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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大공개

북한 金正男과의 7년 대화록

“金日成 외모만 닮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 얼마나 만족시킬지 걱정…”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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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男은 2004년부터 최근까지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기자와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일은 150통이 넘는다. 김정남은 북한 로열패밀리의 깊숙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는 異腹 동생 金正恩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한 《아버지 金正日과 나》를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다

⊙ 후계자 김정은 등장 후 아버지에게 동생 교육 잘 해달라 주문
⊙ 개혁ㆍ개방하지 않으면 북한이 망하고, 개방하면 정권이 붕괴
⊙ 김경희ㆍ장성택 부부, 지금도 내게 애정 가져
⊙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이다
⊙ 동생이 원하면 협력하겠다. 단 외국에서
⊙ 통풍으로 발작 증세, 요산 조절제 매일 복용
⊙ 金正恩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체제 유지 실패시 軍이 실권 장악
⊙ 2001년 일본 불법 입국 당시 젊은 여자는 女비서, 어린 아이 손 잡은 여성이 나의 유일한 아내
일본 TV 아사히 등과 인터뷰를 했을 때의 김정남.
  2011년 12월 19일 오전 12시, 북한 당국이 김정일(金正日)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자마자 고미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東京新聞) 편집위원은 중국에 있는 김정남(金正男)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12월 19일: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세계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뭔가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까?>
 
  답은 곧바로 왔다.
 
  <12월 19일: 애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노코멘트입니다. 더 이상 취재에 응할 수 없습니다. 金正男 拜>
 
  2004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7년간 이메일 대화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평양에 갔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으나 김정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짧은 메일만 보내왔다.
 
 
  金正男과의 우연한 만남
 
  고미요지 기자는 1년 전(2010년)에 있었던 ‘김정남의 요청’을 떠올리며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2010년 9월, 이복(異腹)동생 김정은(金正恩)이 정권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자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나의 생각을 정리해 적절한 시점에 세상에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2004년부터 최근까지 150통의 이메일을 교환했다. 2011년 1월과 5월에는 중국에서 두 차례 만나 심도 있는 대화도 나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2004년 베이징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첫 인사를 나눴고 그해 몇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해 연말 김정남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고미요지 기자는 참고 기다렸다. 《도쿄신문》 서울지국장과 베이징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북한과 김정일 부자(父子)에 관한 기사를 꾸준히 보도하며 5년 가까이 김정남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고 한 달 뒤인 2010년 10월,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불쑥 접근해 왔다. 북한 정권의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한반도 정세를 고려할 때, 김정일 첫째 아들과의 만남은 고급 정보에 목말라 있는 기자로서 큰 행운이었다.
 
  두 사람의 이메일 대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미요지 기자가 한국어로 묻고 김정남도 한글로 답변하는 식이었다.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
 
김정남은 “김정은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기존 파워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주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정일, 원래는 3대 세습에 반대
 
  고미요지 기자는 전 세계 언론인 중에서 김정남과 가장 오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김정남을 통해 북한 정권의 실상과 한ㆍ중ㆍ일ㆍ북의 상호관계를 내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해 《아버지 金正日과 나―김정남 독점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책을 낼 예정이다(일본 문예춘추사 발간예정). 김정남의 고백은 세계 유일 3대(代) 세습국가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읽을 수 있는, 사료(史料)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 될 것이다.
 
  김정남은 김정일이라는 절대권력이 사라진 진공 상태의 북한과 주민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했다. 그는 후계자 김정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할아버지(김일성)를 많이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민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현재 김정은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기존 파워엘리트들이 북한 정권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김정남은 후계 구도와 관련해 “(부친은) 아들이 권력을 이어받지 못하게 할 것이다. 세습은 나와 아버지 김일성의 업적을 망칠 것”이라며 3대 세습을 반대했다는 사실도 처음 공개했다. 그는 또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북한에 들어간 후 “개혁ㆍ개방하지 않으면 북한이 무너진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로부터 경계대상이 됐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북한이 개혁ㆍ개방할 경우 김정일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개혁ㆍ개방이냐 체제 수호냐를 놓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이 너무 지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도 했다.
 
  김정남은 김정은의 강력한 후원자인 고모 김경희(金敬姬)와 고모부 장성택(張成澤)에 대해 “지금도 좋은 관계에 있어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의) 특별한 관심 안(속)에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2006년 경제 개방에 적극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며 “고모부 장성택을 단장으로 30여 명의 경제 간부들을 중국 상하이에 보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2001년 일본 불법 입국과 관련해 “위조여권으로 해외로 외출하는 것은 당시 (북한에서) 일반적이었고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 도쿄의 유명 호텔과 음식점을 다녔다. 김정은도 브라질 여권을 위조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런 ‘악습’은 2001년 자신의 일본 불법 입국 사건으로 인해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중동국가에 불어닥친 ‘재스민혁명(민주화혁명)’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외부의 소식에 민감해져 있다”며 “북한은 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남은 2011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자신의 아들(김한솔)과 관련해 “모험심이 강해 스스로 분쟁 지역인 보스니아 모스타르 소재 국제학교를 선택했고 아들의 견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부모로서)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남은 일본 문화와 국민성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나타냈다.
 
 
  갑자기 날아온 수수께끼 같은 한글 메일
 
2010년 9월 김정은은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후계자로 공식 등장했다. 김정남은 이에 대해 “권력세습은 사회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고, 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정남과 고미요지 기자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베이징 외교가(外交街)는 ‘일본인 납치 문제 협의를 위한 일북(日北)회담’ 개최로 분주했다. 당시 《도쿄신문》 베이징특파원이었던 고미요지 기자는 북측 대표의 입국에 맞춰 타(他)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함께 공항 입국장으로 달려갔다.
 
  운명의 만남은 여기서 이뤄졌다. 김정남이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미요지 기자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일본 기자는 김정남에게 말을 걸었다.
 
  “평양에서 오는 길입니까?”
 
