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1〉 : 월간조선

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28분 중국 서남부 쓰촨(四川)성 원촨(汶川)현에서 리히터 규모 8의 강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룽먼(龍門)산맥 지하 19m에서 발생해 약 2분간 지표면을 심하게 뒤흔들었다. 그 세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1천여km나 떨어진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홍콩 등 연해 대도시에서도 지축의 흔들림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쓰촨대지진은 순식간에 일어나 6만9227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37만4000명을 다치게 했다.

진앙인 원촨현 잉슈(映秀)진에서 80km 이내의 도시와 마을은 온전한 데가 없었다. 다행히 내륙 최대 도시이자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청두(成都)는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잉슈진에서 동쪽으로 50여km 떨어진 주(綿竹)시는 재앙과도 같은 타격을 받았다. 1만1098명이 죽고 3만6000명이 다쳐 피해도시 중 3번째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당시 주 전체 인구(2013년 말 51만명) 중 10분의 1에 달하는 수치다.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과 상점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는 중국 8대 명주 중 하나를 생산하는 주류업체 젠난춘(劍南春)도 있었다. 젠난춘그룹은 주시 중심가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지진으로 양조장 일부가 폐허로 변했고, 바이주(白酒)의 원액을 보관하는 원주(原酒)창고의 외벽이 45도 각도로 기울었다. 그중에는 중국 최대의 술 저장고도 있었다.

“일주일 넘게 술 냄새 진동”

2008년 대지진 후 양조장을 복구하면서 조성한 젠난 옛거리. 길 옆 건물이 모두 양조장이다.

자오잉(趙潁·여) 대당국주(大唐國酒) 총경리는 “지반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원주창고에 보관됐던 술독 대부분이 서로 부딪치고 깨졌다”면서 “당시 13곳의 원주창고 항아리에 담겨 있던 술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가지는 일주일 넘게 술 냄새로 진동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바닥에 쏟아진 술은 전체 보관량 중 40%였다. 이 때문에 젠난춘그룹은 8억 위안(약 1392억원)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3개월간 생산을 중단하고 양조장과 원주창고를 재건하기 위해 투입한 공사비 등을 합하면 20억 위안(약 3480억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밤 필자는 쓰촨성으로 향했다. 두 번째로 찾은 피해도시가 주였다. 당시 주시 정부와 공안당국은 외국 취재진에게 극심한 피해 상황이 노출되길 꺼려 했다. 도심 진입을 막으면서 취재를 방해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월 19일 다시 주를 방문했다. 이제 주는 지진의 참상을 완전히 치유한 채 깨끗했다.

주는 중국에서 현급(縣級) 도시에 속한다. 20세기 말 중국은 대대적인 행정개편을 통해 모든 도시를 광역시화했다. 한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 시와 현을 통합해서, 중앙정부에서 지방 말단 촌까지 피라미드형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주는 더양(德陽)시에 소속됐다. 더양은 주 외에도 광한(廣漢), 스팡(什) 등 4개 시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말 인구는 392만명으로 경상남도(333만명)보다 많고, 면적은 5911km2로 경기도의 60% 수준이다.

중국 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더양이지만, 경제 실력은 만만치 않다. 2013년 지역내총생산(GRDP)은 1395억 위안(약 24조2730억원)을 기록해, 쓰촨성 내 21개 시·주(州) 중 3위를 차지했다(1위 청두는 9108억 위안). 이는 중국 최대 발전기 생산기지가 더양에 있어 가능했다. 현재 중국 원자력 장비의 60%, 수력 발전 설비의 40%, 화력 발전 설비의 30%가 더양에서 생산되고 있다.

1960년대 말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은 유사시 미국과 소련의 핵공격으로부터 산업시설을 지켜야 한다며 3선 건설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연해지역(1선)의 군수산업 시설을 중부지역(2선)보다 훨씬 깊숙한 내륙지역(3선)으로 옮겼다. 이 3선 건설로 발전기 제조업체들이 더양에 자리 잡게 됐다. 이 같은 배경 위에 더양에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합금화학공장이 몰려 있다. 이런 기업들보다 월등히 높은 브랜드 가치를 지닌 업체가 더양에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젠난춘이다.

