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1910년대 쓰인 신소설 《밋친 나뷔》 : 월간조선

1910년대 쓰인 신소설로 추정되는 필사본 원고 《밋친 나뷔(현대어 ‘미친 나비’)》가 처음 공개되었다. 서울 인사동 고서점 ‘호산방’ 소장본으로 전북 완주에 위치한 삼례책마을 박대헌(朴大憲) 이사장이 40년 전 입수했으나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박 이사장은 “고서수집가 조성호(1990년대 작고)씨에게서 필사본을 입수했지만 이전 내력을 듣지 못했다”며 “처음 봤을 당시 낙장 된 원고 조각에서 ‘해동초’라는 글씨가 보였는데, 이는 저자 최찬식(崔瓚植·1881~1951년)의 호 해동초인(海東樵人)으로 여겨지나 이후 분실했다”고 말했다.

최찬식은 이인직(李人稙·1862~ 1916년), 안국선(安國善·1878~1926년), 이해조(李海朝·1869~1927년) 등과 더불어 신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대표작 《추월색》(1912)을 비롯해 《안(雁)의 성(聲)》(1914), 《해안(海岸)》(1914), 《금강문(金剛門)》(1914), 《도화원(桃花園)》(1916), 《능라도(綾羅島)》(1918) 등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한국 신문학 초창기의 개척자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최찬식의 작품 대부분은 새로운 세태의 단면을 젊은이들의 애정관계에 초점을 맞춰 전개한다는 특징을 가졌다.

지난 2002년 국립 민속박물관에서 전시된 한국근대문학사의 희귀한 존재인 ‘딱지본’ 소설들. 최찬식의 《추월색》, 조중환의 《장한몽》, 이해조의 《옥중화》, 작자 미상의 《김인향전》 등이 보인다.

신소설은 한국 근대문학 태동기인 개화·계몽 시대에 국문 글쓰기로 쓴 서사 양식을 말한다. 한자 투에서 벗어나 일상의 언어로 고전소설의 설화성이나 비현실성을 극복한 소설류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이광수(李光洙·1892~?)의 《무정》(1917)이 등장하기 전에 등장한 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최찬식의 《추월색》 등이 이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박 이사장에 따르면, 《밋친 나뷔》는 판면 세로 22.6×가로 32.6cm, 반곽(半廓) 세로 13×가로 12.9cm에, 10행의 계선(界線)이 청색으로 인쇄된 미농괘지(美濃罫紙)의 원고용지를 사용했다. 원고는 모두 109장(218쪽)으로 1행에는 최대 20여 자의 글자를 썼다. 한글을 사용하면서 한자는 괄호에 넣었다.

붓글씨 세필(細筆)로 시종일관 매우 아름답게 썼으며 모든 글자가 판독이 가능하고 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제책은 판심(版心)을 반으로 접어 책등 부분의 위아래 두 곳을 종이끈으로 묶었다. 제책 된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원고의 책등 부분 왼쪽 아래에 쪽수 표시가 있다. 이는 제책 할 때 원고의 순서가 뒤바뀌지 않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는 게 박 이사장의 설명이다.

집요한 것이 사람의 탈 쓴 ‘미친 나비’ 같아

《밋친 나뷔》의 줄거리는 이렇다.

여학교 졸업반 이숙자의 행실과 미모는 학교는 물론 문안에 소문이 자자하다. 평양 부호의 외아들로 경성에서 중학교를 다닌 김춘환은 학생의 본분과 도리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악인이다. 그는 숙자에게 반하여 숙자네 학교 침공(針工)교사 안운경을 매수해 숙자를 손에 넣으려 한다. 번번이 낭패를 보면서도 집요한 것이 사람의 탈을 쓴 ‘미친 나비’와 같았다.

숙자는 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여자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 우연히 신문에서 ‘고학장지(苦學壯志)’란 제하의 조선 유학생 박종인의 기사를 보게 된다. 감동한 숙자는 그를 격려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와 20원을 동봉해 무기명으로 전달한다.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박종인은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20원을 기부금으로 써달라고 말한다. 숙자는 유학생 모임에서 김춘환과 재회하지만 냉담하게 대한다. 반면 박종인에게는 흠모의 마음을 느낀다.