  김정남은 “김정남 맞습니다”라고 짧게 답변한 후 택시에 올라탔다.
 
  고미요지 기자는 본능적으로 “연락하시라”는 말과 함께 명함을 전달했다. 옆에 있던 다섯 명의 기자도 덩달아 명함을 줬다.
 
  김정남은 그로부터 넉 달 뒤인 12월 3일 일본 기자들에게 안부인사를 보냈다.
 
  <12월 3일: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지난 9월 15일 베이징공항에서 만나 기뻤습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행복을 기원합니다. 김정남 拜>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의 이메일을 받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본 기자에게 이메일로 연말 인사를 했다”는 내용의 짧은 기사를 본사에 송고(送稿)했다.
 
  반응은 예상외로 컸다. 한국의 정보기관 관계자는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 기관원의 부탁을 거절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북한식(式) 용어를 사용하며 김정남에게 정성을 쏟았다.
 
  <12월 4일: 김정남님, 메일 보내줘서 감사합니다. 공항에서 만났을 때는 천천히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공화국(북한)에 관심이 많고 금강산과 평양에 간 적도 있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장이 곧바로 왔다.
 
  <12월 4일: 나는 귀하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드릴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공항에서 명함을 받았으므로 안부를 전했을 뿐입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답장 겸 질문 형식의 메일을 다시 보냈다.
 
  <12월 4일: 정남씨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릴 때 해외 유학할 무렵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몇 가지 소문의 진상을 밝히는 게 어떻습니까?>
 
  기자의 직접적인 질문에 김정남은 예상과 달리 신속히 답했다.
 
  <12월 4일: 귀하의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만 내가 일본에 간 사실은 맞습니다. 서울에 간 적은 없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불법 입국) 이후 평양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문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야후 메일 계정 사용한 김정남

 
  고미요지 기자는 다음 날 다시 메일을 보냈다.
 
  <12월 5일: 일본에 몇 번 가봤습니까? 도쿄 아카사카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까? 젊은 시절 평양 고려호텔 지하에서 권총을 발사하며 놀았다는 얘기는 사실입니까?>
 
  김정남은 일본 기자의 취재의욕을 저버리지 않았다.
 
  <12월 6일: 일본에 몇 번 갔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중략) 권총 얘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나의 어학실력이나 컴퓨터 활용능력은 일반적인 수준입니다. 고려호텔 사건은 나와 관련이 없습니다. 언론이 소설을 쓴 것입니다. 베이징에 비밀 기지가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현재 지위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입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이 구사(驅使)하는 영어와 한국어 표현에 적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그는 후계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12월 6일: 한국의 야후 메일을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인 주민등록번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후계자 문제는 언제 결정됩니까? 아버님이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까?>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답장은 불과 20분 만에 전달됐다.
 
  <12월 6일: 내가 한국 야후 메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후계 문제는 철저히 공화국 내부 문제이며 결정권은 부친에게 있습니다.>
 
  <12월 7일: 죄송합니다만 주고받은 메일을 토대로 두 번 기사화했습니다. 남쪽(한국) 기자에게서 자신도 메일을 보내고 싶다는 전화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12월 7일: 내 메일 주소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김정남은 이 같은 메일을 보내고 두 시간 뒤 “그동안 질문에 성의껏 답변했습니다. 이제 대화를 끝내고자 합니다”고 통보해 왔다. 김정남은 ‘한국 기자’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2010년 10월, 김정남이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을 다시 보내기까지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2004년 연말 마지막 메일을 보낸 후 한동안 연락이 없자, 고미요지 기자는 3년 뒤인 2007년 메일 대화록 중 일부를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에 게재했다. 그는 기사 말미에 이렇게 썼다.
 
  <국가 상황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힘차게 매달리는 북조선에서 김정남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그에게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다시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기고문을 통해 전달했다.
 
 
  다시 도착한 김정남發 메일
 
1975년 김정남이 군관복을 입고 외할머니와 찍은 사진.
  2010년 10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10월 22일: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예전 베이징공항에서 만난 고미 선생님은 북조선 전문가로 생각합니다. 만약 질문이 있으면 대답하고 싶습니다. 혹시 기사를 쓰고 싶다면 보도 시기를 후계자 결정 1주년인 내년(2011년) 9월로 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뭐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뜻밖의 메일을 받은 고미요지 기자는 2010년 9월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김정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김정은의 등장이 김정남으로 하여금 어떤 의도에서건 뭔가 행동으로 옮기도록 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노련한 고미요지 기자는 답장을 곧바로 보내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3일 동안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정남은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10월 25일: 김정남 선생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공화국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는 가운데,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입니다. 만약 공화국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시면 소원대로 하겠습니다.>
 
  예상대로 김정남은 즉각 답했다.
 
  <10월 25일: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답변을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연결된 것에 대해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의 수많은 질문에 답변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물론 민감한 부분이나 개인 프라이버시는 피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싶습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그에게 천천히 그리고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11월 1일: 북조선의 세습에 왜 반대합니까? 김정은씨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는 왜 참가하지 않습니까?>
 
  김정남은 ‘3대 세습’에 강한 반감을 보이며 긴 글을 보냈다.
 
