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작품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안녕, 내 모든 것》 《사랑의 기초》.
⊙ 현대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문학과 사회》로 등단.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작품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안녕, 내 모든 것》 《사랑의 기초》.
⊙ 현대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13년 마지막 달력의 다이어리에는 연말 모임이 빼곡하고, 날씨는 폭설 주의보, 건강은 폭탄주 주의보, 연인은 성탄절 주의보, 이런 낭만적인 것들로 채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중국발 미세먼지와 황색 연무로 마음마저 뿌옇다. 막걸리를 풀어 놓은 듯한 탁한 공기 속에서 부유하듯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비와 눈처럼 방어하지 않는 것은 입은 옷이 젖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도 백화점 사람들은 위험 감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도시는 사상 처음 초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졌다. 백화점에서 흩날렸을 콘크리트 먼지만큼의 농도일까. 그날의 먼지와 오늘의 먼지가 제로섬게임 같은 비율일 것 같다. TV조선 방송국 1층의 아모카에서 낭만적인 여인을 기다린다. 설레는 마음이 먼지가루를 마시고 홀릭된 듯하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은 대학 졸업생이던 화자가 사고로 잃어버린 친구에 대한 우정이자 서신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런 사고가 존재했던 것조차 관심 밖에 있던 어느 날, 작가의 사명감으로 그 사고는 존재를 알려 왔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는 걸어서 5분 거리의 삼풍백화점과 이웃하며 산다. 대학 졸업반이어서 매일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 친구의 옷을 사기 위해 삼풍백화점에 갔다가 매장에서 근무하는 고등학교 동창 R을 만난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둘은 우연히 만난 그날 이후 급속도로 친해진다.
주인공에게 삼풍백화점은 자신만의 아지트이자 친구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취직을 하고 오랜만에 R을 만나러 삼풍백화점에 들어간다. 그런데 R은 간식이라도 먹으러 간 건지 매장에 없었다.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지하 펜시 매장에서 일기장을 사고 백화점을 나온다. 그때가 5시 45분경. 백화점 붕괴 10분 전이었다. 주인공은 집에서 쾅 소리를 듣고, 창문 너머 솟아오르는 콘크리트 먼지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그해 2월에서 6월은 짧다면 짧은 둘만의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은 친구 R이 지금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1995년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날이다. 둘이서 친해진 지 5개월쯤 되었다. 그동안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내 초록색 반투명 모토로라 삐삐에 안위를 묻는 메시지들이 가득 찼다. 저녁을 짓다 말고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삼풍백화점 수퍼마켓에 간 아랫집 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마 위에는 반쯤 썬 대파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조간신문에는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실렸다. 나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한 여성 명사가 기고한 특별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신문사 독자부에 항의전화를 걸었다. 신문사에서는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 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본문에서
《삼풍백화점》은 자전적 소설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은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간과할 수 없는 대형 붕괴사고를 소재로 다룬 소설입니다. 사고 10년 후에 어떤 심정으로 쓰게 된 것입니까.
“네, 삼풍백화점은 저의 유일한, 앞으로도 없을 자전소설입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계간지에 젊은 작가 특집란이 실려요. 매호에 젊은 작가 자전소설이 실리고 평론이 실리는 구성인데 문학공부 하는 학생이나 신인작가한테는 꿈 같은 일인 거죠. 등단하고 한동안 전혀 생각 못하고 살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전화가 왔어요. 그때가 2005년도였어요. 젊은 작가 특집으로 저를 지목하게 됐다고 자전소설을 쓰라는 청탁이 었어요. 몇 년 전만 해도 그때가 오면 어떤 이야기를 쓸 거라며 혼자서 구상도 했었는데 막상 자전소설을 쓰려고 하니까 막막하고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소설가로 등단하고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었거든요.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내 살을 뜯어먹지는 말자는 거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치기 어린 결심이었지만, 소설에 내 얘기를 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는데 막상 자전소설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보니, 그러면 나는 그 시절 삼풍백화점을 쓸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나는 그것에 대해 쓰기 위해 작가가 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삼풍백화점》은 그런 심정으로 쓴 작품이고 다른 소설에 비해 자전적 요소들이 제일 많이 들어 있어요. 보통 1인칭 화자일 경우 작가와는 필연적으로 다르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유일하게 1인칭 화자와 작가인 저의 모습이 많이 겹쳐져서 보여요. 물론 전부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워낙 큰 대형사고여서인데, 어디까지가 자전적인 겁니까.
