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정신의 심층탐험 ① 한국인과 先進化 열망 : 월간조선

선진과 후진은 이것과 저것을 앞선 것과 뒤진 것으로 비교하는 개념이다. 선진과 후진이라는 낱말은 《논어(論語)》에 나오는데, 공자는 ‘예악(禮樂)에서 선진(先進)인 사람은 야인(野人)이고, 후진(後進)인 사람은 군자(君子)다. 예악을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나는 선진인 야인의 것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공자는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야인의 예악과 과거에 계속 머물러 있는 군자의 예악을 비교한 뒤, 군자의 예악이 아니라 야인의 예악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공자는 평생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통치자인 군자가 갖춰야 할 덕을 가르쳤다. 그는 군자를 어진 사람으로 만들어 혼란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 공자가 예악에서 군자의 것이 아닌 야인을 따르겠다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바탕인 예악이 누구의 것이냐를 넘어 선진의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나은 상태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진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람들이 선진화라는 말은 쓰면서 후진화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선진화에 대한 열망은 많은 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돼 왔다. 이런 까닭으로 지배층은 일찍부터 선진화를 국가목표로 내걸었다. 걸핏하면 국민에게 써먹는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진화이다.

지배층이 선진화를 국가목표로 내걸더라도, 그것으로 이루고자 하는 속내는 처지나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선진화를 목표로 내건 지배층의 속셈과 그들이 처한 주변 정세에 따라서 선진화에는 ‘앞서가는 선진화’ ‘나름대로 선진화’ ‘줏대 있는 선진화’ ‘따라가는 선진화’ ‘흉내 내는 선진화’ 따위가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 지배층은 아주 오랫동안 선진화를 매우 중요한 국가목표로 내걸고서 국민을 이끌어왔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은 선진화를 이뤄 선진국처럼 살아가는 것을 마땅히 이뤄야 할 의무처럼 느낀다. 한국인은 이런 일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기 위해 선진화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든다.

그러나 한국인은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 갖은 힘을 쏟으면서도, 정작 선진화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깊이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온갖 고생으로 애써 이룩한 선진화가 겉돌고 헛도는 일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진다.

한국인과 ‘따라가는 선진화’의 역사

중국 칭다오 취푸에 있는 공자 무덤으로 가는 입구. 공자 무덤을 ‘지성림(至聖林)’이라 부른다.

한국인은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밖’에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선진국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당연시 여겨왔다. 한국인은 선진국을 열심히 따라서 배우면, 언젠가 한국 또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에서 볼 수 있는 ‘따라가는 선진화’에 대한 믿음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믿음이 워낙 굳세어서 따라가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긴다.

한국인이 ‘따라가는 선진화’를 당연시하는 것은 한국인이 스스로 후진국에서 살아가는 후진사람이라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은 따라가는 선진화에 대한 믿음이 커질수록, 제가 스스로 가꾸어온 문화를 더욱 후진의 것으로 낮추어본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선진국에서 가져온 것에는 아주 후한 점수를 매기지만 스스로 일궈놓은 것에는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긴다. 이런 한국인은 선진국에 대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굽는 괴상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인이 ‘따라가는 선진화’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앞장에 선 이들은 지배층이었다. 그들은 따라가는 선진화의 논리를 내세워 한국인이 보고, 듣고, 아는 잣대를 모두 바깥에서 찾도록 함으로써 안(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잣대로 삼아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챙기고자 하는 이익을 한층 쉽게, 그리고 더욱 많이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따라가는 선진화’를 굳게 믿고서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한국인이 ‘따라가는 선진화’에 빠져든 것은 지배층이 중국의 한자와 한문과 서적을 가져다가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삼으면서였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선비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을 무기로 삼아 기존의 불교세력과 친원세력(親元勢力)을 몰아내고,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를 세우게 됨으로써 ‘따라가는 선진화’가 한층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은 학자(學者)와 사제(司祭)와 관료(官僚)의 구실을 아울러 하면서 유일한 지배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자, ‘따라가는 선진화’를 통치 근간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은 상태로 500년 동안이나 계속 따라서 배우면서 사대(事大), 중화(中華), 모화(慕華), 소중화(小中華), 동국(東國), 정학(正學), 이단(異端), 도통(道統), 진서(眞書), 언문(諺文)의 논리로서 따라가는 선진화를 펼쳐나갔다. 이런 일이 잘 이뤄지도록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책임을 진 최고의 우두머리가 임금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는 소국인 조선이 대국인 중국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모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며, 소중화는 후진인 조선이 선진인 중국을 따라 배워서 이 땅에 작으나마 중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동국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서 바라본 상황에서 동쪽에 있는 나라인 조선을 말하고, 정학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을 말하며, 도통은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요순문무(堯舜文武)에서 공맹정주(孔孟程朱)로 이어지는 중국의 학문 전통을 말한다. 이단은 성리학에서 벗어난 모든 학문을 말하고, 진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말하며, 언문은 조선의 말을 적는 훈민정음을 말한다. 그들은 중국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분석하고, 진단하고, 처방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니 그들은 제 임금을 군주(君主), 제 말을 방언(方言), 제 글을 언문(諺文), 제 문화를 동속(東俗)이라고 낮추어 불러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中華 선진화에서 開化 선진화로