  <11월 3일: 3대 세습이라는 것은 과거 봉건 왕조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사회주의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또 3대 세습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부친이 그렇게 한 것은 북한 내부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백두의 혈통’만 믿고 따르는 데 익숙한 북조선 주민들에게 그 혈통이 아닌 후계자가 등장할 경우,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조선의 특수성을 고려해 ‘백두의 혈통’에게 세습을 단행했다고 봅니다. 나는 3대 세습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북조선 내부의 안정을 위해 세습을 해야 했다면 따라야 합니다. 북조선 내부의 혼란은 한반도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것입니다. 나는 형으로서 동생 김정은에게 협력하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동생이 원하는 경우에 말이죠. 또한 도움도 ‘해외에서’라는 조건을 달고 싶습니다. 나는 동생 김정은을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김정철(金正哲)과는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북조선 정치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노동당 대표자회에 참가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

 
  <11월 5일: 중국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중국은 공화국의 세습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죠? 중국은 공화국의 불안정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11월 5일: 중국 정부의 대(對) 북조선 견해는 잘 모릅니다. 북조선과 중국은 혈맹관계이지만 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도 세습을 환영한다기보다는, 북조선의 내부 안정을 위해 북조선이 강행한 후계 구도에 이해를 표명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체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부의 간부들과 그다지 인연이 없습니다. 중국 정부가 나와 가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이웃 나라 국가 지도자의 가족에 대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정부가 나를 북조선의 차기 지도자라고 지목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11월 6일: 세습의 타당성, 선군(先軍)정치, 개혁ㆍ개방 가능성, 마카오 생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씀해 주세요.>
 
  김정남은 답변에서 아버지 김정일이 추진하는 정책 대부분을 부정했다.
 
  <11월 10일: 권력 세습은 웃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북조선이 안정적으로 경제 회복을 이루고 풍족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동생에 대한 나의 순수한 마음이 일부에서는 ‘북조선 버전 왕자의 난’ ‘김정남이 동생 김정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설명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군정치…. 북조선이 근래 최고의 이념으로 규정했던 선군정치에 대해 내가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북조선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없습니다. 나는 주민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정치를 해달라는 희망뿐입니다. 평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해외에서 북조선 주민들의 실상을 접할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아버지와 후계자를 보조하는 간부들 중에서 북조선 주민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현실을 볼 때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생존과 안락만을 추구해 국사(國事)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주민들과 지도자 사이의 장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후계자 주위에서 사라졌으면 합니다. 그들은 북조선의 발전과 후계자의 미래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상식에 의하면, 북한이 경제 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혁ㆍ개방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중국에 오래 체류하면서 중국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북조선은 ‘강성대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이 말하는 ‘강성대국’이라는 것은 사상, 군사, 경제강국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상은 강한 측면이 있습니다. 군사는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는 숫자의 과학입니다. 북조선의 경제 실상을 볼 때 경제강국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상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해서 주민들에게 계속 “허리 벨트를 더 조여라”고 주문하는 것은 더 이상 명분도 없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북조선이 추진 중인 나진ㆍ선봉 도시건설 계획에 대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을 보면서 개혁ㆍ개방 없이, 또한 미국과 서방의 대규모 투자 없이 나진ㆍ선봉이 과연 싱가포르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마카오 생활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은 듯합니다. 먼저 일각에서 보도된 것처럼 내가 마카오에 있는 VIP 카지노를 출입했다면 지금쯤 거지가 되어 거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과거 마카오에 관광차 갔을 때 슬롯머신 게임을 한 적이 있지만, 현재 마카오에 살면서도 카지노에는 출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내가 서방교육을 받아서 어려서부터 자유를 만끽하며 성장했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지금도 자유분방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북조선의 여권을 가지고 비자 없이 갈 나라가 과연 몇 개나 있을까요? 만약 북조선 여권으로 전 세계 여행이 자유로웠다면, 내가 도미니카 여권을 위조해 일본의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러 갔을까요? 내가 마카오에 자주 가는 이유는 가족이 거주하는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자유분방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북한 고위층 관련 한국 보도는 대부분 부정확
 
  <11월 13일: 성실하게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질문합니다. 2008년 부친이 병에 걸렸을 때 정남씨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의사를 데려왔다고 보도됐는데 맞습니까? 정남씨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모스크바에 살았던 어머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11월 14일: 아버님의 건강 관련 문제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어머님의 묘지가 있는 모스크바도 자주 갑니다.>
 
  김정남은 사적인 질문, 아버지의 건강 상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답변을 단호히 거절했다. 김정일의 건강상태는 북한의 최대 국가 비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미요지 기자는 “중국에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11월 14일: 언제 편한 시간에 만나 천천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시면 즉시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남씨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나라를 ‘북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월 15일: 북한을 북한이라고 해야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한반도가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는 유감스러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북과 남은 유엔에 동시 가입한 엄연한 두 국가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이라고 하고, 대한민국을 남한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됐습니까? >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이 갖고 있는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김정남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주 들른 곳에 대해 언급했고, 한국의 북한 소식 보도에 대해서는 “탈북자를 소스로 사용하는 경우 북조선 시장 정보나 지역 정보는 비교적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고위층 관련 정보는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부정확하다”고 밝혔다.
 
 
  남한의 약점 알고 있는 북조선
 
2010년 11월 북한의 포격 도발로 화염이 치솟는 연평도의 모습. 김정남은 “연평도 사태는 북조선 군부가 자신들의 존재 이유, 핵 보유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지른 도발”이라고 정의했다.
  두 사람이 몇 번의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터졌다. 고미요지 기자의 질문은 민감한 내용으로 다시 바뀌었다.
 
  <11월 25일: 남북 사이에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11월 25일: 북남(北南) 사이에 이번 같은 일이 생겨 매우 걱정입니다. 북조선은 서해5도 지역이 교전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핵(核), 선군정치 모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적절한 대응도 북조선의 공격을 초래했다고 봅니다. 한국은 공격을 받아도 확전(擴戰)을 막기 위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습니다. 전면전 발발(勃發) 시 한국이 받는 경제적 손실은 막대합니다. 북조선은 한국의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이와 유사한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실로 걱정입니다. 오늘 인터넷을 통해 이번 포격이 내 동생의 정치적 업적으로 선전(宣傳)되고 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선전만을 듣고 사는 북조선 주민들은 실상을 정확히 모르겠지만, 전 세계가 내 동생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동생이 동족(同族) 민간인을 포격한 악명 높은 지도자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후계자를 보좌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11월 26일: 북조선은 앞으로도 (남쪽에) 도발을 계속할 것이라 생각합니까? 군(軍) 강경파가 많은 것 같네요.>
 
