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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18) 金弘集

근대화 주도하다 비참한 최후 맞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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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설명하면서 조선의 개혁·개방을 설득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맡은 온건 개혁론자
⊙ ‘위로부터의 개혁’ ‘친일파 개혁’으로 보수적인 유생층과 국민 지지 상실

張哲均
⊙ 66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김홍집은 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 직을 맡아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개혁관료였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직후 군중들에 의해 격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세기 후반, 서구의 개방 압력에 시달리던 조선은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쇄국에서 개방으로 외교노선을 선회했다. 고종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나 다름없는 근대화론자 박규수(朴珪壽)를 중용하고 그의 사랑방 문하생들을 정국의 전면에 내세워 조선의 개혁, 개방을 추진해 나갔는데 그 중심에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조공(朝貢)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청국의 ‘속방화(屬邦化)’ 압력을 감내하면서, 1871년에는 미국과 충돌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었고, 1876년(고종 13)에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에 앞서 성공한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김홍집은 이러한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과 내부로부터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으로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인 1880년 수신사(修信使) 일행으로 일본을 돌아보고 귀국해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후 미국, 영국 등과의 국교수립 협상 실무책임자로서 외교업무를 전담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임오군란(壬午軍亂),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청일전쟁, 아관파천(俄館播遷)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 직을 맡아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개혁관료였지만, 1896년 아관파천 직후 군중들에 의해 격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홍집에 대해서는 친일 매국노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가 일본에 이용당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쇄도하는 외세의 압력과 국내정치적 갈등 속에서 부단히 근대화를 위해 분투했던 것도 사실이다. 120년 전 조선의 망국과정을 돌아보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근대화론자로 개혁, 개방을 주도했던 김홍집을 다른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온건 개혁론자
 
  김홍집은 1842년(헌종 8) 참판 김영작(金永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영작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5대손으로, 이조·호조·예조·병조참판을 역임하였고 한성부 좌윤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67년(고종 4) 26세에 문과 급제하여 승정원을 시작으로 호조·공조·병조·예조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을 가지고 돌아와 고종이 개혁, 개방 정책을 채택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뒤 예조참판으로 승진해서 외교에 전념하게 된다.
 
  개방정책을 전담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대외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으나 1881년 위정척사운동이 격화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다시 복귀하여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어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1882년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책으로 일본 및 청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실무책임을 맡아 협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1884년 예조판서(禮曹判書)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관계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점진적 온건개혁 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혁 노선의 김옥균(金玉均)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좌의정 겸 외무독판(外務督辦)의 중직을 맡아 수습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일 양국의 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에 임명되어 뒤처리를 하는 한편, 갑오개혁을 주도하여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박영효(朴泳孝)와의 친일 연립내각이 수립되자 ‘홍범 14조’ 등의 개혁을 실시했고,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사건이 탄로나 일본으로 망명하자, 재차 입각하여 각 정파와 제휴로 이뤄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계속 개혁을 추진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후에 명성황후)를 시해했는데 이때 김홍집 내각은 일본과 결별하지 못하고 뒷수습을 모호하게 처리하다가 국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매도되어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박규수의 사랑방 문하생과 신진 개혁세력의 형성
 
고종은 정치적 스승이나 다름없는 근대화론자 박규수를 중용하고 그의 사랑방 문하생들을 정국의 전면에 내세워 조선의 개혁, 개방을 추진해 나갔는데 그 중심에 김홍집이 있었다.
  김홍집은 1867년 26세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면서 조선이 당면한 현실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무렵 박규수는 몰락하는 청국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조선의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일대혁신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서울 북촌 자택 사랑방에서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다수의 젊은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국제정세와 근대화를 교육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이 사랑방 모임에 합류해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박영교(朴泳敎), 김윤식(金允植),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박정양(朴定陽), 홍영식(洪英植), 윤치호(尹致昊), 유길준(兪吉濬),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과 교류하게 된다.
 
