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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웜비어 對北 소송 재판 기록

웜비어 母, “북한보다 더한 악마는 없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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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연방법원 증거청문심리 속기록 원문 입수
눈물과 분노로 읽어야 할 오토 웜비어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록

⊙ 웜비어 父, “모든 사람이 북한에 굽실거리는 것 같았다”
⊙ 美 국무부, “북한의 ‘판돈’이 올라가니까, 아들 얘기는 절대 함구하라”
⊙ 조셉 윤 대표가 서명했다는 ‘입원비 청구서’의 내막은?
⊙ 웜비어의 자백 기자회견은 ‘나치의 쇼 재판’… 영상 속 그의 救護 신호
⊙ 1960년대부터 이어진 北의 인질극과 미사일 도발… 섬뜩한 ‘평행이론’
⊙ 美 재판부 놀라게 한 北의 비사법적 처벌, 살인 방식
⊙ 연방법원장 하월 판사, “이번 소송은 단순 재판 아닌, 대승적 목적 위해 필요”
지난해 12월 24일 워싱턴 DC 연방법원이 내린 웜비어 유족의 대북 소송 판결문. 북한은 이를 미국으로 다시 반송시켰다.
  
“자, 시간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지난 1월 2일 오토 웜비어(Otto Warmbier)가 구금되고 4일 뒤인 1월 6일, 북한에서 핵수소폭탄 실험 성공 발표를 했죠. 그로부터 2주 후 오토가 체포됐고, 북한은 열흘쯤 뒤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발사 1주쯤 뒤 오바마가 북한 제재법을 발효했고, 그 후 1주일 뒤 오토 자백 영상이 나왔죠. 3월 3일, 김정은은 핵선제 타격 위협을 가했고, 또 1주일 후 스커드미사일 두 발을 쐈습니다. 5일 후 오바마가 대북제재 행정 명령에 서명하고, 그 이후 오토가 15년 노동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보셨나요.”(재판장이 웜비어 부친에게 한 질문)
  앳된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증인석에 섰다. 법정에 선 건 생애 처음이라고 했다.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눈가는 불그스름했다. 변호인이 물었다.
 
  ― 북한에 갔던 오빠가 돌아온 날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공항으로 마중 가던 길, 그때 오빠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까.
 
  “코마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땐 ‘코마’라는 게 정확히 뭔지 몰랐어요. ‘잠든 상태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공항으로 가는 길이 참 행복했습니다. 이야기보따리가 가득 차 있었거든요. 오빠가 없는 동안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교정기도 뺐고, 인생의 첫 남자친구도 생겼고요. 무슨 얘기부터 할지… 들떠 있었습니다.”
 
  ― 도착 후 봤을 때 오빠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가까이 다가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울고, 신음하는… 태어나서 들은 것 중 가장 무서운 소리였어요. 누워 있는 오빠를 자세히 보니 심하게 망가져 있었어요. 머리는 삭발이고, 코에는 호스를 끼고 있고, 기저귀도 차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몸을 격하게 홱홱거렸어요. 북한에서 오빠처럼 옷 입은 사람을 보냈는데, 그건 오빠가 아니었어요. 한마디로 괴물… 같았습니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오빠, 사랑해! 사랑해!’ 하면서 저도 모르게 뛰쳐나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책감이 들어요.”
 
  〈― 오토 웜비어의 동생, 그레타 웜비어(Greta Warmbier)의 증언 中〉
 
 
오토의 아버지 프레드릭 웜비어와 어머니 신시아 웜비어가 2017년 6월 22일(현지 시각) 장례식장인 신시내티 와이오밍고등학교에서 아들의 관이 영구차로 옮겨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오는 6월 19일은 오토 웜비어의 사망 2주기다. 《월간조선》에서는 지난 3월부터 오토의 아버지인 프레드릭 웜비어(Frederick Warmbier), 그의 측근인 A씨와 몇 차례 접촉을 했다. 인터뷰 요청을 위해서였다. 유족 측은 “좋은 제안이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대신, 지난해 12월 19일 진행된 ‘증거청문심리’의 속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웜비어 유족은 2018년 4월에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8개월간의 소송 끝에 지난해 12월 24일 워싱턴DC 연방법원은 “북한은 웜비어 유족에게 5억113만4683달러(약 590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증거청문심리는 이 같은 판결의 결정적인 판단 근거가 된, 사실상 최종 재판 기록이다. 실제로 판결문을 살펴보면, 이 심리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날 증언자로는 오토의 부모와 동생 2명, 데이비드 호크(David Hawk) 북한인권위원회 위원과 한반도전문가인 이성윤 미 터프츠대학 교수까지 총 5명이 참석했다.
 
  4시간30분 동안 이어진 심리는 당초 인터뷰를 통해 묻고 싶었던 내용을 대부분 담고 있다. 오토와의 추억, 가족들이 보낸 인고의 시간, 아들을 데려오기 위한 고군분투, 그 과정에서 겪은 미 국무부와의 갈등, 북한 정권에 대한 강한 분노 등이 생생하게 들어 있다. 또한 오토 웜비어 구금에 대한 북한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근거들도 세세하게 제시된다. 그간 언론에 알려진 내용 이면(裏面)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호크 위원과 이성윤 교수는 북한 인권 탄압의 실상과 북한의 교활한 인질 전략을 상세히 증언했다. 이를 통해 최근 자행된 북한 미사일 도발의 숨은 속셈과 미북 외교관계의 민낯까지 엿볼 수 있다.
 
  속기록은 A4 용지 기준, 약 100페이지 분량에 달한다. 원문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다 보니 번역체 느낌이 다소 날 수도 있다. 중의적이거나 다소 모호한 단어는 괄호에 함께 게재한다.
 
  2018년 12월 19일 오전 9시2분, 워싱턴DC 연방법원 22A호. 연방법원장인 베릴 하월(Beryl A. Howell) 판사, 맥과이어우즈 로펌의 벤저민 해치(Benjamin Hatch), 리처드 컬런(Richard Cullen), 에밀리 레베카 갠트(Emily Rebecca Gantt) 변호사가 착석했다. 심리는 해치 변호사의 오프닝 멘트로 시작됐다. 오토의 신상을 짧게 소개한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데 대한 보상적 손해배상과 북한이 또다시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함께 청구한다”며 재판의 목적을 밝혔다. 첫 증언자는 아버지 프레드릭 웜비어였다.
 
  ― 오토는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입니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착한 아들이었어요.”
 
  ― 오토가 북한을 여행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십시오.
 
  “고등학교 시절 오토는 ‘집돌이’에 가까웠습니다. 하루 5~6시간씩 공부만 하고, 밖에 나간다고 하면 축구를 하는 게 전부였어요. 대학교에 가면서 여행 기회가 많아졌죠. 이스라엘, 쿠바, 갈라파고스를 다녀왔고, 아내와 저는 다양한 경험은 좋은 거라고 했어요. 그 무렵 교수 중 하나가 ‘아들이 북한에 다녀왔는데 안전했다, 전문 여행사도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토는 그 이듬해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수업을 듣는 프로그램인 1월 학기(J-term) 참가를 앞두고 있었고, 그 전에 북한을 경험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여긴 것 같습니다.”
 
시간별 사건 기록
 
  오토 웜비어는 버지니아대학 경영학부에서 금융을 전공하던 학생이다. 21세이던 2015년 12월, 그는 미국의 북한 전문 여행사를 통해 평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단 5일 일정이었지만,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평양의 한 호텔에서 북한의 선전 포스터를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붙잡혔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비로소 미국 땅을 밟은 그는 혼수상태였고, 며칠 뒤 결국 사망했다.
 