우리는 19세기 말엽 중화 선진화를 포기하고 서양을 따라가는 개화 선진화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국권을 잃었다. 사진은 1945년 11월 3일 환국을 앞두고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앞에 모인 정부요인들.

19세기 말엽에 서구세력이 밀려와 조선왕조가 위기로 치닫게 되자, 지배층은 중국을 따라가는 중화 선진화를 포기하고, 서양을 따라가는 개화(開化) 선진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은 서양을 열심히 따라 배워야 서양과 같은 선진국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따라가는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 어느 나라와 손을 잡아야 할 것인지를 놓고서 미국, 러시아, 청국, 일본과 같은 나라를 저울질하며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결국에는 일본의 덫에 걸려서 나라까지 잃어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인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자, 일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개화를 하게 되었다. 일제는 스스로 개화를 앞서서 이룩한 선진으로, 후진의 한국인을 이리저리 끌어가고 몰아갔다. 일제의 속셈은 한국인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한국인을 모조리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언어, 역사, 풍속, 교육, 종교 따위를 조직적으로 부수고 허물었다. 한국인은 이러한 식민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과 이름까지 일본을 따라서 바꾸어야 했다.

한국인은 1945년 8월 15일 식민통치에서 벗어나자, 한국인이 당한 모든 어려움이 선진화의 실패에서 빚어졌다고 생각하여, 더욱 선진화에 열을 올리게 됐다. 한국인은 따라가는 선진화에 모든 것을 걸고 열심히 따라하려 했다. 남쪽에서는 미국을, 북쪽에서는 소련을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부지런히 따라가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남북전쟁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됨으로써 남과 북이 모두 따라가는 일조차 어렵게 됐다.

그러나 한국인은 선진화에 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따라하면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한국인은 ‘따라가는 선진화’에 힘을 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한계를 깨닫고 선진화의 방향을 크게 바꾸었다. 남쪽에서는 ‘따라가는 선진화’에 머물러서는 국제적인 상품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따라가는 선진화’에서 ‘앞서가는 선진화’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북쪽 역시 ‘따라가는 선진화’를 가지고서는 수령 유일의 독재체제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따라가는 선진화’에서 ‘주체적인 선진화’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오랫동안 버릇처럼 되어온 ‘따라가는 선진화’로부터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매우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후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선진화를 이루고자 할 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따라가는 선진화’이다. 후진인 사람이 선진인 사람을 열심히 따라하면 선진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후진인 사람이 선진인 사람을 아주 대단하게 여겨 넘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곧잘 이러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선진화가 이뤄지려면 선진의 사람이 가만히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후진의 사람이 따라가는 상황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선진의 사람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후진의 사람은 계속 따라가는 일만 해야 하기 때문에 선진의 사람과 같아지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따라가는 선진화’를 통해 선진화를 이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따라가는 선진화’는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일 뿐이고 속으로는 매우 부실하다.

