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이야말로 韓流 퍼뜨린 元祖… 남한 악보 구해다가 파티 등에서 연주하게 해
⊙ 최고의 인기곡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는 통일 노래로 둔갑
⊙ 꽃제비들은 ‘최진사댁 셋째 딸’ ‘갑돌이와 갑순이’로 흥 돋운 후 홍수철의 ‘돈 때문에’ 부르며 동냥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 최고의 인기곡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는 통일 노래로 둔갑
⊙ 꽃제비들은 ‘최진사댁 셋째 딸’ ‘갑돌이와 갑순이’로 흥 돋운 후 홍수철의 ‘돈 때문에’ 부르며 동냥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 2018년 4월 3일 이선희와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김옥주가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 리허설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다. 사진=합동취재단
‘파리보다 파리채가 더 많다.’
북한의 한류(韓流) 이야기다. 주민들은 본다. 어떻게든 본다. 당국은 막는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막는다. 한류가 퍼지는 속도만큼 단속반도 늘어난다. 처벌 수위도 나날이 높아진다. 그래서 주민들은 109상무, 727상무, 114상무 등의 단속반을 이렇게 비꼰다.
왜 북한 당국이 필사적인가? 한류가 김씨 왕조의 절대 권력을 허물기 때문이다. 사소한 곳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다. 선물은 ‘수령님’만 하사(下賜)할 수 있다. 그런데 남쪽 영상물을 본 젊은것들이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신성모독(神聖冒瀆)이다. 남쪽 말투가 퍼지고, ‘자기야’ 등의 비사회주의(非社會主義) 용어가 돌아다니는 것도 신경 쓰인다.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9월 청년교양보장법으로 칼을 뽑았지만 한류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 ‘한류 유포 최대 사형, 한국 영상물 시청 최대 징역 15년’이라며 겁을 주고, 실제로 운동장에서 여러 명을 공개 처형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알려드린다. 북한 당국이 처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1970~80년대에 북한 전역에 한국 문화를 퍼뜨린 원흉(元兇)이 있다. 그이가 없었더라면 한류도 없었다. K-POP, K-드라마 이전에 원조 한류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류 열기는 그이가 깔아놓은 바탕 위에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콘텐츠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고 유통량이 급증했을 뿐이다.
‘노래의 형상화’
김정일은 문화 선전전(宣傳戰)의 위력을 간파했다. 대남(對南) 적화(赤化) 공작 사업의 수단으로 문화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총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한 편의 시, 한 곡의 노래가 적들의 폐부를 찌르고 인민들을 혁명의 길로 끌어낼 수 있다. 빨치산 때부터 실천적으로 검증된 것이다”라고 했다. 북한 예술인들이 기억하는 김정일의 명대사다.
김정일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노래로 적들의 심장을 찌르고,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남조선에서 대중화된 노래들을 긁어 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들도 목록에 넣었다. 조선중앙통신사 등 관련 부서들에 ‘남조선에 이러이러한 노래들이 있다는데 악보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특급 기밀자료인 악보는, ‘절대 보안’을 유지하며 악단으로 내려간다. 김정일 본인이 먼저 흥얼흥얼 부르지는 않았다. 자기 생일날이나 술 파티 때 연주를 시켰다. 이것을 ‘노래의 형상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조선 노래들이 어떻게 밖으로 새어 나오는가? 그때 연주하면서 녹음했던 테이프가 간부들의 손을 거쳐 평양 시민 사이로 흘러나왔다. 카세트테이프 복사본의 음질은 형편없었지만, 문화에 굶주린 인민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통일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북한에서 유행하는 한국 노래로 ‘그때 그 사람’ ‘사랑의 미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나온다. 1970~80년대를 통틀어, 북한 주민 모두가 즐겨 부른 최고의 남조선 노래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다. 가히 ‘민족 가요’ 수준의 애창곡이다. 영화 〈민족과 운명〉 시리즈 중 1992년 제작본 배경 음악으로 나와 널리 퍼졌다고 알려졌지만,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평양의 대학생들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으니까. 물론 공공장소가 아니라 집에서 불렀다. 영화 개봉 후 북한 전역에 선율이 널리 퍼지면서, 사실상 ‘불멸의 히트곡’이 되었다.