  당시 조선 정국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유림(儒林)의 위정척사세력이 다수를 이루고, 퇴진한 대원군이 이들을 후견하는 가운데, 민비와 민씨 외척이 수구(守舊)세력으로 정권의 실세로 부상하였다. 박규수의 개혁세력은 고종의 근대화 개혁노선에 힘입어 대외관계를 주도하면서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규수의 근대화론은 개혁사상으로 무장한 사랑방 문하의 신진관료들에 의해 정치적 당파가 형성되고 더욱 발전되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책노선과 추진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면서 급진노선과 점진노선의 두 흐름으로 분화하게 된다.
 
  후자는 박규수에게서 비롯된 동도서기(東道西器)를 근간으로 청의 양무론(洋務論)적 입장에서 유교적 윤리질서와 전통적 정치사회제도는 견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도입하되 개혁정책은 현재의 수구정권과의 타협 아래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요약하면, 기존의 전제왕정은 유지하면서 소위 ‘서학(西學)’을 수용해 점진적으로 개혁을 도모하자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김윤식과 김홍집으로 대표된다.
 
  김옥균, 박영효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노선은 일본의 유신론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뿐만 아니라 사상, 제도까지 전면적으로 수용해 ‘개화(開化)’를 실현하고, 대외적으로는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며, 대내적으로는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근대적 국가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민씨 수구정권의 타도가 불가피하다는 변법(變法)적 입장이었다.
 
  구한말, 조선 봉건사회가 당면했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국강병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던 이러한 개혁사상은 조선사회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끌어 내는 동기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나, 스스로 정파(政派)가 분열되어 자강(自强)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일본의 침략을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빛을 잃고 말았다.
 
 
  메이지 일본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벤치마킹
 
김홍집은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메이지 일본을 조선의 개혁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다. 사진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일본 무사들.
  김홍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예조참의로 재직할 때 제2차 수신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때 김홍집은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메이지 일본을 조선의 개혁 근대화의 모델로 삼게 된다. 그래서 그의 일본 수신사 행보는 이후 그의 정치노선과 행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박지원(朴趾源)이 청국을 방문하고 ‘북학(北學)’을, 박규수가 청국의 몰락을 목격하고 ‘서학(西學)’을 제시한 바와 같다.
 
  당시 김홍집이 해결할 가장 큰 현안은 인천개항과 관세징수를 재협상하는 문제였다. 그는 윤웅렬(尹雄烈), 이용숙(李容肅), 지석영(池錫永) 등 58명의 수행원과 일본을 방문하여 현안타결을 시도했으나, 일측은 겉으로만 환대할 뿐 협상에는 응하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임무수행에는 실패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일본의 철도와 위생상태, 증기기관차와 자동차의 운용 등을 살펴보면서 유신 이후 재탄생한 ‘신(新)일본’의 근대화한 모습과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이 사행 길에 김홍집은 본연의 대일 관세교섭 이외에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을 했는데 그 하나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이라는 책을 가져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간 지석영을 통해 종두법(種痘法)을 발전시켜 과학기술을 보급해 나간 것이다.
 
  김홍집은 귀국한 다음 해인 1881년에 서양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앞서간 일본의 사례를 배울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이를 위해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에 파견되어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군사교육, 공업계 등등의 상황을 시찰하였다. 또한 김윤식을 영선사(營繕司)로 삼고 젊은 관료들을 동반시켜 청국(淸國)으로 가서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워 오기도 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우호를 맺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외교전략을 제시한 내용이고, 《이언》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양무론(洋務論)과 변법론(變法論)의 이론을 제시한 책이다.
 
  그는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소개하면서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상주하고 조선이 미국, 청국, 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이 토론에 부쳐지자, 김평묵(金平默)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의 중심세력들은 김홍집의 개방정책이 국가파탄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규탄운동을 벌여 김홍집은 한때 자리에서 사직해야만 했다.
 