明·淸代 양식 거리 조성

어마어마한 규모의 젠난춘 제1원주창고. 파괴된 창고를 재건하면서 술독의 3분의 1을 땅에 묻어 지진에 대비했다.

2012년 중화브랜드전략연구원이 발표한 중국 기업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젠난춘은 121억 위안(약 2조1054억원)으로 42위를 차지했다. 이는 더양 내 기업 중 가장 높고 중국 바이주업체 중 4위에 해당한다. 젠난춘은 2008년에는 지진의 여파로 총판매액이 25억 위안(약 4350억원)까지 급락했지만, 2012년에는 80억 위안(약 1조3920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는 창업 이래 최고 실적이었다.

직접 찾아가서 살펴본 젠난춘은 2008년의 상처를 말끔히 털어내고 한창 도약을 준비 중이었다. 지진 당시 피해가 가장 심했던 원주창고는 모두 복구됐다. 새로이 한 곳을 더 건설해 14곳으로 늘어났다. 이 중 1980년대 세워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제1창고는 면적이 무려 5만m2에 달한다. 현재 1000ℓ의 술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를 2만3000여 개나 보관하고 있다. 제1창고는 규모나 양에 있어 중국에서 가장 큰 술 저장고다.

시설 일부가 파괴됐던 양조장도 복고풍 건물로 중건됐다. 젠난춘이 지진의 참화를 빠르게 극복한 요인은 양조장의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오 대당국주 총경리는 “2010년 양조장의 외관을 모두 명·청대 양식으로 바꾸고 그 주변을 전통거리로 정비해 지금의 젠난 옛거리(劍南老街)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대당국주는 젠난춘그룹이 젠난춘의 대외홍보와 젠난 옛거리 관리를 위해 설립한 계열사다.

주에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주시 외곽에서 고대 양조장 유적이 발굴됐는데, 거기서 남제(南齊) 때 명문이 새겨진 꽃무늬 벽돌이 발견됐다. 이 유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사서에는 ‘젠난사오춘(劍南燒春)’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후당서》는 8세기 말 덕종(德宗) 때 젠난사오춘을 궁중어주로 지정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젠난사오춘의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에는 이백(李白)도 등장한다. 그가 명주의 고향 주를 찾아 입고 있던 모피옷을 저당잡아가며까지 젠난사오춘을 맛봤다는 이야기다.

청소년기를 쓰촨성에서 보낸 李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태어난 고향에 있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여러 지방정부가 이백이 자기 땅에서 출생했다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이백은 당이 지배했던 서역의 안서도호부 쑤이예청(碎葉城)에서 태어났고 4세 때 쓰촨성 장유(江油)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쑤이예청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에 해당한다.

분명한 것은 이백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장유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백의 호(號)인 청련거사(靑蓮居士)는 이백이 살았던 장유시 칭롄(靑蓮)진에서 따온 것이다. 이백은 25세 때 장유를 떠나는데, 그 이전까지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오는 일화 중 하나가 젠난사오춘과 관련한 일화다. 주는 장유에서 약 80km 떨어져 있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이백은 고향을 잊지 못했다. 26세 때 양저우(揚州)에서 지은 ‘정야사(靜夜思)’에는 이런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다. 정야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표현한 최고의 망향(望鄕)시로 손꼽힌다.

침상 앞 달빛을 바라보니 (牀前看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가 아닌가. (疑是地上霜)
머리를 들어 산에 뜬 달을 바라보다 (擧頭望山月)
고향 생각에 고개가 숙여지네. (低頭思故鄕)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이백고리에 세워진 이백상. 시 ‛월하독작’을 형상화했다.

