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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역사 이야기

중국 영화 〈장진호〉를 계기로 본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는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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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해병1사단, 중공군 9병단 12만 명 궤멸시켜 중공군의 중·동부전선 南下 저지
⊙ 중국, 2300억원 들여 만든 영화 〈장진호〉 열풍
⊙ “영화 〈장진호〉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당에 바치는 선물”(베이징시 공산당 선전부)
⊙ “우리는 머나먼 異域 땅까지 와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참전용사 이종연 변호사)
중국 영화 〈장진호〉 홍보 포스터.
  중국에서 영화 〈장진호(長津湖)〉 열풍이 불고 있다. 〈장진호〉는 6·25 당시 미(美) 해병1사단 및 미 육군7사단과 중공군 9병단이 벌인 혈전(血戰)인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다.
 
  중국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2300억원)와 최대 인원(1만2000명)이 투입된 이 영화는 감독들의 이름만으로도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패왕별희〉의 천카이거(陳凱歌), 〈황비홍〉 시리즈의 쉬커(徐克), 액션 영화 전문인 린차오셴(林超賢) 등 유명 감독 3명이 함께 메가폰을 잡은 것이다.
 
  〈장진호〉는 개봉 전부터 공산당과 정부, 학교 등에서 관람을 독려한 덕분인지 지난 9월 30일 개봉 후 10월 8일까지 누적 입장 수입 34억5900만 위안(약 6400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국경절(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연휴(10월 1~7일)를 맞아 극장들은 〈장진호〉를 전면에 배치, 10월 5일 중국 전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47%(4281회)가 〈장진호〉였다고 한다. 때문에 개봉한 지 엿새 만에 한국 인구와 맞먹는 5000만명이 이 영화를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왜 이 시점에서 ‘장진호 전투’를 소환한 것일까? 지난 10월 3일 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영화 〈장진호〉는 중국군의 치열한 애국정신, 당과 인민에 대한 더없는 충성을 그려냈고,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는 뜻.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고 함) 정신을 생동감 있게 보여줬다”고 한 데서 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인민일보》는 10월 5일에는 〈장진호〉 제작에 참여한 천카이거 감독의 제작기를 실었다. 천 감독은 여기서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 항미원조 전쟁 승리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대외강경노선을 대변하는 《환구시보》도 10월 7일 “영화 〈장진호〉는 중·미 경쟁 속에서 중국인의 애국심을 고조시켰다”고 했다.
 
  이 영화의 제작 의도는 영화 마지막에 “(장진호 전투는) 전쟁 최종 승리의 토대를 닦았다”며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은 더욱 새로워진다”는 자막이 등장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장진호〉 시나리오를 쓴 황젠신은 시사회에서 “이제 그 누구도 중국을 괴롭힐 수 없다는 게 이 영화의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베이징시 공산당 선전부는 “영화 〈장진호〉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당에 바치는 선물이며, 당 중앙선전부의 지도 아래 시나리오를 다듬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어용(御用)영화임을 실토한 것이다.
 
  아쉽게도 〈장진호〉 열풍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들을 보면, 이 영화 자체의 스케일이나 이 영화 제작·개봉의 의미,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 대한 중국 측 해석을 소개하고 있을 뿐, ‘장진호 전투’의 의미를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장진호 전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후방으로 공격한다!”
 
올리버 스미스 美 해병1사단장(왼쪽)과 쑹스룬 중공군 9병단 사령관.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개마고원으로 진격했던 미 해병1사단과 미 육군7사단 병력이 그달 말부터 12월 초까지 중공군 9병단 병력 12만 명과 벌인 전투를 말한다. 미 육군7사단이 무참하게 패퇴(敗退)하고, 미국 본토에서는 언론들이 “해병1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는 절망적인 뉴스를 토해내고 있는 동안, 미 해병1사단은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들의 적은 중공군뿐이 아니었다.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는 중공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에드윈 P.호이트는 미국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를 두고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후퇴작전’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그건 공격작전이었지 후퇴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전체가 공격작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북쪽으로 유담리까지 쳐올라갔고, 다음으로는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1500m 지점까지 공격해갔으며, 그러고는 남쪽으로 유담리에서 황초령까지 공격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러는 중에 후퇴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드로 윌슨 테일러)
 
  “우리는 수동에서 중공군과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그들을 무찔렀고, 나중에 답교를 건너면서도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항복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후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조지프 오웬)
 
  당시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고 명령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
 
美 해병대원들은 1/10의 열세 속에서도 勇戰을 벌여 중공군의 중·동부전선 南下를 저지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1사단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 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동상(凍傷) 환자였다. 미 해병1사단의 감투(敢鬪) 덕분에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 그리고 10여만 명의 피란민들이 철수(흥남철수)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흥남에서 철수한 피란민들만을 살린 게 아니었다. 장진호 전투는 대한민국을 살렸다. 미 해병1사단과 싸우면서 중공군 9병단은 2만5000명의 전사자와 1만2000명의 부상자를 냈다. 병단의 전투력이 사실상 소진된 것이다. 원래 9병단은 개마고원에 매복하고 있다가 미 해병1사단을 격파한 후 중·동부전선에서 밀고 내려올 계획이었다. 9병단 사령관 쑹스룬(宋時輪)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용명을 떨쳤던 군인으로 특히 기습전의 달인이었다. 마오쩌둥은 “솜씨를 발휘해보라”며 그를 개마고원으로 보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중공군 13병단에 밀려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 내주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37도선까지 밀려났다. 만일 중공군의 계획대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9병단 12만 명이 미군을 격파하고 중·동부전선에서 쳐내려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부전선에서의 패배만으로도 한반도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김씨왕조의 노예로 살고 있을 것이다.
 
