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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나들이

〈베르나르 뷔페 천재의 빛:광대의 그림자〉 展

피카소가 질투한 재능, 프랑스 화단의 아이돌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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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쩍 마른 몸·음울한 표정, 뷔페의 트레이드 마크
⊙ 15세에 미술 명문 학교 입학한 천재… 30세엔 회고전까지
⊙ 그림 속 유독 화려하게 표현된 ‘광대’… “온갖 변장과 희화화로 나 자신 충족시켜”
⊙ 파킨슨병 진단 이후 떨리는 손으로 그림 그려
젊은 시절의 베르나르 뷔페. 사진=월간조선
  “나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작은 배다. 몇 번이고 파도에 배가 침수된다. 나는 거대한 파도를 헤치고 항로를 짜려고 노력한다. 파도에 휩쓸리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을 배로 표현한 화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 뷔페의 그림 속 배는 항상 텅 비어 있다. 〈프로방스 산책-마르세유, 발롱 데 조프 항구〉 (1993)가 대표적인 예다. 부와 명예를 이룩한 말년 시절 그림이지만, 왠지 모를 쓸쓸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이처럼 외로움과 공허함은 뷔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삐쩍 마른 모습이다.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하고 입술은 축 늘어져 있다. 이런 인물들은 뷔페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일찌감치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그는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쌓았다.
 
  화가들 역시 뷔페의 재능을 칭송했다. 뷔페와 동갑내기인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내가 인정하는 프랑스 회화의 마지막 거장은 베르나르 뷔페”라는 찬사를 보냈다. 반면 ‘원조 천재’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보다 40세는 더 어린 뷔페를 질투했다고 한다.
 
  지난 2016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서 열린 전시 〈샤갈, 달리, 뷔페 전〉은 한국에 베르나르 뷔페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계기였다. 당시 뷔페를 잘 모르는 일부 관람객 사이에선 “샤갈과 달리 그림도 보고 뷔페도 먹을 수 있는 전시인가요?”라는 웃지 못할 문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시로 뷔페의 한국 내 인지도는 수직 상승했다. 2019년 같은 장소에서 〈나는 광대다 : 천재의 캔버스〉라는 단독 회고전이 열렸다. 당시 15만 명이 전시장을 찾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이번 전시는 5년 만에 개최된 뷔페 단독 전시로 유화·수채화·판화 등 그의 생애 전반을 아우르는 작품 1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타고난 예술가
 
  뷔페가 11세가 되던 해 2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어린 뷔페는 전쟁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맞닥뜨렸다. 이때의 경험이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한 듯싶다. 평생 인간 실존을 탐구하고, 음울한 행색을 한 인물들을 주로 그렸으니.
 
  15세에 명문 예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특례 입학할 만큼 뷔페의 그림 실력은 타고났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라울 뒤피 등이 다닌 이 학교는 프랑스 예술의 산실로 불린다. 감성이 예민한 사춘기, 그의 삶에 다시금 위기가 찾아온다.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가정을 등한시했다. 뷔페는 세상에 홀로 남은 것과 다름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매일 그림만 그리기 일쑤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지독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뷔페 특유의 강박에 사로잡힌 듯한 선 표현은 이 당시 그린 그림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주 찾았던 브르타뉴 바닷가 풍경은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됐다.
 

  하지만 가난한 뷔페에겐 물감 살 돈도, 캔버스 살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당시 그림 중엔 무채색에 가까운 작품이 많다. 질감 또한 비교적 가볍게 표현됐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시기, 물감을 풍부하게 사용해 두껍게 질감 표현을 한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뷔페의 이 골방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방문을 여니 성공의 빛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 화단의 아이돌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브 생 로랑에게 빼앗긴 사랑
 
  19세에 첫 개인전을 연 뷔페.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의 음울하고 공허한 표정은 당시 컬렉터와 비평가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까, 이내 그를 후원하겠다는 갤러리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20세가 되던 1948년 그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상을 받았고, 27세에 잡지 《콘느상스 데 아츠》가 선정한 전후 최고 예술가에 선정됐다. 1958년 29세에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프랑스의 뛰어난 젊은 재능 5인’에 선정됐다. 통상 작가의 전성기는 40대 초중반으로 본다. 하지만 이미 뷔페는 30세에 회고전을 열 만큼 인정받는 작가였다. 그야말로 아우토반에 올라타 제동없이 질주한 셈이다.
 
  뷔페는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상에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그렸다. 매일 12시간 작업이 그의 일상이었다. 평생 8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며 다작 작가로 이름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뷔페에게 예술은 정장을 갖춰 입고 음미해야 할 대상이 아닌 노동이자 삶 그 자체였다.
 
  양성애자였던 뷔페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쉽지 않은 인물이나 남성 누드를 즐겨 그렸다. 20대 뷔페는 피에르 베르제라는 사업가를 연인으로 뒀다. 연인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인 베르제는 뷔페의 작품 활동 외 업무들을 대신 봐줬다. 둘의 사랑은 8년간 지속된다.
 
  그런데 어느 날, 베르제는 뷔페를 떠나 더 젊고 멋진 남자를 찾아 떠난다. 그 남자가 바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다. 생 로랑 역시 뷔페와 같은 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프랑스의 뛰어난 젊은 재능 5인’ 중 한 사람이었다. 뷔페는 생 로랑의 초상화를 그려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친구에게 요즘 말로 치면 환승 이별을 당했다고나 할까.
 
