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인터뷰] 간사이 재일동포 사회의 代父韓綠春 후지관광호텔 회장 : 월간조선

그는 한국말을 거의 잊었다. 77년을 일본에서 산 탓이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그는 ‘한녹춘(韓綠春)’으로만 살았다. 몸은 일본에 있어도 ‘마음’은 줄곧 한국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한녹춘 회장은 77년 동안 일본땅을 한국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을 본국(本國)이라고 생각했다.

1971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당시 무궁화장을 받은 사람은 두 명. 다른 한 명은 신한은행 설립자인 이희건(李熙健·94)씨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해외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행사’에 초청했다. 한녹춘 회장은 42명 가운데 한 명으로 추천돼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한녹춘(90).’

그의 정식 직함은 후지관광 주식회사 회장, 재일본 오사카 민단 고문이다. 한국 사람 중에 이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간사이 일대 재일동포 사회에서 한녹춘이라는 이름은 ‘경외와 전설’ 자체다. 오영환 오사카 주재 한국총영사는 “간사이 지역 재일동포들은 한녹춘 회장 얼굴 한 번 보는 걸 큰 자랑거리라고 생각한다”며 “한 회장은 간사이 재일동포들의 대부(代父) 같은 존재다”라고 했다.

자산만 1조5000억원대

오사카 민단본부 단장실에 앉아 있는 한녹춘 회장.

대한민국이 한녹춘 회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가 평생 음지(陰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한 회장은 젊었을 때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7명의 오야붕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젊은 한녹춘 회장을 기억하는 민단 원로들은 한 회장을 일러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독종’이라고 했다. 열세 살에 흥남에서 도일, 혈혈단신으로 일본 암흑가에서 살아남은 건 ‘당한 만큼 갚아주지’ 않았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젊었을 때 그는 일본 최대의 카바레인 후지카바레를 포함, 4개의 카바레를 운영했다. 십수 년 전에 카바레 사업을 정리하고 카바레 부지 두 개를 팔았지만, 남아 있는 두 곳의 카바레 부지 시세만 현재 약 9000억~1조원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오사카 도톤보리(道頓堀), 우메다(梅田) 등지에 있는 부동산 가격을 모두 합하면 약 1조5000억원대다.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한녹춘 회장은, 말 그대로 ‘암흑가의 보스’였다. 사진으로 본 그의 얼굴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뭔지 모를 불만으로 가득했다. 사진 속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생을 일본에서 산 셈이지만, 일본말이 아직도 유창하지 않다. 조직의 ‘오야붕’으로 항상 ‘단답형 문답’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땅에서건 일본땅에서건 학교를 다닌 적은 없다. 그래서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 읽거나 쓰는 데 서툴다. 40년 넘게 그의 옆을 지킨 홍성인(洪性仁·76) 전(前) 오사카 민단 단장은 “읽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일본 야쿠자 조직을 이끌고 그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인터뷰 시도 7개월 만에 성사

자신의 사진이 실린 월간조선 2009년 3월호 기사를 민단 원로들과 함께 보고 있다.

한녹춘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2009년 초다. 오사카 민단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에 갔던 기자는 자연스럽게 한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민단 원로들은 과거 일본인들의 냉대에 맞서고, 북한에 연결된 조총련과 투쟁한 이야기를 할 때, 수차례 ‘한녹춘’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이들에게 한녹춘 회장은 야쿠자였지만, 한국과 재일동포를 위해선 몸바쳐 일한 큰 어른이었다.

홍성인 전 오사카 민단 단장은 항상 그를 ‘그 어른’이나 ‘우리 영감’이라고 불렀고, 다른 원로들은 ‘니상(형님)’이라고 칭했다.

기자로서가 아니라, 같은 핏줄을 가진 동포로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2009년 1월 초부터 한 회장과 연락이 닿는 유일한 끈인 홍성인 전 단장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홍 전 단장은 “평생 자신이 원할 때만 연락을 하기 때문에, 그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집으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집과 사무실이 여러 곳인데다,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가족조차 알지 못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상대 조직의 습격을 막기 위한 습관이, 지금까지 몸에 뱄기 때문이다.

그러던 2009년 8월 초 오사카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 기자, 나 홍성인이요. 우리 영감이 이번 광복절 민단 행사에 나오기로 했어요. 이번에 오사카로 들어와요.”

