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현대사 위인 다수 묻혀… 안창호·방정환·조봉암·한용운·박인환·이중섭·나운규 등
⊙ 서울시 중랑구 망우본동 산57-1번지.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 개장
⊙ 1973년 滿葬으로 폐장.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개칭. 현재 7000여 기 잠들어
⊙ 서울시 중랑구 망우본동 산57-1번지.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 개장
⊙ 1973년 滿葬으로 폐장.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개칭. 현재 7000여 기 잠들어
- 항공 사진으로 본 망우리공원. 작은 사진은 1967년 9월 추석 당시의 망우리 풍경이다. 사진=한국문화원연합회 홈페이지, 조선일보DB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인 이근배 시인은 ‘대한민국 역사·문화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망우리공원’이라고 말한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망우리를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의자(主義者)들의 못자리’로 명명한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맞을 수 있는 곳이 망우산이다. 아차산으로도 불린다.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한강이 서해로 흐른다. 한강 건너편 지금의 강동구와 송파구는 위례백제 한성 지역이었다. 고구려군은 이곳 아차산까지 내려와 진을 치고 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온달장군의 전설이 이곳에 묻혀 있다.
우리나라에 공동묘지가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1910년대만 해도 경성부에 미아리·이문동·이태원·만리동·여의도·연희동 등 모두 19개소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도시가 개발되면서 없어졌다.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묘를 쓰기 시작해 1973년 만장(滿葬)으로 폐장되기까지 40년이 흘렀다. 1998년 묘지 명칭을 떼고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이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옛 묘지가 미래유산이 되는 데 80년이 걸린 셈이다.
발자크, 이브 몽탕, 카사노바 등이 잠든 프랑스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스웨덴 스톡홀름의 숲속 공원묘지 ‘스코그스키르코 가르덴(Skogskyrko Garden)’처럼 세계적 명소를 꿈꾼다.
1933년부터 서울시 공동묘지로 사용
서울시 중랑구 망우본동 산57-1번지, 망우리공원에는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이태원무연분묘합장묘 2만8000여 기를 포함 4만8000여 기(실제는 5만여 기 이상)가 모셔졌으나, 이후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2021년 7월 현재 7000여 기로 줄었다. 지난해 윤달인 4월에도 200기가 이장하였다.
최근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 刊)을 펴낸 저자 정종배(鄭鍾培·63)씨의 말이다.
“일제강점기 경성부가 이곳에 경성부 부립공동묘지 분묘 단지를 조성하려 했던 이유는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이면에는 조선 왕조 건원릉의 맥을 끊고 훼손하기 위해 아차산 망우리에다 공동묘지를 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을 ‘경기도 경성부’로, 건원릉이 있는 ‘망우리면’을 ‘망우리’로 격을 낮추었다고 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위원인 정종배씨는 1937년부터 1973년까지 등재된 모든 묘적부를 열람했다. 묘지기록이 없거나 사라진 인사들이 많아 유족과 후손을 탐문하고 세월에 잊힌 망우리 골골을 누볐다. 그렇게 20여 년간 땀을 흘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덧붙여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을 펴냈다.
벽돌 두께인 705쪽에 걸쳐 독립운동가 안창호·오세창, 정치인 장덕수·조봉암·이기붕, 의사 지석영·오긍선, 시인 한용운·김동명·김영랑·박인환·김상용, 작가 김말봉·최학송·계용묵·김이석, 아동문학가 방정환·강소천, 희곡작가 함세덕·이광래, 영화인 나운규, 작곡가 채동선·함이영, 화가 이인성·이중섭, 조각가 차근호·권진규 등 근현대사 130여 인사를 열전(列傳) 형식으로 정리했다. 《월간조선》은 망우리공원에 잠든 수많은 위인 중 저자와 협의해 10인의 삶을 요약해 소개한다.
