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를 악마화하는 과정에는 북한의 집요한 공작과 여기에 놀아난 정치권을 비롯한 주사파 세력들이 있다”
⊙ “가장 잘못된 대북 정책을 펼친 정부는 문재인 정부”
⊙ 中情에서 16년간 근무한 1세대 정보분석관… ‘현존 최고의 정보분석관’으로 꼽혀
⊙ 정보분석가로서 본 체험적·분석적 북한관과 對北 정책 평가는?
⊙ “워싱턴 선언으로 핵 정책을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 마련”
⊙ “DJ가 전한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 용인 발언은 평화유지군 수준을 말하는 것”
⊙ “시대 상황에 잘 맞는 對北 정책은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
⊙ “北의 남한 정보기관 無力化 공작은 통일전선 전술… 대공수사권 이양으로 어느 정도 완성”
⊙ “문재인 정부 대북 전단 살포 금지는 어리석은 정책… 대북 심리전 재개해야”
강인덕
1932년생. 평양 제1중학교, 한국외대 졸업, 경희대학교 박사 / 중앙정보부 해외정보·심리전·북한 국장, 남북대화사무국장,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극동문제연구소 이사장, 통일부 장관, 일본 세이가쿠인대 초빙교수, 現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
⊙ “가장 잘못된 대북 정책을 펼친 정부는 문재인 정부”
⊙ 中情에서 16년간 근무한 1세대 정보분석관… ‘현존 최고의 정보분석관’으로 꼽혀
⊙ 정보분석가로서 본 체험적·분석적 북한관과 對北 정책 평가는?
⊙ “워싱턴 선언으로 핵 정책을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 마련”
⊙ “DJ가 전한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 용인 발언은 평화유지군 수준을 말하는 것”
⊙ “시대 상황에 잘 맞는 對北 정책은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
⊙ “北의 남한 정보기관 無力化 공작은 통일전선 전술… 대공수사권 이양으로 어느 정도 완성”
⊙ “문재인 정부 대북 전단 살포 금지는 어리석은 정책… 대북 심리전 재개해야”
강인덕
1932년생. 평양 제1중학교, 한국외대 졸업, 경희대학교 박사 / 중앙정보부 해외정보·심리전·북한 국장, 남북대화사무국장,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극동문제연구소 이사장, 통일부 장관, 일본 세이가쿠인대 초빙교수, 現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
- 사진=조준우
강인덕(康仁德·91) 전 통일부 장관은 자타공인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의 북한 전문가다. 젊은 시절 그는 16년간 중앙정보부에서 북한 정보 분석관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같은 정보 전문가들은 그를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분석관”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강 전 장관이 해온 주된 정보 분석은 북한에 관한 것들이다. 그는 중앙정보부 해외정보·심리전·북한 국장을 역임했다. 그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1960, 70년대는 북한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당시 가장 많은 정보를 관리하고 분석했던 셈이다. 그는 90세를 넘은 지금도 녹슬지 않은 북한 정보 최고 분석관의 눈으로 《로동신문》이나 북한 잡지들을 보며 북한 정권의 움직임과 그 속내를 분석한다. 그를 지금도 북한 전문가들이 서슴지 않고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꼽는 이유다.
강 장관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사무국장,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남북대화에 참여했다. 그만큼 북한 정권의 속내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력 때문에 보수 인사로 분류됐던 그가 1998년 초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자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이 오기도 했다. 장관 재직 시절 ‘북한을 우리의 적’이라고 발언해 북쪽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해임되자 북한이 갈마초대소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북한에 있어 강 장관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악마화하는 북한과 주사파
강 장관은 지난해 연말 회고록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1, 2)》(경인문화사 刊)를 펴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북한과 그동안 지켜본 남북대화 과정 등이 소개돼 있는데 그는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를 서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하나는 후대 집권 세력들이 앞을 다투듯 주장한 중앙정보부와 그 근무자에 대한 비난과 매도에 답하기 위함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직업적, 프로급 공작원과 정보분석관의 양성과 성장에 얼마나 오랜 시간과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가? 나아가 이들의 역할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4일 어린이보다 더 해맑은 미소의 강인덕 장관을 그가 석좌교수로 있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만나 책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인터뷰했다.
강 장관은 인터뷰 중 간간이 “중앙정보부를 악마화하는 과정에는 북한의 집요한 공작과 여기에 놀아난 정치권을 비롯한 주사파 세력들이 있다”는 걱정과 불만을 섞은 소회를 피력했다.
대화의 출발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강 장관이 1998년 3월 좌파 성향인 DJ 내각의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게 된 이야기부터였다.
― 김대중(이하 DJ) 정권 시절인 1998년 3월 통일부 장관 입각 당시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데요.
“좌파 쪽에서는 이영희 교수 멤버들과 기독교 좌파들이 함께 저를 공격했죠. 우파 쪽에서는 재향군인회가 중심이 돼가지고 비난했고요. 저는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기 전에 DJ의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을 여러 차례 했거든요. 저는 저대로 통일 정책을 갖고 있으니까 그 자세 그대로를 갖고 입각했죠. 햇볕정책을 찬양할 일도 없었죠.”
“햇볕정책은 전략적 對北 정책이 아니다”
― 입각 후에도 햇볕정책에 대한 장관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까.
“국회에서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 김봉호 의원이 ‘햇볕정책이라는 게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전략적으로 맞는 정책이라고 보느냐’고 제게 질의를 했어요. 그 뒤에는 ‘(그 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느냐’고도 물었죠. 저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얘기가 맞다. 전략적인 대북 정책으로서는 맞지 않고 선전적인 의미로 사용할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답했어요.”
― DJ도 장관의 국회에서의 발언을 들었을 텐데요.
“국회가 열렸던 그 주에 국무회의가 끝나고 대통령이 저를 보자는 겁니다. 국회에서 한 제 발언이 사실인지를 물어서 ‘맞다’고 했죠. 그러면서 ‘저는 전략적 의미에서는 이 말(햇볕정책)을 쓰지 않는다’고 거듭 제 입장을 밝혔죠. DJ는 햇볕정책이 알려져 있으니 그대로 써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홍보적인 관점에서는 쓸 수가 있을 거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를 안 하더군요.”
DJ 정권의 통일부 장관 맡은 이유
― 어떻게 보면 대북 정책을 놓고 DJ와 큰 입장 차를 갖고 있던 건데 입각이 주저되지는 않던가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당시 저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가 잠시 귀국한 상태였는데 DJ 정부 출범 후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이 3월 2일에 전화를 해서 ‘통일부 장관으로 정부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장관을 맡느냐’며 거부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7시에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이 ‘오늘 장관 임명식이 있으니 부인과 함께 들어오라’는 거예요. 일시 당황했지만 ‘대통령이 벌써 결정을 했구나’ 생각하고 들어가서 임명장을 받은 거죠.”
― 그래도 장관으로 임명됐으니 다짐이랄까, 결심이랄까, 나름 어떻게 장관직을 수행하겠다는 생각은 했죠?
“그때는 우리가 IMF 상황이었는데 북한을 공부한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포탄 한 발이라도 남쪽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남쪽에 포탄이 떨어지면 한국에 투자했던 사람들 다 나갈 테니까, ‘그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맡았던 거죠. IMF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 그래서 장관 재임 중이던 1999년 4월에 있었던 한 강연에서 북한을 적(敵)이라고 호칭해 대북 강경론자라는 비판을 받은 거군요.
“이화여대 정보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 졸업자들 대상 강연이었습니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했죠. 다음 날 중앙일간지에 ‘햇볕론 주무장관이 대북 강성 발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갔더군요. 북한 《로동신문》이 엄청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제가 그때까지 40여 년 동안 줄곧 펼쳐왔던 얘기라 대통령을 비롯해 저를 대놓고 비판하는 정부 사람들은 없었어요.”
― DJ와는 공식적으로 대북(對北)관 차이로 이견이 노정된 적이 없지요?
“제가 노출시키지 않았지요. 장관이 대통령과의 이견을 노출시킬 수 있나요.”
― 장관 재직 시절에 DJ가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까.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언급을 듣질 못했어요. 핵 개발 문제는 그 전인 1994년에 제네바 합의서 채택할 때 나온 거니까 누구나 북한이 핵 개발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JP, 대통령이 지금 노벨상 중심으로 나가는 것 같아”
― 당시 김종필(이하 JP) 총리와 장관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JP가 중앙정보부 수장일 때 저는 분석관으로 그 밑에 있었으니까 잘 알고 지냈죠. 특이한 게 있었다면 노벨상 이야기가 있었는데 점심을 같이하게 되면 으레 ‘이 사람아, 대통령이 지금 노벨상 그거 중심으로 나가는 것 같아’ 그 얘기를 많이 했어요.”
― JP가요?
“그랬지, 왜 모르겠어요. JP가 정보통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1998년 하반기로 기억하는데 그때 북유럽 인사들을 많이 초청했거든요.”
― 2001년 발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DJ가 “북한은 핵 개발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런 얘기를 했다는데 들어봤는지요.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한 적은 없으니까, 저와 JP가 DJ 정부에 있을 때는 그런 얘기 없었어요.”
―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그런 말을 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했다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저는 정상회담 당시 북에 4억5000만 달러를 줬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을 오래 다뤄온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강인덕 장관은 북에 현금을 준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남북 대결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 계좌를 이용해 북에 송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랐다”고 말했다. 당시 6·15 정상회담 대가로 현금 4억5000만 달러를 북에 보낼 때는 현대그룹도 관련돼 있었다.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에 현대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등으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 문제는 강 장관이 통일부에 재임하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북에 들어갈 구멍’
사실 강인덕 장관은 1978년 중앙정보부를 떠난 후에도 미국이나 일본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많이 듣고 있었다고 한다.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기업 등 일본 내 기업들의 대북 투자 움직임도 1986년부터 듣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다.