인터뷰를 시도한 지 7달 만에 한녹춘 회장의 그림자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2009년 8월 15일, 일본 오사카에 있는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회에서 그를 처음 대면했다.

한때 오사카 일대 암흑가를 호령했던 오야붕 한녹춘 회장의 체구는 예상과 달리 작고 말랐다. 젊은 시절 하루라도 싸움을 하지 않으면 근질거렸다는 그 주먹도 요샌 중학생 주먹만 한 크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내쏘는 듯한 안광(眼光)은 사진과 다르지 않았다. 귀에는 보청기를 꼈고 머리숱은 사진보다 줄어 있었지만, 160㎝ 단구(短軀)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보듯 날카로웠다.

홍성인 전 단장이 그에게 2009년 월간조선 3월호 ‘민단’ 관련 기사를 보여주며 기자를 소개했다. 그 기사에 실린 자신의 사진을 본 한 회장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감사의 표시를 했다. 민단 원로들과 서너 시간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남의 말을 듣기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했다.

홍성인 전 단장이 중간에서 다른 원로들의 일본어를 듣고 그에게 부연설명을 했다. 그래야 한녹춘 회장은 다른 이들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듯했다.

홍성인 전 단장은 한녹춘 회장에게 끊임없이 인터뷰를 권했다. 한 회장은 그때마다 손사래를 쳤다. 민단의 가장 원로인 92세 권기주씨도 “한 회장도 뭔가 이야기를 남겨야 할 것 아니냐”며 거들었다. 한 회장은 그런데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차례 인터뷰를 거부하는 그를 보던 홍성인 전 단장은 “김 기자 안되겠네요. 저 고집은 아무도 못 막아요”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기자는 오사카 우메다(梅田)에 있는 야키니쿠(불고기) 요릿집의 방 안에서 한녹춘 회장, 홍성인 전 단장, 정선박 전 민단 지회장 등과 자리를 함께했다. 앞서 민단 단장실에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그와 따로 만날 수 있었던 건, 뜻밖에도 ‘고향’ 때문이었다. 홍성인 전 단장은 “인터뷰가 어려우니 인사나 하고 가라”며 인사를 시켰다. 그때 홍 전 단장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이렇게 말했다.

“니상(형님), 김 기자 고향이 강원도랍니다. 강원도.”

얼굴을 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또렷한 한국말로 “깡원도. 깡원도”라고 몇 번 되뇌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연방 팔을 잡아 흔들며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주변에 있던 민단 원로들도 “진작 강원도 얘기를 할 걸 그랬네”라며 긴장을 풀었다.

홍성인 전 단장에 따르면, 한녹춘 회장은 자신의 고향을 강원도 고성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사연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한녹춘 회장은 어린 고향 후배에게 ‘불고기를 꼭 사줘야 한다’며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일행이 들어간 야키니쿠집 인근에 한 회장이 운영하던 카바레 건물이 있다. 과거 그가 운영하던 두 곳의 카바레는 현재 주차장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매일 1억원이 넘는 현금이 들어온다고 한다.

한 회장은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동촌’이라고 했다. 홍성인 전 단장은 “강원도 주소를 찾아봐도 고성에는 동촌도 없고 동천도 없다”고 했다. 한녹춘 회장의 이야기다.

둘째 형님 보려고 흥남까지 걸어가

“제 고향은 아주 깊은 산골짜기였습니다. 아버님이 콩이나 팥을 가지고 바닷가에서 열리는 장에 나가 물건을 바꿔온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걸으면, 저녁 무렵에나 장터에 닿았어요.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아서 집이 띄엄띄엄 있었습니다. 집 근처에 큰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서울까지 간다고 동네 어른들이 얘기했어요.”

―주소를 정확히 모르십니까.

“동촌리예요. 동촌리.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 때 강원도 갔을 때, 내 고향이 고성이라고 했어요. 내 한국 본적이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이라고 돼 있습니다. 내 정확한 고향을 몰라서 그때 고성군에서 명예 시민증을 줬어요.”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없어요. 난 고향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지.”