“1995년 6월 29일, 그날 저는 삼풍백화점에 있다가 붕괴 직전에 나왔어요. 거기 백화점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아랫집 아줌마도 그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90년대 중반에 한국사회는 거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20대는 (지금 20대에 비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었어요. 한 해 쉬면서 꿈을 모색하고 싶다는 낭만적 이유로 휴학을 하기도 하고요.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 취직 못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등 지금 20대보다는 많이 낙관적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개인적으로는 어떤 통과의례를 지나온 듯해요. 윗세대인 386세대와 비교해도 그들의 청춘은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저희 세대의 청춘인 90년대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그리고 아이엠에프를 지나면서 거품처럼 팡 터져 버린 느낌이 들어요. 어딘가로 사라지고 무너져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을 소설 안에 담고 싶었어요.”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충격이 매우 컸겠네요.
“집에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렸어요. 밖을 봤더니 건물 숲에서 먼지가 막 솟아오르더라고요. 당시는 삐삐 시절인데 사방에서 막 삐삐가 들어오고 TV를 켰더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속보가 나왔어요. 친한 친구한테서 동생이 연락이 안 된다고 거의 초주검이 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요. 아무래도 동생이 삼풍백화점에 간 것 같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지하에 있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느라고 연락이 안 됐던 거죠.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는데도 한동안 일부러 그곳을 피해 빙 돌아 다녔어요. 그 상황을 도저히 눈으로 확인할 만한 준비가 안 되었던 거죠. 사고가 대강 수습되고 나서 한참이나 그곳이 커다란 구덩이로 남겨져 있었는데, 제 안에 그 엄청나게 커다란 구덩이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당시 호화백화점이라던 삼풍백화점 부근에서 살았다는 거잖아요. 본인이 가 본 백화점 풍경은 어땠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강남에 있는 호화스러운 백화점, 이렇게 보였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당시 주변 아파트 인근에서는 자연스럽게 아파트 상가의 역할을 대체하는 곳이었어요. 저녁 짓다 두부 없으면 얼른 사러 가기도 하고 문방구나 서점을 이용할 때도 거기로 갔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만 해도 백화점 안에 큰 서점이 있던 때였네요. 그 서점에 혼자 가서 책도 참 많이 읽었어요. 한겨울이나 한여름에 아파트 단지를 통과할 때 거기를 통로로도 많이 이용했어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으니까요. 특히 일층 로비는 동네 공원 같은 공간이기도 했고, 근처 주민들한테는 일상의 공간이었어요. 물론 내부의 시각으로는 그랬지만, 또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비자본주의 첨병이라는 시선.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이래저래 아주 복합적인 공간이 그곳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울이지 강남과 강북이 어딨나”
—요즘 화제작 <응답하라 1994>에서는 삼풍백화점 사고가 나왔어요. 연인의 애틋한 재회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어요. 소설에서는 R이 죽은 것으로 끝맺지 않았어요. R은 어떻게 되었나요.
“최근작인 장편 《안녕 내 모든 것》이 90년대의 이야기예요. 그 끝에도 구덩이가 나오는데,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이미지가 구덩이라고 생각했어요. 구덩이라는 게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나의 마음속에도 있잖아요. R이 그 구덩이에 갇혀 있든 제 마음 속 구덩이에 갇혀 있든 어쩌면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R은 청춘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묻혀 있든 여기에 묻혀 있든 말이죠. R이 스스로 들어간 게 아니라, 제가 혹은 시대가 R을 넣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소설을 읽은 많은 분들이 정말 친구가 죽었냐고 물어보는데 그건 제가 항상 빈칸으로 남겨 놔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채 소설을 맺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친구 사이의 현실적인 모습이 잘 그려졌다고 봅니다. 취재와 경험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었나요.
“저는 경험 얘기는 거의 쓰지 않아요. 그래서 그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취재 쪽인데요. 취재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되지만, 공부하는 것도 포함되거든요. 이를테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할 때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는다든지 하는 거요. 건축가가 쓴 도시 이야기라든지, 인류학자가 보는 도시 이야기라든지,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소설 안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아도 단단한 기초가 되고 사유의 밑바탕이 되죠.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는 쪽으로 취재를 많이 한 편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어요. 혼자 삭이고 묵히는 시간도 취재입니다.”
—강남에 죽 살았는데 프라이드가 있나요.