  -2015년 12월 29일: 5일 일정으로 북한 여행 떠남
  -2016년 1월 2일: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 북한 공항에서 붙잡힘
  -2016년 1월 22일: ‘조선중앙통신’, 오토 웜비어 억류 사실 보도
  -2016년 2월 29일: 북, 오토 웜비어 기자회견 개최, 자백 영상 공개
  -2016년 3월 16일: 북 최고재판소, ‘국가전복음모죄’로 웜비어에게 15년 노동교화형 선고
  -2016년 7월 11일: 북, 미북의 유일한 소통 채널인 ‘뉴욕 채널’ 차단
  -2017년 6월 6일: 미 국무부, 유족에 웜비어 혼수상태 소식 전달
  -2017년 6월 13일: 오토 웜비어 미국으로 송환, ‘뉴욕 채널’ 재개
  -2017년 6월 19일: 오토 웜비어 사망
 
  악몽의 시작
 
2016년 2월 29일 오토의 평양 기자회견. 그는 “엄마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며 오열했다. 사진=뉴시스/신화
  ― 북한으로 간 후,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건 언제 알았습니까.
 
  “평양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 연락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1월 2일에는 전화가 왔어야 했죠. 처음엔 ‘비행기를 놓쳤겠지’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우리 부부는 다른 지방에 가 있어서 시차 계산에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 날 집에 도착하니 오전 11시더군요. 그때까지 연락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여행사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답장이 왔어요. ‘공항에서 오토가 잡혔는데, 뭔가 착오가 있던 것 같다. 여행사 대표가 함께 있으니까 괜찮을 거다. 다음 비행기로 바로 올 거다’라고요.”
 
  ― 그 후 며칠 동안은요.
 
  “걱정됐지만, 여행사 말을 믿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을 떠나는 비행기가 1주일에 세 편밖에 없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저 곧 출발하겠거니 생각했어요. 그러다 수요일이 됐습니다. 여행사에서 다시 연락이 와서 ‘여행사 대표는 중국으로 갔고, 오토는 현지에서 체포됐다’고 하더군요. 자기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면서. ‘지금부터는 국무부와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 아들이 북한에 혼자 남겨졌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어땠나요.
 
  “무서웠습니다. 잠시 뒤 국무부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오토가 북한에 감금된 걸 아느냐’면서, ‘혹시 평소 복용하는 약이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그 전화를 기점으로 악몽 같은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16년 1월 22일 오토 웜비어의 체포 사실을 알렸다. 신문은 “(오토가) 미국 정부의 묵인, 조종하에 조선의 일심단결의 기초를 허물어버릴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관광의 명목으로 입국해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감행하다가 적발돼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 북한의 보도 이후, 국무부와는 어떤 대화를 했습니까.
 
  “일찍이 국무부는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북한은 오토를 볼모로 뭔가 원할 거다. 지금 이 사실을 언론이나 대중에 알리면, 괜히 북한의 판돈만 올릴 거니까(raise the stakes) 당분간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두는 게 최선이다. 북한이 오토를 해칠 일은 없을 거고, 다 괜찮을 거다’라고요. 그렇게 20일을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84세인 제 부친이 ‘오토는 어디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거야’라고 묻곤 했는데, 그저 ‘학교에 갔다’고 말했습니다. 국무부 조언에 따라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국무부와는 매주 통화를 했고, 버지니아대학 측에서도 여러 외교관을 소개시켜줬는데, 하나같이 이렇게 조언하더군요. ‘이건 북한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오토를 이용하고 있고, 그걸 손에 넣어야 비로소 끝날 것’이라고요. 아내와 저는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 2월 들어 상황은 더 악화됐죠. 북한 측이 ‘자백’ 기자회견을 했는데, 봤습니까.
 
  “저는…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그건 오토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조종당하고 있었어요. 나치의 쇼 재판처럼요. 강요당한 자백이고, 전적으로 날조된 영상이었습니다.”
 
  북한은 2016년 2월 29일, 오토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은 재판 형식으로 약 30분간 진행됐다. 그는 “양각도국제호텔 종업원구역에서 조선인민에게 자기 제도에 대한 애착심을 심어주는 정치적 구호를 떼버리는 일을 벌였다”며 “이 임무는 미국 우정연합감리교회로부터 받고 미 행정부의 묵인하에 이뤄졌다”고 말했다.
 
  오토는 북한을 언급할 때면 항상 ‘아름답고’ ‘친절한’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신비로운 공산국가라는 교육을 항상 받았다. 이는, 모험심이 많은 나와 같은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나라에서 용감한 행동을 해서, 조선에 대한 서방의 우세를 보여주고 싶은 천진한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오토는 이어 “2015년 9월에 친구 스테판 웨브, 그의 모친인 샤론 웨브와 저녁을 먹는데, 샤론 웨브가 ‘북한의 정치구호를 떼어오면 자신이 속한 우정연합감리교에 ‘전리품’으로 걸어놓고, 1만 달러 중고 승용차를 선물로 주겠다고 해서 범행을 감행했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이를 받아서 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고 했다.
 
  오토는 “북한에 와보니 정말 아름답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미 행정부와 정치가들은 우정연합감리교회를 이용해 추악한 방법으로 이러한 북한을 해치려 한다”면서 “내 범죄는 미 행정부의 반공화국 적대정책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우정연합감리교회 활동의 계획적인 산물”이라고 말했다.
 
  약 25분간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던 오토는 “보다시피 나는 완전히 건강하다. 몸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강조하다, “단, 하나 원하는 게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가족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엄마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동생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면서 결국 오열했다.
 
  ―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날조됐다는 건지 말씀해주세요.
 
  “영상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버지니아대학교에 있을 때 이미 거리 표지판을 훔치는 연습을 했고, 이를 (기숙사) 침대 밑에 뒀다고요. 오토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침대 밑을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정연합감리교회? 오토는 유대인입니다. 영상에 언급된 친구 스테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다만 스테판이 일전에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언젠가 고난에 처하면 내 이름을 써도 된다’고요. 오토의 자백은 김씨 일가와 북한 정권의 이익을 위해 꾸며진 완전한 조작이었어요.”
 
  ― 말할 때 손 동작이나 외관은 어땠습니까.
 
  “오토는 영상에서 ‘건강하다’고 강조했지만,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학대당하고 있다는 것을요. 아내와 나는 ‘저들이 오토를 죽이려 한다’는 걸 직감했어요. 영상 속 오토도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굳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무부와의 갈등
 
2016년 6월 22일, 오토의 장례식장에는 그의 생전 사진과 북한에서 재판받을 때 입었던 옷, 북한에서 사용한 여권·지갑·계산기 등 유품이 전시됐다. 사진=조선DB
  아들이 이역만리 땅에 감금돼 있는데, 소식을 들을 길은 없었다. 반갑게도 국무부에서 ‘편지를 쓰면 된다’고 알려줬다. 북한 억류자였던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도 편지로 소통했다면서. 그날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썼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은 절대로 쓰지 말라’는 국무부 조언에 따라 그저 ‘사랑한다. 보고싶다’는 말로만 채웠다. 혹시 심심할까 봐 소포로 책을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2016년 6월, 국무부가 프레드릭에게 “‘북한이 오토가 이제 전쟁포로(Prisoner of War)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서신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국무부에 ‘그게 무슨 의미냐’고 했더니 “우리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알려왔다. 프레드릭은 “이제 이 문제를 오롯이 홀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기분이었다”면서 “온몸이 무감각해졌고, 실낱같은 희망마저 잃은 듯했다”고 말했다.
 
  이때 북한은 지속적으로 ‘제재 철회’를 요구하던 중이었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북한은 미북 간 유일한 채널이던 ‘뉴욕 채널’을 차단한다고 밝혔다. 2016년 7월 11일, ‘조선중앙통신’은 “미국이 ‘김정은 제재 철회’를 거부함에 따라 첫 대응 조치로 조미 사이에 유일하게 존재해온 공식 접촉통로인 뉴욕 조미접촉통로를 완전히 차단한다”고 보도했다.
 