  <11월 26일: 나는 고미요지 씨가 북조선 전문기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생 김정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물론 있습니다. 향후 만났을 때의 인터뷰 내용은 모두 기사화해도 괜찮습니다! 연평도 사태는 북조선 군부가 자신들의 지위와 존재의 이유, 핵 보유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지른 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11월 27일: 최근 일본에서는 정남씨에 관한 기사가 정말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정은은 어떤 성격입니까? 아버지를 닮았다는 설(說)과 일본과 중국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년 초 베이징 혹은 마카오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11월 27일: 동생 김정은의 성장 과정은 모릅니다.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내가 그의 성격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TV화면에서 볼 때 외모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11월 29일: 연평도 사태는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아버님에게 직접 말하는 기회는 있나요?>
 
  <11월 29일: 나는 부친에게 항상 직언(直言)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있는 그대로 계획 없이 직언합니다. 과거 핵실험, 미사일 발사 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직언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북조선 주민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 매진하도록 동생(김정은)을 잘 교육시켜 달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내 직언을 부친이 받아들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미(韓美) 해상 연합훈련이 끝나고 있군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김경희ㆍ장성택에게서 각별한 사랑받아
 
  <12월 3일: 지금은 마카오에 계십니까? 따뜻한지요? 고모 김경희씨, 고모부 장성택씨와 자주 만나고 있습니까? 주말 잘 보내세요.>
 
  <12월 5일: 북조선의 후계 구도가 공식화된 후 미디어는 소설을 쓰는 데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고모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고모님과 고모부에게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고, 지금도 그분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12월 10일: 어제 중국 정부의 간부와 아버님이 만났습니다. 건강한 것 같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이 정남씨에게 “북조선의 후계자가 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까? 만약 북조선이 혼란하면 귀국해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본국에서도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12월 11일: 건강한 아버님의 모습을 TV에서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나는 부친의 장남으로 혜택을 받아 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후계자의 목록에 오른 적은 없습니다. 장남을 중시하는 풍습 때문에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적했지만 부친이 누구보다 3대 세습에 반대했기 때문에 동생이 후계자로 낙점(결정)되기 전까지 후계자 논의는 금기시됐습니다. 더구나 나는 북조선의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북조선의 차기 지도자는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나 자신의 인생을 끊고 싶지는 않아요.>
 
  김정남은 이메일 대화 곳곳에서 폭탄발언을 했다. “이복동생 김정은을 만난 적이 없다” “핵실험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부친에게 직언했고 북한 주민이 잘살 수 있도록 동생을 잘 교육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김경희ㆍ장성택 부부의 관심 속에 있다”는 내용 등은 북한 전문기자였던 고미요지 기자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정남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다. 고미요지 기자 입장에서 김정남의 메일 한 통, 한 통이 기삿거리였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을 직접 만나기 위해 다각도로 전략을 폈다.
 
  <12월 20일: 정남씨를 만난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님에 대해서는 어떤 추억을 갖고 있습니까? 새해는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전 보낸 메일에서 “아버님이 3대 세습을 반대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던 것입니까?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2월 21일: 새해는 당연히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부친이 과거 어떤 후계 구도를 구상했는지는 부친만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3대 세습이 자행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 근면하고, 무엇을 해도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오늘처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도 이 같은 열정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유익한 연말연시!>
 
  <12월 25일: 저도 동감입니다. 북일(北日)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조선은 왜 군사 중시의 강경 노선을 유지합니까?>
 
 
  북조선 대화 의사 있다
 
  <12월 26일: 북조선이 왜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열강에 끼여 지금까지 생존해 왔습니다. 군 중심의 강경 노선은 생존을 위한 정치적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북조선은 자신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핵을 고집합니다. 북조선만이 핵을 가질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이상한 논리에 도전하는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강경 행동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그런데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을 목표로 북조선은 지금 매우 초조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포즈’가 조금 와일드(Wild)하지만, 대화 의사가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을 북조선을 상대하는 열강들이 좀 고려하면 어떻습니까? 일단 대화의 실마리가 발견되면 북조선에서도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입지가 강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핵을 보유한 나라가 압력에 의해 핵을 스스로 포기한 사례를 알고 계십니까? 북조선을 계속 몰아붙이면 도발을 원하는 북조선의 강경파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만 초래하지 않습니까?>
 
  김정남은 자존심 강한 북한의 속내와 북한 정권을 ‘요리’하는 중요한 방법을 고미요지 기자에게 알려준 셈이다. 6자회담 당사국이 참고할 만한 내용으로 판단된다.
 
  <12월 27일: 북조선의 상황을 잘 보고 계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마카오 생활은 완전히 자유입니까? 혹시 한국의 정보 관계자와 중국 공안 당국에서 감시를 받고 있습니까?>
 
  <12월 28일: 마카오 생활은 자유입니다. 한국 국가정보원과 중국 국가안전부는 나의 행적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감시 차원에서, 또 보호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한 운명은 즐기면서 사는 게 좋습니다. 정보 기관이 관심을 가지고 해도 내 자유를 침해하는 수는 없습니다.>
 
  2011년 새해가 밝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보냈다.
 
  <1월 8일: 나와 아내는 1월 12일 홍콩, 13일에는 마카오로 갑니다. 여행 일정대로 13일에는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휴대폰 번호를 드립니다. 만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1월 9일: 전화번호 잘 받았습니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통화는 가능한 한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자 메시지가 잘 안 될 경우,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두 분의 마카오 여행을 환영합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의 약속이 취소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마카오 출장을 준비했다. 인터뷰가 성사된다면 김정남의 사전 허락을 얻어 취재하는 세계 최초의 인터뷰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언론에 보도된 김정남 인터뷰는 공항이나 호텔, 길거리 등에서 이뤄진 즉석 인터뷰였다.
 