“1986년 6월 재일동포 자산가인 손달원씨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북한 당시 노동당 비서 허담과 만나 금강산 관광 문제, 원산항 개방 문제, 제철소 건설 문제 등에 대해 합의했고 조총련계 기업인인 사쿠라 그룹 김진식씨가 북한에 자동차 수리공장과 신사복 위탁 생산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고 철수했다는 얘기 등을 들었죠. 모두 실패한 거죠. 현대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1989년 1월에 정 회장이 북한을 다녀온 직후부터 일본 지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죠.”
강인덕 장관이 말하는 일본 지인 중에는 당시 《아사히신문》 중견 기자였던 고바야시 씨도 있다. 강 장관은 통일부 장관 취임 후 얼마 안 돼 고바야시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고바야시는 《아사히신문》을 떠나 규슈 국제대학 교수로 있었다. 고바야시는 전화로 강 장관에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고바야시에 따르면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에서 북한과 중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신일본산업 사장인 요시다 다케시라는 사람이었어요. 저도 1990년대 초반 일본에 갔을 때 《아사히신문》 기자와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고바야시와 통화한 후 정주영 회장을 만났습니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현대의 대북사업은 정몽헌 회장이 맡는다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을 위해 북측과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거예요. 저는 정 회장의 말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죠.”
― 북한의 속성을 가장 잘 아는 분이 실패를 예상할 수 있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예상외인데요.
“자유세계의 정보 등이 북한에 들어갈 구멍을 뚫는 거였죠. 이를 위해 북도 끌어들여야 하니까 남북 양쪽이 손해 보지 않고 위험하지 않은 방법은 금강산 관광사업이라고 판단했던 거죠. 그 사업을 정부가 나설 수는 없고 일반 기업이 나서는 게 좋다고 봤던 거였죠.”
통일교, 대북사업 우선권 주장
― 당시 현대 말고도 대북사업에 관심이 있는 기업이나 단체가 있었는데요.
“그랬죠. 정주영 회장보다 먼저 대북사업에 뛰어든 게 통일교였습니다. 제가 현대에 금강산 관광사업 지원을 약속한 이후 통일교 박보희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왜 통일교가 대북사업을 먼저 시작했는데 현대한테 먼저 주느냐, 통일교가 대북 관련 사업들 전체를 하기로 김일성과 계약했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통일교를 미워하는 것 아니냐’ 이런 항의를 제게 하더군요.”
―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그렇지 않다. 정주영씨는 금강산을 배로 오가겠다고 했다. 비가 오거나 폭풍이 불어서 금강산 관광 갔던 사람이 남으로 올 수가 없다면 배에서 재울 수 있지만 통일교는 할 수 없지 않으냐. 당신네들은 그저 관광만 하겠다는 거지 아무런 준비가 없다. 현대는 그런 준비를 했기 때문에 먼저 준 거다’고 했지요.”
― 우리 남한이야 일반 기업이 참여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북한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관광사업에서도 얼마든지 자신들 내키는 대로 약속을 뒤집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처음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할 때 북한 땅에 건물 같은 것을 짓는 것은 반대했어요. 그래서 숙박이 가능한 배를 생각했던 거고요. 북한 땅에 무엇인가를 짓거나 설치하면 유사시에 출입은 물론 통신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이니셔티브를 북에 뺏기게 돼요. 이런 걸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했던 거죠.”
“금강산 관광은 김정일의 돈벌이 용도”
― 결국 금강산 현지에 호텔도 짓고 했는데요.
“쓸데없는 짓이었죠. 개성공단을 보세요. 지금 어떻게 됐나요?”
― 북한은 왜 금강산 관광을 허용했을까요.
“북쪽의 대남 전략은 공작을 계속하면서 남한 내에 통일혁명당 같은 지하조직을 계속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핵 무력을 발전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김정일로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현찰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돈벌이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을 허용한 거라고 봅니다. 정상회담 때 북에 보낸 현금 4억5000만 달러도 그런 용도로 쓰였을 거라고 봐요.”
― 현대도 당시 재무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랬죠. 현대건설도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있었고요. 당시는 IMF 상황 아니었습니까. 현대로서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권과 유착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당시 정부는 그런 상황을 이용한 거고요. 결국 정부의 요구와 기업의 요구가 일치한 거죠. 기업이 왜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기업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당연히 기업으로서는 운용자금 마련이 시급했던 거죠.”
― 훗날 대북 송금 특검 때 문제가 됐던 산업은행의 현대그룹 특혜 대출 시비 같은 게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 거군요?
“그럼요.”
김정일이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원했다고?
― 최근 《중앙일보》에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 게재되고 있는데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DJ에게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실렸습니다. 북한의 통일원칙 중 자주는 선대의 유훈이자 지금도 바뀌지 않는 원칙인데 김정일이 정말 그 말을 했다면 김정일이 여기서 말하는 주한미군이란 북한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일종의 평화유지군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 이야기는 ‘미군의 역할을 바꿔달라. 휴전선 가운데 앉아서 양쪽의 균형을 잡아달라. 이렇게 되면 내가(김정일) 찬성할 수 있다’ 이런 뜻 아닐까요”
― 그러니까 평화유지군 수준.
“그렇죠.”
― 노회한 DJ가 김정일의 그런 속마음을 몰랐을까요.
“저는 알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국에서 평화 유지가 가능하다. 내가 이만큼 공헌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였겠죠. 그래야 노벨 평화상과 연결될 거 아닙니까. 저는 그때 암수술 하고 아산병원에 입원했을 때인데 그 말 듣고 깜짝 놀랐어요.”
― 《월간조선》 2005년 11월호에 실린 “통전부 요원의 폭로” 글을 보면 강인덕 장관의 해임은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묘사돼 있던데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웃음) 그 기사 읽었어요.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이 성공했다는 거죠. 국정원 해체 얘기도 있던데 역시 통일전선 전술이 먹혀들어가 문재인 정부 때 거의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 대공 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렇죠. 대공 수사를 경찰이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10여만이나 되는 경찰관의 사상 의식이 분명히 우리 헌법 규정에 맞도록 움직인다는 전제가 돼야 하거든요. 그게 되겠어요?”
― 북한 전문가로서 보시기에 대공 수사권은 다시 국정원이 가져야겠죠?
“당연하죠. 휴전선을 넘어오는 간첩이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간첩이 우회해서 들어오고 있다고 저는 봐요. 침투를 막기가 쉽지 않죠. 특히 지금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수십만 명을 해외로 내보내잖아요. 그중에는 외교관도 있고 각국 주재 상사원도 있죠. 그중에 남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북의 내부를 꿰뚫어 볼 수 있고 대남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해낼 수 있는 기관이 어디냐? 많은 해외정보 거점을 가진 국정원밖에 없어요.”
“대통령, 국정원 보고서 보지도 않는다”
― 국가 정보기관이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면 북한 정권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세습되면서도 일관되게 선전, 선동, 모략으로 집요한 공격을 한 것이 주효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는 힘을 약화시키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보기관을 악마화하는 단계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가 책을 쓴 이유 중 하나예요. 중앙정보부에 있던 분석관들이 악마화되어 있죠. 프로급의 정보분석관을 만들어낸다는 것, 프로급의 공작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닙니다. 문서 등 중요한 첩보를 공작을 통해 빼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첩보가 애매모호할 때 이것을 정보로 만드는 분석 과정을 담당하는 분석관이 필요하거든요. 이 둘이 맞아야 된단 말이죠. 이걸 키워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노무현 정부 때 한국에 없었어요. 후배들이 제가 있는 도쿄까지 와서 말해주더군요. 대통령이 국정원에서 올리는 보고서를 보지도 않는다고. 하나의 보고서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드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비용과 시간을 들여 가짜 보고서를 만들겠어요? 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내용들이지.”
― 애써 만든 보고서들이 사장(死藏)된 거네요.
“그렇죠. 더 한심한 것은 국정원이 올린 보고서를 청와대 직원들이 다시 작성해서 올렸다는 거예요. 개인 주관에 따라 얼마나 왜곡이 됐겠어요. 우린 전문가들이 만든 보고서를 축약하고 축약해서 올린 건데.”
“北, 대공 수사권 이양 시 쾌재 불렀을 것”
― 노무현 대통령도 소위 운동권과 가깝다 보니 중정이나 국정원 등 우리 정보기관 사람들을 거의 악마화된 집단으로 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죠. 그건 그냥 거부한 게 아니라 사상·의식적으로 거부한 거예요. 주사파이기 때문이라고 봐요. 사상적인 공작 등 북한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봐요. 제가 장관을 그만둔 다음에 북한이 갈마 초대소에서 무슨 환영잔치를 했다고 하던데, 문재인 정부가 대공 수사권을 국정원에서 경찰로 넘긴다고 했을 때 북한 공작 부서는 이만큼 성과를 올렸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죠.”
― 북한의 공작기관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북한의 경우 대남 공작기구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일합니다. 남북대화를 해본 사람은 다 느끼죠. 제가 남북대화에 참여할 때 맨 밑에 있던 친구가 지금은 맨 꼭대기에 올라와 있어요.”
DJ와 김정일의 6·15 남북정상회담은 강인덕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에 이루어졌다. 당시 강 장관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6·15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듣고 강 장관은 일본에 나와 있는 국정원 파견관을 통해 DJ에게 정상회담 전에 참고하라며 책 두 권을 보냈다. 《김정일의 민족관》이라는 책이었다.
― 책은 전달됐다고 합니까.
“글쎄 모르겠어요.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을 보냈는데. 그 책의 10장이 바로 통일 문제예요. 김정일의 통일관은 김일성 때와 달라진 게 없어요.”
― 김정일의 민족관은 어떤 겁니까.
“김일성이가 얘기했던 민족 대단결론이죠. 민족적 대단결론이 바로 통일전선입니다. ‘북쪽에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끝내고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들어갔으니까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남한에서 하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건 단순히 통일전선 공작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남한에 대해서는 통일전선 공작, 대남 공작을 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된다’ 등이 골자죠.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던 당시를 생각하면 돼요. 소련군이 주둔해 있고 소련군의 힘에 의해서 공산당이 조직되고 공산 정권을 만든단 말이죠. 마찬가지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지가 있고 이것이 언제나 뒷받침해주면서 남한에서 통일전선을 형성해라 하는 거죠. 이럴 때 남한에서 ‘북쪽에 엄청난 힘이 있구나, 아무리 우리가 뭘 해도 안 되겠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죠. 이럴 때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었어요.”