  ― 이 사실을 ‘대중에게, 심지어 친구나 가족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요. 이런 함구령이 생활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우리 가족에겐 도전의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한 이웃이 와서 묻더군요. ‘아직까지 오토에게 소식이 없느냐’고요. 그런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만약 우리가 발설했다는 걸 북한이 알면 어떡하지 싶어서요. 그때부터 외출할 때 ‘아무도 오토의 안부를 묻지 않길’이라는 기도를 수반했습니다. 입을 꾹 닫은 채,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사건 초반에 웜비어 부부는 국무부의 실무자인 린다 맥퍼딘(Linda McFadyen)과 소통했다. 이후 로버트 킹(Robert R. King) 북한인권특사, 존 설리번(Jhon Sullivan) 부장관, 존 케리(John F. Kerry) 장관까지 만나 논의했다. 프레드릭은 “국무부를 통해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라고 했다. 외교관도 여럿 만났다. 그는 “스턴로프(Sternloff) 평양 주재 스웨덴대사에게 ‘오토 안부를 얼마나 자주 확인하느냐’고 했더니, ‘북한 심기를 건들고 싶지 않아서 1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한다’고 했다”면서 “모든 사람이 북한에 굽실거리는(kowtowing)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 재판장: 잠시만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제출된 증거자료를 보면 어쨌든 북한의 독재자는 대외적 이미지를 조금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인식이 계속 안 좋아질 텐데, 왜 그러는 걸까요.
 
  “글쎄요. 이렇게 해야 (협상) 금액을 더 올릴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은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으니까, 의사소통이 애초에 어렵기도 하고요. 당시 몇몇 억류자 가족들을 만났는데,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실질적 두려움이었어요. 지금이요?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선 거고요. 북한은 이미 우리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을 했어요. 겁쟁이(coward)들이나 하는 비겁한 방식으로요.”
 
  ― 자, 시간별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월 2일 오토가 구금되고 4일 뒤인 1월 6일, 북한에서 핵수소폭탄 실험 성공 발표를 했죠. 그로부터 2주 후 오토가 체포됐고, 북한은 열흘쯤 뒤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발사 1주쯤 뒤 오바마가 북한 제재법을 발효했고, 그 후 1주일 뒤 오토 자백 영상이 나왔죠. 3월 3일, 김정은은 핵선제 타격 위협을 가했고, 또 1주일 후 스커드미사일 두 발을 쐈습니다. 5일 후 오바마가 대북 제재 행정 명령에 서명하고, 그 이후 오토가 15년 노동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보셨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어요. 오토를 지켜주지 못했어요. 제가 지켜주지 못했고, 워싱턴이 그랬고, 세상이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절망적이었어요.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전화를 기다리는 것밖에…. 연신 미사일을 쏘는 그 사람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밖에요.”
 
  프레드릭은 “당시 우리 가족의 삶은 전화기 옆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국무부에서는 ‘오토에게 곧 전화가 올 것’이라고 줄곧 말했어요. 아내와 저는 매일 한밤중에도 깨어 있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북한에서 전화를 걸면 여기는 밤이니까요. 그렇게 밤새 오지도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 2017년 6월, 오토가 여행을 떠난 지 1년 반 만에 운명적인 전화를 받으셨죠.
 
  “조셉 윤 대표였습니다.”
 
  ― 조셉 윤은 새 행정부죠?(윤 대표는 2016년 10월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로 부임했다.)
 
  “네. 1월부터 접촉은 했습니다. 그는 누누이 이렇게 말했어요. ‘내 우선순위는 오토를 데려오는 것’이라고요. 좋은 말이죠. 워낙 여러 번 들은 터라, 더 이상 희망은 안 생기더군요. 그런 그가 6월의 어느 날 밤 10시에 전화를 했어요. ‘나쁜 소식이 있다. 오토가 지금 혼수상태다’라고 하더군요. 아… 인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 뒤섞이면서 미쳐가는 것 같았어요. 설리번 부장관이 수화기를 바꿔 들더니,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오토가 사실 2016년 이래로 쭉 혼수상태였다’고. 망연자실했어요.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더러운 제3국에서 내 아들이 1년 반 동안 혼수상태였다니…. 그건 죽은 거잖아요. 그들이 오토를 죽인 겁니다. 국무부에 말했어요. ‘아, 난 이제 당신네와 끝났다.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언론을 통하든지 하라’고요. 그랬더니 안 된대요. 북한이 그랬답니다. ‘언론에 오토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하면 영영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아들이 혼수상태인 걸 아는데도 ‘함구령’을 지키라는 요구는 계속됐다. 프레드릭은 “뇌사상태에 빠진 아들을 데리고 정치놀음을 하고 있다는 게 개탄스러웠다”고 했다.
 
 
  아들을 다시 본 순간
 
18개월 만에 돌아온 오토가 신시내티대학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전화를 받고 며칠 후인 6월 13일. 오토가 미국으로 송환됐다. 조셉 윤 대표가 6월 12일 의사 2명과 평양으로 가서 그를 데리고 왔다. 북한 측은 당시 오토의 상태에 대해 “노동을 통해 교화(reforming)되던 중, 식중독의 일종인 보툴리누스균에 감염됐고, 처방된 수면제를 복용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신시내티의 런킨공항. 이곳에서 아들을 1년 6개월 만에 만났다. 동네 주민들은 ‘집에 온 걸 환영해, 오토’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 힘들겠지만, 그 후 10분 동안의 상황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비행기에 오르는데, 엔진 소리에 섞여 짐승 소리 같은 게 나더군요. ‘설마 오토의 소리는 아니겠지’ 했습니다. 낯선 아이가 누워 있더군요. 고통으로 몸을 격하게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은 게 아니었어요.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더군요. 아무것도 가닿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 아무 교감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저와의 인간적인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놨어요. 눈앞에 있는 6피트2인치(188cm), 180파운드(81.6kg)의 아들은 그저 한 마리 동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북한이 그를 고기 조각 취급해놨어요. 그 와중에 눈에 띄었던 건, 버지니아대학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겁니다.”
 
  ― 북한에서 버지니아대학교 티셔츠를 입혀서 돌려보냈다고요.
 
  “네, 마치 ‘원상태 그대로 돌려보낸다’며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요.”
 
2017년 6월 15일, 신시내티대학병원의 캔터 박사가 오토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료진은 그의 뇌조직이 광범위하게 손상됐으며, 북한이 주장하는 보툴리누스균 감염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사진=AP/뉴시스
  그 후 오토는 신시내티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1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오토를 진료한 대니얼 캔터(Daniel Kanter) 박사는 “보툴리누스균 증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오토는 열이 4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산소포화도율도 80 아래를 맴돌았다. 캔터 박사는 “무엇보다 심각한 뇌 손상을 입어, 나아지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또한 오토의 아랫니 2개의 위치도 크게 바뀌어 있었다. 그가 북한에 가기 전, 진료를 담당했던 토드 윌리엄스(Todd Williams)와 머리 독(Murray Dock) 치과 박사들은 이를 보고 “강제적 힘(force)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소견서를 모두 참고했다. 하월 판사는 캔터 박사가 웜비어의 사인을 “뇌 혈액 공급이 5~20분간 중단되거나 크게 줄었기 때문”으로 결론지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와 더불어 로버트 콜린스(Robert Collins) 북한위원회 선임고문이 서면으로 제출한 “북한의 고문 방식인 물고문과 치아 꺾기 고문, 전기 고문은 호흡 중단을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함께 참작했다.
 
  ― 그리고 오토는 죽었나요.
 
  “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음… 제 아버지는 오토가 북한에 있던 2017년 4월에 돌아가셨거든요. 85세의 아버지 또한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수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래도 오토의 입원 기간보다 훨씬 길게 사셨습니다. 22세인 오토가 그만큼 아팠다는 거예요.”
 