 
  마카오에서 독점 인터뷰
 
2001년 일본 불법입국 당시 사진. 김정남의 이모 성혜랑은 “김정남의 심미안을 볼 때 뒤쪽 여성이 부인일 것”이라고 했지만, 김정남은 “아이 손을 잡고 있던 여성이 부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인이 셋이라는 얘기는 거짓이며, 이 여성이 나의 유일한 아내”라 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2011년 1월 13일, 부인과 함께 홍콩에서 마카오로 향했다. 부인을 동반한 것은 일반 관광객으로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김정남으로 하여금 의심과 긴장을 풀게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미요지 부부는 마카오의 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과 카메라, 녹음기만 들고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약속된 시각에 김정남이 나타났다. 고미요지 기자는 곧바로 커피를 주문했다. 가벼운 질문과 농담도 했다.
 
  대화 초반 김정남은 “2007년 선생님이 《문예춘추》에 쓴 기사를 읽었다”고 밝혔다. 고미요지 기자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그를 만나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싶다”고 썼다. 김정남은 메일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고미요지 기자가 쓴 마지막 부분을 분명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고미요지 기자는 《도쿄신문》 1월 28일자로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다음은 언론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다.
 
  ―2009년 북조선은 화폐개혁을 실시했습니다. 김정은이 발의하고 강행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화폐개혁 자체는 대단한 실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김정은씨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까.
 
  “지금도 옛날도, 동생에 대해서는 부친의 위업을 계승하고 주민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게 소원입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연평도 포격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북남관계를 잘 조정해 주길 바랍니다.”
 
  ―김정은씨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경험은 쌓으면 됩니다.”
 
  ―2008년 아버지가 병을 앓은 후 성격이나 행동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최근에는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인기스타도 아니고(웃음) 일본 TV 기자와 언론의 추적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상관하지 않아요(웃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일본 방송국에 잘 아는 기자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나와 관련된 기사는 거의 읽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이 많아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조총련에서 번역해 주면 봅니다.”
 
  ―북조선은 개혁ㆍ개방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북조선이 가장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 문제, 경제 재건 방안 등입니다. 이 시점에서 개혁ㆍ개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성격에 차이가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 닮은 점도 있고 닮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주위 분들은 성격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효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올 추석에는 참배를 하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계구도 실패하면 軍이 실권 쥘 것
 
  1차 인터뷰는 이쯤에서 마무리됐다. 다음 날 2차 인터뷰가 다시 진행됐다. 김정남은 전날과 달리 경계심을 풀고 상당한 여유를 보였다. 인터뷰는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문신(文身)을 새긴 이유, 거주하는 곳, 가족생활 등 여러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젊은 혈기에 문신을 했습니다. 물론 야쿠자와 관계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베이징 시내의 한 아파트입니다. 아이는 마카오와 베이징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 중에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있습니다. 제네바 국제 학교에 다닐 때 사귄 다양한 친구도 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미국인 친구도 있습니다.”
 
  ―북조선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북조선은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합니다. 한국에 포격을 가한 것처럼 군사 권력이 커질 것입니다. 후계자 구도가 실패하면, 반드시 군이 실권을 쥘 것입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무기나 마약을 판다는 얘기는 거짓입니다. 그런 일을 하면 금세 각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여행을 할 수 없게 돼요. 내가 현재 갈 수 없는 곳은 홍콩, 미국, 일본과 태국뿐입니다. 태국은 북조선에 의한 태국인 납치 문제가 있어 가지 않습니다.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면 유럽에도 갈 수 없지요.”
 
  ―2001년 일본에 왔을 때 강제 출국조치를 당한 후 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듣고 후계자에서 제외됐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북조선에서는 위조여권으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내 사건 이후 그 악습은 북조선에서는 없어졌습니다. 김정은도 브라질 여권으로 일본에 갔었습니다.”
 
  ―아버지와 지금도 연락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직접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최근 술과 담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게 걱정인데, 주위의 인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어와 영어가 능숙하네요.
 
  “제네바의 국제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영어도 배웠습니다. 한때 러시아에 유학을 해 간단한 회화(會話)는 할 수 있습니다(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에게 러시아어로 ‘당신은 러시아어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식당에서 요리를 주문할 정도는 합니다.”
 
  ―유학 후 북조선에 들어가 대학에 다녔습니까.
 
  “1980년대 후반에 귀국해, 대학은 다니지 않고 부친 옆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당시 나는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부친에게 질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를 마쳤다.
 
 
  祖國 북조선의 엄중 경고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과의 대화를 정리한 《아버지 金正日과 나》를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다(일본 문예춘추사).
  마카오 ‘밀회(密會)’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신뢰’라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고미요지 기자의 입장에서는 대어(大魚)를 낚은 셈이었다. 이후 둘 사이의 메일 교환은 계속됐고 마침내 인터뷰 기사가 1월 말 《도쿄신문》에 나갔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터졌다. 북한이 김정남에게 엄중 경고조치를 한 것이다.
 
  <2월 5일: 《도쿄신문》에 게재된 기사 내용이 북조선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경고를 받았습니다. 추가 기사 게재는 당분간 보류합니다. 부탁합니다.>
 
  <2월 13일: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사 내용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친구로서 대화하고 싶습니다.>
 
  <2월 13일: 친구로 만나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인터뷰는 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평양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2월 22일: 요즘 중동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가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북조선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2월 22일: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북조선 당국을 긴장시키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월 23일: 북조선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버님은 매일 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월 23일: 북조선에서는 일부 사람만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적으로 해외에 상주하는 북조선 사람(공관 직원 포함)도 특별한 상황 이외에는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통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정의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하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경을 오가며 사업하는 북조선 사람도 국경을 넘으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PC방입니다. 북조선 사람들은 외부 소식에 민감합니다. 심각한 정보 통제가 북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정보를 획득하고 싶은 갈망을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서 오는 메일 내용이 점점 짧아지는 상황을 뒤집기 위해 중국에서의 2차 ‘밀회’를 계획했다. 김정남은 의외로 쉽게 만남을 약속했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哀悼 메일
 
