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 조문단 파견으로 정상회담 무르익어
⊙ 원칙파, “식량으로 북한을 무릎 꿇려라”
⊙ 현인택, “성과 없는 정상회담 의미 없어”
⊙ 北, ‘식량 레버리지’에 ‘도발 레버리지’로 대응
⊙ 원칙파, “식량으로 북한을 무릎 꿇려라”
⊙ 현인택, “성과 없는 정상회담 의미 없어”
⊙ 北, ‘식량 레버리지’에 ‘도발 레버리지’로 대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2009년 10월 중순 당시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출국에 앞서 임 장관에게 “올해 안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도록 준비하라”는 지시와 함께 통일·안보 참모 회의를 통해 정리된 협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가이드라인에는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조건, 시기, 의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태희 전(前) 청와대 대통령실장은 1월 초순 서울시 회현동 연구실에서 기자를 만나 베일에 싸여 있었던 2009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에 얽힌 비화(話)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증언했다.
임 전 실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 협상에서 정상회담 개최 원칙을 협의하고 회담 의제 역시 정리했다”며 “회담 장소는 평양이었으며 회담을 마치고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포로를 데리고 귀국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또 남북은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의제에 올리기로 했다. 임 전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의제 정상회담 상정(上程)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핵 문제를 정상회담에 의제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습니다. 회담 의제가 되었다는 것은 해결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해결할 생각도 없이 왜 의제에 올리겠습니까. 북한은 협상 초반에 핵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리 역시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쉽게 만든다. 정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설사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협상용이지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습니다.”
이렇듯 2009년 이명박 정부 초기 남북관계는 돌파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2009년 말 정상회담은 무산됐고, 남북 정세는 급격히 냉각됐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 등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감도는 위험천만한 시기도 있었다. 북한의 도발은 전후 사정을 모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비칠 수 있다. 북한은 왜 2010년부터 끊임없이 도발했을까.
임 전 실장은 인터뷰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만일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北 조문단 파견으로 정상회담 무르익어
기자는 수개월간 물밑에서 이뤄진 이명박 정부의 공식·비공식 대북(對北)협상을 취재했다. 청와대, 국정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현직 관계자를 폭넓게 접촉해 현 정부의 대북협상 전 과정을 취재했다. 기자는 정부의 통일·외교정책 핵심 관계자들의 증언과 확보된 문건을 바탕으로 극비(極)리에 추진한 이명박 정부 5년의 대북협상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라인은 “북한을 무릎 꿇려야 한다”는 강경파와 “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하게 경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9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를 이해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며 출범했다. 새로운 정부는 전임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했는데 그것이 독일의 프라이카우프이다.
‘자유를 산다’는 뜻의 독일어 프라이카우프는 옛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을 말한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올 목적으로 현금과 현물을 동독 측에 제공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2009년 남북정상회담은 프라이카우프 원칙을 바탕으로 추진했다”며 협상내용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임 전 실장의 설명이다.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나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하루 후에 북에서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두 가지 요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조문단(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이 서울을 방문키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청와대 방문(대통령 면담)을 성사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문을 하고 말고는 북이 결정할 일로 첫 번째 요구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면담은 (정부 내에서) 반대가 있었습니다. ‘북한에 말려들 수 있고,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의 결단으로 북측 조문단이 청와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국내 체류기간에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2009년 싱가포르 협상 배경을 설명해 주세요.
“북조문단 서울 방문으로 대화통로가 열렸습니다. 그러다 2009년 9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에서 북한의 댐 방류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수공(水攻)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북한이 임진강에 누가 있는지 알고 댐 방류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측이 사과했습니다. 또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9월 26일 금강산에서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안에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라고 해서 싱가포르에서 김양건을 만났습니다.”
‘인도적 조치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 합의
—비선(線) 접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과 조율을 안 하고 갈 수 있었겠어요. 다 보고하고 (대통령이) 결심하고 싱가포르로 갔어요. 정부와 조율이 되지 않았다는 일부 주장이 있는데 다 틀린 이야기예요. 당시 정부는 정상회담에 대가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협상을 하되 대가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고민했어요. 그래서 프라이카우프 원칙에 따라 진행시켰습니다. 냉전시대 독일처럼 납북자, 국군포로 생사확인·서신교환, 이산가족 상봉, 한국전쟁 전몰자 유해 발굴, 고향방문을 정례화하되, 그것을 패키지로 쌀과 비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양해각서에 서명했나요.
“양측의 논의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북측이 초안을 가지고 왔어요. 읽어 보고 잘못된 부분을 가필(加筆)해 주고 이것이 내 의견이라고 사인으로 확인해 줬어요. 우리 측 의도 역시 명확히 해야 하잖아요. 북측 역시 돌아가서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밖에 못 했다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걸 안 해주면 나중에 연락이 되지 않죠. 이면합의를 했다거나 섣부르게 서명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안 해주면 창구가 없어지게 됩니다.”
—정상회담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나요.
“경제적 지원이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어요. 경제는 비즈니스이고, 인도적 지원은 그와 별도로 진행시키자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인도적 조치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프라이카우프 원칙 이외에 합의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국군포로 몇 명을 데려오기로 했어요. 일부에서는 ‘가족을 데려와야 한다’,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그러나 북한이 ‘이 사람 국군포로이니 데려가라’고 해서 우리가 그냥 데려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더군다나 가족이 있는 경우 남한에 가기 싫다고 하면 못 하는 것 아닙니까. 또 그 수를 10~20명으로 하자고 한다면 2009년 내에(두 달 안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는데 가능하지 않죠. 제 생각에 일단 ○명으로 적고(합의하고) 시작하는 단계이니 더 할 수 있는지 여부는 한번 알아보는 것이 낫겠다고 봤어요.”