이 말을 하면서 한 회장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홍성인 전 단장이 말을 거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자주 한국을 갔는데, 지금 고향을 잊은 게 참 이상해요. 박 대통령 시절에 중앙정보부에서 아버지 다른 여동생을 찾아줘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40여 년 전에 다시 소식이 끊겼어요. 그때 동생에게 들은 고향 이름이 ‘동촌’이라는 겁니다.”

다시 한녹춘 회장과 나눈 얘기다.

―언제 고향인 강원도 고성을 떠났습니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열세 살이나 열네 살이었어요. 당시 둘째 형님이 흥남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고향에서 무작정 형님을 만나기 위해 흥남으로 걸어갔습니다.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도 안 나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서 무작정 걸었어요. 겨우겨우 둘째 형님을 만났어요. 형님이 일하던 공장에서 함께 일을 했죠.”

당시 그가 일하던 공장은 매일 잔업을 했는데, 어린 한녹춘 회장에겐 일을 잘 못한다고 잔업을 시키지 않았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때였다. 그는 공장 감독원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꾀를 냈다고 한다. 한녹춘 회장의 얘기다.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담배를 한 개비씩 샀어요. 그걸 모아서 감독원에게 건넸더니, 일본인 감독원이 잔업을 하게 해 줬어요. 제 둘째 형님이 제가 잔업 해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줬습니다. 그 돈에다 형님 돈을 합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게 해 줬어요. 당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서 그런지, 화물선에도 기관총을 달고 있었어요. 그 배를 타고, 저 혼자 겨우 일본땅에 도착했어요.”

일본 선원과 싸우고 내린 배 침몰

당시 열세 살이었던 강원도 소년 한녹춘이 처음 밟은 일본땅은, 규슈(九州)의 가고시마(鹿兒島)였다. 그곳에서 한 회장은 작은 고깃배를 타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고 어렸던 탓에, 그물질은 할 수 없었고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했다. 하지만 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에 오자마자 일본음식을 어떻게 만들겠어요? 제가 만든 음식에 불만을 품은 일본 선원 한 명이 저를 때렸습니다. 그래서 대들었더니, 다른 선원들이 가세해서 죽을 때까지 때리더군요. 끝까지 대들었더니, 욕을 하면서 배에서 쫓아내더군요. 아마 ‘저놈, 아주 악질, 독종’이라고 말했겠죠. 하하하. 그런데 그때 배에서 얌전히 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저를 내려놓고 간 그 배가 난파돼서 선원들이 모두 죽었거든요.”

―천운(天運)이었군요.

“예. 저는 천운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가 처음이었죠.”

자신이 탄 배가 침몰한 것을 보고 난 한 회장은 가고시마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오사카로 다시 길을 떠났다. 오갈 곳 없는 그는 오사카 항구 근처를 배회했다. 일본에 와서 그나마 뱃일을 했으니 뱃일을 구해 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뱃일을 찾으러 항구에 갔는데, 텃세가 엄청 심했어요. 가고시마에서처럼 죽기살기로 싸움을 했죠. 매일 싸움을 하다시피 하니까, 저처럼 텃세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붙더군요. 그래서 같이 싸웠죠.”

―체구가 작으신데 싸움을 어떻게 잘하셨습니까.

“체구는 작았지만 빠르고 힘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싸움은 ‘곤조(根性·근성, 마음보, 성질)’입니다. ‘곤조’. 저는 항상 제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갚아줬습니다. 무조건 복수는 한다는 게 제 신조였습니다. 아마, 여기 있는 당신들은 당해도 복수 같은 건 못 하겠지만… 하하하.”

―조직을 만들어서 뒷골목 생활을 하신 건가요.

“제대로 된 조직은 나중에 만들었어요. 오사카에 와서는 저처럼 10대 후반인 아이들과 20대 초반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어요. 그러다가 땅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제 나이 25세 때, 일본이 패망을 해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사람, 한국사람, 중국사람 등이 뒤섞여 살면서 무법천지였어요. 중국사람들은 아예 일본 경찰을 두들겨 팼을 정도니까. 그런 와중에 좋은 땅들이 거저로 나오더군요. 땅주인이 죽은 경우도 있고. 그런 땅을 눈여겨봐 뒀다가, 적은 돈으로 샀죠.”