한국의 지배층이 자주 써먹어 온 ‘따라가는 선진화’가 갖고 있는 허점이 무엇인지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불행의 씨앗, 따라가는 선진화의 성격

첫째, ‘따라가는 선진화’의 논리를 좇아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는 빨리 선진국과 비슷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비슷하게 만드는 일은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진화를 빨리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따라가는 선진화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정치가들이 ‘따라가는 선진화’를 국가목표로 내거는 것은 주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따라가는 선진화’는 알맹이를 갖추기 어렵기 때문에 따라쟁이나 흉내쟁이 선진화에 머물고 만다.

둘째, ‘따라가는 선진화’의 논리를 좇아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는 선진국처럼 되지 못한다. 선진국은 스스로 경험을 쌓아서 그러한 나라를 만들었는데, 따라가는 나라는 그러한 경험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따라하기 때문에 같아질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한 것과 비슷해지기는 해도 결코 같아지지는 않는다.

셋째, ‘따라가는 선진화’의 논리를 좇아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는 선진국을 앞서가는 일을 할 수 없다. 남을 앞서가는 일은 남과 같아지는 일이 아니라 남을 넘어서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남을 따라하여 남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남을 넘어서 앞서나가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사람에게는 남을 앞서가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넷째, ‘따라가는 선진화’의 논리를 좇아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는 남의 것을 따라하기 때문에 저에게 있는 것을 가볍게 또는 업신여기게 된다. 이러한 것이 버릇이 되면 저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나중에는 남을 따라한 것만을 가진 상태에서 저에게 어떤 것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다섯째, ‘따라가는 선진화’ 논리를 좇아서 선진국을 따라가는 나라는 남이 만든 잣대를 가지고 남이 만든 판에 기대어 살아가게 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잣대를 만들어서 판을 허물고, 만들고, 고치고, 키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선진국이 잣대나 판을 달리하면 그것에 따라서 잣대나 판을 달리하고, 선진국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바뀌면 그것에 따라서 잣대나 판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몽땅 바꾼다. 이들은 언제나 남의 잣대와 판에 끌려가게 된다.

한국인은 지배층이 내세우는 바를 좇아서, 오랫동안 따라가는 선진화에 이끌려서 살아왔지만, 그것의 한계를 또렷이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배층이 내세우는 중화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화라는 본보기는 아주 추상적이고 흐릿한 것이어서 무엇을 어떻게 따라해야 하는지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선비들은 중화가 어떠한 것인지 직접 보거나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중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갖가지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다투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구름을 잡는 일처럼 돼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떨어지고 말았다.

광복 이후 남한과 북한이 추진한 선진화는 국민의 열망을 담아내는 수단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선진화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구체적인 본보기를 보고서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나날이 펼쳐지는 생생한 자료를 가지고 얼마나 따라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따라할 수 있을지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라가는 선진화의 한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이 모두 따라가는 선진화를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따라쟁이나 흉내쟁이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방향을 바꾸었다.

한국인과 앞서가는 선진화

한국은 선진화의 열망으로 밤낮 일하며 근대화를 이뤄냈다. 사진은 1970년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

1970년대에 남한과 북한이 따라가는 선진화의 한계를 깨닫고, 선진화의 방향을 바꾼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한국인은 수백 년 동안 고질처럼 답습한 따라쟁이 버릇을 털어버리고 스스로 줏대를 세워보고자 했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앞서기 위해서 매우 공세적이고 저돌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선진화의 방향을 바꾸면서 서로 매우 다른 길로 나아갔다. 남한은 상품 시장에서 요구하는 개방성과 보편성을 바탕으로 앞서가는 선진화의 길을 택한 반면에 북한은 독재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폐쇄성과 특수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선진화의 길을 택했다. 남한과 북한은 새로운 국가를 외치면서 체제 경쟁에 열을 올렸다.