“프라이드라는 말을 썼는데 저는 그 말이 좀 이상해요. 개인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한강 이남에 살았고, 소위 서초 강남권에서는 사춘기 때부터 쭉 살았어요. 그렇지만 누가 물어보면 고향이 서울이라고 하지 강남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제 안에서 저를 만들어 온 중요한 공간들은, 강남과 강북을 마구잡이로 오가는, 막 뒤섞인, 말 그대로 ‘서울들’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딱 나누더라고요. 그 욕망의 기저는 이해하는데, 제 개인으로서는 무엇이 강남적인 것이고 또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혼란스럽고 모호해요. 소설가로서는 등단 때부터 강남 이야기를 쓰는 여성작가라는 수식이 제 뒤를 따라다녔죠. 제 데뷔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반포에 사는 젊은 여자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그 영향도 있겠죠. 그동안 한국 소설에서 강남을 공간적 배경으로 다룬 이야기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있겠고요. 제 등단작에 대해서는, 드디어 한국 소설에 강남 이야기가 등장했다는 시선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껏 제 소설적 관심은, 서울의 강남 그 자체가 아니에요. 여러 욕망들이 첨예하게 집약되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공간으로서의 어떤 곳, 그게 현실에서 ‘강남’이라는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강남이라는 공간을 종종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죠. 그 욕망의 숲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요. 그런데 가끔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그 공간을 다룬다고 읽힐 때는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한때는 콤플렉스이기도 했어요. 왜 내가 뭘 쓰기만 하면 다 강남여자의 이야기로 읽히는 걸까, 이런 생각도 했지요.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욕망에 대한 관심은 욕망하는 타인에 대한 것인가요, 본인의 욕망에 대한 탐구인가요.
“그걸 사과 쪼개듯이 둘로 딱 나눌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딱히 욕망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뭐가 갖고 싶어, 뭘 하고 싶어 죽겠어,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만약 그런 욕망이 든다면, 아 그걸 어떻게 소설로 쓸 수 있을까,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을 소설에 등장시켜야지 이런 쪽으로 잣대를 돌려서 생각하는 편이에요. 욕망을 창작으로 승화(?)하는 걸까요?”
—세태소설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강남스토리, 스펙 좋은 젊은 여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작중인물과 현실의 나는 얼마나 닮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인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뭐라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소설 속에서 저랑 가장 닮은 인물은 삼풍백화점의 ‘나’인 것 같아요. 심한 속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속물성, 그 정도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 욕망에 대한 어느 정도의 냉소, 거리 두기와 줄타기 하면서 약간은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 저인 것 같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것들을 글로 쓰는 사람이죠.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쓸까, 어떻게 쓸까, 이것을 쓸 수 있을까’예요. 쓴다는 게 언젠가부터 제 인생에서 가장 중심 주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욕망이 있어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걸 갖고 놀면서 이렇게 써 볼까 저렇게 써 볼까 궁리하죠. 물론 제 인물들의 욕망에 어떤 발화지점이 있다면, 그건 제 마음에서 그 지점에 공감했기 때문이겠죠. 아 맞아, 저럴 수 있지, 나도 저런 적 있었지, 그게 작은 모티브가 되어서 시작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 소설 읽고 상담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군인 아저씨 팬이 많을 만큼, 군대 가면 작가님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해요. 아무래도 책 속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빠질 것 같아요. 극성팬도 있겠어요.
“군인 아저씨들은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소설을 좋아해요. 30대 초반,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계속 미루는 은수라는 여자에 대해 군대 병장들이 공감을 하더라고요. 노처녀와 예비역으로 세상에 나가야 하는 자기 모습과 동일시를 느끼시나 봐요. 그 당시 팬레터도 많이 왔어요. 극성팬은 많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자분들보다 여자 팬들이 많아요. 여자 팬들은 제 소설을 읽으면 뭔가 상담하고 싶어지나 봐요.”
—실연을 당하고 해답을 못 찾는 여자들이 그 소설을 읽어도 될 듯해요.
“(웃음)”
—사랑의 기초를 연작한 ‘알랭 드 보통’은 직접 만나 보니 어떻던가요.
“알랭 드 보통은 재미있고 영민한 사람이었어요.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고요. 특히 한국 여자들을 궁금해했어요. 제 소설에 나오는 동아시아의 젊은 연애 이야기를 사회학 보고서처럼 재밌게 읽었나 봐요. 그러면서 좀 이상한 게 있대요. 주인공 여자는 나이도 많고 돈도 버는데 독립하면 될 것을 왜 엄마랑 사느냐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젊은 연인들이 모텔을 가는 것도 흥미롭고 재밌지만, 한편은 독립을 하면 서로의 공간으로 가면 되는데 왜 그러냐는 거죠. 사실 제 소설 속에서는 그 ‘방’이 없다는 게 인물의 중요한 제약 요소이고, 한국적인 상황인데 외국인의 시선으로는 저렇게 다르게 읽히는구나 흥미로웠죠.”
—‘사랑의 기초’를 마지막으로 연애소설은 그만 쓰겠다고 하셨는데, 연애 이야기에 홀릭된 독자들이 섭섭해하고, 혹은 관심을 돌릴 수 있지 않나요.