 
  北 테러지원국 재지정의 배경
 
북한에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귀국해 일주일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 신시아와 프레드 릭 웜비어는 작년 5월 4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북한인권 관련 회의에서 북한을 강력히 비난했다. 사진=뉴시스/AP
  ― 그 후 북한에서 오토에 대한 어떤 언급이 있었나요. 사과나 유감의 표현 같은 거요.
 
  “전혀요.”
 
  ― 죽기 전, 오토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셨다고요.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들과 맞서겠다고 했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모든 것을 하겠다고. 그 후로 로펌을 고용했고, 이런저런 내용을 살펴보다가 놀랍게도 북한이 테러지원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충격이었어요.”
 
  북한은 KAL858기 폭파사건 직후인 1988년 이래 오랫동안 테러지원국이었다. 2008년 부시 정부에 ‘핵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해 명단에서 빠졌다. 미국법에 따르면 테러지원국일 경우에만 개인이 국가 대상으로 민·형사 소송을 할 수 있다. 웜비어 유족은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위해 팔방으로 뛰었다. 공화당, 민주당, 무소속 할 것 없이 찾아다녔다. 프레드릭은 “이들 모두 초당(超黨)적으로 지지해줬다”면서 “상·하원 의원, 주지사, 장관을 비롯해 수많은 지지자의 힘을 모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2017년 11월,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됐다. 이듬해 2018년 4월, 유족은 소송을 제기했다.
 
  ― 마지막으로, 오토가 없는 삶은 어떻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공허함입니다. 아무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뭐랄까… 여전히 저에겐 훌륭한 가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오토는 없는 거지요. 오토는 저에게 히어로였습니다. 나아지겠죠. 그럴 거예요. 오토가 너무 보고 싶네요. 언젠가 저도 오토 옆에 묻히겠죠. 그날을 생각하며 위안 삼습니다.”
 
 
  두 동생의 증언
 
오토는 3남매 중 장남이다. 4세 터울 동생 오스틴(왼쪽)과 6세 터울 동생 그레타(오른쪽). 사진=오토페이스북
  두 번째 증인은 오토의 여섯 살 터울 여동생인 그레타 웜비어. 오토는 그를 ‘공주님’이라 부르며 각별히 아꼈다. 오토가 구금됐을 당시 그는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다섯 살이었다. 오빠의 부재로 그는 힘든 사춘기를 겪었다고 한다.
 
  ― 특히 기억에 남는 오빠와의 일화가 있나요.
 
  “매일이 그렇습니다. 오빠가 항상 앉던 소파 자리가 있어요. 거기서 몇 시간씩 책을 보곤 했죠. 잠깐 자리를 뜨면, 저는 그 자리에 굳이 가서 앉곤 했습니다. 오빠가 돌아오면 곧 비켜야 할 걸 알면서도 그게 좋았어요. 쉬는 날, 오빤 항상 5마일(8km)씩 마라톤을 했어요. 저는 그렇게까지 뛰지 못하지만 항상 따라갔습니다. 오빠는 항상 모퉁이에서 고개를 쏙 빼고 제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곤 했어요. 그 사소한 시간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5학년 때 학교에서 합창단원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집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서 생활했는데, 향수병에 심하게 걸렸어요. 엄마, 아빠는 ‘넌 이겨낼 수 있어’라며 참으라고 했지만, 오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장 데리러 갈게.’ 물론 부모님이 허락하진 않겠지만,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위안이 됐어요. 남은 힘든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이요. 그런 오빠였습니다.”
 
  ― 오빠가 북한에 잡혀 있는 동안 어떤 일상을 보냈나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어요. 개학하고 학교에 갔는데, 아무 말도 못 하니까 말수가 적어졌고, 친구들이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도 고민 얘기를 못 했어요. 그저 모든 걸 혼자 감내해내야 했죠. 부모님의 걱정이 이미 너무 컸기 때문에, 저는 어떤 작은 일로도 염려를 끼쳐서는 안 됐고요. 그게 개인적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펐어요. 모든 걸 함께하는 가족이었는데 말이에요. 열다섯 살짜리가 겪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라, 더 빨리 성장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은 오전 10시29분부터 10시 41분까지 짧은 휴정 후 속개됐다. 세 번째 증언자는 네 살 터울의 남동생 오스틴 웜비어(Austin Warmbier)였다. 오하이오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형은 더 없이 완벽한 롤모델이었다”면서 오토를 추억했다. 그의 증언에서는 형의 부재로 맏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게 묻어났다.
 
  ― 비행기에서 형의 상태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 순간 가족들을 위해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을 위해서라도, 형에게 배운 대로, 이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헤어스타일 정말 최악이네’ 하고 첫마디를 건넸습니다.”
 
  오토가 병원에 입원한 약 1주일간, 실제로 오스틴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눈앞에서 박수를 쳐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형 옆에서 농담을 하고, 책을 읽어주고, 선글라스도 씌워줬다. 그리고 밤에는 옆에 누워서 잠을 잤다.
 
  ― 생화학 전공자의 눈에 비친 형의 상태는 어떠했나요.
 
  “아랫입술은 심하게 씹힌 듯했고 이는 완전히 재배열돼 있었고요, 발에는 큰 흉터가 있었어요. 힘줄이 위축돼 있어서 손을 잔뜩 끌어당긴 채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어요. 그 힘이 너무 세서 손이 상할까 봐 장갑을 낀 상태였고요. 다리도 자연스럽지 않은 각도로 심하게 휘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느낀 건 ‘죽음만이 형의 고통을 가져갈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그만큼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 형이 없는 세상은 당신의 여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형이 죽고 나서, 그의 빈 자리를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제 고등학교 졸업식에 없었듯, 대학 졸업식에도 형은 없겠지요. 훗날 제 아이들은 ‘오토’라는 삼촌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형이 없었다면 얻지 못할 것들을 많이 성취하며 살았습니다. 제 인생 자체를 훌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형은 제 여생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북한보다 더한 악마는 없다”
 
2017년 6월 25일, 주한 미국대사관 인근 오토를 추모하는 리본이 걸린 모습. 사진=조선DB
  가족 중 마지막 증언자는 오토의 엄마인 신시아 웜비어(Cynthia Warmbier)다.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갑상선암 선고를 받고 가진 첫아이라 더 애틋했다고 한다. 그는 오토에게 누누이 “넌 항상 기대 이상”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신시아는 “오토는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다른 아이였다. 아들이지만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오토가 북한에 가기 전 여름, 저와 함께 쿠바 여행을 했습니다. 제가 그해 1월 갑상선암 수술을 했던 터라 오토는 여행 내내 저를 보살피며 데리고 다녔어요. 자백 영상 마지막 부분에 울면서 ‘엄마에겐 제가 필요해요’라고 했는데, 그것만큼은 진심이었을 겁니다.”
 
  ― 고소를 결심한 배경이 뭡니까.
 
  “저는 투사(fighter)입니다. 악마를 보면 대항을 해야 해요. 그리고 북한보다 더한 악마는 없습니다.”
 
  ― 오토의 자백 기자회견 전, 사전 공지를 받았습니까.
 
  “국무부의 린다 맥퍼딘과 거의 매주 전화를 할 때였는데, 어느 날 그러더군요. 오늘 밤 오토가 전화할 거니까 꼭 받으라고요. 그리고 북한이 원하는 바를 얘기할 수도 있으니까 필기구도 준비해놓으라고요. 그날 한밤중에 전화가 오기에 한달음에 받았어요. 그런데 린다더군요. 곧 오토의 자백 기자회견이 나올 거라고 했습니다.”
 
  ― 영상을 보고 나서 뭘 했습니까.
 
  “침실로 가서 한참을 공처럼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 영상을 모두 봤습니까.
 