“국민 30~40%는 통일전선에 넘어갔을 것”
― 통일전선에 넘어간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은 5~6% 될까 말까 한다고 하는데 전 그렇게 안 봐요. 지금 거의 머리가 그쪽으로 간 사람이 30~40% 정도 될 거로 봐요. ‘지금 북쪽이 뭘 할 수 있어’ 하는 나이브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 확 퍼져 있잖아요. 북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데도 이걸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하고. 특히 한미훈련한다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민주당을 봐요. 이게 다 통일전선이 먹혀든 거죠. 말하자면 인지의 변화거든요.”
― 통일전선 전술은 결국 인지의 변화까지 다 포함되는 거네요.
“그럼요. 인지의 변화가 시작이자 기본이 되는 거죠. 인지의 변화가 있어야 물이 생기는 거지요. 물이 생겨야 고기가 놀 수 있으니까. 물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게 인지의 변화죠. 단순히 공작원의 공작으로 친북파가 됐다 하는 것만 통일전선으로 보면 안 되고 이런 인지의 변화를 만들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라는 고기가 놀 수 있는 물이 형성되면 이게 통일전선의 성공인 거죠.”
― 통일전선이 성공하고 있다고 봅니까.
“앞서 말한 대로 30~40%의 사람들에게는 먹혀들고 있죠. 그들이 공산당들이 놀 물이 되는 겁니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북쪽에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게 지금 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하는 게 평화잖아요. ‘핵을 쏘게 되면 다 망하지 않느냐. 이걸 쓰지 않도록 우리가 북을 포용해보자’ 이런 주장 아닙니까. 이런 인식 자체가 통일전선의 결과입니다. ‘싸워야 된다’ 이게 아니거든요. 타협해야 한다고 움츠리는 거죠. 굴복하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통일전선의 결과가 되는 거예요.”
“남북 연방이건 연합이건 다 헛소리”
아흔이 넘은 나이를 잊은 강 장관의 열변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니까 반미(反美) 운동의 논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미국이 있어서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으냐, 워싱턴 선언이 더 위험을 초래하지 않느냐’ 하는 인식,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것 자체가 통일전선의 성과라는 거죠. 그런데 이걸 자꾸 과소평가하는 게 더 문제예요. 이래가지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어요. 패망한 베트남이 그런 사례죠. 여기에 하나 더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사회의 부패가 심해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도 그럴 거라고 많은 국민이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대단히 나쁜 흐름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자본을 적으로 본다면 이것도 잘못된 거고, 노사협조라는 것은 말로만 끝나지,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되겠어요? 시장 원리가 작동 안 할 거란 말이죠. 이런 환경 조성 전체가 소위 통일전선의 결과란 말입니다.”
― 만약 DJ가 장관께서 보내준 책을 봤다면 6·15선언 중 첫 번째 항목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는 그런 자주를 맨 앞에 내세우는 선언문은 안 나왔겠죠?
“자주 평화니 민족적 대단결이니 그 전제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했던 ‘어느 동맹보다 민족이 낫다’는 소리와 같은 얘기예요. 현 남북 관계 상황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저는 6·15 공동선언 서문에 나오는 낮은 단계 연방제 같은 거 다 헛소리라고 봐요. 그리고 무슨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든가 하는 소리도 그렇고요.”
― 국가연합과 낮은단계 연방제 가능한가요.
“말이 안 되는 거죠.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전혀 다른데 연합할 수 있냐고요. 연방이건 연합이건 되겠습니까? 이건 1960년에 김정일이가 썼다는 논문을 보면 알아요. 3국 통일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문이 있거든요. 신라, 고구려, 백제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거죠. 39도선 이남만 합쳐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김정일은 조선 반도에 통일 국가는 고려가 처음이라고 해요. 조선 반도에서 고려가 처음으로 통일을 했다는 얘기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에요. 북쪽의 사람들이 통일을 하는 것이지 남쪽의 사람들이 통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통일은 북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남한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보라, 삼국통일 누가 했느냐, 고려가 하지 않았느냐’ 이런 논리로 역사 인식과 오늘의 현실을 연결시켜서 ‘통일은 우리가 하는 거다’ 하는 인식을 북한 동포들에게 심는 거죠. 이런 통일 인식을 가지고 우리와 대화하고 있는데 여기에 연방제 통일이니 그런 게 먹혀들어가겠어요? 게다가 지금은 핵까지 가지고 있는데.”
“DJ, 김정일은 서로 이용한 것”
― 6·15 정상회담을 간단히 평가한다면요?
“저는 DJ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6·15로 연결됐다고 봐요. 본인이 애당초 주장했던 3단계 통일이라든가 이런 연장선상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게는 DJ의 그런 인식이 나이브해 보여요. 북쪽에서는 DJ의 이런 인식을 이용해 자기들에게 필요한 핵 개발자금을 얻어낸 거죠. 역으로 이용한 거죠. 김정일로서는 참 잘 이용한 거죠. 남한 대통령의 사상, 인식을 역이용해 물질화한 거죠.”
― DJ도 노벨상을 위해 거꾸로 이용한 거 아닌가요?
“글쎄 양쪽이 다 이용한 거죠.(웃음) 상호 간에 이익이 맞으니까 성사됐을 거 아닙니까.”
― 그런데 그건 개인의 이익이지, 민족 전체의 이익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통일론이 있습니다. 통일을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보자는 이야기들인데 지금의 북한을 순수하게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있나요? 말이 같고 문화 인식이 같고 생활이 같아야 같은 민족인데 지금은 서로 많이 달라졌잖아요. 남한을 위협하는 핵을 가진 상황인데다가 평양어를 문화어로 만들었고 남한의 문화를 반동문화 취급하는 저 사람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있나요? 민족적 통일이 가능하려면 북쪽도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돌아와야 해요. 자유, 민주, 복지, 시장원리. 이런 것들이 일반적 가치인데 우리도 이런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북을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이걸 반대하는 반인간적인, 반가치적이고 세습적이며 반지성적인 봉건 왕조국가는 구분해야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북한을 보는 눈은 가치 공유라는 차원에서 국가적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적 관점에서 보자는 주장과 국가적 관점에서 보자는 주장 중 우리는 국가적 관점에서 통일을 봐야 한다고 봅니다.”
“문재인 정부 통일 방안이 가장 비현실적”
―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역대 정부 중 가장 현실적 통일 방안을 내놓은 정부는 어느 정부라고 보는지요.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통일 방안이라고 저는 봅니다.”
― 제일 비현실적 방안을 내놓은 정부는요.
“역시 노무현·문재인 정권 아닌가 싶습니다. YS(김영삼)·DJ 정부 시절에는 북쪽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핵을 개발하고 보유했다고 떠들던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북이 핵 보유를 문서화, 법제화까지 했잖아요.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비교하면 문재인 정부가 더 못했고. 북한이 핵을 만든 걸 뻔히 보면서도 김정은이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떠들고 다닌 정부니까요.”
― ‘7·4 남북공동성명’ ‘9·1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등 남북합의서나 공동선언 중 가장 잘된 선언이나 합의문은 어떤 겁니까.
“모두 그 당시 최근의 정세를 이용하는 거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최근에 나오는 선언이 가장 현실적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문재인 정부 때 4·19 판문점선언 같은 거는 잘못됐다고 봐요. 현실에 맞지 않아요. 희망과 현실은 다르단 말이죠.”
― 잘된 선언은 없나 봅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그중 잘된 거는 어떤 겁니까.
“상대적으로 보면 7·4 공동선언이 남북관계 선언의 기본을 만들었고 그걸 기본으로 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 잘됐다고 봅니다. 저는 선언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안 지키면 그만이니까요. 북한이 전략 수행을 위한 전술적인 방법으로 남북 간에 대화도 한 거죠. 만약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이 잘됐다고 북이 핵을 포기했을까요. 안 하죠. 왜냐, 북쪽은 그 핵을 가지고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걸 포기할 수 없죠.”
남북정상회담 제의 거절한 朴正熙
― 제가 과문한 탓인지 장관께서 쓰신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에 나와 있는 1970년대 초 남북조절위 때 박성철 당시 북한 부수상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거부했다는 대목이 있던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제안이 왔죠.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답니다. ‘2시간이면 냉면 먹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느냐, 뭐가 돼야 하지 않느냐. 적십자 회담이라도 뭐가 돼야 내가 갔다 오지’ 하셨답니다. 아마 박 대통령은 북쪽을 잘 아는 분이니까 그렇게 거절했던 것 같습니다.”
― 성과가 없는 정상회담은 안 하겠다는 뜻이었겠죠?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뵐 때마다 전략적인 차원이 우리와 다르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당신께서 뭘 많이 알고 있다는 게 아니라 전략적 차원이 달랐어요. 당신께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걸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정치·경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모두 합해서 본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른을 모시는 데 있어서 우리 생각이 얼마나 얕은지를 느끼곤 했어요.”
― 베트남이 3년 안에 패망한다는 박 대통령의 예견도 적중했다면서요.
“그럼요. 월남과 미국의 파리 회담 성사 직후에 그런 예측을 하셨죠.”
― 공산당의 속성을 잘 아신 거죠.
“북쪽과의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셨죠. 경제를 강조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요. 선 경제 후 통일이라고 할까요.”
― 《남북 경제력 비교》를 중앙정보부에 계실 때인 1974년에 쓰셨죠. 책이 나온 시점 때문인지 보통 우리가 북한을 경제력으로 앞선 시점이 그 책이 나온 1974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관께서 분석해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미 1969년에 우리 GNP가 북에 두 배를 넘었다면서요?