파국의 시작 ‘옥수수 5만t 지원’
2009년 9월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던 남북관계는 10월 말부터 급속히 경색되었다. 남북관계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히 화해무드로 갔다가 대결상황으로 반전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 내의 대북 협상파와 원칙파의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갈등은 옥수수 5만t 지원 문제가 발단이 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옥수수 5만t 지원을 약속했다. 그해 12월 지원하기로 계획했던 옥수수 5만t은 국제 곡물가 급등과 물량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연기되었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유보됐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옥수수 5만t 지원을 대북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다만 전임 정부가 이미 약속한 지원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북한이 먼저 요청하면 지원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옥수수 지원 요구를 하지 않고 버텼다. 먼저 숙이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2009년 하반기 북한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매년 쌀과 비료를 각각 30만~40만t씩 지원했다. 액수로는 5억~6억 달러 규모였다. 그러나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식량지원을 중단했다. 그 결과 10년 가까이 남한의 식량지원에 의지해 버텨온 북한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통받았다.
2009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이 본격 추진되는 등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북한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에게 노무현 정부에서 약속한 옥수수 5만t 지원을 요청했다. 임 전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정부 내 회의를 통해 옥수수 5만t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진행과정에서 터졌다. 통일부가 북한에 ‘(5만t이 아닌) 1만t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당연히 5만t 지원을 예상했던 북한으로서는 충격이었다. 북측은 남측에 “1만t 현인택 집에나 가져다줘라”며 항의했다. 대북 강경파인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식량 레버리지(leverage·지렛대)전략을 쓴다고 본 것이다. 결국 옥수수 지원은 흐지부지 됐다.
북한 고위층은 간접적으로 임 전 실장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인민들 먹이려고 옥수수를 부탁했는데 주기로 해놓고 그럴 수 있느냐”고 섭섭함을 표시했다. 임 전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때부터 북한의 우리 측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3달 안에 북한 식량 바닥난다”
정부의 옥수수 지원 방침이 오락가락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라인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라져 있었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2010년 7월부터 대통령실장)이 온건 협상파라면, 현인택 통일부 장관(現 청와대 통일정책특별보좌관)은 강경 원칙파였다. 협상파는 주로 정치인 출신이었고, 원칙파는 외무(外務) 공무원과 교수 출신이 많았다. 협상파는 결과, 타협, 대화, 정치적 결단을 강조했으며 추진력이 강했다. 반면 원칙파는 결과 못지않게 절차와 형식을 중요시했으며 미국유학파가 많았다.
2009년 9월 말 추석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임 전 실장에게 북한의 옥수수 5만t을 요청할 즈음 강경파는 대통령에게 “북한의 식량이 3달 안에 바닥이 날 것”이라고 북한의 쌀 비축 상황을 진단, 보고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핵심 참모 A씨는 “북한이 3달 안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원칙파는 북한이 식량부족으로 코너에 몰린 당시를 개혁·개방으로 압박할 적기(適期)로 본 듯하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4년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의견도 이즈음 청와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망은 나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체적 데이터(자료)를 근거로 원칙파는 시간을 끌수록 남측에 유리하게 협상을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식량지원을 매개(媒介)로 북한을 압박하는 식량 레버리지 전략이 등장했다. 옥수수 5만t 지원 약속이 1만t으로 줄어든 것은 강경파의 이러한 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강경 원칙파에게 고무적인 북한의 반응이 나타났다. 북한이 옥수수 지원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음에도 정상회담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매달리는 모양새였다. 정부에 ‘북한이 식량이 급하긴 급하구나’, ‘이제 주도권을 잡았다’ 등 원칙파의 낙관론이 우세했다. 그러면서 점차 정부 내 기류도 강경 원칙파 쪽으로 기울었다.
대북접촉 중 돌연 방침 바뀌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010년 2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을 때 북핵문제가 언급되는 정도의 수준은 큰 의미가 없다”며 북핵문제 진전이라는 분명한 성과를 강조했다. 원칙파는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성과로 가져온 ‘북핵문제 정상회담 의제 상정’, ‘국군포로 약간명 송환’ 등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2009년 10월 중순 임 전 실장이 싱가포르 협상장으로 향하자, 원칙파는 대통령에게 ‘비선라인이 협상을 마무리하면 안 되고 통일부-통일전선부 공식라인을 통해 정상회담이 확정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들의 설득은 이명박 대통령을 움직였다. 임 전 실장은 “싱가포르에서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협상 도중에 서울에서 결론을 내리지 말고 통일부에 넘기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큰 원칙을 확인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와 통일전선부에서 다시 하고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우리(임태희-김양건)가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정문헌, “통일부가 더 누르려 했다”
2009년 11월 협상을 이어받은 통일부는 추가 협상을 통해 플러스알파를 얻으려 했다.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정문헌 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2012년 12월 말 강원도 속초 지역구 사무실에서 기자를 만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때 북의 손을 잡아줬어야 했는데 (통일부가) 더 누르려고 했어요. 통일부가 전임 정부처럼 비선라인으로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협상을 (임태희에서 통일부로) 넘겨줬어요. 거기서(통일부에서) 추가요구를 했어요. 안 그래도 되었는데, 무리하게(요구해서 정상회담을 못 했어요). 그때 남북관계를 풀었으면 참 좋았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핵 문제가 어젠다세팅(의제)이 됐어요. 대통령이 가서 비핵개방 이야기하면서 풀도록 되어 있었죠. 우리가 주는 것도 없었어요. 인도적 지원은 해야 되는 거였는데 (인도적 지원을 대가로) 납북자 문제도 해결되었어요. 임태희 장관 입장에서는 ‘(협상이) 다 되었고,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사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2009년 11월 7일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통통회담(통일부-통일전선부)으로 알려진 개성접촉은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북한은 통통회담이 싱가포르 합의를 형식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또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직접 개성에 올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회담에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국장을 보내 회담을 장관급에서 국장급으로 격하시켰다. 통일부는 북측에 추가조건도 제시했다. 회담 장소는 가능하면 서울로 하되 어렵다면 판문점도 가능하며, 국군포로 및 납북자 10명을 남한으로 송환하라는 조건이었다. 북한은 남한의 요구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했다.