오사카카바레 전쟁 막올라

1960~1970년대 일본 최대 카바레 가운데 하나였던 후지 카바레(도톤보리 소재)의 현재 모습. 현재는 골조만 남은 채, 1층에서 주차장 영업을 하고 있다.

한녹춘 회장은 도톤보리 인근에 약 4700㎡(1500평)의 땅을 샀다. 그리고 그 땅에 1960~70년대로선 가장 큰 후지카바레를 열었다. 현재 오사카 최대 환락가가 된 곳이다. 그의 나이 26~30세 사이로 추정된다. 한 회장은 후지카바레를 세운 연도를 묻자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손을 내저었다. 한 회장의 ‘통역’을 맡은 홍성인 단장이 “기억이 정확지 않기도 하지만 남이 꼬치꼬치 캐묻는 걸 싫어한다”고 귀띔을 했다. 다시 한녹춘 회장의 설명이다.

“땅을 사고 가만히 보니, 오사카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업이 카바레더군요. 당시 긴쿠카바레가 제일 유명했고, 그 옆에 호텔이 있었는데 거기도 카바레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를 따라다니던 패거리들과 카바레를 짓기 시작했죠. 당시는 패전 후라서,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철근과 콘크리트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걸 구하려면 힘이 있어야겠더군요. 그래서 제 패거리들을 규합해 ‘후지파’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일단 조직이 되면, 공무원이나 기업 이런 쪽들과 거래를 하기 편하거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한녹춘 회장의 후지카바레는 지상 4층 규모였다. 오사카의 다른 카바레를 규모면에서 우선 압도했다. 자연히 최신, 최대 규모 카바레는 오사카 일대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었고, ‘조직들’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경쟁업체들이 개입된 ‘오사카 카바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후지카바레가 장사가 잘되자, 후네오라는 야쿠자가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모모니레라는 야쿠자도 가세했어요. 이들은 후지카바레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사람들이 운영하는 클럽에 가서도 행패를 부렸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서로의 가게를 지켜주려 싸웠습니다. 저희는 숫자도 얼마 안됐어요. 상대편은 숫자도 많았고 체격도 좋았습니다. 싸움은 거의 전쟁이었고, 저희는 불리했습니다. 야쿠자들이 저를 죽이겠다고 해서 일단 줄행랑을 놓았어요. 겨우 중재가 됐다고 해서 돌아왔더니, 저더러 사죄의 의미로 손가락을 자르라고 하더군요.”

야쿠자 “손가락 잘라라” 요구

―손가락을 잘렸습니까.

“아니오. 손가락도 안 잘랐고,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피신시키고, 저는 100일 동안 다시 도망을 다녔어요. 제가 계속 일본 야쿠자들과 싸우니까, 다른 한국 출신 조직들이 도와줬습니다. 호남출신이 만든 난도카이(남도회), 간다히치로(강신옥)파 등이 저희 조직과 뜻을 같이했죠. 네 번째 전쟁부터는 고베의 다카야마가 합세를 했습니다. 다카야마도 한국 사람이죠.”

한녹춘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쇳소리도 섞여 나왔다. 고령으로 숨도 몰아쉬었다. 일행 앞에 놓여 있는 생맥주와 불고기가 줄지 않자, 잠시 말을 멈추고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3~4시간 전에 오사카 민단 본부에서 식사를 했지만, 한 회장은 불고기를 연방 입으로 가져갔다. 홍성인 전 단장에 따르면, 지금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식사량이 많다고 했다.

네 차례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가장 가슴을 졸인 건 그의 일본인 부인이었다. 홍성인 전 단장은 한녹춘 회장에게 “니상(형님)이 도망 다니면서 야쿠자들과 싸울 때, 형님 생사를 모르니 형수님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라며 “형수님께 고마워하셔야 한다”고 하자, 한 회장은 표정없이 말을 받았다.

“그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한녹춘 회장과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약 2시간 동안 얘기를 하던 한 회장은 “피곤하다”며 “다음번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한 회장을 다시 만난 건, 두 달 후인 2009년 10월 중순이었다. 홍성인 전 단장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다시 만나자고 하시더니 어떻게 된거냐”며 한 회장을 채근했다. 계속 날을 잡지 않았던 한 회장이 다시 기자를 초대했다.

