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주유천하 〈7〉 배중손과 강화도와 진도 : 월간조선

《고려사(高麗史)》에는 특이한 대목이 있다. 열전(列傳)편에 간신과 반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 것이다. 간신은 문공인으로 시작해 왕안덕으로 끝난다. 모두 26명이다. 이 가운데 고등학교 국사 수업을 이수한 분들이 알 만한 인물은 이인임-임견미-조민수 정도다. 셋은 다 사극(史劇)에 자주 나온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반역(叛逆) 부분인데 그 수가 꽤 많다. 유형별로 구분해 보자면 건국 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배신한 인물(환선길), 왕권에 도전한 인물(이자겸·묘청 등), 적과 싸우다 투항한 인물(강조) 등으로 나뉜다. 반역자의 수는 고려 중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다. 무인정권 시대가 시작돼 왕권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정중부-이의방-이의민을 비롯해 최충헌(崔忠獻)-최우(崔瑀·훗날 최이(崔怡)로 개명)-최항(崔沆)-최의(崔竩) 일가도 반역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반역자의 마지막은 요승(妖僧)이라 불렸던 신돈이 장식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왕조의 최대 반역자였던 조선 태조 이성계는 명단에 없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남도석성 부근에 있는 배중손 장군의 동상.
《고려사》에 역적으로 기록돼 그런지 사당은 볼품없이 지어졌다.

《고려사》 반역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지금은 민족혼의 상징처럼 부각되는 인물이 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왕을 비롯한 조정이 굴복한 것과 달리 ‘항복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장소를 옮겨가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배중손(裴仲孫)이 그렇다. 고려의 대몽(對蒙)항쟁 기록을 살펴보고 넘어간다.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를 방문한 뒤 몽골로 돌아가다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됐다. 이 일을 빌미로 몽골은 30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몽골은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었다. 몽골은 경주까지 침략해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우는 등 고려 전역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몽골의 1차 침략 후 최씨 무인정권의 2대 계승자인 최우는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조정을 옮겼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을 잇는 강화대교는 전장(全長)이 780m다. 그런데 이 1km도 안 되는 바다가 해전(海戰)을 겪어보지 않은 몽골군에게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은 마치 강(江)과 같다고 해 염하(鹽河)라고 불리는데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 정도다. 그런데 이곳의 최대 유속이 초당 약 3.5m로 거세 예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꼽혔다.

삼별초(三別抄)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도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치른 격전지였다.

고려가 개경에서 수도를 옮겨온 강화도의 궁성. 지금은 사고(史庫)만 복원됐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고종은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는데 이때 배를 몬 사람이 손돌로, 고종이 탄 배가 지금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좁고도 물살이 빠른 해협에 도착하자 고종은 언뜻 손돌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고종이 여러 차례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은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뢨다. 그럼에도 겁이 덜컥 난 고종은 손돌을 죽이라고 명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손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이것을 따라가면 된다고 했다.

이후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고종은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하였으며 그 넋을 위로하는 사당도 세웠다. 바로 이 ‘손돌목’이 우리나라에서 명량해협의 울돌목에 이어 두 번째로 험한 뱃길이며 조수간만의 차가 전국에서 제일 크니 강화도는 가히 천험의 요새였다고 할 것이다.

강화도에 은거한 고려의 대몽항쟁은 40년 동안 이어졌다. 항쟁이 장기화되자 무인정권과 왕・문인 세력 간에 갈등이 생겼다. 왕과 문인 세력은 몽골과 강화한 뒤 조공하자는 친조(親朝), 뭍으로 나가자는 출륙(出陸)을 주장했다.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인 세력에게서 권력을 되찾자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강화도 궁성 뒤로 가면 산성이 보인다. 이곳에 서면 사방이 조망된다.

고종 44년(1257) 최항이 죽고 이듬해 최씨 무인정권의 마지막 후계자 최의가 피살되면서 최씨 정권이 흔들렸다. 고종은 태자 전(倎·훗날의 원종)을 몽골에 보낸다. 원종은 즉위 후 직접 태자(훗날의 충렬왕)를 데리고 몽골에 들어가면서 강화의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마침내 원종 11년(1270) 개성으로 환궁했다.

최씨에 이어 무인 세력을 대표한 임유무가 죽으면서 무인정권이 몰락하자 그해 5월 27일 환궁을 명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최씨 무인정권은 무슨 힘으로 지금의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진 몽골과 40년간 싸웠느냐는 것이다. 최씨 무인정권을 지탱한 군사력은 바로 삼별초에서 나온다.