대청해전으로 정상회담 破局
11월 10일 개성회담 3일 후,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대청도 동쪽에서 남한 해군과 북한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후에 교전은 대청해전으로 명명(命名)됐다.
11월 14일 개성에서 2차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이 열렸다. 통일부는 북한에 “우리는 할 말이 없다. 할 말 있으면 해라”고 말했다. 북측은 대답하지 않았다. 2009년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대청해전에 대해, 협상파는 “북한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추가조건을 제시해 북한 협상파(김양건 라인)를 압박했다”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한 협상파가 살기 위해 도발을 일으킨 것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원칙파는 “북한이 쌀, 비료의 선지원을 요구했고, 이면합의까지 요구해 협상이 결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측의 주장은 다르지만 북한은 개성회담을 거치면서 ‘이명박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 확실해 보인다.
2009년 11월 플러스알파를 자신하며 바통을 이어받은 통일부가 판 자체를 깨버리고 서해에서 교전까지 발생하는 등 남북관계는 점차 안갯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협상 결렬 보름 후 북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통일부 등 원칙파들에게 나름 할 말이 있게 만들었다.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기존화폐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전격 단행했다. 북한의 화폐개혁은 1992년 이후 17년 만이었다.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92년까지 5차례의 화폐개혁(화폐 교환 포함)을 단행했다. 북한은 체계 변혁이나 체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시행하곤 했다. 원칙파는 화폐개혁을 일련의 대북 압박을 통한 북한의 변화 신호로 이해했다. 반면 협상파는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던 북한이 지하자금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로 이를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는 입장이었다.
이즈음 이명박 대통령은 새로운 측근을 통해 북한과의 비선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화 국회 부의장, 이상득 전 의원, 이재오 의원 등이 중국 등에서 북한 측과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대통령과 상의 후 북한과 접촉을 시작한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공명심 때문에 (정부와 협의 없이) 남북비선 협상에 뛰어든 경우도 있었다.
춘궁기 오자 천안함 도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의 비선접촉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2009년 12월부터 주요 언론은 이들의 활동을 ‘여권 중진 A 베이징 접촉’ 등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보도는 인도적 목적으로 남북을 오가던 인사들이 북한에서 들은 내용을 기반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대부분 신빙성이 낮았다. 하지만 꾸준히 비선접촉 소식이 언론 등을 통해 전해지면서 ‘결국 돌파구가 마련되어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여의도 국회를 중심으로 퍼졌다.
청와대 역시 북한이 협상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다. 남북정상회담이 불발된 이후인 2009년 말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린다. 회의에서 협상파와 원칙파의 논쟁이 있었다.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 식량이 3개월 안에 바닥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3개월이 지나면 북한이 무릎 꿇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북한에 변화가 없어요.”(협상파 인사)
“춘궁기가 오면 달라집니다.”(원칙파 인사)
2010년 3월 춘궁기(봄)가 왔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천안함 피격 사건은 3월 26일 21시22분경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경계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 소속 천안함(PCC-772)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으로 침몰해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된 ‘국가 안보차원의 중대한 사태’이다.
충격적인 무력 도발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 내에서는 책임 소재를 놓고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협상파는 “예정대로 2009년에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으면 천안함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대화를 시작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수십 명의 청년이 전사한 마당에 북한과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체로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5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사건 관련 대국민 담화문(5·24 대북제재 조치)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대북 안보정책의 근간을 적극적 억제 원칙(proactive deterrence)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 안보정책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북한에 “천안함 침몰은 대한민국을 공격한 북한의 도발”이라며 “대한민국은 앞으로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극적 억제 원칙’을 견지할 것이다. 앞으로 (북한이)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의 안보태세를 방어 위주에서 사전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남북교류를 중단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통일·국방·외교부 등 관련 부처의 구체적인 제재 방안도 발표됐다. 통일부는 ▲북한 선박 한국 영해 운항 금지 ▲남북교역 중단 ▲한국인 방북 불허(개성공단-금강산 예외) ▲대북 신규투자 금지 ▲대북 지원 보류(영·유아 지원은 지속), 국방부는 ▲자위권 등 ‘적극적 억제’ 원칙 ▲PSI 해상 차단훈련 실시 ▲대북 심리전 6년 만에 재개 ▲한미 연합 대잠수함훈련 실시, 외교부는 ▲안보리에 천안함 사태 회부 ▲한미동맹 차원의 제재 협의 ▲국제기구에 대북 응징 촉구 ▲유엔 결의 1874, 1718호 엄격한 이행 추진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후 적극적 억제 원칙의 비현실성이 드러났다.