“그때 출판사 에디터가 홍보 문구를 작성하면서, ‘선생님 이제 연애소설 안 쓰실 거죠?’라고 물어서 농담으로 ‘아, 그럴까요?’ 그랬는데 뒤표지에 딱 박혀서 나왔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전략적으로 쓴 문구네요.
“아니요. 그래도 당분간은 쓰지 않을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연애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연애하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런 관심과 주제를 갖고 썼다면, 당분간은 그런 이야기를 그만할 것 같아요. 물론 소설 안에서 작은 줄기로 연애하는 남녀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당분간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 혹은 한국 사회의 어떤 면들을 조망하는 작품을 쓰게 될 것 같아요.”
—《삼풍백화점》 본문에서 ‘맥주 몇 잔에 취한 밤, 헤어진 첫사랑 대신… 면접 본 회사에 전화를 건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헤어진 사람에게 술 취해서 전화하는 이유가 뭘까요. 작가의 전지적 견해에서 한 말씀요.
“저도 그때 백수였어요. 그해 여름은 정말 더웠거든요. 한밤중에 술 먹고 골목을 걷다가 공중전화가 나오면 괜히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도 걸어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술김에. 누구나 그런 기억쯤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적 있나요?”
—저도 있습니다.
“(웃음) 지금은 번호가 찍히니까 못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최소한의 낭만이었던 것 같아요. 말 안 하고 끊은 전화가 오면 옛 남자친구가 아님에도 혼자 착각하고 그러죠. 그런 시절이 한동안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어떤 친구는 술 먹으면 저한테 전화를 맡기기도 했어요.”
—첫 대학 전공이 정치외교학과였나요.
“저희 때는 먼저 과를 결정하고 시험을 보던 때였어요. 그때는 뭔가를 결정하는 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즉흥적인 결정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구체적인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소설보다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또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기자나 저널리스트 사회와 관련된 그런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사회학 계통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정치외교학과가 밖에서 생각하는 현실정치나 이런 거와 전혀 상관없이 기본 정치학이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배우니까 현실정치에 오히려 더 냉소적이 돼 가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사실은 전공에 대해서 별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거든요.(웃음) 현실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니까, 그 아이들이 부끄러운 세상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렸을 때는 어쨌든 세상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10년 후, 2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많은 경우 결정은 정치에서 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이 좀 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남편
—문학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분들의 뜻을 존중해요. 저는 문학인뿐 아니라 어떤 분야의 예술인이나 인문학자, 과학자 등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에 되도록 많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공을 살려 정치참여를 해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소극적인 사람이라 가끔은 동료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어요. 요즘은 많이 변하려고 해요. 정당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세계관이나 신념, 철학이 맞는 사회단체 등에서 꼭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데는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시정치뿐 아니라 미시정치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들 일상, 인간관계에서도 정치적인 것, 권력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사회과학을 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권력관계에 관심이 많아지고, 그런 게 문학에도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
—정치외교학을 먼저 전공한 것이 소설 쓰는 데 큰 기둥이었네요.
“네, 어쩌면 스무 살에 문학을 전공했더라면, 아마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문학은 재미 없는 거다, 이렇게 느끼고 지레 포기를 했을 것 같아요. 먼 길을 돌아 왔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은 어떻게 응원해 줍니까.
“저희 남편은 다른 직업이 있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지금도 혼자서 소설을 써요. 저한테 ‘나 지금 썼는데 읽어 봐 달라’고 하고 자기가 읽어 주기도 하고 그래요. 공모전에 몰래 투고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선배’로서 글을 좀 봐 주지 않나요.
“네, 읽어는 보지요. 제가 다른 곳에서 심사도 하고 하니까 남편은 자기 소설이 공모에 나오면 예심은 통과할 것 같냐고 물어보고, 저는 그때 기분이 좋으면 통과할 것 같다고 하고 제 기분이 별로면, ‘안 된다니까!’ 막 그래요.(웃음) 가끔은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소설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이 소설에 관심이 많고요. 그뿐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집안 꾸미는 것도 저보다 훨씬 잘해요.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열정이 많은 사람 같아요. 무엇보다 저한테는 가장 친한 친구이죠.”
—아이들은 몇 명인가요.
“딸만 둘이에요. 첫째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이만큼도 다 큰 것 같아요. 연년생이라 지난 3년 정도는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금은 엄마를 잘 떨어지기도 하고 제가 주말에 일을 하러 간다고 하면, 엄마 일 잘하고 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해요.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워진 느낌이에요.”