이백은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냈으나, 자신의 재능을 조정에서 펼치길 바랐다. 42세 때 도사 오균의 천거로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갔다. 현종으로부터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제수받고 많은 총애를 받았으나, 궁정시인에 불과한 신분을 벗어나질 못했다. 정치적 야망을 펼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면서 술에 빠져 지냈다. 고관대작 앞에서도 거침없던 이백은 결국 조정을 주무르던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사서 쫓겨나고 말았다. 잠시 장유로 돌아왔다가 다시 천하를 주유했는데, 이 시기에 쓴 시가 ‘장진주(將進酒)’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황허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奔流到海不復廻)
그대 보지 못했는가? 귀한 집에서 거울에 비친 백발을 보며 슬퍼함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카락이 눈처럼 세어졌네. (朝如靑絲暮成雪)
인생은 뜻을 얻으면 모름지기 즐길 것이니, (人生得意須盡歡)
금술잔을 부질없이 달 아래 헛되이 두지 말게나. (莫使金樽空對月)
하늘이 나를 낳고 주신 재주는 반드시 쓸 데가 있고, (天生我材必有用)
천금도 다 쓰고 나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일세. (千金散盡還復來)
양을 삶고 소를 잡아서 즐겨 보세나, (烹羊宰牛且爲樂)
모름지기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會須一飮三百杯)

장진주는 인생무상의 현실을 술로 잊고자 했던 이백이 호방한 풍격으로 써내려간 절창(絶唱)이다. 이백은 훗날 ‘월하독작(月下獨酌)’까지 지어 후대인으로부터 ‘주선(酒仙)’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이백은 다시는 장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칭롄진에는 당대 관련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질 않다. 단지 청대 복원된 이백의 고택 롱서원(西院)이 있다.

이 롱서원 또한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고택의 산문이 무너졌고 침실, 서재, 사랑방 등도 기와가 내려앉았다. 1월 18일 필자가 방문한 현장은 여전히 보수가 진행 중이었다. 롱서원을 관리하는 이백고리(故里)의 관계자는 “외관 복구는 모두 끝났으나 내부 수리가 아직 끝나질 않아 올해 하반기쯤 대외 공개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롱서원 옆에는 2010년 허난(河南)성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백의 시로 시비(詩碑), 시벽(詩壁) 등을 세운 태백비림(碑林)이 조성됐다.

젠난사오춘이 오늘날까지 젠난춘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은 춘(春)이 곧 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 술은 대부분 황주(黃酒) 계열이라 술 빛깔이 황록색을 띠었다. 이 색이 봄을 상징하는데다 술을 마시면 기운이 나게 하는 효과에 착안해서, 중국인들은 ‘춘’자를 더해 술 이름을 지었다. 특히 당대에 이런 작명법이 유행했다. 북송 시인 소동파가 “당대에는 ‘춘’자가 들어간 술이 많았다. 금릉춘(金陵春), 죽엽춘(竹葉春), 곡미춘(曲米春) 등 한두 개가 아니었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강물을 쓰는 우랑예, 룽먼산맥 지하수 쓰는 젠난춘

배합된 원료를 다시 큰 통에 넣어 다지는 한 노동자. 이것을 진흙을 덮어 90일간 발효시킨다.

당대 이후에도 주는 술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지속했고, 청대부터는 대곡주(大曲酒)를 주로 생산했다. 대곡주는 밀에다 약간의 완두콩을 넣어 만든 누룩을 더해 양조하는 술이다. 오랜 시간 동안 발효시킨 큰 누룩 덩어리를 배합해서 효소와 효모균이 풍부하다. 젠난춘은 수수·밀·옥수수·쌀·찹쌀 등에다 이 누룩을 더해 만든 증류주인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량예(五粮液)와 원료 및 양조법에서 유사하다. 두 술은 모두 드넓은 대지 위에 풍부한 물을 공급받아 자란 양질의 곡물을 쓴다.

두 술은 결정적으로 물에서 차이가 난다. 우량예가 양쯔강 변에 위치해 강물을 주로 쓰는 데 반해, 젠난춘은 룽먼산맥에서 지하수를 끌어와 술을 빚는다. 자오 총경리는 “룽먼산맥은 세계의 지붕 칭짱(靑藏)고원의 동단으로 칼슘, 탄산 등 천연 광물질이 풍부한 지하수를 품고 있다”며 “젠난춘은 이 물을 퍼와 빚은 술이라 맛이 아주 깨끗하다”고 말했다. 실제 필자가 제1원주창고에서 맛본 60℃ 원액은 도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19세기 말 주의 술은 다시 청 황실에 진상되는 공주(貢酒)로 지정됐고, 17개의 양조장이 세워져 번성했다.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때 그 수는 2백 개로 늘어났다. 이를 1951년에 통합해 국영 주술공장(酒廠)이 설립됐고, 1958년 회사 이름을 젠난춘술공장으로 바꿨다. 젠난춘이 중국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은 1979년이다. 제3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중국 8대 명주 중 하나로 뽑혔는데, 당시 선정된 술들의 명성과 시장 장악력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젠난춘은 중국에서 ‘마오우젠(茅五劍)’이라 불리며 마오타이(茅臺), 우량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당대 궁중어주라는 이력과 이백을 앞세운 마케팅으로 중국 주당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여기에 저가주부터 최고급 술까지 다양한 상품으로 선보여 격변하는 중국 술시장에 대응하고 있다. 이런 젠난춘의 시장전략은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우리 주류기업에 큰 시사점을 준다.