삼별초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전인 고종 17년(1230) 당시 권력자 최우가 조직한 것이다. 최우가 처음 만든 것은 ‘야별초’였는데 ‘별초’라는 말이 암시하듯 이들은 정예군이었다. 야별초는 원래 도둑을 방지하는, 지금의 경찰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는데 점점 그 인원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우별초로 나뉜다.

이후 몽골과 싸우다 포로가 됐지만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면서 야별초는 삼별초로 확대됐다. 원종이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開京)으로 돌아가면서 맨 먼저 내린 명령이 있다. ‘삼별초를 해산하고 명부(名簿)를 압수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중심이었다는 방증이다.

이때 해산하라는 왕명을 거역하고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이끈 장수가 바로 배중손이다. 배중손은 반역자라는 낙인 때문인지 《고려사》에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전라남도 진도에서 전사(戰死)했을 때의 연도만 나온다. 이제부터 우리는 《고려사》에 등장하는 배중손에 대한 기록을 쫓아가 보기로 한다.

배중손은 원종 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 장군에 이르렀다. 원종 11년,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면서 관민들에게 정한 날짜 내로 모두 복귀하라는 방을 내걸었는데 삼별초가 딴마음을 품고 복종하지 않았다. 왕이 김지저(金之氐)를 강화로 보내 삼별초를 폐지한 후 명단을 가져오게 했다.

삼별초는 명단이 몽골에 전해질까 두려워 반역할 마음을 더욱 품게 됐다. 배중손은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노영희(盧永禧)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서 사람들을 시켜 도성에서 “몽골군이 대거 침략해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으니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여라”고 외치게 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개중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거나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익사하는 자도 많았다. 삼별초는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킨 후 강을 순시하면서 “양반 가운데 배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모두 처형하겠다!”고 고함치니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모두 배에서 내렸다.

간혹 배를 출발시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삼별초가 작은 배를 타고 추격하여 활을 쏘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흩어져 숲속에 숨었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의 통곡 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삼별초는 금강고(金剛庫)의 무기를 군졸에게 나누어주고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켰다.

배중손과 노영희는 삼별초를 지휘해 시가지에 집결시킨 후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위에 올리고 관부(官府)를 설치했다. 이때 대장군(大將軍) 유존혁(劉存奕)과 상서좌승(尙書左丞) 이신손(李信孫)이 각각 좌우승선(左右承宣)으로 임명됐다.

반란에 불응한 장군 이백기(李白起)와 몽골에서 보낸 회회(回回·이슬람)인들은 거리에서 참수됐다. 장군 현문혁(玄文奕)과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 부부도 모두 죽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채정(蔡楨)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련(金鍊),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강지소(康之紹) 등은 강화도를 탈출했다.

이렇게 저항하려는 세력과 몽골에 항복한 조정을 따라 목숨을 부지하려는 세력이 양립하자 삼별초는 더 이상 강화도에 웅거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강화도 수비군 중 일부가 육지로 갔기에 그들을 이용하면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삼별초는 진도로 옮기기로 했다.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타고 온 삼별초가 도착한 곳이 벽파진이다. 벽파진은 훗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뒤 진영을 펼친 곳이다.

반란을 일으킨 지 사흘 뒤,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인원 등을 싣고 남쪽으로 떠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진도 벽파진으로, 강화도를 떠난 지 두 달 보름 뒤인 8월 19일이었다. 삼별초는 용장성(龍藏城)에 터를 잡은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는 등 건물을 짓고 왕을 황제로 칭했다.

삼별초 정부는 ‘오랑(五狼)’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왜(倭)에 국서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명했다.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데 적합했으며, 섬이 크고 땅이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에는 눈여겨볼 곳이 많다.

먼저 삼별초군이 도착한 벽파진은 훗날 이순신 장군이 벽파정을 세우고 조선 수군의 기지로 사용했던 곳이다. 진도와 해남을 잇는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두어진 조세를 개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야 하는 이동로인데 훗날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왜군을 대파한 전적지이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3단계 작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전라도 연해 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2단계로는 후방에 해당하는 제주도를 확보했으며, 3단계로 경상도 남부 연해 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삼별초는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 경상 연해 지역에 대한 세력을 떨치게 됐다.

삼별초는 완도(송징)-남해도(유존혁) 등에 장수를 보냈는데 운송로를 삼별초가 장악하자 고려 조정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삼별초를 고려 조정은 그냥 둘 수 없었다. 마침내 원종 12년(1271) 5월 김방경(金方慶)과 흔도(忻都·몽골 장수), 홍다구(洪茶丘·몽골 장수)가 지휘하는 여몽(麗蒙)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했다.