—혈액형은 뭔가요.
“O형요. 보기에는 안 그럴 것 같은데 한두 시간 만나면 금방 다 친구가 되고 그래요. 밝고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면도 많지만,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완전히 친밀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그리고 저는 필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웃음)”⊙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은 대학 졸업생이던 화자가 사고로 잃어버린 친구에 대한 우정이자 서신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런 사고가 존재했던 것조차 관심 밖에 있던 어느 날, 작가의 사명감으로 그 사고는 존재를 알려 왔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나는 걸어서 5분 거리의 삼풍백화점과 이웃하며 산다. 대학 졸업반이어서 매일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 친구의 옷을 사기 위해 삼풍백화점에 갔다가 매장에서 근무하는 고등학교 동창 R을 만난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둘은 우연히 만난 그날 이후 급속도로 친해진다.
주인공에게 삼풍백화점은 자신만의 아지트이자 친구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취직을 하고 오랜만에 R을 만나러 삼풍백화점에 들어간다. 그런데 R은 간식이라도 먹으러 간 건지 매장에 없었다. 삐삐에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지하 펜시 매장에서 일기장을 사고 백화점을 나온다. 그때가 5시 45분경. 백화점 붕괴 10분 전이었다. 주인공은 집에서 쾅 소리를 듣고, 창문 너머 솟아오르는 콘크리트 먼지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그해 2월에서 6월은 짧다면 짧은 둘만의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 소설의 열린 결말은 친구 R이 지금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1995년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날이다. 둘이서 친해진 지 5개월쯤 되었다. 그동안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내 초록색 반투명 모토로라 삐삐에 안위를 묻는 메시지들이 가득 찼다. 저녁을 짓다 말고 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러 삼풍백화점 수퍼마켓에 간 아랫집 아주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마 위에는 반쯤 썬 대파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며칠 뒤 조간신문에는 사망자와 실종자 명단이 실렸다. 나는 그것을 읽지 않았다. 옆면에는 한 여성 명사가 기고한 특별칼럼이 있었다. 호화롭기로 소문났던 강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신문사 독자부에 항의전화를 걸었다. 신문사에서는 필자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독자부의 담당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가 거기 한 번 와 본 적이나 있대요? 거기 누가 있는지 안대요? 나는 하아하아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전화를 들고 있어 주었던 그 신문사 직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본문에서
《삼풍백화점》은 자전적 소설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은 동시대를 사는 작가가 간과할 수 없는 대형 붕괴사고를 소재로 다룬 소설입니다. 사고 10년 후에 어떤 심정으로 쓰게 된 것입니까.
“네, 삼풍백화점은 저의 유일한, 앞으로도 없을 자전소설입니다.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계간지에 젊은 작가 특집란이 실려요. 매호에 젊은 작가 자전소설이 실리고 평론이 실리는 구성인데 문학공부 하는 학생이나 신인작가한테는 꿈 같은 일인 거죠. 등단하고 한동안 전혀 생각 못하고 살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전화가 왔어요. 그때가 2005년도였어요. 젊은 작가 특집으로 저를 지목하게 됐다고 자전소설을 쓰라는 청탁이 었어요. 몇 년 전만 해도 그때가 오면 어떤 이야기를 쓸 거라며 혼자서 구상도 했었는데 막상 자전소설을 쓰려고 하니까 막막하고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소설가로 등단하고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었거든요.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내 살을 뜯어먹지는 말자는 거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치기 어린 결심이었지만, 소설에 내 얘기를 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는데 막상 자전소설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보니, 그러면 나는 그 시절 삼풍백화점을 쓸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나는 그것에 대해 쓰기 위해 작가가 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삼풍백화점》은 그런 심정으로 쓴 작품이고 다른 소설에 비해 자전적 요소들이 제일 많이 들어 있어요. 보통 1인칭 화자일 경우 작가와는 필연적으로 다르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유일하게 1인칭 화자와 작가인 저의 모습이 많이 겹쳐져서 보여요. 물론 전부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워낙 큰 대형사고여서인데, 어디까지가 자전적인 겁니까.
“1995년 6월 29일, 그날 저는 삼풍백화점에 있다가 붕괴 직전에 나왔어요. 거기 백화점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아랫집 아줌마도 그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90년대 중반에 한국사회는 거품으로 가득 차 있었고 20대는 (지금 20대에 비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었어요. 한 해 쉬면서 꿈을 모색하고 싶다는 낭만적 이유로 휴학을 하기도 하고요.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 취직 못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등 지금 20대보다는 많이 낙관적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개인적으로는 어떤 통과의례를 지나온 듯해요. 윗세대인 386세대와 비교해도 그들의 청춘은 어딘가에 남아 있지만, 저희 세대의 청춘인 90년대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그리고 아이엠에프를 지나면서 거품처럼 팡 터져 버린 느낌이 들어요. 어딘가로 사라지고 무너져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을 소설 안에 담고 싶었어요.”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충격이 매우 컸겠네요.