‘식량 레버리지’에 ‘도발 레버리지’로 대응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경 북한군은 황해남도 강령군 쌍교리 일대의 일명 개머리와 무도 해안포기지에서 연평도를 향해 곡사포 등 해안포 60여 발을 발사해 해병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포함 18명이 부상했다. 민가 21채가 불탔으며 10곳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이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가해 민간인이 부상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대통령은 당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을 방문해 “다시는 도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응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국민들은 “말로만 응징한다”고 정부를 비웃었다. 사실 정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연평도 포격 사건은 개성 통통회담이 무산된 지 정확히 1년 만에 발생했다. 2009년 11월 남측이 북측에 ‘식량 레버리지 전략’을 사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 수 있었다. 2010년 11월 북한은 남한에 ‘도발(挑發) 레버리지 전략’을 사용했다. 북한의 강경파는 “도발을 계속해야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얻을 것이 많아진다”고 판단했다.
연평도 사건 이후 청와대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대응카드가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폐쇄국가인 북한을 압박할 방법이 없었다. 군사적 대응은 불가능했다. 국지전(局地戰)이라도 벌어지면 외국인들이 한국주식을 팔고 떠나는 ‘셀 코리아(Sell KOREA)’가 우려됐다. 더 이상 북한이 남한의 식량지원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남한의 지원이 끊기자 북한 경제의 시스템이 변했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이후 북한은 사(私)경제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다. 그 결과 중국밀수 등을 통한 공식·비공식 무역이 늘어났다. 또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2009년 이후 중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다. 그 결과 식량사정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 현재 북한은 2012년 6·28 경제조치를 통해 경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6·28 경제조치는 ▲농민 생산량 일부 자유 거래 ▲집단농장 분조 축소 ▲기업의 독자적 생산·판매 결정 ▲국가기관·교육·의료 분야만 배급제 유지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B독트린 구상
청와대는 2010년 말부터 북측과 접촉을 다각도로 시도했다.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분위기 변화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경변화 때문이었다. MB는 기본적으로 공무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외무 공무원을 싫어했다. 현대건설 사장 시절의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MB는 과거 중동지역 건설현장에서 근무한 시절을 말할 때 “열사(熱砂)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외교관들은 에어컨 바람 쐬면서…”라며 외교관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2010년 9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딸을 5급으로 특채한 사건은 외교관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던 중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정원 등의 대북 관련 보고서와 예측이 잇달아 어긋나고 북한의 도발이 멈추지 않자, 이 대통령은 “차라리 내가 김정일을 직접 만나 해결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해 영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고민됐다. 임태희 전 실장은 MB독트린(외교노선) 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측 인사를 만나면 항상 6·15 (2000년 김대중 정부), 10·4(2007년 노무현 정부) 선언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NLL 등 서해 영해 문제에서 협상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측을 만나면 남북기본합의서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제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서해 NLL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과거 남북정상의 합의를 포괄하는 MB독트린을 발표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북한의 충격적인 대응으로 물거품이 됐다.
망신살 뻗친 정부
2011년 6월 1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의 문답에서 “남측이 ‘북측에서 볼 때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내놓자’고 하면서 우리 측에 ‘제발 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2011년 5월 9일 북한 개성에서 첫 접촉을 갖고 이어 14일경 베이징에서 추가 접촉을 갖는 등 최소 2차례 이상 비밀접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남북 비밀접촉에 나선 우리 정부 인사 3인의 실명과 직책까지 공개했다. 북한이 공개한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은 통일정책의 핵심 실무자들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남측이)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 비밀접촉을 주관하는 통일부 장관 현인택, 정보원장, 대통령실장, 그리고 파견된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북측도 꼭 비밀에 부쳐달라’고 거듭 간청했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중앙통신은 “남측이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나 이 문제를 결속하자, 그리고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시키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시간, 장소,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밝힌 것으로 봐서 북한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북한의 폭로가 가지는 의미이다. 사실 비밀회담을 폭로해서 북한이 얻을 이익은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망신을 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과거 같으면 최대한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했을 것이다. 북한의 폭로는 2009년 옥수수 5만t 사건부터 쌓인 앙금이 너무 깊어 남북관계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부는 더 이상 북한과 대화할 수도 할 여유도 없었다. 서서히 MB정부는 레임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MB 대북정책의 明暗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한 것인가. 원칙파에 속하는 천영우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은 1월 초 언론 인터뷰에서 “35년 동안의 외교관 생활 가운데 베스트를 꼽으라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한 평가는 남북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느냐로 하는 게 맞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5년간 추진해 온 대북정책이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고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어요. 그 과정에서 북한이 포용정책이나 햇볕정책의 금단현상 때문에 도발도 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대북정책이 잘못됐다고 하는 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유지 방법과 남북관계의 큰 틀이라든지 패러다임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기 위해서 지불한 비용치곤 좀 값비싼 대가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게 헛된 희생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유지 방법을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더 가깝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 천 수석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북한이) 남측에 돈 가져오라고 하면 주고, 북한은 그걸 조공으로 생각했다”며 “그 대가로 도발하지 않는 것을 큰 선심 쓰듯이 하는 그런 식의 남북관계였다”고 혹평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북한에 끌려다니던 대북관계를 정리하고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실용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는 점은 향후 업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일관된 철학 없이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해 원칙도 실리도 얻지 못했고, 그 결과 대북관계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당선자의 과제
이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1월 10일 서울 통의동 집무실에서 중국 정부 특사인 장즈쥔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국가의 안보 및 국민의 안위를 위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북한의) 추가적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이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포함해 대화와 협력의 창구를 열어두겠다”며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일관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원으로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당선자가 선거 기간에 발간한 공약집에 따르면, 당선자는 “불신과 대결을 넘어, 신뢰와 평화의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100% 대한민국의 완성”이라며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들기 위해,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여건을 조성함은 물론 대북정책을 진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남북한 간 북핵문제 해결 위한 실질적 협의 추진 ▲6자회담에 새로운 동력 주입 위해 노력 ▲한·미·중 3자 전략 대화 가동 및 유엔, EU 등 국제사회와 협력 확대 ▲비핵화 진전에 따라 상응하는 정치·경제·외교 조치 강구를 제시했다.