“살기 위해 야마구치구미에 들어갔다”

오사카 심장부인 미도쓰지(御堂筋) 대로(大路)에 있는 니코호텔 중식당에서 한 회장을 다시 만났다. 중식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두 달 만에 기자를 만난 한 회장은 웃으며 두 손을 잡았다. “좋은 음식을 많이 시켰으니 마음대로 먹으라”고 여러 차례 권했다. 한 회장과 두 달 전에 끝내지 못했던 얘기를 이어갔다. 한녹춘 회장의 이야기다.

“오사카 도톤보리 일대 조직들과 4차례 전쟁을 치른 후 일이에요. 한숨 돌리려는데 또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베 야마구치구미(山口組) 3대(代目) 조장(회장)인 다오카 가즈오(田岡一雄)가 후지카바레에 놀러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3대 회장이 된 다오카는 고베 부두노동자들이 만든 지역 조직인 야마구치구미를 전국 조직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날 하필 오사카 지역 재일동포 조직인 메이유카이(明友會) 사람들이 후지카바레에 왔다가 다오카 회장에게 모욕을 줬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다음날 야마구치구미 조직이 총동원돼 메이유카이 회장의 팔목을 잘랐습니다. 팔목을 자른 행동대장도 재일동포인 야나가와 지로(한국명:양원석)였어요. 이후 메이유카이는 해체됐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야마구치구미에 들어가지 않으면 오사카 일대에서는 제대로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마구치구미에 투신했습니다.”

―살기 위해서였다는 겁니까.(한 회장은 이 대목에서 여러 차례 언성을 높였다.)

“맞아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조직에 들어간 겁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야쿠자’라고 하지만 난 야쿠자가 아닙니다. 당시 한국사람이 일본인들 틈에서 카바레를 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한녹춘 회장은 야마구치구미에 들어간 이후 얘기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홍성인 전 단장에 따르면, 젊었을 때부터 그는 조직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사카 민단 원로들의 기억을 정리하면, 한녹춘 회장은 야마구치구미의 2급 단계인 오야붕 7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했다. 홍성인 전 단장의 설명이다.

“사실 야마구치구미는 야나가와 지로, 즉 양원석씨가 이끈 야나가와구미(柳川組)의 활약으로 전국을 제패할 수 있었어요. 야나가와구미는 야마구치구미의 하부 조직 정도였지만, 회장인 다오카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졌어요. 그러자 다오카 회장이 해체명령을 내렸지요. 야나가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릴 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죠. 한녹춘 회장은 그 양원석씨보다 직급이 한 단계 위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받아

2009년 8월 15일 오사카 민단본부 강당에서 열린 광복절 행사에 참석한 한녹춘 회장.

야마구치구미에 가입하자 이제 더 이상 한녹춘 회장을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후지카바레는 일본 간사이 지방의 명물이 됐고, 1950~60년대 중심지였던 북(北)오사카의 우메다에도 카바레를 열었다. 한창 사업을 벌일 때에는 카바레가 4곳, 빌딩이 3~4개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0여 년 만이었다.

한국사람이지만 한국을 잊고 지내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이 다가왔다. 1961년 5·16이었다. 5·16으로 권력을 손에 쥔 박정희 정권은 국가 재건과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 정부와 재일동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오사카 지역의 재일동포 거부(巨富)였던 한녹춘 회장에게 박정희 정부 핵심들이 연락을 했다. 한녹춘 회장의 설명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오사카 영사관을 통해 경호실장 했던 ‘피스톨 박’ 박종규(朴鐘圭)씨가 연락을 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정권을 잡았는데, 대한민국을 위해서 도움을 달라’는 거였어요. 당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영사관 측에서 도움을 청하면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 주곤 했었습니다. 나중에는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도 만났어요. 한일수교 회담 때문에 일본에 왔을 때 연락을 했더군요. 술도 잘 마시고, 아주 멋졌습니다.”

한녹춘 회장에 따르면, 1965년 한일수교 회담이 성사된 후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오사카 후지카바레에서 파티를 열었다. 당시 한 회장은 2층 전체에 다른 손님을 받지 않고 한국 정부관계자들에게 내줬다. “파티 비용을 얼마나 받았느냐”는 질문에 한 회장은 그냥 웃어넘겼다. 한녹춘 회장의 얘기다.