장비가 말년을 보낸 랑중

이백고리 장유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의 도시가 있다. 바로 장비(張飛)가 말년을 보냈던 랑중(閬中)이다. 211년 유비는 유장의 요청으로 익주(益州), 지금의 쓰촨에 들어갔다. 3년 뒤 유비는 유장을 몰아내고 청두에서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뒤이어 위(魏)나라의 공략을 막기 위해 장비를 파서(巴西)태수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장비는 랑중에 주둔하면서 7년간 지냈다.

유비는 청두를 떠나는 장비에게 음주하면 실수하는 습관을 염려해 술을 멀리하라고 엄명했다. 이에 장비도 마음을 잡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병사들을 엄격히 조련했다. 218년 위의 장수 장합이 랑중에 쳐들어오자, 장비는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퇴했다. 그러나 이듬해 10여 년 동안 홀로 형주(荊州)를 지켰던 관우가 위와 오(吳)의 협공을 받는 와중에 여몽의 습격으로 불귀의 객이 됐다. 소설 《삼국지》는 관우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유비가 너무 울다 보니 눈물이 말라 피가 나왔다고 묘사했다.

221년 유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장비를 거기장군(車騎將軍) 겸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세웠다. 곧이어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제갈량은 갓 건국한 촉한의 상황에서 대군을 일으켜 원정하기에는 때가 이르다며 말렸으나, 유비는 막무가내로 듣지 않았다. 유비의 동원령에 랑중에 있던 장비도 군중에 영을 내려 출정을 준비했다. 장비는 장수들에게 병사들이 입을 흰 갑옷과 흰 기를 사흘 안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범강과 장달이 나서서 “짧은 기일 내에 그 많은 갑옷과 기를 마련할 수 없으니 출정 날짜를 좀 늦췄으면 합니다”고 간언했다. 부하가 항명한다고 여긴 장비는 크게 노해 두 사람을 심하게 매질했다. 범강과 장달은 군령을 지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서 숙소에서 술에 취해 잠든 장비를 살해했다. 이때가 장비의 나이 쉰다섯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맹장의 죽음으로는 너무나 허무했다. 암살에 성공한 범강과 장달은 바로 장비의 머리를 베어 수하들을 데리고 오로 도망쳤다.

장비의 전설

장환후사 안 대전에 모셔져 있는 장비상.

수급 없이 남은 장비의 시체는 백성들에 의해 수습되어 숙소 뒤에 마련한 봉분에 묻혔다. 그 뒤 촉한의 후주가 된 유선은 장비를 환후(桓侯)에 봉해 묘소를 크게 정비했고 사당도 조성했다. 이것이 랑중 한복판에 남아 있는 장환후사(張桓侯祠)다. 장환후사는 장비를 모신 대전, 장비의 아들과 수하들을 모신 적만루(敵萬樓), 묘소 및 묘당 등으로 구성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은 모두 청대 지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충칭(重慶)시 윈양(雲陽)현에 또 다른 장비묘가 있다는 점이다. 윈양은 장비나 《삼국지》 격전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곳에 장비묘가 생긴 데에는 범강과 장달의 행적에서 비롯됐다. 두 사람이 랑중을 떠나 오로 가던 중 손권이 유비에게 화친을 청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로 가기 뭐하고 촉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자,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머리를 양쯔강에 던져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전설에 따르면, 장비의 머리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다가 윈양의 한 어부에게 발견됐다. 어부는 물고기를 잡으려다 사람의 머리를 건지게 되자, 깜짝 놀라 강으로 다시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 수급은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은 채 자꾸 어부의 배 주위를 맴돌았다. 집으로 돌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어부는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 호소했다.