남한과 북한은 새로운 선진화의 길로 들어선 지 20~30년이 지나지 않아서 성공과 실패로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남한은 앞서가는 선진화가 성공을 거두는 반면에 북한은 자주적인 선진화가 실패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가 난 것은 국가의 성격이 달랐다는 점과 함께 국가를 끌어간 지도자의 정책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남한과 북한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한에서 어떻게 앞서가는 선진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1년 5월에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일찍부터 무역입국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한국인이 세계의 모든 나라와 상품으로 경쟁을 벌여 먹고사는 길을 선택했다. 한국인은 빈약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국제적인 시장 경쟁에 뛰어들어서 오로지 상품의 가격과 품질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한국인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물건을 찾아내고 만드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여자의 머리채를 잘라 가발을 만들어 팔고, 쥐의 가죽을 벗겨서 코트를 만들어 팔았다.

1970년대까지 한국인이 물건을 만들어 세계시장으로 내보내는 일은 선진국을 따라서 배운 기술로서 값싼 물건을 만들어서 시장에 내다 파는 방식이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인은 값싼 노동력으로 값싼 물건을 만들어서 선진국 시장을 파고들어갔다. 선진국 사람들은 싼값에 이끌려 한국인이 만든 물건을 사서 썼다. 한국인은 값싸게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만들어 선진국으로 내보냈다.

한국인은 임금과 소득이 오르면서 싼값으로 경쟁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자, 비싼 값에도 팔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다. 이로부터 한국인은 가격으로 경쟁하는 것을 넘어서 품질로 경쟁하는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선진국을 따라한 기술을 가지고는 선진국과 품질을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인은 선진국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따라가는 선진화’를 넘어 ‘앞서가는 선진화’에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인이 크게 자랑으로 여기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인이 ‘따라가는 선진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서가는 선진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강변을 따라서 펼쳐져 있는 온갖 것들을 보노라면, 얼핏 보아서는 모든 것이 ‘따라가는 선진화’로써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뜻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일에서 가장 큰 몫을 한 사람은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끌어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계시장에 뛰어들어 당당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해 서방님이 서책을 지니고 서당과 서원을 들락거리며 유세를 떨던 꽁생원의 나라가 사업자가 온갖 상품을 가지고 세계시장을 떠돌면서 흥정으로 날밤을 지새우는 상인의 나라로 바뀌었다.

‘앞서가는 선진화’의 성격

북한은 폐쇄성과 특수성을 바탕으로 선진화의 길을 열었다. 사진은 체제 경쟁을 위해 북한이 개발한 미사일.

사람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선진과 후진으로 나누는 경우에 선진에 포함되는 바람을 갖는다. 선진의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선진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후진의 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선진이 되기 위해서 선진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이 점점 발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선진과 후진의 잣대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선진은 좋은 것, 옳은 것이 되고 후진은 나쁜 것, 그른 것이 되어서 누구나 선진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나름대로 하는 것, 그대로 있는 것, 그대로 두는 것은 나쁘고 그른 것이 되고 만다.

서구인은 근대로 접어들어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달을 이루는 것과 함께 생물의 진화 과정을 알게 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사회진화론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선진과 후진으로 나누어서 바라보게 됐다. 그들은 선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나 국가는 후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를 누르고, 부리고, 가르치고, 도우는 것을 마땅하다고 보았다. 서구인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선진국이 후진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끌어가고, 이용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룩한 사람이나 국가는 지배하는 자리에 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국가는 지배를 당하는 자리에 서게 됐다. 몇 개의 제국이 세계의 모든 지역을 이리저리 쪼개고 나누어서 식민지로 거느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 또는 남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앞서가는 선진화’에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지배층은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룩해서 선진국이 되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것처럼 말했다. 이들은 국민들이 ‘앞서가는 선진화’에 모든 것을 걸도록 이끌어갔다. 그러나 ‘앞서가는 선진화’는 ‘따라가는 선진화’에 못지않게 여러 가지로 허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루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면 곧바로 따라가는 처지가 되는 까닭으로 사람들은 남이 갖지 않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하게 겨루고, 다투고, 싸운다. 그들은 개발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오로지 앞서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하며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쏟아붓는다. 사람들은 오로지 대박을 터트리는 날만을 꿈꾸며 살아간다.