삼별초가 남해안의 해운로를 장악하자 고려 조정이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가 원종 12년에 몽골에 보낸 국서의 한 대목에 등장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육로로 운반하지 못하고 반드시 수로로 운반하는 것이나 그 길목인 진도를 삼별초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배가 지날 수가 없다.”

진도 초입에 있는 용장산성이다. 여기에 삼별초는 궁전을 세웠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의지했던 용장산성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백제시대 이래 고군면 고성리에 있던 읍성을 용장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훗날 임진왜란 때 입증됐듯 명량해협과 벽파진의 지리적 중요성으로 보아 그전부터도 누대에 걸쳐 거듭 성을 쌓고 보수했던 곳이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온은 생포돼 참수됐다. 삼별초의 진도정권이 1년 만에 붕괴된 것이다.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마지막으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원종 14년(1273)까지 항전을 계속했다. 이들이 웅거한 곳은 북제주군 애월읍 소재 항파두성이었다.

이들은 애월항에 목성(木城)을 쌓고 해변에는 돌로 성을 쌓아 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새 지도자 김통정(金通精)은 처음 1년간 조직을 정비하고 방어시설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활동을 펴 충청-경기 연해안까지 확대됐으나 원종 14년 4월 최후를 맞고 말았다.

진도 남도석성은 찾는 이가 없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다. 바로 근처가 세월호사건이 일어난 팽목항이다.

배중손이 최후를 맞은 대목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원종 12년 5월 15일,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골 장수 홍다구가 병선 400척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10여 일 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은 쫓기다가 붙잡혀 죽었고 배중손은 남도석성(南桃石城) 쪽으로 퇴각했다가 전사했다.

승화후 온과 배중손을 잃은 김통정은 진도 동쪽의 금갑진(金甲鎭)으로 퇴각했다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진도에서 삼별초가 패한 후, 진도에서는 1만여 명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갔다. ‘삼별초의 난’이 모두 진압된 후 고려 왕실은 완전히 몽골의 종속 정권으로 전락해 100여 년을 보내게 된다.

그 기간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원의 공주와 결혼한 뒤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됐다. 고려 고관들 사이에서는 몽골식 옷차림과 변발이 유행했으니 명맥만 유지했지 민족혼이 사라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70년 6월 2일
강화도 주둔 삼별초군, 1000여 척의 선박으로 진도로 이동

1270년 8월 19일
진도 벽파진에 삼별초군 상륙

1270년 9월
김방경이 몽골군과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

1270년 12월 22일
김방경과 몽골군 재차 진도를 공격하였지만 실패

1271년 4월
몽골 장수 흔도가 주도해 진도 공략

1271년 5월
진도에 상륙한 고려관군과 몽골군이 총공격. 배중손 전사, 김통정은 제주도로 후퇴

1272년 2월
김통정, 제주도 애월에 성을 쌓고 전력을 재정비

1273년 4월
여몽연합군 제주도 공격. 삼별초 멸망

북한의 핵 위협을 받는 요즘, 사상 최강의 군사대국 몽골에 맞서 싸운 삼별초의 흔적을 찾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삼별초의 흔적은 강화도에서 시작하는 게 옳다. 지금의 강화군청 근처에 고려 왕궁터가 있다. 고려 왕궁터는 건물이 몇 개 없는데 그중에서 눈여겨볼 것이 역사기록을 보존하는 사고(史庫)다.

사고 뒤로는 석성이 쌓여 있다. 다소 가파르지만 한번 올라가 보면 사방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석성 위에는 북장대 같은 장수들이 병졸을 지휘하던 누대도 나온다. 이곳에서는 맑은 날이면 북한 지역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왕궁터와 석성을 본 뒤에는 외포리로 가본다. 외포리에는 ‘삼별초군 항몽유허비’가 있다.

용장산성 아래에 있는 고려항몽충혼탑이다.

외포리 횟집촌 뒤편으로 가보면 삼별초군 항몽유허비가 보인다. 유허비 앞에는 특이하게도 진돗개 동상과 제주도 돌하르방 한 쌍이 서 있다. 모두가 삼별초의 항쟁지였던 진도군과 제주시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삼별초군은 여기서 진도를 향해 머나먼 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삼별초의 두 번째 항쟁지 진도로 가볼 차례다. 해남군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이순신 장군이 물살을 이용해 왜군을 격파한 명량해협, 즉 울돌목이 나온다. 진도대교 바로 밑, 울돌목의 물살은 지금 봐도 기이하다. 물살이 거세 회오리를 일으키는데 밑에 암초가 많아 바다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울돌목 건너에 벽파진이 있고 그 근처에 용장산성이 있다. 산성은 흔적만 남았지만 석축의 웅장함은 여전하다. 용장산성 입구엔 용장사가 있고 그 아래 삼별초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용장산성에는 건물 자리가 모두 12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모두 420m에 이르는 성이 둘러 있다. 용장산성은 사적 제126호이다.