 
  조선책략의 불편한 진실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와 고종에게 소개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이 취할 국가전략을 제시한 책이다.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의 시대에 국가의 생존전략으로서 영국의 세계패권이라는 국제질서를 토대로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이 취할 국가전략을 제시한 책이다.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이 남아 있어 최근에도 ‘미·중 사이 균형외교’에 관한 ‘신조선책략’이 제시되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외교전략서이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는 실로 아시아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다투게 마련이며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강토를 공략하려 할진대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중략)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어떠한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이어짐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미국이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음은 천하만국이 함께 믿는 바이다. 그런데 도리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제국과 연이어 맹약을 간청하고 있으니 이는 곧 서양에서 이른바 세력균형이라 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핵심 내용이다.
 
  요지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친중국(親中), 결일본(結日), 연미(聯美)함으로써 자강(自强)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외교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세력균형(勢力均衡)에 관해서는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이 김홍집과의 필담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근일 서양 각국에는 세력균형이라는 법칙이 있어서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인접하여 후환이 두려우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견제력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이전부터 내려온 부득이한 외교의 한 방법입니다”고 언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지구 위에 더할 수 없이 큰 나라가 있으니, 러시아라고 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조선책략》의 주된 경계 대상은 바로 러시아였고, 아시아의 지리적 요충지인 조선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야 한다는 충고로 이해된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의 남하에 가장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와 장대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청국(淸國)이었다. 청의 실세이자 외교 수장인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당시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진다면 청이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고 판단했고, 조선이 일본 미국과 우호적이 된다면 러시아 견제에 더욱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도록 권고했다. 조선이 이홍장의 권고와 중재에 따라 1880~81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이홍장은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조약문에 명문화하도록 주장하여 조선의 ‘속국화’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 측의 완강한 반대로 이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또한 주일공사 하여장은 이때 “서구가 조약에서 조선의 자주를 인정함으로써 속국의 명목을 잃을 가능성을 염려한 끝에 조선을 몽골, 티베트 같은 번부(藩部)로 만들어 내치와 조약권까지도 청이 주지할 것”을 이홍장에게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청의 내밀한 대외전략을 감안할 때 《조선책략》이 조선을 위한, 조선이 높이 평가해야 할 외교정책이라는 기존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청의 반(反)러 노선에 조선이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인정받으려는 자국의 외교전략 지침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장과 황준헌은 모두 이홍장 휘하의 측근 외교관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책에서 권유한 결일(結日)은 불과 1년 후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이 일본과 충돌하게 되자 청은 즉각 경계의 대상을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조선의 ‘속방화’를 가속화하려고 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통리기무아문 설립과 근대 외교관의 효시
 
  김홍집은 1880년 말 일본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와 협상을 벌여 현안이었던 인천개항 시기를 20개월 늦추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881년 위정척사운동이 격화하면서 그는 보수 유생들로부터 집중 비난을 받고 탄핵상소가 너무 자주 올라오자 인천개항을 연기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척사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고종은 개혁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다.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관장하기 위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자 김홍집은 다시 복귀하여 통상사당상에 임명되어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공법(公法) 국제질서에 관한 외교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김홍집은 1882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타율적이 아닌 자주적 개방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10년 동안 닫혀 있던 쇄국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혁과 개방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당시에는 근대외교에 관해 그만한 역량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던 것이다.
 
  1882년(고종 19)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관계가 시작됐는데 이때 처음으로 태극기(太極旗)가 제작, 사용되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조약의 조인식이 계기가 되어 태극(太極)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도형기(太極圖形旗)가 임시국기로 사용됐는데 김홍집이 건의하고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오군란과 청일 외세의 개입
 
  고종은 근대화 개혁정책을 채택하면서 김홍집 등의 권유에 따라 근대식 군대 창설을 원했다. 그러나 조선의 국내정치 사정은 이러한 신식군대를 운용할 정도로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마침내 1881년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얼마되지 않아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부족, 13개월 동안 군료(軍料) 미불 사태가 발생하여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81년 임오년에 구군영 소속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와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당시 군란의 주도 세력은 민씨 외척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일본공사관을 목표로 했고 수구세력의 핵심인 민비와 일본공사 하나부사를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민비와 민씨 외척의 수구파는 혼란이 확대되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청에 군란을 제압해 줄 것과 함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청국이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청은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회복하려고 45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일본인 살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군란의 주모자를 처단하고,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할 것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을 요구했다.
 
