의 취향을 말해 주는 당호(堂號)가 걸려 있었다. 서울 성북동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옛집은 지금도 그 고격이 남아 있다. 대문 이마에 먼저 당신 자작시가 나무에 새겨졌고, 뒷마당 쪽마루 위엔 단원의 글씨 ‘午睡堂(오수당)’을 당신 아호 하나로 삼아 걸었으며, 대청에 걸린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 현판은 남의 집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서 주거·건축 방식의 급변이 현판 문화를 그만 멸종위기 전통으로 몰고 가 버렸다. 옛적엔 고래등 기와집은 말할 것 없고 서민들의 일자 초가집에도 처마 밑에 당호가 걸려 있었다.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아파트 주거가 대세가 되면서 그 취향은 사라져 버렸고, 대도시의 높다란 공공성 민관(民官) 건물도 그 외관으로만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다.

가사(假死) 지경이던 현판이 우리 사회에서 반짝 주목을 끌었던 것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6년에 목조로 광화문을 복원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현판 글씨를 누구 것으로 할 것인가, 시비가 생겼다. 한편은 1968년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중건할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던 한글 글씨를 그대로 사용하자 했고, 또 한편은 19세기 중반 중건 때 걸렸던 현판의 희미한 사진발을 갖고 되살리자는 주장이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교체한 지금의 광화문 현판은 조선말기 훈련대장을 지낸 임태영의 글씨다.

나중에 국회의장에 오른 김형오(金炯旿, 1947~) 중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당시 야당 의원들이 “그 시대에 한글 현판이라니, 얼마나 신선한 파격인가. 그것만으로도 직전 현판의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예전도 열었던 당대의 선비(송복, ‘광화문’, 2005.3.4)도 가세했다. “누가 봐도 기세가 대단하다 …. 그건 분명 대통령 한 개인의 에너지가 아니라 당시 국민 전체의 에너지일 것”이라며 ‘門化光’ 대신 ‘광화문’으로 현판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즈음 문화재청 책임자는 ‘선 성장·후 민주’ 방식의 3공권력에 체질적 거부반응이 있었던가. 개발독재의 전력이나 절대가난을 벗게 해 준 역사적 대공(大功)을 교량(較量)해 볼 마음이 없었다. ‘어린 백성을 불쌍히 여겨’ 만들어졌던 ‘언문’으로 적어 새 시대의 정서를 과감하게 대변해 준 혜안은 무시해 버렸다. 군색한 선택은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남았던 훈련대장 역임의 임태영(任泰瑛, 1791~1868) 글씨였다. 아버지에 이어 1859년에 사감(私感)으로 무리하게 천주학을 해코지했던 글쓴이의 천주학에 대한 1859년의 ‘경신박해’ 전력엔 눈감았다.

광화문은 당초 사정문(四正門)이었다가 세종 때 고쳐 이름을 붙였던 것. ‘광화’는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다. 광화의 뜻 그대로 한민족의 대표 정체성이 된 한글을 창제해 낸 임금의 동상을 2009년 바로 문 앞에 세울 참인데도 한자 현판을 고집했으니 이 시대의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박정희 글씨가 그렇게 싫었다면 온 국민을 상대로 자유 공모를 해서라도 한글 현판을 걸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한자 현판을 꼭 붙여야만 올바른 복원 방식이라면 함께 국한문 현판을 문 앞뒤에 각각 걸었어도 좋았겠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이 사방에 네 개의 현판을 붙인 경우도 참고가 되지 않았겠는가.

‘공칠과삼’의 정치가

우리 사회의 표피적 선악 이분법에 견주어, 중국은 공산사회라서 그런가 백성들의 배포가 커선가 우리와 다르다. 문화혁명의 과오가 지대했음에도, 공산당 독재를 이어 가려 했음인지,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치세를 ‘공칠과삼(功七過三)’ 곧 ‘공덕이 일곱 과오가 삼’이라 정리했다. 당연히 그의 필적이 기관이나 조직의 로고로 그대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인민일보(人民日報)》 제자(題字)에서 사람 ‘인(人)’ 자를 바삐 내리그은 필력은 좀 시원했던가.

