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장인 서상종 대표가 말하는 피아노의 세계 : 월간조선

프란츠 리스트, 페루치오 부조니, 발렌티나 리시차 그리고 정명훈.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것 외에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애호가란 점이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맞은편엔 ‘서리풀 악기거리’가 있다. 언뜻 보면 주택가에 상점들이 섞여 있는 얌전한 거리다. 알고 보면 음악 전공자들이 즐겨 찾는 클래식 악기의 메카다. 100여 곳의 악기 수리공방(工房)이 차분히 자리하고 있다.

건반 97개의 뵈젠도르퍼 피아노

2016년 5월에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당대회 축하공연. 빨간색 그랜드 피아노가 보인다. 스타인웨이 제품이다. 사진=‘조선의오늘’ 캡처

세계에서 가장 건반이 많은 피아노가 서울에 왔다기에 그 공방을 찾았다. 지하로 내려가니 별천지, 아니 피아노 천지였다. 그랜드 피아노가 가득했다. 가정에서 흔히 구비하는 업라이트 피아노도 보였다.

공방 안을 걷다 보니 유독 몸집이 커다란 피아노가 보였다. 전장(全長)도 길고 무엇보다 건반이 많았다. ‘이 피아노인가?’ 피아노를 들여다보고 있던 서상종 그랜드일번지 대표가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이 피아노가 바로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입니다.”

서상종 대표는 1974년 피아노 제작에 입문한 피아노 장인(匠人)이다. 올해로 49년째. 그랜드 피아노와 고악기(古樂器) 전문가다. 오래된 피아노의 부속을 교체해 새롭게 재생(rebuild)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은 영국 경매에서 입찰받아 한국에 들여왔다. 1974년에 제작돼 영국의 한 공연장에서 연주됐던 피아노란다. 피아노 인생으론 서 대표와 동갑내기다. 말로만 듣던 임페리얼이 마침 공방에 있다기에 구경 온 참이었다.

“일반적인 피아노는 건반이 88개입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 중에서도 임페리얼 모델만 건반이 97개예요. 저음 쪽으로 9개가 더 있지요. 전장 길이는 2m90cm예요. 전장 기준으로는 두 번째지요. 파지올리의 피아노 중에 3m8cm짜리가 있어요.”

그랜드 피아노 시장을 잠시 살펴보자. 프리미엄 피아노 시장엔 크게 4개 브랜드가 있다.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파지올리(Fazioli), 야마하(Yamaha)다. 한 개를 더하면 가와이(Kawai) 정도. 시장점유율만 보면 스타인웨이가 압도적인 1위다. 대형 공연홀이라면 스타인웨이는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심지어 북한 평양에 있는 모란봉극장에도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면 대개 스타인웨이나 야마하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스타인웨이는 음색이 맑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리미어 피아노의 전쟁

경력이 오래된 연주자들은 선호하는 피아노 브랜드가 분명한 편이다.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의 전용 피아노, 전속 조율사와 함께 공연하러 다닌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함께 공연을 다녔다. 백건우, 예프게니 키신도 스타인웨이로 연주하는 스타인웨이 아티스트다.

유명 피아니스트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매출과 브랜드의 명예가 좌우되기 마련이다. ‘될 성 부른 떡잎’들을 영입하기 위해 제조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이 있다. 바로 국제 콩쿠르다. 조성진을 세계에 알린 쇼팽 국제 콩쿠르나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단적인 예다.

본선 1라운드 참가자들은 스타인웨이, 야마하, 파지올리, 가와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선택한 피아노로 결선까지 연주하는데, 준비를 위해 브랜드의 바르샤바 매장에 가서 연습할 수 있다. 참가자의 절반 이상은 스타인웨이를 택한다. 조성진과 임윤찬도 스타인웨이를 선택했다.

참가자가 몰리다 보니 스타인웨이는 2시간으로 연습시간을 제한하기도 한다. 나머지 브랜드는 사정이 다르다. 원하는 만큼 연습시간을 보장할 뿐 아니라 식사와 개인 차량, 기사까지 제공하는 브랜드도 있다.

뵈젠도르퍼는 특유의 개성 있는 음색 때문에 경연을 위한 콩쿠르가 아닌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박하우스나 레너드 번스타인도 뵈젠도르퍼를 사랑했다. 한국에선 정명훈이 대표적이다. 정명훈도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을 연주한다. 2014년 구입해 2021년 독주회 때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전국순회공연을 했다.