  장진호 전투는 전술적 차원에서 보면 미 해병1사단이 자신들보다 월등한 병력으로 매복해 있던 중공군 9병단을 궤멸시켰다는 점에서 미 해병1사단이 승리한 전투이다. 또 전략적 차원에서 봐도 서부전선은 물론 중·동부전선에서도 유엔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한반도를 석권하려던 중공군의 대전략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미 해병1사단, 아니 유엔군이 승리한 전투이다.
 
 
  장진호의 영웅들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라는 책을 보면 장진호 전투의 처절한 실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지퍼가 얼어붙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중공군의 총검에 찔려 죽은 해병대원들이 있는가 하면, 추위를 피해 참호 속으로 들어갔다가 얼음덩이가 되어 미군에게 발견된 중공군도 여럿 있었다. 영화 〈장진호〉를 본 중국 관객 중 일부는 “의용군(중공군) 병사가 눈을 뜨고 총을 똑바로 든 채 얼어 죽은 장면은 과장이 심해 보였다”고 말했다는데, 그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5연대 의무대장 체스터 레슨덴 해군 소령의 증언에 의하면, 군의관들은 부상자들의 붕대를 갈지도 못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바로 동상에 걸려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혹독한 상황 아래서 미 육군7사단이나 그곳에 배속된 카투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했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 장병들은 달랐다. 그들은 ‘프로페셔널’이었다.
 

  윌리엄 G.윈드리치 하사는 수류탄 파편에 머리를 다치고도 후송을 거부한 채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다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위생병이 다가오자 손을 저으며 “아직 아냐”라고 말했다. 몇 분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구호소 텐트 안에 있던 부상병들은 “나가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비틀거리면서도 총을 들고 나가 싸웠다. 그들 대부분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 혹독한 전장에서 꽃핀 해병들의 전우애에 대해 역사가 린 몬트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력이 기강이나 무기의 성능보다 다른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있는데,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전투원이 자기 옆의 동료를 끝까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전쟁은 잔혹한 것이지만 사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타심만큼 멋진 것은 이 세상에 없지요. 사소한 것들이 그 순간에는 사라져버립니다.”
 
  1950년 12월 11일 고토리를 출발한 마지막 미 해병부대가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제1해병사단의 생존자들은 12월 15일 10만 명의 피란민과 함께 흥남부두를 떠났다. 50여 일간의 사투가 끝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군의관 리트빈 중위는 “우리가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젊은이가 싸울 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중공군, 피란민을 방패막이로 이용
 
  물론 모든 병사가 영웅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키가 180cm나 되는 텍사스 출신의 한 병사는 이동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드러누워 버렸다. “난 할 만큼 했어요. 더 이상 안 가요”라면서…. 동료들이 그를 끌다시피 하면서 2km를 이동했다. 구호텐트에 도착한 후 위생병이 그를 점검했다. 그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는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3시간 후에 죽었다.
 
  이 책에는 중공군들이 피란민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바람에 미군들이 애를 먹는 얘기가 여러 군데서 나온다. 피란민 대열에서 중국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중공군 병사들이 지금 항복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미군이 접근하자 갑자기 피란민들 사이에서 중공군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는 증언도 있다. 그게 “정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중공군이 벌인 짓이었다. 당시 미군들의 참전기록에는 6·25 개전 초부터 북한군도 유사한 짓을 자행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온다. 소위 노근리사건 같은 것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했는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그때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존 리’ 이종연 변호사.
  기자는 2012년에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이종연(李鍾淵) 변호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6·25 발발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변호사는 전쟁이 난 후 우연한 기회에 통역장교가 되어 미 해병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장진호 전투의 와중에 카투사 50명을 지휘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그는 존 리(John Lee)라는 이름으로 미 해병대 전사(戰史)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피융, 피융 하면서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입니다. 바로 앞에 팍, 팍, 팍 하면서 총알이 박힐 때는 정말이지 고개도 들 수 없어요. 도랑 속에서 나는 ‘하나님, 꼭 살아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게 해주세요.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군과 싸울 때에는 솔직히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랐어요.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생을 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그때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머나먼 이역(異域) 땅까지 와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종연 변호사의 이 말이야말로 영화 〈장진호〉를 통해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을 주장하는 중국식 역사 왜곡에 대한 가장 정확한 반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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