아사카와 다쿠미
(淺川巧·1891~1931년)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서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다쿠미는 1907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한 교회에만 출석하기보다는 여러 교회, 즉 욱정교회(감리교, 현 반포동 남산감리교회), 정동예배당(장로교, 현 성북동 덕수교회) 등에 출석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 고원과 기사로 홍릉 및 광릉수목원의 기틀을 다졌다. 대한민국 인공림 37%를 차지하는 잣나무 씨앗 발아법인 ‘노천매장법’을 한국인 노동자들의 말에 힌트를 얻어 온실에서 2년 만에 발아하는 것을 노천에서 1년 만(1924년 3월)에 발아시켜 한반도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급성 폐렴으로 1931년 4월 2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 후 이문동 사람들이 엄청난 봄비 속에서도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하여 몇 개 조로 나눠 운반,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로 이장했다. 2015년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으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주된 추모객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사람들이다.
지석영
(池錫永·1855~1935년)
1855년(철종 6년) 6월 15일 출생하여 1935년 2월 1일 별세하여 망우리에 묻혔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한의사였던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석영의 증손자를 포함, 5대가 의사인 집안이다. 장손 지홍창은 군의관 때 김종필씨와 인연을 맺어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맡기도 했다.
그는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의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천연두 예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76년(고종 13년)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한의 박영선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감》을 얻어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았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보고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가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 도즈카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해 12월 하순 두묘(천연두 예방용 백신)와 종두침(천연두 예방 접종용 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의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러 두 살 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여 성공하자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망우리 ‘사색의 길’ 일방통행을 거슬러 왼쪽으로 오르면 첫 번째 만나는 연보비가 송촌(松村) 지석영의 비이다. 봄이면 진달래꽃, 제비꽃이 흐드러져 상춘객들이 지난겨울의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곳이다.
최학송
(崔學松·1901~1932년)
최학송은 1901년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채 국내와 만주를 방랑하며 최하층 생활을 했다. 어려서 집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고 《청춘》 《학지광》 등의 문학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10세 때 간도로 간 아버지를 찾으려 1918년 두만강을 건넜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曺雲·1898~?)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녀’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했다. 두 아들 ‘백’과 ‘택’을 낳았다. 아내가 얼마나 예쁘고 좋았으면 함평, 영광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景)’이라 일컫는 남도여행기를 남겼다.
한때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직접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표현, ‘빈궁(貧窮)문학’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대표작 〈탈출기〉 〈홍염〉 〈그믐달〉 〈기아와 살육〉은 남북한, 중국 조선족자치주, 러시아 등지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의 묘역은 세월에 잊히다 정종배씨와 동국대 곽근 교수가 발견했다. 최학송의 식솔이 모두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최학송묘 관리인이 정씨다.
장형두
(張亨斗·1906~1949년)
좌익분자로 몰려 경찰의 고문에 억울하게 죽은 조선의 천재 식물분류학자다. 1906년 광주 누문동 119번지에서 출생해 12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원예학교 연구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일본부립원예학교 재학 중인 1923년 9월 15일 관동대지진으로 급거 귀국하여 전학한 이리농림학교를 거쳐 1924년 도쿄제국대학 식물학 강사로서 일본 식물 연구의 개척자인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선생에게 사사하고, 식물 공부에 정진했다.
‘일본전국식물명찾기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영재였다. 도쿄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1928년 졸업했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숭실전문학교, 서울중, 서울 사범대에서 근무했다.
1933년 거금 2만원을 들여 심혈을 바쳐 채집한 7000여 점의 표본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했고 1년 만에 그 복잡한 표본을 모두 정리했다.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에 참여하고 1934년 2월 ‘경성식물회’(훗날 ‘조선식물학연구회’로 개칭)를 창립했다. 1949년 학생용 식물도감 《학생 조선식물도보》를 발간해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식물 연구 20년 동안 조상에게 물려받은 2000석 땅을 다 정리하고 백두산, 태백산, 지리산으로 다니며 식물을 수집해 표본으로 만들었다.