  <3월 4일: 아버지에 대한 무서운 인상을 미디어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남씨의 입담은 한국사람처럼 들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3월 5일: 지적한 대로 미디어(언론)가 아버지를 무서운 독재자로 묘사한 부분이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투가 한국사람의 말투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살았던 북조선 외가 친척들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재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밴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돌봐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내가 몇 살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님의 질환 치료 때문에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앓고 계신 우울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어릴 때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해서 내가 확실히 후계자였다는 견해는 조잡한 생각입니다. 북조선 최고 통치자의 아이들이라면 모두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여동생 여정이도 어릴 때 군복 입고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신문사 건물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김정남에게 자신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3월 11일: 오늘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베이징은 지진이 없어 좋겠군요.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 술 한 잔 합시다. 스위스 유학 시절의 추억도 들려주세요.>
 
  <3월 11일: 무사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귀국의 재난 피해자에게 애도의 뜻을 보냅니다. 나는 통풍이 있어 맥주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혈중 요산이 높고 때때로 통풍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매일 요산 조절제를 복용합니다. 물론 나는 술을 좋아합니다. 지금의 나이에 벌써 통풍 발작을 몇 차례 경험한 것은 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제네바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300년 이상 전쟁이 없었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평화로운 국가 이미지가 좋습니다.>
 
  <3월 12일: 답변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관련해 모스크바에 자주 갑니까.>
 
  <3월 13일: 오랫동안 타향에서 혼자 살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회한이 큽니다.>
 
  <3월 19일: 원자로가 녹아 방사능 물질이 퍼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입니다. 아내도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동요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 드립니다. 제네바에서 있을 때 어떻게 지냈나요?>
 
 
  트위터, 페이스북 덕분에 유학 친구 되찾아
 
  <3월 19일: 하루빨리 일본 국민이 평온을 되찾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지구 생태계를 위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네바 추억을 말씀드린다면 국제학교 재학 중, 터키를 비롯한 각국에서 온 많은 학생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동서(東西) 냉전과 남북(南北) 대치 상황이 첨예했던 시절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때도 나는 일본, 미국, 한국 등 서방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단 한번도 정치 이념을 주제로 대화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그 시기의 친구 중 일부와 교제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 덕분에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를 많이 되찾았습니다. 지금도 일 년에 몇 번 그들과 유럽,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재회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대부분이 스키를 즐겨 탔지만 나는 운동신경이 민첩하지 못해 스키를 못 탑니다.>
 
  <3월 21일: 만약 제네바에 계속 머물렀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북조선 외교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나요?>
 
  <3월 21일: 제네바에 있을 때 조국이 그리웠어요. 그러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현지 친구들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서 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제네바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대학에 진학했을 것입니다. 단, 외교관이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북조선 외교관이란 당국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는 일이고, 재능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9년간 체류한 김정남은 북한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평양으로 돌아간 후 사회주의 독재정치를 펴는 아버지와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3월 21일: 정남씨가 유학하는 동안 아버님은 쓸쓸해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유학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제적인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였습니까?>
 
  <3월 23일: 부친은 저를 유학 보내고 난 후 매우 외로워했습니다. 저 역시 부친 곁을 떠날 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학을 떠난 후 나의 이복형제 정철, 정은, 여정이 태어나 부친의 애정도 이복동생으로 기울어진 것 같습니다. 내가 완전한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조선으로 돌아간 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경계했습니다. 아마도 부친의 기대를 거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해외에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질 것을 희망하면서도 유학 기간은 단축되었습니다. 동생들이 현지 친구들과 사귀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동생들은 북조선에서 온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체류했습니다. 북조선 유명 오케스트라단인 보천보 전자악단과 기쁨조로 유명한 왕재산 경음악단의 여자들이 스위스를 들러 남동생, 여동생들의 친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만화 김정은》은 사실에 가까워
 
2001년 1월 상하이 둥팡밍주(동방명주) TV중계탑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보는 김정일. 그는 당시 ‘천지개벽’이라 놀라며 개혁개방을 생각했지만, 체제위협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게 김정남의 분석이다.
  <3월 24일: 지금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만화 김정은》을 읽고 있습니다. 책 사진을 첨부합니다. 여기에 정남씨에 대한 내용이 나왔네요.>
 
  <3월 24일: 나도 한국 지인에게 보내달라고 해서 이미 읽었습니다.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김정일》과 후지모토 씨가 최근에 낸 책도 읽었습니다. 아마 그 책은 평양 고위층이 다 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 만화에까지 등장하는 나를 평양이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3월 26일: 5월 16일이나 17일쯤 만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행기 티켓을 미리 예매해야 합니다.>
 
  <3월 30일: 5월 일정은 아직 확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5~6월에 바쁩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4월 2일: 메일을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정남씨가 본국으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신변 안전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됩니다.>
 
  <4월 2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주의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4월 10일: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베이징에 갑니다. 시간이 맞으면 공항 주변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만날까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 북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4월 11일: 5월에 반드시 만날 수 있습니다. 북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북조선이 외국 투자를 유치해 경제를 회복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현실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풍그룹이든 조선합작투자위원회든 대(對) 북조선 투자를 유치하기 어렵습니다. 북조선에는 외국 투자 유치에 필요한 보호 정책 및 규정이 없습니다. 북조선 당국이 제멋대로 한국과 맺은 금강산 관광 개발 독점권을 취소하거나, 한국의 현대가 지은 금강산 시설들을 일방적으로 점유하는 그런 무지(無知)를 계속 보이면 북조선에 투자할 외국인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북조선은 국제사회에 신뢰를 쌓는 것이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4월 21일: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生母)는 고영희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4월 23일: 생모가 고영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4월 29일: 바쁘십니까? 5월 10일이 정남씨 생일이더군요. 조금 빠르지만 축하드립니다.>
 