정명훈은 “스타인웨이가 보르도 와인이라면 뵈젠도르퍼는 품질이 아주 좋은 부르고뉴 와인”이라 말했다.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Schiff)도 지난해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국 공연에서 뵈젠도르퍼로 연주했다. 당시 이렇게 말했다.

“뵈젠도르퍼는 건반의 반응이 즉각적이면서 정교하다. 공명은 따뜻하고 투명하다. 피아니시모의 음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더 부드럽고 더욱 우울한 음색이 뵈젠도르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정 노래하는 악기다. 스타인웨이가 산문이라면 뵈젠도르퍼는 시(詩)다.”

오스트리아 황실 전담 피아노

뵈젠도르퍼는 1828년 오스트리아의 이그나즈 뵈젠도르퍼가 창립했다. 이그나즈 뵈젠도르퍼의 아버지는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뵈젠도르퍼는 1830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황실 및 왕실 전담 피아노 제조자’로 지정됐다. 피아노로서는 최초였다.

프란츠 리스트의 격렬한 연주를 견딘 피아노로 유명하다. 뵈젠도르퍼 특유의 제작 기법 덕이다. 서 대표의 설명이다.

“뵈젠도르퍼는 피아노 만드는 기법 자체가 다른 피아노와 달라요. 바이올린 통을 만들 듯이 만들지요. 스프러스 나무(가문비나무속의 나무)로 울림통을 만들어요. 그래서 소리가 부드럽게 깊고, 울림이 더 좋아요. 반면 스타인웨이는 배음을 많이 살리는 쪽으로 음향 설계를 해요. 관련 특허를 많이 갖고 있어요.”

뵈젠도르퍼는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다. 어떤 모델은 1대를 제작하는 데 6년이 걸린단다. 피아노 한 대에 수억원을 호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창립 후 몇 차례 경영난을 겪다 2008년 일본 기업 야마하에 인수됐다.

공방 한편엔 파지올리 피아노도 보인다. 이탈리아의 파올로 파지올리가 1981년에 설립한 회사다. 창립자 파지올리도 뵈젠도르퍼의 창립자처럼 가구 장인 집안 출신이다. 파지올리는 이탈리아의 자부심이다. 수억원대의 명품 피아노를 만든다.

“새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은 3억5000만원 이상”

뵈젠도르퍼로 연주하는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사진=Decca/Gilbert Francois

한국에 백건우, 조성진, 임윤찬은 있지만 한국산 프리미어 피아노는 없다. 한국에서도 그랜드 피아노가 만들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서 대표는 한국산 그랜드 피아노의 탄생을 지켜봤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74년, 삼익피아노에 입사해 김영수씨의 문하생으로 피아노와 인연을 맺었다. 김영수씨는 당시 한국 최고의 피아노 제작자였다. 그의 손에서 국산 그랜드 피아노가 탄생했다. 삼익 그랜드 피아노의 인기는 상당했다. 서울대 음대에서도 삼익에서 만든 그랜드 피아노를 주문할 정도였다.

서 대표는 서울대 음대 전속 조율사로 일하게 된다. 거기에서 정진우 서울대 음대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의 권유로 1982년 독일 연수를 떠난다. 삼익피아노 독일지사의 업무를 도우며 피아노 제작 공부를 했다. 당시 삼익피아노는 가성비 좋은 악기로 인식되어 유럽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삼익피아노는 1983년 독일 클라우스 훼너 피아노연구소와 제휴하며 독일형 피아노를 표방한다. 이후 피아노 교습 열풍이 불며 집집마다 피아노 한 대씩 갖추는 게 유행한다. 한국의 피아노산업이 전성기였던 시절이다.

서 대표는 20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악기박람회에 참가한다. 이때 리빌드 피아노의 세계에 눈을 떴다. 유럽에서는 오래된 피아노를 신품처럼 재생한 피아노가 인기라는 걸 알았다. 귀국 후 그 길로 예술의전당 맞은편에 그랜드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수리하고 판매하는 전문점을 차렸다.

― 중고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은 얼마 주고 사 오셨나요.

“2억원 안되게 줬어요. 경매 낙찰가에 세금이 붙는데, 관세 8%, 부가세 10%입니다. 새 제품으로 샀다면 3억5000만원 이상은 줘야 해요.”

오래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몇십억원에 팔렸느니 하는 뉴스가 종종 보도된다. 지난해 6월에도 미국 타리시오 뉴욕 경매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다빈치 엑스 세이델 바이올린이 1534만 달러(약 196억원)에 낙찰됐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특히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 같은 명품 바이올린은 기본적으로 100만 달러에서 시작한다.