“1969년에 우리 남한의 개인소득이 북을 한참 넘어섰죠. 우리 인구가 북의 두 배니까 경제력도 두 배 아닙니까.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 보고를 받으시면서 엄청 기뻐하셨죠. 하루빨리 경제력에서 북한을 앞서는 게 그분의 원(願)이었거든요.”
― 《남북한 경제력 비교》를 만드는 데 많은 인원이 들어갔다면서요?
“비교하고 분석하는 데 전문가를 포함해서 한 1000명 정도 투입됐습니다. 무척 공을 들인 책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닫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남북 경제력을 비교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북한이 생산하는 제품 같은 것들을 해외 우리 거점을 통해 입수해서 분석하고 그랬죠. 한 예로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북한 제품들 견본시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전시된 제품을 모두 사서 보내라고 했죠.”
― 북한의 생활 수준과 함께 기술 수준도 보려는 것이었군요.
“그렇죠. 북의 기술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기계류들도 많이 사 왔는데 그중에는 캄보디아에 있는 북한 이앙기도 있었어요. 그 이앙기를 들여와서 수리한 후 제가 강원도 평창에 있는 논 300평에 직접 모를 심어봤어요. 모의 절반이 물에 뜨는 겁니다. 북한의 농기계 생산 기술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죠. 다른 농기구들의 수준도 그런 식으로 파악했습니다. 심지어 1972년에 제가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남북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아이들 장난감에서 과자까지 다 사가지고 와서 분석했어요. 수집 가능한 모든 북한 제품들을 구해서 분석하면서 남북한 경제력 수준을 비교했던 겁니다.”
― 북한의 기술 수준이 우리보다 뛰어난 제품들도 있었겠죠?
“있었죠. 예를 들어 북한의 선반기계로 만든 제품을 입수했는데 수준이 상당해 보였어요. 그래서 독일 전문가한테 물어봤더니 독일 수준이라는 겁니다. 물에다 넣었다, 건졌다를 반복하면서 제품을 만들었다는 제작 공정까지 밝혀냈죠. 그러니 많은 인원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박 대통령은 그 책을 보시면서 남북 경제력 비교를 위해 들인 노력에 놀라시기도 하고 무척 기뻐하셨죠.”
문재인이 중국에 푸대접받는 이유
― 북한만을 놓고 한미(韓美) 정보력 비교를 하면 어디가 우위에 있습니까. 미 CIA 요원이었던 마이클 리는 북한 정보에 관해서 우리 남한보다 미 CIA가 더 앞선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미국의 북한 정보력이 우리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이 촬영한 항공사진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았거든요. 건물 등 외부의 모습은 다 나오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잖아요. 결국 분석을 해야 하는데 사회적인 문화, 역사 이런 것이 동일할 때 분석, 판단하기가 쉽거든요. 그러니 그건 우리가 잘할 수밖에 없었죠.”
― 힘에는 힘으로 원칙이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다고 하셨는데 그럼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올바른 겁니까.
“공산주의자들은 폭력 지상주의자들 아닙니까. 힘 지상주의자들이거든요. 그들은 모든 것을 폭력으로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력이 없고 힘이 없으면 상대를 안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재인 정부 때의 중국이죠. 그때 중국이 우리한테 한 짓을 보라고요. 우리 힘이 완전히 빠졌다고 봤기 때문에 우리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혼밥’을 하게 하고 중국 경호원들이 문재인 방중을 취재하러 간 우리 기자를 폭행하고 그렇게 했던 거라고 전 봅니다.”
이어지는 강 장관의 말이다.
“만약 문재인 정권이 중국과의 교섭에 오늘날 윤석열 대통령이 하는 식으로 한미관계를 강화시켜가지고 중국에 들어갔다면 그렇게 푸대접은 안 했겠죠. 공산주의자들은 폭력과 힘을 우선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항할 것은 힘밖에 없어요.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이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에 대해 좋게 평가합니다.”
“우리도 핵 재처리 시절 가져야”
― 장관께서는 우리가 직접 핵무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인 것으로 아는데 윤 대통령의 이번 미국 방문 중 핵을 우리가 직접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핵 재처리 기술 확보 등 핵 생산 직전까지의 기술을 갖출 수 있는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저도 윤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에 만족하지만 약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 그런 점입니다. 저는 앞으로라도 미국과 교섭할 때 우리도 핵 재처리 시설을 가져야겠다고 했으면 좋겠어요. 일본은 핵 재처리 시설을 통해서 플루토늄을 40톤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핵폭탄이 9000발 이상 나와요. 저는 우리도 핵 재처리 시설은 가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잘하는 건가요.
“저는 정상화됐다고 봐요. 윤석열 정부가 선택한 길이 맞아요.”
― 결국 북한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다시 대북 심리전을 해야 돼요. 지금 심리전만큼 중요한 작전이 없어요. 대북 전단과 방송은 우리의 강력한 비대칭 전략 자산이에요. 심리전은 지금 북쪽이 갖고 있는 핵에 대한 우리의 비대칭 전력입니다. 북쪽에 정세 변화를 인지시키는 환경 조성을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심리전밖에 없어요.”
― 북에 대한 전단 살포 금지 등은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김여정 하명법’으로 못 하게 한 것 아닙니까.
“바보 같은 짓이지. 말도 안 되지. 도대체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 낮추어야”
― 대북 정책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윤석열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윤석열 정부가 제가 앞서 말한 심리전을 재개하겠다고 했고 한미관계도 개선시켰는데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에 대북제재에 동참 안 하면 페널티를 준다는 식의 압력을 넣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죠. 결국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어떻게 낮추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의 대중국 정책, 대러시아 정책은 이미 결정됐다고 봐요. 대러시아 정책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이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겐 보배가 됐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 한국전쟁의 덕을 본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군사적 지원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책의 기본 방향을 빨리 정해야 해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대북 정책의 방향에서도 중요한 키가 되지 않나 싶어요.”
― 한미 간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강화하는 워싱턴 선언이 나왔지만 국민들 중에는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본토를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우려를 가진 상태에서 북한이 핵 도발을 한다고 해서 북한을 향해 과연 핵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의문은 저한테도 있어요.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을 갖다 놨다고 해서 믿을 수가 있느냐, 쏘는 건 미국 대통령이 결정하는 거니까’ 하는 생각을 하죠. 그러나 여기까지 핵잠수함을 가져왔다는 자체는 대북 억제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어요. 1단계, 2단계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핵우산과 관련해 미국을 도저히 못 믿겠다.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여론이 더 높아진다면 우리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에 한마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워싱턴 선언으로 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대해서 정부와 정부 간 1 대 1로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잖아요. 아직도 북한 핵 대응과 관련해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요구를 진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핵 정책을 진전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펼 수 있는 단계는 생기지 않았습니까. 과거에는 그게 없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워싱턴 선언을 좋게 평가해야 되지 않느냐 보는 거죠.”
“북, 쉽게 무력 도발 못 할 것”
― 과거 미국이 1968년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1976년에 발생한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대처를 보면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에서 문제의 확산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물론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국의 미온적으로 보이는 대처는 베트남 전쟁을 수행 중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이제 미국의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 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봅니다. 북에서 ICBM을 정상 각도로 태평양 쪽으로 쏜다면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을 때 격추시키는 거예요.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본토로 날아오는 것으로 보고 격추시켰다는 명분을 만들 수 있거든요. 이걸 하느냐, 안 하느냐로 미국의 북한 핵 도발 억제 의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북한의 도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좌파 세력이 있습니다. 북한이 도발할까요?
“대내적으로 할 수 있는 도발은 하겠지만 대남 무력 공격 같은 것은 못 한다고 봅니다. 미사일 발사는 대내에서 하는 도발이죠. 대남 무력 공격 발생 시 우리 군은 선(先) 조치 후(後) 보고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에 즉각 대응에 나설 겁니다. 괜히 북한군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연평도 때보다도 몇 배 더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무력 도발은 못 할 겁니다.”
“북, 쉽게 안 무너져”

― 지금도 북한 정보를 분석하십니까.
“하죠. 중앙정보부 시절처럼은 아니지만 《로동신문》 등 북한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그걸 분석하면서 북한의 속내를 분석하죠. 공개 정보 분석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잡지 등에서 전선(電線) 사진을 보게 되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부릅니다. 그러면 그 전문가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정도의 전선 굵기면 여기에는 몇 킬로와트 정도의 전력을 이용할 거다. 어느 정도 크기의 선반을 쓸 거다. 그 전선이 들어가는 공장이 섬유를 만들면 생산량은 얼마일 거다’ 하는 게 다 나옵니다. 공개 정보가 그래서 아주 중요한 겁니다.”
― 북한이 붕괴할 것 같습니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북한에는 한 200만 정도의 권력 공동체가 있어요. 결혼 등 전략적으로 묶인 관계들이죠. 이들은 김정은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공동체가 평양입니다. 그들 때문에 쉽게 안 무너지지요.”
― 장기적으로는요.
“김정은 다음 대 정권에서는 가능할지 몰라요. 정권이 바뀌어야 핵을 포기할 겁니다. 주체사상이 없어질 때 유훈을 안 지켜도 될 때 이럴 때가 돼야 핵도 포기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일성계 정권 외 새로운 정권이 등장할 때는, 그것이 군부가 되든 뭐가 되든 북한 인민을 위한 정책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그것이 개혁과 개방이죠. 북이 개혁, 개방을 해야 통일이 앞당겨지는 겁니다.”
― 김정일 옹립 시기를 1970년대 초반인 73, 74년경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1980년대 넘어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요.
“1980년이 가장 정확하죠. 1974년에 김정일이가 등장한 다음에 업무가 인계되거든요. 후계자에게 최종적으로 인계되는 것이 혁명 공작, 즉 대남 공작이죠. 대체로 1976년 이후에 인계가 시작되거든요. 인계에 3~4년이 걸립니다. 인계 작업이 끝나고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본격 등장하죠. 그때부터는 김일성이가 뒤로 물러나면서 김정일을 앞세웠죠. 북한의 대남 공작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1976년 이후예요.”