어느 정부든 성공해야 한다. 특히 대북관계에서 발전이 있어야 한다. 대북협상은 그 성격상 남북 정상의 확고한 의지가 없이는 어렵다. 새로운 정부는 전임정부의 대북협상 과정에서의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고, 성과가 있다면 정파를 떠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신뢰와 평화의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해 본다.⊙
2009년 10월 중순 당시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출국에 앞서 임 장관에게 “올해 안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도록 준비하라”는 지시와 함께 통일·안보 참모 회의를 통해 정리된 협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가이드라인에는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조건, 시기, 의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태희 전(前) 청와대 대통령실장은 1월 초순 서울시 회현동 연구실에서 기자를 만나 베일에 싸여 있었던 2009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에 얽힌 비화(話)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증언했다.
임 전 실장은 “2009년 10월 싱가포르 협상에서 정상회담 개최 원칙을 협의하고 회담 의제 역시 정리했다”며 “회담 장소는 평양이었으며 회담을 마치고 이명박 대통령이 국군포로를 데리고 귀국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또 남북은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의제에 올리기로 했다. 임 전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의제 정상회담 상정(上程)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핵 문제를 정상회담에 의제에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습니다. 회담 의제가 되었다는 것은 해결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해결할 생각도 없이 왜 의제에 올리겠습니까. 북한은 협상 초반에 핵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리 역시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쉽게 만든다. 정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설사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협상용이지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습니다.”
이렇듯 2009년 이명박 정부 초기 남북관계는 돌파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2009년 말 정상회담은 무산됐고, 남북 정세는 급격히 냉각됐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 등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감도는 위험천만한 시기도 있었다. 북한의 도발은 전후 사정을 모르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비칠 수 있다. 북한은 왜 2010년부터 끊임없이 도발했을까.
임 전 실장은 인터뷰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만일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北 조문단 파견으로 정상회담 무르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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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월 23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방남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전부장, 원동연 아태위 실장 등 북한 사절단을 접견하고 있다. |
2009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를 이해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며 출범했다. 새로운 정부는 전임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했는데 그것이 독일의 프라이카우프이다.
‘자유를 산다’는 뜻의 독일어 프라이카우프는 옛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을 말한다. 통일 전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올 목적으로 현금과 현물을 동독 측에 제공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2009년 남북정상회담은 프라이카우프 원칙을 바탕으로 추진했다”며 협상내용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임 전 실장의 설명이다.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어떻게 접촉하게 되었나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하루 후에 북에서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두 가지 요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조문단(김기남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이 서울을 방문키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청와대 방문(대통령 면담)을 성사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문을 하고 말고는 북이 결정할 일로 첫 번째 요구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면담은 (정부 내에서) 반대가 있었습니다. ‘북한에 말려들 수 있고,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의 결단으로 북측 조문단이 청와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국내 체류기간에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2009년 싱가포르 협상 배경을 설명해 주세요.
“북조문단 서울 방문으로 대화통로가 열렸습니다. 그러다 2009년 9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에서 북한의 댐 방류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수공(水攻)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북한이 임진강에 누가 있는지 알고 댐 방류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측이 사과했습니다. 또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9월 26일 금강산에서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올해 안에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라고 해서 싱가포르에서 김양건을 만났습니다.”
‘인도적 조치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 합의
—비선(線) 접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과 조율을 안 하고 갈 수 있었겠어요. 다 보고하고 (대통령이) 결심하고 싱가포르로 갔어요. 정부와 조율이 되지 않았다는 일부 주장이 있는데 다 틀린 이야기예요. 당시 정부는 정상회담에 대가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협상을 하되 대가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고민했어요. 그래서 프라이카우프 원칙에 따라 진행시켰습니다. 냉전시대 독일처럼 납북자, 국군포로 생사확인·서신교환, 이산가족 상봉, 한국전쟁 전몰자 유해 발굴, 고향방문을 정례화하되, 그것을 패키지로 쌀과 비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양해각서에 서명했나요.
“양측의 논의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북측이 초안을 가지고 왔어요. 읽어 보고 잘못된 부분을 가필(加筆)해 주고 이것이 내 의견이라고 사인으로 확인해 줬어요. 우리 측 의도 역시 명확히 해야 하잖아요. 북측 역시 돌아가서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밖에 못 했다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걸 안 해주면 나중에 연락이 되지 않죠. 이면합의를 했다거나 섣부르게 서명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안 해주면 창구가 없어지게 됩니다.”
—정상회담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나요.
“경제적 지원이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어요. 경제는 비즈니스이고, 인도적 지원은 그와 별도로 진행시키자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인도적 조치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프라이카우프 원칙 이외에 합의한 사항은 무엇인가요.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국군포로 몇 명을 데려오기로 했어요. 일부에서는 ‘가족을 데려와야 한다’,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그러나 북한이 ‘이 사람 국군포로이니 데려가라’고 해서 우리가 그냥 데려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더군다나 가족이 있는 경우 남한에 가기 싫다고 하면 못 하는 것 아닙니까. 또 그 수를 10~20명으로 하자고 한다면 2009년 내에(두 달 안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는데 가능하지 않죠. 제 생각에 일단 ○명으로 적고(합의하고) 시작하는 단계이니 더 할 수 있는지 여부는 한번 알아보는 것이 낫겠다고 봤어요.”