“저는 당시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걸 매우 좋게 생각했습니다. 강력하게 해서 본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일을 매우 잘하더군요. 김종필 총리 등이 초청해서 혁명 이후 한국에 가게 됐습니다. 당시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과 저녁을 여러 번 먹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까.

“아니오. 우리가 식사할 때는 육영수(陸英修) 여사는 밥을 같이 안 먹었습니다. 처음 청와대에 갔을 때 박근혜씨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았을 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우연히 만났지만 얼굴만 보고 헤어졌어요. 서로 누군지는 알지만 제가 말을 걸 입장이 아니니까요.”

그는 박근령(朴槿令)씨의 근황을 기자에게 물었다. “17세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이마에 손을 얹고 웃었다. 옆에 앉은 홍성인 전 단장에게 손가락을 꼽으며 “17세? 17세?”라며 재차 확인을 했다.

“반도호텔 인수하시오”

―박정희 대통령과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얘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제게 ‘한 회장이 조국을 위해 도와달라’고 했죠. 박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반도호텔을 인수해서 운영해 보라고 여러 차례 말했어요. 저는 한국에서 호텔을 운영할 자신이 없어 계속 거절했더니 ‘괜찮아, 괜찮아’ 이러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을 자주 다녔습니까.

“그때는 맘에 맞는 사람들이 많아서 1년에 몇십 번 갔어요. 1960년대 1970년대 대선 때는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선거를 돕기 위해 선거 때마다 강원도에 가서 선거운동을 도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통하는 게 있었나 봅니다.

“네. 제가 아주 좋아했어요. 박 대통령은 정말 진짜 군인이고,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어요. 군인정신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박 대통령과 가장 비슷하죠.”

―한국에 왔을 때 고향에도 가셨나요.

“네. 강원도 고성, 속초에 여러 차례 갔습니다. 그때는 속초에 제대로 된 비행장이 없었는데 치안국에서 작은 비행기를 내줘서 그걸 타고 갔어요. 그런데 비행기가 너무 작아서 엄청나게 흔들렸어요. 당시 재일동포 부자가 온다고 해서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들이 우리를 환영하러 나왔던 게 기억납니다.”

―고향에 가서 가족을 찾으셨습니까.

“저희 직계 가족은 찾지 못했고, 아버지가 다른 누이를 찾았죠. 우리 아버님 묘지와 작은 형님의 생사는 알 수가 없었어요.”

한녹춘 회장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일찍 타계했고, 한 회장 어머니는 인근 마을로 재가를 했다고 한다. 1960년대 한국에 왔을 때, 한 회장은 어머니가 낳은, 성이 다른 누이동생을 만났다. 누이동생의 성은 ‘최(崔)’씨였다. 민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 회장은 그 누이동생을 무척 아꼈다고 했다. 일본에 와서도 속초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에게 고깃배를 사라고 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 누이동생과 연락이 끊긴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한 회장이 자신의 고향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오사카 심장부에 영사관을 세우다

주일오사카총영사관 건설 기성회 발족식(1971년 9월 6일)에서의 한녹춘 회장(가운데).

세 시간에 걸쳐 식사를 마친 한녹춘 회장과 기자 일행은 니코호텔을 나와 인근에 있는 한 회장의 도톤보리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사무실로 가던 중 오사카 총영사관 건물을 지나갔다. 총영사관 앞에는 대형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옆에 있던 홍성인 전 단장은 “우리 영감이 없었으면 총영사관 건물은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홍 전 단장의 얘기다.

“총영사관이 있는 미도쓰지 거리는 오사카의 심장부예요. 이 거리에 총영사관이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이 거리에 건물을 올리려고 저희 민단 소속 재일동포들이 1971년부터 1년간 돈을 모았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차별받고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본국에 총영사관을 지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모은 돈이 16억 엔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영감이 기성회장이 돼서 1억 엔을 내고 모금을 독려해 줬어요. 그 돈을 들고 땅을 사려고 갔는데 일본사람들이 땅을 안 판다고 하는 겁니다.”

―왜 안 판다는 거죠.