국채표
(鞠埰表·1906~1967년)
세종대왕 이래 최고의 기상학자, 한국 최초 기상학 박사, 한국기상학회 초대 회장이자 제2대 중앙관상대장(현 기상청장)을 역임했다. 전남 담양군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와 교토제국대학 수학과, 미국 시카고대 기상학과, 위스콘신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교사로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글을 꾸준히 게재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과학 정보를 전달했다. 주로 계절, 절기와 관련된 자연변화나 대기 현상, 기상 현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과학대중화에 앞장섰다.
해방 후 교직에서 물러나 국립중앙관상대로 자리를 옮기며 기상학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이 기관의 대장은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스승이었던 이원철이 맡고 있었다. 국채표는 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부대장이 된 그는 1947년 고층권 기상 연구의 책임자로서 일제가 5km 상공까지밖에 못 올렸던 기상관측 기구를 23km 상공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은 최빈국인 한국이 거둔 세계적 성과이자 미래의 한국 항공기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소개했다. 미국 유학 중인 1961년 박정희가 이원철 후임으로 중앙관상대장에 임명하자 급거 귀국했다.
김사국
(金思國·1895~1926년)
박원희
(朴元熙·1898~1928년) 부부
사회주의자 김사국과 여성운동가 박원희는 부부 독립운동가였다.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은 1895년 11월 9일 충남 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도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생활고로 중퇴하고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다. 1919년 국민대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망명 중 폐결핵에 걸려 1926년 5월 8일 숨졌다.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1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과 함께 간도 용정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항일선전문 배포, 일제기관 파괴를 계획하다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7년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약했다. 정부는 2000년과 2002년 두 사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설의식
(薛義植·1900~1954년)
함남 단천에서 설태희(薛泰熙· 1875~1940년)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설태희는 구한말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나섰던 개화기 때 선각자였다. 경술국치 이전 갑산군과 영흥군 군수로 임명되어 경술국치 당시 일제가 주는 전별금을 받지 않은 두 분 중 한 분으로 대한자강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17년 서울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3·1 독립운동에 참여, 퇴학당했다. 이후 니혼대학을 졸업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예리한 필봉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29년 주일(駐日)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 창간을 총괄하였다.
편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다. 6·25전쟁 이후에는 ‘충무광(忠武光)’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충무공 연구에 공을 들였고 《난중일기》 《민족의 태양》 등을 저술했다.
신명균
(申明均·1889~1940년)
교육자, 국어학자, 조선어학회 창씨개명에 분개해 나철(羅喆·대종교 창시자) 사진을 품에 안고 순국한 독립지사이다.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동독도리(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1년 조선어강습원 1기생으로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이병기, 장지영 등과 함께 주시경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1913년 3월부터 1914년 4월까지 조선어강습원 초등과 강사로 활약했다. 또 뚝섬공립보통학교, 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교에서 교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의 창립동인이자 동인지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다. 1933년 《조선어문법》이라는 문법서를 간행한 일도 있다.
출판사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면서 소년지 《신소년》과 조선문학전집으로서 《시조전집》 《주시경집》 《가사집》 《소설집》 《백옥루》 등을 펴냈다. 당대 최고의 고전문학 자료로 평가된다.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의해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0년 11월 20일 나철의 사진을 품고 자결했다. 조선어 신문조차 없어진 일제 말기라는 상황과 국어학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일제에 항거한 그의 고결한 삶과 투쟁은 해방 뒤 지금까지 묻혔다. 2017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묘지는 무연고 처리돼 2003년 용미리공원묘지(경기 파주)로 이장됐다.
이탁
(李鐸·1898~1967년)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자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국어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몸 바쳤다. 1898년 6월 2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137번지에서 충장공 이조유의 아들로 태어나 1967년 4월 24일 생을 마감했다. 이명은 이씨종(李氏鍾)이다.