  “일부만요. 아들이 없는 동안, 상상을 많이 했어요. 오토는 지금 뭘 할까, 어떤 기분일까. 영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추운 옷을 입고, 이도 못 닦고 있겠지…. 그런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시간이었어요. 린다는 말하더군요. ‘와! 이런 자백은 처음 봤다. 취재진도 정말 많았고, 오토도 정말 잘 해냈다’고요.”
 
  ― 린다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간 북한에 억류됐던 다른 미국인과 비교한 말입니까.
 
  “케네스 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기자가 모였다고. 그러면서 ‘그만큼 오토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우리가 (오토를) 중요한 사람처럼 여기는 걸 들키면 안 된다. 그럴수록 더 큰 걸 요구할 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에서는 오토가 15년 노동교화형으로 교화되던 중 식중독균에 감염되었고, 수면제 처방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라 주장했다. 사진은 노동교화형 선고를 받은 날 오토 웜비어의 모습. 사진=AP/뉴시스
  ― 오토가 노동교화형 선고를 받은 후, 어떤 시간을 보냈습니까.
 
  “이웃들이 오토에 대해 묻고, 측은한 눈길을 보내며 안아주고요, 어떤 사람은 오토의 자백 영상 링크를 보내와 ‘이것 봤느냐’고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게 너무 질리고, 괴로웠어요. 아주 작은 마을이라 소문이 금방 나거든요. 간단한 생필품을 사는 데도 차를 타고 멀리 나갔습니다. 북한이 우리 가족 모두를 편집증에 걸리게 했어요.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했고요. 그러면서 할 수 있는 건 한국의 날씨를 확인하는 것, 한국은 지금 몇 시일까 보는 것뿐이었죠. 남편과 ‘오토는 긍정맨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치’ 이런 얘기를 하는 것뿐이었죠.”
 
  ― 오토가 북한으로 가고, 1년이 흐른 뒤에는 어땠습니까.
 
  “2017년 1월, 그때 조셉 윤 대표와 얘기를 했습니다. 그는 ‘국무부에 매우 화가 난 걸 안다’면서 운을 떼더군요. 그런데 그의 말을 듣는데, 자꾸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try to win us over)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느낌이었습니다. ‘북한으로 가서 오토 문제를 해결하거나 은퇴하겠다’는 걸 자신의 논점으로 삼으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믿다가, ‘우린 아직까지 오토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고, 그를 본 사람도 없고,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 이게 말이 되느냐. 당신도 결국 오토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윤 대표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1~2주 내로 필히 다시 연락하겠다, 약속드린다’고 말했습니다.”
 
  ― 그리고 2017년 6월에 오토가 코마 상태라는 소식을 들었죠.
 
  “네. 그리고 윤 대표가 그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을 만나러 갔어요. 북한은 윤 대표에게 3명은 보여줬는데, 오토는 끝까지 못 만나게 했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동안 혼수 상태인 줄 몰랐어요. 아마 며칠간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토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 대표가 서명한 종이의 진실
 
조셉 윤 전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오토를 데리고 오면서 입원비 청구서에 서명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사진=조선DB
  지난 4월 25일, 《워싱턴포스트》는 “윤 대표가 오토 웜비어를 데리러 갔을 당시, 북한에서 석방 조건으로 병원 치료비 명목 200만 달러(약 23억원)의 청구서를 제시했고, 윤 대표는 여기에 서명을 했다”고 보도해 논란이 일었다. 이후 4월 29일 윤 대표는 CNN에 “몸값 요구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히면서 “상관이던 틸러슨 전 장관에게 연락해 물어봤더니, 어서 서명하라는 답변을 했다”고 언급했다. 트럼프는 이에 “웜비어를 위해 한푼도 북한에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진실은 뭘까. 증언 내용을 조금 더 들어보자.
 
  ― 윤 대표가 오토를 데려왔던 당시 풍경을 설명해주세요.
 
  “비행기가 착륙했고, 윤 대표가 나오는데 울고 있더군요. 그땐 단지 상봉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오토를 보는 순간 왜 울었는지 알겠더군요. 오토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마치 포로수용소를 목격한 눈빛이었어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IVs(정맥주사 제형) 약물주사로 체중을 늘렸다고 하더군요. 그래 놓고 북한은 ‘건강한 상태로 돌려보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15개월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려보냈는데, 왜 집에 가서 급격히 안 좋아졌을까?’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거죠.”
 
  실제로 평양친선병원 원장은 2018년 10월 27일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웜비어를 직접 치료한 병원의 원장으로서 미국 내에서 웜비어의 사망과 관련해 진실이 완전히 왜곡되고 있는데 분격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웜비어 스스로 기자회견에서 인정한 것처럼 그가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감행한 범죄자이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성의껏 치료해줬다”고 말했다.
 
  ― 회복 가능성은 있어 보였습니까.
 
  “전혀요.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 말을 걸어봤습니까.
 
  “‘그곳에 같이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조금 더 일찍 데려오지 못해 미안하다’ 했더니 의사가 그런 말 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하래요. 그래서 ‘너 이제 집에 왔다, 너를 사랑한다, 이제 다 괜찮을 거야’ 이 말을 계속했어요. 마치 독백처럼.”
 
  ― 북한에서 오토 상태에 대해 한번이라도 설명해온 적이 있나요.
 
  “건강하다고 했죠. 윤 대표가 오토를 데리러 갔을 때, 어떤 종이에 서명을 했다고 했습니다. 오토를 정상인 상태에서 풀어준다는 내용이 담긴 종이라고 했어요. 서명을 하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나중에 윤 대표가 말하더군요. 서명했지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요.”
 
  ― 오토의 죽음 이후 특별히 어려운 점이 있다면요.
 
  “매 순간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희생자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요. 북한이 한 짓에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그들이 원하는 거거든요.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닫는 사람들에게 만행을 일삼죠. 우린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 제 발로 북한에 가지 않는 한 북한이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 재판부가 어떤 판결을 내려주기 바랍니까.
 
  “이 지구에는 악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북한의 이런 체제와 정권은 더 이상 두고 보면 안 됩니다. 자국민에게, 심지어 의붓형에게도 만행을 일삼는 곳입니다. 그저 경고만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요. 북한은 다르게 대해야 해요. 우리 모두는 ‘오토가 당신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밝히고 싶어요.”
 
 
  웜비어의 구금생활, 고문은 일상
 
지난 3월 제2차 미북회담 당시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오토 웜비어에 대해 들은 적 없다”고 했다. 사진=AP/뉴시스
  오토는 북한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네 번째 증인인 데이비드 호크 북한인권위원회 위원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북한에 억류된 김동식 목사의 재판 때도 증언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호크 위원은 2003년부터 북한 인권과 관련된 보고서를 썼는데, 그의 첫 보고서는 〈숨겨진 강제노동수용소〉(히든 굴라그)다. 이는 북한의 정치범수용 체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최초의 조사였다. 그는 우선 관리소, 교화소, 집결소 등 북한 수용소의 종류와 그 안에서 이뤄지는 비인간적 행태를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관리소’의 경우 흔히 정치범수용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범죄자, 잘못된 사상가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족, 최대 3대까지 수용된다는 것입니다. 수감자 인원이 10만명 정도로 아주 많은 게 그 이유죠. 이곳에 들어오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온 가족이 평생 강제노역을 하게 됩니다. 교화소는 형법에 따라 처벌하는 곳이고, 집결소는 본격적으로 수감되기 전 단계 심문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한 범죄에 있어 특이한 점은, 어디서도 범죄행위로 간주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도 죄를 자백하고, 구금생활을 합니다.”
 