“분석관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있어야”
―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남한에서 설왕설래할 때 처음부터 김정은으로 봤습니까.
“아니 김정은이라고 보지는 않았어요. 형 정철이가 있으니까요. 둘 가운데 하나라고는 봤죠.”
― 김정남은요.
“김정남이는 북한 밖에 있으니까 이미 아니라고 봤죠. 김평일의 예를 봐서 알 수 있듯이 밖에 있다가 내부로 들어올 수가 없단 말이죠. 더구나 김정남은 일본에 몰래 갔다가 들켜서 국제적으로 망신도 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아들을 데려다 후계자로 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봐서 정철이 아니면 정은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죠.”
― 현 시기에서 북한 정보분석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예요, 이념의 문제죠. 자유민주주의 인식이 없는 사람은 우리 현실상 필요하지 않아요. 분석관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돼요. 정보란 새로운 지식이기도 해요. 누구보다 앞서가는 거죠. ‘새로운 지식을 내가 만들어내고 있다, 공부하고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분석관 생활을 하면 어렵지가 않아요.”
2시간30분 동안 기자는 아흔이 넘은 원로 북한 전문가의 사자후를 들었다. 그의 말이기에 울림이 깊다.⊙
강 전 장관이 해온 주된 정보 분석은 북한에 관한 것들이다. 그는 중앙정보부 해외정보·심리전·북한 국장을 역임했다. 그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1960, 70년대는 북한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당시 가장 많은 정보를 관리하고 분석했던 셈이다. 그는 90세를 넘은 지금도 녹슬지 않은 북한 정보 최고 분석관의 눈으로 《로동신문》이나 북한 잡지들을 보며 북한 정권의 움직임과 그 속내를 분석한다. 그를 지금도 북한 전문가들이 서슴지 않고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꼽는 이유다.
강 장관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사무국장,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남북대화에 참여했다. 그만큼 북한 정권의 속내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력 때문에 보수 인사로 분류됐던 그가 1998년 초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자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이 오기도 했다. 장관 재직 시절 ‘북한을 우리의 적’이라고 발언해 북쪽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해임되자 북한이 갈마초대소에서 축하 파티를 열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북한에 있어 강 장관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악마화하는 북한과 주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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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저서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1, 2)》. |
〈하나는 후대 집권 세력들이 앞을 다투듯 주장한 중앙정보부와 그 근무자에 대한 비난과 매도에 답하기 위함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직업적, 프로급 공작원과 정보분석관의 양성과 성장에 얼마나 오랜 시간과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가? 나아가 이들의 역할이 국가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4일 어린이보다 더 해맑은 미소의 강인덕 장관을 그가 석좌교수로 있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만나 책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인터뷰했다.
강 장관은 인터뷰 중 간간이 “중앙정보부를 악마화하는 과정에는 북한의 집요한 공작과 여기에 놀아난 정치권을 비롯한 주사파 세력들이 있다”는 걱정과 불만을 섞은 소회를 피력했다.
대화의 출발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강 장관이 1998년 3월 좌파 성향인 DJ 내각의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게 된 이야기부터였다.
― 김대중(이하 DJ) 정권 시절인 1998년 3월 통일부 장관 입각 당시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데요.
“좌파 쪽에서는 이영희 교수 멤버들과 기독교 좌파들이 함께 저를 공격했죠. 우파 쪽에서는 재향군인회가 중심이 돼가지고 비난했고요. 저는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기 전에 DJ의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을 여러 차례 했거든요. 저는 저대로 통일 정책을 갖고 있으니까 그 자세 그대로를 갖고 입각했죠. 햇볕정책을 찬양할 일도 없었죠.”
“햇볕정책은 전략적 對北 정책이 아니다”
― 입각 후에도 햇볕정책에 대한 장관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까.
“국회에서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 김봉호 의원이 ‘햇볕정책이라는 게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전략적으로 맞는 정책이라고 보느냐’고 제게 질의를 했어요. 그 뒤에는 ‘(그 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느냐’고도 물었죠. 저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얘기가 맞다. 전략적인 대북 정책으로서는 맞지 않고 선전적인 의미로 사용할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답했어요.”
― DJ도 장관의 국회에서의 발언을 들었을 텐데요.
“국회가 열렸던 그 주에 국무회의가 끝나고 대통령이 저를 보자는 겁니다. 국회에서 한 제 발언이 사실인지를 물어서 ‘맞다’고 했죠. 그러면서 ‘저는 전략적 의미에서는 이 말(햇볕정책)을 쓰지 않는다’고 거듭 제 입장을 밝혔죠. DJ는 햇볕정책이 알려져 있으니 그대로 써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홍보적인 관점에서는 쓸 수가 있을 거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를 안 하더군요.”
DJ 정권의 통일부 장관 맡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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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7일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열린 첫 통일안보대책회의에 앞서 당시 박정수 외교통상부 장관, 이종찬 안기부장, 천용택 국방장관, 강인덕 통일부 장관(왼쪽부터)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당시 저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가 잠시 귀국한 상태였는데 DJ 정부 출범 후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수석이 3월 2일에 전화를 해서 ‘통일부 장관으로 정부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장관을 맡느냐’며 거부를 했는데 다음 날 아침 7시에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이 ‘오늘 장관 임명식이 있으니 부인과 함께 들어오라’는 거예요. 일시 당황했지만 ‘대통령이 벌써 결정을 했구나’ 생각하고 들어가서 임명장을 받은 거죠.”
― 그래도 장관으로 임명됐으니 다짐이랄까, 결심이랄까, 나름 어떻게 장관직을 수행하겠다는 생각은 했죠?
“그때는 우리가 IMF 상황이었는데 북한을 공부한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포탄 한 발이라도 남쪽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남쪽에 포탄이 떨어지면 한국에 투자했던 사람들 다 나갈 테니까, ‘그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맡았던 거죠. IMF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 그래서 장관 재임 중이던 1999년 4월에 있었던 한 강연에서 북한을 적(敵)이라고 호칭해 대북 강경론자라는 비판을 받은 거군요.
“이화여대 정보대학원 최고관리자 과정 졸업자들 대상 강연이었습니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했죠. 다음 날 중앙일간지에 ‘햇볕론 주무장관이 대북 강성 발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갔더군요. 북한 《로동신문》이 엄청난 비난을 퍼부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제가 그때까지 40여 년 동안 줄곧 펼쳐왔던 얘기라 대통령을 비롯해 저를 대놓고 비판하는 정부 사람들은 없었어요.”
― DJ와는 공식적으로 대북(對北)관 차이로 이견이 노정된 적이 없지요?
“제가 노출시키지 않았지요. 장관이 대통령과의 이견을 노출시킬 수 있나요.”
― 장관 재직 시절에 DJ가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는 걸로 보였습니까.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언급을 듣질 못했어요. 핵 개발 문제는 그 전인 1994년에 제네바 합의서 채택할 때 나온 거니까 누구나 북한이 핵 개발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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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정부 세종로청사에서 열린 국무총리 취임식을 마친 김종필 국무총리가 신임 각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랫줄 김 총리 오른쪽이 강 전 장관. 사진=조선DB |
“JP가 중앙정보부 수장일 때 저는 분석관으로 그 밑에 있었으니까 잘 알고 지냈죠. 특이한 게 있었다면 노벨상 이야기가 있었는데 점심을 같이하게 되면 으레 ‘이 사람아, 대통령이 지금 노벨상 그거 중심으로 나가는 것 같아’ 그 얘기를 많이 했어요.”
― JP가요?
“그랬지, 왜 모르겠어요. JP가 정보통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1998년 하반기로 기억하는데 그때 북유럽 인사들을 많이 초청했거든요.”
― 2001년 발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DJ가 “북한은 핵 개발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런 얘기를 했다는데 들어봤는지요.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한 적은 없으니까, 저와 JP가 DJ 정부에 있을 때는 그런 얘기 없었어요.”
―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그런 말을 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했다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저는 정상회담 당시 북에 4억5000만 달러를 줬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을 오래 다뤄온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강인덕 장관은 북에 현금을 준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남북 대결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 계좌를 이용해 북에 송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랐다”고 말했다. 당시 6·15 정상회담 대가로 현금 4억5000만 달러를 북에 보낼 때는 현대그룹도 관련돼 있었다.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에 현대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등으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 문제는 강 장관이 통일부에 재임하던 시절에 이루어졌다.
‘북에 들어갈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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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 양호민 논설위원과 대담을 나누는 강인덕 당시 극동문제연구소장. 사진=조선DB |
“1986년 6월 재일동포 자산가인 손달원씨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북한 당시 노동당 비서 허담과 만나 금강산 관광 문제, 원산항 개방 문제, 제철소 건설 문제 등에 대해 합의했고 조총련계 기업인인 사쿠라 그룹 김진식씨가 북한에 자동차 수리공장과 신사복 위탁 생산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고 철수했다는 얘기 등을 들었죠. 모두 실패한 거죠. 현대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1989년 1월에 정 회장이 북한을 다녀온 직후부터 일본 지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죠.”
강인덕 장관이 말하는 일본 지인 중에는 당시 《아사히신문》 중견 기자였던 고바야시 씨도 있다. 강 장관은 통일부 장관 취임 후 얼마 안 돼 고바야시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고바야시는 《아사히신문》을 떠나 규슈 국제대학 교수로 있었다. 고바야시는 전화로 강 장관에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고바야시에 따르면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에서 북한과 중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신일본산업 사장인 요시다 다케시라는 사람이었어요. 저도 1990년대 초반 일본에 갔을 때 《아사히신문》 기자와 함께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고바야시와 통화한 후 정주영 회장을 만났습니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현대의 대북사업은 정몽헌 회장이 맡는다면서 금강산 관광사업을 위해 북측과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거예요. 저는 정 회장의 말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죠.”
― 북한의 속성을 가장 잘 아는 분이 실패를 예상할 수 있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예상외인데요.