‘통일 가요’로 둔갑한 ‘사랑의 미로’
충성, 총칼, 수령 등의 가사 없이도 노래를 만들 수 있고, 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북한 주민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나가자’ ‘투쟁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을 써가며 그런 노래만 불러야 했던 북 주민들에게, 남쪽 노래는 스트레스를 풀고 흥을 돋우는 치료제였다.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이다. 칠보산 전자악단에서 이 노래를 편곡해 대남(對南) 공작방송(工作放送)할 때마다 불렀을 정도다. 칠보산 전자악단은 김정일의 개인 밴드로, 김정일 기쁨조의 시초다. 1970년대 노동당 선전부 직속으로 꾸렸다. 기악조 5명, 성악조 6명(남성 1명, 여성 5명) 등 총 11명이 구성원이다. 김정일은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꿨다. 원래 가사는 김정일만 부를 수 있었다. 김정일 이외의 모두는 1984년 설립,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윤이상연구소에서 발간한 《통일노래집》에 나온 가사대로 불러야 했다. 다른 사람이 원곡대로 부르면 바로 끌려갔다. 다음은 김정일이 원작자의 허락 없이 개작(改作)한 가사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자주(自主)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마무리가 ‘아득한 혁명의 미로여~’로 끝나는 판본도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도 1970년대부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다. 노래를 하면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어 집에서 아는 사람끼리 문을 딱 닫아놓고 합창을 했다. 밀정(密偵)이 안 들어오는 이상, 참석자들은 비밀을 잘 지켰다. 다음 노래 모임에 또 초대받기 위해서다.
목숨을 걸고 불렀던 노래도 있다. ‘당신은 모르실거야’의 작곡가 길옥윤이 만든 ‘서울의 찬가’다. 평양에서 울려 퍼진, 평안북도 영변 출신 작곡가가 만든 ‘서울의 찬가’!
꽃제비들의 애창곡
1990년대엔 ‘생계형 노래’도 유행했다. 꽃제비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역전에서 남조선 노래를 부르며 동냥을 빌었다. 흥겨우면서도 친숙한 민요풍의 노래 두 곡이 베스트 레퍼토리였다. ‘건넛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는데~’로 시작하는 ‘최진사댁 셋째 딸’과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로 시작하는 ‘갑돌이와 갑순이’다. 꽃제비들은 어깨춤을 추고, 가사 내용에 맞춰 촌극(寸劇) 비슷하게 공연도 하면서 구걸을 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1939년에 나온 신민요 ‘온돌야화’(김부해 편곡/이병한, 함석초 노래)를 개사, 편곡해서 만든 노래다. 올드팬들은 1965년 본 민요 전문 가수인 김세레나의 버전을 기억할 터이다. 수많은 가수가 부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필자는 나훈아·하춘화 듀엣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1972년에는 노래 가사대로 이야기를 꾸민 영화도 나왔고, 아직도 유치원 재롱잔치나 초등학교 운동회, 장터 등지에서 꾸준히 들리는 명곡이다. 북한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노래가 퍼지다 보니, 최 진사가 최 영감이 되기도 하고, 셋째 딸이 둘째 딸이 되기도 하고, ‘갑순이와 갑룡이’가 되기도 했다.
‘돈 때문에’
이 두 곡을 부르고 나서 꽃제비들은 강렬한 마무리 노래를 불렀다. 박인호 작사/작곡,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홍수환의 동생인 홍수철이 부른 ‘돈 때문에’(1983)다.
〈돈 때문에 속상하고 짠! 돈 때문에 기분 좋고 짠!
돈이란 짠! 무엇이길래 짠! 사람들 울리나 짠!짠!
돈 때문에 출세하고 짠! 돈 때문에 고생하고 짠!