“나는 거기장군 장비로, 얼마 전 살해당해 구천을 맴돌고 있소. 당신이 건진 수급은 내 머리요. 이대로 흘러 내려가면 오의 땅인데, 내가 어찌 원수의 땅으로 흘러간다 말이오. 제발 내 머리를 건져 촉의 땅에 묻어주시오.”

어부는 잠에서 깨어나자 곧바로 강으로 가 장비의 머리를 건져올렸다. 이웃들과 정성을 다해 수습한 뒤 강변에 묻고 작은 사당을 지으니, 이것이 윈양의 ‘장환후묘(張桓侯廟)’다. 현재 장환후묘는 2007년 완공된 싼샤(三峽)댐으로 인해 본래 자리에서 32km 떨어진 곳에 옮겨졌다.

랑중, 중국 4大古城의 하나

이처럼 랑중은 장비의 도시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기원전 330년 오늘날 충칭(重慶)에서 번성했던 파국이 랑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사서에 처음 등장했다. 316년 진(秦) 혜왕(惠王)이 랑중을 공략해 점령하자, 얼마 안 있어 파국과 청두에 있던 촉국은 종말을 고했다. 2년 뒤 혜왕이 쓰촨 북부(川北)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세운 행정소재지가 바로 랑중현이다. 2300년 전 지은 지역명이 지금까지 내려져 오는 사례는 중국에서도 아주 희귀하다.

7세기 랑중의 관할 지역이 커지면서 더 큰 행정구역으로 랑저우(州)가 생겼고 10세기에는 그 명칭이 바오닝(保寧)으로 바뀌었다. 바오닝이 1천 년 동안 관할하던 현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를 반복했지만, 그 중심지는 항상 랑중이었다. 하지만 신해혁명 후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1914년 중화민국 정권은 쓰촨 북부의 행정소재지를 랑중에서 난충(南充)으로 이관했다. 이로써 랑중은 2천 년 넘게 지킨 독보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이렇듯 긴 세월 동안 랑중이 쓰촨 북부를 대표한 이유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랑중은 쓰촨과 산시(陝西)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다.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를 자링장(嘉陵江)이 S자형으로 꿰뚫어 흐른다. 그 지형이 태극의 형상과 흡사하다. 자링장 북쪽으로 랑중고성(古城)이 자리 잡고 있다. 랑중고성은 청대 지어진 성곽 안에 당대 기본 골격이 짜인 도로와 수백 년 된 민가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중국 고대 도시계획의 활화석이다.

주변의 자연 풍광도 아름다워 수많은 문인이 랑중을 찾았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에 정착했던 시성 두보는 랑중을 방문한 뒤 ‘삼면으로 흐르는 강이 성벽을 껴안고, 주위의 산세가 노을을 가두다(三面江光抱城廓, 四圍山勢鎖煙霞)’라고 읊었다. 주변 산하에 둘러싸여 조화를 이룬 랑중의 매력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시구다. 오늘날 랑중고성은 산시(山西)성 핑야오(平遙), 윈난(雲南)성 리장(麗江), 안후이(安徽)성 서셴(縣) 등과 더불어 중국 4대 고성으로 손꼽힌다.

세계로 전파된 그림자극

오랜 세월 쓰촨 북부의 중심지였다 보니, 랑중은 전통산업이 잘 발달했다. 중국 3대 비단 생산지 중 하나이고, 잠사와 면직의 품질은 중국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명대 말기부터 제조되어 오늘날까지 옛 기술 그대로 생산되는 초(醋)는 중국에서 가장 맛 좋기로 유명하다. 이런 경공업을 중심으로 2013년 GRDP는 157억 위안(약 2조7318억원)을 달성했다. 현급 도시치고는 인구도 많아 89만명이나 된다.