‘악기 강국’ 한국의 몰락

피아노도 오래될수록 가치가 올라갈까. 피아노는 다른 얘기다. 감가상각이 있다. 기계라서 그렇다. 프리미엄 피아노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같은 중고차라도 최고급 올드카들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같다.

― 그래도 새 피아노가 낫지 않나요.

“너무 비싸니까요. 최근 몇 년간 그랜드 피아노 가격이 금값이 됐어요. 원자재 가격이나 인건비가 오른 탓도 있지만 중국 탓이 커요.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피아노 수요가 폭증했어요. 베이징대 음대는 그랜드 피아노를 한꺼번에 100대씩 주문해요. 1년에 200대밖에 못 만드는데 100대를 한곳에서 가져가는 겁니다.”

― 한국에서는 못 만드나요.

“이제는 못 만들죠. 시스템이 없어요. 삼익은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영창은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지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악기 강국이었다. 1995년 기준으로 기타는 1억4324만 달러(세계 1위), 피아노는 1억1929만 달러어치(세계 2위) 수출했다. 계속될 것 같던 전성기는 돌아보니 1995년이 정점이었다. 중국의 저가 공세가 거세졌고, 피아노 붐이 사그라들었다. 아파트 거주 인구가 많아지며 층간 소음 문제가 불거졌다. 디지털 피아노로 수요가 옮겨갔다. 피아노 교습 자체가 인터넷과 게임 등에 밀리기도 했다.

이후 삼익악기와 영창피아노 모두 인건비가 싼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겼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두 회사 모두 경영난을 맞으며 주인이 바뀌었다. 영창피아노는 부도 후 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해 ‘HDC영창’이 됐다.

“피아노 기술자가 없다”

― 제작 원가를 낮추는 게 아니라 고가 피아노 제작으로 방향을 돌렸으면 어땠을까요.

“원래 삼익악기가 영창악기를 인수하려고 했어요. 대주주가 됐는데 영창 노조에서 공정위원회에 고발을 했어요. 독과점이라며 합병을 막아달라고요. 공정위에서 제게 국내 악기시장 현황을 증언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3번 갔는데 공정위에선 제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어요.”

― 뭐라고 답변할 생각이었나요.

“‘국내에 영창, 삼익만 있는 게 아니다. 외국 브랜드 다 들어와 있다. 두 회사가 합병해서 세계와 싸워야 한다. 우리나라 브랜드 두 곳이 힘을 합치면 야마하와 싸울 수 있다’ 이렇게 답하려고 했는데 저한텐 묻지도 않았어요. 합병할 수 없다고 결정했죠.”

결국 삼익은 영창 인수를 포기했고 영창은 곧 부도를 맞았다.

― 이후 벌어진 일을 보면 근시안적인 결정이었네요.

“그렇죠.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단순히 독과점이라는 논리로 칼질을 해버려서 산업 자체가 죽은 격이에요. 한국인 피아니스트들도 품질 좋은 한국 피아노가 있다면 그걸로 외국에서 연주하고 싶지 않겠어요?”

― 지금이라도 다시 한국산 그랜드 피아노를 만들 수는 없나요.

“이제는 기술자들이 한국에 없어요. 중국으로 이주했거나 다 흩어졌죠. 피아노는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각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필요해요. 나무를 자르는 것부터 시작해요. 나무를 가져와서 관리해야 하고, 나무는 또 한 가지만 쓰나요. 어떤 목재를 쓸지 목재 전문가가 있어야 해요. 생산 시스템을 만드는 관리자, 생산 책임자, 저처럼 마지막에 소리를 만드는 사람까지 많은 전문가가 함께 만드는 겁니다.”

― 종합예술이네요.

“피아노에 철이 많이 들어가요. 그러면 철을 다루는 전문가도 필요해요.”

양궁 장비 생산했던 삼익악기

2000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시절의 김수녕 선수. 양궁 장비에 ‘samick’(삼익) 로고가 쓰여 있다. 사진=조선DB

피아노의 제조 공정 때문인지 악기 기업이 언뜻 분야가 전혀 달라 보이는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삼익악기는 1975년 양궁사업부(삼익스포츠의 전신)를 설치해 양궁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선수용 리커브 양궁 장비를 만들어 국가대표 팀에 공급했다.