1919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조맹선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간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사관연성소 특무반장에 임명되었으며,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24년 체포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12월 가출옥하였다. 1929년부터 오산고보 교사로 한글 발음 표기 방법과 조선어 맞춤법 등을 연구 발표하였고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철자위원 및 조선어 통일 제정위원 등에 위촉되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묘비와 상석이 남아 있다.
박현식
(朴顯植·1894~1954년)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한영중·고교 설립자이자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회’ 사정위원으로 활동한 한글학자다. 1894년 12월 30일(음력) 평남 대동군 금제면 대정리, 속칭 산데마을에서 아버지 박태진과 어머니 이숙원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마을에서 2km 떨어진 4년제 광염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기독교장로회 계통에서 세운 교회 부설학교로 서구 문물과 신문학을 가르쳤다.
광염학교 시절 어린 나이였지만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한번은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학업성적 경시대회를 개최했다. 최고의 성적으로 도산 선생이 직접 시상했다고 한다.
광염학교를 졸업하고 탁지부 관리로 있던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한성외국어학교, 경성제일고보 부설 임시교원 양성소를 졸업한 뒤 1923년 일본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 고등사범부 과정을 수료했다. 1933년 한영학원을 개교(당시 서울 삼각동 89번지)했다. 단 한 번의 결근도 없었고 아들의 사망 소식에도 끝까지 수업을 마쳤을 만큼 교사로서 책임감이 남달랐다. 건국 이래 최초로 시행된 대한민국 제1회 교육공로자상(1953년)을 수상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맞을 수 있는 곳이 망우산이다. 아차산으로도 불린다.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한강이 서해로 흐른다. 한강 건너편 지금의 강동구와 송파구는 위례백제 한성 지역이었다. 고구려군은 이곳 아차산까지 내려와 진을 치고 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온달장군의 전설이 이곳에 묻혀 있다.
우리나라에 공동묘지가 처음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1910년대만 해도 경성부에 미아리·이문동·이태원·만리동·여의도·연희동 등 모두 19개소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도시가 개발되면서 없어졌다.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묘를 쓰기 시작해 1973년 만장(滿葬)으로 폐장되기까지 40년이 흘렀다. 1998년 묘지 명칭을 떼고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이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옛 묘지가 미래유산이 되는 데 80년이 걸린 셈이다.
발자크, 이브 몽탕, 카사노바 등이 잠든 프랑스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스웨덴 스톡홀름의 숲속 공원묘지 ‘스코그스키르코 가르덴(Skogskyrko Garden)’처럼 세계적 명소를 꿈꾼다.
1933년부터 서울시 공동묘지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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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배씨가 펴낸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
최근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 刊)을 펴낸 저자 정종배(鄭鍾培·63)씨의 말이다.
“일제강점기 경성부가 이곳에 경성부 부립공동묘지 분묘 단지를 조성하려 했던 이유는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이면에는 조선 왕조 건원릉의 맥을 끊고 훼손하기 위해 아차산 망우리에다 공동묘지를 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을 ‘경기도 경성부’로, 건원릉이 있는 ‘망우리면’을 ‘망우리’로 격을 낮추었다고 한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위원인 정종배씨는 1937년부터 1973년까지 등재된 모든 묘적부를 열람했다. 묘지기록이 없거나 사라진 인사들이 많아 유족과 후손을 탐문하고 세월에 잊힌 망우리 골골을 누볐다. 그렇게 20여 년간 땀을 흘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덧붙여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을 펴냈다.
벽돌 두께인 705쪽에 걸쳐 독립운동가 안창호·오세창, 정치인 장덕수·조봉암·이기붕, 의사 지석영·오긍선, 시인 한용운·김동명·김영랑·박인환·김상용, 작가 김말봉·최학송·계용묵·김이석, 아동문학가 방정환·강소천, 희곡작가 함세덕·이광래, 영화인 나운규, 작곡가 채동선·함이영, 화가 이인성·이중섭, 조각가 차근호·권진규 등 근현대사 130여 인사를 열전(列傳) 형식으로 정리했다. 《월간조선》은 망우리공원에 잠든 수많은 위인 중 저자와 협의해 10인의 삶을 요약해 소개한다.