일찍이 집안에서 자유결혼을 허락받은 숙자는 박종인의 전후 내력을 아버지에게 고백하니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 나쁜 운명처럼 박종인은 김춘환과 동향(평양)인데다 친구 사이다. 김춘환은 가난한 박종인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이때 박종인과 숙자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 김춘환은 결혼을 방해하려 거짓 소문을 낸다.

숙자는 도쿄고등사범을 졸업하고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귀국선을 탄다. 부산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목포에 당도한다. 한편 김춘환은 지금까지 실패한 계교에 분해하며 계속 숙자를 탐할 기회를 엿보다가 숙자가 외가가 있는 나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먼저 목포에 도착한다. 마침 안운경이 목포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김춘환은 그를 만나 계략을 꾸민다.

숙자가 목포에 도착하였으나, 나주에서 마중 나온 하인 또쇠는 일복(日服)을 한 숙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쇠는 나주로 돌아가고, 또쇠를 못 만난 숙자는 ‘목포 여관에서 기다린다’는 전보를 나주에 보낸다. 김춘환은 건달을 매수해 건달로 하여금 나주로 향하는 인력꾼 행세를 하게 한다. 숙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길을 떠난다.

밤길을 지키던 김춘환이 숙자 일행을 발견한 뒤 풀숲으로 끌고 가 겁탈하려 한다. 숙자는 죽을 각오로 저항했고, 이때 말 요령 소리와 함께 나타난 숙자의 외숙과 또쇠가 구출한다.

이후 경성에 도착한 숙자는 여자중학교 총교사로 내정되고 박종인은 은행원이 되었다. 이들은 혼례를 치르고 평양으로 신혼여행을 간다.

한편 김춘환은 숙자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아아 이놈의 지은 죄는 천 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남을지라…”며 혼잣말을 하다가 목을 맨다.

때마침 평양 부벽루를 구경 중이던 숙자와 박종인은 한 소년이 목을 매는 광경을 목격한다. 급히 끌어내리고 얼굴을 보니 다름 아닌 김춘환이었다. 숙자와 박종인은 김춘환을 위로하며 함께 경성으로 돌아온다.

붓글씨로 쓴 《밋친 나뷔》 원고의 마지막 대목을 컴퓨터 워드 프로세스로 옮겼다. 한글 고어(古語)를 그대로 살렸다.

‘지나치게 우연성에 의존하는 소설 구성’

이 소설 원문의 마지막 대목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김춘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아, 하느님이시여. 이 목숨을 버리기는 어렵지 아니하오나 태산 같은 이놈의 죄를 어디 가서 벗어오리까” 하며 탄식하는데, 그 소리를 박종인이 듣고 깜짝 놀라 좇아가니 한 소년이 목을 매고 있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니 김춘환이었다.

최찬식은 다른 소설에서도 ‘사건의 우여곡절과 지나치게 우연성에 의존하는 소설 구성법만을 따르고 있는데’(문학평론가 권영민) 이 《밋친 나뷔》 역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추월색》과 스토리 전개 겹치는 부분 많아

삼례책마을 박대헌 이사장.

박 이사장에 따르면 《밋친 나뷔》와 《추월색》은 스토리 전개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청춘 남녀의 기구한 애정 갈등을 모티브로 하면서 도쿄 유학생인 여성이 짝사랑하던 남성의 구애를 거절하자 그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고 칼로 위협하며 죽이려는 장면이 유사하다. 또 작품 배경에 신문물의 자유연애 사상이 담겨 있으며 행복-고난-행복의 패턴이되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종결짓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추월색》은 《밋친 나뷔》보다 스케일이 훨씬 크다. 《밋친 나뷔》가 경성, 나주, 목포, 평양, 도쿄 등이 소설의 무대라면, 《추월색》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일본, 중국, 영국 등의 아시아와 유럽이 무대다.