“오사카 심장부에 조센징(조선인)들이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 모두가 억울하고 실망해서 울고 있는데 우리 영감이 ‘걱정 마라. 내가 해결한다’고 하더군요. 영감의 부인이 일본분인데, 그분 이름으로 땅을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 건물을 올린 다음, 땅의 등기를 영감 부인 이름에서 대한민국으로 바꿨습니다. 우리가 이 건물을 올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태극기가 휘날리는 오늘날의 오사카한국총영사관(2008년 4월, 통일일보).

총영사관 앞에 나부끼는 태극기 밑에는 커다란 동판이 있다. 1974년에 만든 그 동판의 건축주는 ‘대한민국’이 아닌 ‘주 대판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설기성회 회장 韓綠春’으로 돼 있다. 홍성인 전 단장의 설명을 무심히 듣던 한녹춘 회장은 홍 전 단장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알고 나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총영사관 건물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 회장의 사무실은 그의 땀과 인생이 담긴 후지카바레 건물 4층에 있다. 후지카바레 건물은 현재 지상 1층만 주차장으로 쓰인다. 2, 3층은 내부 장식도 없이 골조만 남아 있는 상태다.

한 회장 사무실 옆 방에 주차장 관리인들의 사무실이 있었다. 한 회장 사무실은 1조5000억원대 자산가답지 않게 초라하고 어둠침침했다. 사무실 한쪽에는 ‘라꾸라꾸’라는 상표가 붙은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녹춘 회장은 “주차장 세 곳의 수금을 마치고 나면 새벽인데, 가끔 이곳에서 눈을 붙인다”며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말했다.

한 회장의 책장에는 지난 5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받은 감사패가 수십 개 있었다. 감사패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작으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盧泰愚),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이름이 이어졌다.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교육부장관, 강원도지사, 서울시장 등의 이름이 보였다. 강원도 고성군에서 받은 ‘명예 고성군민증’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한녹춘 회장은 “이명박(李明博) 대통령이 서울시장 때 수해가 나서 수재의연금을 보냈는데 상패 하나 못 받았다”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나에게 상패를 보내라고 할 생각이다”라고 농을 던졌다. 홍성인 전 단장은 “한 회장은 지난 40년간 수해가 난 지역에 항상 300만~500만 엔씩을 보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북송 때 매일 데모”

―한국 정부에서 받은 상패가 많군요.

“본국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항상 도왔습니다. 기억나는 건 김종필씨가 1971년에 국무총리가 됐을 때, ‘한국 경찰에 사이드카가 없다’고 해서 사서 보내줬어요. 제가 80대, 강계중 전 민단단장이 60대를 사서 보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한번은 육영수 여사가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짓는데 건설비가 없다고 해서 1억 엔을 보냈습니다. 무교동에 대한체육회 건물을 지을 때도 저와 이희건 회장 등 세 명이 엘리베이터를 놔줬어요.”

옆에 있던 홍성인 전 단장이 “형님, 영남대에도 1억 엔 보냈고 강원도에 큰 회관 지어준 건 생각 안 나요?”라고 했다. 한 회장은 귀를 기울여 듣다가, “어. 어” 하며 웃었다. 홍성인 단장에 따르면, 한녹춘 회장은 고향인 강원도에 특히 지원을 많이 했다. 40년 전 강원일보가 인쇄기, 등사판 등이 부족하다고 해서 일본에서 사서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한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신한은행도 설립되지 못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1960년도에 오사카에 동포 은행이 두 개 있었어요. 오사카 흥은(興銀)과 상은(商銀)입니다. 원래는 상은이 먼저 생겼고 제가 상은의 이사였어요. 나중에 흥은이 생겼는데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포 은행이 하나보다는 두세 개 정도 있으면 서로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죠. 어느 날 이희건씨가 제게 와서 오사카 흥은의 2대 이사장 선거에 나갈 테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내가 돕기도 했지만 이희건씨는 체격과 언변, 수완이 좋아요. 이사장에 당선됐죠. 그런데 얼마 있다가 이희건씨가 제게 와서 ‘은행에 돈이 없어서 망하게 될 지경’이라고 사정을 하더군요. ‘우리 은행이 하나라도 망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후지카바레에 들어오는 수입금 전부를 흥은에 입금했습니다. 오사카 흥은이 망했더라면 신한은행은 아예 만들지도 못했겠죠.”

―일본에 사시면서 재일동포와 대한민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일이 뭡니까.