파국의 시작 ‘옥수수 5만t 지원’
2009년 9월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던 남북관계는 10월 말부터 급속히 경색되었다. 남북관계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히 화해무드로 갔다가 대결상황으로 반전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부 내의 대북 협상파와 원칙파의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갈등은 옥수수 5만t 지원 문제가 발단이 됐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옥수수 5만t 지원을 약속했다. 그해 12월 지원하기로 계획했던 옥수수 5만t은 국제 곡물가 급등과 물량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연기되었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유보됐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옥수수 5만t 지원을 대북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다만 전임 정부가 이미 약속한 지원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북한이 먼저 요청하면 지원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옥수수 지원 요구를 하지 않고 버텼다. 먼저 숙이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2009년 하반기 북한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매년 쌀과 비료를 각각 30만~40만t씩 지원했다. 액수로는 5억~6억 달러 규모였다. 그러나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식량지원을 중단했다. 그 결과 10년 가까이 남한의 식량지원에 의지해 버텨온 북한은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통받았다.
2009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이 본격 추진되는 등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북한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에게 노무현 정부에서 약속한 옥수수 5만t 지원을 요청했다. 임 전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정부 내 회의를 통해 옥수수 5만t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진행과정에서 터졌다. 통일부가 북한에 ‘(5만t이 아닌) 1만t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당연히 5만t 지원을 예상했던 북한으로서는 충격이었다. 북측은 남측에 “1만t 현인택 집에나 가져다줘라”며 항의했다. 대북 강경파인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식량 레버리지(leverage·지렛대)전략을 쓴다고 본 것이다. 결국 옥수수 지원은 흐지부지 됐다.
북한 고위층은 간접적으로 임 전 실장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인민들 먹이려고 옥수수를 부탁했는데 주기로 해놓고 그럴 수 있느냐”고 섭섭함을 표시했다. 임 전 실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때부터 북한의 우리 측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3달 안에 북한 식량 바닥난다”
정부의 옥수수 지원 방침이 오락가락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라인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라져 있었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2010년 7월부터 대통령실장)이 온건 협상파라면, 현인택 통일부 장관(現 청와대 통일정책특별보좌관)은 강경 원칙파였다. 협상파는 주로 정치인 출신이었고, 원칙파는 외무(外務) 공무원과 교수 출신이 많았다. 협상파는 결과, 타협, 대화, 정치적 결단을 강조했으며 추진력이 강했다. 반면 원칙파는 결과 못지않게 절차와 형식을 중요시했으며 미국유학파가 많았다.
2009년 9월 말 추석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임 전 실장에게 북한의 옥수수 5만t을 요청할 즈음 강경파는 대통령에게 “북한의 식량이 3달 안에 바닥이 날 것”이라고 북한의 쌀 비축 상황을 진단, 보고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핵심 참모 A씨는 “북한이 3달 안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원칙파는 북한이 식량부족으로 코너에 몰린 당시를 개혁·개방으로 압박할 적기(適期)로 본 듯하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4년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의견도 이즈음 청와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망은 나름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구체적 데이터(자료)를 근거로 원칙파는 시간을 끌수록 남측에 유리하게 협상을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식량지원을 매개(媒介)로 북한을 압박하는 식량 레버리지 전략이 등장했다. 옥수수 5만t 지원 약속이 1만t으로 줄어든 것은 강경파의 이러한 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강경 원칙파에게 고무적인 북한의 반응이 나타났다. 북한이 옥수수 지원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음에도 정상회담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매달리는 모양새였다. 정부에 ‘북한이 식량이 급하긴 급하구나’, ‘이제 주도권을 잡았다’ 등 원칙파의 낙관론이 우세했다. 그러면서 점차 정부 내 기류도 강경 원칙파 쪽으로 기울었다.
대북접촉 중 돌연 방침 바뀌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010년 2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을 때 북핵문제가 언급되는 정도의 수준은 큰 의미가 없다”며 북핵문제 진전이라는 분명한 성과를 강조했다. 원칙파는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성과로 가져온 ‘북핵문제 정상회담 의제 상정’, ‘국군포로 약간명 송환’ 등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2009년 10월 중순 임 전 실장이 싱가포르 협상장으로 향하자, 원칙파는 대통령에게 ‘비선라인이 협상을 마무리하면 안 되고 통일부-통일전선부 공식라인을 통해 정상회담이 확정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들의 설득은 이명박 대통령을 움직였다. 임 전 실장은 “싱가포르에서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협상 도중에 서울에서 결론을 내리지 말고 통일부에 넘기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큰 원칙을 확인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와 통일전선부에서 다시 하고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우리(임태희-김양건)가 뒷받침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정문헌, “통일부가 더 누르려 했다”
2009년 11월 협상을 이어받은 통일부는 추가 협상을 통해 플러스알파를 얻으려 했다.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정문헌 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2012년 12월 말 강원도 속초 지역구 사무실에서 기자를 만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때 북의 손을 잡아줬어야 했는데 (통일부가) 더 누르려고 했어요. 통일부가 전임 정부처럼 비선라인으로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협상을 (임태희에서 통일부로) 넘겨줬어요. 거기서(통일부에서) 추가요구를 했어요. 안 그래도 되었는데, 무리하게(요구해서 정상회담을 못 했어요). 그때 남북관계를 풀었으면 참 좋았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핵 문제가 어젠다세팅(의제)이 됐어요. 대통령이 가서 비핵개방 이야기하면서 풀도록 되어 있었죠. 우리가 주는 것도 없었어요. 인도적 지원은 해야 되는 거였는데 (인도적 지원을 대가로) 납북자 문제도 해결되었어요. 임태희 장관 입장에서는 ‘(협상이) 다 되었고,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사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2009년 11월 7일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통통회담(통일부-통일전선부)으로 알려진 개성접촉은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북한은 통통회담이 싱가포르 합의를 형식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또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직접 개성에 올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회담에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국장을 보내 회담을 장관급에서 국장급으로 격하시켰다. 통일부는 북측에 추가조건도 제시했다. 회담 장소는 가능하면 서울로 하되 어렵다면 판문점도 가능하며, 국군포로 및 납북자 10명을 남한으로 송환하라는 조건이었다. 북한은 남한의 요구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했다.