  문제는 이러한 내우외환의 혼란을 수습할 인물이 없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에게 사태수습을 맡겼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 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자 대원군은 어쩔 수 없이 외교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내세워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사이 청은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잡아가고 민씨 수구정권이 다시 부활했다.
 
  대원군과 민비 간의 정치적 다툼 속에 결국 군란으로 시작한 이 국내적 사건은 대외적으로는 청과 일본에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권한을 확대시켜 주는 국제문제로 변질된 것이다.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청국과 협상할 때에도 실무책임을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이홍장을 설득해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임오군란을 수습한 김홍집은 1883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교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갑신정변과 김홍집의 행보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김홍집이 사태 수습을 맡았다. 사진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은 1884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절반을 철수시켰다. 조선에서 주도권을 회복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내세워 민비의 수구정권과 각을 세우고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개혁 노선의 인물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조정의 중간 관직에 다수 진출해 있었는데, 국내적으론 대개혁, 대외적으론 청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는 입장이다. 일본 후쿠자와에 영향을 받아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도막(倒幕)세력과 같은 노선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 침탈의 걸림돌이던 청과 민씨 수구 일파를 내몰기 위하여 김옥균 등에게 조선의 자주와 평화보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일본군대 동원과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차관까지 약속하며 정변을 부추겼다. 김옥균 등은 1884년 10월 우정국(郵政局) 개설 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를 감행했다. 갑신정변이다. 이들은 일본군 200명과 조선 군인 50여 명을 동원하여 고종과 민비를 볼모로 잡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김옥균 등 정변 주도세력은 개혁내각을 구성했다. 당시 온건 개혁노선의 김홍집은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한성판윤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정변에 그가 주동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정변 내각의 핵심적 개혁내용은 ‘14개조 정강(政綱)’에 표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는 것이며,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민비와 외척 정권은 다시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 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변의 주체세력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정변세력과의 약속은 고사하고 일본 군대도 철수시켰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주도자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도 김홍집의 몫이었다.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를 해결할 적임자는 김홍집밖에 없었다. 김홍집은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외무독판(外務督辦)을 겸직해 또다시 외교와 개혁의 책임자가 되었다. 일본은 정변이 실패하자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전가했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대한 사의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고 마무리하였다. 굴욕적인 한성조약 체결에 책임을 지고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본은 청국과도 1885년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핵심내용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및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양국 중 어느 한쪽이 파병(派兵)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린다는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과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10년 뒤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는 구실이 되었다.
 
 
  동학혁명과 청일의 충돌
 
김홍집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등 갑오개혁(갑오경장)을 단행했다. 사진은 놀이패 한두레가 동학혁명의 정신을 마당극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던 김홍집은 1887년 다시 좌의정 겸 내무대신으로 정계에 복귀해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가던 중 1894년 동학혁명을 맞게 된다. 혁명의 배경은 일본의 농산물 수탈과 일본으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防穀令)과 관련이 깊다.
 
  1876년 조선이 개항하면서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쌀·콩 등 농산물을 매점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곡물의 절대 비축량이 부족하여 식량난이 가중되었다. 1888년(고종 25)에는 흉년까지 들자 전국 여러 곳에서 연달아 폭동이 일어났다. 곡물 수출항인 원산(元山)을 관장하던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을 근거로 원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동하였다. 1892년 방곡령 사건이다.
 