박정희 글씨의 현판을 내린 것에 견준다면, 각종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가 분명하기에 한국판 ‘공칠과삼’으로 대접해야 마땅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현판 글씨는 고맙게도 계속 살아남았다. 1956년 11월 30일에 영주 부석사를 찾았던 인연으로 남겼던 ‘浮石寺(부석사)’ 글씨는 개창조 의상대사가 바다를 건너려 하자 댓바람에 달려나왔다는 당나라 선묘(善妙) 낭자의 치맛자락처럼 바람에 휘말리는 정취는 그대로 ‘살아있는’ 기운(氣韻)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람이라고 정평 난 부석사인데 금상첨화로 그 현판이 보태졌다,

그때 대한뉴스를 보면 휘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설은 그 글씨가 마땅치 않다며 대통령이 나중에 새로 써서 내려 보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최명,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2016, 초고). 서울 도심의 사직공원 안 활터에 걸린 ‘黃鶴亭(황학정)’ 현판은 1958년에 그에게 운명의 날이 되고만 4월 19일에 휘호했다.

동아시아 현대정치사에서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이승만의 필력은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고종 퇴위를 획책했다는 혐의로 한성감옥에서 20대 후반에 6년 가까이 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했다. 이 기간에 독서와 사색과 글쓰기(書役)에 열심이었다. 감옥에서 ‘옥중학당’을 개설하여 무식한 죄수들과 간수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덕분에 문필가로서도 출중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2000).

임금의 선비 대접

도산서원 현판. 선조의 명령으로 명필 한호가 쓴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의 평판에 따라 필적 등이 시빗거리가 되곤 하지만, 왕조시대 땐 어필(御筆) 또는 어제(御製)는 극존의 대상이었다. 한국 유교의 본고향에 세워진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이퇴계를 지극히 공경했던 나머지 선조임금이 특별히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石峯韓濩, 1543~1605) 서자관(書字官)을 어전에 불러 앉혀 쓰게 했다.

그때의 일화가 전설처럼 문중에 전해진다던데, 퇴계의 직계 종손 쪽이던 한문학자 연민 이가원(淵民李家源, 1917-2000)은 마치 어전에서 직접 목격했듯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명문가 출신답게 붓글씨도 아주 선필(善筆)이었다. 소설가 박경리가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웠던 1999년에 연민 글씨로 현판을 만들고 싶다 해서 내가 그 심부름을 했을 적에 들었던 일화다.

임금의 스승인 큰 선비를 모시는 서원 이름을 바로 말하면 석봉이 부담을 느낄까 봐 선조는 학교 ‘원(院)’, 글 ‘서(書)’, 뫼 ‘산(山)’이라며 문구의 글자를 거꾸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어느 서원을 말함인지 석봉은 몰랐다. 유명 서원에는 ‘옥산(玉山)’도 있고 ‘도산(道山)’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언덕 ‘부(阝)’ 변(邊)이라 하자 질그릇 ‘도(陶)’임을 직감했다. 이어 임금이 쌀 ‘포(勹)’ 글자를 말하는데 석봉은 성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끓어올라 그만 붓손이 크게 떨었다는 것. 해서 글이 원만하지 못하다며 집에 가서 제대로 다시 적어 오겠다 했다. 집에서 아무리 써 보아도 처음 것만 못해 원래대로 새겼다. 이 일화를 듣고 나서 현장을 다시 찾아 현판을 다시 내가 면밀히 바라보았다. 거기서 손떨림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하자, 그건 각수(刻手)가 “알아서 고친 결과”라고 연민은 시침을 뗐다.

그 현판에서 나는 또 다른 배움도 얻었다. 현판 한 구석에 ‘宣賜(선사)’라 새겨져 있었다. ‘선(宣)’ 자로 시작하니 선조 임금이 ‘내렸다(賜)’는 뜻일까? 나중에야 ‘선사’ 보통명사는 ‘임금이 내렸다’가 본디 뜻임을 알았다. 그렇게 나라의 공적 일의 성과에는 직책만 적었지 임금이나 고관대작의 이름을 내세워 적는 법은 없었다.