둘째, ‘앞서가는 선진화’를 지키려면 새롭게 개발한 지식과 기술을 남이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새롭게 개발한 지식과 기술에 특허권을 부여하여 남이 쓸 수 없도록 막아버린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은 그것의 이용을 오로지함으로써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한다.

셋째, ‘앞서가는 선진화’에 빠지면 살아가는 보람을 이기고, 누르는 일에 두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이기고 누르는 일에서 살맛을 느낀다. 그들은 삶을 더욱 보람차고 살맛나게 만들기 위해서 오로지 남을 이기고 누르는 일에 힘을 쏟는다. 이들은 이기고, 누르기 위해서 법규를 어겨가며 속이고, 빼앗고, 짓밟는 일까지 저지른다.

넷째, ‘앞서가는 선진화’가 버릇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앞서가는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해도 되는 것, 그냥 있어도 되는 것, 그냥 두어도 되는 것을 모두 앞서가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앞서갈 필요가 없는 것까지 앞서가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수고, 허물고, 짓고,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은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다섯째, ‘앞서가는 선진화’가 고질이 되면, 앞서가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과 앞서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앞서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새로운 것을 갖거나 쓰는 일을 보람차고 살맛나는 일로 여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이 가져올 수 있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장 앞서서 겪는다. 이들은 조심하지 않기 때문에 앞서려다가 도리어 뒤처지는 일이 많다.

앞서가는 선진화의 덫

한국은 개방성과 보편성을 바탕으로 ‘앞서가는 선진화’를 이뤘다. 작년 5월 9일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에 건립된 삼성 메모리 반도체 공장에서 연구원이 반도체를 살피고 있다.

사람이 앞서가야 할 것을 앞서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런 일에서 ‘앞서가는 선진화’에 대한 바람을 갖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 겨루거나 다투는 일 또한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앞서가는 선진화’의 덫에 걸려서 모든 것이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살아가는 일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는 일에는 앞서가야 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일을 알맞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나름대로 해도 되는 일은 나름대로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냥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은 그냥 있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냥 그대로 두어도 되는 것은 그냥 그대로 둘 수 있어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 것은 따라갈 수 있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좋고 싫은 것을 떠나서 자본과 시장을 바탕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모든 일을 돈으로 풀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그들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로지 돈을 갖고자 한다. 사람들은 좀 더 많은 돈을 벌어보기 위해서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람들이 더욱 쉽게 그리고 더욱 많이 벌기 위해서는 시장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력적인 상품을 내놓는 데 필요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 사람들은 한 걸음이라도 남을 앞서기 위해서 치열하게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매달린다. 이런 까닭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앞서가는 선진화를 생명줄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이런 것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몰아간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이론이다.

사람들이 줏대를 갖고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두루 헤아려 볼 수 있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나름대로 할 것, 따라서 할 것, 앞서서 할 것, 그냥 있을 것, 그냥 둘 것 따위를 두루 헤아려서 그것에 알맞게 해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는 모든 것을 선진과 후진으로 나누어서 보는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이 모든 것을 선진, 후진으로 나누게 되면, 저절로 선진화의 논리에 빠진다. 이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면 앞서가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남을 잣대로 삼아서 살아가게 되면, 나라는 줏대를 세울 수 없게 된다.

셋째, 우리는 앞서가는 선진화의 논리에 이끌려서 끊임없이 남과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사람은 알아주고 도와주는 힘을 바탕으로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사람이 남과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일은 살아가는 일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끊임없이 남과 겨루고, 다투고, 싸우게 되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무너지게 된다.

넷째, 우리는 스스로 사람의 됨됨이를 사람답게 갈고 닦아나가는 것과 함께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의 살판을 사람다운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낱낱의 사람이 아무리 사람답게 살려고 애를 쓰더라도, 세상이 개판으로 되어 있으면 사람다움을 이룰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세상의 살판이 좀 더 사람다운 것이 될 수 있도록 다듬고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