또 사건의 전개도 훨씬 복잡하다. 《추월색》의 경우 남녀 주인공인 이시종의 외딸 정임과 김승지의 외아들 영창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라든지, 신혼여행 중에 마적단에 납치되는 수난을 겪다가 영창의 부모와 만나는 곡절이 드라마틱하다.

또 두 작품은 단어나 표현에서도 유사성이 있다. 《밋친 나뷔》에서 김춘환이 숙자를 겁탈하려 할 때 ‘안으려던 허리를 다시 움켜 안고 길옆 수풀 속으로 들어가니 솔개에 채인 병아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추월색》에서는 ‘가늘고 약한 허리를 덥석 안고 나무 수풀 깊고 깊은 곳, 육모정 속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들어가니, 이때 형세가 솔개가 병아리를 찬 모양이라’고 적혀 있다.(‘육모정’은 육각정을 말한다.)

비슷한 장면과 대사는 두 소설의 여러 대목에서 확인된다. 《밋친 나뷔》에서 숙자가 김춘환을 나무라며 “이게 무슨 짓이오. 당신도 해외에서 공기를 마셨으며 당신 말씀대로 이십세기 문명한 시대에 처한 양반이 한낱 아녀자에게 이러한 행실을 한단 말이오”라고 말한다. 《추월색》에서 정임이 강한영에게 “여보시오. 해외 유학도 하고 신사상도 있다는 이가 이런 금수의 행실을 행코자 하면 어찌하자는 말씀이오? 지금 일개 여자에게 악행위를 더하고자 하심은 실로 비소망어평일이로구려”라고 말한다.(‘非所望於平日’은 평소에 바라던 바가 아니다는 뜻이다.)

두 소설의 구조가 비슷하면서도 《추월색》이 좀 더 진일보한 서사의 전개와 디테일을 지닌다는 점에서 《밋친 나뷔》가 《추월색》보다 먼저 쓰인 초기작일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쳐본다.

1912년경 작품으로 추정

《밋친 나뷔(현대어 ‘미친 나비’)》의 원고는 판면 세로 22.6 x 가로 32.6cm, 반곽(半廓) 세로 13 x 가로 12.9cm 크기다.

그러나 박대헌 이사장은 《밋친 나뷔》의 작성연대가 표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1912년경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논거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밋친 나뷔》 원고에 사용된 양면괘지의 제작 연대가 한일합방(1910년) 전후에 제작된 종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구한말 서화가 강진희(姜璡熙·1851~1919년)가 펴낸 《악부합영(樂府合英)》(1913) 역시 양면괘지에 쓴 친필 원고본이다. 《밋친 나뷔》 원고에 사용된 종이와 일정 부분 비교가 된다.

둘째, 《밋친 나뷔》의 대사 중에 ‘〈포켓〉에서 광화문 그림장을 선선히 내어주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그림장(張)이란 ‘그림을 그린 종잇장’, 또는 ‘종잇장에 그린 그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이르는 말로 ‘광화문 그림장’은 ‘광화문 그림이 도안된 지폐’를 지칭하는 말로 보인다.

필사본 원고의 맨 마지막 쪽에 ‘밋친나뷔 종’으로 적혀 있다.

소설 속 화폐를 통해 당시 소설의 창작 연대를 유추할 수도 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서 통용된 지폐 가운데 ‘광화문’이 도안된 지폐는 1906년과 1908년, 1909년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에서 발행된 ‘오원권’과 한일합방 다음 해인 1911년 구(舊)한국은행에서 발행한 ‘5원권’이 있다. 전부 동일한 도안을 사용했다.