아사카와 다쿠미
(淺川巧·1891~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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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서 2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다쿠미는 1907년 고후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한 교회에만 출석하기보다는 여러 교회, 즉 욱정교회(감리교, 현 반포동 남산감리교회), 정동예배당(장로교, 현 성북동 덕수교회) 등에 출석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 고원과 기사로 홍릉 및 광릉수목원의 기틀을 다졌다. 대한민국 인공림 37%를 차지하는 잣나무 씨앗 발아법인 ‘노천매장법’을 한국인 노동자들의 말에 힌트를 얻어 온실에서 2년 만에 발아하는 것을 노천에서 1년 만(1924년 3월)에 발아시켜 한반도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급성 폐렴으로 1931년 4월 2일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 후 이문동 사람들이 엄청난 봄비 속에서도 상여를 서로 메겠다고 하여 몇 개 조로 나눠 운반,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1942년 망우리로 이장했다. 2015년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으로 선정되었다. 망우리공원 유택 중 개인과 단체의 추모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주된 추모객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사람들이다.
지석영
(池錫永·1855~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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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법 선구자 지석영의 묘비. |
그는 개화 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의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천연두 예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76년(고종 13년)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한의 박영선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감》을 얻어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았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보고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가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 도즈카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해 12월 하순 두묘(천연두 예방용 백신)와 종두침(천연두 예방 접종용 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의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러 두 살 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여 성공하자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망우리 ‘사색의 길’ 일방통행을 거슬러 왼쪽으로 오르면 첫 번째 만나는 연보비가 송촌(松村) 지석영의 비이다. 봄이면 진달래꽃, 제비꽃이 흐드러져 상춘객들이 지난겨울의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곳이다.
최학송
(崔學松·1901~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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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궁문학 창시자 최학송의 문학비. |
10세 때 간도로 간 아버지를 찾으려 1918년 두만강을 건넜다. 이때 전남 영광 출신 시조시인 조운(曺雲·1898~?)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 인연으로 네 번째(?) 부인으로 조운의 누이 ‘분녀’와 용두동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했다. 두 아들 ‘백’과 ‘택’을 낳았다. 아내가 얼마나 예쁘고 좋았으면 함평, 영광 불갑산 연실봉을 ‘조선 8경(景)’이라 일컫는 남도여행기를 남겼다.
한때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며 짧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직접 경험한 최하층민의 생활을 구체적이고 진실하게 표현, ‘빈궁(貧窮)문학’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대표작 〈탈출기〉 〈홍염〉 〈그믐달〉 〈기아와 살육〉은 남북한, 중국 조선족자치주, 러시아 등지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의 묘역은 세월에 잊히다 정종배씨와 동국대 곽근 교수가 발견했다. 최학송의 식솔이 모두 함북 성진으로 떠난 뒤 묘지를 돌보는 이가 없었다. 최학송묘 관리인이 정씨다.
장형두
(張亨斗·1906~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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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식물학자 장형두의 묘비. |
‘일본전국식물명찾기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영재였다. 도쿄제국대학 고등조원학과를 1928년 졸업했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숭실전문학교, 서울중, 서울 사범대에서 근무했다.
1933년 거금 2만원을 들여 심혈을 바쳐 채집한 7000여 점의 표본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했고 1년 만에 그 복잡한 표본을 모두 정리했다. 1933년 5월 ‘조선박물연구회’ 설립에 참여하고 1934년 2월 ‘경성식물회’(훗날 ‘조선식물학연구회’로 개칭)를 창립했다. 1949년 학생용 식물도감 《학생 조선식물도보》를 발간해 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식물 연구 20년 동안 조상에게 물려받은 2000석 땅을 다 정리하고 백두산, 태백산, 지리산으로 다니며 식물을 수집해 표본으로 만들었다.