  일본은 방곡령 시행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보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이 거절하자 이듬해 군대를 동원하여 피해배상을 강요했다. 조선은 배상금 11만환을 지불하기로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동학군의 기세가 강성해지자 조선은 다시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일본도 10년 전 체결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양국의 세력균형과 동학 토벌 명분으로 일방적으로 조선에 출병했다.
 
  서울에 군사를 배치한 일본은 조선에 청과의 관계 파기와 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청군과 조선 공략을 이미 계획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력으로 억압했다. 민씨 정권이 이에 저항하자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이고, 고종은 김홍집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김홍집은 과거제 등 묵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화폐제도의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새로운 도량형 제도의 채택 등 약 210건의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일명 갑오경장). 그리고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작업을 추진해 근대조선의 정치, 사회 제도의 골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친일내각의 등장
 
  일본은 조선에 파병하면서 이미 청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계획한 대로 경복궁을 침공해 조정을 장악하고 조선 군대를 무장해제시킨 후, 집결한 청군을 향해 진격하는 한편, 1894년 7월 풍도(豊島) 앞바다에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8월 중순 평양전투에서 청군을 제압해 승기를 잡은 일본은 잠재해 있던 ‘정한론’을 사실상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내각회의에서는 ‘조선보호국화 방안’을 정부의 공식정책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보호국화’ 책략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의 원훈이자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를 공사로 서울에 파견해 보호국화 정책목표를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해산한 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박영효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조성하고 500만 엔의 차관을 공여하면서 조선정부로 하여금 일본식 내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했다.
 
  9월에는 일본이 평양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파했다. 일본군에 연패한 청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①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랴오둥(遼東)반도·팽호도(澎湖)의 할양과 대만(臺灣)을 식민지로 할양 ③전후 배상금 2억냥 지불 ④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이다.
 
  일본이 승리하자 박영효 등은 군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김홍집을 압박했다. 그는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 간의 갈등심화 등으로 총재직을 사임했다. 박정양(朴定陽)-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사건이 탄로나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 박정양은 일본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3개월이 못 되어 사직하고 말았다.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 자리에 나오라는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서면서 이번에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더 이상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는 “상감께서 밤새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의 안전만을 위해서 상감의 간청을 거절할 수가 있겠느냐? 죽음을 각오하고 상감의 간청을 수락하고 나왔다”고 했다. 김홍집이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청일전쟁은 일본 ‘비수론’과 청국 ‘방아쇠론’의 격돌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사진은 120년 전 일본 함대가 떠났던 사세보 일대.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각축하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에 영토분할 경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은 2000년 역사의 사대교린 조공체제에서 이탈하여 근대 국민국가(國民國家)의 면모를 갖추면서, 보편화해 가고 있는 서구의 공법 국제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이 역사적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외적 요인은 청일전쟁이었고, 내적 계기는 근대화 개혁이었다. 조선은 뿌리 깊은 중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 변화를 조선 스스로 이루어 내지 못함으로써 제국화한 일본의 침략대상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한반도에 양군이 진주하면서 야기되었지만, 청일 간의 갈등은 그 이전부터 동지나해(東支那海)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1872년 병력을 파견해 대만을 공격했고 1879년 류큐(琉球) 왕국을 오키나와 현으로 명명해 자국에 편입시켰다. 청의 외무를 전담했던 북양대신 이홍장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1880년 8000t급 갑철함(甲鐵艦)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그리고 어뢰정 10척을 독일에 발주했다. 이어 먼저 영국에 발주한 순양함들과 묶어 ‘북양(北洋)함대’를 편성했다. 청의 해군력은 북양함대만으로도 세계 10위권 내에 진입해서 ‘불침(不沈)전함’이라 불릴 만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세력이 구원을 요청하자 청은 도입한 영국제 순양함 3척이 호위하는 수송선단으로 지상군을 신속히 조선에 전개해 군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때도 조선에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해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청은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직접적인 발판이 될 수 있는 한반도에서만은 일본에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 견고하다. 중국(明)과 일본이 직접 충돌한 1874년 임진왜란 시 명군의 조선파병에 전략적 근거를 제공했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이다. 대륙세력인 중국 처지에서 보면 한반도는 해양세력이 중국을 향해 겨누는 ‘방아쇠’로 인식한 결과이다. 중국이 6·25에 참전하고 오늘날에도 북한을 감싸 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이 보는 한반도의 전략적 인식은 다르다. 1885년부터 3년간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독일인 메켈(K. W. J. Meckel)은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와 같다”고 했다. 독일 히틀러와 군부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진정한 이유를 전력과 국력의 열세에서 찾지 않고 유대인들이 후방에서 조국 독일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이른바 ‘등 뒤의 비수론(Dolchstolegende)’이다. 일본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에 영향을 받아 1890년 ‘외교정략론’을 통해 일본을 ‘주권선’으로, 한반도는 주권선의 방어를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이익선’으로 설정했다.
 