  <4월 29일: 내 생일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날은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와이프가 만들어주는 만두 수프를 마시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5월 1일: 5월 일정은 결정되었습니까? 정말 짧은 만남이라도 가지고 싶습니다. 이복형제 정철씨가 싱가포르에 놀러 갔을 때 북조선 간부의 아이들로 구성된 ‘봉화조’라는 그룹이 동행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정말 있나요? 또 정남씨가 대남 정책을 맡았던 김용순씨의 아들과 친한 관계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5월 2일: 북조선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 사용
 
보스니아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에 다니는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 본처와의 사이의 아들(금솔)은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김한솔은 김금솔보다 두 살 많다.
  고미요지 기자와 김정남과의 2차 밀회 일정이 다가왔다. 고미요지 기자는 홀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2011년 5월 16일,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베이징 시내를 며칠 동안 배회했다. 하지만 귀국 전날까지 김정남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밀회 계획을 포기한 고미요지 기자는 귀국을 앞두고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 학자와 저녁약속을 잡았다. 밤 10시가 넘어도 김정남의 전화는 없었다. 고미요지 기자는 중국인 학자와 술잔을 계속 기울였다. 자정 무렵 시각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든 그는, 마카오에서 사용하는 휴대폰 전화번호로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사실을 확인했다. 김정남이라 직감(直感)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김정남은 베이징의 한 고급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고미요지 기자는 곧바로 김정남에게 달려갔다.
 
  고급호텔 꼭대기 층에 위치한 고급 바(Bar)의 희미한 조명 속에서 젊은 남녀가 놀고 있었다. 카운터에 야구모자를 쓴 사람이 고미요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정남은 카운터에 홀로 앉아 고급 위스키를 ‘원샷’으로 주문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몇 잔을 더 주문했다. 그때마다 신용카드 대신 100위안짜리 현금을 꺼냈다. 김정남은 취기(醉氣) 때문인지 자신의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이국(異國)에서 가정을 가진 김정남의 끝 모를 외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새벽 2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김정남은 중국 고급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미요지 기자는 “만난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었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다음 날 아침 귀국길에 올랐다. 김정남이 먼저 메일을 보냈다.
 
  <5월 17일: 무사히 귀국했습니까? 이번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5월 17일: 함께 술을 마셔 기뻤습니다. 다음은 싱가포르나 마카오에서 만납시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꾸준히 메일을 주고받았다. 고미요지 기자는 김정남에게 그동안 주고받은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써도 되는지를 물었다. 김정남은 “당분간 시간을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6월 3일: 얼마 전 한국 보도에 따르면, 정남씨의 아들이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괜찮습니까?>
 
  <6월 3일: 부정확한 기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만, 때로는 어이가 없습니다. 부친과 함께 김정은이 방중(訪中)했다는 오보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김정은의 단독 방중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현재 김정은이 중국 지도부와 단독 면담하기에는 김정은의 공식 직함이 빈약합니다. 김정은이 내년에 더 높은 자리에 임명된 후에 단독 방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
 
  <6월 6일: 가족에 특별한 변화는 없습니까? 그런데 점점 고모부 장성택씨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6월 17일: 조금 바빴습니다. 가족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북조선이 경제를 개혁해 주민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모부가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게 다행입니다.>
 
  <6월 18일: 정남씨는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계십니까?>
 
  <6월 18일: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강요하면 스트레스가 많아져 공부를 더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생활에서 좋은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마약, 도박을 하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7월 1일: “김정일 이복형제 김평일 평양에서 가택 구류”라는 뉴스를 보았습니까?>
 
  <7월 1일: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사입니다. 2001년 일본에서 일(불법 입국)이 있었을 때 동행한 여성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7월 5일: 당시 일본 사건 때 동행했던 두 여성 모두 부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7월 6일: ‘와이프들’이라는 표현은 이상합니다. 내 와이프는 당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여성입니다. 내 와이프가 고려항공 사장의 딸이라는 설은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어린 아이와 와이프 그리고 여자 비서가 동행한 사실을 놓고 언론이 소설을 썼습니다. 와이프가 두 사람이라, 웃기는군요. 내가 사랑하는 와이프는 한 명뿐입니다.>
 
  <7월 6일: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많은 기자가 정남씨에게 세 명의 부인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7월 7일: 내가 잠시 동거하여 아이가 있거나 교제한 다른 여성은 있습니다만, 결혼한 와이프는 단 한 명입니다. 나의 여성 편력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와이프 세 명과 산다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나를 이상한 이미지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불쾌합니다.>
 
 
  反美감정은 북한 체제 유지에 필요
 
  <7월 16일: 어제 한국 뉴스에 코카콜라가 평양에 공장을 건설하고 콜라를 판매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7월 16일: 신빙성이 없는 기사라고 생각됩니다. 아시다시피 북조선은 반미(反美)감정을 고취하기 위해 코카콜라, 청바지 등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물품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에서 코카콜라, 청바지가 몰래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 당국은 분명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코카콜라의 진출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7월 27일: 아버님은 2002년 중국 상하이의 발전을 눈으로 확인하고 매우 놀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로 돌아오면 그 놀라움을 잊고 자국의 개방에 부정적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7월 27일: 상하이 발전은 아버지도 인정했습니다. ‘천지 개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개혁ㆍ개방이 가져오는 북조선의 체제에 대한 위협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견디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7월 29일: 신의주 경제특구 구상은 왜 실패했는지 아십니까?>
 
  <7월 29일: 신의주 개발 실패의 원인은 북조선 내부에 있습니다. 중국인 양빈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중국 정부와 조율 없이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북조선은 신의주를 중국 마카오처럼 카지노 사업을 위주로 한 환락도시로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동북 3성의 자본이 유출되는 것을 우려해 제한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월 15일: 오늘은 종전 기념일입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북조선은 반일(反日)이라기보다 반미(反美) 감정이 더 강한 것을 느낍니다. 한국은 반일 감정이 더 심각한 것 같네요.>
 