“자유세계의 정보 등이 북한에 들어갈 구멍을 뚫는 거였죠. 이를 위해 북도 끌어들여야 하니까 남북 양쪽이 손해 보지 않고 위험하지 않은 방법은 금강산 관광사업이라고 판단했던 거죠. 그 사업을 정부가 나설 수는 없고 일반 기업이 나서는 게 좋다고 봤던 거였죠.”
― 당시 현대 말고도 대북사업에 관심이 있는 기업이나 단체가 있었는데요.
“그랬죠. 정주영 회장보다 먼저 대북사업에 뛰어든 게 통일교였습니다. 제가 현대에 금강산 관광사업 지원을 약속한 이후 통일교 박보희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왜 통일교가 대북사업을 먼저 시작했는데 현대한테 먼저 주느냐, 통일교가 대북 관련 사업들 전체를 하기로 김일성과 계약했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통일교를 미워하는 것 아니냐’ 이런 항의를 제게 하더군요.”
―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그렇지 않다. 정주영씨는 금강산을 배로 오가겠다고 했다. 비가 오거나 폭풍이 불어서 금강산 관광 갔던 사람이 남으로 올 수가 없다면 배에서 재울 수 있지만 통일교는 할 수 없지 않으냐. 당신네들은 그저 관광만 하겠다는 거지 아무런 준비가 없다. 현대는 그런 준비를 했기 때문에 먼저 준 거다’고 했지요.”
― 우리 남한이야 일반 기업이 참여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북한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관광사업에서도 얼마든지 자신들 내키는 대로 약속을 뒤집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처음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할 때 북한 땅에 건물 같은 것을 짓는 것은 반대했어요. 그래서 숙박이 가능한 배를 생각했던 거고요. 북한 땅에 무엇인가를 짓거나 설치하면 유사시에 출입은 물론 통신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이니셔티브를 북에 뺏기게 돼요. 이런 걸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했던 거죠.”
“금강산 관광은 김정일의 돈벌이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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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국회에서 열린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쓸데없는 짓이었죠. 개성공단을 보세요. 지금 어떻게 됐나요?”
― 북한은 왜 금강산 관광을 허용했을까요.
“북쪽의 대남 전략은 공작을 계속하면서 남한 내에 통일혁명당 같은 지하조직을 계속 만들면서 한쪽에서는 핵 무력을 발전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김정일로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현찰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돈벌이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을 허용한 거라고 봅니다. 정상회담 때 북에 보낸 현금 4억5000만 달러도 그런 용도로 쓰였을 거라고 봐요.”
― 현대도 당시 재무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랬죠. 현대건설도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있었고요. 당시는 IMF 상황 아니었습니까. 현대로서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권과 유착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당시 정부는 그런 상황을 이용한 거고요. 결국 정부의 요구와 기업의 요구가 일치한 거죠. 기업이 왜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기업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당연히 기업으로서는 운용자금 마련이 시급했던 거죠.”
― 훗날 대북 송금 특검 때 문제가 됐던 산업은행의 현대그룹 특혜 대출 시비 같은 게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 거군요?
“그럼요.”
김정일이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원했다고?
― 최근 《중앙일보》에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 게재되고 있는데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DJ에게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실렸습니다. 북한의 통일원칙 중 자주는 선대의 유훈이자 지금도 바뀌지 않는 원칙인데 김정일이 정말 그 말을 했다면 김정일이 여기서 말하는 주한미군이란 북한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일종의 평화유지군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김정일의 주한미군 주둔 이야기는 ‘미군의 역할을 바꿔달라. 휴전선 가운데 앉아서 양쪽의 균형을 잡아달라. 이렇게 되면 내가(김정일) 찬성할 수 있다’ 이런 뜻 아닐까요”
― 그러니까 평화유지군 수준.
“그렇죠.”
― 노회한 DJ가 김정일의 그런 속마음을 몰랐을까요.
“저는 알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국에서 평화 유지가 가능하다. 내가 이만큼 공헌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였겠죠. 그래야 노벨 평화상과 연결될 거 아닙니까. 저는 그때 암수술 하고 아산병원에 입원했을 때인데 그 말 듣고 깜짝 놀랐어요.”
― 《월간조선》 2005년 11월호에 실린 “통전부 요원의 폭로” 글을 보면 강인덕 장관의 해임은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묘사돼 있던데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웃음) 그 기사 읽었어요.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이 성공했다는 거죠. 국정원 해체 얘기도 있던데 역시 통일전선 전술이 먹혀들어가 문재인 정부 때 거의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 대공 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렇죠. 대공 수사를 경찰이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10여만이나 되는 경찰관의 사상 의식이 분명히 우리 헌법 규정에 맞도록 움직인다는 전제가 돼야 하거든요. 그게 되겠어요?”
― 북한 전문가로서 보시기에 대공 수사권은 다시 국정원이 가져야겠죠?
“당연하죠. 휴전선을 넘어오는 간첩이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간첩이 우회해서 들어오고 있다고 저는 봐요. 침투를 막기가 쉽지 않죠. 특히 지금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수십만 명을 해외로 내보내잖아요. 그중에는 외교관도 있고 각국 주재 상사원도 있죠. 그중에 남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북의 내부를 꿰뚫어 볼 수 있고 대남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해낼 수 있는 기관이 어디냐? 많은 해외정보 거점을 가진 국정원밖에 없어요.”
“대통령, 국정원 보고서 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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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국가안보자문단 오찬회의에 참석해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는 강인덕 전 장관. 사진=청와대 |
“그렇죠. 제가 책을 쓴 이유 중 하나예요. 중앙정보부에 있던 분석관들이 악마화되어 있죠. 프로급의 정보분석관을 만들어낸다는 것, 프로급의 공작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닙니다. 문서 등 중요한 첩보를 공작을 통해 빼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첩보가 애매모호할 때 이것을 정보로 만드는 분석 과정을 담당하는 분석관이 필요하거든요. 이 둘이 맞아야 된단 말이죠. 이걸 키워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노무현 정부 때 한국에 없었어요. 후배들이 제가 있는 도쿄까지 와서 말해주더군요. 대통령이 국정원에서 올리는 보고서를 보지도 않는다고. 하나의 보고서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드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비용과 시간을 들여 가짜 보고서를 만들겠어요? 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내용들이지.”
― 애써 만든 보고서들이 사장(死藏)된 거네요.
“그렇죠. 더 한심한 것은 국정원이 올린 보고서를 청와대 직원들이 다시 작성해서 올렸다는 거예요. 개인 주관에 따라 얼마나 왜곡이 됐겠어요. 우린 전문가들이 만든 보고서를 축약하고 축약해서 올린 건데.”
“北, 대공 수사권 이양 시 쾌재 불렀을 것”
― 노무현 대통령도 소위 운동권과 가깝다 보니 중정이나 국정원 등 우리 정보기관 사람들을 거의 악마화된 집단으로 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죠. 그건 그냥 거부한 게 아니라 사상·의식적으로 거부한 거예요. 주사파이기 때문이라고 봐요. 사상적인 공작 등 북한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봐요. 제가 장관을 그만둔 다음에 북한이 갈마 초대소에서 무슨 환영잔치를 했다고 하던데, 문재인 정부가 대공 수사권을 국정원에서 경찰로 넘긴다고 했을 때 북한 공작 부서는 이만큼 성과를 올렸다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죠.”
― 북한의 공작기관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북한의 경우 대남 공작기구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일합니다. 남북대화를 해본 사람은 다 느끼죠. 제가 남북대화에 참여할 때 맨 밑에 있던 친구가 지금은 맨 꼭대기에 올라와 있어요.”
DJ와 김정일의 6·15 남북정상회담은 강인덕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에 이루어졌다. 당시 강 장관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6·15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듣고 강 장관은 일본에 나와 있는 국정원 파견관을 통해 DJ에게 정상회담 전에 참고하라며 책 두 권을 보냈다. 《김정일의 민족관》이라는 책이었다.
― 책은 전달됐다고 합니까.
“글쎄 모르겠어요.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을 보냈는데. 그 책의 10장이 바로 통일 문제예요. 김정일의 통일관은 김일성 때와 달라진 게 없어요.”
― 김정일의 민족관은 어떤 겁니까.
“김일성이가 얘기했던 민족 대단결론이죠. 민족적 대단결론이 바로 통일전선입니다. ‘북쪽에서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끝내고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들어갔으니까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남한에서 하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건 단순히 통일전선 공작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남한에 대해서는 통일전선 공작, 대남 공작을 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된다’ 등이 골자죠.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던 당시를 생각하면 돼요. 소련군이 주둔해 있고 소련군의 힘에 의해서 공산당이 조직되고 공산 정권을 만든단 말이죠. 마찬가지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강력한 군사기지가 있고 이것이 언제나 뒷받침해주면서 남한에서 통일전선을 형성해라 하는 거죠. 이럴 때 남한에서 ‘북쪽에 엄청난 힘이 있구나, 아무리 우리가 뭘 해도 안 되겠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죠. 이럴 때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었어요.”
“국민 30~40%는 통일전선에 넘어갔을 것”
― 통일전선에 넘어간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은 5~6% 될까 말까 한다고 하는데 전 그렇게 안 봐요. 지금 거의 머리가 그쪽으로 간 사람이 30~40% 정도 될 거로 봐요. ‘지금 북쪽이 뭘 할 수 있어’ 하는 나이브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 확 퍼져 있잖아요. 북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데도 이걸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하고. 특히 한미훈련한다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민주당을 봐요. 이게 다 통일전선이 먹혀든 거죠. 말하자면 인지의 변화거든요.”
― 통일전선 전술은 결국 인지의 변화까지 다 포함되는 거네요.
“그럼요. 인지의 변화가 시작이자 기본이 되는 거죠. 인지의 변화가 있어야 물이 생기는 거지요. 물이 생겨야 고기가 놀 수 있으니까. 물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게 인지의 변화죠. 단순히 공작원의 공작으로 친북파가 됐다 하는 것만 통일전선으로 보면 안 되고 이런 인지의 변화를 만들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라는 고기가 놀 수 있는 물이 형성되면 이게 통일전선의 성공인 거죠.”