돈이란 짠! 무엇이길래 짠! 사람을 유혹하나 짠!짠!〉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중세(中世)로 돌아간 것처럼 사정이 어려웠다. 먹을 것을 찾아 밤낮으로 산길을 걸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조선 시대 소금 장수와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을 헤맸다. 받을 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꿔준 사람을 찾아 나섰고, 보리쌀 한 홉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 장사 밑천을 동업자가 가지고 튄다. 내가 자는 사이에, 혹은 변소를 다녀오는 사이에 저지른 짓이다. 소문에, 그 ×이 돈을 갖고 혜산으로 튀었다는 말이 들린다. 그 ×을 잡아야 돈이 나오니 추적을 멈출 수 없다. 단천에서 양강도로 넘어간 후 갑산을 지나 혜산으로 들어가며 7일 동안을 걷는다. 산길을 무작정 걸어가며 부른 가사가 ‘돈이란 무엇이길래 사람을 울리나’다. 처음엔 연변 노래인 줄 알고 불렀지만, 나중엔 다들 남조선 노래라는 걸 알았다. 울분에 가득 차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불렀다. 어쩌면 이렇게 내 심정을 잘 알아주나, 하는 심정으로 목 놓아 불렀다. 원곡은 행진곡풍도 약간 느껴질 만큼 흥겨운데, 북한에서는 처절하게 불렀다고 한다.
‘5분 시청 후 15년 옥살이’
전 세계 언론에 의하면,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역사상 최악의 독재를 하고 있다. 끔찍하고 잔인한 처벌을 동반한 문화 탄압도 그 가운데 일부다. 세계적으로 유행한 〈오징어 게임〉 시청에 따른 처벌, ‘5분 시청 후 15년 옥살이’ 이야기는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다룬 바 있다. 북한 당국이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리즈를 시청한 20대 4명을 2021년 6월 3일 평안남도 평성시 경기장에서 공개 처형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남조선 드라마 속 대사나 행동을 따라 하면 엄중 처벌 대상이라고 겁을 줘도 북한 주민은 ‘용감하고 씩씩한 방송’을 보지 않는다. ‘용감하고 씩씩한 방송’은 조선중앙방송을 풍자하는 북한 주민들의 표현이다.
사정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누구 탓이냐. 한류를 북 전역에 퍼뜨린 작자다. 김정은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 작자를 원망해야 한다. 하기야 북 전역에서 한류를 금한다면, 예능까지 다 챙겨 본다는 김정은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류에 푹 빠진 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그래서 충고한다. 혼자만 몰래 보며 즐기지 말고, 북한 전역에 한류를 허(許)하라!⊙
북한의 한류(韓流) 이야기다. 주민들은 본다. 어떻게든 본다. 당국은 막는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막는다. 한류가 퍼지는 속도만큼 단속반도 늘어난다. 처벌 수위도 나날이 높아진다. 그래서 주민들은 109상무, 727상무, 114상무 등의 단속반을 이렇게 비꼰다.
왜 북한 당국이 필사적인가? 한류가 김씨 왕조의 절대 권력을 허물기 때문이다. 사소한 곳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다. 선물은 ‘수령님’만 하사(下賜)할 수 있다. 그런데 남쪽 영상물을 본 젊은것들이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신성모독(神聖冒瀆)이다. 남쪽 말투가 퍼지고, ‘자기야’ 등의 비사회주의(非社會主義) 용어가 돌아다니는 것도 신경 쓰인다.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 2021년 9월 청년교양보장법으로 칼을 뽑았지만 한류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 ‘한류 유포 최대 사형, 한국 영상물 시청 최대 징역 15년’이라며 겁을 주고, 실제로 운동장에서 여러 명을 공개 처형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알려드린다. 북한 당국이 처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1970~80년대에 북한 전역에 한국 문화를 퍼뜨린 원흉(元兇)이 있다. 그이가 없었더라면 한류도 없었다. K-POP, K-드라마 이전에 원조 한류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한류 열기는 그이가 깔아놓은 바탕 위에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콘텐츠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고 유통량이 급증했을 뿐이다.