삼익이 만든 장비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당시 양궁 활 시장은 호이트와 야마하가 양분하고 있었다. 한국 남자 대표 선수들은 호이트, 여자 대표 선수들은 야마하 장비를 쓰고 있었다.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호이트가 한국 남자 선수들에게 최신 장비 판매를 거부했다. 결국 남자 단체전과 개인전 모두 미국에 금메달을 내줬다.

대한민국 양궁협회는 이듬해부터 학생부 선수들은 국산 장비만 써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에 발맞춰 국산 장비의 품질도 더욱 좋아졌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여자 양궁 김수녕 선수가 삼익스포츠 장비로 금메달을 땄다. 삼익스포츠의 활이 세계에 알려지며 시장점유율이 상승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선 양궁 금메달리스트 4명이 모두 삼익이 만든 장비를 사용했을 정도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당시엔 선수용 양궁 시장의 20%, 레저용 양궁 시장의 40%를 삼익이 차지하고 있었다. 글로벌 1위 기업이었던 호이트로서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올림픽 이후 물량 공세를 시작했다. 각국 선수들에게 포상금을 내걸고 후원을 늘렸다. 여기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며 삼익스포츠는 경영난을 겪었다. 결국 2015년에 파산했다. 지금은 또 다른 토종기업 윈앤윈이 한국 양궁 장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 피아노를 전자제품처럼 자동화해서 만들기는 힘들겠네요.

“그렇지요.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창악기를 인수한 후, 현대자동차 부회장이었던 박병재 대표가 영창악기 경영을 맡았어요.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악기도 자동차와 같은 조립산업이다. AS 없는 피아노를 만들겠다.’”

― 자동차 회사였다면 아주 좋은 경영 목표네요.

“중국 톈진에 있는 악기 공장을 싹 뜯어고쳤어요. 최신 설비를 설치했어요. 투자를 엄청나게 해서 자동화를 했지요. 추진력이 엄청난 분이니까요. 그런데 피아노는 자동차가 아니거든요.”

현재 HDC영창의 매출에선 어쿠스틱 피아노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이젠 전자악기의 비중이 높다. 세계적인 신시사이저 브랜드 커즈와일을 영창에서 보유하고 있다. 서 대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국에선 피아노 생산 인프라가 무너졌어요. 무너진 후엔 사람들을 규합해서 다시 시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이라도 다시 피아노를 만들고 싶어요.”

― 그랜드 피아노를요?

“예전 방식의 포르테 피아노를 만들고 싶어요. 베토벤, 모차르트 시대의 피아노. 철이 안 들어갑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크게 노래하듯이 큰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아니었거든요. 말하듯이 연주하는 피아노였어요.”

피아노 재생

― 유행은 돌고 도니 그런 피아노가 인기를 얻을 수 있겠네요.

“유럽엔 이미 그 시대가 왔어요. 일본도 50년 전부터 고음악을 하고 있고요. 한국은 이제 시작입니다. 한예종에도 2021년에 고음악과가 개설됐어요.”

― 고음악에는 고악기가 필요하겠네요.

“바이올린만 해도, 예전 바이올린과 현재 바이올린은 모양이 달라요.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부임하고 그러더군요. ‘나는 200~300년 전에 제작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데, 협연을 해보면 현재의 피아노와는 음색이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옛날 피아노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 베토벤의 음악도 고악기로 연주하면 느낌이 완전히 다르겠네요.

“그래서 제가 피아노 리빌드를 하는 겁니다. 옛날에 만들어진 피아노 통에 내부 부속만 바꾸는 거예요. ‘올드 바이올린’이라는 게 뭔가요. 나무가 산화되고 썩어서 소리가 부드럽고도 힘차게 나는 거예요.”

― 그런가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뒷얘기가 있어요. 예전에 유럽에서 집을 부쉈는데 좋은 목재가 나온 거예요. 그걸 잘라서 바이올린으로 만든 게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 크레모나에 가면 스프러스 나무를 켜요. 몇 년에 켜서 말리기 시작했는지 다 기록해요. 세월이 흐를수록 목재의 가치가 올라가요.”

― 왜 그런가요.