  ― 미국법과 국제법에 따른 ‘고문’의 정의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들 시설에서 이러한 ‘고문’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네. 구금과 심문 초기, 집결소에서 특히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고문이 이뤄집니다. 만족할 만한 자백이 이뤄질 때까지요.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가고 나면, 강제노동으로 인한 생산 할당량을 못 채우거나 수용소 규정을 위반하면 주로 이뤄집니다. 굶주릴 정도로 식량 배급이 적다는 건 기본이고요. 전 수용소에 걸쳐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대우나 처벌이 행해져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조직적 고문은, 수용소에 가기 전 집결소에서 주로 행해집니다.”
 
  ― 그러니까 심문 단계에서는 고문이 일상적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겪어본 사람들 50명의 증언에 따르면… 네.”
 
  ― 재판장: 잠시만 끼어들게요. 미국에서는 범죄 혐의가 있어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이땐 정부가 증거를 제시해야 하죠. 북한은 범죄 절차에서 ‘자백’이라는 게 필수인가요? 그러니까 형사소추가 일반적으로 피고인의 자백으로 해결되는 겁니까.
 
  “네.”
 
  ― 재판장: 그런 시스템이 ‘왜 초기 구금과 심문에서 고문이 뒤따르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관리소’로 들어가는 북한 주민들은 특정 죄목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나와 내 가족이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건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알아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교화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개 자백과 관련돼 있습니다.”
 
  ― 재판장: 그렇다면 오토 웜비어는 후자의 과정을 겪었다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심문을 받았고, 북한은 자백을 원했죠. 만일 ‘미국 정부를 대표해 적대행위를 취했다’고 자백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계속 위협했을 겁니다.”
 
  ― 고문 방식은 어떤 게 있습니까. 신체에 물리적 흔적을 오래 남기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요.
 
  “초기 구금과 심문 기간 동안 쓰는 일반적인 방법 중 하나는, 손목을 묶어 천장에 매다는 겁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요. 이때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으면, 특별한 상처가 남지 않아요. 또 다른 흔한 방법은 다리를 많이 굽힌 스자세를 시킨 다음, 무릎 뒤에 쇠막대나 나무막대를 끼우고 유지시키게 하는 겁니다. 이 또한 굉장히 고통스러운 형벌이지만, 혈액순환이 너무 오래 멈춰 절단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흉터가 남지 않을 겁니다. 수용소에서는 아주 작은 상자에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세로 며칠 동안 가둬놓는 겁니다. 이 또한 아무런 외상이 남지 않죠. 물론 구타로 인해 이를 잃거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괜찮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는 처벌도 많이 자행됩니다.”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북한
 
  호크는 “이 시설 내에서 죽는 사람도 많다. 미국법에 따른 ‘불법적 살인’이 북한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 미 의회, 국무부, 유엔위원회 등은 북한의 인권 유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반인륜적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된 적도 있죠. 북한은 자신의 인권 유린을 인정합니까.
 
  “아니요. 수십 년 동안 단호히 부인해왔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은 항상 이렇게 판에 박힌 말을 합니다. ‘국민에게 헌신하고,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인 우리나라에서 인권 유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2014년 유엔 조사에서 전 세계 정부가 압도적으로 ‘북한의 이런 행위는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한다’고 입을 모았죠. 그러자 북한은 태세 전환을 합니다. ‘이게 다 적대적인 미국이 시작한 공갈협박(racket)’이라고요. 그때부터 이게 고정멘트가 됐습니다.”
 
  ― 북한은 ‘영사 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서명했죠. 그렇다면 오토와의 소통을 허용했어야 한 것 아닌가요.
 
  “협약에 따르면 외교관이 없고, 외교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은 국가는 다른 나라에 자국의 업무를 봐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권력지원(Supporting Power)’이라고 하죠. 그래서 오랫동안 평양에 있는 스웨덴대사에서 미국 문제를 돌봐왔죠. 협약은 (오토와 같은 상황 발생 시) 스웨덴 지원세력이 구금자와 접촉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웨덴 측은 단 한 차례만 접근할 수 있었어요. 북한이 이 협약에 따른 법적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면, 스웨덴 측은 오토와 좀 더 자주 접촉했을 거고, 오토의 건강상태를 제때 알았을 거고, 국제사회에서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오토의 운명은 달라졌겠지요.”
 
  ― 미국법에 따른 ‘인질극’의 정의를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인으로 인질극을 벌이기도 합니까.
 
  “그럼요. 1960년대 말, 미 해군 병사들이 북한 해역을 침범해 인질로 잡힌 적이 있었죠. 그들 또한 강제 자백을 했고, 결국 키신저와 닉슨이 사과를 했습니다. 물론 석방시키고 나서 사과는 철회했습니다. 굳이 옛날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10년 전쯤 두 명의 미국인 기자가 북한 국경을 건너다 인질로 잡혔죠. 고어 부통령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리포터였어요. 그때 미국에서는 ‘고어 부통령이 가서 구해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에서는 ‘부통령은 안 된다. 대통령이 와야 한다’고 했죠. 이런 사례는 너무 많죠. 가장 최근에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세 명을 데려왔고, 오바마 시절에는 미 정보부 수장이던 제임스 클래퍼가 가서 데려왔고요. 이런 식이에요.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고 미 고위층들이 평양으로 가곤 하죠.”
 
  ― 오토 또한 위 사례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까. 북한의 필요에 의해 억류됐다?
 
  “앞서 언급한 인질의 상황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 오토가 억류된 동안 북한은 미국과 교신했습니까.
 
  “제가 알기론, 아니요. 그때는 미국 정책에 따르면 ‘전략적 인내’의 시기였습니다. 북한과의 협상은 그 시점으로부터 몇 년 전 실패로 끝났고, 추가 협상은 없었죠. ‘뉴욕 채널’도 끊겼고요.”
 
  ― 그때 미국의 고위급 관리가 북한에 갔더라면, 양국 간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됐을 거라 봅니까.
 
  “이제까지의 패턴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 오토의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거죠. 재빨리 국외로 반출시켜야 한다고 결정한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죽어버리면 입장이 곤란해지니까요.”
 
  ― 북한이 국제적 명성에 신경을 쓴다는 겁니까.
 
  “그렇죠.”
 
  ― 북한이 오토의 비사법적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봅니까.
 
  “네.”
 
  ― 북한에서 오토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걸 인정하지 않는 게 놀랍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인정했으면 더 충격받았을 겁니다.”
 
 
  “北은 언제 봉투를 드밀어야 하는지 안다”
 
1968년 북한에 납치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사진=조선DB
  마지막 증인은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학 플레처스쿨 교수다. 플레처스쿨은 미국 최초의 국제법 및 외교학 전문대학원이다. 한반도 전문가인 이 교수는 이날 북한의 계산된 도발 정책과 전술의 구체적인 패턴에 대해 진술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웜비어 가족의 비극을 초월한 역사적·외교적 의미를 갖는다”면서 “어마어마한 사회적 파급 효과와 함축성도 지니고 있다”고 운을 뗐다.
 
  ― 북한의 사법부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북한에는 독립된 사법부가 없습니다. 얼핏 정상 국가처럼 보이지만, 운영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매우 독특한 곳이죠. 앞서 언급된 강요에 의한 자백은 북한 체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주효합니다.”
 
  ― 자백이라는 게 형법상 절차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서 중요하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간 있었던 자백의 패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푸에블로호 선원 인질 사건과 오토 웜비어 사건 사이에서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습니다. 1968년 1월부터 12월까지 선원 82명이 감금돼 고문당한 사건이죠. 선원들은 결국 ‘우리는 간첩죄를 범했다, 스파이가 되기 위해 영해를 침범했다’고 자백하고, 서명했습니다. 감금된 동안 이들은 머리를 씁니다. 예컨대 자백 내용에 의도적으로 ‘paean’이라는 단어를 써요. 이건 ‘pee on(오줌을 누다)’과 발음이 같은데, 의미는 ‘숭배한다’거든요.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 지도자와 체제를(에) 숭배한다(오줌을 눈다)’라고 읽곤 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사전을 찾아보고 만족했고요. 또 북한에서 선전물을 제작하기 위해 선원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일제히 중간 손가락을 든 포즈를 취하고, 북한 측에는 ‘하와이에서 이건 행운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원들은 미국에 지속적으로 ‘모든 걸 강요당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어요.”
 