  <8월 15일: 최근 한국의 반일 감정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 문제만은 북조선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은 일본 비판 때만 한국과 동조합니다. 북조선이 반미 감정을 고취하는 이유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유일한 초강대국과 맞서 있다는 자부심과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미 감정을 고취하는 것입니다. 경제 파탄의 원인이 미국의 북조선 고립ㆍ압살 책동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반미 감정의 고취가 필요합니다.>
 
  <9월 11일: 좋은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탄생 백주년에 큰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용을 아시나요?>
 
  <9월 14일: 내년 4월 후계자의 지위를 높이는 행사가 있을 것입니다. 북조선이 추진하는 황금평, 나진 특구 개발 착공식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해외 투자 뉴스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최근 후계자(김정은)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 아홉 명이 탈북해 북조선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외모만 닮은 김정은
 
중국의 차기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태자당은 김정남을 김정은의 대안으로 여기며 그를 보호하고 있다.
  김정남은 고미요지 기자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자극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숨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일까.
 
  김정남은 2011년 10월 아들(한솔) 문제로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한솔은 동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본처 사이에는 김금솔(男)이 있다.
 
  <10월 15일: 수많은 매체가 아들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왜 분쟁지역인 보스니아에 있는 학교를 선택했습니까?>
 
  <10월 17일: 유학 장소로 스위스를 논의했지만 한솔이 지망한 유나이티드 월드 칼리지(UWC)는 스위스에 분교가 없었습니다. 그 학교의 분교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캐나다에 있었지만 이미 학생 등록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모험성향이 강한 아들은 결국 보스니아 모스타르를 선택했습니다. 분쟁지역에 아이를 보내려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그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새 나도 아이를 유학 보내는 나이가 됐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김정남이 자신의 아들을 유학 보낼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한 것은 운명(運命)의 장난일까, 자연의 순리일까. 그날의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12월 10일: 안녕하세요. 현재 평양은 건설 러시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12월 10일: 자본이 많아지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만, 억지로 공사를 진행할 경우 부실 공사가 우려됩니다. 할아버지 외모만 닮은 김정은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후계자 김정은은 2012년 정식 데뷔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김정남은 자신의 소식통을 통해 북한 내부 사정을 전해 듣고 머지 않아 위기가 있을 것이라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김정일이 사망한 것이다.
 
  고미요지 기자는 이복형제 김정남과 김정은 그리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김정은 체제를 지원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가 순조롭게 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에 체류하는 김정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정남과 150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중국의 의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북한은 군사력에 의존해 존립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대로는 경제 자립을 전망할 수 없다. 김정은 체제가 국가의 안정과 빈곤이라는 모순을 풀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경우 ‘김정남 옹립 시나리오’가 현실성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결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김정남은 중국에 의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기 국가주석 시진핑의 출신 모체인 ‘태자당’이 김정남을 지지한다는 시각이 있다. 태자당은 자금력, 정치력이 우수해 김정남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 김정은 체제가 파탄했을 때, 사상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김정남을 평양에 보낼 수 있다. 중국이 가진 마지막 북조선 압박 카드인 셈이다. 김정남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김정은, 중국을 배경으로 와신상담하는 김정남. 두 사람의 불화는 수면 아래에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김정은이 중시하는 군부 가족 9명 탈북해 북한 당국 골머리 앓아”
 
2011년 9월 8일 북한 청진항을 출발해 9월 13일 일본 해상보안청에 의해 구출된 후, 10월 4일 한국에 입국한 군부 가족 일행.
  김정남은 2011년 9월 14일 고미요지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최근 후계자(김정은)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 아홉 명이 탈북해 북조선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남이 언급한 군부 가족 9명은 도대체 누구이며 왜 북한을 탈출했을까.
 
  묘하게도 같은 날 아침, 국내 주요 조간신문은 “일본 해상보안청은 9월 13일 오후 탈북자로 추정되는 9명을 이시카와현 앞바다에서 구조했다”고 전했다. 탈북자는 남성 3명, 여성 3명, 남자 어린이 3명이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 조사에서 “9월 8일 북한 청진에서 출항했다. 우리는 모두 가족과 친척이며 한국에 가고 싶다”고 밝혔다. 인솔자 격인 한 남성은 조선인민군 소속 현역 군인으로 알려졌다. 이시카와현 노도반도에서 청진까지의 거리는 750km. 이들이 타고 온 8m 길이의 목조 어선으로는 사실상 항해가 불가능한 거리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인민군 가족 일행은 10월 4일 한국에 인도됐다. 현재 이들은 정부 합동신문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행 중 1명은 “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백남운(白南雲ㆍ1895~1979)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조선노동당에서 한국인 납치업무를 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 외교부 대변인은 “확인해 주기 어렵다”고 했다.
 
  참고로, 백남운은 8ㆍ15 광복 후 월북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로, 북한 정권 수립 때 초대내각 교육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북한 정권의 핵심인물이다. 백남운의 손자가 사실이라면 김정남이 언급한 ‘후계자가 중시하는 군부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남이 9월 14일 메일에서 언급한 ‘탈북 군부 가족 9명’과 같은 날 한국 언론에 보도된 ‘인민군 가족 9명’은 과연 같은 사람들일까.
 
  김정남의 메일 발송 시점과 탈북자의 성분, 가족의 수, 한국에 입국한 인민군 탈북자 일행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이들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백남운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탈북자의 얘기를 중국에 있는 김정남이 확인해 준 셈이다.
 
  김정은이 공식 후계자로 오른 지 1주년이 되던 시점(2011년 9월)에 이들이 왜 탈북했을까. 이들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기에 북한 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할아버지는 자진 월북(越北)했고, 손자 일행은 자유를 찾아 자진 탈북(脫北)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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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1-02) 찬성 : 14   반대 : 16
2018년 무술년 황금누렁이해에 뭐하쇼 나는 참고로 1982년 개띠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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