  청의 북양함대와 조선진출에 자극받은 일본은 1893년 왕의 칙어를 통해 전 공무원 급료의 10%를 헌납하고 왕실 내탕금까지 투입해 ‘정원’과 ‘진원’을 능가하는 1만2000t급 영국제 최신 전함 ‘후지(富士)’와 ‘야시마(八島)’를 도입하기로 했다. 2척을 도입하는 데 들어간 예산이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달했다. 오늘날 ‘안보딜레마(security dilemma)’로 설명되는 적대국 간 군비증강의 역사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청일전쟁은 청의 ‘방아쇠론’과 일본 ‘비수론’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는데, 그때 센카쿠 제도도 함께 일본에 넘어갔다.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은 센카쿠 제도를 새로운 동북아 해상패권 경쟁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중국 ‘군사굴기(軍事崛起)’의 다음 목표는 어디가 될 것인가? 동아시아의 사태진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생생한 역사의 교훈이다.
 
 
  친러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과 을미사변
 
  서구열강 중에서 해외 식민지 경쟁에 늦었던 러시아는 1891년부터 대륙횡단 시베리아 철도를 착공하여 대 아시아 진출과 부동항(不凍港) 확보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랴오둥반도를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중국분할 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걸었다. 이른바 1895년 4월 삼국간섭(三國干涉)이다. 열세를 인정한 일본정부는 결국 랴오둥반도를 포기하고 대신 청국으로부터 보상금 3000만 냥을 받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이로써 일제의 상승세는 주춤하고 러시아의 막강한 힘이 주목을 받으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하였다. 이 움직임의 핵심에 민비와 수구세력이 있었다.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Waeber)도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민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정부내 친일세력을 추방하고, 친러적 인물들을 기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는 이른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구상이었다.
 
  이러한 조선의 정책은 전쟁까지 겪으며 청에 승리한 일본으로서는 위기였다. 일본정부는 비상수단으로 이노우에 공사를 경질하고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오(三浦梧樓)를 파견해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로서 민비를 시해했다.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는 대원군을 이 사건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어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하려고 계획했다. 일본은 민비 시해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음모와 공작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은 일본의 간계에 이용당해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사변 전모는 100년이 지난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 문서로 드러나게 됐다. 당시 사건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시해사건 꼭 100년째가 되는 지난 1995년에 당시 사용했던 일본도가 일본 규슈(九州)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도검의 칼집에 ‘순식간에 여우를 해치우다’라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었다.
 
 
  아관파천과 친일내각 총리대신의 비참한 최후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관계 열강의 비난이 세차게 일어나자 일본은 곤경에 빠졌다. 일본은 다시 조선에 개혁조치를 요구했다. 8월 을미사변에 이어 11월 공포된 개혁조치에는 조선사회에 민감한 단발령도 포함되었다. 분개한 국민들은 유림들을 선봉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김홍집 내각은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궁궐 호위의 중앙군을 전국 각 지방에 보내야 했고, 이 때문에 왕실호위는 약화되었다.
 