“집에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렸어요. 밖을 봤더니 건물 숲에서 먼지가 막 솟아오르더라고요. 당시는 삐삐 시절인데 사방에서 막 삐삐가 들어오고 TV를 켰더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속보가 나왔어요. 친한 친구한테서 동생이 연락이 안 된다고 거의 초주검이 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요. 아무래도 동생이 삼풍백화점에 간 것 같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지하에 있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느라고 연락이 안 됐던 거죠.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는데도 한동안 일부러 그곳을 피해 빙 돌아 다녔어요. 그 상황을 도저히 눈으로 확인할 만한 준비가 안 되었던 거죠. 사고가 대강 수습되고 나서 한참이나 그곳이 커다란 구덩이로 남겨져 있었는데, 제 안에 그 엄청나게 커다란 구덩이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당시 호화백화점이라던 삼풍백화점 부근에서 살았다는 거잖아요. 본인이 가 본 백화점 풍경은 어땠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강남에 있는 호화스러운 백화점, 이렇게 보였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당시 주변 아파트 인근에서는 자연스럽게 아파트 상가의 역할을 대체하는 곳이었어요. 저녁 짓다 두부 없으면 얼른 사러 가기도 하고 문방구나 서점을 이용할 때도 거기로 갔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만 해도 백화점 안에 큰 서점이 있던 때였네요. 그 서점에 혼자 가서 책도 참 많이 읽었어요. 한겨울이나 한여름에 아파트 단지를 통과할 때 거기를 통로로도 많이 이용했어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으니까요. 특히 일층 로비는 동네 공원 같은 공간이기도 했고, 근처 주민들한테는 일상의 공간이었어요. 물론 내부의 시각으로는 그랬지만, 또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소비자본주의 첨병이라는 시선.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이래저래 아주 복합적인 공간이 그곳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냥 서울이지 강남과 강북이 어딨나”
—요즘 화제작 <응답하라 1994>에서는 삼풍백화점 사고가 나왔어요. 연인의 애틋한 재회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어요. 소설에서는 R이 죽은 것으로 끝맺지 않았어요. R은 어떻게 되었나요.
“최근작인 장편 《안녕 내 모든 것》이 90년대의 이야기예요. 그 끝에도 구덩이가 나오는데,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이미지가 구덩이라고 생각했어요. 구덩이라는 게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나의 마음속에도 있잖아요. R이 그 구덩이에 갇혀 있든 제 마음 속 구덩이에 갇혀 있든 어쩌면 다르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R은 청춘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묻혀 있든 여기에 묻혀 있든 말이죠. R이 스스로 들어간 게 아니라, 제가 혹은 시대가 R을 넣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소설을 읽은 많은 분들이 정말 친구가 죽었냐고 물어보는데 그건 제가 항상 빈칸으로 남겨 놔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채 소설을 맺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친구 사이의 현실적인 모습이 잘 그려졌다고 봅니다. 취재와 경험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었나요.
“저는 경험 얘기는 거의 쓰지 않아요. 그래서 그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취재 쪽인데요. 취재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되지만, 공부하는 것도 포함되거든요. 이를테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할 때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는다든지 하는 거요. 건축가가 쓴 도시 이야기라든지, 인류학자가 보는 도시 이야기라든지,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소설 안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아도 단단한 기초가 되고 사유의 밑바탕이 되죠.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는 쪽으로 취재를 많이 한 편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어요. 혼자 삭이고 묵히는 시간도 취재입니다.”
—강남에 죽 살았는데 프라이드가 있나요.