용장산성에서 진도군 중심부로 향하면 소치 허련이 여생을 보냈던 운림산방이 나오는데 거기 못 미쳐 승화후 온의 왕릉이 있다. 무덤 근처의 솔숲으로 덮인 고개는 왕무덤재라고 불린다. 왕 무덤 아래에는 말무덤이라 불리는 무덤이 또 하나 있는데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금갑은 삼별초군이 마지막 항쟁을 위해 제주도로 떠난 곳이다.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변해 있다.

진도의 남쪽으로 향하면 남도석성이 나온다. 스산한 정취가 가을이면 일품인 이곳에서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전사했다. 근처 금갑진은 한적한 해수욕장인데 여기급창(女妓及唱) 둠벙이라는 못이 있다. 이 둠벙은 김통정을 따라가다가 뒤처진 부녀자들과 시종들이 스스로 죽겠다고 몸을 던진 곳이다.

내친김에 삼별초의 흔적을 더 찾고 싶다면 제주도로 가면 된다. 그런데 여몽연합군에 패해 멸망한 삼별초의 잔군이 일본 오키나와로 갔다는 이설(異說)이 최근 나와 눈길을 끈다.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는 배로 빠르면 사흘이 걸리는 거리인데 과연 이 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김통정의 삼별초는 1273년 4월, 전선 160척에 탄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김통정은 자결하고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됐다는 게 기록의 전부다. 그런데 포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과연 남김없이 전멸했을까? 혹시 그중에 국외로 탈출한 사람들은 전혀 없었던 걸까?

윤용혁 공주대 역사학과 교수는 수년 전 한국중세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논문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본섬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 등지에서 출토된 기와가 고려 삼별초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인데 기와가 주목받은 것은 2007년 6월이다.

‘탐라와 유구(琉球·류큐) 왕국’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의 민병찬 당시 학예실장 등이 오키나와에서 대여해 온 13~14세기 수막새 기와가 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막새란 수키와가 이어진 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를 말한다.

두 기와 모두 가운데 둥근 원 주위로 연꽃 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에는 연속적인 점 무늬가 있었다. 박물관의 연꽃 잎이 8개, 오키나와의 것이 9개라는 것 정도만 달랐다. 박물관 기와는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기와 중에는 좀 더 확실한 내용을 전해주는 암키와도 있었다.

그 기와에는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癸酉年高麗瓦匠造).’ 1273년, 즉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진압된 그해가 계유년이다. 이 기록으로 인해 진도나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떠난 삼별초 잔군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이 기와가 덮인 건물을 지었다는 설이 나왔다.

이 ‘고려 기와’는 우라소에성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일본 학계에선 ‘계유년’을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이라고 봐 왔다. 《고려사》에 처음 고려와 유구국의 교섭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찰도(察都)가 사신을 파견한 1389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 교수는 “계유년은 1273년 이외의 다른 해가 되기 어렵고 그 기와를 만든 세력은 삼별초가 유력하다”고 했다. 1389년이라면 고려 장인이 원나라나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텐데 기와에는 간지(干支·십간과 십이지)만을 기록했다. 삼별초는 외교문서에서 간지만으로 연대를 표시했다.

윤 교수는 진도의 삼별초가 몽골에 맞서 일본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려 했던 것에 주목했다. 진도가 함락된 지 한참 뒤인 1271년 9월에 교토(京都)에 도착한 서신에서 삼별초는 ‘몽골이 곧 일본을 침략할 것’이라며 ‘식량과 병력을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머물면서도 일본에 도착한 원 사신 조양필(趙良弼)의 활동을 방해해 교토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감안하면 ▲당시 삼별초 세력이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할 때 잔여 세력의 일부가 제주도가 아닌 일본 등 제3의 지역으로 분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제주도 함락 당시에는 진도 때보다 더 많은 분산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윤 교수는 분석했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그 기와로 건물을 지었다면, 이는 고대사의 대부분이 공백으로 남은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삼별초가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지역 세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큰 성도 축조됐다.

이 때문에 최근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이 건국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삼별초”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삼별초 세력이 주도한 오키나와의 대형 건축 공사가 정치적 공동체의 출현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펼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언제는 소설 속 주인공 홍길동이 세웠다는 율도국이 오키나와라더니 이번에는 또 삼별초냐”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한민족의 자존심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만 억지로, 근거없는 상상으로 이룬 자존심은 오히려 우리 민족을 협량하게 만든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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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에도 우리는 굴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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