대청해전으로 정상회담 破局
11월 10일 개성회담 3일 후,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대청도 동쪽에서 남한 해군과 북한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후에 교전은 대청해전으로 명명(命名)됐다.
11월 14일 개성에서 2차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이 열렸다. 통일부는 북한에 “우리는 할 말이 없다. 할 말 있으면 해라”고 말했다. 북측은 대답하지 않았다. 2009년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대청해전에 대해, 협상파는 “북한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추가조건을 제시해 북한 협상파(김양건 라인)를 압박했다”며 “협상이 결렬될 경우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한 협상파가 살기 위해 도발을 일으킨 것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원칙파는 “북한이 쌀, 비료의 선지원을 요구했고, 이면합의까지 요구해 협상이 결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양측의 주장은 다르지만 북한은 개성회담을 거치면서 ‘이명박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 확실해 보인다.
2009년 11월 플러스알파를 자신하며 바통을 이어받은 통일부가 판 자체를 깨버리고 서해에서 교전까지 발생하는 등 남북관계는 점차 안갯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협상 결렬 보름 후 북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통일부 등 원칙파들에게 나름 할 말이 있게 만들었다.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기존화폐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전격 단행했다. 북한의 화폐개혁은 1992년 이후 17년 만이었다.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92년까지 5차례의 화폐개혁(화폐 교환 포함)을 단행했다. 북한은 체계 변혁이나 체제 단속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시행하곤 했다. 원칙파는 화폐개혁을 일련의 대북 압박을 통한 북한의 변화 신호로 이해했다. 반면 협상파는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던 북한이 지하자금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로 이를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는 입장이었다.
이즈음 이명박 대통령은 새로운 측근을 통해 북한과의 비선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화 국회 부의장, 이상득 전 의원, 이재오 의원 등이 중국 등에서 북한 측과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대통령과 상의 후 북한과 접촉을 시작한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공명심 때문에 (정부와 협의 없이) 남북비선 협상에 뛰어든 경우도 있었다.
춘궁기 오자 천안함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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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격당한 천안함 절단 부분. |
청와대 역시 북한이 협상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다. 남북정상회담이 불발된 이후인 2009년 말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린다. 회의에서 협상파와 원칙파의 논쟁이 있었다.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 식량이 3개월 안에 바닥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3개월이 지나면 북한이 무릎 꿇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북한에 변화가 없어요.”(협상파 인사)
“춘궁기가 오면 달라집니다.”(원칙파 인사)
2010년 3월 춘궁기(봄)가 왔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천안함 피격 사건은 3월 26일 21시22분경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경계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 소속 천안함(PCC-772)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으로 침몰해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된 ‘국가 안보차원의 중대한 사태’이다.
충격적인 무력 도발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 내에서는 책임 소재를 놓고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협상파는 “예정대로 2009년에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으면 천안함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대화를 시작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수십 명의 청년이 전사한 마당에 북한과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체로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5월 2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사건 관련 대국민 담화문(5·24 대북제재 조치)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대북 안보정책의 근간을 적극적 억제 원칙(proactive deterrence)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 안보정책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북한에 “천안함 침몰은 대한민국을 공격한 북한의 도발”이라며 “대한민국은 앞으로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극적 억제 원칙’을 견지할 것이다. 앞으로 (북한이)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군의 안보태세를 방어 위주에서 사전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남북교류를 중단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통일·국방·외교부 등 관련 부처의 구체적인 제재 방안도 발표됐다. 통일부는 ▲북한 선박 한국 영해 운항 금지 ▲남북교역 중단 ▲한국인 방북 불허(개성공단-금강산 예외) ▲대북 신규투자 금지 ▲대북 지원 보류(영·유아 지원은 지속), 국방부는 ▲자위권 등 ‘적극적 억제’ 원칙 ▲PSI 해상 차단훈련 실시 ▲대북 심리전 6년 만에 재개 ▲한미 연합 대잠수함훈련 실시, 외교부는 ▲안보리에 천안함 사태 회부 ▲한미동맹 차원의 제재 협의 ▲국제기구에 대북 응징 촉구 ▲유엔 결의 1874, 1718호 엄격한 이행 추진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후 적극적 억제 원칙의 비현실성이 드러났다.
‘식량 레버리지’에 ‘도발 레버리지’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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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23일 오후 서해 연평도가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북한은 이날 오후 2시34분부터 약 1시간에 걸쳐 연평도에 포탄 수십 발을 발사했다. |
공교롭게도 연평도 포격 사건은 개성 통통회담이 무산된 지 정확히 1년 만에 발생했다. 2009년 11월 남측이 북측에 ‘식량 레버리지 전략’을 사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 수 있었다. 2010년 11월 북한은 남한에 ‘도발(挑發) 레버리지 전략’을 사용했다. 북한의 강경파는 “도발을 계속해야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얻을 것이 많아진다”고 판단했다.