 
  광대가 된 화가
 
〈연보라빛 넥타이를 맨 광대〉, 1991, 종이에 혼합 재료, 65x50cm. ⓒBernard Buffet
  이번 전시에 소개된 〈광대의 얼굴〉 (1955), 〈빨간 배경의 광대〉(1966), 〈광녀-모자 쓴 여인들〉(1970)처럼 뷔페는 광대를 자주 그렸다. 심지어는 스스로 광대로 분장해 그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니콜라스 폴크스는 저서에서 “뷔페가 광대 그림의 일부에 자신을 투영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광대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이유에 대해 뷔페 역시 “광대는 온갖 변장과 희화화로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뷔페는 이 광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뷔페의 광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 강렬한 배경, 커다란 장식이 달린 의상 등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특히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디오르가 뷔페의 광대 그림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광대 그림을 수집해 자신의 집 벽면에 커다랗게 걸어놨다.
 
  20세기 미술은 오늘날 인터넷 유행어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처럼 빠르게 변화했다. 신흥 예술 강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은 추상 미술과 팝아트를 앞세워 세계 미술계를 선도해나갔다.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술의 주요 담론으로 싹트기 시작하면서 개념 미술 등 전례 없던 장르가 확산하고 있었다.
 
  전통의 예술 강국 프랑스엔 위기였다. 아이돌 작가 뷔페를 앞세워 미국 미술에 대항해야 했다. 당시 정부는 뷔페에게 추상 미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뷔페는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아니, 단칼에 거절했다. 이는 정부의 앙갚음으로 되돌아왔다. 1970년대 파리엔 퐁피두센터가 들어선다. 정부는 프랑스 근현대 작품들을 사들여 하나둘씩 퐁피두센터에 소장하기 시작한다. 뷔페의 작품은 쏙 뺀 채 말이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 게 분명하지만, 뷔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장르를 이어나간다. 대가(大家)라면 으레 작품 시기별로 화풍에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뷔페의 그림은 큰 변화 없이 젊은 시절 확립한 스타일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형태를 띤다.
 
 
  고전, 뷔페를 만나다
 
〈단테의 지옥, 지옥에 떨어져 얼음에 갇힌 사람들〉, 1976, 캔버스에 유채, 250x430cm. ⓒBernard Buffet
  오늘날 고전(古典)은 영화로 제작되곤 한다. 미술도 그래왔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해석된 고전은 미술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서를 재해석해 화폭에 옮긴 마르크 샤갈의 〈성서 메시지〉 연작이 좋은 예다.
 
  완숙기에 접어든 뷔페는 문학을 소재 삼아 자신의 예술 지평을 확장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단테의 지옥, 지옥에 떨어져 얼음에 갇힌 사람들〉 (1976)이 대표적이다.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의 한 장면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로 250cm, 세로 430cm를 자랑하는 대작이다. 단테가 묘사한 9층 지옥 중 배신 지옥을 그렸다. 작품 속 인물들은 지옥의 강이 만나는 얼음 호수에서 고통받고 있다.
 

  미겔 드 세르반테스의 대표작 《돈키호테》도 뷔페의 손에서 재탄생했다. 유화로 그린 〈돈키호테와 샤프롱들〉(1988)을 시작으로 석판으로 제작된 〈돈키호테〉(1989), 〈산초 판사〉(1989), 〈노새 몰이꾼과의 만남〉 (1989), 〈풍차〉(1989) 등도 이번 전시에서 소개됐다. 소설 《돈키호테》의 등장인물 모두 삐쩍 마른 몸에 표정 또한 단조롭지만, 우울함 대신 익살스러움이 느껴진다.
 
 
  평생의 뮤즈 아나벨
 
〈십자가에 걸린 해골〉, 1998,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Bernard Buffet
  1958년 여름 뷔페는 프랑스 남동부 생 트로페에서 평생의 뮤즈를 만난다. 피에르 베르제와 이별한 이듬해였다. 그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이자 가수 아나벨 슈와브였다. 그해 11월 둘은 결혼했고, 뷔페가 세상을 떠난 1999년까지 함께한다.
 
  뷔페는 아나벨을 모델로 작품 여러 점을 남겼다. 늘 무기력해 보이던 뷔페의 인물들과 달리 작품 속 아나벨은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2002년 아나벨이 쓴 글을 보면 뷔페를 향한 여전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가 그려준 나의 초상화를 볼 때면, 나는 절대로 늙지 않을 것이며, 살찌지 않고, 추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그가 나를 사랑했던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당신이 지금까지 나에게 주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다음 해에도 아나벨은 이렇게 썼다. “나는 다시 한 번 위대한 화가 베르나르 뷔페에게 변함없는 존경심을 깨닫는다. 그런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 지나칠 만큼 자랑스럽다고 고백한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림 노동을 멈추지 않았던 뷔페. 이 때문이었을까. 199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만다. 서서히 몸이 굳어갔다. 나중엔 손이 떨려 한쪽 팔로 다른 팔을 붙잡은 채 그림을 그렸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린 그림에서 그 처절함이 엿보인다. 이땐 힘이 달렸는지 예전 같은 날카로운 선이나 두꺼운 질감 처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 소재로 해골까지 등장한다. 이미 자신의 말로를 직감하고 있었을까? 타고난 예술가 뷔페는 1999년 가을, 프랑스 남부 투르투르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파킨슨병과 함께 이미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 노동, 그것은 뷔페에게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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