이와는 달리, 주변 통행이 자유로워져 청와대 근처에 오가다 보면 무얼 헐어 버리고 공원을 지었다며 거기에 대문짝처럼 대통령 누구라고 큼직하게 새겼다. 이 지경이면 전국 도처에 나랏돈으로 지은 공적 건조물에 직책만 적지 않고 자만(自慢)의 기세로 기관장 성명 삼자도 새기는 노릇이 다반사가 된 것은 나무랄 일이 못된다. 사람 벼슬은 잠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조선 궁궐에 가 보면 어제 어필만 있지 어느 임금인지는 역사책을 들쳐 보아야 겨우 알 수 있는 그런 금도(襟度)가 있었다.

각자장(刻字匠)의 대접

광화문의 경우, 처음 걸었던 현판에 균열이 생긴 것도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왔고 지금은 지방정부도 지정하고 있는 각자장(刻字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 뒷말도 돌았다.

나라살림에 기름기가 슬슬 비치던 1970년대는 도처에 불사(佛事)가 벌어져 서울 인사동의 서각사 가게들 앞에는 절집 현판들이 줄지어 제작 중이었다. 번성했던 그런 가게 하나에서 일하던 각자장이 있었다. 6·25 참전 용사라 했다. 그때 부상 탓인지 한쪽 눈이 건강하게 보이질 않았다. 일목요연(一目瞭然)의 사자성어도 그걸 말함인지, 성취동기가 남다른 사람임을 직감했다. 글자 필획(筆劃) 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일중(一中)서실’을 출입한다 했고, 한문을 제대로 해독하려고 유명 한학자 임창순(任昌淳, 1914~99)에게 배우고 있었다.

그 오옥진(吳玉鎭, 1935~2014)이 무형문화재 각자장으로 처음 지정되었다. 의욕수가 더욱 뻗쳐 스스로 독립하고는 팔만대장경을 새기던 목각 전통에 따라 《훈민정음》《대동여지도》등의 옛 서화를 고법대로 제작해 냈고 인출(印出)해 냈다. 후학들과 함께 전시회도 열었고, 작품집(《철재 오옥진 작품집》, 1985)도 냈다.

전국 각지에는 그에게 서각을 배웠다는 장인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그들의 솜씨가 겨우 싸구려 음식점 계산대 뒤에 사랑이니 평화니 하는 문구의, 판에 박은 현판 일색임이 안타깝다. 그런 현판일망정 구경한 김에 기왕이면 살림집에 즐겨 걸어 놓던 옛 아취(雅趣)를 되살려 보면 어떨까. 동양화는 세로 그림이 다반사라서 넓게 퍼진 아파트 거실과 어울리지 않음도 그 퇴조의 원인 하나라 했는데, 그렇다면 현판은 주로 가로로 새겨졌으니 이쯤 하면 아파트 복도 끝에 가훈의 글씨를 한번 새겨 걸어 보면 현관이 무척 어울릴 것이다.

현판에서 역사문화의 향기가

추사 김정희가 쓴 봉은사 판전 현판. 추사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공공장소에 붙어 있는 현판은 역사문화 공부의 좋은 매체가 된다. 한국 서도의 금자탑이 추사인데,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 경각(經閣)에 붙어 있는 ‘板殿(판전)’이다. 타계 사흘 전에 마치 어린애가 썼지 싶은 그런 간결함의 절정이다.

역사적 명품이 개인 손에 있다면 구걸하듯이 간청한 연후에 큰 절을 올려야 겨우 볼 수 있음에 견주어, 공공재로 남은 좋은 현판은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니 그 아니 좋은가. 서울 성북동엘 가면 월북 행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장론이 사랑을 받는 상허 이태준(尙虛李泰俊, 1904~?)작가의 옛집이 남아 있다. 지금은 찻집으로 꾸며진 ‘수연산방(壽硯山房)’이 그곳인데, 일제 때 아내의 타박을 받고도 무리해서 장만했던 것이 추사였다. 그의 추사 사랑이 엿보이는 찻집 이름 현판도 볼 만하다.

전국 도처의 명소에서 현판으로 판서를 지냈다가 나중에 일제가 주려던 작위를 거절했던 석촌 윤용구(石村尹用求, 1853-1939)도 만날 수 있고 이 나라 최초의 사진관을 열었던 명필 해강 김규진(海岡金圭鎭, 1868-1933)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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