‘노래의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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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영화 발전’을 위해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씨를 납치했던 김정일은 북한에 한류 열풍을 조장한 장본인이다. |
김정일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노래로 적들의 심장을 찌르고,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남조선에서 대중화된 노래들을 긁어 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들도 목록에 넣었다. 조선중앙통신사 등 관련 부서들에 ‘남조선에 이러이러한 노래들이 있다는데 악보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특급 기밀자료인 악보는, ‘절대 보안’을 유지하며 악단으로 내려간다. 김정일 본인이 먼저 흥얼흥얼 부르지는 않았다. 자기 생일날이나 술 파티 때 연주를 시켰다. 이것을 ‘노래의 형상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조선 노래들이 어떻게 밖으로 새어 나오는가? 그때 연주하면서 녹음했던 테이프가 간부들의 손을 거쳐 평양 시민 사이로 흘러나왔다. 카세트테이프 복사본의 음질은 형편없었지만, 문화에 굶주린 인민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통일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북한에서 유행하는 한국 노래로 ‘그때 그 사람’ ‘사랑의 미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나온다. 1970~80년대를 통틀어, 북한 주민 모두가 즐겨 부른 최고의 남조선 노래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다. 가히 ‘민족 가요’ 수준의 애창곡이다. 영화 〈민족과 운명〉 시리즈 중 1992년 제작본 배경 음악으로 나와 널리 퍼졌다고 알려졌지만,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평양의 대학생들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으니까. 물론 공공장소가 아니라 집에서 불렀다. 영화 개봉 후 북한 전역에 선율이 널리 퍼지면서, 사실상 ‘불멸의 히트곡’이 되었다.
‘통일 가요’로 둔갑한 ‘사랑의 미로’
충성, 총칼, 수령 등의 가사 없이도 노래를 만들 수 있고, 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북한 주민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나가자’ ‘투쟁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을 써가며 그런 노래만 불러야 했던 북 주민들에게, 남쪽 노래는 스트레스를 풀고 흥을 돋우는 치료제였다.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의 애창곡이다. 칠보산 전자악단에서 이 노래를 편곡해 대남(對南) 공작방송(工作放送)할 때마다 불렀을 정도다. 칠보산 전자악단은 김정일의 개인 밴드로, 김정일 기쁨조의 시초다. 1970년대 노동당 선전부 직속으로 꾸렸다. 기악조 5명, 성악조 6명(남성 1명, 여성 5명) 등 총 11명이 구성원이다. 김정일은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꿨다. 원래 가사는 김정일만 부를 수 있었다. 김정일 이외의 모두는 1984년 설립,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윤이상연구소에서 발간한 《통일노래집》에 나온 가사대로 불러야 했다. 다른 사람이 원곡대로 부르면 바로 끌려갔다. 다음은 김정일이 원작자의 허락 없이 개작(改作)한 가사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자주(自主) 위해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 그대 작은 가슴에/ 빛을 준 사랑이여/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마무리가 ‘아득한 혁명의 미로여~’로 끝나는 판본도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거야’도 1970년대부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다. 노래를 하면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어 집에서 아는 사람끼리 문을 딱 닫아놓고 합창을 했다. 밀정(密偵)이 안 들어오는 이상, 참석자들은 비밀을 잘 지켰다. 다음 노래 모임에 또 초대받기 위해서다.
목숨을 걸고 불렀던 노래도 있다. ‘당신은 모르실거야’의 작곡가 길옥윤이 만든 ‘서울의 찬가’다. 평양에서 울려 퍼진, 평안북도 영변 출신 작곡가가 만든 ‘서울의 찬가’!