국채표
(鞠埰表·1906~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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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기상학 박사 국채표의 묘비. |
교사로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글을 꾸준히 게재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과학 정보를 전달했다. 주로 계절, 절기와 관련된 자연변화나 대기 현상, 기상 현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과학대중화에 앞장섰다.
해방 후 교직에서 물러나 국립중앙관상대로 자리를 옮기며 기상학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이 기관의 대장은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연희전문학교의 스승이었던 이원철이 맡고 있었다. 국채표는 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부대장이 된 그는 1947년 고층권 기상 연구의 책임자로서 일제가 5km 상공까지밖에 못 올렸던 기상관측 기구를 23km 상공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은 최빈국인 한국이 거둔 세계적 성과이자 미래의 한국 항공기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소개했다. 미국 유학 중인 1961년 박정희가 이원철 후임으로 중앙관상대장에 임명하자 급거 귀국했다.
김사국
(金思國·1895~1926년)
박원희
(朴元熙·1898~1928년)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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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국·박원희 묘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은 1895년 11월 9일 충남 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도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생활고로 중퇴하고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다. 1919년 국민대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망명 중 폐결핵에 걸려 1926년 5월 8일 숨졌다.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1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과 함께 간도 용정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항일선전문 배포, 일제기관 파괴를 계획하다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7년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약했다. 정부는 2000년과 2002년 두 사람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설의식
(薛義植·1900~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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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설의식의 묘. |
1917년 서울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3·1 독립운동에 참여, 퇴학당했다. 이후 니혼대학을 졸업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예리한 필봉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1929년 주일(駐日)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 창간을 총괄하였다.
편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 《신가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다. 6·25전쟁 이후에는 ‘충무광(忠武光)’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충무공 연구에 공을 들였고 《난중일기》 《민족의 태양》 등을 저술했다.
신명균
(申明均·1889~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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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한 독립지사 신명균의 묘비. |
출판사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면서 소년지 《신소년》과 조선문학전집으로서 《시조전집》 《주시경집》 《가사집》 《소설집》 《백옥루》 등을 펴냈다. 당대 최고의 고전문학 자료로 평가된다.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의해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0년 11월 20일 나철의 사진을 품고 자결했다. 조선어 신문조차 없어진 일제 말기라는 상황과 국어학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일제에 항거한 그의 고결한 삶과 투쟁은 해방 뒤 지금까지 묻혔다. 2017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묘지는 무연고 처리돼 2003년 용미리공원묘지(경기 파주)로 이장됐다.
이탁
(李鐸·1898~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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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자 이탁의 묘비.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
1919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조맹선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간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사관연성소 특무반장에 임명되었으며,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24년 체포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12월 가출옥하였다. 1929년부터 오산고보 교사로 한글 발음 표기 방법과 조선어 맞춤법 등을 연구 발표하였고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철자위원 및 조선어 통일 제정위원 등에 위촉되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묘비와 상석이 남아 있다.
박현식
(朴顯植·1894~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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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박현식 묘비. |
광염학교 시절 어린 나이였지만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한번은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학업성적 경시대회를 개최했다. 최고의 성적으로 도산 선생이 직접 시상했다고 한다.
광염학교를 졸업하고 탁지부 관리로 있던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한성외국어학교, 경성제일고보 부설 임시교원 양성소를 졸업한 뒤 1923년 일본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 고등사범부 과정을 수료했다. 1933년 한영학원을 개교(당시 서울 삼각동 89번지)했다. 단 한 번의 결근도 없었고 아들의 사망 소식에도 끝까지 수업을 마쳤을 만큼 교사로서 책임감이 남달랐다. 건국 이래 최초로 시행된 대한민국 제1회 교육공로자상(1953년)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