다양한 전통문화도 잘 보존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그림자극(皮影戱)이다. 그림자극은 소가죽으로 만든 인형을 배우가 스크린 뒤에서 조명을 받아 움직여 공연하는 연극이다. 배우는 막대기로 인형을 조종할 뿐만 아니라 대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 연주까지 해야 하기에, 오랜 시간 고도의 기예를 닦아야 한다. 중국에서 시작된 그림자극은 인도네시아와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전파됐고, 터키와 그리스를 거쳐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현재 중국에는 10대 그림자극 유파(流派)가 존재한다. 이 중 랑중을 중심으로 발달한 쓰촨 북부 그림자극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째, 배우가 직접 인형을 만든다. 다른 유파에는 인형만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다. 둘째, 인형의 얼굴형 등을 둥글게 처리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다른 지방은 코, 턱, 손 등이 뾰족하고 날카롭다. 셋째, 공연되는 레퍼토리가 촉한과 관련 있거나 지역의 전설과 민간 설화다.

2012년 10월 필자가 만난 왕뱌오(王彪) 씨는 랑중 그림자극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3대째 그림자극을 공연하면서 자녀 및 동생 가족과 함께 전문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왕씨는 “촉한은 쓰촨을 중국 역사무대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왕조이기에 쓰촨 사람들이 보내는 애정이 아주 깊다”며 “장비가 랑중을 다스렸던 시기에 일어났던 고사를 중심으로 공연하고 있다”고 말했다. 왕씨 극단은 전통적인 연희 형식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벌이는 퍼포먼스 또한 창작해 선보이고 있다.

108가지 약재 첨가해 만드는 랑중의 바오닝야酒

랑중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오닝야주(保寧壓酒)다. 바오닝야주는 1668년 랑중고성 북문 밖에 살던 란문중(蘭文中)이 처음 빚은 술이다. 이 술은 원액을 만들기까지의 제조 과정은 여타 증류주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양조할 때 첨가하는 누룩을 천마(天麻), 육계(肉桂), 구기자, 반하(半夏), 대추 등 108가지의 약재로 만든다.

또한 원액에다 꽃가루와 얼음설탕을 더한 뒤 술독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저장고에 보관해 1~3년간 숙성시킨다. 그러면 술 도수는 60℃에서 16~30℃로 떨어지고 짙으면서 투명한 황색을 띠게 된다. 처음 마시는 술 맛은 흡사 최고급 사케가 연상됐지만, 냄새는 더욱 향긋했고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깊었다. 왕뱌오 씨의 추천으로 바오닝야주를 처음 접한 필자는 금세 그 맛에 반해 하룻밤 사이 3병이나 들이켰다.

란씨 가문은 오랫동안 바오닝야주의 제조법을 가족끼리만 전수했다. 양조기술은 오직 집안 남자들에게만 가르쳐 외부 유출을 막았다. 이 덕분에 란씨 가문이 경영했던 술도가는 3백 년 동안 랑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고 장사가 잘됐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1953년 국영 랑중술공장이 문을 열었고, 1956년에는 란씨 형제들이 운영하던 4개의 술도가를 합병했다. 이에 따라 바오닝야주의 제조법이 전파됐다

지난해 6월 랑중을 다시 찾았을 때 만난 쑹하이취안(宋海全·41) 랑중시 문화관광국장은 “란씨 가문의 헌신 덕분에 바오닝야주의 제조법이 퍼져나갔고 랑중 주류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개혁개방 이후 바오닝야주의 대중화는 더욱 진척되어 랑중의 술도가라면 어느 곳이나 빚고 있다. 핵심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한 랑중술공장은 2009년 회사 이름을 아예 바오닝야주주식회사로 바꾸고 전국 술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최근 들어 랑중은 시정부 차원에서 풍수(風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당대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풍수사였던 원천강(袁天綱), 이순풍(李淳風)이 랑중에 살면서 풍수지리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했던 점을 착안해 풍수문화를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미 15세기 원천강과 이순풍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천궁원(天宮院)을 확장했고 두 사람의 묘까지 조성했다.

2012년부터는 전 세계의 저명한 풍수학자들을 초청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쑹 국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풍수가들과 맺은 인연뿐만 아니라 배산임수(背山臨水)의 도시 배치, 풍수에 따라 집을 짓는 전통 등 랑중은 자타가 공인하는 풍수지리의 성지”라고 말했다. 과거 장비의 도시로만 기억됐던 랑중이 앞으로는 바오닝야주와 풍수문화로 이름을 떨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