“1970년대 조총련과 북한을 상대로 싸웠던 게 가장 기억납니다. 재일동포들을 상대로 한국 영주권 신청을 받을 때, 조총련과 북한이 방해를 했어요. 그때 홍성인 고문 등 청년들과 횃불을 밝히고 시위를 했죠. 전국에서 올라온 재일동포들을 위해서 버스도 대절해 줬어요. 또 재일동포들의 북송 반대 운동을 할 때 매일 아침마다 데모를 하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북한을 미화하고 본국을 비하할 때 아사히 신문 본사 앞에 가서 여러 날 농성도 했어요. 그때는 정말 매일매일이 투쟁이고 전쟁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날이 오면 안돼요.”

“아버님 묘소에 한 번이라도 가 봤으면…”

한녹춘 회장은 조국을 위해서 베풀었던 일을 말할 때 매우 쑥스러워했다. 홍성인 전 단장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는 걸 잘 못해서, 돈과 시간을 다 대놓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민단 사람들이 1960~70년대 청년활동을 하면서 조총련 사람들과 매일 싸웠습니다. 그럴 때면, 조직의 ‘오야붕’인 영감이 직접 나타나서 같이 삐라를 뿌리고 벽보를 붙이고 다녔어요. 영감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데모할 때 사람을 동원할 수도 없었고 모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겨울에는 ‘추운데 뜨끈한 어묵이라도 먹으라’고 몇만 엔씩 쥐여 줬습니다. ‘총련 아이들과 싸울 때 칼은 쓰지 마라. 돌멩이와 주먹으로만 때려라’라고 ‘전투지침’도 일러줬습니다. 칼을 쓰면 중범죄자가 된다는 이유였어요. 우리 영감처럼 물심양면으로 동포를 도운 사람은 없습니다. 민단 건물 만들 때, 본국을 돕기 위해 성금 모을 때마다, 영감은 공치사 한 번 안 하고 거액을 내놨어요.”

한녹춘 회장은 사무실 옆방으로 기자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받은 300여 개의 표창과 감사패, 선물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잇지 못하고, 손짓으로 여기저기를 보라는 듯 가리켰다. 그는 사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고 나서 몹시 피곤해 했다. 한 회장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는 다시 안 가십니까.

“아직은 계획이 없어요. 그런데 아버님의 묘소에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또…”

말끝을 흐리던 한 회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를 일본에 보내주신 우리 둘째 형님 생각이 자주 납니다.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요. 살아 있기나 한지.”

두 번째 인터뷰가 끝나고 얼마 뒤 한녹춘 회장은 주위 사람의 노력으로 40년 전에 소식이 끊겼던 누이동생 소식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한 회장 누이동생은 여전히 속초에 살고 있었으며, 한 회장 아버님 묘소가 강원도 고성의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한 회장은 그 얘기를 듣고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 金鍾泌前 국무총리가 韓綠春 회장에게 보내는 편지

“한 회장님은 대한민국의 둘도 없는 숨은 애국자입니다”

[편집자 주]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년 전 뇌경색으로 병원신세를 졌다. 김 전 총리에게 한녹춘 회장과 인연에 대해서 한마디 해 달라고 하자, 月刊朝鮮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단정한 붓글씨로 한녹춘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김 전 총리의 편지를 독자들에게도 공개한다. 이 편지는 그대로 한녹춘 회장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韓綠春會長님

山野가 온통 丹楓으로 물들고, 五穀百果가 풍성한 좋은 季節입니다.

會長님 近間安寧하셨습니까?

오랜만에 人便으로 會長님의 近況을 傳해받고 반가움과 함께 지난 因緣들을 回想했습니다.

그동안 會長님은 母國이 어려울 때마다 어떤 代價나 條件없이 誠心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會長님이야말로 둘도 없는 숨은 愛國者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大韓民國이 世界 속의 十位圈國家로 跳躍할 수 있었던 것도 會長님의 母國愛와 聲援해 주신 結實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 번 感謝와 尊敬을 드립니다.

지난해 末腦血管疾患入院治療를 받고 退院後療養 중에 있습니다. 아마 來年 봄쯤이면 만나 뵙고 懷抱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期待합니다. 相面時까지 會長님의 康寧을 眞心으로 希願합니다.

二○○九年十一月
雲庭金鍾泌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