  ― 오토의 영상에서도 그러한 신호를 봤습니까.
 
  “오토는 ‘북한’을 ‘DPRK’라고 하지 않고, 계속 ‘DPR코리아’라고 발음합니다. ‘미국 정부’는 ‘미 행정부(U.S. administration)’로 말하더군요. 이건 북한식 표기법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적대적 미국 정책’이라는 말을 씁니다. 북한의 고정 멘트죠. 또 ‘내 가장 조용한 부츠(my quietest boots)’라는 이상한 말도 했습니다.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는 데 의심이 없어요. 그 밖에도 모순이 너무 많습니다. 선전물을 떼오면 포상을 받기로 했는데 그걸 동생들의 학비로 쓰려고 했다는 말. 이건 한국인 정서거든요. 전통적으로 맏이가 동생을 부양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한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웜비어 가족이 재정적으로 어렵다고? 글쎄요.”
 
  ―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 선원들의 이중적 의미는 북한에서 끝까지 몰랐습니까.
 
  “불행하게도, 미국의 한 주간지가 숨겨진 메시지를 설명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그 후 승무원들은 훨씬 잔인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 북한의 인질 역사를 통틀어서 스스로 잘못을 시인한 적은 한 번도 없나요.
 
  “결코 없죠. 1987년 두 명의 북한 요원이 한국의 민간 항공기에 시한폭탄을 둔 사건이 있었습니다(KAL858기 폭파사건). 1988년, 북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이유죠. 조사 과정에서 요원은 이 모든 걸 김정일이 지시한 것이라고 자백했어요. 공작원이 직접 자백했는데도 북한은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그 전인 1983년 한국의 대통령이 버마 랑군을 방문한 때 폭탄테러가 있었습니다. 한국 고위 관리 17명과 버마인 4명이 사망했고, 북한 요원들은 직후 체포돼 자백했죠. 그때도 북한은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면서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죠. 이처럼 과거 북한의 거짓말, 전략적 기만, 부정 등은 오토 웜비어 사건에 이르기까지 꾸준합니다.”
 
 
  기념일에 맞춰 미사일 도발
 
  ― 재판부에 ‘북한은 전략적으로 시기 적절한 때에 대외관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인 포로를 이용한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하셨죠.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
 
  “호크가 잠깐 언급했듯, 2009년 3월에 미국 기자 두 명이 인질로 붙잡힌 적이 있습니다. 오바마 정부 초기였죠. 선거운동 당시 오바마는 이란, 북한 등의 독재자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여러 북한 전문가는 ‘분명히 북한은 그 말을 이용할 것’이라고 내다봤죠. 오바마 정부 들어서고 나니 북한이 보기에 경험 없는 대통령이 전례 없는 국제위기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고비용의 전쟁을 겪고 있거든요. 이때다 싶어 북한은 강경책을 펼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때의 북한은 매우 강경했습니다. 거기다 미국 시민 둘을 잡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안보우산’이 따로 없었던 셈이죠.
 
  그해 4월 5일. 오바마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이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핵 없는 세계’ 연설이 있던 날, 북한은 3년 만에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인 5월, 2차 핵실험을 하죠. 그날은 미국의 현충일인 5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또한 3년 만이었죠. 북한은 미국의 국경일뿐만 아니라 자기네의 기념일, 때때로 중국인의 국경일에도 이러한 도발을 합니다. 왜? 그 영향력이 더 크기 때문이죠. 주목을 끄는 건 물론이고, 대응 압박도 더 크게 느끼게 만들거든요. 그리고 3년의 공백을 둔 것도 이유가 있어요. 대개 일정한 공백 이후의 도발은, 더 큰 양보가 필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2009년 북한의 인질극은 애초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 밖에 이런 패턴은 많습니다. 2018년 5월 폼페이오 장관이 미국 시민 3명을 데리고 왔을 때, 2010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아이잘론 고메스를 데리고 왔을 때도 유사한 일이 있었죠. 1950~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어요. 1968년, 닉슨 행정부 초기던 4월 15일, 김일성의 57번째 생일에도 북한 제트기 공격이 있었죠. 미 해군 정찰기 한 대가 동해 북한 영공에서 북한 전투기에 격추당해 승무원 31명이 모두 숨졌습니다. 1968년 미국 상황이 어땠나요. 베트남전쟁에서 꼼짝 못 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두 번의 값비싼 전쟁을 벌여야 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죠. 군사력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보복할 가능성이 없겠다 싶었던 겁니다. 북한은 국제환경을 굉장히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언제 봉투를 들이밀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 북한의 도발은 인질극뿐만 아니라 핵폭발, 암살 같은 것도 포함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북한은 유명한 전·현직 미국 대통령이 자국민 석방을 위해 평양으로 왔을 때 적대행위를 취하는 것을 선전상의 승리라고 합니다.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북한은 합리적인 정권’이라는 것을 미국에 주입시키고, ‘미국은 더 많은 경제적·정치적 양보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죠. 생명을 담보로 아주 교활한 게임을 하는 겁니다.”
 
  ― 그렇다면 왜 굳이 재판을 여는 겁니까.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포로를 잡고 있는 거라면, 바로 협상에 들어가면 되지 왜 번거롭게 재판을 열고 자백하도록 합니까.
 
  “북한은 특이한 나라예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은 지상낙원이고, 노동자들의 천국이고, 모든 게 완벽해서 부러울 게 없다’고 말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고기능의 자유국가’라는 환상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거죠. 나라 자체가 가식인 겁니다. 보세요.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민주’라는 단어가 버젓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 명분을 위해서라도 보여주기식 재판이 필요한 거예요. 북한은 겉으로 정상 국가의 모습을 하려 합니다.”
 
  ― 북한이 향후 정책 목표를 위해 오토를 구금했다고 보십니까. 그 ‘정책 목표’는 오토 석방을 조건으로 미국이 명시적이나 암묵적인 조건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고요.
 
  “물론이죠. 오토가 구금된 게 2016년 1월 2일이죠. 2016년은 미국에서 선거의 해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3년간 핵 장치 실험을 하지 않고 있었고요. 오토가 억류된 지 나흘 뒤인 1월 6일. 북한은 핵 실험을 감행했죠. 그때가 언제냐. 김정은의 생일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뒤인 2월 7일,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하죠. 2월 18일에는 오바마가 북한 제재 및 정책 강화법에 서명합니다. 제재 법안은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됐죠. 3월 9일 김정은은 핵 선제타격은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며 위협을 가했죠. 뒤이어 스커드미사일을 발사하고 4월 24일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실험을 했습니다. 그 시점에 미국의 젊은 억류자를 둔다면, 북한에는 든든한 ‘안보담요’이자, 미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유용한 볼모(useful pawn)가 되는 겁니다. 그때만큼은 어떤 수단으로도 북한을 처벌할 수 없을 거고, 북한은 곡조를 살짝 바꾸면서 미국 측으로부터 더 큰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거죠.”
 
 
  “강한 제재만이 北 도발 멈출 것”
 
  ― 오토가 북한에서 고문 대상이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요.
 
  “신체적·정신적 압박과 학대를 이용해서 자백을 얻는 건 그곳에서 일상적인 심문 방법이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감히 말하자면, 북한 심문관들이 고문하지 않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어요.”
 