꽃제비들의 애창곡
1990년대엔 ‘생계형 노래’도 유행했다. 꽃제비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역전에서 남조선 노래를 부르며 동냥을 빌었다. 흥겨우면서도 친숙한 민요풍의 노래 두 곡이 베스트 레퍼토리였다. ‘건넛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는데~’로 시작하는 ‘최진사댁 셋째 딸’과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로 시작하는 ‘갑돌이와 갑순이’다. 꽃제비들은 어깨춤을 추고, 가사 내용에 맞춰 촌극(寸劇) 비슷하게 공연도 하면서 구걸을 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1939년에 나온 신민요 ‘온돌야화’(김부해 편곡/이병한, 함석초 노래)를 개사, 편곡해서 만든 노래다. 올드팬들은 1965년 본 민요 전문 가수인 김세레나의 버전을 기억할 터이다. 수많은 가수가 부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필자는 나훈아·하춘화 듀엣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1972년에는 노래 가사대로 이야기를 꾸민 영화도 나왔고, 아직도 유치원 재롱잔치나 초등학교 운동회, 장터 등지에서 꾸준히 들리는 명곡이다. 북한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노래가 퍼지다 보니, 최 진사가 최 영감이 되기도 하고, 셋째 딸이 둘째 딸이 되기도 하고, ‘갑순이와 갑룡이’가 되기도 했다.
‘돈 때문에’
이 두 곡을 부르고 나서 꽃제비들은 강렬한 마무리 노래를 불렀다. 박인호 작사/작곡,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홍수환의 동생인 홍수철이 부른 ‘돈 때문에’(1983)다.
〈돈 때문에 속상하고 짠! 돈 때문에 기분 좋고 짠!
돈이란 짠! 무엇이길래 짠! 사람들 울리나 짠!짠!
돈 때문에 출세하고 짠! 돈 때문에 고생하고 짠!
돈이란 짠! 무엇이길래 짠! 사람을 유혹하나 짠!짠!〉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중세(中世)로 돌아간 것처럼 사정이 어려웠다. 먹을 것을 찾아 밤낮으로 산길을 걸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조선 시대 소금 장수와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을 헤맸다. 받을 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꿔준 사람을 찾아 나섰고, 보리쌀 한 홉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 장사 밑천을 동업자가 가지고 튄다. 내가 자는 사이에, 혹은 변소를 다녀오는 사이에 저지른 짓이다. 소문에, 그 ×이 돈을 갖고 혜산으로 튀었다는 말이 들린다. 그 ×을 잡아야 돈이 나오니 추적을 멈출 수 없다. 단천에서 양강도로 넘어간 후 갑산을 지나 혜산으로 들어가며 7일 동안을 걷는다. 산길을 무작정 걸어가며 부른 가사가 ‘돈이란 무엇이길래 사람을 울리나’다. 처음엔 연변 노래인 줄 알고 불렀지만, 나중엔 다들 남조선 노래라는 걸 알았다. 울분에 가득 차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불렀다. 어쩌면 이렇게 내 심정을 잘 알아주나, 하는 심정으로 목 놓아 불렀다. 원곡은 행진곡풍도 약간 느껴질 만큼 흥겨운데, 북한에서는 처절하게 불렀다고 한다.
‘5분 시청 후 15년 옥살이’
전 세계 언론에 의하면,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역사상 최악의 독재를 하고 있다. 끔찍하고 잔인한 처벌을 동반한 문화 탄압도 그 가운데 일부다. 세계적으로 유행한 〈오징어 게임〉 시청에 따른 처벌, ‘5분 시청 후 15년 옥살이’ 이야기는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다룬 바 있다. 북한 당국이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리즈를 시청한 20대 4명을 2021년 6월 3일 평안남도 평성시 경기장에서 공개 처형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남조선 드라마 속 대사나 행동을 따라 하면 엄중 처벌 대상이라고 겁을 줘도 북한 주민은 ‘용감하고 씩씩한 방송’을 보지 않는다. ‘용감하고 씩씩한 방송’은 조선중앙방송을 풍자하는 북한 주민들의 표현이다.
사정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누구 탓이냐. 한류를 북 전역에 퍼뜨린 작자다. 김정은은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 작자를 원망해야 한다. 하기야 북 전역에서 한류를 금한다면, 예능까지 다 챙겨 본다는 김정은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류에 푹 빠진 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그래서 충고한다. 혼자만 몰래 보며 즐기지 말고, 북한 전역에 한류를 허(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