일본 다이이치은행권은 1906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구한국은행권은 1911년부터 1914년 조선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통용되었다. 따라서 《밋친 나뷔》에서 지칭한 ‘광화문 그림장’은 1906년부터 1914년 사이에 통용된 지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소설 중에 숙자가 ‘나주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군산에서 이리~대전을 거쳐 경성으로 가는 호남선 열차를 이용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주에서 배를 타고 군산에 갔다’는 의미는 호남선 전 구간 개통이 안 됐다는 의미다. 전 구간[대전~이리(익산)~송정리~나주~목포]은 1914년 1월 무렵 개통되었다. 따라서 호남선의 일부 구간 개통 시기인 1912년 3월부터 1914년 1월 사이에 쓰였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미친’ ‘나뷔’ ‘狂蝶’ … 개화기 신문에 자주 등장

다만 몇 가지 의문도 든다. 《밋친 나뷔》는 당대 소설 제목과 비교해 상당히 획기적이다. 1910년대 신소설은 대개 구투(舊套)의 한문식 제목이 대부분이다. 《금수회의록》《자유종》《구마검》《안(雁)의 성(聲)》 같은 경우가 그렇다. 최찬식이 발표한 작품 제목들 역시 한자어로 돼 있다. 따라서 1910년대에 《밋친 나뷔》라는 제목을 실제 썼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다만 ‘미친 나비’와 같은 의미인 한자 ‘광접(狂蝶)’이 당대 언론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1907년 6월 18일 자 《황성신문》 2면에 ‘광접투향(狂蝶偸香)’, 1909년 6월 2일 자 《황성신문》 2면에 ‘주가광접(酒家狂蝶)’, 1910년 3월 27일 자 《황성신문》 2면에 ‘광접취화(狂蝶醉花)’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또 1910년 6월 23일 자 《대한매일신보》 2면에도 ‘광접당시(狂蝶倘猜)’, 1912년 4월 12일 자 《매일신보》 3면에 〈이소화(李笑花)의 광접(狂蝶), 엄중 징치하여 달라고〉라는 기사도 등장한다.

이로 유추할 때 1900년대 전후 시기에 ‘광접’, 혹은 ‘밋친 나뷔’는 낯설거나 생경한 단어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밋친’과 ‘나뷔’라는 단어 표기도 개화기·계몽기 시절에 통용되던 것이었다.

1899년 3월 24일 자 《독립신문》(‘밋친 손’), 1899년 3월 13일 자 《독립신문》(‘밋친 군슈’), 1899년 11월 4일 자 《독립신문》(‘밋친 계집’), 1907년 9월 1일 《대한매일신보》(‘밋친 사람’), 1900년 11월 23일 자 《제국신문》(‘나뷔의 니난 형샹’), 1900년 11월 24일 자 《제국신문》(‘가령 나뷔로 말하여도’), 1908년 5월 10일 자 《대한매일신보》(‘密花沸手玉 나뷔에’) 등 신문에서 ‘밋친’과 ‘나뷔’의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남녀평등과 자유결혼 사상 담겨

박대헌 이사장에 따르면, 신소설 《밋친 나뷔》는 남녀평등권과 자유결혼, 신교육관에 역점을 두고 쓴 소설로 보인다. 숙자를 탐하려는 평양 부호의 외아들 김춘환을 ‘미친 나비’로 설정하면서 새로운 자유결혼의 부부상으로 숙자와 박종인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세 사람(이숙자, 박종인, 김춘환)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물의 유입을 강조하면서, 신여성의 사회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작품 속 지문에 남녀평등권과 자유결혼의 당위성을 담고 있다.

박대헌 이사장은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신소설의 자유결혼관 의식 중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의 절정 부분에서 김춘환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을 일곱 차례나 부르면서 참회와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자살을 시도한다. 이때 이숙자와 박종인이 김춘환의 목숨을 구해주고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기존의 소설에서는 볼 수 없던 또 다른 형태의 해피엔딩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대헌 이사장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최찬식의 최초 작품으로 알려진 《추월색》과 같은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소설 《밋친 나뷔》 원고의 발굴은 근대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밋친 나뷔》와 《추월색》 작품의 비교에서 살폈듯이 두 작품은 여러 곳에서 서로 동일한 구조와 일정한 패턴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밋친 나뷔》 작품이 《추월색》 출간 이전에 완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합니다.

다만 《밋친 나뷔》가 왜 출간되지 않고 사장(死藏)되었는지도 앞으로 연구해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