“나무 속의 진액이 싹 빠져나가야 소리가 잘 울리거든요. 그래서 나무를 켠 후 말리는 겁니다. 피아노도 똑같아요. 나무가 산화되고 진이 다 빠져나가면 거칠거칠한 섬유질이 없어지면서 소리가 부드러워져요. 울림이 잘 생기고요. 그래서 예전 피아노의 통을 살리고 내부의 기계만 새것으로 바꾸는 겁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브로드우드

서상종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브로드우드 피아노. ‘베토벤의 피아노’와 같은 모델이다. 사진=서상종

서 대표는 하프시코드, 포르테 피아노, 쳄발로 같은 고악기들을 여러 대 갖고 있다. 피아노 수집에 몇십억원은 썼단다. 피아노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다.

그가 갖고 있는 피아노 중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브로드우드(Broadwood)다. ‘베토벤 피아노’라고도 불린다.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베토벤이 피아노 뚜껑에 귀를 대고 진동을 느끼며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피아노가 바로 브로드우드 피아노다.

1818년 세계적인 피아노 제작자 존 브로드우드가 자신이 만든 피아노 중 가장 좋은 피아노를 베토벤에게 헌정한다.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작곡도, 연주도 못 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피아노를 기증받았지만 일종의 증여세를 낼 돈조차 없었다. 정부에서 특별히 허가해줘 베토벤은 겨우 피아노를 인수했다.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만난 후 베토벤의 예술혼은 다시 켜졌다. 1, 2악장만 완성되고 나머지는 미완성 상태였던 베토벤 소나타 29번이 그렇게 완성됐다.

“이 브로드우드 피아노는 베토벤에게 헌정된 피아노와 똑같은 모델입니다. 1819년에 만들어진 걸 경매로 낙찰받았어요.”

국악과 피아노의 만남

세계적인 고악기 복원 전문가 에드윈 뵌크(Beunk)와 서상종 대표. 사진=서상종

영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해온 뵈젠도르퍼 임페리얼의 새로운 동반자는 누굴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임동창 선생이다. 서 대표는 지난 2012년경 오랜 친구이기도 한 임동창을 위해 피앗고를 만들었다.

서 대표의 설명이다.

“1700년대 초 처음 탄생한 후 피아노는 작곡가와 제작자가 소통하는 가운데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음악도 변화했어요. 그 속에서 음악가들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나갔지요. 임동창 선생에겐 자신만의 소리가 있거든요.”

― 어떤 소리인가요.

“예를 들면 국악적인 연주 기법이지요. 한국 전통 음악을 편곡하기도 하고, 자신의 주법으로 해석해서 연주하기도 하지요. 꽹과리, 징 같은 악기들과 함께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일반 피아노로는 기(氣)가 안 따라붙는 거예요. 그러니 센 소리로 만들어달라는 겁니다.”

― 어떻게 센소리로 만들죠?

“해머가 현을 칠 때 소리를 예쁘게 정제하기 위해 해머를 펠트로 감아놓거든요. ‘피앗고1’은 해머에 딱딱한 아크릴을 씌웠어요. 임 선생과 오랫동안 소통하며 만들었어요. 직설적인 소리, 정제되지 않은 소리를 다이내믹하게 내고 싶다는 요청을 소리로 구현해봤어요.”

해머는 피아노 건반마다 연결되어 있는 망치 모양의 부속이다. 건반을 누르면 양모 펠트로 감싸진 해머가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낸다.

“그다음엔 해머를 딱딱한 단풍나무를 이용해 만들었어요. 그게 ‘피앗고2’입니다.”

산전수전 겪은 여성의 소리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서상종 대표. 두 사람은 피아노를 개량해 피앗고를 만들었다. 사진=문덕관

전라북도 완주에 가면 피앗고를 만날 수 있다. 임동창 선생의 풍류학교 내 연주 공간에 있다. 보통의 피아노와는 음색이 전혀 다르다. 소리가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음색이다.

임동창 선생은 피앗고의 음색을 이렇게 설명했다. ‘기존 피아노의 소리가 안개처럼 깔린다면 피앗고는 뚫고 나간다.’

뵈젠도르퍼를 쓸으며 서 대표가 말했다.

“임 선생이 이 피아노가 가진 독특한 소리를 듣다 보면 ‘이런 음악을 만들어야겠다’ 느낌이 오겠지요. 어떤 음악이 나올지 기대돼요. 음악을 만드는 건 창작자의 역할이고 저는 도울 뿐입니다.”

임동창 선생은 임페리얼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서 대표를 만난 이후 뵈젠도르퍼는 완주로 옮겨졌다. 피아노 음색이 어떤지 그에게 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성이 내는 소리다. 깊은 울음을 품은 피아노다.”

세계에서 가장 긴 피아노를 구경하러 갔다가 피아노 장인 얘기에 푹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