연평도 사건 이후 청와대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대응카드가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폐쇄국가인 북한을 압박할 방법이 없었다. 군사적 대응은 불가능했다. 국지전(局地戰)이라도 벌어지면 외국인들이 한국주식을 팔고 떠나는 ‘셀 코리아(Sell KOREA)’가 우려됐다. 더 이상 북한이 남한의 식량지원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남한의 지원이 끊기자 북한 경제의 시스템이 변했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이후 북한은 사(私)경제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다. 그 결과 중국밀수 등을 통한 공식·비공식 무역이 늘어났다. 또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2009년 이후 중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다. 그 결과 식량사정은 어느 정도 안정됐다. 현재 북한은 2012년 6·28 경제조치를 통해 경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6·28 경제조치는 ▲농민 생산량 일부 자유 거래 ▲집단농장 분조 축소 ▲기업의 독자적 생산·판매 결정 ▲국가기관·교육·의료 분야만 배급제 유지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B독트린 구상
청와대는 2010년 말부터 북측과 접촉을 다각도로 시도했다.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분위기 변화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경변화 때문이었다. MB는 기본적으로 공무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외무 공무원을 싫어했다. 현대건설 사장 시절의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MB는 과거 중동지역 건설현장에서 근무한 시절을 말할 때 “열사(熱砂)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외교관들은 에어컨 바람 쐬면서…”라며 외교관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2010년 9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딸을 5급으로 특채한 사건은 외교관에 대한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던 중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정원 등의 대북 관련 보고서와 예측이 잇달아 어긋나고 북한의 도발이 멈추지 않자, 이 대통령은 “차라리 내가 김정일을 직접 만나 해결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해 영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고민됐다. 임태희 전 실장은 MB독트린(외교노선) 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측 인사를 만나면 항상 6·15 (2000년 김대중 정부), 10·4(2007년 노무현 정부) 선언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NLL 등 서해 영해 문제에서 협상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측을 만나면 남북기본합의서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제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서해 NLL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과거 남북정상의 합의를 포괄하는 MB독트린을 발표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북한의 충격적인 대응으로 물거품이 됐다.
망신살 뻗친 정부
2011년 6월 1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의 문답에서 “남측이 ‘북측에서 볼 때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내놓자’고 하면서 우리 측에 ‘제발 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2011년 5월 9일 북한 개성에서 첫 접촉을 갖고 이어 14일경 베이징에서 추가 접촉을 갖는 등 최소 2차례 이상 비밀접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남북 비밀접촉에 나선 우리 정부 인사 3인의 실명과 직책까지 공개했다. 북한이 공개한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은 통일정책의 핵심 실무자들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남측이)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 비밀접촉을 주관하는 통일부 장관 현인택, 정보원장, 대통령실장, 그리고 파견된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북측도 꼭 비밀에 부쳐달라’고 거듭 간청했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중앙통신은 “남측이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만나 이 문제를 결속하자, 그리고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시키자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거리낌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시간, 장소,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밝힌 것으로 봐서 북한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북한의 폭로가 가지는 의미이다. 사실 비밀회담을 폭로해서 북한이 얻을 이익은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망신을 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과거 같으면 최대한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했을 것이다. 북한의 폭로는 2009년 옥수수 5만t 사건부터 쌓인 앙금이 너무 깊어 남북관계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부는 더 이상 북한과 대화할 수도 할 여유도 없었다. 서서히 MB정부는 레임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MB 대북정책의 明暗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한 것인가. 원칙파에 속하는 천영우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은 1월 초 언론 인터뷰에서 “35년 동안의 외교관 생활 가운데 베스트를 꼽으라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한 평가는 남북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느냐로 하는 게 맞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5년간 추진해 온 대북정책이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고 남북관계 패러다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켰어요. 그 과정에서 북한이 포용정책이나 햇볕정책의 금단현상 때문에 도발도 했지만, 그 자체만으로 대북정책이 잘못됐다고 하는 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유지 방법과 남북관계의 큰 틀이라든지 패러다임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기 위해서 지불한 비용치곤 좀 값비싼 대가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게 헛된 희생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유지 방법을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더 가깝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 천 수석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북한이) 남측에 돈 가져오라고 하면 주고, 북한은 그걸 조공으로 생각했다”며 “그 대가로 도발하지 않는 것을 큰 선심 쓰듯이 하는 그런 식의 남북관계였다”고 혹평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북한에 끌려다니던 대북관계를 정리하고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실용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는 점은 향후 업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일관된 철학 없이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해 원칙도 실리도 얻지 못했고, 그 결과 대북관계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당선자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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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천안함 46용사 2주기 추모식에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
박 당선자가 선거 기간에 발간한 공약집에 따르면, 당선자는 “불신과 대결을 넘어, 신뢰와 평화의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100% 대한민국의 완성”이라며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들기 위해,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여건을 조성함은 물론 대북정책을 진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 대안으로 ▲남북한 간 북핵문제 해결 위한 실질적 협의 추진 ▲6자회담에 새로운 동력 주입 위해 노력 ▲한·미·중 3자 전략 대화 가동 및 유엔, EU 등 국제사회와 협력 확대 ▲비핵화 진전에 따라 상응하는 정치·경제·외교 조치 강구를 제시했다.
어느 정부든 성공해야 한다. 특히 대북관계에서 발전이 있어야 한다. 대북협상은 그 성격상 남북 정상의 확고한 의지가 없이는 어렵다. 새로운 정부는 전임정부의 대북협상 과정에서의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고, 성과가 있다면 정파를 떠나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신뢰와 평화의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