  사회혼란과 왕실경비의 소홀한 틈새를 이용하여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 친러파는 1896년 2월 11일 베베르 등과 공모하여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하였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을 부추겨 새로운 내각도 탄생시켰다. ‘친일적’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친러적’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이어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뒤늦게 사실을 안 김홍집은 정병하, 유길준 등과 함께 허겁지겁 경복궁 앞으로 달려갔다. 친러 정권은 경복궁 앞에 경관들을 배치해 놓았고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으며 광화문 앞에 있는 일본 수비대에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고 서 있었다.
 
  민비가 시해당하자 김홍집은 자결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김홍집을 방문했던 유길준이 “왕비는 이미 참변을 당했고 사태는 벌어졌으니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다”고 극구 말렸으나, 김홍집은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일국의 중신 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임금과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밖에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고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김홍집에게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이에 살기등등한 보부상패들은 그를 교자에서 끌어내렸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살기등등한 보부상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친일파 역적 매국노 ‘왜대신’으로 매도되어 살해된 시신은 광화문 밖에 효수되었고, 시신은 도륙되어 각도로 보내졌으며, 백성들은 수급에 돌을 던졌다 한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는데, 이시영(李始榮)에게 시집간 딸 등 이미 출가한 딸들은 연좌제를 피했으나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연좌되어 관비로 끌려갈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인 뒤 자살하였다.
 
 
  누가 김홍집을 매국노라 말할 수 있을까?
 
  갑오경장(甲午更張)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일본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하였을 뿐 아니라 집권 후에도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여 개혁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타율적 성격을 띤 개혁운동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개혁사업의 전면에 김홍집이 있었고 그의 내각은 을미사변의 어정쩡한 처리와 단발령을 강행함으로써 ‘위로부터의 개혁’, ‘친일파 개혁’으로 보수적인 유생층과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단발령에 대해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왕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곧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들에게도 모두 상투를 자를 것을 명했다. … 단발령이 내리자 통곡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저마다 분을 참지 못했다. 서울에 와 있던 시골 사람들은 멋모르고 밖에 나왔다가 상투를 잘리니 그것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통곡하며 서울을 떠났다. 사정이 이러하니 단발령의 잘잘못은 제쳐두고라도 온갖 비난이 김홍집에게 쏟아졌다.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운 그로서는 이 비난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완용 일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었고 그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가 이때 죽은 것은 그 개인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늘 일본에 이용을 당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망정 뒷날 변절한 개화파의 오명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김홍집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김홍집과 내각에서 함께 일해 온 유길준은 “내게는 세 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을 행하지 못했으니, 하나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부끄럽고, 둘째는 세계 만국에 부끄럽고, 셋째는 후세에 대해 그렇습니다”고 고백했다. 김홍집은 이 부끄러운 책임을 지고 끝내 백성에게 목숨을 맡긴 것 아닐까? 근대외교의 효시로 일본을 모델로 개혁, 개방을 주도한 김홍집은 내우외환의 정세 속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국내외의 신망을 얻었지만, 결국 정적 친러파의 손에 왜대신으로 매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김홍집을 비판하기에 앞서 국권상실이라는 국란의 위기에서도 망국적인 당쟁이 재현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관파천은 결국 친일파로부터 친러파로의 정권교체였다. 권력다툼에 외세를 이용하는 붕당(朋黨)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친러파로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김홍집을 친일파 왜대신으로 매도하는 데 앞장선 이완용은 10년 후에는 ‘조선의 망국에 마침표를 찍은 매국 왜대신’으로 변신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아관파천의 외교적 실패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아관파천은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서방 외교관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줬다. 특히 당시 패권국가인 영국과 해양세력 미국이 동북아에서 야심을 드러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강화시켜 주고 오히려 조선에는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해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하는 상황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반복된다. 한반도의 역사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요인과 함께 그러한 여건에 길들여진 사고와 생활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인적 요인에 의해 반복된다. (중략) 사람과 사고가 바뀌면 역사도 바뀔 수 있다.”《서희의 외교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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