― 통일전선이 성공하고 있다고 봅니까.
“앞서 말한 대로 30~40%의 사람들에게는 먹혀들고 있죠. 그들이 공산당들이 놀 물이 되는 겁니다.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북쪽에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게 지금 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얘기하는 게 평화잖아요. ‘핵을 쏘게 되면 다 망하지 않느냐. 이걸 쓰지 않도록 우리가 북을 포용해보자’ 이런 주장 아닙니까. 이런 인식 자체가 통일전선의 결과입니다. ‘싸워야 된다’ 이게 아니거든요. 타협해야 한다고 움츠리는 거죠. 굴복하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통일전선의 결과가 되는 거예요.”
“남북 연방이건 연합이건 다 헛소리”
아흔이 넘은 나이를 잊은 강 장관의 열변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니까 반미(反美) 운동의 논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미국이 있어서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으냐, 워싱턴 선언이 더 위험을 초래하지 않느냐’ 하는 인식,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갖게 하는 것 자체가 통일전선의 성과라는 거죠. 그런데 이걸 자꾸 과소평가하는 게 더 문제예요. 이래가지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어요. 패망한 베트남이 그런 사례죠. 여기에 하나 더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사회의 부패가 심해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도 그럴 거라고 많은 국민이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대단히 나쁜 흐름입니다. 노동운동 자체가 자본을 적으로 본다면 이것도 잘못된 거고, 노사협조라는 것은 말로만 끝나지,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되겠어요? 시장 원리가 작동 안 할 거란 말이죠. 이런 환경 조성 전체가 소위 통일전선의 결과란 말입니다.”
― 만약 DJ가 장관께서 보내준 책을 봤다면 6·15선언 중 첫 번째 항목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는 그런 자주를 맨 앞에 내세우는 선언문은 안 나왔겠죠?
“자주 평화니 민족적 대단결이니 그 전제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했던 ‘어느 동맹보다 민족이 낫다’는 소리와 같은 얘기예요. 현 남북 관계 상황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저는 6·15 공동선언 서문에 나오는 낮은 단계 연방제 같은 거 다 헛소리라고 봐요. 그리고 무슨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든가 하는 소리도 그렇고요.”
― 국가연합과 낮은단계 연방제 가능한가요.
“말이 안 되는 거죠.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전혀 다른데 연합할 수 있냐고요. 연방이건 연합이건 되겠습니까? 이건 1960년에 김정일이가 썼다는 논문을 보면 알아요. 3국 통일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문이 있거든요. 신라, 고구려, 백제 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거죠. 39도선 이남만 합쳐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김정일은 조선 반도에 통일 국가는 고려가 처음이라고 해요. 조선 반도에서 고려가 처음으로 통일을 했다는 얘기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에요. 북쪽의 사람들이 통일을 하는 것이지 남쪽의 사람들이 통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통일은 북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남한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보라, 삼국통일 누가 했느냐, 고려가 하지 않았느냐’ 이런 논리로 역사 인식과 오늘의 현실을 연결시켜서 ‘통일은 우리가 하는 거다’ 하는 인식을 북한 동포들에게 심는 거죠. 이런 통일 인식을 가지고 우리와 대화하고 있는데 여기에 연방제 통일이니 그런 게 먹혀들어가겠어요? 게다가 지금은 핵까지 가지고 있는데.”
“DJ, 김정일은 서로 이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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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이 맞고 있다. 사진=조선DB |
“저는 DJ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6·15로 연결됐다고 봐요. 본인이 애당초 주장했던 3단계 통일이라든가 이런 연장선상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게는 DJ의 그런 인식이 나이브해 보여요. 북쪽에서는 DJ의 이런 인식을 이용해 자기들에게 필요한 핵 개발자금을 얻어낸 거죠. 역으로 이용한 거죠. 김정일로서는 참 잘 이용한 거죠. 남한 대통령의 사상, 인식을 역이용해 물질화한 거죠.”
― DJ도 노벨상을 위해 거꾸로 이용한 거 아닌가요?
“글쎄 양쪽이 다 이용한 거죠.(웃음) 상호 간에 이익이 맞으니까 성사됐을 거 아닙니까.”
― 그런데 그건 개인의 이익이지, 민족 전체의 이익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통일론이 있습니다. 통일을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보자는 이야기들인데 지금의 북한을 순수하게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있나요? 말이 같고 문화 인식이 같고 생활이 같아야 같은 민족인데 지금은 서로 많이 달라졌잖아요. 남한을 위협하는 핵을 가진 상황인데다가 평양어를 문화어로 만들었고 남한의 문화를 반동문화 취급하는 저 사람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있나요? 민족적 통일이 가능하려면 북쪽도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돌아와야 해요. 자유, 민주, 복지, 시장원리. 이런 것들이 일반적 가치인데 우리도 이런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북을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이걸 반대하는 반인간적인, 반가치적이고 세습적이며 반지성적인 봉건 왕조국가는 구분해야죠. 이런 의미에서 저는 북한을 보는 눈은 가치 공유라는 차원에서 국가적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적 관점에서 보자는 주장과 국가적 관점에서 보자는 주장 중 우리는 국가적 관점에서 통일을 봐야 한다고 봅니다.”
“문재인 정부 통일 방안이 가장 비현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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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성명을 보도한 1972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지면. |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통일 방안이라고 저는 봅니다.”
― 제일 비현실적 방안을 내놓은 정부는요.
“역시 노무현·문재인 정권 아닌가 싶습니다. YS(김영삼)·DJ 정부 시절에는 북쪽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핵을 개발하고 보유했다고 떠들던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북이 핵 보유를 문서화, 법제화까지 했잖아요. 노무현·문재인 정부를 비교하면 문재인 정부가 더 못했고. 북한이 핵을 만든 걸 뻔히 보면서도 김정은이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떠들고 다닌 정부니까요.”
― ‘7·4 남북공동성명’ ‘9·1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등 남북합의서나 공동선언 중 가장 잘된 선언이나 합의문은 어떤 겁니까.
“모두 그 당시 최근의 정세를 이용하는 거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최근에 나오는 선언이 가장 현실적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문재인 정부 때 4·19 판문점선언 같은 거는 잘못됐다고 봐요. 현실에 맞지 않아요. 희망과 현실은 다르단 말이죠.”
― 잘된 선언은 없나 봅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그중 잘된 거는 어떤 겁니까.
“상대적으로 보면 7·4 공동선언이 남북관계 선언의 기본을 만들었고 그걸 기본으로 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이 잘됐다고 봅니다. 저는 선언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안 지키면 그만이니까요. 북한이 전략 수행을 위한 전술적인 방법으로 남북 간에 대화도 한 거죠. 만약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이 잘됐다고 북이 핵을 포기했을까요. 안 하죠. 왜냐, 북쪽은 그 핵을 가지고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걸 포기할 수 없죠.”
남북정상회담 제의 거절한 朴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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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2월 청와대를 예방한 북한 부수상 박성철의 인사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조선DB |
“그때 정식으로 제안이 왔죠.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답니다. ‘2시간이면 냉면 먹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느냐, 뭐가 돼야 하지 않느냐. 적십자 회담이라도 뭐가 돼야 내가 갔다 오지’ 하셨답니다. 아마 박 대통령은 북쪽을 잘 아는 분이니까 그렇게 거절했던 것 같습니다.”
― 성과가 없는 정상회담은 안 하겠다는 뜻이었겠죠?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뵐 때마다 전략적인 차원이 우리와 다르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당신께서 뭘 많이 알고 있다는 게 아니라 전략적 차원이 달랐어요. 당신께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걸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정치·경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모두 합해서 본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른을 모시는 데 있어서 우리 생각이 얼마나 얕은지를 느끼곤 했어요.”
― 베트남이 3년 안에 패망한다는 박 대통령의 예견도 적중했다면서요.
“그럼요. 월남과 미국의 파리 회담 성사 직후에 그런 예측을 하셨죠.”
― 공산당의 속성을 잘 아신 거죠.
“북쪽과의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셨죠. 경제를 강조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고요. 선 경제 후 통일이라고 할까요.”
― 《남북 경제력 비교》를 중앙정보부에 계실 때인 1974년에 쓰셨죠. 책이 나온 시점 때문인지 보통 우리가 북한을 경제력으로 앞선 시점이 그 책이 나온 1974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관께서 분석해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미 1969년에 우리 GNP가 북에 두 배를 넘었다면서요?
“1969년에 우리 남한의 개인소득이 북을 한참 넘어섰죠. 우리 인구가 북의 두 배니까 경제력도 두 배 아닙니까.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 보고를 받으시면서 엄청 기뻐하셨죠. 하루빨리 경제력에서 북한을 앞서는 게 그분의 원(願)이었거든요.”
― 《남북한 경제력 비교》를 만드는 데 많은 인원이 들어갔다면서요?
“비교하고 분석하는 데 전문가를 포함해서 한 1000명 정도 투입됐습니다. 무척 공을 들인 책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닫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남북 경제력을 비교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북한이 생산하는 제품 같은 것들을 해외 우리 거점을 통해 입수해서 분석하고 그랬죠. 한 예로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북한 제품들 견본시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전시된 제품을 모두 사서 보내라고 했죠.”
― 북한의 생활 수준과 함께 기술 수준도 보려는 것이었군요.
“그렇죠. 북의 기술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기계류들도 많이 사 왔는데 그중에는 캄보디아에 있는 북한 이앙기도 있었어요. 그 이앙기를 들여와서 수리한 후 제가 강원도 평창에 있는 논 300평에 직접 모를 심어봤어요. 모의 절반이 물에 뜨는 겁니다. 북한의 농기계 생산 기술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죠. 다른 농기구들의 수준도 그런 식으로 파악했습니다. 심지어 1972년에 제가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남북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아이들 장난감에서 과자까지 다 사가지고 와서 분석했어요. 수집 가능한 모든 북한 제품들을 구해서 분석하면서 남북한 경제력 수준을 비교했던 겁니다.”