“프라이드라는 말을 썼는데 저는 그 말이 좀 이상해요. 개인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한강 이남에 살았고, 소위 서초 강남권에서는 사춘기 때부터 쭉 살았어요. 그렇지만 누가 물어보면 고향이 서울이라고 하지 강남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제 안에서 저를 만들어 온 중요한 공간들은, 강남과 강북을 마구잡이로 오가는, 막 뒤섞인, 말 그대로 ‘서울들’이에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딱 나누더라고요. 그 욕망의 기저는 이해하는데, 제 개인으로서는 무엇이 강남적인 것이고 또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혼란스럽고 모호해요. 소설가로서는 등단 때부터 강남 이야기를 쓰는 여성작가라는 수식이 제 뒤를 따라다녔죠. 제 데뷔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반포에 사는 젊은 여자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그 영향도 있겠죠. 그동안 한국 소설에서 강남을 공간적 배경으로 다룬 이야기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있겠고요. 제 등단작에 대해서는, 드디어 한국 소설에 강남 이야기가 등장했다는 시선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껏 제 소설적 관심은, 서울의 강남 그 자체가 아니에요. 여러 욕망들이 첨예하게 집약되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공간으로서의 어떤 곳, 그게 현실에서 ‘강남’이라는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강남이라는 공간을 종종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죠. 그 욕망의 숲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요. 그런데 가끔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그 공간을 다룬다고 읽힐 때는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한때는 콤플렉스이기도 했어요. 왜 내가 뭘 쓰기만 하면 다 강남여자의 이야기로 읽히는 걸까, 이런 생각도 했지요.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아요.”
—욕망에 대한 관심은 욕망하는 타인에 대한 것인가요, 본인의 욕망에 대한 탐구인가요.
“그걸 사과 쪼개듯이 둘로 딱 나눌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딱히 욕망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뭐가 갖고 싶어, 뭘 하고 싶어 죽겠어,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만약 그런 욕망이 든다면, 아 그걸 어떻게 소설로 쓸 수 있을까,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을 소설에 등장시켜야지 이런 쪽으로 잣대를 돌려서 생각하는 편이에요. 욕망을 창작으로 승화(?)하는 걸까요?”
—세태소설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강남스토리, 스펙 좋은 젊은 여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작중인물과 현실의 나는 얼마나 닮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인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뭐라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소설 속에서 저랑 가장 닮은 인물은 삼풍백화점의 ‘나’인 것 같아요. 심한 속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속물성, 그 정도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 욕망에 대한 어느 정도의 냉소, 거리 두기와 줄타기 하면서 약간은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 저인 것 같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것들을 글로 쓰는 사람이죠.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쓸까, 어떻게 쓸까, 이것을 쓸 수 있을까’예요. 쓴다는 게 언젠가부터 제 인생에서 가장 중심 주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욕망이 있어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걸 갖고 놀면서 이렇게 써 볼까 저렇게 써 볼까 궁리하죠. 물론 제 인물들의 욕망에 어떤 발화지점이 있다면, 그건 제 마음에서 그 지점에 공감했기 때문이겠죠. 아 맞아, 저럴 수 있지, 나도 저런 적 있었지, 그게 작은 모티브가 되어서 시작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여자들이 소설 읽고 상담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군인 아저씨 팬이 많을 만큼, 군대 가면 작가님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해요. 아무래도 책 속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빠질 것 같아요. 극성팬도 있겠어요.“군인 아저씨들은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소설을 좋아해요. 30대 초반,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계속 미루는 은수라는 여자에 대해 군대 병장들이 공감을 하더라고요. 노처녀와 예비역으로 세상에 나가야 하는 자기 모습과 동일시를 느끼시나 봐요. 그 당시 팬레터도 많이 왔어요. 극성팬은 많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자분들보다 여자 팬들이 많아요. 여자 팬들은 제 소설을 읽으면 뭔가 상담하고 싶어지나 봐요.”
—실연을 당하고 해답을 못 찾는 여자들이 그 소설을 읽어도 될 듯해요.
“(웃음)”
—사랑의 기초를 연작한 ‘알랭 드 보통’은 직접 만나 보니 어떻던가요.
“알랭 드 보통은 재미있고 영민한 사람이었어요.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고요. 특히 한국 여자들을 궁금해했어요. 제 소설에 나오는 동아시아의 젊은 연애 이야기를 사회학 보고서처럼 재밌게 읽었나 봐요. 그러면서 좀 이상한 게 있대요. 주인공 여자는 나이도 많고 돈도 버는데 독립하면 될 것을 왜 엄마랑 사느냐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젊은 연인들이 모텔을 가는 것도 흥미롭고 재밌지만, 한편은 독립을 하면 서로의 공간으로 가면 되는데 왜 그러냐는 거죠. 사실 제 소설 속에서는 그 ‘방’이 없다는 게 인물의 중요한 제약 요소이고, 한국적인 상황인데 외국인의 시선으로는 저렇게 다르게 읽히는구나 흥미로웠죠.”
—‘사랑의 기초’를 마지막으로 연애소설은 그만 쓰겠다고 하셨는데, 연애 이야기에 홀릭된 독자들이 섭섭해하고, 혹은 관심을 돌릴 수 있지 않나요.
“그때 출판사 에디터가 홍보 문구를 작성하면서, ‘선생님 이제 연애소설 안 쓰실 거죠?’라고 물어서 농담으로 ‘아, 그럴까요?’ 그랬는데 뒤표지에 딱 박혀서 나왔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전략적으로 쓴 문구네요.