  ― 포로 스스로 자백한다고 해도 고문을 하고, 안 하면 반역이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고문은 북한의 주효한 국정운영 기술이니까요. 두루 쓰이고, 묵과되죠. 도덕적 거리낌도 없어요. 372페이지짜리 유엔 보고서 중 144~208페이지에 이 같은 내용이 그 증거와 함께 기술돼 있습니다. 시민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고 성별, 종교, 인종적 배경, 정치 등 다양한 집단에 대한 각종 탄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 제7장에서는 북한을 ‘공격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이고,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1990년대 후반 2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북한 기근이 인공적·강제적 기근이었다는 겁니다. 북한이 인간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런 그들에게 죄수를 고문하는 것은 표준적인 관행이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 건 반역이라는 겁니다.”
 
  ― 최근에 오토 웜비어와 관련해 (미국의 북한에 대한) 개인 규제가 있었습니까.
 
  “가장 최근으로는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2018년 12월 10일은 미국 인권선언 70주년이었습니다. 이를 기해 미국 정부(재무부)는 북한 고위관료 3명(최룡해 부위원장, 정경택 인민보안상, 박광호 노동당 부위원장 겸 선전선동부장)을 제재 명단에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오토 웜비어를 지정의 근거로 명시적 언급을 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의회나 행정부에 의한 제재 외에, 미국 연방법원에서 북한에 대한 보상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한 이전 사례들을 알고 있나요.
 
  “네. 김동식 목사의 경우 유족이 북한 측에 소송을 제기했고, 보상금과 징벌적 손해배상금으로 3억3000만 달러(약 3800억원) 판결을 받았습니다.”
 
  ― 여러 제재와 법원의 배상금 판결에도 북한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습니까.
 
  “계속됐습니다. 제 견해로는 미국이 민간인 학대, 인질과 납치, 무기 도발 등을 중단해야 한다는 강력한 억제책을 실시하지 않는 한 북한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혹은 천문학적 벌금을 부여한다든지요. 북한에 돈이 없다고요? 북한은 가난하지만 북한 정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핵무기를 만들 자금은 있는 나라입니다.”
 
  ― 북한이 오토 웜비어의 죽음으로 테러지원국에 재지정된 것과 관련해 입장을 드러낸 적이 있나요.
 
  “북한이 매우 당황했을 것으로 봅니다. 북한은 인권 침해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있을 때 매우 민감하게 행동하곤 합니다. 아마 오토 웜비어의 가족이 자기검열, 침묵에 빠지지 않고 실제로 북한을 고소할 용기를 냈다는 것에도 엄청 놀랐을 겁니다.”
 
  ― 재판장: 그렇다면 미국 법원이 내린 판결은 어떻습니까. 북한은 여기에도 주목합니까. 그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요.
 
  “재판장님, 우리에게 북한은 때때로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어쩔 땐 도전할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북한의 이야기는 종종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죠. 반면, 북한 입장에서 미국을 읽는다는 건, 생사의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북한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북한은 굉장히 교활합니다. 몇 대에 걸쳐 미국을 읽고, 미국의 의도, 정치적 환경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건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업무예요. 북한은, 미국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국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주목할 겁니다.”
 
  ― 재판장: 좋습니다.
 
  이때 시계는 오후 1시 36분을 가리켰다. 하월 판사는 심리 말미에 “미국 법정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제시된 증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서 “이 사건의 사법적 기록은 이성윤 교수의 말대로,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나아가, 대승적인 차원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웜비어 부부에게 큰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웜비어 유족 근황
 
리용호 북한 외무상. 워싱턴DC 연방법원은 지난 1월, 북한 측 수신인으로 리용호를 쓰고 판결문을 발송했지만 이내 반송됐다.
  5일 후인 2018년 12월 24일, 하월 판사는 심리 내용을 토대로 최종 판결문을 냈다. 하월 판사는 “오토에게 가해진 고문과 인질극, 비사법적 살인과 함께 웜비어의 가족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북한에 책임이 있다”며 5억113만4683달러(약 5900억원)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족 자산 가치에 대한 손실금으로 603만 달러(약 71억원)를 인정했으며, 오토에 대한 위자료와 유족의 위자료를 각각 1500만 달러(약 176억원)로 책정했다. 또 오토가 미국에 돌아온 후 발생한 9만6375달러(약 1억1360만원)의 의료비도 북한이 배상해야 할 금액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더해졌다. 과거 판례에 따라, 1인당 1억5000만 달러씩, 총 3억 달러를 인정했다.
 
  이 판결문은 지난 1월 16일 리용호 북한 외무상 앞으로 발송됐다. 2월 14일 최종 배송지에 도착했고, 김성원이라는 인물이 수신 확인란에 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약 열흘 뒤인 3월 6일, 이 우편물을 다시 미국으로 반송시켰다. 해치 변호사 등은 3월 26일, 판결문 이행 요청서를 법원에 제출했고, 4월 9일 법원은 이를 승인했다.
 
  한편 프레드릭 웜비어와 신시아 웜비어는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북한의 실상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신시아 웜비어는 지난 5월 3일 워싱턴 허드슨연구소에서 열린 납북자 행사에 참석해 “북한은 암이다. 제거해야 한다. 이들의 대화는 모두 가식이고,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그는 “북한에서 아들 치료비를 요구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내가) 직접 돈을 지불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어 지난 5월 10일 프레드릭 웜비어는 뉴욕 유엔본부에서 일본 정부 주최로 열린 납치 문제 관련 심포지엄에서 “김정은은 범죄자”라면서 “국제무대에서 그에게 ‘위원장’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지만, 실제론 ‘범죄자 김’으로 불러야 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5900억원 배상을 이행할까?
 
  웜비어 소송은 피고인 없이 이뤄졌다. 북한에 소장을 보냈지만, 무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궐석 재판’이었다. 피고인 없이 도출한 ‘징벌적 손해배상’. 일견 상징적 의미가 강해 보이는 판결인데, 북한은 이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미국법 전문가인 변진석 숙명여대 법대 교수에게 물어봤다.
 
  “실제로 이행해야 합니다. 징벌적이라고 해도 다른 배상과 법적인 강제성은 똑같아요. 물론 이번 판결은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북한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세상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경고의 메시지를 건네기 위해 높은 금액을 측정한 면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재판은 1심이었지만, 사실상 최종 재판이다. 2심을 가려면 북측에서 항소를 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항소 기간도 이미 도과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끝까지 배상을 안 할 경우 대응 방법은 있을까.
 
  “북한이 과연 배상을 할까요? 안 할 겁니다. 북한이 끝까지 안 갚으면 미국 사법부 차원에서 강제로 받아낼 재간은 없습니다. 미·북 간 사법 절차 이행에 관한 협약 같은 게 없으니까요. 다만, 미국은 이 배상액을 계속 가지고 갈 것으로 보입니다. 향후 국제정치 관계에서 일정 작용을 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미·북 간 협상이 있을 때 미국 측에서 이를 슬쩍 꺼낼 수도 있는 거고요.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일 향후 핵문제가 해결되고 미·북 간 관계가 정상화되면 일종의 ‘청산협정’을 맺을 수도 있겠죠. 거의 없겠지만, 미국 내 동결된 북한의 자산이 있다면 이걸로 상계처리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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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리시즈    (2019-06-20) 찬성 : 1   반대 : 0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민청학련 혹은 박종철 열사 등이 온갖 고문으로 죄를 뒤집어 쓰고 유명을 달리 했고 소위 민주화의 성과로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그와 똑같이 벌어진 웜비어 사건에 대해 지금 정권 잡은 좌파세럭들은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만만한 남한 정권에 대한 투쟁은 눈에 불을 켜고 하더만 핵을 가지고 위협하는 북쪽 독재정권에 대해선 일언반구 쪽도 못쓰고 비유만 맞추는 이 정권은 도대체 어디 나라 정권인가요?
유인태 선생님..뭐라고 말씀을 좀 해주세요. 적어도 양심있는 좌파 선생님.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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