― 북한의 기술 수준이 우리보다 뛰어난 제품들도 있었겠죠?
“있었죠. 예를 들어 북한의 선반기계로 만든 제품을 입수했는데 수준이 상당해 보였어요. 그래서 독일 전문가한테 물어봤더니 독일 수준이라는 겁니다. 물에다 넣었다, 건졌다를 반복하면서 제품을 만들었다는 제작 공정까지 밝혀냈죠. 그러니 많은 인원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박 대통령은 그 책을 보시면서 남북 경제력 비교를 위해 들인 노력에 놀라시기도 하고 무척 기뻐하셨죠.”
문재인이 중국에 푸대접받는 이유
― 북한만을 놓고 한미(韓美) 정보력 비교를 하면 어디가 우위에 있습니까. 미 CIA 요원이었던 마이클 리는 북한 정보에 관해서 우리 남한보다 미 CIA가 더 앞선다고 하던데요.
“지금은 미국의 북한 정보력이 우리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이 촬영한 항공사진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았거든요. 건물 등 외부의 모습은 다 나오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잖아요. 결국 분석을 해야 하는데 사회적인 문화, 역사 이런 것이 동일할 때 분석, 판단하기가 쉽거든요. 그러니 그건 우리가 잘할 수밖에 없었죠.”
― 힘에는 힘으로 원칙이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다고 하셨는데 그럼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올바른 겁니까.
“공산주의자들은 폭력 지상주의자들 아닙니까. 힘 지상주의자들이거든요. 그들은 모든 것을 폭력으로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력이 없고 힘이 없으면 상대를 안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재인 정부 때의 중국이죠. 그때 중국이 우리한테 한 짓을 보라고요. 우리 힘이 완전히 빠졌다고 봤기 때문에 우리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혼밥’을 하게 하고 중국 경호원들이 문재인 방중을 취재하러 간 우리 기자를 폭행하고 그렇게 했던 거라고 전 봅니다.”
이어지는 강 장관의 말이다.
“만약 문재인 정권이 중국과의 교섭에 오늘날 윤석열 대통령이 하는 식으로 한미관계를 강화시켜가지고 중국에 들어갔다면 그렇게 푸대접은 안 했겠죠. 공산주의자들은 폭력과 힘을 우선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항할 것은 힘밖에 없어요. 힘에는 힘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이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에 대해 좋게 평가합니다.”
“우리도 핵 재처리 시절 가져야”
― 장관께서는 우리가 직접 핵무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인 것으로 아는데 윤 대통령의 이번 미국 방문 중 핵을 우리가 직접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핵 재처리 기술 확보 등 핵 생산 직전까지의 기술을 갖출 수 있는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저도 윤 대통령의 워싱턴 선언에 만족하지만 약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 그런 점입니다. 저는 앞으로라도 미국과 교섭할 때 우리도 핵 재처리 시설을 가져야겠다고 했으면 좋겠어요. 일본은 핵 재처리 시설을 통해서 플루토늄을 40톤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핵폭탄이 9000발 이상 나와요. 저는 우리도 핵 재처리 시설은 가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잘하는 건가요.
“저는 정상화됐다고 봐요. 윤석열 정부가 선택한 길이 맞아요.”
― 결국 북한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다시 대북 심리전을 해야 돼요. 지금 심리전만큼 중요한 작전이 없어요. 대북 전단과 방송은 우리의 강력한 비대칭 전략 자산이에요. 심리전은 지금 북쪽이 갖고 있는 핵에 대한 우리의 비대칭 전력입니다. 북쪽에 정세 변화를 인지시키는 환경 조성을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심리전밖에 없어요.”
― 북에 대한 전단 살포 금지 등은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김여정 하명법’으로 못 하게 한 것 아닙니까.
“바보 같은 짓이지. 말도 안 되지. 도대체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 낮추어야”
― 대북 정책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윤석열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윤석열 정부가 제가 앞서 말한 심리전을 재개하겠다고 했고 한미관계도 개선시켰는데 하나 염려스러운 것은 중국입니다. 중국에 대북제재에 동참 안 하면 페널티를 준다는 식의 압력을 넣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죠. 결국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어떻게 낮추느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의 대중국 정책, 대러시아 정책은 이미 결정됐다고 봐요. 대러시아 정책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이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겐 보배가 됐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 한국전쟁의 덕을 본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군사적 지원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책의 기본 방향을 빨리 정해야 해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대북 정책의 방향에서도 중요한 키가 되지 않나 싶어요.”
― 한미 간 한국에 대한 핵우산을 강화하는 워싱턴 선언이 나왔지만 국민들 중에는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본토를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우려를 가진 상태에서 북한이 핵 도발을 한다고 해서 북한을 향해 과연 핵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의문은 저한테도 있어요.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을 갖다 놨다고 해서 믿을 수가 있느냐, 쏘는 건 미국 대통령이 결정하는 거니까’ 하는 생각을 하죠. 그러나 여기까지 핵잠수함을 가져왔다는 자체는 대북 억제력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어요. 1단계, 2단계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핵우산과 관련해 미국을 도저히 못 믿겠다.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여론이 더 높아진다면 우리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에 한마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워싱턴 선언으로 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대해서 정부와 정부 간 1 대 1로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잖아요. 아직도 북한 핵 대응과 관련해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요구를 진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핵 정책을 진전시킬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펼 수 있는 단계는 생기지 않았습니까. 과거에는 그게 없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워싱턴 선언을 좋게 평가해야 되지 않느냐 보는 거죠.”
“북, 쉽게 무력 도발 못 할 것”
― 과거 미국이 1968년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1976년에 발생한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대처를 보면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에서 문제의 확산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물론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국의 미온적으로 보이는 대처는 베트남 전쟁을 수행 중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이제 미국의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 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봅니다. 북에서 ICBM을 정상 각도로 태평양 쪽으로 쏜다면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을 때 격추시키는 거예요.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본토로 날아오는 것으로 보고 격추시켰다는 명분을 만들 수 있거든요. 이걸 하느냐, 안 하느냐로 미국의 북한 핵 도발 억제 의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북한의 도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좌파 세력이 있습니다. 북한이 도발할까요?
“대내적으로 할 수 있는 도발은 하겠지만 대남 무력 공격 같은 것은 못 한다고 봅니다. 미사일 발사는 대내에서 하는 도발이죠. 대남 무력 공격 발생 시 우리 군은 선(先) 조치 후(後) 보고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에 즉각 대응에 나설 겁니다. 괜히 북한군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연평도 때보다도 몇 배 더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무력 도발은 못 할 겁니다.”
“북, 쉽게 안 무너져”

― 지금도 북한 정보를 분석하십니까.
“하죠. 중앙정보부 시절처럼은 아니지만 《로동신문》 등 북한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그걸 분석하면서 북한의 속내를 분석하죠. 공개 정보 분석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잡지 등에서 전선(電線) 사진을 보게 되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부릅니다. 그러면 그 전문가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정도의 전선 굵기면 여기에는 몇 킬로와트 정도의 전력을 이용할 거다. 어느 정도 크기의 선반을 쓸 거다. 그 전선이 들어가는 공장이 섬유를 만들면 생산량은 얼마일 거다’ 하는 게 다 나옵니다. 공개 정보가 그래서 아주 중요한 겁니다.”
― 북한이 붕괴할 것 같습니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북한에는 한 200만 정도의 권력 공동체가 있어요. 결혼 등 전략적으로 묶인 관계들이죠. 이들은 김정은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공동체가 평양입니다. 그들 때문에 쉽게 안 무너지지요.”
― 장기적으로는요.
“김정은 다음 대 정권에서는 가능할지 몰라요. 정권이 바뀌어야 핵을 포기할 겁니다. 주체사상이 없어질 때 유훈을 안 지켜도 될 때 이럴 때가 돼야 핵도 포기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일성계 정권 외 새로운 정권이 등장할 때는, 그것이 군부가 되든 뭐가 되든 북한 인민을 위한 정책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그것이 개혁과 개방이죠. 북이 개혁, 개방을 해야 통일이 앞당겨지는 겁니다.”
― 김정일 옹립 시기를 1970년대 초반인 73, 74년경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1980년대 넘어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요.
“1980년이 가장 정확하죠. 1974년에 김정일이가 등장한 다음에 업무가 인계되거든요. 후계자에게 최종적으로 인계되는 것이 혁명 공작, 즉 대남 공작이죠. 대체로 1976년 이후에 인계가 시작되거든요. 인계에 3~4년이 걸립니다. 인계 작업이 끝나고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본격 등장하죠. 그때부터는 김일성이가 뒤로 물러나면서 김정일을 앞세웠죠. 북한의 대남 공작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1976년 이후예요.”
“분석관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있어야”
―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남이냐, 김정은이냐를 놓고 남한에서 설왕설래할 때 처음부터 김정은으로 봤습니까.
“아니 김정은이라고 보지는 않았어요. 형 정철이가 있으니까요. 둘 가운데 하나라고는 봤죠.”
― 김정남은요.
“김정남이는 북한 밖에 있으니까 이미 아니라고 봤죠. 김평일의 예를 봐서 알 수 있듯이 밖에 있다가 내부로 들어올 수가 없단 말이죠. 더구나 김정남은 일본에 몰래 갔다가 들켜서 국제적으로 망신도 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아들을 데려다 후계자로 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봐서 정철이 아니면 정은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죠.”
― 현 시기에서 북한 정보분석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 문제예요, 이념의 문제죠. 자유민주주의 인식이 없는 사람은 우리 현실상 필요하지 않아요. 분석관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돼요. 정보란 새로운 지식이기도 해요. 누구보다 앞서가는 거죠. ‘새로운 지식을 내가 만들어내고 있다, 공부하고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분석관 생활을 하면 어렵지가 않아요.”
2시간30분 동안 기자는 아흔이 넘은 원로 북한 전문가의 사자후를 들었다. 그의 말이기에 울림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