“아니요. 그래도 당분간은 쓰지 않을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연애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연애하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런 관심과 주제를 갖고 썼다면, 당분간은 그런 이야기를 그만할 것 같아요. 물론 소설 안에서 작은 줄기로 연애하는 남녀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당분간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 혹은 한국 사회의 어떤 면들을 조망하는 작품을 쓰게 될 것 같아요.”
—《삼풍백화점》 본문에서 ‘맥주 몇 잔에 취한 밤, 헤어진 첫사랑 대신… 면접 본 회사에 전화를 건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헤어진 사람에게 술 취해서 전화하는 이유가 뭘까요. 작가의 전지적 견해에서 한 말씀요.
“저도 그때 백수였어요. 그해 여름은 정말 더웠거든요. 한밤중에 술 먹고 골목을 걷다가 공중전화가 나오면 괜히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도 걸어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술김에. 누구나 그런 기억쯤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적 있나요?”
—저도 있습니다.
“(웃음) 지금은 번호가 찍히니까 못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최소한의 낭만이었던 것 같아요. 말 안 하고 끊은 전화가 오면 옛 남자친구가 아님에도 혼자 착각하고 그러죠. 그런 시절이 한동안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어떤 친구는 술 먹으면 저한테 전화를 맡기기도 했어요.”
—첫 대학 전공이 정치외교학과였나요.
“저희 때는 먼저 과를 결정하고 시험을 보던 때였어요. 그때는 뭔가를 결정하는 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즉흥적인 결정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구체적인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소설보다 언젠가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또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기자나 저널리스트 사회와 관련된 그런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사회학 계통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정치외교학과가 밖에서 생각하는 현실정치나 이런 거와 전혀 상관없이 기본 정치학이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배우니까 현실정치에 오히려 더 냉소적이 돼 가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사실은 전공에 대해서 별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대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거든요.(웃음) 현실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지금은 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니까, 그 아이들이 부끄러운 세상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렸을 때는 어쨌든 세상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10년 후, 2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많은 경우 결정은 정치에서 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이 좀 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남편
—문학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분들의 뜻을 존중해요. 저는 문학인뿐 아니라 어떤 분야의 예술인이나 인문학자, 과학자 등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에 되도록 많이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공을 살려 정치참여를 해도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소극적인 사람이라 가끔은 동료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어요. 요즘은 많이 변하려고 해요. 정당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세계관이나 신념, 철학이 맞는 사회단체 등에서 꼭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데는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시정치뿐 아니라 미시정치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들 일상, 인간관계에서도 정치적인 것, 권력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사회과학을 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권력관계에 관심이 많아지고, 그런 게 문학에도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
—정치외교학을 먼저 전공한 것이 소설 쓰는 데 큰 기둥이었네요.
“네, 어쩌면 스무 살에 문학을 전공했더라면, 아마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문학은 재미 없는 거다, 이렇게 느끼고 지레 포기를 했을 것 같아요. 먼 길을 돌아 왔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남편은 어떻게 응원해 줍니까.
“저희 남편은 다른 직업이 있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지금도 혼자서 소설을 써요. 저한테 ‘나 지금 썼는데 읽어 봐 달라’고 하고 자기가 읽어 주기도 하고 그래요. 공모전에 몰래 투고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선배’로서 글을 좀 봐 주지 않나요.
“네, 읽어는 보지요. 제가 다른 곳에서 심사도 하고 하니까 남편은 자기 소설이 공모에 나오면 예심은 통과할 것 같냐고 물어보고, 저는 그때 기분이 좋으면 통과할 것 같다고 하고 제 기분이 별로면, ‘안 된다니까!’ 막 그래요.(웃음) 가끔은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소설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이 소설에 관심이 많고요. 그뿐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집안 꾸미는 것도 저보다 훨씬 잘해요.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열정이 많은 사람 같아요. 무엇보다 저한테는 가장 친한 친구이죠.”
—아이들은 몇 명인가요.
“딸만 둘이에요. 첫째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이만큼도 다 큰 것 같아요. 연년생이라 지난 3년 정도는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금은 엄마를 잘 떨어지기도 하고 제가 주말에 일을 하러 간다고 하면, 엄마 일 잘하고 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해요.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워진 느낌이에요.”
—혈액형은 뭔가요.
“O형요. 보기에는 안 그럴 것 같은데 한두 시간 만나면 금방 다 친구가 되고 그래요. 밝고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면도 많지만, 누구라도 마음 깊은 곳까지 완전히 친밀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그리고 저는 필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